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여행을 같이 갔던 사람들이 모였다. 보쌈을 배터지게 먹고 맥주가 생각나서 라이브카페에 갔는데 술이 어찌나 약해졌는지 원래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이지만 어제는 아주 죽는 줄 알았다. 다른 테이블에 앉았던 어느 빼짝 마른 아저씨는 온몸을 쥐어짜며 찢어질 듯 노래를 불렀고 몇 잔 마시지도 않았는데 머릿속이 가물가물해지기 시작한 나는 한동안 귀를 막고 눈을 감은 채로 쉬어줘야만 했다. 물 만난 고기처럼 놀고 즐기는 것도 신체 리듬이 맞장구를 쳐줘야지, 할랑한 기분만으로는 무리였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은 모두 반가웠고 다들 출근 안 하는 나를 부러워했지만 술기운 탓인지, 나는 공연히 살짝 센치해지기까지 했다. 함께 3학년을 맡았던 선생님이 졸업앨범에 들어간 스냅사진을 확대해서 액자로 만들어 선물해 주셨는데 사진 속에서 수줍에 웃고 있는 나를 보니 오, 참 앳되구나,  하는 시건방진 생각이 들었더랬다. 요즘 거울을 볼때마다 눈밑 애교살 부근에 자글자글 잡히는 주름 때문에 마음이 좋지 않다. 작년까지만 해도 절대 이런 걱정을 하지를 않았었다. 게다가 나란 인간이 몸이 안 따라줘서 놀지를 못하다니, 넌센스지 넌센스야. 일하면서 쉬어주고 놀면서 체력보강하던 나였는데 언제부터인가 슬쩍 맛이 간 것 같다. 살이 좀 빠져서 그런가. 이제는 높은 산도 잘 오르고 아무리 걸어도 말짱하니 체력은 더 좋아진 게 분명한데 내 안의 흥이 살들과 함께 우수수 빠져나간 것 같다. 나도 이제 그 아저씨마냥 멸치꽁댕이처럼 온몸을 쥐어짜며 노래를 불러야 할지도 몰라. 보기 숭하던데. 볼 때 다르고 놀 때 다른 반전의 묘미, 가 곧 나의 매력이었다. 기필코 사수해야 한다. 살은 보내고 흥은 추스리자.

  4월은 아마 사랑이 하고싶어지는 달인가 보다. 그래서 잔인한 게야. 평생교육 시간에 한 남학우가 세미나 중간에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를 불렀다. 그것도 기타를 치고 하모니카를 불면서 아주 지대루. 웃으면 눈이 보이지 않는 귀여운 타입이었는데 목소리가 으찌나 좋던지 노래가 끝나자마자 강의실 내의 여인네들의 표정과 음성이 약 2.3배 정도 상승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결국 그 남정네는 우리과 동기 H의 가슴에 확 꽂혀버렸다. 가까이 앉아 있었기에 더 확실히 목격했다면서 목소리 좋지, 노래 잘하지, 거기다 기타까지 치네, 하모니카를 불던 입술은 또 어찌나 섹시하던지. 아주 난리였다. 밥 먹으면서 내내 그 완소남에 대해 이야기하더니 학생회관 앞에서 완소남과 마주친 그녀. 대담하게도 지나치는 그에게 다가가 먼저 인사를 건넸고 우리의 완소남은 상냥한 말투로 점심은 드셨냐고 대꾸를 해주더니만 큰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총총히 사라졌다. 너 좋아하는 거 너무 표나더라. 그녀는 경상도 억양으로 화들짝 그랬어여?? 하더니 손에 들고 있던 캔커피를 못 줬다면서 또 아쉬워한다. 캔커피를 건네면서 손이 살짝 스칠 수도 있는거고 그건 엄연히 둘 사이를 가깝게 만드는 스킨십일 수도 있다나 모라나. 스물다섯. 그녀의 하얀 블라우스 사이를 파고드는 건 따듯한 햇살, 살랑이는 봄바람, 그리고 찌릿한 연정이었다. 어쩌면 그 때가 가장 좋지 아니한가. 누군가가 막 좋아질락말락할 즈음. 누군가에게 막 다가설락말락할 무렵. 나도 주름이 더 늘기 전에 몇 번 더 들이대야 하는 건 아닐까. 이렇게는 못 늙는다. 억울해서.

  나 시집 잘 가나, 못 가나에 유독 관심이 많은 친구에게 만나는 남자만 무려 세 명이라고 구라를 쳤고, 주말에 도통 바빠서 시간이 안 난다고 허풍을 떨었고, 남자보다는 일단 자기계발에 힘써야 하지 않겠냐고 잘난척을 해가며 반쯤은 진심 섞인 이야길 했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미루고 미뤘던 레포트 쓰느라 이렇게 컴퓨터 앞에 노곤한 몸둥이를 쟁여놓고 있다는 거. 교사가 되고나서 심신에 익힌 개김의 미덕 때문에 뭐든 빨리 하는 게 없다. 학교에 있을 땐 업무를 빨리 처리하면 손해였기 때문에 날짜 임박해서 그것도 있는 엄살, 없는 엄살 다 해가며 제출해야 몸이 편했다. 빨리 하면 더 얹어주면 얹어줬지 일찍 하고 쉬라, 는 법이 없으니까. 성질 급한 걸로 따지면 챔피언급인 나도 인정할 정도의 교훈이면 어지간한거다. 아무튼 몇 년을 그래왔더니 이제는 뭐든 데드라인에 임박해서 아둥바둥이다. 대학원 공부나 과제라는 게 그렇듯 번갯불에 콩 튀겨먹듯 되는 게 아닌데 하여간 못된 건 빨리 배워가지고 이게 뭔 곤욕이람. 이토록 청아한 주말. 아리송한 단편 하나를 번역하다보니 타자를 치는 손가락에 힘이 스르르 빠진다. 누가 이렇게 아리까리하게 쓰랬니.

  제목을 4월이 가기 전에, 라고 해놓긴 했는데 4월이 가기 전에 대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갈피를 잃었다. 지금 쓰고 있는 레포트 끝내는데 의의를 두어야 할 듯. 숙취를 해결하는 데에도 의의를 두어야 할 것 같다. 왜 이렇게 진도가 안 나가나, 했더니 눈이 뻑뻑하고 머리가 띵한 게 어제 마신 술 탓이지 싶다. 그나저나 그 멸치꽁댕이같던 아저씨는 왜 계속 떠오르고 난리람. 마이크가 사람인지, 사람이 마이크인지. 하여간 보기 숭했다. 노래를 부르고 싶으면 노래방으로 가시지 왜 굳이 라이브카페에서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시는 건지. 맑고 개운한 머리로 번역을 하고 레포트를 쓰며 자기계발에 힘써야겠다고 다짐을 하며 글을 마쳐야겠다. 한 마디로 잠부터 좀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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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4-21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엔..왜 이리..소녀들이 많은지...거 참.....^^

비로그인 2007-04-22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차장님, 소녀가 나쁜 거에요? -.-...
전 보기 좋기만 한데요!!! :) 나도 구라좀 치고 싶어요 ㅋㅋ~

레와 2007-04-22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쪼록, 내일 아침은 상콤-한 모닝이길...!!

이 빼빠를 오늘 낮, 한낮에 보았더라면
당장 밖으로 나가서 봄 햇살 좀 쬐고 와요!! 라고 했을꺼라는..

모쪼록... 모쪼록... 모쪼록...^^*

깐따삐야 2007-04-23 0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네... 주름 자글자글한 소녀입니다... ㅠ.ㅠ

체셔고양2님, 보기 좋으시다니 다행이에요. 저 정도 구라는 그냥 애교죠? ㅋ

레와님, 어제도 저녁 늦게 들어왔더니 아직 피곤하네요. 대체 레포트는 언제 끝낼지 갑갑합니다~ 레와님도 쌍콤하게 한 주 시작하세요!
 

  소로우의 말이 가슴에 콕, 하니 와서 박힌다. 그냥 단순한 단순함을 지향하는 말은 아니지만 왠지 저렇게 외치고 싶어진다. 공연히 마음이 심란해질 때는 원하는 바를 입 밖으로 소리내어 말해보는 것도 좋다. 즉각적인 효과보다도 내 말을 내 귀로 들으며 음, 그런거지, 정도로 추스릴 수 있다면 다행이다.

  지도교수가 배정되었다. 고른 배정을 위해 밀려나는 수도 있단 말을 들어서 나름 구체적인 계획서를 작성, 소신 지원했는데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 교수님은 드라마를 전공하시는 분이다. 앞으로 보름 정도의 기간 동안 모의 수능 출제 위원으로 들어가신다길래 어제는 같은 강의를 듣는 수강생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교수님의 인기 비결은 신비주의인 것 같다. 계산되지 않은 네추럴 본 신비감. 특히 강의 시간에는 어떤 말을 해도 웃음 이상의 표현을 하지 않으신다. 2년차 선배들은 그 모습이 흥미로운지 간간히 넥타이가 멋지세요, 앞으로 보고싶어서 어떡해요, 날씨가 너무 좋아요, 등등 살갑게 대화를 걸어보지만 교수님은 네... 허허... 그 이상의 반응이 절대 없다. 우리는 그 싱겁고 밋밋한 반응이 재미있어서 또 다시 깔깔대고 웃어보지만 어림없다.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 아이들이 한 마디 하면 열 마디로 응대하며 수다를 떨었던 내 모습을 떠올리곤 얼굴을 붉히며 반성했다. 카리스마는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여.

  면대면으로 보는 교수님은 상냥하고 친절하셨다. 아직 젊으셔서 좀 수줍어하시는 것도 같았지만 눈빛이 무척 맑고 진지해서 속으로 살짝 설레이기까지 했다. 지도 교수 발표를 보고 오후에 연구실로 찾아갔을 때 벽의 한 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외서와 DVD들을 보고는 슬쩍 군침을 다셨다. 논문 주제에 대해 물어오셔서 일단 연구 계획서에 써냈던 테네시 윌리엄스의 작품들을 언급했고 교수님은 의외로 한 번에 좋다는 반응을 보이셨다. 관련 서적과 연구 분야의 전문가에 대해 조언하셨고 시종일관 따듯하고 여유 있는 모습을 잃지 않으셨다. 나는 함께 있는 사람의 영향을 잘 받는 편이다. 이렇듯 일정한 비등점을 지녔을 듯한 사람과 마주하고 있으면 저절로 마음이 편해진다.

  점점 여러 사람들과 안면을 트며 친해지는 가운데 아주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을 느끼고 있다. 요즘처럼 일분일초를 다투는 세태 속에서 안 치열하게 사는 사람도 있겠냐마는 내가 그 동안 너무 안이하게 살아온 탓일까. 주변 사람들의 바지런함이 어떨 땐 신기하기까지 하다. 나란 사람은 사실 멍하게 앉아서 쓸데없는 몽상에 빠지는 것도 좋아하고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해서 별에별 걱정을 다하며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기도 한다. 요즘 나한테 귀엽고 깜찍하다며 마구마구 하트를 날려주고 있는 선배 선생님이 한 분 있다. 여자라서 안타깝지만 내가 나중에 배우자를 만난다면 이런 사람을 만나야 하지 않을까, 그런 느낌이 든다. 근사하고 유창한 영어로 알차게 프리젠테이션을 하더니만 세미나 때에는 고향 특산물이라는 난생 처음 먹어보는 맛난 떡을 준비해 오고, 남은 돈으로는 식권을 사서 돌려 함께 밥을 먹으며 스터디 그룹을 추진하는 등, 묻어가는 인생 속에 무탈한 행복이 있나니... 정도로 되는 둥 마는 둥 살고 있던 내게는 신선한 케릭터였다. 게다가 재즈댄스, 웃음치료 등 석사 2년차 동안 따놓은 자격증도 한 두개가 아니었다. 시간이 많다... 숙제가 하기 싫다... 이 정도의 생각만 하고 있던 나는 못난 무뇌충 같았다.

  나는 적극적인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적극적인 누군가가 진지하게 조언을 해주고 이렇게 하라, 고 이야기 해주면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하긴 한다. 먼저 나서서 어떤 일을 추진하는 것은 못 하지만 일단 참여를 했으면 경우 빠지는 짓은 잘 안 한다. 한 마디로 묻어가되 성실히 묻어간다. 묻어줄 사람만 잘 만나면 의외의 활약을 하기도 한다. 다만 적극적인 것과 나대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하고 후자 쪽의 말은 안 듣는다. 묻어가는 주제에 기준도 참 깐깐하지만 아무튼 그렇다. 그 선배 선생님은 내가 직, 간접 경험이 많은 것 같고 공감 능력이 뛰어나다는 말을 했다. 공감 능력은 괜찮은데 대처 능력이 많이 부족하지. 예쁘고 매력적이라는 말까지 들었는데 이 분이 남자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뚱맞은 생각을 했더랬다. 역시 성숙한 인간은 어떻게든 나를 알아본다니깐. 동호회에서 처음 만나 결혼을 약속한 연하의 남자친구가 있단다. 이런 멋진 여자친구를 두었다니, 그 분은 참 행운아란 생각이 들었다.  

  함께 저녁을 먹으며 선생님은 이런 말을 했다. 원하는대로 살되 지나간 것에 대해 아쉬워하지 말라고. 더 어릴 땐 쉽지 않았는데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그렇게 된단다. 아쉬워할 시간이 없는데다 원하는대로 하기에도 젊음이 너무 짧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든단다. 만약 그러지 않았더라면... 하고 후회하곤 하지만 결국 그러지 않았더라도 비껴갈 것은 비껴가게 되어 있고 계속 갖고 갈 것은 갖고 가게 되어 있다고. 그게 인연이란다. 간절히 바라며 최선을 다하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열심히 살다보면 좋은 일도 생기고 우리처럼 반가운 인연도 만난다고. 구구절절 맞는 얘기. 나는 진정 묻어가도 좋을 사람을 만난 것 같다.

  선생님의 단순한 열정, 이 참 좋다. 소심한 몽상가인 내 옆엔 경박하지 않으면서도 활동적인 행동가가 필요하다. 나의 날카롭고 변덕스런 신경선을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현명하고 상냥하게 나를 부추겨주고 이끌어줄 그런 사람. 정말 완벽하지 않은가. 그나저나 그 비스무레한 여자친구들이나 동료들은 있는데 왜 저런 남자는 한 번도 못 봤지. 나타나길 간절히 바라고 최선을 다했어야 하나. 하지만 선생님을 보며 생각은 다른 쪽으로 흘러간다. <자명한 이치>의 마리처럼 삶이 나를 필요로 한다고, 내가 없으면 삶도 없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어졌다. 아직 계획은 없다. 테네시 윌리엄스 밖에는. 그래도 열심히 살 것이다. 계속. 쭈욱.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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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07-04-12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에너지를 가진 분들이 곁에 있다는 건, 축복인 것 같습니다.

이곳, 알라딘 서재에서 제가 만나고 있는 여러 알라디너들도 좋은 에너지를 가진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물론 깐따삐야님두요.

곁에 계신분들이 깐따삐야님께 좋은 에너지를 나눠주셨듯이,
깐따삐야님도 그분들께 좋은 에너지를 발산해 주실꺼예요. 알게 모르게..
더불어 저 또한 이곳에서 좋은 에너지를 많이 얻고 갑니다.


귀찮은 황사녀석이 목을 간질간질거려요.
차 많이 마시는 오후시간 됩시다! ^^*

Mephistopheles 2007-04-13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신기주의" 입니다...^^

깐따삐야 2007-04-13 0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와님, 맞는 말씀이에요. 레와님도 좋은 에너지를 가진 사람들 중 한 분이시죠. 요즘 레와님 사진 구경하는 즐거움이 쏠쏠해요.^^

메피스토님, 저랑 비슷하시군요! ㅋㅋ

마태우스 2007-04-13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님이 예쁘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이만하면 성숙한 거죠?^^

깐따삐야 2007-04-13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암요~ 그렇구말구요~ ㅋㅋ

비로그인 2007-04-13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님의 "신기주의" 가 맘에 듭니다.ㅋㅋ
전 "응큼주의" 할래요 :)

봄봄 2007-04-15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저도 심하게 묻어가는 거 잘 합니다..그러면서 때론 소소하게 빛을 보이기도 하죠..그 빛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면 더 없이 행복하겠죠? ㅋㅋ

깐따삐야 2007-04-16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셔고양2님, 여자라면 응큼까진 아니어도 앙큼한 매력이 있어야 하는데 전 그게 안되서 말이죠...ㅋ

봄봄님, 제가 하고싶은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아침부터 줄곧 모니터 앞에 앉아 있는 중인데 고작 한 페이지 썼다. 이런 날이 있다. 내 이야기를 쓰라면 쓰겠다. 아주 신이 나서. 하지만 남의 이야기에서 엑기스를 뽑아내는 일은 다르다. 저걸 엑기스로 하자니 이게 걸리고 이걸 엑기스로 하자니 남의 이야기라서 영 마뜩찮다. 깡통 찌그러뜨리듯 압축하자니 어딘가 미진함이 남고.

  이러다 주말이 다 가겠다.

  미친 듯 오락가락하는 날씨 속에 올지 말지 방황하는 봄이나, 이렇듯 딴짓거리 하느라 과제에 집중하지 못하는 나나 진도 참 더디다.

  그냥 숙제 안 해가고 한 대 맞지 뭐, 하던 옛날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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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런스 2007-03-29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삐야님 동병상련지정이 넘 잘 느껴져서 한마디 남겨요. 새로 공부 시작하신 것 늦었지만 축하드리고요. 날리는 꽃 잎 푸르른 초록 눈길 한번 줄 수 없는 시절도 한 때려니 생각해요. 깐따삐야 님은 넘 잘해내실 분이라고 믿고 있어요. 힘내세요.

싸이런스 2007-03-29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ome suggestions for article summary

1. About a third of the report will be a factual summary of the contents of the article, including describing the overall purpose of the study, research design used, instrumentation and procedures used, major findings of the study, and implications. In the last third of the report, you should state your critical reflections on the article. These will include answers to questions like whether the design of the study is appropriate for the stated purpose or research questions. Is sufficient information provided about the instrument and about the procedures used to collect data? etc. Also, consider if the study has added anything new to the knowledge base.

2. A typical summary begins this way [Intro]
In his article on "Language, Culture, and Schooling, "Henry Trueby examins the many problems faced by language minority children in the classroom and suggests some steps that might be taken towards helping these students achieve academically at a level comparable to mainstream American students....[the title and author are identified in the very first sentence, along with the main thrust of the article]

3. And the evaluative/critical comments may sound as follows [Conclusion]:
Although the author demonstrates a deep understanding of the ESL and LEP students' dilemma, I feel that his suggestions, taken from other scholarly works, offer little towards remedying their problems...

4. 학교 writing 숙제 할 때 도움 되는 책을 권해 드릴께요.
Swales, J. M. & Feak, C. B. (2004). Academic writing for graduate students: Essential tasks and skills. 2nd Edition. Ann Arbor: The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깐따삐야 2007-03-29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싸이런스님, 감사합니다. 주변에서는 그래도 3월이 가장 편한거야, 라고 말하니 더 죽을 맛이로구만요. ㅋㅋ 님도 힘내시고 화이팅 하세요!

싸이런스 2007-03-29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움이 될지 몰라서 적어 봤어요. 3월이 편한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렇다고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익숙해질테니까요. 화이팅

깐따삐야 2007-03-29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싸이런스님, 앗, 자세한 조언 고맙습니다. 참고할게요. 힘내서 다시 붙들어봐야겠습니다.^^

2007-03-29 2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07-03-29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초부터 줄줄줄 야근을 했더니..벌써..3월 말이군요...
2007년이다.!! 했던 때가 엊그제같은데....벌써 1사분기가 휘리릭 지나갑니다..^^

마태우스 2007-03-30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숙제는 원래 싫지요 알라딘에 글쓰는 건 재밌는데.....^^

깐따삐야 2007-03-30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ㅋㅋ 그 마음 압니다.

메피스토님, 바쁘게 지내셨네요. 저는 어째 시간이 가는 둥 마는 둥 하는 것 같아요.

마태우스님, 알라딘에 글 쓴다, 생각하고 숙제를 마무리해야겠어요. 힘들겠지만.^^
 

  엊그제 자정을 넘기자마자 부르르 진동 소리와 함께 울리던 휴대폰. 예약 문자로 보낸 생일 축하 메시지였다. 갑자기 얼굴에 화악 열이 올랐다. 예전에 예약 문자를 보낼 거라는 말을 언뜻 비쳤던 기억이 났다. 다 끝난 마당에, 그것도 생일도 아닌 날 받아야만 하는 축하 메시지라니. 참 생뚱맞고 어이없고 짜증났다. 그리고 왠지 괘씸했다. 지는 낭만이어도 나는 고통인 것을. 나처럼 예약 문자에 대해 관심도 없고 어떻게 보내는 지도 모르는 착한 사람과 사귀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친구가 사람을 소개시켜 준다고 했다. 그 친구가 영양사로 일하는 학교의 수학선생님인데 한 일 년 지켜보아온 바에 따르면 꽤 괜찮은 사람이라나. 훈남 기근 현상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던 중이라 흔쾌히 소개팅을 수락했다. 수학에 대한 무지몽매함이 긍정적 반응을 부채질하기도 했다. 친구는 주말 즈음으로 날짜를 잡는 게 어떻겠냐고 했고 둘의 만남이 현실화되어 가는 듯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박 뭐시기 선생이 천천히 이메일을 통해 서로를 알아가면 어떻겠냐고 했단다. 먼저 소개시켜 달라고 할 땐 언제고 이메일은 뭐여... 싶었지만 수학에 젬병인 나는 왠지 그 쪽의 말이 합당하고 신중하게 들렸다. 

  그런데 줄곧 깜깜무소식이더니 며칠 전 날아온 메일. 사귀던 여자친구와 6개월 전에 헤어졌는데 막상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려 하니 자신이 준비가 안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면서 자신의 아픈 마음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복잡한 심경을 간곡히 토로하고 있었다. 내가 왜 생전 알지도 못했던 남자의 이런 상투적이고 신파스런 넋두리를 읽어주셔야 하는 건지. 그럼 애초에 소개시켜 달란 말 따위를 하지 말던가. 누가 자기 하나 때문에 목매고 앉아 계신 줄 아나보다. 기분이 팍, 상하면서 또 한 번 얼굴에 화악 열이 올랐다.

  예전에 속 없고 맹했던, 지금도 곧잘 속리산 맑은물이란 소리를 듣긴 하지만, 아무튼 옛날의 나였다면 함께 가슴 아파하면서 정말 순수한 사람이구나... 감탄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순수하고 진실하니까 저런 거겠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그래도 간단하게 거절하면 될 일을 가지고 저런 식의 구구절절함까지 내비칠 필요까지 있었을까 싶다. 기분이 몹시 상해서 친구에게 아무 얘기도 안 하고 있었는데 진행 상황이 궁금했는지 말을 걸어온 친구, 이야기를 듣더니 황당해 한다. 그렇게 한참을 같이 황당해 하고 있었는데 문득 친구란 계집애가 하는 말. 근데 너가 좀 지랄맞으니까 남자는 저래도 좋지 않냐? 좋으면 너나 가져. 내가 얼마나 마음이 약하고 여려터진데. 우리가 너무 오래 떨어져 지내다 보니 네가 날 잘 모르는 것 같다고 못을 박아준 다음 다시 기분이 상해서 대화를 맺었다.

  뷁, 이란 말이 순식간에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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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3-22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한 사람일세. 왜 소개팅을 시켜달래놓고 메일로 그런 넋두리를 늘어놓는대요. 흠...... 대화상대가 필요했나. -_-

깐따삐야 2007-03-22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 점이나 보러갈까 진지하게 생각 중이에요. 제 주변에는 늘상 저런 인간들이 들끓는다는 게 문제랍니다. ㅡㅜ

레와 2007-03-22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닥토닥..
잊어버려요! 쌍그리 뭉개버려 싹! 잊어버려요!

꽃피는 봄이 왔어요~
깐따삐야님의 봄날은 더더욱 눈부신 날이 될꺼예요!! 이히힛~

깐~따~삐~야~ ♬ ( - 깐따삐야님의 위한 주문 - )

비로그인 2007-03-22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삐야님 ^^
점보러 간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닌 거 같구요,
그냥 저처럼 까칠하게 구세요 그럼 되요~ 호호홋-
넘 맘쓰지 마시구요 :)

치니 2007-03-22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 남자랑 소개팅 안하게 된걸 다행으로 아세용, 만났음 큰일날 뻔 했네요.
한마디로 X 밟을 뻔 하다가 피하신거여요 ~ ㅋㅋ

봄봄 2007-03-22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잊어버리세요! 저도 가끔 삼실서 정말 말이 통하지 않는, 정말 말도 섞기 싫은, 앞과 뒤가 콱콱 막힌 사람과 업무처리를 해야 할 때면 이렇게 생각해요. 에궁. 저사람이랑 같이 사는 사람은 어쩌겄나? 그래도 나는 저런 사람이랑 같이 안사니 얼마나 다행인가? 하면서요. 세상이 넓잖아요. 힘내세요~

깐따삐야 2007-03-22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와님, 싸그리 으깨서 죽을 만든 다음 개나 줘버리고 싶다니깐요. 고마워요... 레와님도 눈부신 봄날 되시길.^^

체셔고양2님, 까칠하게... 전 왜 새침하거나 까칠하지 못하고, 늘상 5분이면 다 나와, 일까요. 여자는 자고로 신비감이 있어야 하는데 신기함만 있으니 원~

치니님,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저 넋두리를 생방송으로 안 듣는 게 어디에요!

봄봄님, 제 말이 그 말입니다. 그나저나 세상은 넓기도 한데, 왜 저는 늘 저런 인간들만 걸리는 건지 모르겠어요. 치명적인 성격적 결함이 있는 것도 같고. 아프리카에 가서 난민을 도우면 보람이라도 있지 이건 아무것도 남는 게 없고 허구언날 자괴감만 는다니깐요.

비연 2007-03-23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뷁...맞네요...;;;

Mephistopheles 2007-03-23 0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말입니다...다 나중에 진국을 만나기 위한 시행착오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되는 걸요...^^ 혹시.....
http://www.aladdin.co.kr/blog/mypaper/1082052
이런 남자..?? 찾으시는 건가요..^^

깐따삐야 2007-03-23 0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연님, 그쵸? ㅋㅋ

메피스토님, 저는 눈이 높은 편이 아니랍니다. 눈이 낮다 못해 두더지가 땅굴 파는 것 같다, 는 말을 들은 적도 있어요. 주변에 훈남 있음 소개해 주세여어~^^

비로그인 2007-03-23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분, `나쁜남자 증후군'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러기도 힘들 것 같아요.

깐따삐야 2007-03-23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Jude님, 실제로 보진 않았지만 굉장히 답답해서 숨이 콱, 막힐 것 같은 사람일 거에요. 친구 얘기로는, 평소엔 말도 없고 얌전한데 애들은 무쟈게 과격하게 때린다고 하더라구요. 낮에는 애들 패고, 오후에는 편지 쓰고, 밤에는 혼자 울고... 무서버라.

비로그인 2007-03-23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깐따삐야 님의 댓글을 보니 웬걸, 캐시 베이츠가 열연한 미저리가 생각납니다. 가까이 하지 마세요, 뿌리치신 것이 천만다행입니다!
 

  오빠가 엄마 생신을 잊은 줄 알고 문자를 두 번이나 날렸다. 일주일 전에 보낸 문자. 오빠... 다음주 일요일이 엄마 생신인 거 알지? 그리고 어젯밤에 보낸 문자. 오빠... 내일이 엄마 생신인데 전화라도 하지. 오빠는 내가 처음 문자를 보냈을 때 바로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는 여행을 보내드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엄마가 단칼에 거절하는 건 불 보듯 뻔한 일. 그러자 오빠는 용돈을 보낸드린다고 했고 생일이 오늘인데 보낸다는 용돈은 일주일이 넘도록 깜깜 무소식이었다. 남매 지간에 치사스럽게 돈 때문에 그랬던 건 아니었다. 돈은 나도 벌고 있고, 나도 자식인데 저 멀리 달나라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구상의 어느 곳이라도 구경시켜 드릴 수 있다. 다만 그 심보가 고약했을 뿐. 엄마는 내가 주말 내내 투덜거리자 제발 좀 가만히 있으라고 타이르셨고, 그런 엄마를 대하고 있자니 어쩐지 더 화가 났다. 오빠는 바쁘니까 그렇다 쳐. 언니는 대체 뭐래. 며느리가 되어가지고. 엄마는 내가 시집 가서 내일이 시어머니 생신인데 넋놓고 띵가띵가 하고 있으면 아이구, 우리 딸... 참 이쁘다, 잘한다, 그럴거야? 엄마는 네가 고렇게 시누이 노릇을 하려고 들면 중간에서 너희 오빠만 힘들어지고, 그런 모습을 보는 엄마는 안 힘들겠냐며 나를 열심히 달래셨다. 그 마음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참을성 제로인 나는 급기야 토요일 저녁, 내딴엔 화를 누르고 또 누르며 조심스럽게 문자를 보냈다. 오빠... 내일이 엄마 생신인데 전화라도 하지... 휴대폰은 한참 동안 반응이 없었고 거의 포기한 채 잠을 자려고 하는데 오빠에게 전화가 왔다.

  오빠는 바쁜데 대체 왜 자꾸 문자를 보내냐며 버럭 화부터 냈다. 기가 막히다 못해 말문이 막힌 나는 잠깐 버벅대다가 이건 좀 너무하는 거 아니냐며 더 크게 화를 냈다. 오빠는 별 것도 아닌 걸 가지고 이렇게 반응하는 나를 이해 못하겠다고 했고 나는 어떻게 엄마 생일이 별 게 아닐 수가 있냐고, 대체 내일이 생일인데 전화는 언제 하려는 거였으며, 언니는 옆에서 뭐하고 있는 거냐고 따지기 시작했다. 오빠는 한 술 더 떠서 언제부터 그렇게 우리가 생일을 열심히 챙겼느냐고, 그거 말고도 중요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느냐고, 짜증까지 냈다. 열이 머리 꼭대기까지 뻗친 나는 느그들끼리 잘 먹고 잘 살라는 투로 쌀쌀맞게 전화를 끊었다. 밖에서 깜짝 놀라 들어오신 엄마는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채 나를 꾸중하셨다. 오빠가 한 말을 그대로 전하자 엄마는 오빠가 엄마를 믿어서 그러는 거라며 그렇게 화를 내는 애가 아닌데 요즘 무슨 일이 있나, 힘이 드는가 보다, 오히려 오빠를 염려하셨다. 문자를 보냈던 것을 후회했다. 엄마 근심걱정만 하나 더 보탰구나. 내가 벌려놓는 일이란 게 늘 이렇지 뭐.

  오빠는 나와 통화를 끝내마자마 곧 집전화로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는 오빠와 언니의 안부부터 들입다 물으시더니 나는 걱정 말고 너희들이나 잘 있어라, 딸 입장에선 그런 서운한 감정 가질 수 있다, 네가 오빠니까 이해해라, 등등... 참으로 인자한 말씀만 하셨다. 또 나만 못되먹은 여동생이자 속알머리 없는 딸년으로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나중에 엄마에게 전해듣자니 내가 문자를 보냈을 무렵, 오빠는 중요한 모임이 있어서 식사 중이었는데 똑같은 문자를 두 번이나 받으니 얘가 지금 나보고 뭘 어떻게 하라는 건가 싶어서 짜증이 났단다. 내딴엔 언니한테 보내고 싶은 걸 오빠한테 보낸 것이고, 그것도 오빠가 바쁠까봐 전화 대신 문자로 보냈던 건데 어따 대고 승질이야 승질은. 즈그들이 뭘 그렇게 잘했다고. 암만 바빠도 손가락이 부러졌냐, 전화도 못하게. 그리고 은행에서 일하면서 돈도 못 부치냐. 점심 먹고 이 한 번 쑤실 시간에 손가락 몇 번만 움직이면 바로 입금되는 걸. 나는 밤이 깊도록 계속 씩씩거렸고 엄마와 아빠는 이런 나를 향해 한숨을 쉬시며, 너나 나중에 시부모한테 잘하라고, 오빠하고 언니는 다른 식구다, 따로 떨어뜨려 놓고 생각하라고 말씀하셨다. 거기서 그만 해도 될 것을 나는 쉼 없이 재잘거렸다. 그러엄, 난 나중에 잘할거야. 언니처럼 안해. 엄마는 내가 시어머니 생신날 아침에 전화해서는 생일상은 잘 차려 드셨어용? 이 따위로 묻기나 하면 어이구, 우리 딸, 고생도 안하고 참 잘한다, 이럴거야? 엄마는 지금도 그렇고 나중에도 그렇고 너 하나 때문에 집안에 분란 일어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며 돌아누우셨고, 아빠는 조용히 바둑에 다시 집중하셨다. 분란의 불씨였던 나는 제 분을 제가 못 이겨 찔끔거리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아침을 먹고 나니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는 뭐가 그렇게 안쓰럽고, 미안하고, 사랑스러운지 생전 안 내던 목소리까지 내며 다정스럽게 통화하셨다. 설거지를 하고 있던 나는 여전히 마음이 풀려있지 않은 상태였고 언니한테 미역국은 커녕 생일케익 하나 얻어먹지 못하고서도 어디서 저런 상냥함이 용솟음치는지,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다. 통화 내용을 들어보니 언니는 감기에 걸린 모양이었다. 하여간 집안 어른 생신이나 제사 때만 되면 갑자기 몸저 눕는 것들이 있다더니 남의 집 일이 아니구만. 엄마는 요즘 딸기가 많이 나오니 딸기도 사다 먹고 아무 일 하지 말고 푹 쉬면서 몸조리 잘하라고 당부에 당부를 거듭하셨다. 엄마야말로 김치냉장고에 꽁꽁 묻어놓은 한라봉 좀 마구마구 꺼내드시고 아무 일 좀 하지 말고 푹 쉬면서 몸조리나 잘하시지. 언니는 오빠를 바꿔 주었고 엄마는 또 한바탕 염려와 애정이 고루 섞인 목소리로 당부에 당부를 거듭하셨다. 전화를 끊고 엄마는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느이 오빠가 하여간 오나가나 선생들 징징거리는 것 때문에 짜증난단다. 언니는 초등학교 선생님이다. 남들은 교사 며느리면 좋은 줄 알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네들의 오만에 가린 무능력과 게으름에 대해서. 물론 나라고 예외는 아니다. 

  오빠와 언니는 3년을 사귀다가 결혼했고 그 누구도 그들의 결혼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선남선녀란 칭송이 자자했고 나는 결혼식장에서 내내 눈물을 훔쳐댔지만 그건 슬픔 때문이 아니라 오빠가 어느새 저만큼 성장했구나, 하는 감동 때문이었다. 언니는 훤칠하면서도 다소곳한 미인이었고 모든 사람들이 초등학교 교사라는 타이틀에 점수를 듬뿍 얹어 주었다. 하지만 팔이란 게 안으로만 굽어서 그런가. 나는 두고두고 우리 오빠가 아까웠다. 나도 교사인데 내가 만났던 남자들은 죄다 오빠보다 못한 인간들이었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언니보다 무지 못났냐 하면 그것도 아니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물론 훤칠하지도 않은데다 다소곳과는 더더군다나 거리가 멀기에 보는 입장에 따라서는 네가 못난 거 맞네, 할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뭔가 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항시 조용조용하고 차분차분한 언니를 볼 때면, 저렇게 생겨먹은 여자애들 때문에 학교 다닐 때 둘이 같이 떠들어도 꼭 나만 혼나곤 했는데, 하는 억울했던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언니가 쌈빡한 선물을 챙겨줄 때나 부모님께 잘할 때면 그런 마음이 싹 가실 때도 있었지만, 설거지를 하고나서 매번 수저를 거꾸로 꼽아놓을 때는 아직 멀었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말만 이렇게 할 뿐, 오빠 내외가 한 번 집에 다녀가면 엄마와 나는 곧바로 몸살을 앓을 만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챙겨먹이고 바리바리 싸 보내느라 일심전력을 다한다. 시집살이란 건 정말 옛말이다. 요즘 시어머니나 시누이들은 며느리와 올케 때문에 보약이라도 지어먹으며 노동을 해야 할 지경이다. 공들여 아들 키워놓고 나서는 다시 며느리 수발하느라 요즘 시어머니들 참 힘들다. 그 뿐인가. 아이라도 낳아서 데려오면 시아버지는 허리 아프단 말도 못하고 반짝 일어나 목마 태워줘야지, 시어머니는 한 편에서 유기농 채소로 이유식 끓여줘야지, 그야말로 네버앤딩서비스다. 그것도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것처럼 싫은 내색 하지 말고 해야지, 싫은 내색 했다 하면 바로 며느리 눈총 아들에게 가서 박히고, 엄마 말처럼 집안에 분란 일으키지 않으려면 그저 하고 싶은 말도 참고 마음에 안 들더라도 패스, 하며 생글거려야 한다. 나도 사실 모든 걸 떠나서 오로지 오빠를 위해 입을 다물고 눈가에 잔주름을 만들며 웃곤 한다. 친자매 같은 올케, 딸 같은 며느리, 나는 냉정한 인간이라 그런지 그런 말 하는 사람들 보면 닭살만 와르르 돋는다.

  오빠에게 전화가 왔다. 확실히 오빠는 순한 남자다. 삐졌냐고 해서 아니라고 했다. 혹시 잊었을까봐 그랬고, 오빠보다 언니한테 좀 섭섭했다고 했다. 오빠는 언니 이름을 대며 00가 너 정도만 되어도 뭐가 걱정이겠냐고 괜히 나를 부추겨줬다. 어제는 언니가 옆에 있어서 더 화를 냈던 거라고. 그런 말들을 주욱 듣고 있다보니 오빠가 참 안쓰럽고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다보니 영리해졌구나. 그 마음씀에 가슴이 쓰렸다. 오늘은 가봐야 할 결혼식이 두 개고 오후에는 회사에도 들러야 한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심하게 잠겨 있었다. 아픈 데 있냐고 물으니 이가 아파서 병원엘 가야 할 것 같다고. 제발 아프지 말고 건강 잘 챙겨... 병원에도 가고... 나의 학교 생활을 묻고 나중에 식구들끼리 장어 먹으러 가자며 밝게 이야기했다. 엄마하고 호박꼬지 말린 것으로 찰떡을 해서 이모들과 나눠 먹을 거라고 했더니 내가 떡 좀 보내줄까, 한다. 나한테 화를 내놓고 미안했던 모양이다. 나는 아니라고, 오빠하고 언니나 건강하게 잘 있으라고, 언니도 감기 걸렸다던데 옆에서 잘 챙겨주라고, 갑자기 착한 말이 술술 나왔다. 오빠는 오후에 출근하자마자 돈은 부치겠다고 말했다. 에휴... 단순하기는. 서울이라는 괴물 같은 도시에서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고 있는 오빠를 내가 너무 괴롭혔구나, 반성을 했다. 엄마 생신을 앞두고 나는 최악의 선물을 한 셈. 엄마가 종종 네가 아무리 살갑게 굴어도 결정적인 순간에 엄마한테 힘이 되는 건 그래도 오빠다, 라고 말씀하시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란 인간은 본의 아니게 사랑하는 사람을 힘들게 하고, 괴롭히는 일을 너무 자주 저지르곤 한다. 사랑하지만 말고, 좀 아껴주면 안되겠니. 이제부터라도 분란의 불씨가 마음 한 귀퉁이에서 깜빡거리면 지체하지 말고 찬물을 끼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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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따삐야 2007-03-18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고맙습니다.^^ 근데 이제부터는 어설프게 시누이 노릇 하려고 들지 말고 그냥 제 나름대로 부모님께 잘하려고 노력해야겠어요. 오빠만 더 힘들어지고, 그건 원하는 바도 아니고. 저도 별로 잘하는 거 없으면서 괜히 시끄럽게만 만들고... 후회스러워요.

이게다예요 2007-03-18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빠들은 대부분 기질면으론 착하지만, 결혼하면 여자를 따르게 마련인 거 같아요.
님의 새언니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조용하고 차분면서 센스없는 사람을 매우 못마땅해하는 편이에요. 부모님 생일이나 챙겨야 할 날에 딱딱 맞춰 용돈을 보내지 못하는 건 대부분 여자들이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인 거 같아요. 대체로 돈은 여자들이 관리하니까요. 그런데서 센스와 경우와 성의가 보이는 거 같아요.
아, 여기서 왠 흥분이죠?ㅋ

Mephistopheles 2007-03-18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까지 초절정 미녀이신 깐따삐야님의 넋두리셨습니다..^^
아버지가 선생님이셨다 보니...여교사에 대해 말씀하시는 걸 자주 듣게 되었지요..
장점과 더불어 장점을 말입니다..^^

마태우스 2007-03-19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생신이라고 가르쳐주는 동생에게 대뜸 화부터 내다니, 이해가 잘 안갑니다. 그나저나 제가 깐따삐야님 사진을 안봤으면 모를까, 언니가 더 미녀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깐따삐야 2007-03-19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 다예요님, 척 보기엔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는데 순간순간 센스꽝이라서 사람 속 터지게 하는 부류가 있지요. 그렇지만 그런 사람한테 뭐라고 해도, 뭐라고 한 사람만 욕 먹는 현실이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저도 참하고 다소곳한 처자가 되고 싶어요. ㅡㅜ

메피스토님, 결국 누워서 침 뱉는 격이라도 할 수 없어요. 사람들은 교사라고 하면 자녀교육 잘 시키고, 어르신한테 깍듯하고, 그런 좋은 면들을 주로 생각하지만 저 자신을 비롯해서 주변의 현실들을 봤을 때 절대 그렇지 않다는 거. 직업을 떠나서 그저 인간 나름, 이에요.

마태우스님, 오빠가 결혼하고 나서 이상하게 성격이 급해졌어요. 답답한 언니 때문이라고 또 언니 핑계를 대야만 속이 시원해지는 못된 시누이가 저라죠. 그리고 언니는 다들 미스코리아니 탤런트니 하지만, 외모라는 건 옥동자든, 조지 클루니든 자꾸 보면 익숙해지는 거고 결국 중요한 건 그 역할을 잘 하는가, 못 하는가, 아니겠어요. 그래도... 오빠를 괴롭힌 격이 되어서 제 행동에 대해선 후회하고 있어요.

봄봄 2007-03-22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삐야님..거의 울집 풍경을 보는 것 같습니다. ㅋㅋ 저도 맨날 온 가족의 생일을 다이어리에 적고 가족들에게 미리미리 통보하곤 합니다. 어느덧 형제들의 생일 때마다 모여서 저녁먹고 촛불끄고 선물전달하고 그랬는데 언젠가 큰올케언니가 그러더라구요. 한번에 몰아서 하면 안되겠느냐고. ㅠㅠ 지금은 조카들까정 생겨서 만남이 더 잦아지긴 했죠.

그런데 저도 바쁜 큰 오라버니한테 자정을 넘어서 전화해서는 지금까지 오빠가 체크하지 못했던 부분과 앞으로 체크해야 할 집안의 대소사들에 대해 1시간씩 잔소리를 해대기도 했지만, 이제는 마음을 좀 비웠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딸과 결혼을 한 아들과 시집온 며느리와 며느리를 둔 시어머니는 그 입장부터가 다르더라구요. 그리고 가족안에서 각자의 역할이 있더라구요. 님이나 저 같은 경우는 의사소통의 창구라고라 할까? ㅋㅋ

하지만 사람이 순식간에 바뀐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그저 서로를 이해해가면서 조금씩 그 간격을 좁혀가는 것 뿐이더라구요. 큰오라버니가 내 잔소리를 다 듣고 나서 그러더라구요. 미안하다고, 앞으로 노력하겠다고, 고맙다고, 그런데 자기는 한번에 여러 가지를 신경쓰는 것(챙김)을 잘 못한다고 그러더라구요. ㅋㅋ

깐따삐야 2007-03-22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봄님, 다들 살아가는 모양새가 비슷한 모양이에요. ㅋㅋ 마지막 말씀에 공감해요. 저희 오빠도 한 번에 여러가지 챙기는 걸 잘 못하는 편인데, 남자들은 대개 그렇지 않나요? 그래서 함께 사는 여자가 잘 챙겨야 하는건데 말이죠. 근데 저도 결혼하면 나중에 나 몰라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이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