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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마시고 우리가 하는 말
한유석 지음 / 달 / 2015년 4월
평점 :
술 마시고 우리가 하는 말 _ 한유석 / 달 출판사
<술 마시고 우리가 하는 말> 이처럼 매력적이고 눈길을 끄는 제목이 있을까?
내가 좋아하는 것이 두 가지나 들어가 있다. 술, 그리고 말. 술을 좋아한다. 그리고 잘 마시기도 한다.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듣는 것도 좋아한다. 읽기 전부터 꽤나 기대했던, 그런 책이다.
<맹물처럼 입안에 빙빙 돌지 않고, 술술 넘어가서 술이라고 한다.>
첫 문장이다. 술술 넘어가서 술이란다. 술은 술술 넘어가는데 이 책은 생각보다 술술 읽히질 않는다.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침을 꼴깍 삼킨다. 지금 책을 읽는 건지, 술을 마시는 건지 알 길이 없다.
함께 술 한 잔 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그리고 함께 나누는 대화 속에서 깊은 생각에 빠지게 했다.
그래서 더 천천히, 음미하듯이 읽어나갔다.
<하루의 끝, 한번에 와인 한 병을 비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보통 세 번에 나누어 마시는데
좋아지든 나빠지든 마실 때마다 맛의 변화가 좋다. 보관의 문제도 있겠지만
같은 와인이 공기와 만나 다른 표정을 짓는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같은 사람이지만 이십대, 삼십대, 사십대 각각 다른 표정을 짓는다. P.30>
이십대의 나는 쌀쌀맞고 신경질적인 표정이었다면
삼십대의 나는 조금은 부드러워지고 유해진 표정이 되어가는 것 같다.
사십대에는 좀 더 따뜻하고 여유로운 표정을 짓는 사람이고 싶다.
<서른을 넘게 되면 자신의 삶이 지겨워지게 된다. 취미생활,
또는 일상의 일탈로 자신을 위로하는 것이 약발이 안 먹히게 되는 순간이 종종 온다.
“벗어나고 싶어, 벗어나고 싶어. 무거워, 무거워.”를 온종일 되뇌게 되는 날이 생긴다.
그럴 때는 스스로를 가볍게 할 술로 임시처방을 하고, 만반의 준비를 해 좀 길게 떠나자.
길게 떠난 자는 많은 것을 잊고 가벼워져 올 것이다.
일상에 매몰되지 않고 살아가게 하는 비밀 몇 가지를 챙겨 올 것이다.
일상이 지겨울 때, 몰래 펴볼 수 있는 마음의 기억을 많이 챙겨 올 것이다.
술과 여행은 지평선을 닮아가는 일상에 지지 않는 힘이 되었고,
지치지 않고 오래 회사를 다닐 수 있었던 비밀이자 비법이다. p.49>
긴 여행을 할 수 없으니 임시처방으로 참 오래 버텼다.
즐거울 때도, 행복할 대도, 슬플 때도, 우울할 때도 늘 술이 함께였다.
그 시간이 좋았지만 그래도 마음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훌쩍, 갑자기 떠나기도 했었다.
삶이라는 게 바로 그 기억을 붙들고 임시처방으로 달래며 그렇게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음에 떠날 때는 아일랜드에 가고 싶다.
원없이 기네스를 마시러 갔다던 작가처럼 원없이 기네스를 마시고
데미안 라이스의 목소리에 취해 아일랜드의 하늘을 보고 싶다.
<순간이 아닌 내내 설레게 하는 것은 같은 궤도를 도는 사람이다. 자라난 환경이나 일의 같음이 아니다. 삶의 방향과 희로애락의 같음, 지구와 달처럼 궤도를 공유하는 연결이다. p.95>
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술 마시고 우리 하는 말이다.
그러니 술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야기겠지.
함께 술을 마신다는 것. 그리고 그 자리가 좋다는 것. 나는 그게 참 좋다.
우리의 궤도 안에 술이 있었으면 좋겠다.
술을 음미하고 즐길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좋다.
술 생각나게 하는 책일줄만 알았지.
이렇게 가슴 두근거리게 할 줄은 몰랐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
혼자 있는 시간.
함께 하는 시간.
서러운 마음.
사랑하는 사람들
잊혀진 사람들.
술을 들여다 봤더니 거기에 지난 날의 내가 있었다.
행복했던 나도, 상처받은 나도, 절망 속의 나도, 즐거웠던 나도 모두 보인다.
그리고 앞으로 나도 그리게 된다.
술자리의 내다버리고 싶은 기억도 많지만, 땅거미가 지는 밤, 그래도 술그늘을 찾는 것은 음식그늘, 사람그늘이 함께 빚어내는 아름다운 순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p.308
수많은 술이 나오지만 그 중에서 마시고 싶었던 것은
가본 적 없는 숲속으로 데려간다는 잔향이 긴 ‘쥬브레 샹베르땡 비에이유 비네’다.
몸이 오래오래 그 향을 기억한다는 와인. 그 향을 가득 머금고 취하고 싶은 밤이다.
음식그늘과 사람그늘이 함께 빚어내는 아름다운 순간을 놓치지 말고 마음에 담아두고 싶다.
오래도록,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리
순간이 아닌 내내 설레게 하는 것은 같은 궤도를 도는 사람이다. 자라난 환경이나 일의 같음이 아니다. 삶의 방향과 희로애락의 같음, 지구와 달처럼 궤도를 공유하는 연결이다. p.95
자극적이지 않고 담백하면서 편안하게, 사람 속으로 땅속으로 그렇게 스미고 싶다. p.105
사랑은 술을 함께 마시고, 등을 가늠하고, 긴 겨울을 이겨낼 스웨터를 짜는 일이다. 그렇게 등을 껴안는 일이다. p.116
우리는 떠돌 수밖에 없어 어른이 된다. 떠나온 그 순간, 그곳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어 노래가 된다. 때로는 돌아갈 수 없어 쩔쩔매고, 돌아갈 수 없어 목이 멘다. 그러나 돌아갈 수 없어 새로운 길이 된다. p.116
사람 사이에는 거리가 필요하다. 사람 사이에도 숨을 고를 필요가 있기에. 더 오래 만나기 위해. 더 소중해지기 위해. p.119
나이가 든다는 것은 체감하는 세월의 속도가 빨라지는 것이지만, 대신 음미할 수 있는 느린 걸음을 선물해준다. 그리고 음미는 대부분 섬세하거나, 진하거나, 깊거나, 잠잠해서 근사하다. p.214
술은 인생을 거스르는 마법이다. 술로 지금의 내가 이전으로 돌아가 그때의 나를 만나고 위로한다. 돌아오지 않을 시간으로 거슬러가, 그 시절에 쓰러져 있는 나를 일으켜 세운다. 문 밖의 나를 문 안으로 들인다. 서러워 울었던 눈물 자국을 닦아주고, 서성이다 지쳐버린 발을 씻어준다. 마음의 중심이 커지면 제대로 길을 가는 것이고, 중심이 작아지면 틀린 길을 가는 것이라 일러준다. 지는 일에 축 처진 뒷모습에 "지면 또 어때"라고 토닥인다. 이전의 고단한 내가 웃어준다. 지금의 내가 웃어준다. 말간 아침이 기다리고 있다. p.379
옷도, 음식도, 사람도 복원의 시간이 필요하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만큼 기다려주면 오래갈 수 있다. 존재하는 것은 각자로 존재하게 해야 한다. 가지려 하기에, 집착하기에, 편애하기에 괴롭다. 남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니라 나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가지지 않아도 때가 되어 함께이면 된다. 함께이지 못해도 잊지 않으면 된다. 마음을 주었다면, 소중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해야 한다. 어쩌면 그것이 세상에서 온전히, 행복하게, 사람과 만나는 길이다. p.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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