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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그 해 겨울, 주기도문도 채 외우지 못하던 나는 꼬박꼬박 교회에 나갔다. 오빠, 그리고 매일 함께 놀던 동네 언니가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매년 구세군에서 준비하는 크리스마스는 마을 아이들의 축제였다. 그 날 밤, 오빠는 촛불을 들고 무언가를 낭송했고 나는 옆집 기옥이 언니와 울면 안 돼, 춤을 추었다. 너는 너무 어려서 안 돼. 처음에는 노래도, 춤도, 아무것도 시켜주지 않았는데 누군가 한 명이 빠지게 돼서 그 역할을 내가 맡게 되었다. 언니들이 울긋불긋 화장을 해주었고 하얀 스타킹에 발레복처럼 생긴 무용복도 입었다. 춤을 추다가 날아갈 것만 같았다. 무대 아래에는 엄마가 와 있었다. 엄마는 내가 깜찍하게 춤을 잘 추었다고 뿌듯해 하셨다. 근데 엄마, 왜 다 함께 기도합시다, 할 때 엄마만 눈 안 감았어? 엄마는 기도 안 했어. 내가 보기엔 기도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닌 엄마였는데 엄마는 참 담담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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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결에 깨어보니 아빠가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오빠가 내 코 밑에 닭다리를 갖다 대고 간질이고 있었다. 냄새 맡고 일어날 줄 알았어. 밤늦게 퇴근한 아빠가 치킨과 아이스크림을 사오셨다. 아빠가 사온 치킨은 호프집에서 맥주 안주용으로 바짝 튀긴 통닭이었다. 엄마는 아빠의 늦은 퇴근과 나의 소아비만을 걱정했지만 나는 아빠가 술 한 잔 하고 통닭을 사오는 겨울밤이 참 좋았다. 방안에 솔솔 퍼지며 깊은 잠도 깨우던 고소한 통닭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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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날, 동아리 건물 앞에서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었다. 기숙사 근처에서 Y와 K가 내 이름을 부르며 올라왔다. 방학 중의 만남이 반가워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신나게 이야기를 하는데 어라, 멀리서 느릿느릿 걸어오는 저 사람. D선배였다. 친구들이 먼저 알아보곤 호들갑을 떨었다. 따뜻한 캔커피를 뽑는다, 동아리방으로 올라간다, 선배에게 말을 건다... 하지만... 네 선배라는 남자, 하체가 너무 부실한 것 아니냐는 K의 농담에 구박을 날리며 잔뜩 붉어진 얼굴로 그 자리를 떠났다. 눈발이 폴폴 날리던 추운 날이었는데 주변의 찬 공기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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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 오네요! 산성의 굽이진 길을 따라 올라갔다. 굳이 걷자는 이유는 뭔가. 구두창이 미끄러웠지만 그의 손을 잡거나 팔을 붙잡거나 하지는 않았다. 조심해요, 라며 내 팔을 붙잡은 건 그였다. 추위와 긴장으로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렸고 넘어지기라도 하면 우스울까봐 되도록 천천히 발을 내딛었다. 계획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고 그럼에도, 거리 한번 좁혀보겠다고 이 추운 날, 이러고 있는 남자에 대해 웃음이 났다. 눈을 기다리는 이유도 참 여러 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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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올해 들어 가장 많은 눈이 내린 날. 슈가 파우더를 흩뿌려놓은 듯한 달콤한 경치 감상도 잠시. 가족의 출근길과 외출이 염려되는 날씨였다. 채 눈이 녹지 않은 오전에는 꼼짝도 안하고 집에서 김치부침개를 부쳤다. 볕이 들기 시작한 오후에는 아크릴판으로 뭔가를 제작 중인 남편이 공구를 산다길래 마트에 따라갔었다. 딸기가 먹음직스러워 보여서 한 팩 샀는데 기대보다는 단맛이 덜했다. 주말 오후라 사람들이 어찌나 많던지. 그나저나 요즘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리는 듯, 어쩐지 다리로 걷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걷는 것 같은 느낌이다. 머잖아 내가 발을 떼는 순간, 사람들이 좌우로 갈라서는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겠지.-_- 어제는 눈도 오고 하여 <크리스마스 캐롤>을 보러 갔는데 디테일이 훌륭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전에 지나치게 충실한 것이 흠이었다. 매우 교훈적인 호러 무비라고 볼 수 있음. 관객은 딱 네 명. 아, 내 안에 한 사람 더. 이제는 오래 같은 자세로 앉아 있기도 힘들고, 눈이 와도 호젓한 기분에 젖기보다 나와 주변 사람들의 안위를 더 염려하는, 그런 날들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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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9-12-19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아직도 기억이 나요. 아침에 인근 초등학교에서 받는 민방위 훈련에 늦어 눈길 내리막 길을 내려가다 미끄러져 2미터 정도 공중부양했다 그냥 철푸덕 떨어졌던 기억이..2분 기절했던 기억도 모락모락...이래서 눈오는 날엔 배수구 트랜치 잘못 밟으면 비명횡사한다는 소리를 직접 체험했어요...

깐따삐야 2009-12-21 10:51   좋아요 0 | URL
상상만 해도 아찔! 눈 오는 날은 아무리 바쁘셔도 찬찬히 걸어야 해요. 저도 출근길에 미끄러지는 바람에 옷을 다 버려 다시 집으로 돌아갔던 기억이...^^

BRINY 2009-12-19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2000년 겨울인가 엄청난 대설이 왔을 때가 기억나요. 여기가 서울이냐 알래스카냐!하고 외치던 때요. 도로와 인도 구별도 안가고, 테헤란로에 차도 안다니고, 아파트 단지 쪽문 들어서다가 휙 미끄러져서 간신히 기둥붙잡고 살아났던 일

깐따삐야 2009-12-21 10:55   좋아요 0 | URL
어제도 대낮인데도 인적이 드물더라구요. 바람은 차고 길은 꽁꽁 얼어붙고.
항상 그런 상황에서는 창피해서 아픈 내색도 못하고 반짝 일어나곤 하죠. 저도 잘 넘어지는 편이라 그런 경험 많아요.ㅋㅋ

웽스북스 2009-12-20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육점인지 닭집인지 앞에서 기다렸다 은박 비닐 봉투에 담아와서 먹던 기름이 흥건하던 그 닭맛, 닭냄새가 막 그리워져요. 물론 요즘 굽네치킨 같은 닭들, 엄청 세련되고 맛있지만, 기다림, 설렘, 뭐 이런 것들이 그 때 그 닭을 따라올 수 있을까 싶기도 해요. 저 수많은 내용중에 먹을 거에 집착하는 웬디씨 ㅋㅋㅋ

깐따삐야 2009-12-21 10:59   좋아요 0 | URL
기름 좔좔 시장닭 맛을 어떻게 잊겠어요. 하여간 양도 되게 많았었는데. 요즘 치킨 광고들 보면 저 숱한 치킨집이 장사가 다 되긴 되는걸까, 싶을 정도로 정말 다양해졌죠. 아, 언제쯤 치킨에 맥주 한잔 할 날이 올지 모르겠어요.ㅠ
 



   화려한 음식의 향연이나 자극적인 장면 하나 눈에 띄지 않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의 풍미를 돋우는 것은 메릴 스트립과 에이미 아담스라는 걸출한 두 여배우였다. 어느 시공간, 어느 역할에 갖다 놓아도 마치 태어날 때부터 그 사람이었던 것처럼 관객의 오감에 쏙쏙 스미는 연기를 보여주는 메릴 스트립, 한편 <박물관이 살아있다>에서 용감하고 발랄한 비행사로 출연했던 에이미 아담스는 이 영화에서 매우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요리 블로거로 변신했다. 두 사람은 영화 속에서 한 번도 만나지 않지만 각자의 서로 다른 사연과 매력으로 관객에게 어필한다.

  줄리아 차일드(메릴 스트립 분)는 남편을 따라 파리로 건너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찾다가 미국인을 위한 프랑스 요리 레시피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요리로 인정을 받고 책을 내기까지 갖가지 우여곡절을 겪지만 항상 변함없는 마음으로 자신과, 자신의 음식을 지지해주는 남편의 사랑으로 어려움을 극복한다. 두 사람에게는 아이가 없다는 아픔이 있지만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맛있는 요리를 준비하는 줄리아와 그런 줄리아를 더욱 따듯한 마음으로 보듬는 남편의 모습은 다채로운 레시피보다 더 빛을 발한다.

  한편 2천년대 뉴욕에 살고 있는 줄리 파웰(에이미 아담스 분)은 작가가 되려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매일매일 따분한 공무원으로서의 일상을 보내고 있다. 온종일 상담 전화를 받다가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와 다양한 요리를 만드는 것이 그녀의 유일한 낙이다. 줄리의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던 남편은 블로그를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하고 그녀는 줄리아 차일드의 요리 레시피를 1년 동안 마스터하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줄리의 줄리아 레시피 탐구 블로그는 점점 더 유명해지고 드디어 인터뷰와 출판 제안까지, 작가의 꿈을 이루게 된다.

  나중에 줄리는 줄리아가 자신의 블로그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좌절하기도 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줄리아와 줄리아의 레시피를 좋아하고 도전한 덕분에 스스로 행복해졌음을 깨닫게 된다. 가재를 죽이지 못해 안달복달하고, 낮잠 때문에 스튜를 바짝 태우고, 블로그 때문에 직장 상사에게 잔소리를 듣고, 남편과 다투고... 늘 성공적인 날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요리에 대한 열정이 그녀의 일상을 구원한 것은 틀림없다.

  어느 날 앨범을 펼쳐보았는데 한쪽 귀퉁이에 ‘오늘은 깐따삐야가 밤도 태우고 고구마도 태웠다’라는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남편의 글씨체였고 구체적인 날짜까지 적혀 있었다. 짓궂은 사람, 웃음이 났다. 물 조절과 불 조절, 시간 조절까지 무참히 실패했던 작년 겨울의 일이었다. 냄비 하나가 아작 났고 우리는 예상치도 못한 군밤과 군고구마를 먹어야 했다. 지금은 물론 예상한 것들을 먹을 수 있을 만큼은 능숙해졌지만 그리 될 때까지 망가진 그릇하며 낭비한 양념들을 차마 헤아리기 힘들다.

  영화를 보는 동안 요리는 그처럼 누구나의 일상이고, 추억이고, 사랑이구나 하는 생각. 예전에 부모님께 혼이 나거나 오빠와 다투었을 때도 엄마가 밥 먹어라, 하는 말 한 마디에 밥상 앞에 마주 앉아 수저질을 하다보면 서운했던 감정이 따끈한 된장찌개 국물에, 고소한 꽁치 구이 한 점에, 사르르 녹는 듯한 기분을 느낄 때가 있었다. 잘 익은 김치 한 포기를 들고 와 계란과 바꾸어 가시던 아주머니도 있었고 아빠가 미꾸라지라도 많이 잡는 날이면 동네 아저씨들이 몰려와 생선국수 잔치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제는 급식이 보편화되었지만 가끔씩 보온도시락 속 반찬들, 김치볶음과 소시지 부침, 따끈따끈했던 물통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온정으로 가득한 음식의 효능이다.

  소박한 냄비 하나에 일상과 추억과 사랑을 담아내는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메릴 스트립의 미소는 오래도록 여운이 길고 에이미 아담스의 미소는 기분 좋은 날, 무언가 소중한 것을 깨달은 날, 나의 그것과도 닮아 있었다. 쌀쌀해진 날씨, 잔잔하고 훈훈한 사랑의 레시피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권하고픈 맛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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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12-16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깐따삐야님.
이 글의 느낌이 무척 좋아요. 바람이 매섭게 부는 날 따뜻한 집에서 온 식구들이 둘러앉아 호호 거리며 군고구마를 까먹는 그런 느낌의 글이랄까요. 맨 마지막에 깐따삐야님이 쓰신 글을 그대로 인용해서 이 페이퍼를 얘기해보자면,

쌀쌀해진 날씨, 잔잔하고 훈훈한 사랑의 글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권하고픈 맛있는 페이퍼다.

이쯤 되겠네요. 정말 잘 읽고 추천 누르고 갑니다. 깐따삐야님의 글은 언제나 소박하고 정겨워 좋았지만, 오늘 이 글은 특히 더해요.

Mephistopheles 2009-12-16 16:39   좋아요 0 | URL
더불어..짐승같은 식욕...포함해야 합니다..=3=3=3=3

깐따삐야 2009-12-17 15:18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마음에 드셨다니 기분 좋습니다. 소재에 비해 다양한 음식들이 나오지 않아서 조금 의아했는데 그래도 즐겁게 본 영화였어요.^^

이제 '메피님 같은 식욕'을 관용어로 사용해야겠어요.ㅋㅋ

비로그인 2009-12-16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미 아담스, 30대가 넘어서도 저렇게 천진무구한 얼굴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자연의 신비여요.(영화 `다우트'를 보면 더 확실해 진답니다)

깐따삐야 2009-12-17 15:21   좋아요 0 | URL
그쵸? 확 들어오는 미모는 아니지만 의외로 다양한 장르에 쓸 수 있는 얼굴일지도 모르겠어요. '다우트'는 못 본 영화인데 이번 기회에 챙겨봐야겠네요.

레와 2009-12-16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제가 살고 있는 곳에서는 안해요. 안해요..

엉...엉....ㅠ_ㅠ

깐따삐야 2009-12-17 15:22   좋아요 0 | URL
3D 이런 것과는 별로 상관없는 영화이니 나중에 dvd로 보셔도 될 것 같아요.^^

Mephistopheles 2009-12-16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영화를 보고 메릴 스트립이라는 배우는 레전드 라고 그냥 단정지어버렸어요...ㅋㅋ
천진난만한 얼굴로 따진다면 예스맨에 나왔던 '조이 데샤넬'이란 배우도 눈여겨보세요.
굉장히 사랑스런 배우라는..(500일 썸머 개봉예정되어 있는 것 같던데..)

깐따삐야 2009-12-17 15:26   좋아요 0 | URL
정말 그래요. 더 이상의 수식이 필요 없을 정도로.
처음 듣는 이름인데요. 한번 찾아보겠어요.^^

hnine 2009-12-16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줄리아 차일드라는 실제 유명한 요리사가 있는데 (파파 할머니였으니 지금도 살아계신지는 모르겠어요.) 혹시 이 영화의 줄리아 차일드가 그 할머니일까요?
아, 위의 포스터를 자세히 보니 '실화'라네요. 맞나봐요!

깐따삐야 2009-12-17 15:49   좋아요 0 | URL
네. 줄리아 차일드도 줄리 파웰도 모두 실존인물이라고 하네요. 줄리 파웰은 지금도 살아있구요.^^

비연 2009-12-16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보고 싶은 영화 중 하나에요^^

깐따삐야 2009-12-17 15:51   좋아요 0 | URL
두 배우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런 영화입니다. 보세요.^^
 

  요즘 커피를 안마시니까 금단현상이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 건지 커피향이 나는 빵이 먹고 싶어진다. 로티보이의 번이라든가, 파리바게트의 모카빵이라든지. 어제는 집 앞 제과점이 카페 형식으로 리모델링을 한 후 개업행사가 있었다. 얼마 이상을 구매하면 딸기잼을 하나 얹어주고 원두커피를 제공하는 정도. 잼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런데 홍보 도우미 언니가 나눠주는 원두커피는 남편 것을 빼앗아 한 모금 마셔봤더니 너무 밍밍했다.

  지난 여름, 연수를 받는 동안 구내식당 점심이 질릴 즈음이면 밖에 나가서 밥을 먹곤 했는데 달라진 대학가 풍경 중에 유독 눈에 띄는 것은 다양한 커피전문점들이었다. 요즘 대학생들이 지갑이 두둑해져서인지, 씀씀이가 변해서인지, 한 끼 밥값에 버금가는 커피를 파는 숍들이 성업 중이었다. 5천원짜리 돈가스를 시키자 둘이 먹고도 남을 만큼 넓적한 돈가스가 나왔는데 바로 옆 커피숍에선 내가 좋아하는 모카라떼를 그 이상의 가격에 팔고 있었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커피전문점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애매모호한 분위기의 커피숍 겸 호프집이 많았다. 그런 집은 커피도 맛없고 안주도 맛없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가격대가 만만한 것도 아니어서 자주 다니지는 않았다. 결국 그런대로 괜찮은 커피숍이 발견되면 너나없이 그곳으로 몰려들곤 했다. 한 공간의 창가 자리에서 과 선배가 소개팅을 하고 있고 맞은편에서는 동기 녀석이 헤어질 여자 친구를 기다리는 식이었다.

  어느 날 오후, 중문 근처에 갔는데 -왜 갔는지는 지금은 생각이 안 나지만- 동아리 동기 J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이렇게 밖에서 만난 것도 반가운데 이야기나 할래, 하더니 나를 그런대로 괜찮았던 그 커피숍에 데려갔다. 그녀는 마침 비어 있던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 나는 아마도 모카라떼를 시켰을 것이고 그녀는 무슨 허브티 종류를 마셨던 것 같다.

  J는 불문과에 다니고 있었는데 항상 자기가 왜 불문학을 하는지는 자기도 모른다고 투덜거리곤 했었다. 원래 국문학을 선택했지만 1학년 때 학점이 안 좋아서 밀렸다는 말도 했다. 학부제가 생긴 후로 그런 일은 잦은 편이었다. 그리고는 거의 머슴처럼 부려먹던 남자 친구 이야기, 특징적인 동아리 선배들에 대한 소감 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당시 그녀와 그녀의 남자 친구는 좀 유명했다. 한낮에 J가 술에 취해 울고 있고 그런 J를 달래서 부축하는 남자 친구의 모습을 두 번인가 봤다. J는 자기가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그 애 밖에는 자기를 받아줄 사람이 없다고 했다. 또한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알면서도 동아리 밖에는 그런 자신을 받아줄 곳이 없다고도 했다.

 나는 네가 술을 잘 안 마시는 게 불만이야.

  대화 중간에 그녀가 툭, 그런 말을 던졌다. 별로 신선한 지적도 아니었지만 환한 대낮에, 그런대로 괜찮은 커피숍에 앉아서, 약속도 없이 만난 동기한테 갑자기 그런 말을 듣는 것이 좀 이상했다. 나는 머쓱해져서, 그게 그렇게 불만이었어? 하고 물었다.

 너는 술을 안 마셔도 솔직할 수 있어서 참 좋겠다.

  J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J의 눈빛은 비꼼도, 호기심도 아닌 부러움이었다. 내가 그랬던가. 무지해서 용맹한 무용담으로 점철된 시절이었으니 그리 보였을 수 있겠다. 하지만 오히려 나는 J의 솔직함과 자유분방함에 기함하고 있던 터였다. 나는 그냥 까불었던 것이지만 J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흠모하던 선배를 계속 흠모했고 그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그 나이에 그런 마음은 숨기려고 해도 잘 숨겨지지도 않지만. 그런 J를 바라보는 선배의 눈빛은 차갑고 매정했다. 우리에게는 장난기 가득 머금은 따듯한 눈빛을 보내면서도 유독 J에게만은 그러지 않았다. 내가 동아리에 드나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선배는 그녀에게 완전히 벽을 보였다. J는 사람들이 다 보는 잡기장에 악필로 심란한 마음을 써내려가기도 했다. 술을 마시면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보였고 그녀가 쓴 시에는 복잡한 가족사와 외롭고 성긴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처음에 그녀는 나를 경계하는 것처럼 보였고 나는 술도 잘 마시고 시도 잘 쓰는 그녀에게 호기심이 있었다.

  나는 좀 비겁하게도 스스로의 솔직함에 자신이 없던 터라 그 날 J와의 대화는 그냥 겉돌다 끝나 버렸던 것 같다. 이후에 그녀는 동방에 한 동안 뜸했다, 다시 나오기를 반복하더니 갑자기 휴학을 해버렸다. 나중에 한 선배로부터 다단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 같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러더니 결혼을 했다고 하고 아기 엄마가 되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아무도 J의 소식을 확실히 아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그 후로 가끔씩 묵은 잡기장의 삐뚤빼뚤한 활자 속에서, 호평을 받았던 연작시 속에서, J를 떠올리곤 했다.

  중문의 그 커피숍은 사라진지 오래다. 그 자리에는 편의점이 들어섰고 맞은편에는 커피 전문점이 생겼다. 당시 그 순간을 돌이켜 보면 J는 그 날 어쩌면 나랑 술을 마시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이라면 내가 먼저 스타우트를 주문해 버릴 텐데. 당시의 나는 -지금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지만- 타인이 보내는 큐 사인에 그다지 민첩하지 못했다. 이따금 내 이름을 반갑게 부르며 커피숍으로 이끌던 J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든다. 지금도 이 도시에 살고 있다면 언젠가 한번은 마주치지 않을까, 서로 많이 변해서 못 알아볼 수도 있을까, 아쉬운 마음. 지금이라면 내가 먼저 이름을 부르고, 안부를 묻고, 커피를 살 수도 있을 텐데.

  혼자서, 친구들과, 지인들과, 때로는 낯선 사람과 다양한 이름의 커피숍에서 참으로 숱한 커피를 마셨지만 J와의 짧은 추억은 그 가운데서도 아주 검고 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모락모락 커피 향 같은 이야기꽃을 피워 봐도 좋았으련만 커피 향을 즐기거나, 상대의 심중을 헤아리거나 하기에는 내가 너무 어렸던 것 같다. 커피 한 잔에 인연의 타이밍이 적절히 녹아들면 그보다 더 맛난 커피가 어디 있을까. 그런 아쉬움, 그리움이 드는 커피의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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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IN 2009-12-12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구야~ 제목을 White coffee 로 읽고서, '응? 웬 하얀 커피?' 했다는. -_-
오늘은 오랜만에 믹스커피를 먹었는데요, 음, 전에 먹던 그 맛이 아니라서 조금
실망했었답니다. (자판기 커피라서 그런가.킁)
누구나 커피를 주제로 글을 쓰라면 다들 제각각 이야기가 많을지도..하고
깐따님의 글을 읽으면서 생각했습니다.^^

깐따삐야 2009-12-14 12:08   좋아요 0 | URL
white coffee라... 괜찮겠는데요? ^^
자판기마다 커피 맛이 조금씩 다르죠. 저 학교 다닐 때는 도서관 휴게실 자판기 커피가 가장 맛있었고 학생회관 자판기 커피가 가장 별로였던 것 같아요.
커피에 얽힌 사연이 이 세상엔 얼마나 많을까요!

레와 2009-12-14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학교 다닐때는 커피숍 보다는 단대 자판기 커피를 주로 마셨어요. 꼭 연못 근처에서..ㅋ 같은 학교안이라도 각 단대마다 커피 맛은 제각각..

싸고 양도 많은 인문대 커피가 그리운데요..^^

깐따삐야 2009-12-16 14:05   좋아요 0 | URL
그때는 단대 자판기 커피 가격이 150원~200원이었는데 여름에 연수 가서 보니 더 이상 인기가 없는 것 같고 그 옆에 덩치 큰 다른 자판기가 들어와 있더라구요. 그 안에는 컵이나 팩으로 제조된 온갖 커피 종류가 와글와글!

그러게요. 싸고 양도 많고 어느 날은 쓸쓸히 위안이 되기도 하는 그 커피가 그립군요.^^
 

  목소리가 착 가라앉은 것이 많이 피곤해 보였다. 통화 중에 오늘 당장 만나자고 했고 그러자고 했다. 뭔가 갑갑한 모양이었다. 지하주차장에 삐딱하게 주차를 해놓고 무얼 먹을까, 고민하다가 근처 고기 집으로 향했다. 사람들 왁자지껄한 식당도 오랜만이었다. 옆에는 통신회사 직원들이 단체회식을 하고 있었고 칸막이 하나로 그들을 방음한 채 주문을 했다. 갈매기살이 지방이 적대. 그래? 그거 시키자. 아가씨나 임신부나 먹으면서 몸매 걱정하는 건 매한가지다.

  올해로 2년차 교사, 대학 동기이자 십년지기 친구인 E는 대학 새내기 시절부터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성숙한 분위기를 하고 있어서 처음엔 선배인 줄 알고 인사까지 할 뻔 했는데 알고 보니 나보다 생일도 늦은 동갑내기였다는. 친구가 될 인연이었는지 흡사 은하철도 999의 철이 같던 나와 통하는 데가 많았다. 지난 십년 동안 우리에게도 사소한 오해와 공백기가 있었지만 오래 갈 인연이었는지 지금껏 이런저런 속내를 많이 털어놓는 사이다. 

  고기를 먹고 나서 근처 도넛 가게로 자리를 이동했다. 나는 망고주스, E는 카페라떼. 고기에 밥까지 먹고 도넛까지 먹었다. 그녀는 스트레스성 폭식으로 고민하면서도 노란봉지 인스턴트커피와 종종 시켜먹는 피자를 끊기가 힘들다고 했다. 커피는 정말 그렇다. 수업 마치고 나와서 목이 아플 때, 스트레스와 공복감을 해소시키는 데에는 뜨겁고 진한 인스턴트커피만한 게 없다.

  늘 하는 고민이지만 직장생활에서는 역시 인간관계가 가장 속을 썩인다. E는 올해 담임이 없다보니 아이들과의 관계는 오히려 더 좋아졌단다. 그런데 소위 말하는 ‘요즘 젊은 사람’ 축에 끼어버려 마음고생을 하는 것 같았다. 더욱이 또래 동료 중에 남달리 싹싹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매번 비교되기 십상이다. 어느 날, 옆자리 선생님이 E에게 그러더란다. 일 년 넘게 생활해도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르겠다고, 나도 선생님처럼 다른 사람 신경 안 쓰고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E 자신은 그저 말수가 적고 자기 일 이외의 일에 참견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뿐인데 동료나 선배가 보기에는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도 학기 초에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새 학교로 와서 적응하기도 바쁜데 일거리까지 많다보니 내심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중이었다. 그때 문을 열고 먼저 들어오려고 했다는 이유로 고령의 선생님께 호되게 야단을 맞은 적이 있었다. 어르신이 나가시는데 양보는커녕 먼저 문을 밀고 들어왔다는 이유였다. 처음에 잠깐 보자고 하실 때는 왜 그런지 영문을 몰랐는데 이유를 듣고 보니 맥이 빠졌다. 컨디션이 엉망이었고 이래저래 분주한 아침부터 그런 일로 훈계를 듣는 일이 마뜩치 않았다. 결국 공손히 듣고 있지를 못하고 반발을 했다.

  저는 바쁜 아침에 문 맞은편에 누가 서 있는지 미리 예상하거나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선생님이 양보해 주실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결국 간단한 잔소리 몇 마디로 그칠 수도 있는 일을 크게 벌인 셈이었다. 갑자기 흥분한 선생님은 몇 호봉이냐, 몇 살이냐 부터 시작해서 우리 부모님까지 욕 먹일 셈이었다. 아이들을 지도할 때도 누구한테 그렇게 배웠느냐, 집에서 그렇게 가르쳤느냐, 는 말은 반드시 피하곤 하는데 그런 말을 내가 듣고 있자니 팽- 돌더라는. 여러 가지 대꾸를 했지만 내 말의 핵심은, 나이를 허투루 먹었냐는 반응이었고 선생님은 거의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이런 일은 항상 뒷수습이 문제인데 사태를 아신 교장 선생님은 그냥 웃어 넘기셨지만 그 선생님과 비슷한 또래의 선생님들이 나를 좋게 볼 리 만무했다. 급식실에 내려갔더니 벌써 대놓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라는. 그러던 말던 밥을 푹푹 퍼 넣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과를 마쳤다. 그래도 어르신한테 그런 식으로 반응한 것은 분명 내 잘못이었다. 학년부장 선생님이 나를 부르셔서 젊은 사람이니 먼저 사과드리는 게 좋겠다고 하셨고 당일에는 차마 내키지 않았지만 다음 날 아침, 학교에 가자마자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다.

  이후 선생님은 웬일인지 눈에 띌 정도로 나와 우리 반 아이들을 잘 챙겨주셨다. 나 역시 전보다 더욱 공손하게 행동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선생님께 혼이 난 젊은 선생님들이 한 둘이 아니었던 모양인데 나처럼 눈에 뵈는 거 없이 행동한 경우는 없었는가 보다. 선생님으로서는 아마도 일생의 봉변이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날, 나도 사고 칠 컨디션이었고 선생님도 망신살 뻗친 날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가 친구인지는 몰라도 E도 감정 처리가 영 서툴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공문처리를 하다보면 인상이 저절로 일그러지고 쌍욕이 마구 튀어나온다고. 자기는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일하는데 한가하게 관찰만 하다가 한 마디씩 하는 사람들 보면 울화가 치민단다. 회식자리에서라도 마음 편하게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싶은데 그조차도 허락이 안 될 때는 정말 참기 힘들단다. 원래 피로에 장사 없는 법이다. 심신이 극도의 스트레스로 예민해지다보면 사소한 말 한 마디도 귀에 걸리기 마련이다. 더욱이 나나 E처럼 남의 일에 무심한 타입들은 더욱 그렇다.

  이럴 때 연애라도 하면 좋으련만 어째 남자를 만나도 별 느낌이 없단다. 소개팅도 지겹고 만나러 가는 일도 귀찮다고. 남들은 뭐든지 잘하는 것 같은데 나는 왜 이렇게 뭐든지 잘 못하고 느린 건지 모르겠어. 주차할 때부터 툴툴거리더니 어느 새 열패감 덩어리다. 남보다 좀 더 일찍 이룬다고 마냥 좋을 것 같으냐. 그 사람들은 더, 더, 더 하고 있을 거다. 주변에서 그런 모습을 많이 보았다. 부족할 게 없어 보이는데 행복하지는 않다. 부족한 것 천지인데 자족하며 즐거워한다. 언젠가부터 그렇듯 소박한 마음가짐보다 위대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도 그러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동갑인데도 불구하고 벌써 능글능글해진 친구도 있는데 E는 새내기 시절이나 지금이나 참 그대로다. 나는 좀 어정쩡한 상태여서 무엇이 더 낫다고 말할 수도 없는 처지. 별로 노련하지도, 세련되지도 못한 것으로 치자면 E 쪽에 가까울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의 대화는 뚜렷한 결론 없이 맺을 때가 많다. 누구 한쪽에서 단호하게 이렇게 해봐, 하면 좋을 텐데 스스로에게도 확신이 없다보니 나도 그래! 라는 공감에서 그칠 때가 더 많다.

  E를 보내고 집에 들어오니 남편이 앉아 있다 반짝 일어난다. 아직도 이런 풍경이 낯설다. 웬 남자? 아주 잠깐, 그런 느낌이 들 정도이니. 인생을 늘 소풍 온 것처럼 사는 그에 비하면 나는 인생을 늘 부담스럽게 사는 것 같다. 어차피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마찬가지인 것을. 어깨에 힘만 주면 대수냐고. 당장 절실해 보이는 고민이나 문제들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 경험을 많이 했다. E가 자신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시간 또한 나중에 웃기 위한 당연한 과정일 지도 모른다. 다만 스스로에 대해 낙관하는 자세는 필요한 것 같다. 그것이 지나쳐 게으름이나 뻔뻔함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주의하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조금 늦게, 더디 깨친다고 해서 자학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아직 때 묻지 않아 서투른 E, 어여 자신감을 되찾기를. 우리는 서로의 능수능란하지 못함 때문에 불편하기도 하지만 그래서 서로를 좋아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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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9-12-06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E라는 분은 답답한 심정을 들어 줄 임신이라 불편한 몸을 이끌고 같이 얼굴보고 대화를 해줄 수 있는 깐따삐야님 같은 분이 곁에 있어 행복할꺼에요..

웽스북스 2009-12-06 21:30   좋아요 0 | URL
메피님 댓글에 추천을 날리고 싶은 웬디씨 ㅋㅋ

깐따삐야 2009-12-07 10:21   좋아요 0 | URL
E한테도 그렇게 말해줄래요. 넌 내가 있어 행복한 거냐(?) ㅋㅋ

웽스북스 2009-12-06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삐야님. 요즘 깐따삐야님 글이 많아서 괜시리 좋아요. 헤헷. 글로 태교를?
E랑 저랑 비슷한 점이 좀 있는 것 같아요. 저도, 무슨 생각 하면서 사는지 모르겠다는 말 주변 사람들한테 좀 듣는 스타일이라서 말이죠.

참, 예정일은 언제에요?

깐따삐야 2009-12-07 10:27   좋아요 0 | URL
여기 와서 좋은 글 읽고, 웬디양님 사진도 보고, 나도 뭔가 끄적이고. 이만한 태교도 없죠.^^
E나 웬디양님이나 제가 보기에는 오히려 생각이 너무 많은 타입인 것 같은데 혼자 생각이 많다보면 남들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는가 봐요.

예정일은 확실치 않다고들 하던데 내년 4월 초순 쯤이에요.

레와 2009-12-07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깐따삐야님 글이 많아서 좋아요!^^


얼굴에 그때그때의 감정이 바로 들어나는 저 같은 사람은 때론 무심함이 필요한데
타고난 성격은 참.. 안 변해요.
딴엔 노력했는데 '넌 하나도 안변했어!' 이런말 들으면 또 좌절하고..^^;

살면 살 수록 어려워요. 으흐~

깐따삐야 2009-12-08 12:15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요. 감정 덩어리죠.ㅋ 그저 주변에 무심한 편일 뿐. 제 일에는 도끼눈 뜨고 아우성입니다.
정말 살면 살수록 어렵죠? ^^
 

  쉬게 되면서 자주 보는 프로그램이 있다. EBS에서 하는 ‘60분 부모’라는 프로그램이다. 아침 먹고 집안일 좀 하고나서 10시쯤 되면 한가해지는데 그때부터 약 한 시간가량 진행된다. 처음엔 개그맨 이혁재가 MC인 것이 의외라고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차분하고 재미있게 진행을 잘한다.

  영유아부터 어린이까지, 식이장애부터 학습장애 등등 다루는 소재도 폭넓다. 예비 엄마가 아니라 교사의 입장에서 시청을 해도 건질 것이 많은 방송이다. 그다지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그렇기에 더욱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은, 아이의 잘못은 대개 부모의 양육태도에서 비롯된다는 것. 어떤 엄마들은 아이한테 너무 미안해서 방송 중에 펑펑 울기도 한다. 얼마 전 방송에서 할머니 손에 키워진 아이가 퇴근한 엄마에게, “엄마, 빨리 가. 집에 오지 마.” 하는 것을 보고 괜히 뜨끔했었다. 하루 종일 안 보이다가 저녁때만 되면 나타나서 이거 하지 마, 저거 하지 마, 하는 엄마를 반길 리가 있겠는가. 머잖아 내 모습인 것 같아 한숨만 나왔다.

  매주 목요일에는 부부심리탐구 코너가 진행된다. SOS에 출연할 정도로 심각한 수위가 아니라 적어도 겉만 봐선 멀쩡한 부부들이 출연한다. 대개 신청자는 아내이고 처음에 남편들은 아내의 고민을 이해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 또한 그다지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그래서 더욱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부부 문제는 서로를 너무 모르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것. 연애기간이 길고 짧고 와는 무관하다. 전문가들은 관찰카메라를 통해 평소 사는 모습을 꼼꼼히 관찰하고 상담을 통해 부부의 어린 시절 내상까지 끄집어낸다.

  상담 과정을 보고 있자면 부부란 것이 참말이지, 배우자의 과거까지 뭉뚱그려서 짊어지고 가야 하는 힘든 인연이구나 싶어진다. 인디언들이 친구를 가리켜 ‘내 슬픔을 자기 등에 지고 가는 자’라고 한다더니 부부도 별반 다르지 않더라는. 출연자들은 그 동안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보지 못하거나 미처 눈치 채지 못했던 배우자의 내밀한 아픔, 극복되지 못한 열등감, 삶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지켜보며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그렇듯 같은 인간으로서의 공감과 연민으로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올케언니가 오빠에게 연민을 좀 가져봤으면, 할 때가 있었다. 오빠가 남자고, 남편이라고 해서 의지만 할 것이 아니라 크게 품어줄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었다. 언니의 불만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오빠를 지극히 잘 아는 시누이로서의 욕심이었다. 나도 누군가의 올케가 되고부터는 생각이 달라졌을까. 그렇지 않다. 동생으로서 오빠를 안쓰러워하는 시누이의 한 마디 안에 한때 내가 느꼈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삶에 대한 태도를 배우고 아는 것과 실제로 삶을 사는 것은 역시 별개의 문제인 것 같다.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 중에 ‘사사롭지만 도움이 되는 일(a small, good thing)’이라는 단편이 있다. 상심한 부부에게 제과점 주인이 줄 수 있는 것이란 갓 구워낸 따끈한 빵 뿐이지만 부부는 더할 나위 없는 위안을 얻는다. 주인의 말처럼 ‘그렇게 고급스런 빵은 아니지만’ 슬픔으로 축축해진 가슴을 다시 덥힐 수 있는 빵. 학교에서, 책 속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고급스런 것들을 많이 듣고 배웠지만 그것들이 누군가 꼭 필요할 때 내미는 빵 한 덩어리만 할까 싶다.  

  ‘60분 부모’에서 전문가들이 내리는 처방도 결코 거창하지 않다. 사사건건 말이 많은 부모에게는 불필요한 말을 줄이세요, 정서불안의 아이를 염려하는 부모에게는 주변 환경부터 깨끗이 정돈하세요, 서로에 대해 아쉽고 서운한 점을 토로하는 부부들에게는 알고 보면 각자가 다 힘든 겁니다... TV라는 매체가 시청하는 그 순간만으로 그칠 때가 많긴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프로그램은 자기 몫의 삶과 역할부터 돌아보고 반성하는, 기초적인 삶의 태도를 날마다 되새길 수 있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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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12-04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외로 타인의 필터 하나를 거치고 나면, 뿌옇던 것이 명확할 때가 있지요. 저도 종종 즐겨봤더랬습니다.

깐따삐야 2009-12-06 19:44   좋아요 0 | URL
맞아요. 사는 모양은 다들 비슷비슷한데 의외의 힌트를 얻기도 합니다. Jude님도 애청자셨군요.^^

Mephistopheles 2009-12-04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흐흐..뭔가 말하고 싶은데 그냥 꼭꼭 참고 있을래요...^^

깐따삐야 2009-12-06 19:46   좋아요 0 | URL
으흐흐...?
이런 걸 보고 달으나마나, 달지 않느니만도 못한 댓글이라고 하던가요.-_-

Mephistopheles 2009-12-06 19:50   좋아요 0 | URL
사실 별거 아니에요. 그냥 우리가 익히 아는 사실도 다른 사람의 시선에선 또 다르고 새롭게 보여지기도 한다잖아요. 그나저나 임신 중 날고기.그러니까 회...말고 간장게장이나 그런 것도 피해야 하는 건가요???

깐따삐야 2009-12-07 10:30   좋아요 0 | URL
아니 머 그 말씀을 그렇게 꼭꼭 참으시기까지 하셨어요. ㅋㅋ
스트레스 받으면 안 된다고 먹고 싶은 건 다 먹는다는 임신부들도 있다던데 저는 안 좋다는 건 그래도 피하는 쪽이에요. 근데 왜요? 간장게장 사주시게요? 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