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위의 동그라미들을 기억하고 그 날을 보내고. 그렇게 한해가 흘러갔다. 올해 연말은 불황 탓인지 비교적 조용한 것 같다. 어느 곳엔 폭설이 내렸다 하고 거리엔 자선냄비도 등장한 모양인데 과제하고 밥 먹고 남편한테 장난치고. 겨울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다.

 마지막 학기, 마지막 수업. 무엇이 아쉬운지 수업이 끝나고도 다들 일어날 줄을 몰랐는데 돌아보면 부담과 희열이 공존하는 서평 시간 같았다. 고전은 다양한 이슈를 담고 있지만 그만큼 새로운 읽기에 대한 부담이 존재한다. 그 부담이 시너지로 작용하여 퍽퍽한 감성을 일깨우기까지 단 한 줄도 못 쓸 때가 있다. 그분이 오신 듯 술술 써내려가지는 희열은 아주 가끔만 찾아오는 것이어서 괴로울 때도 있었지만 꾸준히 쓰고, 진지한 토론이 오가면서 서가에 꽂혀 있던 과거들이 새로 움트는 느낌이었다. 현장으로 돌아가면 분명 그리워질 시간이다.

 혼자만 공부하는 게 억울해서 남편한테도 문제집을 사서 안겼는데 저녁 시간마다 꽤 열심히 푼다. 무슨 문제인가를 풀다가 공식이 생각 안 난다는 실언을 하는 바람에 나로부터 무지막지한 바가지를 긁힌 후에는 자존심이 발동했는지, 아니면 대거리가 귀찮았는지,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공부시켜놓고 나만 놀기엔 살짝 미안해서 책을 읽는데 ‘인생은 신산했고 사랑은 아득했으며 대학은 생각보다 세속적이었다.’(이장욱, 「고백의 제왕」 中)는 문장에 확 꽂힌다. 정말 그랬었는데, 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패러디. ‘계절은 신산했고 논문은 아득했으며 결혼은 생각보다 세속적이었다.’ 세월이 좀 더 흐르면 무엇 무엇이 신산해지고 아득해지고 세속적일까. 내 눈빛이 깊어질 때 쯤 남편은 I'm gonna be a bad boy~ 그것도 춤이라고. 몹쓸 흐느적거림으로 나를 웃긴다. 싸우고 풀리고 하면서 우리는 단순해졌고 우리의 관계 또한 그렇다. 둘 다 배는 자꾸 나와 생각은 얕아지고 배꼽만 깊어지는 게 아닌가 싶어 나~안 안타까울 뿐이고!

 조만간 마지막 과제물을 제출하고 논문 심사가 끝나면 공식적인 한 학기 일정이 모두 끝나고 방학에 들어간다.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장이’가 청주에 온대서 보러 가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루나틱’ 이후로 같이 공연을 보러 가는 건 처음이구나. 크리스마스 즈음해서는 엄마와 만두를 잔뜩 빚을 것이고 중국 갔던 멤버들과 울릉도에 갈 계획도 세우고 있다. 가까이들 사는데도 친구들 얼굴 본 지가 백만 년은 된 것 같다. 남편이 붙잡고 안 놔주는 것도 아닌데 어째 그 남자 핑계를 대고 싶고, 달력 위의 형광색 동그라미들은 아직도 몇 개가 더 남아 있는데 내년은 더욱 바빠질 거란 예감에 자발적 게으름을 고수하고픈, 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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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08-12-08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논문 끝내시는군요. 부러워요...전 1년 놀고...이제 시작하려구요.

깐따삐야 2008-12-09 11:35   좋아요 0 | URL
그 덕에 애꿎은 커피만 잔뜩 마셨네요. BRINY님도 화이팅.^^

순오기 2008-12-08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웅~ 신혼에 공부하랴 논문 쓰랴~~ 단순하지 않으면 다 수행할 수 없는 일이지요.
하하하~ "둘 다 배는 자꾸 나와 생각은 얕아지고 배꼽만 깊어지는'
그래도 즐겁고 행복한 시절은 그때가 최고일 듯...ㅋㅋㅋ

깐따삐야 2008-12-09 11:44   좋아요 0 | URL
남편은 자기가 많이 먹는 건 생각 안 하고 누가 내 몸매 이렇게 만들었냐고 떼쓰고 그런다죠.
주변 어른들도 순오기님처럼 말씀하세요. 나중엔 그래도 그때가 좋았지~ 생각할 거라구요. 기운 없으면 싸우지도 않는다구. ㅋㅋ

2008-12-08 17: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09 1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08 2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09 1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웽스북스 2008-12-09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삐야님, 울릉도는 정말 정말 좋대요. 우와, 부러워요. 잘 다녀와요.
남편에게 장난치고, 라는 말에 확 꽂히지 뭐에요 ~ 아, 얼마나 조곤조곤 사랑스럽게 장난칠까 우리 깐따삐야님은~

깐따삐야 2008-12-09 12:04   좋아요 0 | URL
저는 어느 모임이고 묻어가는 걸 좋아해서 울릉도 좋냐길래 좋아요! 한 마디 했는데 그렇게 됐네요. 오징어가 맛있겠죠?
어느 날은 남편이 저한테 "나를 이렇게 가지고 놀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하더군요. 마치 사기결혼이라도 당한 것처럼. 다 좋으면서 그러는 거죠. 흐흐.

웬디양님은 키가 커서 어떤 겨울 코트든 멋지게 소화할 것 같아요. 검정 롱코트에 체크 머플러, 그냥 그런 모습이 문득 떠올랐어요. 보고 싶네요.^^


까랑 2008-12-11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깐따삐야님 글 보면 행복할 뿐이고~!! ㅋㅋㅋ...
울릉도 잘 다녀오세요. 전 가본지 20년이나 되었는데, 아직도 섬 일주를 하면서 봤던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생생하답니다.
얕아지는 생각과 깊어지는 배꼽의 상관관계에 고개가 갸웃거려지긴 하지만, 어쨌든 행복하신 것 같아 기쁘네요.
감기 조심하시구요^^

깐따삐야 2008-12-12 16:53   좋아요 0 | URL
그러게, 가고 싶었는데 말이죠. 울릉도의 겨울 날씨가 장난 아니라고 총무가 제주도를 가면 어떻겠냐고. 그나저나 왜 이렇게들 섬에 집착하는지. -_-a
행복할까요? 엊그제도 치열하게 싸웠다는. ㅋㅋ
까랑님도 감기 조심하시고... 서재도 만드시면 어떨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