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여행을 같이 갔던 사람들이 모였다. 보쌈을 배터지게 먹고 맥주가 생각나서 라이브카페에 갔는데 술이 어찌나 약해졌는지 원래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이지만 어제는 아주 죽는 줄 알았다. 다른 테이블에 앉았던 어느 빼짝 마른 아저씨는 온몸을 쥐어짜며 찢어질 듯 노래를 불렀고 몇 잔 마시지도 않았는데 머릿속이 가물가물해지기 시작한 나는 한동안 귀를 막고 눈을 감은 채로 쉬어줘야만 했다. 물 만난 고기처럼 놀고 즐기는 것도 신체 리듬이 맞장구를 쳐줘야지, 할랑한 기분만으로는 무리였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은 모두 반가웠고 다들 출근 안 하는 나를 부러워했지만 술기운 탓인지, 나는 공연히 살짝 센치해지기까지 했다. 함께 3학년을 맡았던 선생님이 졸업앨범에 들어간 스냅사진을 확대해서 액자로 만들어 선물해 주셨는데 사진 속에서 수줍에 웃고 있는 나를 보니 오, 참 앳되구나, 하는 시건방진 생각이 들었더랬다. 요즘 거울을 볼때마다 눈밑 애교살 부근에 자글자글 잡히는 주름 때문에 마음이 좋지 않다. 작년까지만 해도 절대 이런 걱정을 하지를 않았었다. 게다가 나란 인간이 몸이 안 따라줘서 놀지를 못하다니, 넌센스지 넌센스야. 일하면서 쉬어주고 놀면서 체력보강하던 나였는데 언제부터인가 슬쩍 맛이 간 것 같다. 살이 좀 빠져서 그런가. 이제는 높은 산도 잘 오르고 아무리 걸어도 말짱하니 체력은 더 좋아진 게 분명한데 내 안의 흥이 살들과 함께 우수수 빠져나간 것 같다. 나도 이제 그 아저씨마냥 멸치꽁댕이처럼 온몸을 쥐어짜며 노래를 불러야 할지도 몰라. 보기 숭하던데. 볼 때 다르고 놀 때 다른 반전의 묘미, 가 곧 나의 매력이었다. 기필코 사수해야 한다. 살은 보내고 흥은 추스리자.
4월은 아마 사랑이 하고싶어지는 달인가 보다. 그래서 잔인한 게야. 평생교육 시간에 한 남학우가 세미나 중간에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를 불렀다. 그것도 기타를 치고 하모니카를 불면서 아주 지대루. 웃으면 눈이 보이지 않는 귀여운 타입이었는데 목소리가 으찌나 좋던지 노래가 끝나자마자 강의실 내의 여인네들의 표정과 음성이 약 2.3배 정도 상승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결국 그 남정네는 우리과 동기 H의 가슴에 확 꽂혀버렸다. 가까이 앉아 있었기에 더 확실히 목격했다면서 목소리 좋지, 노래 잘하지, 거기다 기타까지 치네, 하모니카를 불던 입술은 또 어찌나 섹시하던지. 아주 난리였다. 밥 먹으면서 내내 그 완소남에 대해 이야기하더니 학생회관 앞에서 완소남과 마주친 그녀. 대담하게도 지나치는 그에게 다가가 먼저 인사를 건넸고 우리의 완소남은 상냥한 말투로 점심은 드셨냐고 대꾸를 해주더니만 큰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총총히 사라졌다. 너 좋아하는 거 너무 표나더라. 그녀는 경상도 억양으로 화들짝 그랬어여?? 하더니 손에 들고 있던 캔커피를 못 줬다면서 또 아쉬워한다. 캔커피를 건네면서 손이 살짝 스칠 수도 있는거고 그건 엄연히 둘 사이를 가깝게 만드는 스킨십일 수도 있다나 모라나. 스물다섯. 그녀의 하얀 블라우스 사이를 파고드는 건 따듯한 햇살, 살랑이는 봄바람, 그리고 찌릿한 연정이었다. 어쩌면 그 때가 가장 좋지 아니한가. 누군가가 막 좋아질락말락할 즈음. 누군가에게 막 다가설락말락할 무렵. 나도 주름이 더 늘기 전에 몇 번 더 들이대야 하는 건 아닐까. 이렇게는 못 늙는다. 억울해서.
나 시집 잘 가나, 못 가나에 유독 관심이 많은 친구에게 만나는 남자만 무려 세 명이라고 구라를 쳤고, 주말에 도통 바빠서 시간이 안 난다고 허풍을 떨었고, 남자보다는 일단 자기계발에 힘써야 하지 않겠냐고 잘난척을 해가며 반쯤은 진심 섞인 이야길 했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미루고 미뤘던 레포트 쓰느라 이렇게 컴퓨터 앞에 노곤한 몸둥이를 쟁여놓고 있다는 거. 교사가 되고나서 심신에 익힌 개김의 미덕 때문에 뭐든 빨리 하는 게 없다. 학교에 있을 땐 업무를 빨리 처리하면 손해였기 때문에 날짜 임박해서 그것도 있는 엄살, 없는 엄살 다 해가며 제출해야 몸이 편했다. 빨리 하면 더 얹어주면 얹어줬지 일찍 하고 쉬라, 는 법이 없으니까. 성질 급한 걸로 따지면 챔피언급인 나도 인정할 정도의 교훈이면 어지간한거다. 아무튼 몇 년을 그래왔더니 이제는 뭐든 데드라인에 임박해서 아둥바둥이다. 대학원 공부나 과제라는 게 그렇듯 번갯불에 콩 튀겨먹듯 되는 게 아닌데 하여간 못된 건 빨리 배워가지고 이게 뭔 곤욕이람. 이토록 청아한 주말. 아리송한 단편 하나를 번역하다보니 타자를 치는 손가락에 힘이 스르르 빠진다. 누가 이렇게 아리까리하게 쓰랬니.
제목을 4월이 가기 전에, 라고 해놓긴 했는데 4월이 가기 전에 대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갈피를 잃었다. 지금 쓰고 있는 레포트 끝내는데 의의를 두어야 할 듯. 숙취를 해결하는 데에도 의의를 두어야 할 것 같다. 왜 이렇게 진도가 안 나가나, 했더니 눈이 뻑뻑하고 머리가 띵한 게 어제 마신 술 탓이지 싶다. 그나저나 그 멸치꽁댕이같던 아저씨는 왜 계속 떠오르고 난리람. 마이크가 사람인지, 사람이 마이크인지. 하여간 보기 숭했다. 노래를 부르고 싶으면 노래방으로 가시지 왜 굳이 라이브카페에서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시는 건지. 맑고 개운한 머리로 번역을 하고 레포트를 쓰며 자기계발에 힘써야겠다고 다짐을 하며 글을 마쳐야겠다. 한 마디로 잠부터 좀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