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로우의 말이 가슴에 콕, 하니 와서 박힌다. 그냥 단순한 단순함을 지향하는 말은 아니지만 왠지 저렇게 외치고 싶어진다. 공연히 마음이 심란해질 때는 원하는 바를 입 밖으로 소리내어 말해보는 것도 좋다. 즉각적인 효과보다도 내 말을 내 귀로 들으며 음, 그런거지, 정도로 추스릴 수 있다면 다행이다.

  지도교수가 배정되었다. 고른 배정을 위해 밀려나는 수도 있단 말을 들어서 나름 구체적인 계획서를 작성, 소신 지원했는데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 교수님은 드라마를 전공하시는 분이다. 앞으로 보름 정도의 기간 동안 모의 수능 출제 위원으로 들어가신다길래 어제는 같은 강의를 듣는 수강생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교수님의 인기 비결은 신비주의인 것 같다. 계산되지 않은 네추럴 본 신비감. 특히 강의 시간에는 어떤 말을 해도 웃음 이상의 표현을 하지 않으신다. 2년차 선배들은 그 모습이 흥미로운지 간간히 넥타이가 멋지세요, 앞으로 보고싶어서 어떡해요, 날씨가 너무 좋아요, 등등 살갑게 대화를 걸어보지만 교수님은 네... 허허... 그 이상의 반응이 절대 없다. 우리는 그 싱겁고 밋밋한 반응이 재미있어서 또 다시 깔깔대고 웃어보지만 어림없다.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 아이들이 한 마디 하면 열 마디로 응대하며 수다를 떨었던 내 모습을 떠올리곤 얼굴을 붉히며 반성했다. 카리스마는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여.

  면대면으로 보는 교수님은 상냥하고 친절하셨다. 아직 젊으셔서 좀 수줍어하시는 것도 같았지만 눈빛이 무척 맑고 진지해서 속으로 살짝 설레이기까지 했다. 지도 교수 발표를 보고 오후에 연구실로 찾아갔을 때 벽의 한 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외서와 DVD들을 보고는 슬쩍 군침을 다셨다. 논문 주제에 대해 물어오셔서 일단 연구 계획서에 써냈던 테네시 윌리엄스의 작품들을 언급했고 교수님은 의외로 한 번에 좋다는 반응을 보이셨다. 관련 서적과 연구 분야의 전문가에 대해 조언하셨고 시종일관 따듯하고 여유 있는 모습을 잃지 않으셨다. 나는 함께 있는 사람의 영향을 잘 받는 편이다. 이렇듯 일정한 비등점을 지녔을 듯한 사람과 마주하고 있으면 저절로 마음이 편해진다.

  점점 여러 사람들과 안면을 트며 친해지는 가운데 아주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을 느끼고 있다. 요즘처럼 일분일초를 다투는 세태 속에서 안 치열하게 사는 사람도 있겠냐마는 내가 그 동안 너무 안이하게 살아온 탓일까. 주변 사람들의 바지런함이 어떨 땐 신기하기까지 하다. 나란 사람은 사실 멍하게 앉아서 쓸데없는 몽상에 빠지는 것도 좋아하고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해서 별에별 걱정을 다하며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기도 한다. 요즘 나한테 귀엽고 깜찍하다며 마구마구 하트를 날려주고 있는 선배 선생님이 한 분 있다. 여자라서 안타깝지만 내가 나중에 배우자를 만난다면 이런 사람을 만나야 하지 않을까, 그런 느낌이 든다. 근사하고 유창한 영어로 알차게 프리젠테이션을 하더니만 세미나 때에는 고향 특산물이라는 난생 처음 먹어보는 맛난 떡을 준비해 오고, 남은 돈으로는 식권을 사서 돌려 함께 밥을 먹으며 스터디 그룹을 추진하는 등, 묻어가는 인생 속에 무탈한 행복이 있나니... 정도로 되는 둥 마는 둥 살고 있던 내게는 신선한 케릭터였다. 게다가 재즈댄스, 웃음치료 등 석사 2년차 동안 따놓은 자격증도 한 두개가 아니었다. 시간이 많다... 숙제가 하기 싫다... 이 정도의 생각만 하고 있던 나는 못난 무뇌충 같았다.

  나는 적극적인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적극적인 누군가가 진지하게 조언을 해주고 이렇게 하라, 고 이야기 해주면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하긴 한다. 먼저 나서서 어떤 일을 추진하는 것은 못 하지만 일단 참여를 했으면 경우 빠지는 짓은 잘 안 한다. 한 마디로 묻어가되 성실히 묻어간다. 묻어줄 사람만 잘 만나면 의외의 활약을 하기도 한다. 다만 적극적인 것과 나대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하고 후자 쪽의 말은 안 듣는다. 묻어가는 주제에 기준도 참 깐깐하지만 아무튼 그렇다. 그 선배 선생님은 내가 직, 간접 경험이 많은 것 같고 공감 능력이 뛰어나다는 말을 했다. 공감 능력은 괜찮은데 대처 능력이 많이 부족하지. 예쁘고 매력적이라는 말까지 들었는데 이 분이 남자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뚱맞은 생각을 했더랬다. 역시 성숙한 인간은 어떻게든 나를 알아본다니깐. 동호회에서 처음 만나 결혼을 약속한 연하의 남자친구가 있단다. 이런 멋진 여자친구를 두었다니, 그 분은 참 행운아란 생각이 들었다.  

  함께 저녁을 먹으며 선생님은 이런 말을 했다. 원하는대로 살되 지나간 것에 대해 아쉬워하지 말라고. 더 어릴 땐 쉽지 않았는데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그렇게 된단다. 아쉬워할 시간이 없는데다 원하는대로 하기에도 젊음이 너무 짧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든단다. 만약 그러지 않았더라면... 하고 후회하곤 하지만 결국 그러지 않았더라도 비껴갈 것은 비껴가게 되어 있고 계속 갖고 갈 것은 갖고 가게 되어 있다고. 그게 인연이란다. 간절히 바라며 최선을 다하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열심히 살다보면 좋은 일도 생기고 우리처럼 반가운 인연도 만난다고. 구구절절 맞는 얘기. 나는 진정 묻어가도 좋을 사람을 만난 것 같다.

  선생님의 단순한 열정, 이 참 좋다. 소심한 몽상가인 내 옆엔 경박하지 않으면서도 활동적인 행동가가 필요하다. 나의 날카롭고 변덕스런 신경선을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현명하고 상냥하게 나를 부추겨주고 이끌어줄 그런 사람. 정말 완벽하지 않은가. 그나저나 그 비스무레한 여자친구들이나 동료들은 있는데 왜 저런 남자는 한 번도 못 봤지. 나타나길 간절히 바라고 최선을 다했어야 하나. 하지만 선생님을 보며 생각은 다른 쪽으로 흘러간다. <자명한 이치>의 마리처럼 삶이 나를 필요로 한다고, 내가 없으면 삶도 없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어졌다. 아직 계획은 없다. 테네시 윌리엄스 밖에는. 그래도 열심히 살 것이다. 계속. 쭈욱.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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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07-04-12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에너지를 가진 분들이 곁에 있다는 건, 축복인 것 같습니다.

이곳, 알라딘 서재에서 제가 만나고 있는 여러 알라디너들도 좋은 에너지를 가진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물론 깐따삐야님두요.

곁에 계신분들이 깐따삐야님께 좋은 에너지를 나눠주셨듯이,
깐따삐야님도 그분들께 좋은 에너지를 발산해 주실꺼예요. 알게 모르게..
더불어 저 또한 이곳에서 좋은 에너지를 많이 얻고 갑니다.


귀찮은 황사녀석이 목을 간질간질거려요.
차 많이 마시는 오후시간 됩시다! ^^*

Mephistopheles 2007-04-13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신기주의" 입니다...^^

깐따삐야 2007-04-13 0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와님, 맞는 말씀이에요. 레와님도 좋은 에너지를 가진 사람들 중 한 분이시죠. 요즘 레와님 사진 구경하는 즐거움이 쏠쏠해요.^^

메피스토님, 저랑 비슷하시군요! ㅋㅋ

마태우스 2007-04-13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님이 예쁘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이만하면 성숙한 거죠?^^

깐따삐야 2007-04-13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암요~ 그렇구말구요~ ㅋㅋ

비로그인 2007-04-13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님의 "신기주의" 가 맘에 듭니다.ㅋㅋ
전 "응큼주의" 할래요 :)

봄봄 2007-04-15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저도 심하게 묻어가는 거 잘 합니다..그러면서 때론 소소하게 빛을 보이기도 하죠..그 빛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면 더 없이 행복하겠죠? ㅋㅋ

깐따삐야 2007-04-16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셔고양2님, 여자라면 응큼까진 아니어도 앙큼한 매력이 있어야 하는데 전 그게 안되서 말이죠...ㅋ

봄봄님, 제가 하고싶은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