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파란여우 > 오월의 숲길 모퉁이를 지나며

저 길모퉁이를 돌아서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지금은 안정적인 초록의 자태를 드리우고 있는 연두시절의 추억이란 제 보금자리를 부지런히 가꾸고 있던 박새와 등에 점박이 무늬를 지닌 무당벌레와 길고 섬세한 더듬이를 지닌 사슴벌레의 길목이었을 터. 살면서 내가 지나쳤던 모퉁이 길목에는 어떤 이름들이 기다려왔던가.
때로는 절망과 한숨과 기쁨과 작은 행복과 눈물이라는 살아있음의 축복과 아픔의 이름들.

사실, 비스듬히 돌아선 길 모퉁이를 지나치면 어두운 숲길에서 두려움과 떨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조심스럽게 내딛는 발목을 비추던 숲속의 햇살, 먹고 새끼치고 기도하는 목숨들이 이 곳 어딘가에서 낯 선 방문객의 어설픈 발자국을 지켜보고 있겠다.

정상으로 가는 길. 아, 눈이 부시다. 초록의 유혹은 대책없이 대성가곡 합창을 부르고 지금 내게 있어 최고의 농염미로 여린 내 손목을 잡아 이끄는 너는 대체 누구냐.

조팝나무 한 그루 내 작은 키에 맞추어 거기에 서 있다. 지난 해 나를 설레게 만들었던 너. 거칠고 투박하고 더렵혀진 내 손으로는 너의 순결한 살갗을 만질 수가 없어서....
사랑스러운 것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너의 이름은 그리운 첫사랑

세상에서 아름답고 그리운 것이어디 첫사랑 하나 뿐이랴. 비록 환희의 꽃은 피우지 못할망정 작은 잎파리 하나 피워내는 일도 충분한 축복이 될 수 있음은 대지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또 다른 성서.
명감 나무 잎사귀에 바람아 부디 순탄하게 지나가기를.

하늘. 너무나 벅차고 고결한 이름.
태초에 땅이 있었고 하늘이 있어 오늘은 감사의 기도를 올리며
거짓으로부터 벗어나 오직 참된 자기로부터 스며나온 이 한때의 육신
너를 닮은 아해를 낳고 싶다.

사심없이 땅과 교접하여 생명을 잉태하는 일을 하늘은 동의한다. 착한 토양과 지렁이와 나뭇잎의 산화로 얻은 생명이란 어쩌면 가장 숭고하게 정분이 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길 모퉁이를 돌아서면 정분이 나서 이미 성숙한 또 하나의 화소(話素)가 기다리고 있구나...이것은 '할'이다.

나는 이제 하하 소리를 내어 웃는다. 초록을 만나는 일, 대지와 교접하여 생명을 잉태하는 일도 사실은 별 거 아닐지도 모른다고 시건방을 떤다. 불현듯 나뭇잎사귀 동시에 부르르 떨고 눈을 뜰 수 가 없다. 이 아찔한 현기증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나를 덮쳐오는 저것의 눈부심에 정신을 잃고...

추락.......
오만한 내 발목을 무참하게 일시적으로 꺽고 육신을 뒹굴게 만든 낭떠러지. 너무나 짧은 순간에 바닥으로 굴렀던 저 가혹한 언덕 길. 세상에 길은 왜 이리 다양하게 나 있던가. 예상밖의 충격은 상처를 주고 기운을 소멸시킨다. 낭떠러지 절벽 위의 태양아, 쓰러진 내 발목에 다시 햇살을 다오. 부디.....

제비꽃
주저 앉은 자리에서 만난 너. 무심코 네가 거기에 있었음이 지금 내게는 고맙다.
너의 이름은 눈물.
너 하나 만나기 위하여 길 모퉁이를 지나쳐 이곳까지 찾아 온 나를 내치지 말아 주기를. 그 기나긴 고단한 발걸음의 수고를 너는 알고 있지? 그런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