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에 실패한 젊은이가 고향으로 돌아와 재기의 희망과 기운을 되찾는다는 스토리만 놓고 보면 진부함 이상을 기대하기 어렵지만 이 영화의 미덕은 단 한 번의 웅장한 클라이막스 없이도 은은한 잔향을 오래 남긴다는 것이다. 하얗다 못해 푸른빛을 발하는 눈의 고장 홋카이도, 썰매 끌기 대회에 출전할 말을 돌보며 사는 성실한 사람들, 힘겨운 모래언덕을 넘으며 이 고장 사람들의 유일한 낙이자 보람이 되어주는 경주마들... 주인공 마나부(이세야 유스케 분)의 귀향은 재생을 위한 귀소본능처럼 그의 마음과 정신을 치유한다.

 자신의 이력에 누가 될까봐 가족마저 모른 채 하고 성공가도만을 달려왔던 마나부는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는 각박한 도시 생활의 상처와 피로로 지쳐있지만 마구간을 운영하는 형은 동생의 실패에 마음 아파하면서도 일부러 그를 냉정하게 대한다.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던 어머니는 돌아온 그를 알아보지 못한 채 양로원에서 늙어가고 있고, 바깥세상을 잘 모르는 마을 사람들은 썰매 대회의 우승을 위해 말을 기르는 일에만 헌신하고 있다. 아무런 변화도, 발전도 없는 홋카이도가 지겨워 떠났던 마나부이지만 부질없는 성공과 그 상실의 절망 후 귀향한 그는 고향의 다른 얼굴을 보게 된다.

 이 고장에서 이뤄지는 ‘반에이 경마’는 일반 경마와는 달리 단순한 속도전이라기보다는 끈질긴 지구력을 더 중시하는 경기다. 경주마들은 썰매에 무거운 짐을 싣고 달려야 하며 트랙 사이사이에는 모래 언덕이 있어서 앞서가던 말들도 숨을 고르며 잠시 멈추어야 한다. 힘에 부쳐 언덕을 넘지 못하는 말은 탈락하게 되고 머리가 먼저 들어오는 말이 아니라 꼬리와 썰매 끝이 완전히 통과해야만 우승이다. 처음에 앞서간다고 방심할 수 없으며 조금 뒤처지고 있다고 해서 실망하기엔 이르다. 지구력이 강한 말과, 그 말을 적절히 잘 조율할 수 있는 기수가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 것. 결국 끝까지 가봐야만 희비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도박성 경마와는 달리, 반에이 경마는 지난한 우리네 인생과 몹시 닮아 있다.

 가족도, 고향도 버리고 독불장군처럼 앞으로만 전진해왔던 마나부는 경주마의 건강을 위해 낮밤을 가리지 않고 헌신하는 사람들과, 가파른 언덕을 오르며 그 사람들의 정성에 보답하는 말과, 애정과 테크닉을 모두 갖추어야 하는 기수. 이렇듯 삼위일체로 합심하여 목표를 이뤄가는 홋카이도의 반에이 경마를 보면서 지나간 삶을 돌아보게 된다. 새로운 기운을 얻고 홋카이도를 떠나는 마나부가 그들을 향해 줄 수 있는 선물은 지붕 위의 눈덩이. 언젠가 말이 병에 걸렸을 때 친구가 지붕 위에 눈덩이를 올려놓고 절을 하던 모습을 보았던 것. 육회로 팔려나갈 퇴마로 여겨졌던 ‘운류’가 결승점을 향해 선두로 달려가는 가운데 마나부의 눈덩이는 지붕 위에서 하얗게 빛나고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은 슬픔조차 절제되어 있고 분노 또한 극한으로 치닫지 않는다. 영화는 한 순간도 단정적인 주장을 하지 않은 채 홋카이도의 정경을 훑고, 사람들의 움직임을 읽고, 말들의 경주를 지켜본다. 그 묵묵함 안에서 지붕 위의 눈덩이는 하늘을 향해 반짝이고 마나부는 서서히 절망으로부터 벗어난다. 말 그대로, 처음부터 나쁜 사람은 없다. 살벌한 경쟁사회에 내몰리다 보면 본의 아니게 가까운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범실로 한순간에 신망을 잃기도 한다. 그때 필요한 사람이 바로 가족, 그리고 어머니인 것 같다. 마나부의 형은 돌아온 마나부에게 외면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가족을 찾느냐고 다그치는데 마나부는 뭘 바라고 온 게 아니라 ‘그냥 갑자기 엄마와 형이 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과거의 그가 어떤 아들이고 어떤 동생이었든 간에 그 순간의 그 말만큼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 한 톨의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진심일 것이다.

 변함없이 지루한 홋카이도, 정신을 놓은 채로도 아들을 사랑하는 어머니, 말을 위해 모든 걸 바치는 형.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도시의 논리에 상처 입은 마나부는 지루하지만 한결같고, 무지하지만 부지런한 가족과 동료들의 품에서 재기의 힘을 얻는다. 퇴마라는 운명을 거스르며 혼신을 다해 모래 언덕을 넘어가는 운류처럼 마나부 또한 새로운 결의를 다진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이 영화를 많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명절을 앞둔 요즘, 나도 어느새 사람보다 선물세트를 더 반가워하는 속물이 되어간다는 자각에 움찔하기도 했는데 이 영화를 보면서 인생이 참 지겨울 만큼 길구나, 우리가 일순간의 안락에 심신을 내맡기면서도 쉬이 만족할 수 없는 것은 인생이 그렇듯 길기 때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그 뿐인가. 탄탄대로를 달리다가도 모래 언덕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고, 처음 출발선과는 달리 점점 더 지쳐가는 체력에,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트랙은 인생을 더욱 고단하게 한다. 그래도 참 다행인 것은 그 멀미나도록 오랜 경주가 재빨리 치고 나가는 속도전이 아니라 기나긴 지구력 다툼이라는 것. 

 앞서간다고 자만하지 마라. 모래 언덕 보일라. 뒤쳐진다고 절망하지 마라. 결승점은 멀었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치니 2008-02-01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속 인물들은 슬픔조차 절제되어 있고 분노 또한 극한으로 치닫지 않는다
-> 이 맛에 일본 영화 보는거 같아요.
그나저나 염장질 하고 싶어졌어요, 저 조만간 홋카이도로 보드 타러 갑니당 ~ 히힛.

깐따삐야 2008-02-01 12:10   좋아요 0 | URL
오호! 좋으시겠다. 저도 일본에 다시 가고 싶어요. 노천탕에 몸을 푸욱 담그고 있던 기억이 모락모락~ ^^ 씽씽~ 재밌게 놀다 오세요!

2008-02-01 15: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01 2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03 0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03 0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08-02-02 0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태그의 의미심장함~~~~~ 동감하면 인생을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거겠죠? ^^

깐따삐야 2008-02-03 01:41   좋아요 0 | URL
태그처럼만 살면 좋겠어요. 동감하신다니 역시 순오기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