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내셔널의 밤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박솔뫼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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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이 세 권째 박솔뫼이니 우리 작가 중에선 그래도 많이 읽은 편이다. 이이가 이제 우리 나이로 마흔, 현 행정부의 나이 계산으로 하면 서른 여덟이나 아홉인데 자신의 독특한 문장을 챙긴 것 같다. 무미하고 건조한 문장. 어느 작품을 읽어도 조금은 서걱거리는 느낌. 독자에 따라 이렇게 작은 석영 알갱이가 섞여 있는 듯한 이야기법을 좋아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할 터이지만 나는 좋다.

  이 소설은 출판사 아르테의 한국소설선 ‘작은 책’이란 타이틀로 찍었다. 작가 노트까지 합해서 128쪽. 근데 책이 내 손바닥 보다 작다. 한 페이지에 열일곱 줄과 글자가 원고지 기준으로 28자 정도 들어간다. 그러니 책을 읽으면 페이지가 쉴 새 없이 휙휙 넘어간다. 자, 진심으로 말하는데, 처음엔 페이지 넘기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이야기의 연결을 놓치고 말았을 정도다. 분량은 단편소설 한 편. 7쪽에서 시작해 119쪽까지, 그러니까 113쪽이다. 이 책을 개가실에서 봤으니까 읽었지, 만일 시내 서점에서 봤다면 그냥 그 자리에서 뚝뚝 읽어 치웠을 거 같다. 분량이 괘씸해 절대로 안 샀을 듯. 그러나 오해하지 마시라. 이야기는 재미있으니.


  홍한솔. 젠더가 별로 의미 없는 주인공이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2로 시작하니 생물학적으로는 여성이지만 가슴절제술을 해 편평한 가슴을 가진, 겉 모습만 보면 남자에 가까운 사람이다. 한솔의 친구 가운데 ‘영우’라고 있다. 영우는 몸과 마음이 다 여자다. 대학 동창으로 연극에 매력을 느껴 졸업 후에 연극을 더 하기 위해 예술대학에 응시했지만 두 번 떨어진 경험이 있다. 가끔 중요하지 않은 배역으로 연극에 출연하기도 했던 영우는 직장생활을 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남자를 만나 결혼하게 됐다. 그리하여 한솔에게 청첩장을 보낸 것.

  일본은 청첩장을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보낸다. 참석, 불참에 동그라미 하세요, 라고 정식 초청장을 보내고 반송 봉투와 우표까지 동봉한다. 한솔은 참석에 진한 사인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냈다. 이제 고속열차를 타고 부산에 가서 한 사흘 놀다가 비행기를 타고 간사이 공항에 도착한 다음 열차로 갈아타서 고베의 한 호텔에 여장을 푼다. 그리고 다음날 호텔 근처에 있는 교회의 결혼식에 참석한 후 한 일주일 놀다 올 예정이다.

  시내구간이라 서행을 하던 고속열차가 광명역에 도착하더니 많은 사람이 탑승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런가보다, 부심하게 앉은 한솔에게 차려 입은 입성만 보면 10대 후반으로도 보이는 여성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창가 자리를 양보해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 평소 자주 여러 곳을 여행하는 한솔이 창가 자리에 미련 같은 걸 가질 이유가 없어서 순순히 그러겠노라 했고, 그리하여 창가에 앉은 이름이 ‘나미’인 젊은 여자는 창문을 내다보는 것도 아니고 통로를 지나는 사람으로부터 그저 자신의 얼굴을 가리기 위해 고개를 외로 꼬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솔은 작품이 끝날 때까지도 왜 그러는지 모르지만 독자는 독자의 권리로 곧 알게 된다. 나미는 무슨 폭력적이거나 감금 같은 걸 자행하지는 않지만 사이비 종교집단인 건 확실한 교회에서 몸만 빠져나와 집안의 가족과 친척들하고 담 쌓고 사는 이모네 집에서 며칠 숨어 지내다가 부산에 사는 이모의 친구네 집으로 거처를 옮기기로 한 거였다. 종교집단의 집요한 추적을 벗어나기 위하여 나미는 남들 안 하던 짓을 한다. 옆에 앉은 겉으로 보기엔 남자한테 말을 붙이는 거. 옛날에야 옆에 앉은 승객하고 말도 트고, 삶은 달걀도 벗겨 먹고, 칠성 사이다도 나눠 마시고, 겨울 같으면 귤도 까먹고, 선데이 서울도 함께 보고 그랬지, 요새 누가 옆에 앉은 사람하고 말 트나? 확실히 나미가 자기도 모르는 새 오버하는 거였다. 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평소에 책을 많이 읽는 한솔이 나미에게 탐정이 나오는 소설 한 권을 그냥 준다. 부산에서 자신이 머물 호텔과 자기 이름도 책 속지에 볼펜으로 써 주고.

  이렇게 부산에 도착한 한솔과 나미. 한솔은 코모도 호텔에 숙박을 하고, 나미는 이모의 친구 유미네 집으로 들어간다. 유미는 전직이 일본행 크루즈의 식당에서 엔카와 트로트를 부르는 가수였다. 그러다가 이제 나이가 들어 후배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부산에 정착했는데, 새 가수들이 일정에 문제가 생기면 가끔 대타로 노래를 하기도 한다. 그래도 생활을 잘 하는 이런 직업의 여성들이 거의 그렇듯 세상 물정에 빠삭하고 매사에 현명하게 대처할 줄 아는 중년, 노년의 초입에 들어섰다.

  이게 거의 다다. 부산에 도착한 한솔과 나미가 그곳에서 사흘동안 만나고, 선착장에 가서 배 구경을 하고, 서로 숙소로 가다가 한솔은 호텔 인근의 편의점에서 빵과 우유를 사 호텔방에서 포트로 데운 우유와 빵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뭐 이런 거.


  근데 왜 제목이 “인터내셔널의 밤”이냐고? 부산이잖아. 거기에 러시아 선원들이 많은 모양이다. 난 부산 몇 번을 가도 러시아 사람은 못 봤는데, 아마 너무 오래 전에 가서 그럴 거다. 한솔이 만난 우람하고 단단하고 게다가 잘 생긴 러시아 선원이 우연히 두 번인가 길에서 만난다. 그럴 때마다 러시아 선원이 휘파람으로 노래하고 있던 것이 “인터내셔널 가”이다. 그래서 제목을 그렇게 지었다.

  이런 작품은 스토리 읽기 위해 선택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독자의 시선을 끄는 쓸쓸한 분위기가 있어서, 나는 박솔뫼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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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4-02-10 09: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읽긴 읽은 모양인데 기억이 하——-나도 안 나서 제가 쓴 독후감을 다시 봐도 정말 까맣게… 예전에 문예지 신인공모할 때 담당자 부재라 동료 박*뫼가 수령했다는 우체국 택배 전송 알림 문자 받고 와 내 원고 박솔뫼가 받았다! 한 기억만 납니다 ㅋㅋㅋ(받기만 했다…흔적도 없다…)

Falstaff 2024-02-11 05:49   좋아요 0 | URL
이런 작품들은 나중에 기억이 정말 하.....나도 안 나는 경우가 많습지요. ㅋㅋㅋ 그 맘 제가 압니다.
어쨌건 박솔뫼하고 옷긴 스친 인연이 있는 열반인 님.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