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에 반하는 운명이든, 고의적인 마주침이든 사랑의 시작은 말 그래도 시작에 불과하다. 댄(주드 로 분)은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앨리스(나탈리 포트먼 분)에게 첫눈에 반하지만 사랑도 결국 선택의 문제라고 말하는 앨리스가 옳았다. 영국의 앨리스가 뉴욕의 제인으로 돌아갔을 때, 지나가는 남자들마다 눈에 띄는 미모의 그녀를 돌아본다. 제인이 댄에게 처음 그랬던 것처럼 마주 오는 한 사람을 향해 매력적인 미소로 유혹의 제스처를 보냈다면 누구라도 그녀와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까?

 댄은 앨리스를 운명이라고 여겼던 것처럼 처음 만난 안나(줄리아 로버츠 분)를 향한 감정 또한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소설가가 되기 위해 어린 연인의 삶을 빌려다 쓰고 안나가 자신을 거부하자 유치하고 저열한 복수를 하는 그는 미성숙한 남자다. 댄은 사랑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연인들을 향해 자신의 잣대만을 강요한다. 진실이 먼저인가, 사랑이 먼저인가. 눈을 감아주는 것이 믿음인가, 눈을 뜨고 직시하는 것이 사랑인가. 갈팡질팡 우유부단한 그가 스스로의 행동이 연인의 입장에선 얼마나 모순이며 상처인가를 깨닫게 되었을 때 곁에 남아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반면 스트립 댄서인 앨리스는 모든 사람 앞에서 벌거벗고 춤을 추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끝까지 실명을 알려주지 않을 정도로 은밀한 구석이 있다. 앨리스의 두 얼굴을 가장 먼저 눈치 챈 사람은 래리(클라이브 오웬 분)다. 그는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속으론 아주 영악스러운’ 앨리스를 알아본다. 그녀는 사랑하고픈 사람을 알아보고, 무방비 상태로 그를 유혹하고, 충실하게 사랑하고, 자신의 자리가 없다는 걸 깨닫자 그를 떠난다. 생계를 위해 벌거벗고 춤을 추더라도 상대에 대한 사랑만큼은 변함없이 간직한다. 어린 소녀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사랑에 있어서 앨리스는 댄보다 훨씬 성숙하다. 댄의 위선을 간파하자 냉차게 돌아서는 그녀. 사랑할만한 사람을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때가 왔을 때 그 애착을 버릴 수도 있는 그녀는 멋있다.

 포토그래퍼인 안나는 사람들의 슬픈 표정에서도 아름다움을 캐취하는 직업처럼 감정으로부터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여자다. 단순하고 노골적인 래리는 그처럼 우아하고 신비로운 그녀에게 이끌리며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피부과 의사인 그는 안나에게 계속 진실을 말하라고 종용하고 있지만, 그는 어쩌면 사람의 피부 속 진실에 대해서는 무심한 남자일지 모른다. 래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남자이기 때문이다. 안나와 우연히 사랑에 빠진 건 댄의 고의적인 장난질 때문이었고 댄의 등장으로 결혼까지 파경을 맞지만 래리는 안나를 향한 사랑을 결코 멈추지 않는다. 모든 것을 다 말할 것을 요구하고 모든 것을 다 알게 되어도 안나를 계속 사랑한다. 진실을 궁금해 하면서도 막상 진실 앞에서 나약해지는 댄과는 다르다. 안나가 선택하는 사람은 결국 댄이 아니라 래리다. 

 사랑의 시작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진실이 가장 중요한가? 앨리스가 사실은 제인이었다고 해서 그녀가 댄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사랑이 가장 중요한가? 굴욕을 감수하고서라도 사랑을 지키려고 했던 안나를 차갑게 내치던 댄에게 중요했던 것은 사랑이 아니지 않는가? 사랑의 시작은 ‘시작’에 불과할 뿐. 영화는 그것을 기적이고 운명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갸우뚱한 표정으로 묻고 있다. 그 다음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황홀한 순간을 지나 조금씩 변해가는 감정과, 상대방의 거짓 또는 위선, 애착과 집착의 불안한 경계와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홀로 서서 두리번거리게 되는 것이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당신과 영영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 내가 믿어야 할 것은 당신이라는 존재인가, 당신과 나를 이어주고 있는 사랑인가. 클로저는 섬세한 연기를 펼치고 있는 배우들의 대화와 움직임, 그 사이의 틈을 이처럼 수많은 질문들로 메운다. 꼼꼼한 독서를 하듯 집중력을 요하는 영화다. Stranger로 만나 Closer로 이별하는 누구든, 사랑 앞에 이방인이며, 연인에게 타인일 수밖에 없다고 영화는 끊임없이 말하는 것 같다. 시작하는 연인에겐 다소 우울하겠지만 오래된 연인들에겐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작품이란 느낌. 사람과 사랑의 두 얼굴을 인정하고 그것을 한 차원 승화시키는 경지에까지 오르려면 연인을 놓치고 훌쩍이는 댄처럼 더 많이 아프고, 더 오래 울고, 더 많이 후회해야 하는 건지도. 그렇다고 해서 크게 변하는 것은 별로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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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04 2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04 2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04 2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05 09: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웽스북스 2008-02-04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를 보고 되미안 롸이스 아자씨를 처음 알았지요 흐흐
영화도 참 좋았었는데 또 이 이기적인 기억력 때문에 가물가물하네요
깐따삐야님 리뷰를 보니 다시 보고 싶다
(어둠의 경로로 부비적부비적 ㅋㅋ)

깐따삐야 2008-02-05 09:47   좋아요 0 | URL
원스 ost도 그랬고 아일랜드 음악엔 신비한 분위기가 있는 것 같아요. 이기적인 기억력.ㅋㅋ 영화가 딱히 줄거리를 기억할 만한 내용이 아니라서 그런지도 몰라요.^^

웽스북스 2008-02-05 13:36   좋아요 0 | URL
맞아요, 게다가 이 아저씨는 본인의 음악과 어울리게 생겨서 좋아요 ^_^

- 2008-02-05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훠! 영화랑 내용은 좋은데,왜 자꾸 포스터에 눈이 갈까?
사람들 눈알이 너무 부리부리해.

깐따삐야 2008-02-05 23:38   좋아요 0 | URL
엄훠! 서양배우들이라 더 그런가?? 그나저나 영화랑 내용이 좋다뉘. 과연...?

비로그인 2008-02-06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이크 니콜스 감독, 졸업은 참 서투르고 우스꽝스럽고 사랑스러웠는데. ^^*
이 영화는 뭐랄까,.. 굉장히 깔끔하고 세련된 것 같아요.

깐따삐야 2008-02-09 10:54   좋아요 0 | URL
'졸업'은 유명한 작품인데도 아직 못 봤어요. 보고 싶네요!
클로저는 언제 한 번 더 봐야 할 것 같아요. 아직도 정리 안 된 질문들이 많아요.^^

프레이야 2008-02-09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삐야님 설연휴 즐거이 보내셨지요? ^^
이 영화 저도 무지 좋아해요. 어쩜 이리 인물들의 심리관계망을 촘촘히 그려내셨어요.
님의 리뷰가 참 좋습니다. ^^

깐따삐야 2008-02-09 22:58   좋아요 0 | URL
아, 혜경님도 떡국 맛있게 드시고 연휴 잘 보내셨죠? ^^
사실은 리뷰를 쓰면서도 갸우뚱 했어요. 영화가 좋긴 좋은데 뭔가 미진하고 아리송하고 말이죠. 그래서 조만간 한 번 더 보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