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빌라 - La Villa de Paris
윤진서 지음 / 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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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기까지 꽤 오래 걸렸다. 마음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갈팡질팡, 어질어질 도무지 알 길이 없어 어느 한 곳에 집중하지 못했다. 게다가 파리 빌라는 이별한 여자가 떠돌아다는 이야기 아니던가. 내 마음도 흐릿한데 책 속 그녀의 이야기도 흐릿하다. 선명하지 않고 뿌옇다. 소설인 듯 에세이인듯, 윤진서인 듯 아닌 듯한 모호한 느낌이다.

 

 

 

사랑, 그것을 온전히 소유하고 싶은 시절이 나에겐 있었다. 내 마음은 늘 사랑하는 사람을 향하고 있었지만 끝내 그 마음은 모래사장에 가닿지 못하는 파도처럼 부서지고 흩어질 뿐이었다. 그럴 때면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여행을 떠났다. 수많은 길에 나와 내 감정을 쏟아부으면 그 길들은 얼마간 나의 공간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난 더 사랑할 수 있는 것들을 찾기 위해 더 멀리로 걸음을 내디뎠다. p.192

 

 

 

‘나’ 뿐만이 아니라 누구나 온전히 소유하고 싶어한 적이 있다. 완전한 사랑을 꿈꾸기도 하고. 그러나 세상에 완전한 소유, 사랑이 있을까. 완벽하게 이별이 없는 사랑이 존재할까. 나는 사랑을 두려워하고 불신하는 편이다. 하지만 사랑에 대한 불신이 있음에도 사랑을 믿고 싶어지기도 하니까, 그러니까 어쩌면 완전한 사랑을 꿈꾸는지도 모르겠다.

 

 

 

마음이 부서지고 흩어지고 나면 여행을 떠났다는 여자. 나는 그 여자와 함께 여행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아니 여자의 여행을 몰래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여자의 얼굴이 윤진서와 겹쳐지기도 하지만 처음 그 흐릿한 느낌처럼 흐린 시선을 본다. 사랑에 빠졌고 사랑을 잃은 여자. 워낙 다양하게 돌아다니다보니(남프랑스, 아테네, 인도, 미국 등) 현실감이 좀 없기도 하다. 어디가 과거이고 어디가 현재인지 잘 구분이 가지 않는다.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도 감이 오지 않지만(이름이니, 직업이니 뭐 그런 게 대수겠냐만은) 인생의 축제같은 시간을 함께 보낸 남자와 헤어진, 그리고 떠난 여자.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를 떼어내려 거리로 나왔다. 거리는 비어 있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버릴 수 없었다. p.9

 

 

 

그의 손길에 길들여지고 있던 나는 그가 쓰다듬을 때면 점점 강아지가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가끔은 그가 없으면 정처 없이 떠도는 길 잃은 강아지가 되어 비를 맞은 채 밤길을 돌아다니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p.57

 

 

 

그걸로 됐다고, 이제는 정말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화장실에서 그의 말라 있는 칫솔을 발견했을 때 나는 무너졌다. 벌써 그리움을 깨달은 것이다. p.60

 

 

 

단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가 한때, 내가 가질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욕망을 건드렸다는 것이다. 식욕과 성욕은 물론이고 평범한 안정 속에서 행복하게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엄마가 되는 욕망까지도. 이전엔 가져본 적 없지만 누구나 가질 법한 욕망을.

나는 이토록 시시한 여자였다. p.62

 

 

 

그를 떼어내지도 못하고, 칫솔만 보고도 그리워져 무너지고, 자신의 욕망을 보고 시시하다고 느끼는 여자의 모습이 콕콕 가슴에 박힌다. 여행을 다니면서 이별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여자는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랑에 대해,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생각한다. 아테네의 늙은 바텐더와, 신비로운 숲 속의 정원사와, 노벨상을 탔다는 노신사와 같은 사람들과 함께한 시간은 참 특별하게 느껴졌다. 소설 속 특수한 상황인거라고 생각할수도 있지만 결국 인간은 그렇게 인간에게 위로받고 변하고 나아간다고 믿고 싶다.

 

 

 

정체성에 대한 불안감은 결국 인간 모두의 숙제인가봐요. p.53

 

 

 

나는 한때 진짜 삶이 오기를 간절히 기도한 적이 있었다. 되고 싶었으나 되지 못했던 여인들, 혹은 되기 싫었으나 내 안에 자리잡았던 여인들, 그들은 밤이면 한꺼번에 다가와 입을 벌려 욕망을 드러내고는 아침이면 다시 내 안의 깊숙한 곳 어딘가로 도망쳤다. 되고 싶었으나 되지 못했던 여인들의 수는 많아져갔고 나 자신 또한 점점 그녀들을 갈망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p.82

 

 

문득 이런 생각이 찾아들었다. 어쩌면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무도 찾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나를 아는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러면 이전의 내 모습을 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p.111

 

 

 

외로움, 그것은 생각지 못한 순간에 찾아오는, 어쩌면 사랑보다 더 불시에 찾아오는 감정인지도 모른다. p.155

 

 

 

나는 외롭지 않다

그렇게 말한 순간부터 다시 말로 꺼내기가 무서울 정도로 외로움은 줄곧 내 곁에 머무르며 한시도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p.157

 

 

 

마음에 드는 문장이 꽤 많았다. 마음 속에 숨겨져 있던 것들이 끌려나오기도 했다. 나는 내 모습이 싫어서 그 모습을 버리고 싶었던 적이 있다. 변하지 않는 나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내 안의 욕망과 가면 쓴 모습을 숨기기도 하고 드러내기도 하면서 어떤 게 나인지조차 모르겠는 날들이 있다. 외롭지 않다고 했지만 외로움에 걸려 넘어져 함께 하고 있는 내 모습과 겹쳐서 서글퍼지기도 했다. 나는 여자와 함께 여행을 한 것만 같다.

 

 

 

 

모두가 현재의 역사를 만들고 있다. 모든 과거는 미래를 낳는다. 오늘의 나는 사라지고 내일은 또다른 내가 태어난다. 매일매일이 조금 다른 ‘나’일 것이다. 내일이 온다. p.136

 

 

 

매일매일이 조금 다른 ‘나’일 거라는 여자의 말에 내가 위로를 받는다. 내일이 온다고 나 스스로에게 작게 말한다.

 

 

 

 

나는 아직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바랄 뿐이다. 부디 나의 삶에 사랑이 넘치기를. p.193

 

 

 

여자의 삶에 사랑이 넘치게 된다면 나도 조금은 기대를 해보고 싶다. 넘치는 것까지 바라지 않는다. 조금은 사랑을 따뜻하게 감싸안고 싶다고.

 

 

 

 

 

 

 

우리는 잠시 혹은 영원 사이의 시간 동안 얼마나 지속될지 모르는 불안한, 사랑이라는 이름의 감정을 느끼기 위하여 여러 상태로 자신을 몰아간다. 어쩌면 그 속에서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내몰기도 할 것이다. 그래야만 사랑이라는 확신이 더 강렬하게 들어서일 것이며 어쩌면 사랑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p.28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찾아온다는 인생의 축제 같은 시간이 나에게 찾아왔다. 그와 나, 우리의 소박한 축제가 벌어진 것이다. p.40


사람은 타인을 만날 때 언제나 가면을 쓰며 그들 또한 오직 가면을 쓴 타인만을 보게 된다. 만약 그들이 가면을 벗는다 해도 진정한 자신을 볼 수가 없다. 첫 번째 가면을 벗는다 해도 두 번째 가면이, 두 번째 가면을 벗더라도 세 번째 가면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종종 당신의 가면을 당신으로 알게 되고 당신도 그들의 가면을 그들로 알게 된다. 사랑과 혐오의 대상은 아마 가면일지 모른다. 진정한 얼굴은 고독에 빠져 있다. 사람은 이 고독에서 도망치려 또다시 가면을 만든다. _ <장미의장례행렬> 인용 p.52

나라는 인간은 언제고 상황에 만족할 줄 아는 작은 미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왜 혼자일 땐 고맙게 지나갔던 일들이 둘이 되면 서운함으로 전락하고 마는 걸까. 사랑하는 이에게 왜 나 자신도 버거워하는 일들을 시키려 드는 것일까. p.74


과거의 기억들이 몰려올 때 나는 모든 것이 나의 착각이었다고 생각했다. 내가 믿었던 것들은 애초에 그곳에 없었다고.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믿고 있었다고. p.104


사랑은 대체 무엇일까. 들었고, 보았다. 나는 분명 그것을 만져보았다. 그러나 사라졌다. 그렇게 사라진 감정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분명히 내게 존재했던 그것들은. p.105



원래부터 나란 인간은 척을 잘한다. 초연한 척, 관심 없는 척, 괜찮은 척. 사실 그렇게 척을 하다보면 스스로도 그렇게 믿게 되는 순간이 온다. 그렇게 믿고 살아가는 사람에겐 눈물이 날 일이라곤 별로 없었다. (...) 그동안 내가 알아왔던 척을 잘하는 여자는 사라지고 최소한의 슬픔도 숨길 수 없는 여자가 되어버렸다. p.133


굉장히 소중한 것을 발견했을 때에는 어쩔 수 없이 슬픈 느낌이 든다.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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