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에는 폭설이 내렸다는데 올 겨울 청주에는 눈 소식이 별로 없다. 어제 아침, 조금 일찍 깬 남편이 눈이 잔뜩 내렸다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내다보니 잔뜩은 아니고 폭폭 밟힐 만큼은 내린 것 같았다. 가로등이 드문드문 켜져 있어 평범한 아파트 숲이 꽤나 몽환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카메라를 들이대는 찰나, 가로등은 꺼져버렸을 뿐이고.

 예전엔 눈은 눈이었는데 어지간히 쌓인 눈을 보니 걱정부터 되었다. 출퇴근길이 미끄럽겠구나. 서점에 가고 싶었는데 오늘은 어디 돌아다니지 말아야겠구나. 그러다 문득, 작년 크리스마스 무렵 노트북을 사러 하이마트에 갔던 생각이 났다. 아무도 선물을 안 줘서 거금을 들여 내가 나한테 선물을 했던 씩씩한 기억. 그 노트북은 지금껏 한 번도 고장을 안 일으켰고 논문 쓰는데도 일조를 했다.  

 사실 특별한 날을 특별하게 보내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래본 적도 별로 없다. 선물로 가장 좋은 건 여전히 용돈이고. 그래도 없을 때야 몰라도 이젠 있으니깐 장난삼아 떠보기로 했다. “크리스마슨데 뭐 없어요?” 반응이 어째 뜨뜻미지근해서 장동민 할매 마냥 퍽퍽, 몇 대 가격해 보기도 했다. 그러자 남편은 출근하다말고 집에 다시 돌아와 동그란 눈뭉치를 내민다. “이게 선물이에요?” 조금 후에 남편한테서 전화가 온다. “잘 도착했어요. 길도 미끄러웠는데.” “설마 그게 선물은 아니죠? 잘 도착한 거.” “맞는데요.” 웃고 말아야지 어쩌겠는가. 이번엔 문자가 온다. 크리스마스 이모티콘이다. “이걸로 때우려고?” 그리고는 잊었는데 그는 기어이 퇴근길에 일을 저질렀다.  



 나는 밥을 차리다 말고 한 이십년 같이 산 마누라마냥 “얼마 줬어요?” 부터 물었다. “얼마 안 해요. 그런 거 묻지 말고 즐기면 좋잖아. 예쁘잖아요.” “내가 말을 말아야지. 그냥 장난한 건데. 당분간 긴축정책이야.” “그런데요, 사와도 뭐라고 하고 안사와도 뭐라고 할 것 같았어요.” 생각해보니 맞는 말. 깜찍하고 크리스마스 분위기도 나고 좋긴 한데 요즘 하도 주변에서 불황이다, IMF보다 더한 위기다, 내년엔 더 어려워질 것이다, 등등 긴장을 시키다보니 이런 소비가 사치스럽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한편으로는 그래, 이때 아니면 언제 이래 보겠어. 내년부턴 어림없어. 혼자 중얼거려보기도 하고. 하여간 나라는 여자는 갈수록 각박해진다. 받는 거에 익숙해져야 대접 받는 건데 아주 무덤을 파고 앉았다는.

 나만 이런 게 아니라 올해 크리스마스나 연말은 여기저기서 다소 삼가고 자중하는 분위기다. 힘들 때만 그러지 말고 매년 이랬으면 좋겠단 생각도 든다. 오늘은 트리에 불 켜놓고 집에서 맛있는 거나 해먹어야지. 어둠의 경로로 뭘 좀 다운받아 볼까. 이십대의 마지막 크리스마슨데 이렇게 덤덤할 수가 없다. 눈사람과 트리는 잘 보관했다가 내년에 재활용해야겠단 생각. 이 어쩌지 못할 주부 마인드란. -_-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8-12-24 1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24 1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08-12-24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삐야님도 메리크리스마스..
눈도 왔겠다 신혼이겠다 눈 던지면서 나자바바라~~ 포퍼먼스 연출하진 않을 것 같고..왠지 깐따부부는 눈에다 나뭇가지로 문제지에 나온 답 해석을 서로 상의하면서 풀어나갈 것 같은 분위기가 든다는...ㅋㅋ

깐따삐야 2008-12-26 15:41   좋아요 0 | URL
ㅋㅋ 크리스마스 기념으루 문제집 안 풀고 영화 봤어요. 그나저나 지구가 멈추는 날, 봤는데 그냥 문제집 푸는 게 더 재밌더라는.
내가 키아누 리브스랑 제니퍼 코넬리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정말 너무하더군요.

물만두 2008-12-24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리크리스마스!!!!
눈 속을 잘 살피시지요. 혹 웬 다이아~라도^^ㅋㅋㅋ
서울은 비와요 ㅜ.ㅜ

깐따삐야 2008-12-26 15:42   좋아요 0 | URL
어머, 서울은 비 왔나요? 여기는 찬바람 부는 쨍, 하니 맑은 날씨였어요.
웬 다이아~ 찾을 틈도 없이 눈이 녹아버렸답니다.

웽스북스 2008-12-24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어머 저런 예쁜 선물은 당연히 재활용이죠. 내년에는 두개 위치를 바꿔서. ㅋㅋ
아니면 하나씩 추가해 나가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아요.

깐따님도, 메리크리스마스!

깐따삐야 2008-12-26 15:44   좋아요 0 | URL
저는 별이나 종보담도 쬬꼬렛이나 과자 달린 트리가 더 좋아요. ㅎㅎ
다음해 크리스마스엔 그런 걸 달아볼래요.

웬디양님도 크리스마스 잘 보냈죠? ^^

무스탕 2008-12-24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삐야님도 남편님도 즐거운 성탄절 보내세요~ ^^

글구요, 남편님께서 뭐 사들고 들어오시면 무조건 좋다고 하세요. 아니면 마른논에 물 들어가듯 쥐도새도 모르게 그런게 사라지는 날이 올지도 몰라요. ㅎㅎ

깐따삐야 2008-12-26 15:46   좋아요 0 | URL
음... 주변에서 그런 조언들 많이 하시던데 저는 그게 잘 안 되요. 아무래도 대우 못 받고 살 팔자인가 봐요. 흑!

BRINY 2008-12-24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미있는 크리스마스 보내시겠어요~ 즐거운 날 보내세요~

깐따삐야 2008-12-26 15:46   좋아요 0 | URL
BRINY님도 크리스마스 즐겁게 보내셨나요?
올해는 주위가 조용하고 썰렁하더라구요.

순오기 2008-12-25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활용은 당근, 대한민국 경제 살리는 주부마인드에 강추!
남편이 뭐 사올 때 무조건 '잘했다~ 뽀뽀도 해주고 엉덩이도 두드려 주고...'
이런 거 잘 못해서 국물도 없이 산다우~~ㅜㅜ

깐따삐야 2008-12-26 15:49   좋아요 0 | URL
근데 저러다가도 갑자기 뭔가 확 꽂혀서는! 안 사도 되는 걸 잘 사요. 가끔.
어우~ 사온 것도 스트레슨데 그렇게는 못해요. 저 역시 국물도 없겠죠? ㅜㅜ

순오기 2008-12-26 17:20   좋아요 0 | URL
ㅎㅎㅎ 국물도 없이 살았는데 울남편 50줄 넘으니까 알아서 잘 사오대요.
20년 버티면 괜찮아진다우~~~ㅋㅋㅋ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장이. 오랜만에 보는 연극이었다. 삼십만 송이의 안개꽃과 일곱 번째 난장이의 마임이 무척 아름다웠던. 말할 수 없기에 더욱 간절해질 수밖에 없는 몸짓. 아이들이 보기엔 좋을 것 같아요. 나는 이제 너무 삭막해졌나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말하지 않은 말, 눈빛과 가슴에는 삼십만 송이의 꽃송이가 촉촉한 안개가 되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말하지 않았기에, 표현하지 못했기에 멈춰버렸지만 그 순간 깊이 각인되어버린, 화석 같은 기억이 있다. 시작도 잘 모르겠으나 끝도 없었던. 끝났다고 말하기에는 그립고, 함부로 그리움을 표현하기엔 시작이란 걸 한 적도 없었던. 시작과 끝이 분명했던 연애는 더 이상 그립지 않다. 충분히 설레었고 힘들었던 그때, 그것으로 족하다. 온몸으로 사랑을 이야기하는 난장이를 보면서 나는 왜 내가 이토록 아픈 걸까.

 우리는 대개 놓쳐버린 사랑에 대해 그리워하죠? 열렬히 연애하다 헤어진 사람보다 오히려 더 많이 생각나기도 하잖아요. 아니. 생각난다거나 그렇지는 않고. 조금 뭐 아쉽다, 그 정도지요. 그는 대수롭잖게 대꾸했는데 왠지 난, 예의가 아닐까봐 더 말을 잇지는 않았다.

 표현해서가 아니라 그저 드러난다. 뜨겁고 질긴 마음이란 것은. 아득했던 마음에 폭죽이 터지고 우주가 전부 환해지지만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시간은 각자를 서로 다른 곳으로 데려가고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멀리 와 있다. 그리고 난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거나, 과거의 나일 수가 없고. 상대 역시 그럴 것이다.

 엄마는 동지를 잊지 않고 팥죽을 끓이셨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새알심은 빼고. 마른 오징어를 물에 불려 튀김도 만들어주셨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기억하시는 엄마와 매일 나와 같이 밥을 먹는 이 남자. 그리고 이맘때가 되니 그리워지는, 팥죽 같은, 기억. 간결해진 것은 일상일 뿐. 허영심 많은 나는 아니었나 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8-12-22 0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22 16: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력 위의 동그라미들을 기억하고 그 날을 보내고. 그렇게 한해가 흘러갔다. 올해 연말은 불황 탓인지 비교적 조용한 것 같다. 어느 곳엔 폭설이 내렸다 하고 거리엔 자선냄비도 등장한 모양인데 과제하고 밥 먹고 남편한테 장난치고. 겨울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다.

 마지막 학기, 마지막 수업. 무엇이 아쉬운지 수업이 끝나고도 다들 일어날 줄을 몰랐는데 돌아보면 부담과 희열이 공존하는 서평 시간 같았다. 고전은 다양한 이슈를 담고 있지만 그만큼 새로운 읽기에 대한 부담이 존재한다. 그 부담이 시너지로 작용하여 퍽퍽한 감성을 일깨우기까지 단 한 줄도 못 쓸 때가 있다. 그분이 오신 듯 술술 써내려가지는 희열은 아주 가끔만 찾아오는 것이어서 괴로울 때도 있었지만 꾸준히 쓰고, 진지한 토론이 오가면서 서가에 꽂혀 있던 과거들이 새로 움트는 느낌이었다. 현장으로 돌아가면 분명 그리워질 시간이다.

 혼자만 공부하는 게 억울해서 남편한테도 문제집을 사서 안겼는데 저녁 시간마다 꽤 열심히 푼다. 무슨 문제인가를 풀다가 공식이 생각 안 난다는 실언을 하는 바람에 나로부터 무지막지한 바가지를 긁힌 후에는 자존심이 발동했는지, 아니면 대거리가 귀찮았는지,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공부시켜놓고 나만 놀기엔 살짝 미안해서 책을 읽는데 ‘인생은 신산했고 사랑은 아득했으며 대학은 생각보다 세속적이었다.’(이장욱, 「고백의 제왕」 中)는 문장에 확 꽂힌다. 정말 그랬었는데, 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패러디. ‘계절은 신산했고 논문은 아득했으며 결혼은 생각보다 세속적이었다.’ 세월이 좀 더 흐르면 무엇 무엇이 신산해지고 아득해지고 세속적일까. 내 눈빛이 깊어질 때 쯤 남편은 I'm gonna be a bad boy~ 그것도 춤이라고. 몹쓸 흐느적거림으로 나를 웃긴다. 싸우고 풀리고 하면서 우리는 단순해졌고 우리의 관계 또한 그렇다. 둘 다 배는 자꾸 나와 생각은 얕아지고 배꼽만 깊어지는 게 아닌가 싶어 나~안 안타까울 뿐이고!

 조만간 마지막 과제물을 제출하고 논문 심사가 끝나면 공식적인 한 학기 일정이 모두 끝나고 방학에 들어간다.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장이’가 청주에 온대서 보러 가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루나틱’ 이후로 같이 공연을 보러 가는 건 처음이구나. 크리스마스 즈음해서는 엄마와 만두를 잔뜩 빚을 것이고 중국 갔던 멤버들과 울릉도에 갈 계획도 세우고 있다. 가까이들 사는데도 친구들 얼굴 본 지가 백만 년은 된 것 같다. 남편이 붙잡고 안 놔주는 것도 아닌데 어째 그 남자 핑계를 대고 싶고, 달력 위의 형광색 동그라미들은 아직도 몇 개가 더 남아 있는데 내년은 더욱 바빠질 거란 예감에 자발적 게으름을 고수하고픈, 연말이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BRINY 2008-12-08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논문 끝내시는군요. 부러워요...전 1년 놀고...이제 시작하려구요.

깐따삐야 2008-12-09 11:35   좋아요 0 | URL
그 덕에 애꿎은 커피만 잔뜩 마셨네요. BRINY님도 화이팅.^^

순오기 2008-12-08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웅~ 신혼에 공부하랴 논문 쓰랴~~ 단순하지 않으면 다 수행할 수 없는 일이지요.
하하하~ "둘 다 배는 자꾸 나와 생각은 얕아지고 배꼽만 깊어지는'
그래도 즐겁고 행복한 시절은 그때가 최고일 듯...ㅋㅋㅋ

깐따삐야 2008-12-09 11:44   좋아요 0 | URL
남편은 자기가 많이 먹는 건 생각 안 하고 누가 내 몸매 이렇게 만들었냐고 떼쓰고 그런다죠.
주변 어른들도 순오기님처럼 말씀하세요. 나중엔 그래도 그때가 좋았지~ 생각할 거라구요. 기운 없으면 싸우지도 않는다구. ㅋㅋ

2008-12-08 17: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09 1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08 2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09 1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웽스북스 2008-12-09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삐야님, 울릉도는 정말 정말 좋대요. 우와, 부러워요. 잘 다녀와요.
남편에게 장난치고, 라는 말에 확 꽂히지 뭐에요 ~ 아, 얼마나 조곤조곤 사랑스럽게 장난칠까 우리 깐따삐야님은~

깐따삐야 2008-12-09 12:04   좋아요 0 | URL
저는 어느 모임이고 묻어가는 걸 좋아해서 울릉도 좋냐길래 좋아요! 한 마디 했는데 그렇게 됐네요. 오징어가 맛있겠죠?
어느 날은 남편이 저한테 "나를 이렇게 가지고 놀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하더군요. 마치 사기결혼이라도 당한 것처럼. 다 좋으면서 그러는 거죠. 흐흐.

웬디양님은 키가 커서 어떤 겨울 코트든 멋지게 소화할 것 같아요. 검정 롱코트에 체크 머플러, 그냥 그런 모습이 문득 떠올랐어요. 보고 싶네요.^^


까랑 2008-12-11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깐따삐야님 글 보면 행복할 뿐이고~!! ㅋㅋㅋ...
울릉도 잘 다녀오세요. 전 가본지 20년이나 되었는데, 아직도 섬 일주를 하면서 봤던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생생하답니다.
얕아지는 생각과 깊어지는 배꼽의 상관관계에 고개가 갸웃거려지긴 하지만, 어쨌든 행복하신 것 같아 기쁘네요.
감기 조심하시구요^^

깐따삐야 2008-12-12 16:53   좋아요 0 | URL
그러게, 가고 싶었는데 말이죠. 울릉도의 겨울 날씨가 장난 아니라고 총무가 제주도를 가면 어떻겠냐고. 그나저나 왜 이렇게들 섬에 집착하는지. -_-a
행복할까요? 엊그제도 치열하게 싸웠다는. ㅋㅋ
까랑님도 감기 조심하시고... 서재도 만드시면 어떨까요? ^^
 


 햇볕이 좋아 이불을 널고 커피 한 잔을 끓여와 노트북 앞에 앉았다. 얼마만의 여유인지 모르겠다. 엊그제 본논문 발표가 있었다. 코멘트 속에는 지적 사항과 함께 칭찬도 있었다. 지적 사항에 대해서는 지도교수님과 함께 좀 더 생각해 보기로 했다. 글을 쓰면서도 새로운 것 하나 없이 혼자 억지를 부리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칭찬은 조금 부끄러웠다. 전체 발표가 끝나고 어느 교수님은 그간의 온정주의를 타파해야 한다면서, 긴장을 늦추지 말고 마지막 심사가 끝나는 그 시점까지 성실히 마무리할 것을 당부하셨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신적 매질을 많이 당한 시간이었다.

 저녁에는 우리 방 사람들끼리 모여 조촐한 뒤풀이가 이어졌다. 맥주를 돌리기 시작하자 냉랭한 강의실 안에서 추위와 긴장으로 굳어 있던 심신이 부드러워졌다. 화제는 어느새 유부녀가 된 내게로 옮겨졌다. 다들 결혼에 대한 다양한 관점과 의견들을 내놓았는데 그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좋아서 저러는 거라고 일갈해 버렸다. 교수님은 중간에서 이런저런 예를 들어 결혼은 좋은 점도 있고, 안 좋은 점도 있다고 정리를 해주셨는데 그저 그런 마무리이긴 하지만 참 적확한 결론이다. 실제로 그렇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다채로운 감정의 파고를 겪어야했던 연애시절에 비하면 우리가 언제 그랬나 싶을 만큼 서로에게 빠른 속도로 적응해 가고 있다는 점. 어쩌면 부부 교사 특유의 성실성 덕분인지도. 그는 착한 사람인데, 그도 나를 착한 사람이라 착각하고 있으니 이런 뜻밖의 참한 생활이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한편 결혼하고 나서는 엄마 생각이 많이 난다. 한 동네에 살게 되어 그나마 위안이 되지만 그 동안 잘 못한 것만 생각이 나서 누가 엄마 이야기만 하면 뭉클해진다. 처음엔 반대도 했었지만 남편을 일단 가족으로 맞고 나니 정말 잘해주신다. 어떨 때는 엄마와 내가 이 남자 하나 잘 먹고 잘 입히려고 결혼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그런 엄마에게 고맙고, 나와의 결혼을 통해 편안해지고 건강해진 남편을 보는 것도 흐뭇하다. 내게 매년 11월은 참 힘든 계절이었다. 언젠가 페이퍼에 2월, 6월, 11월에 대해 쓴 적도 있다. 하지만 올해 11월에는 스산한 바깥 풍경 안에 바쁘게 움직이는 내 모습이 보인다. 피곤한 얼굴이면서도 반짝, 생기가 도는. 그 현재에 감사한다.


댓글(18)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Mephistopheles 2008-11-14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이건 뭥미.?? 결혼은 또 언제하셨데요~~ 암튼 신출귀몰 깐따삐야님 같으니라구!!

깐따삐야 2008-11-16 10:18   좋아요 0 | URL
에엥? 모른 척 하시는 거죠? ㅋㅋ

다락방 2008-11-14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결혼은 정말 언제하신거예요? 늦은듯 하지만 결혼 축하드려요, 깐따삐야님!

깐따삐야 2008-11-16 10:19   좋아요 0 | URL
엥? 다락방님도 모른 척 하시는 거죠? 제가 넘 뜸했나 봐요. 감사해요.^^

무스탕 2008-11-14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머! 두 분 정말 깐따삐야님 결혼 발표 페이퍼 못보셨어요?
애정이 식은겨... =3=3=3

깐따삐야 2008-11-16 10:20   좋아요 0 | URL
무스탕님 덕분에 깨달았어요. 애정이 식은겨... ㅠㅠ

순오기 2008-11-14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혼해서도 엄마 생각 많이 하지만 아기 낳고 나면 더 많이 하지요, 눈물을 글썽이며...
11월의 행복이 깐따님에게 가 있구만유, 한 남자를 잘 먹이고 입히는 것도 중요해요.ㅋㅋ

깐따삐야 2008-11-16 10:23   좋아요 0 | URL
그럴 줄 알았으면 함께 살 때 더 잘할 걸, 후회되고 그래요.
순오기님처럼 씩씩하고 부지런한 주부가 되어야 할텐데 저는 아직 멀었답니다.^^

가시장미 2008-11-14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었지만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 우리 비슷한 시기에 결혼한거에요? 저도 페이퍼를 못 보았는데... 엘신님이 귀뜸해주셔서 알고는 있었어요. ㅋㅋ 반가워요! 저도 저녁에 갈치를 구울까봐요 ^^

깐따삐야 2008-11-16 10:2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요즘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겠어요. 장미님도 바쁘죠? 어제 저녁에 갈치 구우셨어요? ^^

sretre7 2008-11-15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결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결혼생활 하세요 ^^ 언제나 배움에의 열정 부럽습니다. 파이팅~!

깐따삐야 2008-11-16 10:27   좋아요 0 | URL
감사드려요.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홈페이지 개편 중이신가요? 님도 늘 건강하고 행복하시길요.^^

웽스북스 2008-11-15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머! 두 분 정말 깐따삐야님 결혼 발표 페이퍼 못보셨어요?
애정이 식은겨... =3=3=3 22222

깐따님, 어제 지하철에서 매우 참한 임산부가
할머님이 양보해주시는 자리를 극구 마다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 깐따삐야님 생각 났잖아요. (너무 앞서 생각난거죠 하하하)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보기 좋아요 ^_^

깐따삐야 2008-11-16 10:31   좋아요 0 | URL
메피님은 걍 모른 척 하시는 것 같다는...ㅋㅋ

막 빛의 속도로 앞서가는데요. 아직은 그냥 참한 새댁으로만~
미혼일 때가 그리울 때도 있어요. 웬디양님은 지금 그 시기를 맘껏 즐겨요!

2008-11-15 19: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1-16 1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까랑 2008-11-17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결혼하셨군요. 뒤늦게나마 축하드립니다. 가끔 들러서 '빼어나게 잘 써진' 깐따삐야님의 글을 보는게 낙이라면 낙이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글이 뜸해지시길래 논문이 바빠서 그런가, 아니면 누가 생겼나 했더랬어요. 누가 있다는 건 여름에 올린 글에서 보았지만 그 후로 글이 안올라오길래 목하열애중이신가 하고 저도 두달 반 정도 안들어왔었는데, 오늘 와보니 그새 결혼을 하셨군요. ㅋㅋㅋ~ 암튼 다시 한번 축하드리구요, 아무리 바쁘시더라도 이런 무명(?)의 팬도 있다는 걸 염두에 두시고 가끔이라도 안부글 올려주세요. 행복하시길요^^

깐따삐야 2008-11-19 15:2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연애하고 논문 쓰고 결혼하고... 바쁘게 지내다 보니 달력이 두 장 남았네요. 제 일상에 관심을 가져주는 팬이 다 계시다니 기쁘고 고맙습니다.
까랑님도 추위에 건강 유의하시고 행복하시길요~
 

 



  코끝에 어느새 찬 맛이 스민다. 가을이 묵묵히 깊어가는 사이 나도 묵묵한 주부가 되었다. 연애할 땐 나날이 심란하기도 하더니 막상 결혼하고 보니 나날이 바빠 심란할 짬이 없다. 손에 익지 않은 살림과, 낯선 동거와, 불쑥 다가온 논문발표 등으로 나~안 분주하고도 단순한 일상을 꾸려갈 뿐이고.

 ‘사과’는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며칠 안 되어 그와 함께 본 영화다. 개봉 전부터 꼭 봐야겠다 싶어지는 영화들이 있는데 이 영화가 그랬다. 사실 이런(?) 영화는 둘이 함께 보고 싶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둘이 함께 봐도 괜찮을까? 하는 양가감정을 품게 만들곤 한다. 얼마 전 ‘멋진 하루’를 참 좋게 보았고 이 영화에 대해서도 비슷한 기대를 품었던 것 같다. 이제 결혼을 했기 때문일까. 의외로 ‘사과’가 더 좋았다. 덕분에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보고나서 여운이 찰랑거릴 때 바로 리뷰를 썼다면 좋았을 텐데. 아, 주부란 참 고단도 하다.

 오래된 연인, 현정(문소리 분)과 민석(이선균 분)은 여행 중에 민석의 일방적인 결별 선언으로 갑작스럽게 헤어진다. ‘나를 점점 잃어버리는 것 같다’는 민석의 고백은 ‘나를 점점 잃어가는 게 싫다’는 거부의 뜻 아니겠는가. 어느 정도 나를 버려야 비로소 채워지는 사랑과, 결코 버릴 수 없는 자아의 한 모서리 때문에 부딪쳐 본 적이 있는 아무개들이라면 그를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로 승천하지 못한 관념은 결별로 추락할 뿐. 모든 헤어짐이 그러하듯 현정은 많이 아파한다. 그런 그녀 주변을 맴돌던 상훈(김태우 분)은 꾸준한 구애로 현정의 마음을 얻고 그들은 별다른 장애 없이 결혼한다.

 떨어져 지내는 것을 감수하고도 목표를 이루려는 상훈과 함께 공유하는 시간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현정. 남자는 ‘미래’를 보고 여자는 ‘지금’도 소중하다. 대개는 ‘잘해보려고’ 한 일들이 ‘몰라주는 게’ 되어버리니 누군가를 진심으로 이해한다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현정이 더 잘 사랑해 보려고 한 말이 “너 나 미워하잖아.”라는 상훈의 대꾸로 돌아오는 것처럼. 그렇듯 영화는 남녀 간의 생각 차로 인해 이들이 겪는 해프닝과 진실의 시간차 때문에 방해 받는 소통에 대해 가감 없이 보도한다. 연애와 결혼 속에서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아무도 나쁘지는 않다. 입장 차이만이 존재할 뿐. 그 시선이 참 공평하고 담백했다.

 관객이 많지 않아 낯모르는 커플 몇 쌍이 오붓하게 봤는데 극장을 나오면서 예상 밖의 반응을 들었다. 앞서 걷던 중년 부인이 남편을 향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영화라고 원 그지 같아서.”라고 불평하고 있었다. 우리는 마주보며 다소 당황했지만 이야기를 나누면서 연령대에 따라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는 데에 동의했다. 십대라면 공감하기 어려울 것이고, 목하 연애 중이거나 우리처럼 갓 결혼한 커플들이라면 꽤 흥미로울 것이며, 이미 그 세월을 넘어선 커플들은 주목할 만한 사건 하나 없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간만의 데이트를 망쳤다거나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도. 결별과 결혼의 시즌, 이 영화는 처음부터 그들을 타깃으로 했는가 보다.

“난 결혼하고 나서 자기를 더 사랑하게 되는 것 같아.”
“나는 참 사랑을 열심히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노력은 안 했던 것 같아.”
얼마나 흔해빠진 대사들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층 새로워진 눈빛의 문소리는 그 진부한 대사들로 내 마음을 툭툭 건드렸다. 그처럼 ‘사과’는 나와 당신을 포함한 아무개들의 거울 같은 영화다. 사과 같은 내 얼굴, 예쁘기도 했으면. 고로, 이제 노력할 일이 남았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레와 2008-10-29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오랜만이예요! 깐따삐야 새~댁!^^
늦었지만 결혼 축하드립니다!!

봐야지.. 봐야지 하면서 놓쳐버린 영화 '멋진하루'와 '사과'. (아이고;;)
이렇게 눈에 쏙쏙 가슴에 송송 박히는 리뷰들을 만날때면 놓쳐버린 영화들에 대한 아쉬움이 백만배쯤 커져요. 어떻게든 챙겨봐야겠어요! (불끈!)

학생으로 주부로 바쁘시겠지만,
깐따삐야님의 페이퍼에 목말라있는 알라디너들을 위해 종종 흔적 남겨 주시어요.
감기 조심하시구요! ^^

깐따삐야 2008-10-31 10:0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멋진 하루', '사과' 둘 다 나름 좋았어요. 그냥 조용히 혼자 봐도 좋을 것 같은 영화들이에요.

요즘은 하루가 넘 빨리 가네요. 별로 하는 일도 없는 것 같은데 말이죠. 감기 걸린 사람들 많던데 레와님도 쌀쌀한 날씨, 건강 유의하세요!

순오기 2008-10-30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잉?~~~ 연애한단 페이퍼 하나 달랑 올리고 결혼한거예요?
누구처럼 인증샷이 필요해요~ ^^ 알콩달콩 행복을 잘 만들어가세요!!
멋진 하루~~~ 대중적인 흥미를 유발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나름 괜찮았어요.
깐따님 후기를 봐선 나는 '사과'는 보지 말아야 할지도~~~~

깐따삐야 2008-10-31 10:07   좋아요 0 | URL
어머~ 결혼한단 페이퍼도 올렸는데요? ㅋㅋ
요즘은 순오기님처럼 세상의 주부들이 모두 대단해 보인답니다. 열심히 살아야죠.
'멋진 하루'는 전도연이 지하철 안에서 울던 장면이 내내 기억에 남아요. 생각날 때 한번 더 보고 싶은 영화에요.
'사과'도 보세요. 문소리의 변화가 눈길을 끌더군요.^^

봄봄 2008-10-30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앗..오래간만에 들어왔더니 바람이 지나간사이에 결혼하셨네요^^ 늦게나마 축하드려요..결혼하기 전에 봤으면 더 좋았을 것 같네요..저도 요근래 한국영화 주루룩 봤는데 멋진하루와 사과가 좋더라구요~~

깐따삐야 2008-10-31 10:1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른다더니 저도 제가 올해 결혼할 줄은 몰랐답니다.^^
조만간 '미쓰 홍당무'도 보려구요. 영화계는 요즘 여배우 전성시대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