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와 달빛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8
세르브 언털 지음, 김보국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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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르브 언털의 1937년 작품. 세르브 언털은 1901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유대인 가족에서 태어났으나 1907년에 아버지와 함께 가톨릭으로 개종해 유대인이라기보다 유럽인의 정체성으로 평생을 살다 갔으면 좋았을 텐데, 자신은 유럽인으로 알았건만 세상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아서 1944년 벌프의 노동수용소로 끌려가 1945년 종전을 눈앞에 두고 수용소 간수들한테 그만 맞아 죽었다. 사십 여 성상을 평생 부르주아로 살다가.

  1937년이라고, 조금 오래된 작품이라고 우습게 보다간 코피난다. 서유럽이 아니고 동북부 유럽인 폴란드, 보헤미아, 헝가리 등에서도 1920년대와 30년대에는 지금 시각으로 보더라도 혁신적인 포스트 모던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온 시기이다. 물론 이 배경에는 1차 세계대전 종전 후 피폐한 산업과 이에 따른 인간의 상실이 토양을 만들었겠지만 문학을 포함한 예술 장르는 원래부터 인간의 불행을 거름으로 삼아 발전하는 측면이 많은 법이다. 물론 프랑스와 독일의 초현실주의에 영향을 받긴 했어도 동유럽 작가들이 나름대로 충분히 숙성을 시켜 특유의 문법을 만들었다고 보는데,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내가 뭘 알아야지. 이거 아마추어가 폼 한 번 잡아보려고 잘난 척하는 “순 구라”다. 믿지 마시라. 하여간 내가 왜 이렇게 순도 백퍼센트의 구라를 풀었는가 하면, 헝가리 문학의 기념비라고 일컬어진다는 세르브 언털의 <여행자와 달빛>도 사실 해석해내기가 만만하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이 작품을 쓰여진 그대로 읽는다면 이제 나이가 들어 결혼해 신혼여행을 간 주인공이 사춘기 한 시절에 극도로 번민했던 죽음에 관한 사고에 여전히 빠져 있는 미성숙 상태를 그렸다고 볼 수도 있고, 그런 시각도 당연하지만, 작품에서 연속적으로 벌어지는 우연한 만남과 과거 회상과 자의에 의한 죽음의 유혹과 책 표지처럼 어두운 배경으로 깔린 우울함, 공황상태를 1930년대 중후반 특유의 사회전반에 대한 반향이라고 봐도 크게 틀린 관점은 아닐 듯하다.

  나 역시 처음엔 스토리 중심으로 책을 읽었다. 그러다 보니까 세상에 이런 유아적, 아니지, 사춘기적 정서에 함몰되어 있으며 1930년대 작품 아니랄까봐 반여성주의적 사고방식도 여전한 주인공의 철딱서니 없는 방황과 무질서와 몽상과 방향 없는 사랑타령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 점점 지루해지는 것을 참지 못했다. 이런 상태를 애써 눌러 참고, 내 특기 가운데 하나가 지겨운 거 버티는 일이라서 계속 읽어 나갔는데, 이것, 앞에서 말한 모든 난처한 것들이 점점 하나의 집단적 고통상태를 그리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고착되더란 말이다. 당연히 제 밭에 물 주는 식의 사고의 확장일 수 있겠지만 작품은 질기게도 어둠, 밤, 공황, 죽음, 질병, 이별, 배신 등 삶의 극단적 부정으로 일관하다가, 로마 빈민들에 의한 탄생 영세식과 밤을 새워 벌인 축하 파티, 빈민들에 의한 죽음과 강절도의 공포가 아닌 친절과 염려를 기점으로 한 순간에 화면이 밝아지며 대단원을 맞는다.

  작가 세르브 언털이……. 자꾸 “언털”, “언털”하니까 어감이 좋지 않아 잠깐 덧붙이자면, 언털을 알파벳으로 쓰면 Antal이다. 내가 아는 Antal 가운데 제일 유명한 사람이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스페셜리스트이자 내셔널 심포니, 로열 필하모니 음악감독을 했던 도러티 언털, 멘델스죤 무언가의 거장 일제 폰 알펜하임의 남편이다. 헝가리 발음으로 Antal을 “언털”이라고 읽는다. 하이든 교향곡 전곡과 오페라 전곡은 지금도 명반으로 꼽는다. 하이든 오페라 전곡은 내가 알기로 도러티 언털 녹음이 유일하다.

  하여간 세르브의 기본 정조는 대단히 우울하다. 비록 막판에 좋게 좋게 끝나 다행이지만 다분히 의도적으로 해피 엔드로 끌고 간 느낌이 드는 건 숨길 수 없다. 어떤 해피 엔드인지는 결코 일러드리지 않겠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쪽으로 해피 엔드는 아닐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야기가 빠그러지는지 지금부터 보자. 난 언제나 이렇게 서두가 너무 길어서…… 지랄이다.


  첫 장면은 베네치아. 서른여섯 살의 미하이가 남자 주인공이고 아내 에르지가 여자 주인공이다. 에르지는 퍼터키 졸탄이라는 당시 헝가리의 큰 부자와 4년 동안 결혼생활을 하다가, 퍼터키 씨가 끝도 없이 바람을 피우는 건 알겠는데 하다못해 이젠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타이피스트도 건드리는 걸 보고 눈이 확 돌아버려 홧김에 서방질한 대상이 미하이였으며, 처음에는 미미한 홧김의 서방질이었건만 날이 갈수록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 데다가 미하이도 이하동문이라 슬슬 꼬드기기를, 하루빨리 이혼 서류에 인감도장 찍고 자신과 새롭게 결혼하자고 해서 정말로 헝가리의 막강한 부자 남편과 헤어진 다음 보건복지부 장관 입장에선 인정하기 힘들었겠지만 법무부 장관은 확실하게 인정한 총각 미하이와 새로 결혼한 거였다. 미하이는 영국과 프랑스에서 몇 년 간 체류한 경험이 있는 사업가의 막내 아들로 작가 세르브와 마찬가지로 여태 부르주아가 아닌 상태로는 하루도 살아본 적이 없기는 하다. 작은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에르지와 이이의 전남편 퍼터키 씨 역시 미하이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회사의 큰 주주 가운데 한 명이라는 사실. 퍼터키 씨가 나쁜 마음만 먹는다면 미하이 가문의 사업 정도는 가뿐하게 망가뜨릴 수 있다는 거. 근데 감히 퍼터키 씨 가족을 이혼시키고 새로 결혼을 했다고? 그렇다.

  첫 장면이 베네치아인 것은 이들이 신혼여행을 왔기 때문이다. 미하이는 이탈리아에 처음 온 반면 에르지는 남편보다 이탈리아 말에 더 능통하고, 처음 와본 것도 아니어서 일정이나 묵을 숙소, 메뉴 선택, 방문할 유적지 같은 것을 모두 정한다. 미하이가 생각하는 이탈리아는 과하게 관능적이라 위험 그 자체. 그래서 여태까지 이탈리아를 멀리 했던 것이고, 이제 결혼을 해 명실공히 어른이 되어 유혹에 빠지지 않을 것 같아서 오스트리아가 아닌 이탈리아로 신혼여행을 온 것이다. 이날 밤에 미하이가 하는 이야기의 논점은, 물론 말로만 주장이겠지만, 그리스와 가까운 지역이니 사모스 와인이나 마브로다프니 와인이 여기 베네치아의 술 판매점 딱 한 군데는 있을 것이다, 그것을 찾아야겠다, 라고 주장해 아내 에르지를 홀로 호텔방으로 올려 보내고, 이미 어둠이 잔뜩 내려 앉은 베네치아 골목골목 이 음산한 지역, 물비린내와 폭력과 살인과 강도의 냄새가 자욱한 어두운 골목을 와드득 몸을 떨면서 돌아다닌다. 이 장면에서 어느 책에서 읽었더라, 기억나지는 않지만, 운하에 정박한 보트 속에 숨은 자객 이야기가 불쑥 생각나서, 책의 분위기도 그렇고 곧 사달이 나고 말지 싶었지만, 주인공 미하이는 동녘이 훤할 때까지 미쳤다고 섬뜩하게 어두운 골목길을 홀로 쏘다니는 것으로 작품은 시작한다.

  이 철없는 미하이. 며칠 후 부부는 라벤나에 도착했고, 아침 일찍 에르지가 잠에서 깨지도 않았을 때 미하이 홀로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입더니 호텔을 나가버린다. 가장 유명한 라벤나의 비잔틴 모자이크를 혼자 보고 싶어서. 라벤나의 모자이크는 미하이 자신의 과거에 대한 기념물 같은 것이라 말한다. 독자는 여기서 처음으로 미하이의 사춘기 시절 만난 친구들과 친구의 여동생 에버를 떠올린다. 가톨릭에 귀의한 유대인으로 나중에 움브리아의 프란체스코 파 수도사 세베리누스가 되는 에르빈, 일찌감치 자신의 금장시계를 훔쳐간 사기꾼 세페트네키 야노시. 그리고 친구들을 자기 집에 오게 해 함께 연극놀이를 하던 울피우시 터마시와 터마시의 동생 에버.

  이들을 만나기 전부터 고교생 미하이는 핼쑥하고 불안하고 열정에 타서 이글거리는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상태를 보니 섬망장애 또는 공황장애가 틀림없는 ‘소용돌이’ 증상을 겪고 있었다. 주변에서 갑자기 땅이 열리고 소용돌이가 쳐 마치 자신이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공표에 휩싸이는 증상인데 눈 오는 날 부더 성에서 극도로 심한 소용돌이 증상을 겪고 있을 때 터마시가 나타나 어깨에 손을 대는 순간 순식간에 소용돌이 증상이 사라지면서 이 사이 좋은 남매와 절친 사이가 되었던 거다. 좀 이상할 정도로 친한 남매들. 그리고 몇 년 후, 터마시는 에버가 보는 앞에서, 에버의 결혼이 예정되어 있던 때 과량의 모르핀을 마시고 스스로 죽음에 이르고 만다. 이후 주인공 미하이도 죽음을 선망하게 되고 신혼여행까지 와서, 아내 에르지에게 옛 사춘기 시절의 추억을 다 말했음에도, 절대 에버와 사랑으로 좋아하는 사이가 아니었다고 진심으로 고백했음에도, 결국 미하이는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한 여자는 에버 한 명이었음을 천천히 알게 된다.

  그건 조금 나중의 일이고, 이들이 몇 군데를 더 거쳤다가 로마로 가는 기차를 탔을 때, 정거하는 역에서 십 분 동안 멈추었다 출발한다는 말을 들은 미하이는 짬을 이용해 차 한 잔을 마시고 싶어 기차를 내렸고, 시간이 다 돼 기차가 떠난다고 소리치는 말에 허겁지겁 뛰어 다시 탑승을 했건만 자신이 내렸던 기차가 아니라 다른 열차를 타는 바람에 저절로 아내와 떨어지고 만다. 이것으로 이 부부는 끝났다. 그러나 이것으로 미하이와 에르지의 이탈리아/프랑스 여행은 본격적으로 막이 올라간다. 개봉박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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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4-02-08 09: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베네치아의 골목 자객 나오는 그 소설 혹시 대프니 듀 모리에의 <지금 쳐다보지 마> 아닌가요?
단편집 첫 이야기요. 소설의 그 마지막 장면이 정말 섬뜩했어요.

Falstaff 2024-02-08 14:41   좋아요 1 | URL
옙. 마침 책이 책꽂이 바로 앞에 꽂혀 있어서 지금 확인했습니다. 맞습니다! <지금 쳐다다보지 마>! 와, 대단하신 쿨캣님. 저는 책 열어 볼 때까지도 알렉상드르 뒤마나 빅토르 위고를 생각했었거든요. ㅋㅋㅋ

coolcat329 2024-02-08 17:28   좋아요 1 | URL
그 이야기가 워낙 강렬해서 잊혀지질 않았거든요. 폴스타프님이 칭찬을 해주셔서 기분이 좋습니다.🤩 즐거운 명절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