바야흐로 냄비요리와 뚝배기의 계절이 왔다. 교수님이 점심을 사신다길래 사람들과 함께 추어탕집에 갔다. 감자탕, 매운탕, 삼계탕 등 각종 탕들을 느무느무 사랑하는 나로서는 맛있게 한 그릇 비웠는데 몇몇 여성 동지들이 배신을 때리며 비빔밥을 시켰다. 추어탕집에 와서 비빔밥이라니 뭘 모르는군. 그러나 짬뽕을 시켜놓곤 짜장을 넘보듯 비빔밥의 고소한 참기름 냄새에 매혹당한 나는, 다음엔 반드시 아삭한 콩나물이 씹히는 비빔밥을 먹고야 말리라 다짐했다.

  우리방 사람들은 성격이 참 제각각이다. 뭐니뭐니해도 교수님처럼 특이한 양반이 없는데 남자 멤버라고 하나 있는 사람도 사고 패턴이 4차원이다. 한번은 두 사람을 마주앉혀놓고 밥을 먹은 적이 있는데 그야말로 적막강산. 결국 두 사람을 멀찌감치 떼어놓아야만 나머지 멤버들도 마음 편히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착안. 여자 멤버들 중 가장 어린 내가 제물로 바쳐졌다. 수줍음 많고 조용하신 교수님 옆좌석은 방석만 덩그러니 놓여져 있을 뿐. 아무도 넙죽 가서 앉으려고를 하지 않았고 모두의 만장일치로 그 자리는 나를 위한 고정석이 되다시피 했다. 그들의 공모에 의하면 가장 젊고 귀여운 선생님이 옆에 앉아야 교수님도 좋아하시지 않겠냐고 하는데 말이 좋아 그렇지, 나는 어리버리하게 있다가 낚인거다. 방석은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 순간부터 레드카펫으로 화하여 여기저기서 번쩍이는 카메라 셔터 소리가 들려오는 듯 나의 태도는 급, 돌변한다. 식사 중 나의 임무란 끊임없이 활기찬 소음을 만들어내는 일. 사람들은 대개 묵묵히 밥을 먹다가 내가 던지는 말에 다같이 웃고 그리고는 다시 침묵. 이야깃거리가 떨어지면 급기야는 교수님을 갈군다. 이젠 교수님도 적응이 되시는지 함께 좋아라 웃으신다. -_-;

  그런데 이번엔 교수님의 희한한 발언으로 다같이 파안대소하는 일이 벌어졌다. 어쩌다 사상체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태음인이니 소음인이니 그런 말이 오가다가 나를 향해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였다. 모모모 선생님은 얼굴에 내성적인 게 보여요. 그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사람들이 까르르 웃어대기 시작했고 나는 가슴이 뭉클하다며 오버 섞인 진심을 표현했다. 나는 맞다고, 잘 보신 거라고, 역시 통찰력이 대단하시다고 주장하고 나머지 멤버들은 대관절 어디가 내성적인 거냐고 딴지를 걸어댔다. 혼자 있을 땐 항상 연구하고 사색하는 자세를 잃지 않는다, 우울한 기분에 휩싸일 때도 많다고 능청을 떨었더니 사람들은 반신반의한 표정을 지었고 교수님은 진지함이 물씬 밴 표정으로 한번 더 강조하셨다. 모모모 선생님은 얼굴에 그대로 써 있습니다... 내성적이라는 것이.

  문학을 하시는 분이니 교묘한 아이러니나 패러독스 같은 장치를 구사했다고 보아야 할까. 평소 모습으로 볼 때 그건 아닌 듯 싶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이면을 읽어낼 줄 아는 통찰력이라고 이 연사 힘차게 주장하고 싶다. 교수님 표정이 너무나도 진지해서 듣고 있던 나마저 크크큭거렸지만 속으론 얼라리요? 라고 외쳤던 게 사실. 나도 알고보면 내성적이야, 내가 넘 내성적이어서, 난 왜케 내성적이지? 이런 말들은 내가 주변 사람들을 웃기고 싶을 때 썼던 말인데. 물론 INFJ이자 소음인인 나는 다소 내성적인 게 맞다. 그러나 대개 밖으로 보여지는 모습은 웃지 않는 공주를 한번 웃겨보겠다고 필사적으로 망가지는 구혼자의 모습. 어찌나 필사적인지 어색한 분위기의 획기적인 전환을 위해서는 나도 팔고, 동료도 팔고, 식구도 팔고, 교수님도 팔고. 있는 거 없는 거 다 팔아치운다. 정 없으면 길 가다 마주쳤던 납작코 퍼그까지 끌어들인다. 혹자는 이런 나를 가리켜 웃음을 위한 헝그리 정신이라고 칭송하기도 했지만, 나는 단지 모든 사람이 뚝배기 국물에 익사라도 할 것처럼 묵묵히 수저질을 하는 장면을 오래 견디지 못하는 것 뿐이다.   

 진정으로 내성적이라는 것은 이런 나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나한테는 침묵 속의 수저질처럼 표독스러운 것도 없어 보인다. 물론 십년지기 친구와는 별스런 대화 없이도 밥 한 그릇 비우고 코털 삐져나온 것 까지도 심드렁하니 지적해줄 수 있겠지만, 수줍음이 많은 탓에 분위기 리드를 못하고 하고 싶은 말을 찾다가 상대가 너무 어렵게 보여서 포기해버리는, 그렇듯 무거운 입영열차 분위기는 용납이 안 된다. 강의 시간이나 연구 과제물 작성할 때 얼마든지 진지할 수 있는데 맛있는 음식을 앞에 놓고 숙연해질 필요가 어디 있을까. 음식이 그런 우리를 보고 뭐라 하겠느냐 말이다. 전에 어떤 소개팅남과 만난 지 하루만에 급격히 마음을 튼 적이 있었는데 그와 나를 쉽사리 엮어주었던 공통주제는 웃기는 자들의 고독에 관련된 것이었다. 사람들을 실컷 웃겨주고 난 뒤 쓸쓸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미니홈피에 일기를 쓴다던 그 남자. 요즘 대한민국 어머니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고 있는 전현무 아나운서 같은 스타일의 남자였는데, 우리는 처음부터 너무 편했던 탓에 친구 이상으로 발전할 수 없었지만 그가 지녔던 삶의 애환만큼은 지금껏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어쨌든 교수님의 엉뚱한 발언과 나를 제외한 기타 등등의 고약한 멤버들의 반발 덕분에 수저질이 몇번 더 오갔고 점심식사도 무사히 마쳤다. 4차원의 사나이가 불현듯 프루프록의 연가와 자크 라깡 이야기를 꺼내서 급속냉각시켜버리긴 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나는 논문으로 운을 떼어도 농담이 되어버리고 그 사나이는 분명히 농담처럼 시작하는데도 논문이 되어버린다. 4차원의 사나이와 내성적인 나 사이엔 추어탕과 영미문학의 갭처럼 깊은 심연이 자리하고 있는지도. 그나저나 원래 생각했던 주제를 수정해야 할 순간이 오고야 말았고, 아무 생각 없이 지내던 나는 당분간 진지 모드로 돌입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내성적으루다가 연구와 사유에 몰두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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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11-29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그방에서 깐따비야님의 위치는 "신구" 혹은 "이순재" 선생같은 존재시군요..
(혼자 있을 땐 항상 연구하고 사색하는 자세를 잃지 않는다,라면서 책상 속의 발은 열심히 다이아몬드 스텝을 밟고 있을 깐따비야님을 혼자서 상상하면 무지하게 낄낄거리고 있습니다.)

깐따삐야 2007-12-14 13:27   좋아요 0 | URL
가끔 교수님과 뿡뿡이를 오버랩 시켜놓고 혼자 낄낄거릴 때도 많아요.ㅋㅋ

마늘빵 2007-11-29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_- 나도 너무나 내성적이야.

깐따삐야 2007-11-29 14:29   좋아요 0 | URL
제가 볼 때 아프락사스님은 저희 교수님이나 4차원의 사나이 과에 더 가까우실 듯? 진정으로 내성적인 건 저라구욧.-_-

치니 2007-11-29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평소, 남을 웃겨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젤 착한 사람이라고 주장합니다. ^-^

깐따삐야 2007-11-29 21:28   좋아요 0 | URL
오훙, 뜨끔. 치니님도 통찰력이 남다르시구낭.ㅋㅋ 젤 맹한 사람이나 아니었음 좋겠어요.-_-

라로 2007-11-30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추어탕 못먹어요~.-.-;;;;

라로 2007-11-30 10:39   좋아요 0 | URL
그리구 외향적이에요~.-.-;;;

라로 2007-11-30 10:39   좋아요 0 | URL
그래두 저와 놀아주시겠어요????

라로 2007-11-30 10:42   좋아요 0 | URL
근데,,,,깐따삐아님 고수신가봐요?
저두 배우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그런 저력이???전 4차원남자 과인가봐요~.
여기서 눈물 몇방울 ㅠㅠ
농담으로 운을때도 다 진지하게 받아들이니,,,
살맛이 안나욥!!ㅜ

깐따삐야 2007-11-30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abi님, 추어탕을 못 드신다니 참 안타깝지만 우리에겐 뼈다귀 감자탕도 있잖아요.^^ 그리고 웃기자고 웃기는 게 아니라 그냥 웃기대요. 과년한 처자에게 있어 고런 이미지가 썩 좋은 것만도 아니랍니당. 첨엔 모두들 제가 조신하고 참한 줄 알았다던데 말이죠. 요즘은 일일드라마 미우나고우나에 나오는 쏘냐(에바)의 말투를 흉내내며 주변 사람들을 웃겨대고 있어요. 이래두 저와 놀아주시겠어요? -_-

2007-11-30 2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30 1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30 2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30 2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