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코스텔로 창비세계문학 90
J. M. 쿳시 지음, 김성호 옮김 / 창비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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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는 1928년생으로 1995년 현재 예순여섯, 곧 예순일곱 살이 되는 오스트레일리아 작가다. 멜버른에서 낳고 지금도 그곳에서 살고 있지만 1951년부터 63년까지 잉글랜드와 프랑스에서 살았으니 사실상 범 유럽, 아니, 범 백인 코스모폴리탄이라고 봐도 좋다. 물론 진보적 작가라서 인종에 관한 차별의식은 없는 사람이라도, 유럽 전역에 살았던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 일당의 만행과, 공장식 축산의 고통을 견디다가 짧은 생을 전기충격으로 마감하는 짐승들의 비참한 축생은 대단히 슬퍼할지언정, 불과 자신의 몇 대 선조밖에 되지 않는 유럽에서 유입된 백인 종자들이 테즈메이니아 섬 원주민을 완전히 멸종시킨 것에는 한 번도 관심을 쏟아본 적이 없다. 나중에 누군가가 말을 해주어 본인도 깨닫고 왜 그랬을까, 잠시 생각해보기도 하지만 당연히 그때 뿐이다. 작가로 지내는 동안 장편소설 아홉 편, 시집 두 권, 그리고 새들의 삶에 관한 에세이 집과 기타 잡문을 썼는데, 이 가운데 젊은 시절의 노작인 <에클스가의 집>이 대박을 쳐, 독자들은 아직도 엘리자베스 코스텔로 하면 <에클스가의 집>을 먼저 언급할 지경이다. <에클스가의 집>의 주인공이 누구인가 하면,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 <율리시즈>에 출연하는 두 명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레오폴드 블룸의 아내인 메리언 블룸이다. 이 작품이 얼마나 명성을 떨쳤는지 평론가들은 지금도 <에클스가의 집>이 엘리자베스 코스텔로가 죽은 후에도 오래오래 살아남는 것은 물론이고 어쩌면 <율리시즈>만큼 오래 생명력을 이어갈 것이라고 평할 정도이다.

  두 번 결혼했고 결혼마다 한 명씩, 자식 둘을 두었다. 딸은 남 프랑스에서 미술관련 일을 하고, 아들은 매사추세츠에 있는 한 대학에서 물리학과 천문학을 강의하다가 현재는 휴직중이다. 1995년 봄에 코스텔로 여사는 펜실베이니아의 윌리엄스타운에 가야 한다. 엘토나 대학에서 수여하는 스토우Stowe상의 수상자로 선정이 되어 상금인 수표 5만 달러를 받는 대가로 수락 연설을 하기 위해. 그래서 이번 여행엔 아들 존이 펜실베이니아의 호텔에서 엄마를 기다리다가 다시 출국할 때까지 옆에서 보살피기로 했다. 공항에서 호텔까지는 스토우 상과 관련한 허드레 일을 전담하는 테리사가 해주기로 했다.

  아들 존. 만만하지 않다. 어머니라 해도 흔히 생각하는 어머니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작가 어머니는 글을 쓸 때 자신의 서재 문을 여는 어떤 경우도 용납하지 않았다. 자기를 밖에 던져놓고 문을 닫아 걸어버린 엄마에 대한 응답 가운데 하나의 방법으로 존은 서른세 살이 될 때까지 어머니가 쓴 작품은 물론이고 매스컴에 기고한 어떤 문장도 읽어보지 않았다. 자신의 성취를 위해 단단한 벽을 쌓은 어머니에게 자신 역시 벽을 쌓아 답례를 했겠지. 그는 어머니의 수상연설이 끝난 다음날 아침 호텔에서 출국하는 어머니를 기다리다 만난 라디오 방송국 여성 진행자이자 여성주의 작가 수전 K. 모비어스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제 어머니는 남자였던 적이 있어요. 개였던 적도 있지요.”

  워낙 독특한 폭력을 묘사하는 데 도가 튼 쿳시라서 위 인용을 읽고 이게 무슨 수작인지 걱정하지 마시라. 정말 어느 날 일어나보니 생식기가 변했다거나 개로 종변하는 변용 현상이 일어났던 적이 있는 게 아니라 자신한테 남성적인 폭력성을 구사한 적도 있고, 개 같은… (생략)… 말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존도 나이가 들고, 결혼도 했으며 두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어서, 예전에 쌓아 올린 벽도 많이 허문 상태이다. 그러나 1995년 봄의 펜실베이니아에서의 존은 비록 사랑하는 아들이기에 어머니의 곁을 지키고 있을 것이지만 엄마를 향해 거슬리는 말을 삼가지 않는 조련사가 되리라고 마음먹은 터였다. 그는 여전히 어머니를 알지 못한다. 이제 와서 새삼스레 이해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는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온갖 찬사를 남발하는 군중들이 굳이 자신에게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고 싶다.

  “당신들은 이 여자가 무녀라도 되는 양 그녀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는데, 이 여자는 사십년 전, 날이면 날마다 햄프스테드의 원룸에 처박혀 온자 울고, 저녁이면 안개 자욱한 거리로 기어나가 피시 앤드 칩스를 사서 끼니를 해결하고, 입은 옷 그대로 잠에 빠져들던 바로 그 여자입니다. 나중에는 머리카락을 사방으로 휘날리며 아이들에게 ‘니들 때문에 내가 죽지, 죽어! 니들이 내 몸을 갈기갈기 찢어놓는구나!’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멜버른의 집을 뒤집어놓던 바로 그 여자지요.”

  하지만 아들 존은 어머니를 증오하지 않는다. 그게 쉽게 되나, 어디.

  책에서는 모자간, 모녀간 불화가 문제로 부상하지 않는다. 한 시절에 그랬던 적이 있다, 수준이지. 문제가 터지고, 도무지 수습되지 않는 생각의 차이를 만드는 건 작가 엘리자베스 코스텔로가 자신의 육성으로 말한 스토우 상 수락 연설에서 시작한다. 신자유주의와 여성문제, 원주민 권리 보장과 오늘날 오스트레일리아의 문학 같은 문제를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오리무중의 연설. 심사위원장을 맡은 맥길대학 교수 고든 휘틀리는 스토우 상이 엘리자베스 차지가 된 이유는 1995년이 오스트랄라시아의 해로 선포되었기 때문이라는 악담을 날려버린다.


  엘리자베스는 채식주의자다. 원래부터 그렇지는 않았는데 위에서 잠깐 말한 공장식 축산의 현실을 직접 목격하고 다만 인간에게 고기를 제공하기 위해 고통스럽게 낳고 죽어가는 동물의 섭취를 포기한 거였다. 자신이 동물을 먹지 않겠으면 그냥 먹지 않으면 되는 거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다른 사람도 육식을 금지하기를 바라 2년 후 다시 방문한 미국의 애플턴 대학 연설에서 공장식 축산을, 어처구니없게도, 트레블린카, 나치에 의한 유대인 처형수용소에 비교하는 우를 범하고 만다. 유대인의 생각으로 돼지는 더러운 동물이다. 독일 사람한테 얻어맞고 싶으면 그 사람 얼굴 앞에서 Sie sind ein Schwein 너는 돼지야, 라고만 하면 된다. 전세계에서 돼지고기를 가장 많이 먹는 나라 사람들도 그렇다. 이 일로 백인 지역의 많은 지식인들은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를 정상이 아닌 작가로 생각하기 시작했고, 소수의 네오나치들과 낭만적 채식주의자들은 열광했다.

  연설 후에 교수 부부들과 육식 금지에 관한 담론이 벌어진다. 이 자리 말석에 엘리자베스의 아들이 미국에서 교수를 하고 있다는 정보를 들은 주최측이 급하게 참석시킨 아들 부부도 끼어 있었다. 그러다 어처구니없게도 토론은 엘리자베스와 며느리 노마 사이에서 가장 활발하게 벌어진다.

  “우리가 돼지는 먹고 개는 안 먹는다면 그건 그저 우리가 양육되는 방식인 거예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으세요, 엘리자베스? 그건 그저 우리 습속의 일부라고요.”

  시어머니는 교수(부부)들이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대답한다. “역겨움이라는 게 있어요. 우리는 신들을 제거했는지는 모르지만 역겨움을 제거하지는 못했는데, 역겨움은 일종의 종교적인 공포예요.”

  이게 무슨 집안 망신인가. 시어머니 엘리자베스라는 이름 대신에 우리나라 대통령 배우자의 이름을 넣어도 비슷할 거 같다. 조금 다르지만 우리나라에서도 21세기 먹거리 십자군이 쳐들어왔다. 국회라는 공권력은 조만간에 완전히 사라질 개고기 식용을 아예 금지시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금지권은 언제나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할 권력이거늘 오만한 국회는 이를 무시했다. 자칭 진보도, 보수도. 며느리 노마는 시어머니에게 다시 덤벼든다.


  “(고기를 먹지 않는) 그 절제의 힘에 의거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우월한 존재, 예컨대 사회 내의 우월한 카스트로 분류한다 이거예요. 브라만처럼.”


  채식주의자라고 고기 먹는 사람들에게 괜히 우월감 갖지 말라는 뜻이다. 나도 개고기 안 먹었다. 그러나 먹는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생각하지 않았다. 개고기 식용 금지를 주장하는 인간들의 90퍼센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자기도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웃기는 사람들. 대신 당신들은 개고기 먹는 사람을 열등하게 봤잖아, 아냐? 3년이 흐른 후 우리나라에서 개고기를 먹으면 야만인이 아니라 범죄자가 되는 거다. 국민을 범죄자로 만들만큼 개고기 먹는 게 그렇게 세상에 대고 쪽팔렸니? 아주 먹지 못하게 되기 전에, 먹기만 해도 범죄자가 되어 여차하면 족보에 빨간 줄 올라가기 전에, 나도 한 번, 적어도 한 번, 몇 십 년 만에 먹어보고 여전히 맛있으면 수십번이라도 먹겠다. 이거 진심이다. “금지권력”을 조심하고 삼가하지 않는 너희들, 우스운 종자들, 너희는 개만도 못하다는 거, 이건 몰랐지?


  육십대 후반의 엘리자베스 코스텔로. 세상에 많은 것을 겪었겠지. 이 책을 출간할 당시의 J.M. 쿳시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일년 동안 거주했고 예순세 살이었으며 다음 해에 동물보호단체 “보이스리스”에 가입한다. 그리고 3년 후인 2006년엔 오스트레일리아 시민권을 딴다. 여러가지로 엘리자베스와 쿳시가 비슷한 면이 많다. 이제 노년의 초입에 들어 작품이 변하기 시작해서, 쿳시를 읽을 때마다 재미는 있으나 불편한 감정이 드는 것이 많이 누그러졌다. 아프리카의 지역적 특색 때문에 숨기지 못했던 야만성이 사라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이 책에서도 거구의 남성에 의한 여성 폭행 장면도 나오긴 하지만 그게 작품의 한 전환점으로 기능하지는 못한다. 무엇보다 작품의 방법이 달라졌다.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는 주인공의 연설 내용과 모임의 참석자 사이의 대담 같은 것들로 만들어져 전에 내가 읽은 몇 안 되는 쿳시와는 완전히 결을 달리한다. 그래서 많은 부분, 마치 에세이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그만큼 쿳시는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더욱 직설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야기의 오류나 과장, 잘못은 전부 엘리자베스가 한 짓으로 몰아버리고. 거참 똑똑한 작가네. 말은 자기가 하고, 책임은 주인공한테 뒤집어 씌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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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2-19 08: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추락>인가요? 거기서 동물의 안락사와 관련된 내용에서, 이 작가의 동물에 대한 남다른 생각을 읽었던 것 같아요.

Falstaff 2024-02-19 12:18   좋아요 1 | URL
넵. 말씀을 들으니까 기억이 날 듯합니다. <추락>하면 성희롱, 성폭력 이런 것들이 주로 떠올라서 말입죠. 그런 것들이 과해서 쿳시가 저한테는 좀 불편한 작가였거든요.
 
무덤없는 주검 서문문고 104
사르트르 / 서문당 / 199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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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맞이 도서관 나흘 방학 동안 2kg 분 거 반성하는 의미에서 20세기 잘난 척 대마왕 사르트르를 읽는 고행을 감행. 근데 이게 웬일이니?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을 수가! 천생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였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아, 씨, 재수없는 사르트르, 천재가 맞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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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02-12 17: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천재는 누구도 이길수가 없어요 ㅠㅠ
그럼 결국 2kg는 계속 가지고 있으신 거예요?

Falstaff 2024-02-12 17:18   좋아요 1 | URL
맞아요, 천재들하고는 아예 상종을 하지 말아야... ㅋㅋㅋ
2kg 얼른 빼야지요. 어떻게 달고 다니겠습니까.

반유행열반인 2024-02-17 1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감기 심하게 앓느라 잃은 체중이 그리로 갔었군요!!! 잘 먹고 잘 놀고 평안하신 것으로 알겄습니다 ㅋㅋㅋㅋ

Falstaff 2024-02-17 12:11   좋아요 1 | URL
이제 거의 빠졌습니다. 열반인 님도 정상 회복하셨으리라 믿습니다! ㅎㅎㅎ

그레이스 2024-02-19 0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르트르 <구토> 읽고 저도 그 생각했습니다.
폴스타프님 절판 책들 오래된 좋은 책들 발굴 중이신가요?^^
 
낙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1
압둘라자크 구르나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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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부 아프리카의 내륙지방에 사는 소년 유수프 이야기. 이슬람도 에덴과 노아의 방주와 기타 기독교의 오랜 약속 또는 계약인, 구약과 비슷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소년 유수프. 이 꼬마의 이름을 기독교 식으로 쓰면 “요셉”이다. 나 이거 몰랐다. 알았다면 이 책을 읽을까 말까 꽤 고민하다가 읽더라도 아주 나중에 읽지 않았을까 싶다. 요셉과 관련해서는 토마스 만이 쓴 걸작 한 편으로도 내게는 너무 충분했으니까.

  앗! 이거 괜히 말했다. 소년 유수프가 소년 요셉하고 같은 이름이라면, 벌써 눈치 채실 분은 앞으로 벌어질 유수프의 팔자 사나운 앞날을 다 그릴 수 있을 듯하니. 요셉은 야곱이 낳은 많고 많은 아들 가운데 열한 번째 아들이다.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엄마 닮아 잘 생긴데다가 야곱이 그렇게 아끼던 둘째 아내 라헬이 직접 낳은 아이라서 남들 눈에도 유별나게 총애하는지라 형제들의 시기를 많이 받았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형들 나이가 많아지고 야곱이 늙어가니까 열 명의 형들이 야곱을 마른 우물에 내던져 버린다. 지나가던 상인이 야곱을 구해 그를 데리고 애굽으로 가 큰 관리에게 노예로 팔아버렸지만, 잘 생긴 외모가 어디 가? 관리의 아내가 그만 요셉에게 반해 유혹하다가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허위로 요셉을 고발하여 유치장으로 보내버린다. 여기까지만 알면 된다. 우리의 주인공 유수프가 족장의 아들 요셉만큼 성령 가득한 이스라엘 소년도 아니고 게다가 아마 케냐 몸바사에서 내륙으로 쑥 들어간 곳에 사는 가난한 여관집 흑인 소년에 불과하니 요셉만큼 휘황찬란한 기록은 남기지 못한다.


  그럼 유수프의 아버지는 여구부? 야곱은 아내를 얻기 위해 무려 14년 동안 외삼촌이자 장인이 될 라반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는 반면, 유수프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아버지는 유서 깊은 아랍계 킬와 가문의 아가씨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야반도주해 버렸다. 아버지는 이 집안을 위해 토기 물단지를 탁송해주는 대리인에 불과했기 때문에 사위가 되는 건 언감생심이었으니 사랑하는 이와 함께 살려면 이렇게라도 할 수밖에. 이후 인도인 소유의 상아 창고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다가 일을 똑소리 나게 잘 해서 사환으로, 임시직 상인으로 승진 비슷하게 했으며 이동안 두 아들을 낳아, 향수병에 시달리는 아내를 위해 두 손자를 앞세우고 8년 만에 칼와로 갔다가 처자식을 빼앗기고 홀로 도망쳐 나왔던 적이 있다. 물론 천사하고 씨름을 하다 엉치뼈를 부러뜨리지도 않았다.

  유수프의 친엄마는 타이타 오지의 시골 산지 부족의 딸이지만 아버지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다면 지참금으로 콩 두 자루와 염소 다섯 마리만 주면 그냥 등 떠밀어 시집보내는 지역이라고 했다. 유수프의 아버지는 그동안 여러 사업을 하다가 거참 이상도 하지, 하는 일마다 어떻게 그렇게 말짱 다 말아먹는지. 나중에 머리를 굴려보면 바닷가에서 크게 장사를 하는 아지즈 아저씨의 대리점 비슷하게 상품을 보관도 하고 빚도 얻어서 사업도 했지만 그리 성공을 보지는 못했다.  이 가족이 사는 곳이 소도시 ‘카와’라는 곳인데, 독일인들이 식민지를 만들기 위해 내륙의 고지대로 가는 철도를 건설하기 위해 전진기지로 사용하면서 신흥도시로 부상한 곳이다. 그러나 정작 철도가 놓이자 이제 카와는 목재와 물을 얻기 위한 중간계류지에 불과하여 이동인구가 없어지는 바람에 도시 전체가 지옥으로 바뀌어 버렸다.

  유수프의 아버지가 한 사업은 호텔업. 말이 좋아 호텔이지 이층 객실에 침대 네 개를 놓고, 아래층에선 밥을 파는 식당을 운영할 뿐이었다. 당연히 이 호텔이라는 곳도 카와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손님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 지옥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상인 아지즈 아저씨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원래 산골 카와에 아지즈 아저씨가 뜨면 종종북, 탐부리, 뿔피리, 시와 같은 지역 전통악기를 두드리고 크게 부는 악대를 선두로 이어서 경비원과 짐꾼들이 줄을 잇고 제일 나중에야 아지즈 아저씨와 저승사자같이 생긴 음냐파라(경비대장) 모하메드 압달라가 도착했다. 아지즈 아저씨가 올 때마다 아버지와의 일을 끝내고 유수프의 집에서 점심식사를 마친 후 슬쩍 유수프에게 10안나짜리 동전을 쥐어 주었다. 그런데 이 날은 아지즈 아저씨 혼자 와서 점심을 먹었다. 없는 살림에 엄마가 얼마나 정성을 들여 음식을 했는지 읽으면서도 군침을 꿀떡 삼켰으니, 닭고기와 저민 양고기로 만든 두 종류의 카레, 건포도와 아몬드가 점점이 박히고 버터를 발라 반짝이는 최고의 페샤와르 쌀밥, 천으로 덮인 바구니에 가득 담긴 향긋하고 불룩한 번, 만다지와 마함리, 코코넛 소스로 버무린 시금치, 물콩 한 접시, 잔불에 구운 말린 생선. 아쉽다, 쐬주 한 병이 빠졌다.

  식사가 끝나고 아지즈 아저씨는 위층 객실에 올라가고, 아버지는 방에서 시에스타를 즐긴 후에, 아빠가 먼저 깼다. 그리고는 하나밖에 안 남은 아들 유수프를 불러 놓고 하는 말이, 이제 너도 열두 살이니 제법 컸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렸다. 그리하여 넓은 세상에 나가 뜻을 펼치는 것이 당연, 오늘 당장 아지즈 아저씨와 함께 가서 세상 사는 법과 장사하는 법을 배워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기를 게을리하지 말지어다. 그리고 무려 기차를 타고, 해변, 바닷가까지 가는 일정이라는 데도 유수프는 이상하게 즐겁거나 기쁘지가 않았다. 엄마가 벌써 작은 보따리를 준비했으니 속에는 반바지 두 벌, 지난 이드 축제 때 사서 아직 새것인 칸주(무릎까지 내려오는 무슬림 옷), 셔츠 하나, 쿠란 한 권, 그리고 어머니가 쥐어 준 낡은 묵주. 이게 다다. 그리하여 유수프는 아지즈 아저씨와 함께 기차를 타고 (뭄바사로 여겨지는) 해변가 도시에 도착했다. 어머니의 묵주는 기차간에 떨어뜨려 영영 잃어버리고. 상단에 팔린 요셉이 생각난다고? 뭐, 나도 그랬다.


  아지즈 아저씨는 이제 주인님이라는 뜻의 “사이드”라고 불렸다. 유수프는 아저씨가 입에 붙어 도저히 사이드라고 말이 나오지 않았지만 그것 때문에 소년이 일해야 하는 상점의 열일곱 정도 먹은 청년 점원 칼릴에게 구박도 받았다. 칼릴은 이복 여동생과 함께 이 집에 들어와 상점과 아지즈 아저씨 부재 시의 장부 관리까지 다 도맡아 하는 일꾼이었다. 칼릴은 잘 생긴 유수프를 동생이라 칭하며 여러가지로 그를 돌보게 된다. 딱 하나 아쉬운 건 워낙 말이 많은 수다꾼이라는 점. 칼릴은 냉정하게 현실을 읽어준다. “유수프, 네가 여기 있는 것은 네 아버지가 사이드에게 빚을 졌기 때문이야. 네 아버지는 형편없는 사업가가 틀림없어.” 칼릴의 아버지도 사업을 하다 사이드 아지즈에게 많은 빚을 지고 죽어버렸다. 그래서 칼릴과 여동생을 (법적으로 노예제도가 없어졌으니) 담보로 데려와 일을 시키고 있었으며, 여동생은 후에 아지즈의 두번째 아내가 된다.

  아지즈는 그냥 평범한 똘똘한 청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못생겼지만 엄청나게 부자인 과부가 수많은 청혼자를 물리치고 아지즈에게 결혼하자고 중매를 넣었다. 과부는 못생긴 것도 모자라 미치기까지 했다는 풍문이 돌았다. 인간의 손에 다친 상처가 아니라 뭔가 나쁜 영이 손을 댄 것이라 과부는 아지즈와 결혼한 후에도 사람들 눈으로부터 숨어서 지냈으며, 아지즈는 단박에 큰 부자가 되어 큰 상단을 꾸려 내륙으로 카라반을 시작했다. 원래 과부는 상선을 거느리고 무역을 하던 집이었지만 아지즈는 바다 대신 시야를 내륙으로 돌린 것인데, 이게 잘한 일인지 아닌지는 직접 읽어보셔도 모른다.

  우리의 유수프는 해가 갈수록 점점 빼어난 미남으로 다시 태어난다. 설마 야곱의 아들 요셉만 하겠는가만 하여간 근동의 최고 미남으로 꼽아도 군소리가 없을 정도였으며, 실제로 나이 든 처녀 한 명이 노골적으로 남편을 삼겠다고 껄떡대기 시작했다. 이럴 즈음 유수프는 마님의 예전 노예 출신 정원사 음지 함다니가 가꾼 정원에 흠뻑 빠져 살았고, 벽 뒤에서 유수프를 본 마님은 다 큰 청년이 자신의 정원을 들락거린다며 불평을 했으며, 아지즈 아저씨는 다음 해 상단이 출발할 때 유수프를 데려 가, 산악지대에서 자신의 대리점과 창고를 하고 있는, 아이고 이름도 길다, 알함둘릴라히 라빌 알라민의 집에 유수프만 달랑 남긴 채 카라반을 계속한다. 유수프는 졸지에 사로잡힌 신세가 되어 버렸다.


  이후 유수프는 더 멋있는 청년으로 자라 다시 해변가 저택의 상점으로 돌아오고, 이번엔 진짜 상단을 따라 험하고 고단한 카라반에 동행하며, 금단의 정원에서 정원사 일을 하기 시작하는데, 세상의 모든 불행은 가장 행복할 때 들이닥치는 법이라서, 천상의 낙원처럼 보이는 금단의 정원, 이곳이 낙원이 아닌 이유는, 차마 말할 수 없음이 안타깝다. 직접 확인하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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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2-12 08: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저도 읽어서 아는 내용인데(성경 포함)^^
폴스타프님 글은 너무 재미있네요~

Falstaff 2024-02-12 08:57   좋아요 1 | URL
ㅎㅎㅎ 애초에 재미있게 읽어주시려 각오하고 읽어주시니 그렇지 별 거 있겠습니까. 그저 고마울 따름입지요. ^^

moonnight 2024-02-12 1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흥미진진한데 끊어버리시네요ㅠㅠ직접 확인해야겠습니다^^; Falstaff님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Falstaff 2024-02-12 11:18   좋아요 2 | URL
이 책 재미있습니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단발머리 2024-02-12 15: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렇게 끝내시면 어떡합니까, Falstaff님!!
˝애굽으로 가 큰 관리에게 노예로 팔아버렸지만, 잘 생긴 외모가 어디 가?˝ 에서 빵 터졌습니다. 저도 성경에 나오는 여러 인물 중에서 요셉을 참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요셉이 잘생겨서가...... 아니라 똑똑해서입니다, 라고 말하는 건 거짓말이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얼마나 잘생겼는지 궁금해하며 조심스레 차은우 떠올려봅니다.
저도 읽어보려고요. 차은우 떠올리며 읽는 유수프 이야기 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4-02-12 16:26   좋아요 1 | URL
ㅋㅋㅋ 실존은 의식보다 강합니다! 차은우가 누구여? 마누라한테 물어봤다가 오지게 얻어 터지고, 그래 내가 뭐랬어, 책 좀 그만 파고 테레비 좀 보라 그랬지, 검색해보니까 예쁘장하게 생겼네요. ㅋㅋㅋㅋ
꿈 해몽한 것도 쓰려다가 아무래도 길어질까 싶어 관뒀습지요, 유수프 역시 그만큼 똑똑하지는 않고요. 그만큼이라니, 발꿈치에도 미치지 못하니까요.
재미있습니다. 즐기시기 바랍니다. ^^
 
인터내셔널의 밤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박솔뫼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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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이 세 권째 박솔뫼이니 우리 작가 중에선 그래도 많이 읽은 편이다. 이이가 이제 우리 나이로 마흔, 현 행정부의 나이 계산으로 하면 서른 여덟이나 아홉인데 자신의 독특한 문장을 챙긴 것 같다. 무미하고 건조한 문장. 어느 작품을 읽어도 조금은 서걱거리는 느낌. 독자에 따라 이렇게 작은 석영 알갱이가 섞여 있는 듯한 이야기법을 좋아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할 터이지만 나는 좋다.

  이 소설은 출판사 아르테의 한국소설선 ‘작은 책’이란 타이틀로 찍었다. 작가 노트까지 합해서 128쪽. 근데 책이 내 손바닥 보다 작다. 한 페이지에 열일곱 줄과 글자가 원고지 기준으로 28자 정도 들어간다. 그러니 책을 읽으면 페이지가 쉴 새 없이 휙휙 넘어간다. 자, 진심으로 말하는데, 처음엔 페이지 넘기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이야기의 연결을 놓치고 말았을 정도다. 분량은 단편소설 한 편. 7쪽에서 시작해 119쪽까지, 그러니까 113쪽이다. 이 책을 개가실에서 봤으니까 읽었지, 만일 시내 서점에서 봤다면 그냥 그 자리에서 뚝뚝 읽어 치웠을 거 같다. 분량이 괘씸해 절대로 안 샀을 듯. 그러나 오해하지 마시라. 이야기는 재미있으니.


  홍한솔. 젠더가 별로 의미 없는 주인공이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2로 시작하니 생물학적으로는 여성이지만 가슴절제술을 해 편평한 가슴을 가진, 겉 모습만 보면 남자에 가까운 사람이다. 한솔의 친구 가운데 ‘영우’라고 있다. 영우는 몸과 마음이 다 여자다. 대학 동창으로 연극에 매력을 느껴 졸업 후에 연극을 더 하기 위해 예술대학에 응시했지만 두 번 떨어진 경험이 있다. 가끔 중요하지 않은 배역으로 연극에 출연하기도 했던 영우는 직장생활을 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남자를 만나 결혼하게 됐다. 그리하여 한솔에게 청첩장을 보낸 것.

  일본은 청첩장을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보낸다. 참석, 불참에 동그라미 하세요, 라고 정식 초청장을 보내고 반송 봉투와 우표까지 동봉한다. 한솔은 참석에 진한 사인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냈다. 이제 고속열차를 타고 부산에 가서 한 사흘 놀다가 비행기를 타고 간사이 공항에 도착한 다음 열차로 갈아타서 고베의 한 호텔에 여장을 푼다. 그리고 다음날 호텔 근처에 있는 교회의 결혼식에 참석한 후 한 일주일 놀다 올 예정이다.

  시내구간이라 서행을 하던 고속열차가 광명역에 도착하더니 많은 사람이 탑승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런가보다, 부심하게 앉은 한솔에게 차려 입은 입성만 보면 10대 후반으로도 보이는 여성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창가 자리를 양보해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 평소 자주 여러 곳을 여행하는 한솔이 창가 자리에 미련 같은 걸 가질 이유가 없어서 순순히 그러겠노라 했고, 그리하여 창가에 앉은 이름이 ‘나미’인 젊은 여자는 창문을 내다보는 것도 아니고 통로를 지나는 사람으로부터 그저 자신의 얼굴을 가리기 위해 고개를 외로 꼬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솔은 작품이 끝날 때까지도 왜 그러는지 모르지만 독자는 독자의 권리로 곧 알게 된다. 나미는 무슨 폭력적이거나 감금 같은 걸 자행하지는 않지만 사이비 종교집단인 건 확실한 교회에서 몸만 빠져나와 집안의 가족과 친척들하고 담 쌓고 사는 이모네 집에서 며칠 숨어 지내다가 부산에 사는 이모의 친구네 집으로 거처를 옮기기로 한 거였다. 종교집단의 집요한 추적을 벗어나기 위하여 나미는 남들 안 하던 짓을 한다. 옆에 앉은 겉으로 보기엔 남자한테 말을 붙이는 거. 옛날에야 옆에 앉은 승객하고 말도 트고, 삶은 달걀도 벗겨 먹고, 칠성 사이다도 나눠 마시고, 겨울 같으면 귤도 까먹고, 선데이 서울도 함께 보고 그랬지, 요새 누가 옆에 앉은 사람하고 말 트나? 확실히 나미가 자기도 모르는 새 오버하는 거였다. 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평소에 책을 많이 읽는 한솔이 나미에게 탐정이 나오는 소설 한 권을 그냥 준다. 부산에서 자신이 머물 호텔과 자기 이름도 책 속지에 볼펜으로 써 주고.

  이렇게 부산에 도착한 한솔과 나미. 한솔은 코모도 호텔에 숙박을 하고, 나미는 이모의 친구 유미네 집으로 들어간다. 유미는 전직이 일본행 크루즈의 식당에서 엔카와 트로트를 부르는 가수였다. 그러다가 이제 나이가 들어 후배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부산에 정착했는데, 새 가수들이 일정에 문제가 생기면 가끔 대타로 노래를 하기도 한다. 그래도 생활을 잘 하는 이런 직업의 여성들이 거의 그렇듯 세상 물정에 빠삭하고 매사에 현명하게 대처할 줄 아는 중년, 노년의 초입에 들어섰다.

  이게 거의 다다. 부산에 도착한 한솔과 나미가 그곳에서 사흘동안 만나고, 선착장에 가서 배 구경을 하고, 서로 숙소로 가다가 한솔은 호텔 인근의 편의점에서 빵과 우유를 사 호텔방에서 포트로 데운 우유와 빵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뭐 이런 거.


  근데 왜 제목이 “인터내셔널의 밤”이냐고? 부산이잖아. 거기에 러시아 선원들이 많은 모양이다. 난 부산 몇 번을 가도 러시아 사람은 못 봤는데, 아마 너무 오래 전에 가서 그럴 거다. 한솔이 만난 우람하고 단단하고 게다가 잘 생긴 러시아 선원이 우연히 두 번인가 길에서 만난다. 그럴 때마다 러시아 선원이 휘파람으로 노래하고 있던 것이 “인터내셔널 가”이다. 그래서 제목을 그렇게 지었다.

  이런 작품은 스토리 읽기 위해 선택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독자의 시선을 끄는 쓸쓸한 분위기가 있어서, 나는 박솔뫼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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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4-02-10 09: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읽긴 읽은 모양인데 기억이 하——-나도 안 나서 제가 쓴 독후감을 다시 봐도 정말 까맣게… 예전에 문예지 신인공모할 때 담당자 부재라 동료 박*뫼가 수령했다는 우체국 택배 전송 알림 문자 받고 와 내 원고 박솔뫼가 받았다! 한 기억만 납니다 ㅋㅋㅋ(받기만 했다…흔적도 없다…)

Falstaff 2024-02-11 05:49   좋아요 0 | URL
이런 작품들은 나중에 기억이 정말 하.....나도 안 나는 경우가 많습지요. ㅋㅋㅋ 그 맘 제가 압니다.
어쨌건 박솔뫼하고 옷긴 스친 인연이 있는 열반인 님. ㅎㅎㅎ
 
여행자와 달빛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8
세르브 언털 지음, 김보국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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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르브 언털의 1937년 작품. 세르브 언털은 1901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유대인 가족에서 태어났으나 1907년에 아버지와 함께 가톨릭으로 개종해 유대인이라기보다 유럽인의 정체성으로 평생을 살다 갔으면 좋았을 텐데, 자신은 유럽인으로 알았건만 세상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아서 1944년 벌프의 노동수용소로 끌려가 1945년 종전을 눈앞에 두고 수용소 간수들한테 그만 맞아 죽었다. 사십 여 성상을 평생 부르주아로 살다가.

  1937년이라고, 조금 오래된 작품이라고 우습게 보다간 코피난다. 서유럽이 아니고 동북부 유럽인 폴란드, 보헤미아, 헝가리 등에서도 1920년대와 30년대에는 지금 시각으로 보더라도 혁신적인 포스트 모던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온 시기이다. 물론 이 배경에는 1차 세계대전 종전 후 피폐한 산업과 이에 따른 인간의 상실이 토양을 만들었겠지만 문학을 포함한 예술 장르는 원래부터 인간의 불행을 거름으로 삼아 발전하는 측면이 많은 법이다. 물론 프랑스와 독일의 초현실주의에 영향을 받긴 했어도 동유럽 작가들이 나름대로 충분히 숙성을 시켜 특유의 문법을 만들었다고 보는데,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내가 뭘 알아야지. 이거 아마추어가 폼 한 번 잡아보려고 잘난 척하는 “순 구라”다. 믿지 마시라. 하여간 내가 왜 이렇게 순도 백퍼센트의 구라를 풀었는가 하면, 헝가리 문학의 기념비라고 일컬어진다는 세르브 언털의 <여행자와 달빛>도 사실 해석해내기가 만만하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이 작품을 쓰여진 그대로 읽는다면 이제 나이가 들어 결혼해 신혼여행을 간 주인공이 사춘기 한 시절에 극도로 번민했던 죽음에 관한 사고에 여전히 빠져 있는 미성숙 상태를 그렸다고 볼 수도 있고, 그런 시각도 당연하지만, 작품에서 연속적으로 벌어지는 우연한 만남과 과거 회상과 자의에 의한 죽음의 유혹과 책 표지처럼 어두운 배경으로 깔린 우울함, 공황상태를 1930년대 중후반 특유의 사회전반에 대한 반향이라고 봐도 크게 틀린 관점은 아닐 듯하다.

  나 역시 처음엔 스토리 중심으로 책을 읽었다. 그러다 보니까 세상에 이런 유아적, 아니지, 사춘기적 정서에 함몰되어 있으며 1930년대 작품 아니랄까봐 반여성주의적 사고방식도 여전한 주인공의 철딱서니 없는 방황과 무질서와 몽상과 방향 없는 사랑타령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 점점 지루해지는 것을 참지 못했다. 이런 상태를 애써 눌러 참고, 내 특기 가운데 하나가 지겨운 거 버티는 일이라서 계속 읽어 나갔는데, 이것, 앞에서 말한 모든 난처한 것들이 점점 하나의 집단적 고통상태를 그리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고착되더란 말이다. 당연히 제 밭에 물 주는 식의 사고의 확장일 수 있겠지만 작품은 질기게도 어둠, 밤, 공황, 죽음, 질병, 이별, 배신 등 삶의 극단적 부정으로 일관하다가, 로마 빈민들에 의한 탄생 영세식과 밤을 새워 벌인 축하 파티, 빈민들에 의한 죽음과 강절도의 공포가 아닌 친절과 염려를 기점으로 한 순간에 화면이 밝아지며 대단원을 맞는다.

  작가 세르브 언털이……. 자꾸 “언털”, “언털”하니까 어감이 좋지 않아 잠깐 덧붙이자면, 언털을 알파벳으로 쓰면 Antal이다. 내가 아는 Antal 가운데 제일 유명한 사람이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스페셜리스트이자 내셔널 심포니, 로열 필하모니 음악감독을 했던 도러티 언털, 멘델스죤 무언가의 거장 일제 폰 알펜하임의 남편이다. 헝가리 발음으로 Antal을 “언털”이라고 읽는다. 하이든 교향곡 전곡과 오페라 전곡은 지금도 명반으로 꼽는다. 하이든 오페라 전곡은 내가 알기로 도러티 언털 녹음이 유일하다.

  하여간 세르브의 기본 정조는 대단히 우울하다. 비록 막판에 좋게 좋게 끝나 다행이지만 다분히 의도적으로 해피 엔드로 끌고 간 느낌이 드는 건 숨길 수 없다. 어떤 해피 엔드인지는 결코 일러드리지 않겠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쪽으로 해피 엔드는 아닐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야기가 빠그러지는지 지금부터 보자. 난 언제나 이렇게 서두가 너무 길어서…… 지랄이다.


  첫 장면은 베네치아. 서른여섯 살의 미하이가 남자 주인공이고 아내 에르지가 여자 주인공이다. 에르지는 퍼터키 졸탄이라는 당시 헝가리의 큰 부자와 4년 동안 결혼생활을 하다가, 퍼터키 씨가 끝도 없이 바람을 피우는 건 알겠는데 하다못해 이젠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타이피스트도 건드리는 걸 보고 눈이 확 돌아버려 홧김에 서방질한 대상이 미하이였으며, 처음에는 미미한 홧김의 서방질이었건만 날이 갈수록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 데다가 미하이도 이하동문이라 슬슬 꼬드기기를, 하루빨리 이혼 서류에 인감도장 찍고 자신과 새롭게 결혼하자고 해서 정말로 헝가리의 막강한 부자 남편과 헤어진 다음 보건복지부 장관 입장에선 인정하기 힘들었겠지만 법무부 장관은 확실하게 인정한 총각 미하이와 새로 결혼한 거였다. 미하이는 영국과 프랑스에서 몇 년 간 체류한 경험이 있는 사업가의 막내 아들로 작가 세르브와 마찬가지로 여태 부르주아가 아닌 상태로는 하루도 살아본 적이 없기는 하다. 작은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에르지와 이이의 전남편 퍼터키 씨 역시 미하이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회사의 큰 주주 가운데 한 명이라는 사실. 퍼터키 씨가 나쁜 마음만 먹는다면 미하이 가문의 사업 정도는 가뿐하게 망가뜨릴 수 있다는 거. 근데 감히 퍼터키 씨 가족을 이혼시키고 새로 결혼을 했다고? 그렇다.

  첫 장면이 베네치아인 것은 이들이 신혼여행을 왔기 때문이다. 미하이는 이탈리아에 처음 온 반면 에르지는 남편보다 이탈리아 말에 더 능통하고, 처음 와본 것도 아니어서 일정이나 묵을 숙소, 메뉴 선택, 방문할 유적지 같은 것을 모두 정한다. 미하이가 생각하는 이탈리아는 과하게 관능적이라 위험 그 자체. 그래서 여태까지 이탈리아를 멀리 했던 것이고, 이제 결혼을 해 명실공히 어른이 되어 유혹에 빠지지 않을 것 같아서 오스트리아가 아닌 이탈리아로 신혼여행을 온 것이다. 이날 밤에 미하이가 하는 이야기의 논점은, 물론 말로만 주장이겠지만, 그리스와 가까운 지역이니 사모스 와인이나 마브로다프니 와인이 여기 베네치아의 술 판매점 딱 한 군데는 있을 것이다, 그것을 찾아야겠다, 라고 주장해 아내 에르지를 홀로 호텔방으로 올려 보내고, 이미 어둠이 잔뜩 내려 앉은 베네치아 골목골목 이 음산한 지역, 물비린내와 폭력과 살인과 강도의 냄새가 자욱한 어두운 골목을 와드득 몸을 떨면서 돌아다닌다. 이 장면에서 어느 책에서 읽었더라, 기억나지는 않지만, 운하에 정박한 보트 속에 숨은 자객 이야기가 불쑥 생각나서, 책의 분위기도 그렇고 곧 사달이 나고 말지 싶었지만, 주인공 미하이는 동녘이 훤할 때까지 미쳤다고 섬뜩하게 어두운 골목길을 홀로 쏘다니는 것으로 작품은 시작한다.

  이 철없는 미하이. 며칠 후 부부는 라벤나에 도착했고, 아침 일찍 에르지가 잠에서 깨지도 않았을 때 미하이 홀로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입더니 호텔을 나가버린다. 가장 유명한 라벤나의 비잔틴 모자이크를 혼자 보고 싶어서. 라벤나의 모자이크는 미하이 자신의 과거에 대한 기념물 같은 것이라 말한다. 독자는 여기서 처음으로 미하이의 사춘기 시절 만난 친구들과 친구의 여동생 에버를 떠올린다. 가톨릭에 귀의한 유대인으로 나중에 움브리아의 프란체스코 파 수도사 세베리누스가 되는 에르빈, 일찌감치 자신의 금장시계를 훔쳐간 사기꾼 세페트네키 야노시. 그리고 친구들을 자기 집에 오게 해 함께 연극놀이를 하던 울피우시 터마시와 터마시의 동생 에버.

  이들을 만나기 전부터 고교생 미하이는 핼쑥하고 불안하고 열정에 타서 이글거리는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상태를 보니 섬망장애 또는 공황장애가 틀림없는 ‘소용돌이’ 증상을 겪고 있었다. 주변에서 갑자기 땅이 열리고 소용돌이가 쳐 마치 자신이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공표에 휩싸이는 증상인데 눈 오는 날 부더 성에서 극도로 심한 소용돌이 증상을 겪고 있을 때 터마시가 나타나 어깨에 손을 대는 순간 순식간에 소용돌이 증상이 사라지면서 이 사이 좋은 남매와 절친 사이가 되었던 거다. 좀 이상할 정도로 친한 남매들. 그리고 몇 년 후, 터마시는 에버가 보는 앞에서, 에버의 결혼이 예정되어 있던 때 과량의 모르핀을 마시고 스스로 죽음에 이르고 만다. 이후 주인공 미하이도 죽음을 선망하게 되고 신혼여행까지 와서, 아내 에르지에게 옛 사춘기 시절의 추억을 다 말했음에도, 절대 에버와 사랑으로 좋아하는 사이가 아니었다고 진심으로 고백했음에도, 결국 미하이는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한 여자는 에버 한 명이었음을 천천히 알게 된다.

  그건 조금 나중의 일이고, 이들이 몇 군데를 더 거쳤다가 로마로 가는 기차를 탔을 때, 정거하는 역에서 십 분 동안 멈추었다 출발한다는 말을 들은 미하이는 짬을 이용해 차 한 잔을 마시고 싶어 기차를 내렸고, 시간이 다 돼 기차가 떠난다고 소리치는 말에 허겁지겁 뛰어 다시 탑승을 했건만 자신이 내렸던 기차가 아니라 다른 열차를 타는 바람에 저절로 아내와 떨어지고 만다. 이것으로 이 부부는 끝났다. 그러나 이것으로 미하이와 에르지의 이탈리아/프랑스 여행은 본격적으로 막이 올라간다. 개봉박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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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4-02-08 09: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베네치아의 골목 자객 나오는 그 소설 혹시 대프니 듀 모리에의 <지금 쳐다보지 마> 아닌가요?
단편집 첫 이야기요. 소설의 그 마지막 장면이 정말 섬뜩했어요.

Falstaff 2024-02-08 14:41   좋아요 1 | URL
옙. 마침 책이 책꽂이 바로 앞에 꽂혀 있어서 지금 확인했습니다. 맞습니다! <지금 쳐다다보지 마>! 와, 대단하신 쿨캣님. 저는 책 열어 볼 때까지도 알렉상드르 뒤마나 빅토르 위고를 생각했었거든요. ㅋㅋㅋ

coolcat329 2024-02-08 17:28   좋아요 1 | URL
그 이야기가 워낙 강렬해서 잊혀지질 않았거든요. 폴스타프님이 칭찬을 해주셔서 기분이 좋습니다.🤩 즐거운 명절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