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에는 폭설이 내렸다는데 올 겨울 청주에는 눈 소식이 별로 없다. 어제 아침, 조금 일찍 깬 남편이 눈이 잔뜩 내렸다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내다보니 잔뜩은 아니고 폭폭 밟힐 만큼은 내린 것 같았다. 가로등이 드문드문 켜져 있어 평범한 아파트 숲이 꽤나 몽환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카메라를 들이대는 찰나, 가로등은 꺼져버렸을 뿐이고.
예전엔 눈은 눈이었는데 어지간히 쌓인 눈을 보니 걱정부터 되었다. 출퇴근길이 미끄럽겠구나. 서점에 가고 싶었는데 오늘은 어디 돌아다니지 말아야겠구나. 그러다 문득, 작년 크리스마스 무렵 노트북을 사러 하이마트에 갔던 생각이 났다. 아무도 선물을 안 줘서 거금을 들여 내가 나한테 선물을 했던 씩씩한 기억. 그 노트북은 지금껏 한 번도 고장을 안 일으켰고 논문 쓰는데도 일조를 했다.
사실 특별한 날을 특별하게 보내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래본 적도 별로 없다. 선물로 가장 좋은 건 여전히 용돈이고. 그래도 없을 때야 몰라도 이젠 있으니깐 장난삼아 떠보기로 했다. “크리스마슨데 뭐 없어요?” 반응이 어째 뜨뜻미지근해서 장동민 할매 마냥 퍽퍽, 몇 대 가격해 보기도 했다. 그러자 남편은 출근하다말고 집에 다시 돌아와 동그란 눈뭉치를 내민다. “이게 선물이에요?” 조금 후에 남편한테서 전화가 온다. “잘 도착했어요. 길도 미끄러웠는데.” “설마 그게 선물은 아니죠? 잘 도착한 거.” “맞는데요.” 웃고 말아야지 어쩌겠는가. 이번엔 문자가 온다. 크리스마스 이모티콘이다. “이걸로 때우려고?” 그리고는 잊었는데 그는 기어이 퇴근길에 일을 저질렀다.
나는 밥을 차리다 말고 한 이십년 같이 산 마누라마냥 “얼마 줬어요?” 부터 물었다. “얼마 안 해요. 그런 거 묻지 말고 즐기면 좋잖아. 예쁘잖아요.” “내가 말을 말아야지. 그냥 장난한 건데. 당분간 긴축정책이야.” “그런데요, 사와도 뭐라고 하고 안사와도 뭐라고 할 것 같았어요.” 생각해보니 맞는 말. 깜찍하고 크리스마스 분위기도 나고 좋긴 한데 요즘 하도 주변에서 불황이다, IMF보다 더한 위기다, 내년엔 더 어려워질 것이다, 등등 긴장을 시키다보니 이런 소비가 사치스럽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한편으로는 그래, 이때 아니면 언제 이래 보겠어. 내년부턴 어림없어. 혼자 중얼거려보기도 하고. 하여간 나라는 여자는 갈수록 각박해진다. 받는 거에 익숙해져야 대접 받는 건데 아주 무덤을 파고 앉았다는.
나만 이런 게 아니라 올해 크리스마스나 연말은 여기저기서 다소 삼가고 자중하는 분위기다. 힘들 때만 그러지 말고 매년 이랬으면 좋겠단 생각도 든다. 오늘은 트리에 불 켜놓고 집에서 맛있는 거나 해먹어야지. 어둠의 경로로 뭘 좀 다운받아 볼까. 이십대의 마지막 크리스마슨데 이렇게 덤덤할 수가 없다. 눈사람과 트리는 잘 보관했다가 내년에 재활용해야겠단 생각. 이 어쩌지 못할 주부 마인드란.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