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원에서 침을 맞고 오는 길이라는 E는 첫눈에도 그다지 건강해 보이지 않았다. 오랜 수험생활의 피로와 스트레스로 얼굴엔 지친 기색이 완연했고 예전보다 턱 선도 다소 둥글어진 것이 살도 좀 오른 것 같았다. 스스로 느긋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음보다 몸이 먼저 아픈 신호를 보내고 있는 줄도 몰랐다면서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 따로 없다고 하소연했다. 건강한 것 빼면 내세울 것 없고 고기라면 환장하던 우리였는데 심신도, 입맛도 그간의 세월 탓인가. 한껏 담백해진 것 같았다. 꽤 오랜만에 방문한 피자헛의 피자 맛도 느끼하고 짭짤하던 전과 달리 많이 담백해졌더라는. 옛날의 우리였다면 大자 한판을 놓고도 아쉬워했으련만 식욕도 예전 같지 않은데다 밀린 사연을 쏟아놓느라 작은 것 한판도 다 먹지 못했다.

 이제 다른 길을 찾아봐야 하나보다, 마음을 비웠더니 그때서야 기회가 왔다면서 E는 조금 부끄러워했다. 그 동안 부모님께 너무 많이 의지했다고, 본의 아니게 주변 사람들에게도 누를 끼쳤다고도 했다. 건강을 해칠 정도로 지난했던 수험생활은 안타깝지만 E의 겸손하고 의젓해진 모습을 보니 한편으론 반가웠다. 도도하고 무뚝뚝했던 그녀는 특유의 시큰둥한 표정은 여전했지만 부모님에 대한 마음과 앞으로 만나게 될 아이들에 대한 설렘을 드러낼 때만큼은 눈빛에 따듯한 기운을 담뿍 담고 있었다. 졸업하기 전까지만 해도 난 다른 꿈이 있다, 고향을 떠나고 싶다, 부모님은 내 마음을 모른다고 말했던 그녀였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에게 주어진 혜택들을 그전까지는 잘 몰랐다며, 그 점이 얼마나 다행스럽고도 고마운 일인지 알 것 같단다. E가 아마 많이 성숙해 있을 거라는 엄마의 예측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아버지 아는 분의 배려로 필리핀에 머물렀던 경험을 이야기할 때는 무척 흥미로웠다. 천주교와 동성애가 공존하는 모순적인 나라가 바로 필리핀이라며 드디어 슬슬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E. “내가 그 동안 게이 관련 서적을 많이 찾아봤는데 말이야. 내 생각엔 단지 가능성의 차이인 것 같아. 누구나 동성을 좋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잠재해 있는데 그게 발현될 수 있는 환경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거지. 필리핀에서는 동성애가 별로 특별한 일도 아냐. 거기서 알고 지냈던 필리핀 사람 하나가 우리나라 어느 목사가 한국에는 게이가 없다고 말했다더라. 그래서 내가 그건 그 목사의 믿음일 뿐, 한국에 게이가 왜 없냐고 말했더니 그럴 줄 알았다면서 되게들 좋아하더라. 흐흐.” 겉으로만 보면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시피 한 그녀와 나를 끈끈하게 이어주는 것은 바로 이런 점이었다.

 단과대들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사범대에서 E와 나는 광대무변한 관심사를 주고받으며 쌓여가는 테트리스를 해소했던 것 같다. 한번 대화의 물고가 터지면 아침 일찍 도서관에서 만나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하도 말을 많이 해서 입이 더 커질 때까지 그야말로 네버엔딩 스토리였다. 명징한 사고력으로 객관적인 자세를 잃지 않는 E와 너무도 다정해서 매사를 주관적인 자세로 임하던 나는 참 안 닮은, 필리핀처럼 모순적인 한 쌍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너희 둘은 대체 만나면 무슨 이야길 그렇게 오래 하느냐고 묻곤 했는데 생각해보면 별로 특별한 이야길 했던 것 같지도 않다. 담배 한 대 피우지 못하는 여자들 둘이 모여 흡연을 주제로 두 시간 넘게 떠든 적도 있다면 말 다했지. 오늘도 필리핀으로 운을 뗀 대화는 곧이어 동성애 이슈로 이어지고, 기독교와 천주교에 대한 언급을 하다 보니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가 안 나올 수 없고, 이후 장정일로 일보 전진했다가는 어느 틈엔가, 남자들의 바람기에 대한 고찰로 일보 후퇴하더니 내가 조만간 그녀에게 ‘브로크백 마운틴’을 빌려주기로 약속하면서 가까스로 마무리 되었다. 오늘도 입이 조금 커진 채로 돌아오는 길, 꽤 오랜만에 보는 건데도 이런 점에선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 의아하면서도 재밌었다.

 다 먹지 못해 포장했던 피자 조각은 내가 가져왔고, 커피와 함께 먹으려고 가져갔던 반건시 곶감은 두 개가 남아 그녀에게 주었다. 피자와 곶감처럼 담백하고 말랑말랑한 저녁, 엉뚱한 면은 그대로 간직한 채 한층 의젓해진 E를 보아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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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2-03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너무 좋으셨겠어요~~ 그런 친구와 만나는 날은 입이 커져서 돌아와도
마음은 전혀 피곤하지가 않죠.. ^^
저두 오늘 곶감을 먹었어요.ㅎㅎ 전 뱃속이 말랑해요~ 후후 ^u^*

깐따삐야 2008-02-03 01:50   좋아요 0 | URL
그렇죠. 눈은 충혈되고 입은 커졌는데 마음은 반짝반짝+말랑말랑 합니다.^^
곶감을 먹어서 뱃속이 말랑~ 넘 귀여운 표현! ㅋㅋ

웽스북스 2008-02-03 0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커피와 함께 먹으려고 곶감을 챙겨가다니, 센스쟁이 센스쟁이!! 상상하니 맛이 꽤 잘어울려요 그간 E가 참 깐따삐야님 마음에 많이 걸렸을텐데, 붙어서 같이 선생님이 된다니, 다행이에요 이제 둘의 수다의 지평이 한층 더 넓어지겠네요 ㅎㅎ

깐따삐야 2008-02-04 11:40   좋아요 0 | URL
다음에 웬디양님과 상봉할 때도 곶감 챙겨갈게요.^^ 이젠 자주 보게 될 것 같아요. 이상한 책도 많이 읽고 워낙 생각하는 것도 독특한 애라서 만나면 재미있다는. 수다의 지평! 완전 공감되는 말이에요. ㅋㅋ

웽스북스 2008-02-03 02:37   좋아요 0 | URL
우와 집에 늘 곶감이 상비돼있어요?

깐따삐야 2008-02-03 02:43   좋아요 0 | URL
지금은 많이 있는데 없으면 사가기라도 할게요. 웬디양님이 좋아한다면야! ^^

Mephistopheles 2008-02-03 0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입이 커졌다는 말에 달려라 하니 홍두깨 선생의 부인인 고은애라는 캐릭터가 자꾸 생각납니다.

깐따삐야 2008-02-03 02:28   좋아요 0 | URL
입이 더더더 커져도 좋으니 홍두깨 선생님 같은 남편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전엔 잘 몰랐는데 참 착하고 좋은 남자라는. ㅋㅋ

웽스북스 2008-02-03 02:37   좋아요 0 | URL
맞아 맞아
그러니까, 이런 남자가 별 매력이 없게 느껴져서 문제에요
진짜 걱정이죠? ㅋㅋㅋ

깐따삐야 2008-02-03 02:45   좋아요 0 | URL
오늘 E와 이야기 하면서 남자는 그저 매력이고 뭐고 수수하고 가정적인 게 젤이라는 노친네 같은 소리들을 했어요. 그러면서 결혼 뭐 급해, 결론은 결국 이렇게 나버리구. ㅋㅋ
웬디양님 이상형도 아주 독해(?) 뵈던데 그르지 마요. 안 좋아. -_-

Mephistopheles 2008-02-03 02:54   좋아요 0 | URL
노친네 같은 소리라기 보단..이제 슬슬 남자 보는 눈이 정직해진게 아닐까나요? 오호호

웽스북스 2008-02-03 02:56   좋아요 0 | URL
아 나는 나이가 몇살인데 아직도 가오가 멋있어보일까 흑흑

Mephistopheles 2008-02-03 03:00   좋아요 0 | URL
그건 아마도 그 가오의 데미지를 직접 입어보지 않는 이상 여전히 그 가오가 멋져 보일지도 모른답니다.^^

웽스북스 2008-02-03 03:15   좋아요 0 | URL
ㅋㅋ 얼른 한번 어디가서 가오의 데미지를 좀 입고 와야 할까봐요 ㅋㅋ

깐따삐야 2008-02-03 12:38   좋아요 0 | URL
메피님- 백퍼센트 동감입니당.^^

웬디양님- 꼭 그럴 필요까진 없구. ㅋㅋ 간접체험만으로도 그 데미지의 심각성에 대해 느낀 바가 많아서 저는 가오 잡는 남자는 딱 질색이에요. 그리고 이상형은 이상형일 뿐이라서 현실 속에서는 또 전혀 다른 남자를 만나게 될지도 몰라요. 워낙에 예측불허한 영역이니 말예요.^^

웽스북스 2008-02-03 13:52   좋아요 0 | URL
그쵸그쵸? 하튼 문제에요 문제, 그니까 이를테면 하이킥의 최민용 같은 사람이랄까? 결혼하면 얼마나 고생이겠어요 ㅜ_ㅜ

깐따삐야 2008-02-04 11:25   좋아요 0 | URL
오홋! 최민용! 언젠가 S양이 저한테 그런 말 한 적 있어요. 언니는 서민정스러우니까 최민용샘 같은 남자를 만나야 한다구. 일리가 있단 생각이 들었고 최민용이 좋기도 했어요.^^
최민용은 가오를 잡으면서도 가오만이 전부가 아니잖아요. 말투가 좀 까칠해서 그렇지 속마음은 참 따듯하기도 하구 말이죠. 웬디양님이 최민용스러운 남자만 만난다면 내가 눈 감고 교제 승낙하지요. ㅋㅋㅋㅋ

웽스북스 2008-02-04 15:57   좋아요 0 | URL
허락은 받았구~ 이제 최민용만 찾으면 된다~ㅋㅋㅋ

프레이야 2008-02-03 0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곶감이랑 커피 콤비했는데요 ㅎㅎ
잘 어울리고 배도 부르고..
그나저나 말 안 하면 입이 다시 줄어들어요? =3=3=3

깐따삐야 2008-02-03 12:41   좋아요 0 | URL
그쵸. 커피가 은근히 우리나라 한과나 곶감이랑 잘 어울려요.^^
만약 줄어들지 않았다면 진짜 고은애씨가 됐겠죠? ㅋㅋ

순오기 2008-02-03 0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친구와의 행복한 시간...좋아 보여요!
나도 아직 비혼이라는 그 친구와 만나면 두세시간은 기본이었고, 집에 와선 또 전화로...그도 부족하면 편지로 쓸게~~~였어요. 그렇게 주고 받은 편지가 지금도 내 보물창고에 간직돼 있죠.
우리엄니 왈, "니들은 맨날 만나고 와서 전화하고 또 편지 쓰고, 도대체 무슨 할말이 그렇게도 많냐? 할말 많아서 좋겠다!" 그랬지요~~~~~~ ^^ 아~ 그 시절이 그립다!!

깐따삐야 2008-02-03 13:06   좋아요 0 | URL
부족하면 편지로 쓸게~ ㅋㅋ 순오기님과 친구분도 입 크기가 늘어나는 건 일도 아니었겠군요! ^^

웽스북스 2008-02-03 13:52   좋아요 0 | URL
그 편지속 내용이 저도 궁금해요 순오기님 ^-^

순오기 2008-02-04 01:44   좋아요 0 | URL
그 편지 중 제일 폼나는 걸로 한번 올려볼까? ㅎㅎ

깐따삐야 2008-02-04 11:26   좋아요 0 | URL
아, 기대기대! 올려주세요. 순오기님.^^

마늘빵 2008-02-03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걍 글만 읽었어두 그 수다가 얼마나 즐거웠는데 상상이 갑니다아. 이런 수다는 사랑스러워.

깐따삐야 2008-02-03 13:07   좋아요 0 | URL
삼라만상에 관심이 있는 츠자들이다 보니...^^

2008-02-05 1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05 2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