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 우리 집 근처에서 예비 소집이 있던 차에 며칠 전 만났던 E와 동기 H를 만났다. 횡단보도 맞은편에 말쑥하게 정장을 갖춰 입은 두 남녀가 눈에 들어왔고 그들을 보자마자 난 학생 때로 돌아간 듯 손을 흔들었다. E는 우리만 이렇게 차려입고 왔다며 부끄러워하는데 넥타이를 맨 H를 보니 우리가 이제는 진짜 어른으로 나이 들어가는 건가, 하는 느낌이 스쳤다. E는 차분하고 성숙한 분위기 때문에 대학생 때부터 사모님 소리를 듣던 애라서 오히려 지금에서야 제 나이를 되찾은 느낌인데, H 같은 경우는 거의 동생처럼 생각했던 애였는데 이젠 그야말로 남자 어른이 되었구나 싶었다. “야! 너 많이 컸다! 이젠 진짜 어른 같다.” “야! 나도 이제 늙어가는 중야.” 우리는 길 한복판에서 호들갑을 떨며 반갑게 악수를 나눴고 가까운 식당으로 가서 함께 점심을 먹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E는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숱한 정보들 가운데 일본의 독특한 성문화에 대한 코멘트를 해서 우리를 웃겨줬다. 어디로 보나 참하기 그지없는 처자가 다소곳이 앉아서 그런 이야기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니 황당해지는 건 주변 사람이고 눈을 껌벅이며 쿡쿡거리는 H의 수줍고 멋쩍은 표정은 여전했다. 사람이 변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은 정말 반갑고도 재미난 일이다. 도통한 표정으로 “필리핀에서 게이는 봤는데 레즈비언을 보지 못한 건 참 아쉬운 일이야.” 라고 말하며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 E나, 입 근처를 주먹으로 가리며 웃음을 참아내는 H나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사실 H는 처음 입학했을 때 나를 유난히 피했었다. 제삼자를 통해 H가 나를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단 이야길 전해 듣고 “너 내가 싫어서 그러냐?” 라고 대놓고 물어보니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던 H. 그러나 눈빛엔 공포심이 그득하더라는. 나중에 친해지고 나서 솔직히 고백한 바에 따르면 내가 마냥 무서웠단다. 안 그래도 남학교만 다녀서 여자아이들과 쉽게 곁을 틀 수 없어 힘들었는데 나의 솔직한 말투나 직선적인 행동이 너무 두려워서 되도록 내가 없는 자리로만 피해 다녔다니 나로서는 정말 놀랍고 황당한 경우였다.
그랬던 녀석이 어느 날부터인가 나와 급격히 친해져서는 군대 가기 전까지 정말로 자주 만나 놀았던 것 같다. 영화 마니아였던 덕분에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시계태엽 오렌지’ 같은 낯선 작품들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고 학내 동아리 등에서 보여주는 공짜 영화에 대한 정보도 녀석을 통해 입수하곤 했다. H는 뭐든지 많이도 먹고 빨리도 먹던, 둥글둥글 새끼 곰 같던 나에게 지금 딱 보기 좋다고, 넌 절대로 살 빼면 안 된다고 말해줬던 유일한 남자였기에 더욱 나의 귀여움을 받았다. 다들 핑클에 미쳐있을 때 이소라를 좋아하던 녀석이었으니 취향이 독특하다고 할 수밖에. 오늘 나를 보자마자 한 말도 그거였다. “아니 왜 이렇게 살이 빠진 거야! 그 때가 딱 좋았는데...” 물론 그 때가 딱 좋진 않았지만 오늘 그 말은 듣기에 딱 좋더라.
H와 절친했던 J가 피 뽑은 대가로 놀이공원 자유이용권이 생겨 함께 기차 타고 놀러갔던 기억도 났다. 그때 갑자기 내가 코피가 터지는 바람에 다들 걱정하고 그랬었다. 피로 물든 소풍이라고나 할까. 당시 사진을 보면 공룡 조형물 아래에서 나와 E는 서 있고, H와 J는 그 앞에 앉아 있는 우스꽝스런 포즈를 취하고 있다. 대체 누구 제안으로 그런 만용을 저지른 건지 알 수가 없다는. 왈칵 코피를 쏟고 난 내 표정이 그 중에서 가장 밝다는 것도 좀 웃기다. 놀이기구 타러 놀러간 사람들이 놀이기구 수리하러 온 표정들을 짓고 있다니. 신나게 놀다가도 카메라 앞에만 서면 굳어지던 우리는 어딘지 다들 조금씩 어설펐던 것 같다.
E는 내게 반명함판 사진을 한 장 주었고 사진을 보니 그제야 세월의 흐름이 느껴졌다. 아무리 신기에 가까운 뽀샵 기능이라지만 시간의 무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눈빛만큼은 어쩌지 못하더라는. 그래도 그들이 모처럼 출발의 설렘으로 가득해 보여서 흐뭇했다. 홀가분한 이 순간을 기다리며 그간 마음 졸였던 시간들을 떠올리며 피곤한 표정을 짓기도 했지만 아마 긴 준비 기간만큼 그에 상응하는 좋은 선생님이 되리라 믿는다. 여전히 신랄한 언어들로 서로 주제파악을 시켜주는 겸손한 벗들이기에 더 고마웠고 불러주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갈 것만 같았던 처음 그 마음, 즉 초심을 잃지 말자면서 결의를 다졌다.
친구들을 만나면 그 순간만큼은 그 때 그 시간으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초등학교 친구를 만나면 나는 초등학생이 되고 이렇듯 학부 때 친구들을 만나면 대학생으로 돌아간다. 추억의 교집합 속에서 아팠거나 부끄러웠던 부분을 핀셋으로 끄집어내면서도 이제는 서로 담담하게 웃어넘길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망각의 힘이기도 하고 나이의 위력이기도 하겠지. 예전처럼 하루가 멀다 하고 붙어 다니진 않지만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건강하고 잘 되기를 빌어주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 이제는 E와 H가 첫 월급을 받는 날 얼마나 맛있는 것을 사줄 지 기대나 하고 있어야겠다. H의 도트 무늬 넥타이와 E의 쉬폰 블라우스, 옷은 낯설었지만 낯익은 모델들 덕분에 즐거운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