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 우리 집 근처에서 예비 소집이 있던 차에 며칠 전 만났던 E와 동기 H를 만났다. 횡단보도 맞은편에 말쑥하게 정장을 갖춰 입은 두 남녀가 눈에 들어왔고 그들을 보자마자 난 학생 때로 돌아간 듯 손을 흔들었다. E는 우리만 이렇게 차려입고 왔다며 부끄러워하는데 넥타이를 맨 H를 보니 우리가 이제는 진짜 어른으로 나이 들어가는 건가, 하는 느낌이 스쳤다. E는 차분하고 성숙한 분위기 때문에 대학생 때부터 사모님 소리를 듣던 애라서 오히려 지금에서야 제 나이를 되찾은 느낌인데, H 같은 경우는 거의 동생처럼 생각했던 애였는데 이젠 그야말로 남자 어른이 되었구나 싶었다. “야! 너 많이 컸다! 이젠 진짜 어른 같다.” “야! 나도 이제 늙어가는 중야.” 우리는 길 한복판에서 호들갑을 떨며 반갑게 악수를 나눴고 가까운 식당으로 가서 함께 점심을 먹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E는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숱한 정보들 가운데 일본의 독특한 성문화에 대한 코멘트를 해서 우리를 웃겨줬다. 어디로 보나 참하기 그지없는 처자가 다소곳이 앉아서 그런 이야기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니 황당해지는 건 주변 사람이고 눈을 껌벅이며 쿡쿡거리는 H의 수줍고 멋쩍은 표정은 여전했다. 사람이 변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은 정말 반갑고도 재미난 일이다. 도통한 표정으로 “필리핀에서 게이는 봤는데 레즈비언을 보지 못한 건 참 아쉬운 일이야.” 라고 말하며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 E나, 입 근처를 주먹으로 가리며 웃음을 참아내는 H나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사실 H는 처음 입학했을 때 나를 유난히 피했었다. 제삼자를 통해 H가 나를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단 이야길 전해 듣고 “너 내가 싫어서 그러냐?” 라고 대놓고 물어보니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던 H. 그러나 눈빛엔 공포심이 그득하더라는. 나중에 친해지고 나서 솔직히 고백한 바에 따르면 내가 마냥 무서웠단다. 안 그래도 남학교만 다녀서 여자아이들과 쉽게 곁을 틀 수 없어 힘들었는데 나의 솔직한 말투나 직선적인 행동이 너무 두려워서 되도록 내가 없는 자리로만 피해 다녔다니 나로서는 정말 놀랍고 황당한 경우였다.

 그랬던 녀석이 어느 날부터인가 나와 급격히 친해져서는 군대 가기 전까지 정말로 자주 만나 놀았던 것 같다. 영화 마니아였던 덕분에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시계태엽 오렌지’ 같은 낯선 작품들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고 학내 동아리 등에서 보여주는 공짜 영화에 대한 정보도 녀석을 통해 입수하곤 했다. H는 뭐든지 많이도 먹고 빨리도 먹던, 둥글둥글 새끼 곰 같던 나에게 지금 딱 보기 좋다고, 넌 절대로 살 빼면 안 된다고 말해줬던 유일한 남자였기에 더욱 나의 귀여움을 받았다. 다들 핑클에 미쳐있을 때 이소라를 좋아하던 녀석이었으니 취향이 독특하다고 할 수밖에. 오늘 나를 보자마자 한 말도 그거였다. “아니 왜 이렇게 살이 빠진 거야! 그 때가 딱 좋았는데...” 물론 그 때가 딱 좋진 않았지만 오늘 그 말은 듣기에 딱 좋더라.

 H와 절친했던 J가 피 뽑은 대가로 놀이공원 자유이용권이 생겨 함께 기차 타고 놀러갔던 기억도 났다. 그때 갑자기 내가 코피가 터지는 바람에 다들 걱정하고 그랬었다. 피로 물든 소풍이라고나 할까. 당시 사진을 보면 공룡 조형물 아래에서 나와 E는 서 있고, H와 J는 그 앞에 앉아 있는 우스꽝스런 포즈를 취하고 있다. 대체 누구 제안으로 그런 만용을 저지른 건지 알 수가 없다는. 왈칵 코피를 쏟고 난 내 표정이 그 중에서 가장 밝다는 것도 좀 웃기다. 놀이기구 타러 놀러간 사람들이 놀이기구 수리하러 온 표정들을 짓고 있다니. 신나게 놀다가도 카메라 앞에만 서면 굳어지던 우리는 어딘지 다들 조금씩 어설펐던 것 같다.

 E는 내게 반명함판 사진을 한 장 주었고 사진을 보니 그제야 세월의 흐름이 느껴졌다. 아무리 신기에 가까운 뽀샵 기능이라지만 시간의 무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눈빛만큼은 어쩌지 못하더라는. 그래도 그들이 모처럼 출발의 설렘으로 가득해 보여서 흐뭇했다. 홀가분한 이 순간을 기다리며 그간 마음 졸였던 시간들을 떠올리며 피곤한 표정을 짓기도 했지만 아마 긴 준비 기간만큼 그에 상응하는 좋은 선생님이 되리라 믿는다. 여전히 신랄한 언어들로 서로 주제파악을 시켜주는 겸손한 벗들이기에 더 고마웠고 불러주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갈 것만 같았던 처음 그 마음, 즉 초심을 잃지 말자면서 결의를 다졌다.

 친구들을 만나면 그 순간만큼은 그 때 그 시간으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초등학교 친구를 만나면 나는 초등학생이 되고 이렇듯 학부 때 친구들을 만나면 대학생으로 돌아간다. 추억의 교집합 속에서 아팠거나 부끄러웠던 부분을 핀셋으로 끄집어내면서도 이제는 서로 담담하게 웃어넘길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망각의 힘이기도 하고 나이의 위력이기도 하겠지. 예전처럼 하루가 멀다 하고 붙어 다니진 않지만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건강하고 잘 되기를 빌어주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 이제는 E와 H가 첫 월급을 받는 날 얼마나 맛있는 것을 사줄 지 기대나 하고 있어야겠다. H의 도트 무늬 넥타이와 E의 쉬폰 블라우스, 옷은 낯설었지만 낯익은 모델들 덕분에 즐거운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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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08-02-06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러워요,,,저도 올해엔 옛친구들을 찾아 나설까봐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깐따삐야 2008-02-06 07:44   좋아요 0 | URL
이렇게 다시 모여 수다 떠는 시간을 기다려왔는데 기쁜 일이죠.^^
나비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올 한해도 건강하세요!

Mephistopheles 2008-02-06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큰일났군요 깐따삐야님...우리가 지구에 온 정체를 이미 H는 첫눈에 간파를 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빨리 조치를 취해야겠습니다.

깐따삐야 2008-02-06 07:48   좋아요 0 | URL
ㅋㅋ 그러게나 말여요. 처음에 저를 슬슬 피할 땐 쟤가 대체 나한테서 뭘 보고나서 저러나 싶더라니깐요. 이제는 뭐 농담도 막 하구 편해졌지만 가아끔 미심쩍긴 하다는. -_-;

웽스북스 2008-02-06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얼마전에 동기남자애들을 보고 느꼈던 것과 다소 비슷한 감정인가봐요 ^_^
그런데 그 동네는 헌혈하면 놀이동산 자유이용권을 줘요? 우와!

깐따삐야 2008-02-06 07:51   좋아요 0 | URL
그럴 거에요. 내가 키운 것도 아니면서 뿌듯한 느낌도 있고 말이죠.^^
저는 사실 지금까지 헌혈을 한 번도 안 해봤어요. 바늘이 무서워서 주사도 간신히 맞는다는. -_-
J라는 동기가 여름방학 무렵에 학교에서 헌혈을 했는데 애버랜드 자유이용권을 주더라구요. 덕분에 코피 터져가며 재밌게 놀다왔지요. ㅋㅋ
 

  첫눈에 반하는 운명이든, 고의적인 마주침이든 사랑의 시작은 말 그래도 시작에 불과하다. 댄(주드 로 분)은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앨리스(나탈리 포트먼 분)에게 첫눈에 반하지만 사랑도 결국 선택의 문제라고 말하는 앨리스가 옳았다. 영국의 앨리스가 뉴욕의 제인으로 돌아갔을 때, 지나가는 남자들마다 눈에 띄는 미모의 그녀를 돌아본다. 제인이 댄에게 처음 그랬던 것처럼 마주 오는 한 사람을 향해 매력적인 미소로 유혹의 제스처를 보냈다면 누구라도 그녀와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까?

 댄은 앨리스를 운명이라고 여겼던 것처럼 처음 만난 안나(줄리아 로버츠 분)를 향한 감정 또한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소설가가 되기 위해 어린 연인의 삶을 빌려다 쓰고 안나가 자신을 거부하자 유치하고 저열한 복수를 하는 그는 미성숙한 남자다. 댄은 사랑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연인들을 향해 자신의 잣대만을 강요한다. 진실이 먼저인가, 사랑이 먼저인가. 눈을 감아주는 것이 믿음인가, 눈을 뜨고 직시하는 것이 사랑인가. 갈팡질팡 우유부단한 그가 스스로의 행동이 연인의 입장에선 얼마나 모순이며 상처인가를 깨닫게 되었을 때 곁에 남아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반면 스트립 댄서인 앨리스는 모든 사람 앞에서 벌거벗고 춤을 추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끝까지 실명을 알려주지 않을 정도로 은밀한 구석이 있다. 앨리스의 두 얼굴을 가장 먼저 눈치 챈 사람은 래리(클라이브 오웬 분)다. 그는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속으론 아주 영악스러운’ 앨리스를 알아본다. 그녀는 사랑하고픈 사람을 알아보고, 무방비 상태로 그를 유혹하고, 충실하게 사랑하고, 자신의 자리가 없다는 걸 깨닫자 그를 떠난다. 생계를 위해 벌거벗고 춤을 추더라도 상대에 대한 사랑만큼은 변함없이 간직한다. 어린 소녀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사랑에 있어서 앨리스는 댄보다 훨씬 성숙하다. 댄의 위선을 간파하자 냉차게 돌아서는 그녀. 사랑할만한 사람을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때가 왔을 때 그 애착을 버릴 수도 있는 그녀는 멋있다.

 포토그래퍼인 안나는 사람들의 슬픈 표정에서도 아름다움을 캐취하는 직업처럼 감정으로부터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여자다. 단순하고 노골적인 래리는 그처럼 우아하고 신비로운 그녀에게 이끌리며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피부과 의사인 그는 안나에게 계속 진실을 말하라고 종용하고 있지만, 그는 어쩌면 사람의 피부 속 진실에 대해서는 무심한 남자일지 모른다. 래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남자이기 때문이다. 안나와 우연히 사랑에 빠진 건 댄의 고의적인 장난질 때문이었고 댄의 등장으로 결혼까지 파경을 맞지만 래리는 안나를 향한 사랑을 결코 멈추지 않는다. 모든 것을 다 말할 것을 요구하고 모든 것을 다 알게 되어도 안나를 계속 사랑한다. 진실을 궁금해 하면서도 막상 진실 앞에서 나약해지는 댄과는 다르다. 안나가 선택하는 사람은 결국 댄이 아니라 래리다. 

 사랑의 시작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진실이 가장 중요한가? 앨리스가 사실은 제인이었다고 해서 그녀가 댄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사랑이 가장 중요한가? 굴욕을 감수하고서라도 사랑을 지키려고 했던 안나를 차갑게 내치던 댄에게 중요했던 것은 사랑이 아니지 않는가? 사랑의 시작은 ‘시작’에 불과할 뿐. 영화는 그것을 기적이고 운명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갸우뚱한 표정으로 묻고 있다. 그 다음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황홀한 순간을 지나 조금씩 변해가는 감정과, 상대방의 거짓 또는 위선, 애착과 집착의 불안한 경계와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홀로 서서 두리번거리게 되는 것이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당신과 영영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 내가 믿어야 할 것은 당신이라는 존재인가, 당신과 나를 이어주고 있는 사랑인가. 클로저는 섬세한 연기를 펼치고 있는 배우들의 대화와 움직임, 그 사이의 틈을 이처럼 수많은 질문들로 메운다. 꼼꼼한 독서를 하듯 집중력을 요하는 영화다. Stranger로 만나 Closer로 이별하는 누구든, 사랑 앞에 이방인이며, 연인에게 타인일 수밖에 없다고 영화는 끊임없이 말하는 것 같다. 시작하는 연인에겐 다소 우울하겠지만 오래된 연인들에겐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작품이란 느낌. 사람과 사랑의 두 얼굴을 인정하고 그것을 한 차원 승화시키는 경지에까지 오르려면 연인을 놓치고 훌쩍이는 댄처럼 더 많이 아프고, 더 오래 울고, 더 많이 후회해야 하는 건지도. 그렇다고 해서 크게 변하는 것은 별로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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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04 2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04 2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04 2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05 09: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웽스북스 2008-02-04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를 보고 되미안 롸이스 아자씨를 처음 알았지요 흐흐
영화도 참 좋았었는데 또 이 이기적인 기억력 때문에 가물가물하네요
깐따삐야님 리뷰를 보니 다시 보고 싶다
(어둠의 경로로 부비적부비적 ㅋㅋ)

깐따삐야 2008-02-05 09:47   좋아요 0 | URL
원스 ost도 그랬고 아일랜드 음악엔 신비한 분위기가 있는 것 같아요. 이기적인 기억력.ㅋㅋ 영화가 딱히 줄거리를 기억할 만한 내용이 아니라서 그런지도 몰라요.^^

웽스북스 2008-02-05 13:36   좋아요 0 | URL
맞아요, 게다가 이 아저씨는 본인의 음악과 어울리게 생겨서 좋아요 ^_^

- 2008-02-05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훠! 영화랑 내용은 좋은데,왜 자꾸 포스터에 눈이 갈까?
사람들 눈알이 너무 부리부리해.

깐따삐야 2008-02-05 23:38   좋아요 0 | URL
엄훠! 서양배우들이라 더 그런가?? 그나저나 영화랑 내용이 좋다뉘. 과연...?

비로그인 2008-02-06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이크 니콜스 감독, 졸업은 참 서투르고 우스꽝스럽고 사랑스러웠는데. ^^*
이 영화는 뭐랄까,.. 굉장히 깔끔하고 세련된 것 같아요.

깐따삐야 2008-02-09 10:54   좋아요 0 | URL
'졸업'은 유명한 작품인데도 아직 못 봤어요. 보고 싶네요!
클로저는 언제 한 번 더 봐야 할 것 같아요. 아직도 정리 안 된 질문들이 많아요.^^

프레이야 2008-02-09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삐야님 설연휴 즐거이 보내셨지요? ^^
이 영화 저도 무지 좋아해요. 어쩜 이리 인물들의 심리관계망을 촘촘히 그려내셨어요.
님의 리뷰가 참 좋습니다. ^^

깐따삐야 2008-02-09 22:58   좋아요 0 | URL
아, 혜경님도 떡국 맛있게 드시고 연휴 잘 보내셨죠? ^^
사실은 리뷰를 쓰면서도 갸우뚱 했어요. 영화가 좋긴 좋은데 뭔가 미진하고 아리송하고 말이죠. 그래서 조만간 한 번 더 보려구요.
 

  한의원에서 침을 맞고 오는 길이라는 E는 첫눈에도 그다지 건강해 보이지 않았다. 오랜 수험생활의 피로와 스트레스로 얼굴엔 지친 기색이 완연했고 예전보다 턱 선도 다소 둥글어진 것이 살도 좀 오른 것 같았다. 스스로 느긋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음보다 몸이 먼저 아픈 신호를 보내고 있는 줄도 몰랐다면서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 따로 없다고 하소연했다. 건강한 것 빼면 내세울 것 없고 고기라면 환장하던 우리였는데 심신도, 입맛도 그간의 세월 탓인가. 한껏 담백해진 것 같았다. 꽤 오랜만에 방문한 피자헛의 피자 맛도 느끼하고 짭짤하던 전과 달리 많이 담백해졌더라는. 옛날의 우리였다면 大자 한판을 놓고도 아쉬워했으련만 식욕도 예전 같지 않은데다 밀린 사연을 쏟아놓느라 작은 것 한판도 다 먹지 못했다.

 이제 다른 길을 찾아봐야 하나보다, 마음을 비웠더니 그때서야 기회가 왔다면서 E는 조금 부끄러워했다. 그 동안 부모님께 너무 많이 의지했다고, 본의 아니게 주변 사람들에게도 누를 끼쳤다고도 했다. 건강을 해칠 정도로 지난했던 수험생활은 안타깝지만 E의 겸손하고 의젓해진 모습을 보니 한편으론 반가웠다. 도도하고 무뚝뚝했던 그녀는 특유의 시큰둥한 표정은 여전했지만 부모님에 대한 마음과 앞으로 만나게 될 아이들에 대한 설렘을 드러낼 때만큼은 눈빛에 따듯한 기운을 담뿍 담고 있었다. 졸업하기 전까지만 해도 난 다른 꿈이 있다, 고향을 떠나고 싶다, 부모님은 내 마음을 모른다고 말했던 그녀였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에게 주어진 혜택들을 그전까지는 잘 몰랐다며, 그 점이 얼마나 다행스럽고도 고마운 일인지 알 것 같단다. E가 아마 많이 성숙해 있을 거라는 엄마의 예측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아버지 아는 분의 배려로 필리핀에 머물렀던 경험을 이야기할 때는 무척 흥미로웠다. 천주교와 동성애가 공존하는 모순적인 나라가 바로 필리핀이라며 드디어 슬슬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E. “내가 그 동안 게이 관련 서적을 많이 찾아봤는데 말이야. 내 생각엔 단지 가능성의 차이인 것 같아. 누구나 동성을 좋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잠재해 있는데 그게 발현될 수 있는 환경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거지. 필리핀에서는 동성애가 별로 특별한 일도 아냐. 거기서 알고 지냈던 필리핀 사람 하나가 우리나라 어느 목사가 한국에는 게이가 없다고 말했다더라. 그래서 내가 그건 그 목사의 믿음일 뿐, 한국에 게이가 왜 없냐고 말했더니 그럴 줄 알았다면서 되게들 좋아하더라. 흐흐.” 겉으로만 보면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시피 한 그녀와 나를 끈끈하게 이어주는 것은 바로 이런 점이었다.

 단과대들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사범대에서 E와 나는 광대무변한 관심사를 주고받으며 쌓여가는 테트리스를 해소했던 것 같다. 한번 대화의 물고가 터지면 아침 일찍 도서관에서 만나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하도 말을 많이 해서 입이 더 커질 때까지 그야말로 네버엔딩 스토리였다. 명징한 사고력으로 객관적인 자세를 잃지 않는 E와 너무도 다정해서 매사를 주관적인 자세로 임하던 나는 참 안 닮은, 필리핀처럼 모순적인 한 쌍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너희 둘은 대체 만나면 무슨 이야길 그렇게 오래 하느냐고 묻곤 했는데 생각해보면 별로 특별한 이야길 했던 것 같지도 않다. 담배 한 대 피우지 못하는 여자들 둘이 모여 흡연을 주제로 두 시간 넘게 떠든 적도 있다면 말 다했지. 오늘도 필리핀으로 운을 뗀 대화는 곧이어 동성애 이슈로 이어지고, 기독교와 천주교에 대한 언급을 하다 보니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가 안 나올 수 없고, 이후 장정일로 일보 전진했다가는 어느 틈엔가, 남자들의 바람기에 대한 고찰로 일보 후퇴하더니 내가 조만간 그녀에게 ‘브로크백 마운틴’을 빌려주기로 약속하면서 가까스로 마무리 되었다. 오늘도 입이 조금 커진 채로 돌아오는 길, 꽤 오랜만에 보는 건데도 이런 점에선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 의아하면서도 재밌었다.

 다 먹지 못해 포장했던 피자 조각은 내가 가져왔고, 커피와 함께 먹으려고 가져갔던 반건시 곶감은 두 개가 남아 그녀에게 주었다. 피자와 곶감처럼 담백하고 말랑말랑한 저녁, 엉뚱한 면은 그대로 간직한 채 한층 의젓해진 E를 보아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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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2-03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너무 좋으셨겠어요~~ 그런 친구와 만나는 날은 입이 커져서 돌아와도
마음은 전혀 피곤하지가 않죠.. ^^
저두 오늘 곶감을 먹었어요.ㅎㅎ 전 뱃속이 말랑해요~ 후후 ^u^*

깐따삐야 2008-02-03 01:50   좋아요 0 | URL
그렇죠. 눈은 충혈되고 입은 커졌는데 마음은 반짝반짝+말랑말랑 합니다.^^
곶감을 먹어서 뱃속이 말랑~ 넘 귀여운 표현! ㅋㅋ

웽스북스 2008-02-03 0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커피와 함께 먹으려고 곶감을 챙겨가다니, 센스쟁이 센스쟁이!! 상상하니 맛이 꽤 잘어울려요 그간 E가 참 깐따삐야님 마음에 많이 걸렸을텐데, 붙어서 같이 선생님이 된다니, 다행이에요 이제 둘의 수다의 지평이 한층 더 넓어지겠네요 ㅎㅎ

깐따삐야 2008-02-04 11:40   좋아요 0 | URL
다음에 웬디양님과 상봉할 때도 곶감 챙겨갈게요.^^ 이젠 자주 보게 될 것 같아요. 이상한 책도 많이 읽고 워낙 생각하는 것도 독특한 애라서 만나면 재미있다는. 수다의 지평! 완전 공감되는 말이에요. ㅋㅋ

웽스북스 2008-02-03 02:37   좋아요 0 | URL
우와 집에 늘 곶감이 상비돼있어요?

깐따삐야 2008-02-03 02:43   좋아요 0 | URL
지금은 많이 있는데 없으면 사가기라도 할게요. 웬디양님이 좋아한다면야! ^^

Mephistopheles 2008-02-03 0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입이 커졌다는 말에 달려라 하니 홍두깨 선생의 부인인 고은애라는 캐릭터가 자꾸 생각납니다.

깐따삐야 2008-02-03 02:28   좋아요 0 | URL
입이 더더더 커져도 좋으니 홍두깨 선생님 같은 남편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전엔 잘 몰랐는데 참 착하고 좋은 남자라는. ㅋㅋ

웽스북스 2008-02-03 02:37   좋아요 0 | URL
맞아 맞아
그러니까, 이런 남자가 별 매력이 없게 느껴져서 문제에요
진짜 걱정이죠? ㅋㅋㅋ

깐따삐야 2008-02-03 02:45   좋아요 0 | URL
오늘 E와 이야기 하면서 남자는 그저 매력이고 뭐고 수수하고 가정적인 게 젤이라는 노친네 같은 소리들을 했어요. 그러면서 결혼 뭐 급해, 결론은 결국 이렇게 나버리구. ㅋㅋ
웬디양님 이상형도 아주 독해(?) 뵈던데 그르지 마요. 안 좋아. -_-

Mephistopheles 2008-02-03 02:54   좋아요 0 | URL
노친네 같은 소리라기 보단..이제 슬슬 남자 보는 눈이 정직해진게 아닐까나요? 오호호

웽스북스 2008-02-03 02:56   좋아요 0 | URL
아 나는 나이가 몇살인데 아직도 가오가 멋있어보일까 흑흑

Mephistopheles 2008-02-03 03:00   좋아요 0 | URL
그건 아마도 그 가오의 데미지를 직접 입어보지 않는 이상 여전히 그 가오가 멋져 보일지도 모른답니다.^^

웽스북스 2008-02-03 03:15   좋아요 0 | URL
ㅋㅋ 얼른 한번 어디가서 가오의 데미지를 좀 입고 와야 할까봐요 ㅋㅋ

깐따삐야 2008-02-03 12:38   좋아요 0 | URL
메피님- 백퍼센트 동감입니당.^^

웬디양님- 꼭 그럴 필요까진 없구. ㅋㅋ 간접체험만으로도 그 데미지의 심각성에 대해 느낀 바가 많아서 저는 가오 잡는 남자는 딱 질색이에요. 그리고 이상형은 이상형일 뿐이라서 현실 속에서는 또 전혀 다른 남자를 만나게 될지도 몰라요. 워낙에 예측불허한 영역이니 말예요.^^

웽스북스 2008-02-03 13:52   좋아요 0 | URL
그쵸그쵸? 하튼 문제에요 문제, 그니까 이를테면 하이킥의 최민용 같은 사람이랄까? 결혼하면 얼마나 고생이겠어요 ㅜ_ㅜ

깐따삐야 2008-02-04 11:25   좋아요 0 | URL
오홋! 최민용! 언젠가 S양이 저한테 그런 말 한 적 있어요. 언니는 서민정스러우니까 최민용샘 같은 남자를 만나야 한다구. 일리가 있단 생각이 들었고 최민용이 좋기도 했어요.^^
최민용은 가오를 잡으면서도 가오만이 전부가 아니잖아요. 말투가 좀 까칠해서 그렇지 속마음은 참 따듯하기도 하구 말이죠. 웬디양님이 최민용스러운 남자만 만난다면 내가 눈 감고 교제 승낙하지요. ㅋㅋㅋㅋ

웽스북스 2008-02-04 15:57   좋아요 0 | URL
허락은 받았구~ 이제 최민용만 찾으면 된다~ㅋㅋㅋ

프레이야 2008-02-03 0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곶감이랑 커피 콤비했는데요 ㅎㅎ
잘 어울리고 배도 부르고..
그나저나 말 안 하면 입이 다시 줄어들어요? =3=3=3

깐따삐야 2008-02-03 12:41   좋아요 0 | URL
그쵸. 커피가 은근히 우리나라 한과나 곶감이랑 잘 어울려요.^^
만약 줄어들지 않았다면 진짜 고은애씨가 됐겠죠? ㅋㅋ

순오기 2008-02-03 0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친구와의 행복한 시간...좋아 보여요!
나도 아직 비혼이라는 그 친구와 만나면 두세시간은 기본이었고, 집에 와선 또 전화로...그도 부족하면 편지로 쓸게~~~였어요. 그렇게 주고 받은 편지가 지금도 내 보물창고에 간직돼 있죠.
우리엄니 왈, "니들은 맨날 만나고 와서 전화하고 또 편지 쓰고, 도대체 무슨 할말이 그렇게도 많냐? 할말 많아서 좋겠다!" 그랬지요~~~~~~ ^^ 아~ 그 시절이 그립다!!

깐따삐야 2008-02-03 13:06   좋아요 0 | URL
부족하면 편지로 쓸게~ ㅋㅋ 순오기님과 친구분도 입 크기가 늘어나는 건 일도 아니었겠군요! ^^

웽스북스 2008-02-03 13:52   좋아요 0 | URL
그 편지속 내용이 저도 궁금해요 순오기님 ^-^

순오기 2008-02-04 01:44   좋아요 0 | URL
그 편지 중 제일 폼나는 걸로 한번 올려볼까? ㅎㅎ

깐따삐야 2008-02-04 11:26   좋아요 0 | URL
아, 기대기대! 올려주세요. 순오기님.^^

마늘빵 2008-02-03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걍 글만 읽었어두 그 수다가 얼마나 즐거웠는데 상상이 갑니다아. 이런 수다는 사랑스러워.

깐따삐야 2008-02-03 13:07   좋아요 0 | URL
삼라만상에 관심이 있는 츠자들이다 보니...^^

2008-02-05 1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05 2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올해 2월은 1월의 연장선상에 있는 듯하다. 겨울이어도 이젠 예전만큼 많은 눈이 내리지도 않고 달력을 보니 4일이 벌써 입춘이다. 눈덩이 한번 뭉쳐보지 않고 겨울이 다 갔다.

 대학 초년생 때 단짝처럼 붙어 다니던 친구 E가 드디어 교단에 서게 되었다. 덕분에 뜸했던 동기들과도 연락이 닿아 그간의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곳을 떠나 혼자 수험생활을 했던 E는 그 동안 많이 고단했을 것이다. 바로 옆 동네에 살면서도 생각처럼 자주 만나지지 않았다. 이젠 하루에도 수차례씩 희비가 엇갈리는 반인반수(?)로서의 교직 생활에 대해 서로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늘어나겠지.

 S는 바뀐 내 번호로 전화를 걸어왔고 먼저 걸려온 전화에 무척 미안했다. 가까운 데 있으니 나오라는 E의 말에 그냥 다음에 보자고 한 다음 전화를 끊고 생각해보니 S가 어머니 병환 때문에 고생하고 있단 소식을 얼마 전에 들었던 기억이 났다. 옆에 있단 말을 듣고도 미처 안부 챙기는 것까지 생각이 못 미쳤고, 진즉에 한번 찾아갔어야 하는 건데, 하는 후회가 S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뒤늦게 들었다. 이 나이를 먹고도 사람 대하는 폼이 이렇듯 서툴다는. 나는 뭐에 놀란 사람마냥 무턱대고 어머니의 안부부터 물었고 S는 고맙다고 했지만 미안함은 채 가시질 않았다. S는 워낙 머리가 좋고 낙천적인 아이였다. 그늘지거나 옹이진 부분이 없어 우리는 S의 환한 기운에 주광성을 지닌 곤충들 마냥 모여들곤 했었다. 조만간 동기 결혼식에서 만날 텐데 부디 그 유쾌하고 장난스런 웃음소리가 그대로이길.

 S는 모인 동기들끼리 내 이야길 했다면서 넌 여전히 열심히 공부하는구나, 라고 말했다. ‘여전히’란 말과 ‘열심히’란 말이 생경하게 들렸다. 학부 시절을 떠올려보면 나는 그다지 학과 공부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였다. 주로 동아리방이나 구내서점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강의 시간 중에도 머릿속으로는 잡념과 몽상에 빠져 있었다. 실용영어와 전산수업을 들으러 다니는 친구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 사과대로 건너가 교양 수업을 즐기곤 했다. 순진하고 성실했던 동기들은 전공 책이 아닌 다른 책들을 읽는 나를 똑똑하다고 오해했는지 모르겠다. 그들의 기억 속에서 한껏 미화된 내가 나의 전부가 아니듯, 다른 사람을 향한 나의 판단 역시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의 세월 동안 과거 그대로인 부분과 새롭게 변한 부분을 두루 지니고 있을 얼굴들을 조만간 만나게 된다.

 비둘기 새내기로 불리던 우리가 어느덧 스물아홉이 된 새해. E가 지루한 수험생활을 마치게 된 것이 반갑고 앞으로 묻게 될 안부의 내용도 달라지리란 생각에 마음도 편하다. E는 아마 엄마 말씀처럼 그 동안 마음 졸이며 고생했던 만큼 더 훌륭하고 겸손한 선생님이 될 것이다. 느끼한 음식을 좋아하던 아이였는데 피자를 사줘야겠다. 이제는 아이가 아니니깐 다른 것을 좋아할지도. 느끼한 뉴스만 족족 올라오는 요즘이라서 뭐를 먹어도 피자맛이 날 것 같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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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02-01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뉴스야..메이드 인 아메리카 풍 버러 냄새가 아주 진동을 한다죠...

깐따삐야 2008-02-01 21:50   좋아요 0 | URL
그러게나 말입니다. 요즘 뱃속도 안 좋은데 말이죠. -_-

Mephistopheles 2008-02-01 22:24   좋아요 0 | URL
언제쯤이나 알싸한 청양고추같은 뉴스를 볼 수 있을까요?

깐따삐야 2008-02-01 22:32   좋아요 0 | URL
매운 맛을 봐야 하는 쪽은 우리가 아니라죠. 2mb와 그 일당들이죠. -_-

웽스북스 2008-02-01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들의 기억 속에서 한껏 미화된 내가 나의 전부가 아니듯, 다른 사람을 향한 나의 판단 역시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완전 공감!

어떤 모임에서 전 비둘기 학번이에요, 전 산소학번이에요, 전 월드컵학번이에요 하는 우리들 앞에서 어떤 88학번 분께서, 야 나도 올림픽 학번이라고 사랑받았거든? 이라고 항변했던 게 생각나요. 이제 비둘기학번이라는 말을 누구도 깜찍하게 들어주지 않겠쬬? ㅜ_ㅜ

깐따삐야 2008-02-01 21:52   좋아요 0 | URL
그래서 나이 먹을수록 누군가에 대한 판단이 조심스러워져요.

올림픽 학번. ㅋㅋ 웬디양님이랑 나는 원래 깜찍하잖아요? (짱돌방어시스템 아직도 가동 중이라는. 흐흐.)

마늘빵 2008-02-01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암. 내가 간접적으로 아는 사람은 2차에서 떨어졌다능 -_-

깐따삐야 2008-02-01 22:35   좋아요 0 | URL
그랬군요. E도 2차에서 여러번 떨어지다가 이번에 붙었어요. 시험의 당락을 좌우하는 건 실력+노력+운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아요.
(근데 그냥 아는 사람이라고 하시지. 간접적으로. ㅋㅋ 정확하기도 하셔라.)

2008-02-02 09: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03 0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업에 실패한 젊은이가 고향으로 돌아와 재기의 희망과 기운을 되찾는다는 스토리만 놓고 보면 진부함 이상을 기대하기 어렵지만 이 영화의 미덕은 단 한 번의 웅장한 클라이막스 없이도 은은한 잔향을 오래 남긴다는 것이다. 하얗다 못해 푸른빛을 발하는 눈의 고장 홋카이도, 썰매 끌기 대회에 출전할 말을 돌보며 사는 성실한 사람들, 힘겨운 모래언덕을 넘으며 이 고장 사람들의 유일한 낙이자 보람이 되어주는 경주마들... 주인공 마나부(이세야 유스케 분)의 귀향은 재생을 위한 귀소본능처럼 그의 마음과 정신을 치유한다.

 자신의 이력에 누가 될까봐 가족마저 모른 채 하고 성공가도만을 달려왔던 마나부는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는 각박한 도시 생활의 상처와 피로로 지쳐있지만 마구간을 운영하는 형은 동생의 실패에 마음 아파하면서도 일부러 그를 냉정하게 대한다.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던 어머니는 돌아온 그를 알아보지 못한 채 양로원에서 늙어가고 있고, 바깥세상을 잘 모르는 마을 사람들은 썰매 대회의 우승을 위해 말을 기르는 일에만 헌신하고 있다. 아무런 변화도, 발전도 없는 홋카이도가 지겨워 떠났던 마나부이지만 부질없는 성공과 그 상실의 절망 후 귀향한 그는 고향의 다른 얼굴을 보게 된다.

 이 고장에서 이뤄지는 ‘반에이 경마’는 일반 경마와는 달리 단순한 속도전이라기보다는 끈질긴 지구력을 더 중시하는 경기다. 경주마들은 썰매에 무거운 짐을 싣고 달려야 하며 트랙 사이사이에는 모래 언덕이 있어서 앞서가던 말들도 숨을 고르며 잠시 멈추어야 한다. 힘에 부쳐 언덕을 넘지 못하는 말은 탈락하게 되고 머리가 먼저 들어오는 말이 아니라 꼬리와 썰매 끝이 완전히 통과해야만 우승이다. 처음에 앞서간다고 방심할 수 없으며 조금 뒤처지고 있다고 해서 실망하기엔 이르다. 지구력이 강한 말과, 그 말을 적절히 잘 조율할 수 있는 기수가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 것. 결국 끝까지 가봐야만 희비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도박성 경마와는 달리, 반에이 경마는 지난한 우리네 인생과 몹시 닮아 있다.

 가족도, 고향도 버리고 독불장군처럼 앞으로만 전진해왔던 마나부는 경주마의 건강을 위해 낮밤을 가리지 않고 헌신하는 사람들과, 가파른 언덕을 오르며 그 사람들의 정성에 보답하는 말과, 애정과 테크닉을 모두 갖추어야 하는 기수. 이렇듯 삼위일체로 합심하여 목표를 이뤄가는 홋카이도의 반에이 경마를 보면서 지나간 삶을 돌아보게 된다. 새로운 기운을 얻고 홋카이도를 떠나는 마나부가 그들을 향해 줄 수 있는 선물은 지붕 위의 눈덩이. 언젠가 말이 병에 걸렸을 때 친구가 지붕 위에 눈덩이를 올려놓고 절을 하던 모습을 보았던 것. 육회로 팔려나갈 퇴마로 여겨졌던 ‘운류’가 결승점을 향해 선두로 달려가는 가운데 마나부의 눈덩이는 지붕 위에서 하얗게 빛나고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은 슬픔조차 절제되어 있고 분노 또한 극한으로 치닫지 않는다. 영화는 한 순간도 단정적인 주장을 하지 않은 채 홋카이도의 정경을 훑고, 사람들의 움직임을 읽고, 말들의 경주를 지켜본다. 그 묵묵함 안에서 지붕 위의 눈덩이는 하늘을 향해 반짝이고 마나부는 서서히 절망으로부터 벗어난다. 말 그대로, 처음부터 나쁜 사람은 없다. 살벌한 경쟁사회에 내몰리다 보면 본의 아니게 가까운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범실로 한순간에 신망을 잃기도 한다. 그때 필요한 사람이 바로 가족, 그리고 어머니인 것 같다. 마나부의 형은 돌아온 마나부에게 외면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가족을 찾느냐고 다그치는데 마나부는 뭘 바라고 온 게 아니라 ‘그냥 갑자기 엄마와 형이 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과거의 그가 어떤 아들이고 어떤 동생이었든 간에 그 순간의 그 말만큼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 한 톨의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진심일 것이다.

 변함없이 지루한 홋카이도, 정신을 놓은 채로도 아들을 사랑하는 어머니, 말을 위해 모든 걸 바치는 형.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도시의 논리에 상처 입은 마나부는 지루하지만 한결같고, 무지하지만 부지런한 가족과 동료들의 품에서 재기의 힘을 얻는다. 퇴마라는 운명을 거스르며 혼신을 다해 모래 언덕을 넘어가는 운류처럼 마나부 또한 새로운 결의를 다진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이 영화를 많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명절을 앞둔 요즘, 나도 어느새 사람보다 선물세트를 더 반가워하는 속물이 되어간다는 자각에 움찔하기도 했는데 이 영화를 보면서 인생이 참 지겨울 만큼 길구나, 우리가 일순간의 안락에 심신을 내맡기면서도 쉬이 만족할 수 없는 것은 인생이 그렇듯 길기 때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그 뿐인가. 탄탄대로를 달리다가도 모래 언덕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고, 처음 출발선과는 달리 점점 더 지쳐가는 체력에,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트랙은 인생을 더욱 고단하게 한다. 그래도 참 다행인 것은 그 멀미나도록 오랜 경주가 재빨리 치고 나가는 속도전이 아니라 기나긴 지구력 다툼이라는 것. 

 앞서간다고 자만하지 마라. 모래 언덕 보일라. 뒤쳐진다고 절망하지 마라. 결승점은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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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8-02-01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속 인물들은 슬픔조차 절제되어 있고 분노 또한 극한으로 치닫지 않는다
-> 이 맛에 일본 영화 보는거 같아요.
그나저나 염장질 하고 싶어졌어요, 저 조만간 홋카이도로 보드 타러 갑니당 ~ 히힛.

깐따삐야 2008-02-01 12:10   좋아요 0 | URL
오호! 좋으시겠다. 저도 일본에 다시 가고 싶어요. 노천탕에 몸을 푸욱 담그고 있던 기억이 모락모락~ ^^ 씽씽~ 재밌게 놀다 오세요!

2008-02-01 15: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01 2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03 0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03 0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08-02-02 0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태그의 의미심장함~~~~~ 동감하면 인생을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거겠죠? ^^

깐따삐야 2008-02-03 01:41   좋아요 0 | URL
태그처럼만 살면 좋겠어요. 동감하신다니 역시 순오기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