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치일기 1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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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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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1996년 작품. 1990년 8월부터 1991년 6월까지 지속된 콜롬비아 기자 열 명의 납치사건에 관한 기록이다.

  마루하 파촌은 삼촌이기도 했던 남편과의 사이에서 세 딸과 두 아들을 두었는데 세월이 갈수록 도무지 성격상 차이로 견딜 수 없어 가톨릭 대주교에게 요구해 친족간 혼인관계 불성립의 판정을 받아냈다. 원래 집안 대대로 신문기자인 인텔리 계급이라 자신도 신문기자로 다시 커리어를 이어가면서 크지 않은 잡지사를 창간하기도 했고 두 달 전부터는 국영단체인 영화진흥원 포시네의 원장으로 임명되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생활을 이어갔다. 마루하의 언니 글로리아 파촌은 루이스 카를로스 갈란의 아내였는데, 남편이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들에게 대폭적인 지지를 받아 거의 당선이 확정적이었지만 그만 테러리스트에게 표적이 되어 암살당하고 말았다. 루이스 갈란은 “범죄자의 국외 인도”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강경파였다.

  이 책이 끝날 때까지 계속해 문제가 되는 콜롬비아에서의 “범죄자 국외 인도”, 국외는 미국을 일컫는 말이다. 콜롬비아는 당시 전 세계 마약 공급의 80퍼센트 이상을 차지했으며, 마약왕이라고 불린 메데인 카르텔의 설립자 파블로 에밀리오 에스코바르 가비리아는 마약을 팔아 한때 세계 제7위의 현금보유자로 이름을 올릴 정도였다. 문제는 콜롬비아 마약의 대부분이 미국으로 흘러들어 마약 가격이 하락하는 바람에 마약 중독자가 순식간에 불어나 사회적으로 큰 문제로 부각되었다는 점이다. 미국 정부는 좌익 게릴라들과 정부군 사이의 내전에 깊숙이 관여했던 전력이 있어, 비공식(미확인)적으로 마약 단체에 직접적인 소탕작전에도 개입하면서, 콜롬비아 정부에 마약 생산과 판매에 관련된 범죄자를 미국 법정에 세우라고 집요하게 요구했다. 미국 입장에서 콜롬비아 내부에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마약 카르텔을 정부가 체포해봤자 부패한 정부에 막대한 뇌물을 주어 가벼운 형을 선고받거나, 폭력적인 방법으로 체포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교도소에 수감 중이라도 여전히 마약 제조와 판매에 깊숙이 관여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또한 사실이 그러했다. 파블로 에스코바르를 필두로 카르텔의 지도자들은 미국으로 신병을 인수할 경우 최하 150년 형을 피할 수 없으며 90년이 지나기 전까지 가석방 심의 대상조차 되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는 터에 도저히 “범죄자 국외 인도”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하여 현직 영화진흥원 원장이며, 강력한 대통령 후보자였던 사람의 친척인 마루하 파촌 데 비야미사르는 카르텔이 납치 대상으로 점찍을 완벽한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마루하가 아이 다섯을 데리고 새로 결혼한 현재 남편 알베르토 비야미사르 카르데나스 역시 정치인으로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대통령 세사르 가비리아의 집무실에 전화를 하거나 찾아갈 수 있는 정도의 인물이었으니, 정부와의 협상에 적당한 미끼로 쓸 수 있음에야.

  영화진흥원 앞 오후 7시 5분. 마루하는 시누이 베아트리스와 르노 21, 관용차를 타고 퇴근한다. 베아트리스의 남편은 침착하고 경험 많고 유능해 명예훈장을 받은 신경정신과 의사 페드로 게레로 박사지만 이날 이후 우울증에 시달릴 예정이다. 일상적으로 시누-올케는 함께 차를 타고, 러시 아워 시간 속의 보고타 시내를 관통해 먼저 올케 마루하의 집에 들렸다가 베아트리스의 집에서 퇴근한다. 그러나 이 날 진흥원을 출발하자마자 메르세데스와 택시 한 대가 르노21을 바싹 뒤쫓기 시작했지만 마루하의 운전기사는 눈치채지 못했다. 르노21이 82번가로 들어서서 집에서 2백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회전길에서 오른쪽으로 커브를 틀었을 때, 택시가 난폭하게 다가와 앞길을 막는가 했더니 메르세데스가 바짝 뒤에 붙어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렸다. 눈과 입 부위에 구멍 세 개가 뚫린 복면을 쓴 남자 몇 명이 내리더니 소음기가 부착된 소총을 발사해 불쌍한 운전기사의 머리통에 구멍을 내버렸고 차 밖으로 끌어내 다시 네 발을 더 쏘아버린다. 기사는 사건이 알려져 사람들이 모일 때까지 숨을 쉬고 있었지만 앰뷸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향하던 중 절명해버리고 만다. 괴한들은 마루하를 메르세데스에, 베아트리스를 택시에 싣고 급하게 출발해 보고타 시내를 질주하는데, 붐비는 퇴근시간에 지들이 튀면 얼마나 튀겠는가. 이렇게 납치된 두 명의 여인이 모처의 좁은 방에서 다시 만난다. 군대훈련을 경험했고 예비역 대위 자격이 있는 베아트리스는 괴한들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여유가 있었다. 이들이 베아트리스는 원래 납치 명단에 포함되지 않아 돌려보내겠다고 하자, 올케를 바라본 베아트리스는 자진해서 남겠다고 말해 마루하는 감격해버리고 만다. 혹시 모르지. 곱게 보내줄 리가 없잖아. 그 결정 때문에 목숨을 건진 것인지 누가 알랴. 이 작품은 이때부터 다음해 1991년 6월 이들이 납치에서 풀려나고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자수하여 스스로 교도소에 입소하는 장면까지다.


  마루하와 남편 알베르토 바야미사르가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만난 것은 1993년 10월. 납치에서 풀려나 2년 4개월 만이었다. 이 자리에서 부부는 마르케스에게 마루하와 시누이 베아트리스가 납치되고, 갇힌 장소에서 겪었던 경험, 두 명을 석방시키기 위한 각 계층 사람들의 노력과 납치한 쪽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 편의 소설로 만들어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한다. 작품을 쓰는 데 필요한 모든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 시점이 가볍지 않다. 왜냐하면 콜롬비아 역사상 가장 악질적인 살인자인 에스코바르가 아직 처단되지 않은 상태였고, 국내 치안은 여전히 테러를 감행하고 있는 카르텔 쪽 단체 로스 엑스트라디타블레스의 기세 역시 주눅들기는커녕 에스코바르 자수 이전보다 더 맹렬하게 무차별 테러와 폭력을 행사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런데 이들의 납치를 소설로 쓴다고? 그랬다. 물론 구상 단계에서 에스코바르가 은신처 지붕 위에서 집중적인 기총소사를 받아 죽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게 얼마야, 안 그래?

  그런데 얼마 후, 작가는 마루하와 베아트리스 말고 여덟 명의 기자들이 이들보다 더 먼저 납치되었으며 결코 따로 떼어내서는 되지 않을 이야기인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차례로 이 시기에 납치됐던 사람들과 그 가족들을 인터뷰하는 한편, 이들이 남긴 메모나 기타 자료를 수집해 엉클어진 모든 것을 정리하며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내게는 굉장히 낯선 마르케스 표 르포 소설이 완성된다.

  1990년 8월 30일, 가장 먼저 납치된 사람은 디아나 트루바이. 크립톤 텔레비전 뉴스 책임자이며 잡지 『뉴스&뉴스』의 편집자를 겸해 일하고 있다. 특종을 잘 잡아내기로 유명하며 좌익반군과 내란시기에 반군 지도자와 단독 인터뷰를 따내 장안의 스타가 된 경험이 있는 막강 커리어의 히로인이다. 디아나에게 에스코바르와의 단독 인터뷰를 제안했으니 이걸 덥썩 물지 않으면 가짜 디아나라서, 그날이 되자마자 뉴스 논설위원 아수세나 리에바노, 편집자 후안 비타, 카메라맨 리처드 베세라와 오를란도 아세베토, 그리고 콜롬비아 주재 독일 특파원 헤로 부스까지 모두 여섯 명이 길을 나섰다가 몽땅 납치당하고 말았다.

  마리나 몬타야는 마루하보다 두 달 먼저 납치당했다. 환갑이 넘은 노년이지만 여전한 미모를 유지하고 있는 출렁이는 금발의 미인. 특히 손과 손톱이 돋보인다. 이 사람은 동생 헤르만 몬토야 때문에 납치당했다. 헤르만이 공화국 전임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내 막강한 스피커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해 로스 엑스트라다타블레스가 데려왔지만, 납치행각을 벌인 뒤에 보니까 헤르만 몬토야는 이미 골방 신세로 떨어진 지 오래고 더구나 지금은 캐나다 대사로 나가 있어서 현 정부 정책에 감놔라 배놔라 할 처지가 되지 못한다. 납치가 있었고, 요구사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당연히 인질에 대한 처형을 동반하는 것. 이때 납치범은 중요도가 떨어지는 순서로 사형을 집행한다. 그리하여 마리나 몬토야는 불행하게도 첫번째 처형 대상자로 이름을 올리고, 그렇게 된다.

  마리나가 납치되고 불과 네 시간 후에 당한 프랑시스코 산토스. 일명 파초 산토스. 이이는 신문 『엘 티엠포』의 편집부장이다. 15년 전에도 파초의 아버지 에르난도스 산체스에 대한 납치기도가 있어서 그런지 산초는 납치 기간 내내 무지하게 적응을 잘 하면서 오히려 감시하는 청년들을 감화감복 시키기에 이르는 유쾌한 사람이다. 자신이 어디에 갇혀 있는 지도 척 보고 알지만 함부로 도망하기엔 날아드는 총탄이 겁나 그냥 있기로 한다. 나중에 절호의 찬스를 맞아 창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 총 든 감시원이 “지금 뭐해!” 라는 외침에 “보면 몰라? 똥 누잖아.” 대꾸해서 자기 목숨 자기가 구한다.


  지금 두 권짜리 이 책은 절판이다. 이렇게 말하면 출판사한테 미안한데, 그렇다고 독자를 위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지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작품을 원하는 사람들은 선택하지 마시라. 이걸 소설이라 할 수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신동아나 월간조선에 5회에서 6회 분량으로 연재하면 딱 좋을 듯하다. 마르케스가 쓴 “르포소설”이라기 보다 그냥 “르포르타쥬”라고 하는 게 맞다. 웃기게도 책 뒤표지에 “<마술적> 리얼리즘에서 <사실적> 리얼리즘으로의 변신!>이라 써 놓았다. 아무리 거장이라도 다 마음에 들게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으, 이거 진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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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라기 / 광대가 공연예술신서 78
허규 지음 / 평민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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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4년 갑술생. 경기도 고양 사람으로 서울대 농대 시절에 연극부에 다니며 뜻을 세웠다. 연극하는 데 졸업장이 무슨 대수, 임학과 다니다 때려치웠다. 1956년 제작극회 창단멤버로 들어가 존 오스본 작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의 조연출로 시작했으니 처음부터 연기에는 뜻이 없었다고 본다. 1960년엔 실험극장 창단멤버로 참여해서 창립공연으로 이오네스코의 <수업>을 연출했는데, 본격적인 연출 데뷔작으로는 1961년 제작극회의 명동 국립극장 공연 차범석 작 <껍질이 째지는 아픔이 없이는>으로 친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엔 연극해서 밥 빌어먹고 살기 정말 팍팍해서 KBS, TBC, MBC를 차례로 돌아가며 연속극과 드라마 연출자로 활약해 “방송드라마의 차원을 높이고 건강한 방향을 제시”했다고 평가받는다. 1970년에 실험극장에서 오영진 작 <허생전>을 연출한 것을 계기로 우리나라 전통극에 몰입해 방송국을 때려치우고 “전통의 현대적 계승과 재창조”를 목표로 민예극장을 창단, 창단극으로 <고려인 떡쇠>를 올렸다. (인터넷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했음)

  허규의 첫 희곡은 1977년 제1회 대한민국연극제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물도리동>. 이후 1979년 대한민국연극제에서도 <다시라기>로 한 번 더 연출상을 받아 10월 25일에 무대에 올렸다. 1979년 10월 25일. 이날 딱 한 번 공연하고 막을 내렸다. 다음 날 새벽, 궁정동에서 김이 쏜 총알이 박의 뇌에 박히는 유고상황이 벌어져 게엄령이 떨어졌으며, 지금 생각하면 놀랄지 모르지만 전국적으로 애도 물결이 몰아치던 때라 어딜 감히 <다시라기> 같은 마당극을 올릴 수 있었을까. 공연을 준비하느라 쓴 돈은 하늘로 날아갔건만 절치부심, 허규는 다음해 5월에 국립극장 소극장을 빌어 재공연에 들어간다. 아뿔싸. 이제 또다시 한반도는 남쪽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황황하고 참담한 국면을 맞았으니 이번엔 관객이 한 명도 들지 않은 텅 빈 극장에서 공연을 해야 했다. 그리고는 2000년, 허규가 숨을 거둘 때까지 재공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책 머리말 참조). 극작가는 재공연도 못 봤지만 지금은 <다시라기>가 예술종합학교 입학 시험 실기 텍스트일 때도 있고, 다양하게 각색해 자주 공연하는 대표적 레퍼토리라고 한다.

  연출가, 극작가라기보다 이것들을 통틀어 연극인으로의 허규는 무엇보다 창극을 현대 무대에 새롭게 올려놓았다는 업적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전설적인 여성 명창인 박녹주, 김소희 등을 앞세운 여성국극으로 명을 이어가던 창극은 1970년대 들어 개봉관 공연은 전혀 없었고 재개봉관에선 간혹 있었으나, 거의 대부분 변두리 동네의 작은 재재개봉관 극장에서 “1부 쇼, 2부 영화”, 이런 수준으로 전락해버렸다.  당연히 공연 시간도 두 시간을 넘지 못해 우리나라 고유의 창극이 갈 길을 찾지 못하던 때, 허규는 다섯 시간 이상을 공연하는 대작 혹은 제대로 된 창극을 시도했으며 이 과정에서 잊혔던 <강릉매화전>을 복원했다고 한다. 이이가 없었더라면 1970년대 중후반부터, 기억하기로는 중구 정동 당시 문화방송 건물 강당에서 주로 공연했던 마당극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노인이 되었지만 당시 윤문식, 김종엽, 김성애 등이 시민들의 눈과 귀를 붙잡아 기어이 배꼽까지 빼고 말았던 여러 마당극은 그때의 인기를 유지하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다시래기”의 사전적 의미는 “전라남도 진도에서 전승되는 장례풍속. 출상 전날 밤에 상가에서 노래와 춤과 재담으로 상주를 위로하는 놀이이다. 국가 무형 문화재 정식 명칭은 “진도 다시래기”이다. 국가 무형 문화재 제81호.” (인터넷. 표준국어대사전)


  이것이 위키피디아로 넘어가면 “한국의 상여놀이의 일종”이며 “출상 전날 밤 빈 상여를 이용한 놀이로서 상을 당한 유족들의 슬픔을 누그러뜨리고 죽은 자의 극락왕생을 축원하기 위한 행사”이다. 진짜 상주 말고 가짜 상주, 즉 가상주가 등장해 상주 대신 손님도 맞고 곡도 하고 어른들 빈 술상 눈에 들어오면 어, 진숙이 어멈 윗돌 어른 새 상 가져다 드려, 술 한 주전자하고, 마당 간수도 제대로 한다. 물론 진도라니까 신랄한 전라도 사투리로 그랬을 거다. 그런데 아무 초상이나 이런 건 아닐 터. 어린 아이 아홉 두고 초년에 고기잡이 갔다가 파도에 실려 온 초상집에서 아무리 슬픔을 누그러뜨린다는 명목이라도 꽹과리, 장고, 북을 동원해 춤과 재담을 발휘할 수는 없을 테니. 그리하여 필요충분 조건이 반드시 호상일 것. 놀이패를 넉넉하게 먹이고 초상 끝나면 행자라도 쥐여줄 수 있는 방귀깨나 뀌는 집일 것.

  어느 시골에 초상이 나 갔더니 고인이 아흔이 넘어, 당시엔 무지무지무지하게 오래 사신 거였다, 편하게 잠자다 깨지 않았다는데, 편히 쉬시기를, 풍물은 부르지 못하고 대신 노래방 기계 가져다 밤새 노래하고 춤추고 놀았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이것도 일종의 다시래기로 볼 수 있다. 진도는 아니지만. 또 있나? 있다. 임권택 감독이 1996년에 연출한 <축제>. 밤새도록 조문객이 술 마시고 고스톱 치고 도리짓고땡 하고 주정부리고 하는 건 뭐 상가면 늘 하는 일이고, 초상 다 치룬 후에 기념사진 한 방이 무슨 일이래? 자, 모두 여기 보셔요. 하다가 상복 입고 딴 표정 지을 수 없어서 엄숙 모드로 있는데, 찍사가 하시는 말씀이, “얼굴이 왜 그래요? 어디 초상 났어요?” 하니 사람들이 와하하하…. 그것도 일종의 다시래기지 뭐겠는가. 우리나라 대부분의 호상은 전부 일종의 다시래기다.

  이 책에 나오는 <다시라기> 이야기는 다 끝났다. 여태 말한 ‘다시래기’를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다. 춤과 소리, 음악, 장단 같은 것을 문자로 이야기해봤자 책을 직접 읽은 나도 이해 못하고, 그걸 전해본들 당신도 이해 못하니 그냥 지나가자. 초상난 김에 한 판 잘 때려먹는 굿판이 벌어지는 거다, 이런 선에서. 책을 읽으면 보탤 수 있는 건 소리꾼이 하는 사설의 내용 뿐이다. 그거 한 자락 소개해보자.


  “진도 다시래기에 나오는 춤은, 사당과 중이 추는 허튼춤을 비롯하여 사당이 추는 곱사춤과 거사가 추는 봉사춤과 같은 이른바 소회적인 발림춤이 있다.” (위키피디아)

  라고 했고, 허규는 거사 대신에 정말 봉사를 등장시켜 (봉사 역을 하는 거사겠지만 하여간 대본에는) 봉사가 춤도 추고 소리도 한다. 봉사의 아내가 아이를 낳는 순간, 소리 한 자락 꽝!


  홀애비 죽어 원한귀야, 총각 죽어 몽달귀야 너도 먹고 물러가라, 선달 죽어 노망귀야, 과부 죽어 한 식귀야, 너도 먹고 물러가라, 신통, 방통, 해산통, 밥통, 똥통, 오줌통, 배통, 복통, 장구통, 북통, 요통, 옆구리통, 신통, 방통, 퉁 터져서,

  옥동자를 쑥 내주소,

  잠잘 때는 반듯 눕고

  사랑한 것 보지 않고

  고른 자리 찾아 앉고

  음한 소리 듣지 않고

  삼가하고 조심했으니

  아들이면 정승감

  딸이면은 정경부인

  그 아이 수이 낳아

  무럭무럭 자랄 적에

  너그럽고 부드럽게

  자상하고 지혜롭게

  잘 먹이고 잘 길러서

  눈망울은 수정같이

  마음은 하해같이

  기운은 철퇴같이

  재조는 조물주같이

  훌륭하게 길러 내어

  그른 일 바로잡고

  바른 길로 키우리다.

  두리둥, 두리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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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1-22 18: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도리동은 들어 본 것 같습니다. 와, 근데 이분 참 부침이 많으셨네요. 그런 속에서도 끝까지 해 내셨던 걸 보면 존경스럽고. 돌아가셨을 땐 어떠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암튼 이리뷰를 통해 또 한 번 배우네요. 잘 읽었습니다.^^

Falstaff 2024-01-22 16:36   좋아요 1 | URL
이건 중국이 부러운 겁니다. 걔네들은 경극, 북경에서 공연하는 전통극을 이어가기 위하여 무진장하게 애를 쓰고 있거든요. 저 천년 전 원나라 시대부터 이어지는 극의 전통을 이으려는 노력이 정말 부러울 정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허규의 작업이 비록 상업적이고 통속적이었다고 할지언정 존중받아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별 다섯? 넷? 헷갈리다가 결국 넷을 선택한 저도 밉습니다. ㅋㅋㅋㅋㅋ 이제 오후 다섯 시도 안 됐는데 벌써 취한 거 같네요.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7
알랭 로브그리예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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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랭 로브그리예의 작품으로는 대단히 의외다. 마치 허를 찔리는 듯한 느낌. 영화에도 관심을 가져 여러 시나리오 작품을 써서 황금사자상 같은 것도 받았으며 영화 연출도 몇 편 한 바와 같이 로브그리예 표 소설이라기 보다 영화를 위한 밑그림 같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정말 영화로 만들었다면 첫 장면, 남자인 듯도 하고 여자인 듯도 한 진Djinn이 등장하는 장면부터 관객을 팍 몰입시키는 효과를 기대할 만하겠다. 7장 마지막에 딱 한 번 나오는 베드 씬도 (영화라면) 적절한 분량에다가, 열린 결말이라서 엔딩 크레딧이 죽 올라갈 때까지 관객은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차마 일어나지도 못하고, 이 영화를 좋다고 해야 하나, 후지다고 해야 하나, 재밌다고 해야 하나, 재미없다고 해야 하나, 고민하게 만드는 대단히 기분 좋은 심통도 부릴 수 있겠다. 물론 연출하는 감독에 따라서.

  로브그리예 작품을 많이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그의 작품으로는 낯설다. 책을 다 읽고 작가 연보를 보니 이렇게 쓰여 있다.


  “1980년부터 1987년까지 브뤼셀자유대학교의 문학사회학 연구센터 소장직을 맡을 것이다. 멕시코 순회강연을 다닌다.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교수 이본 레너드의 요청으로 쓴 책 『면접Le Rendezvours』을 1981년에 출간한다. 프랑스어에 숙달하고자 하는 미국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육 목적에서 집필한 소설인데, 이야기의 얼개가 문법의 활용과 정교하게 맞물려 전개되도록 고안한 텍스트다. 같은 해 미뉘 출판사에서 나온 『진Djinn』은 그 텍스트에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보강하여 새로 펴낸 소설이다.”


  역자 성귀수는 위 인용에서 첫 문장을 미래 시재를, 다음 문장부터 현재 시재를 사용한다. 미국 대학생의 불어 향상을 위한 한 학기용 교과서라서 1장부터 8장까지 장이 올라갈수록 난이도도 따라서 올라간다는데, 본문에서도 단순과거 시재니 복합과거 시재니 시재 이야기가 몇 번 나와서 혹시 역자가 미래 시재와 현재 시재를 혼용해 쓰는 장난을 쳤을까? 잠깐 생각했다가, 아니겠지, 타이포겠지, 이렇게 여기기로 했다. 아, 이거 시비 거는 거 아니다. 작품이 프랑스어 교재의 난이도에 따라 쓰여졌다니까 혹시 해서 나도 장난삼아 해본 말이다.

  미국인 학생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프랑스 소설 한 편 읽기도 쉽지 않은데, 그것도 다른 작가도 아니고 골치 아픈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한 알랭 로브그리예가 쓴 텍스트를 읽는 것만 가지고도 충분히 혈압 올라가는 일이건만 그가 보통 쓰는 식으로, 소위 누보-로망 작품으로 교과서를 만들었다면 그걸 제대로 읽고, 읽을 수 있다고 쳐도 감상할 수 있었을까. 이를 어엿비 여긴 작가는 나름대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게 썼을 지도 모른다. 근데 이이가 살아 있어야 물어보지? 거참.

  알랭 로브그리예의 작품은 대단히, 대.단.히. 건조하다. 사물이나 상태를 미분적으로 쪼개 지면에 옮기는 행위를 즐긴다. 이 작품 1장 두번째 문단은 이렇다.


  “내부는 온통 조용하다. 좀더 바짝 귀를 기울이자, 꽤 가까운 곳에서 맑은 소음 하나가 규칙적으로 탐지된다. 제대로 잠그지 않은 수도꼭지로 물이 새면서 통이나 대야 또는 바닥에 고인 웅덩이에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다.”


  내가 아는 알랭 로브그리예라면, 이렇게 썼을 지도 모른다.


  “가로 20미터 세로 50미터, 높이 7미터 60센티미터의 텅 빈 창고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청각에 보다 더 주위를 기울이자 두시 반 방향 약 5.3미터 정도 거리에 있는 지상 60센티미터 높이에 설치된, 반의 반은 흑갈색 녹이 슨 크롬 도금 수도꼭지의 물이 새면서 수도 앞에 놓인 가림막 때문에 창고 입구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통이나 대야 아니면 그냥 바닥에 고인 물 웅덩이에 분당 35회가량 빈도로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니면 식물에 물을 주는 물 조리개일 수도 있다.”


  원래 문장을 왜 로브그리예가 허용하지 못하느냐 하면, 수도꼭지에서 물이 어디로 떨어지는 지 모를 수 없다. 그냥 한 번 휙 쳐다보면 될 것을. 아마 저 장면 자체가 나오지 않았을 거 같다. 안 봤으니까. 근데 저렇게 썼으니 어찌 예외적인 작품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이이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기가 질리는 건, 내가 다시 쓴 문장보다 백 배는 세밀한 걸 잠깐도 아니고 무려 2백 페이지에 육박하거나 그걸 넘어가는 분량 내내 읽고 있다고 가정해보시라. 아주 기가 넘어간다. 아니라고? 그럼 당신은 누보-로망하고 연분이 무지하게 잘 맞거나 안 읽어본 거다. 나는 특히 로브그리예와 사로트를 읽을 때마다 그렇게 돼지머리고기에 소주 한 병이 생각난다. 맨정신이 힘들어서.

  내가 처음 읽은 누보 로망 작품이 나탈리 사로트가 쓴 <황금열매>였는데, 그냥 읽었다는 말이지 무슨 감명이나 감동, 감화 이딴 의미 아니다. 말 그대로 문자, 글씨 모음을 읽었을 뿐. 이어서 두 번째가 로브그리예. 세번째 나이 든 마르그리트 뒤라스와 미셸 뷔토르 등등.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소감은 대동소이하게 “문자를 읽었음”에서 그리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다. 실제로 로브그리예와 비슷한 시기를 살다 간 쥘리앙 그리크는 특히 로브그리예를 예로 들면서 누보-로망의 과도한 미분적 세계관과 묘사방법을 크게 비판했는데, 아이고, 그걸 읽고 얼마나 기분이 좋든지.

  그러면 <진>은 로브그리예의 이색적 작품이며 누보-로망과 조금의 거리가 있으니 더 즐겼느냐고? 즐긴 건 맞지만 암만해도 아쉽다. 로브그리예를 읽을 때는 아주 엷은 지옥의 맛을 보는 재미로 이이를 선택해 돈 내고 일부러 고역을 견디는 소프트 코어 식 피학적 재미인 것을, 그걸 쏙 빼앗긴 느낌이다. 누보-로망이 웃기는 것이, 읽을 때 어렵고 읽고 나서도 머릿속에 남은 거 없어서, 나한테 돈 빌려가서 안 갚은 놈 있으면 재미있으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데, 위에서 내가 <진>의 한 단락을 다시 써 본 것처럼, 내 주위에 글 좀 쓴다, 하는 동무들은 한 명도 빼지 않고 다들 한 번씩 누보-로망 식 미분적 문장해체를 시도해본다는 말이지.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매력”이지. 이거 말고 어울리는 말이 또 뭐가 있겠어? 아, 몰라, 몰라, 몰라. 요즘 문청들한테도 누보-로망이 연구 대상인지는.


  <진>은 프롤로그로 시작한다. 화자 ‘나’부터 골이 좀 아프다. ‘나’는 시몽 르쾨르라는 이름의 남자의 수수한 아파트 방을 열고 진입한다. 책상 위에는 더블 스페이스로 타자한 99쪽 분량의 소설을 발견한다. 소설을 읽어가면서 든 생각은 프랑스어를 가르치기 위한 교과서 가운데 하나를 읽는 기분이다. 미국 대학의 학기당 8주에 대충 들어맞게끔 여덟 장chapter으로 구성한 작품.

  ‘나’는 저자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다. 키이우 출신의 전기기술자 보리스 쾨리스멘이라는 프랑스 여권이 나왔지만 틀림없이 외국에서 만든 조악한 위조 여권이다. 게다가 이름이 우크라이나 사람으로 볼 수도 없다. 몇 달 전부터 파시가street에서 프랑스 현대문학을 가르쳤는데 이땐 또 로빈 쾨르시모스, 일명 시몽 르쾨르라고 되어 있다. 이 오리무중의 사내가 귀신처럼 사라지면서 남겨둔 유일한 것. 그게 99쪽의 소설 한 편이다. <진>의 본문 1장부터 8장까지로 구성한.

  내용? 프롤로그, 에필로그 빼면 겨우 백쪽 분량인데 내용까지 다 일러드리면 정작 진짜 책 읽을 땐 뭘 읽으시려고. 그냥 시간의 다차원 공간 이야기라고 해두자. 충분히 즐길 만한. 전혀 어렵지 않은 로브그리예. 그의 누보-로망에 질리신 분들도 가볍게 도전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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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1-19 06: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허규, 《다시라기/광대가》
화요일.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납치일기>
수요일. 비톨트 곰브로비치, 《이보나, 부르군드의 공주 / 결혼식 / 오페레타》
목요일. 찬쉐, <황니가黃泥街>
금요일. 존 스타인벡, <통조림공장 골목>

잠자냥 2024-01-19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그 양반이 글케 해맑게 웃었나봅니다?! ㅋㅋㅋㅋㅋ

Falstaff 2024-01-19 10:29   좋아요 1 | URL
영화계에서도 돈 좀 벌었잖아요. 그 동네가 기본 얼굴은 있어야 하는데 제법 어울립니다. 거의 모든 책에 같은 사진을 올렸더라고요. 잘 생겼습니다. 그래도 제 영원한 라이벌은 알랑 들롱입니다. ㅎㅎ

stella.K 2024-01-19 2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그러고 보니 오래 전 멋모르고 이 양반의 질투에 도전했다 질린적이 있네요. 누보 로망을 미분적이라고 하시니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도 이 책은 읽을만한가 봅니다. 영화같다니.
근데 미분적으로 글을 쓰시는 팔님의 동무가 계시다니 누군지 궁금하네요. ㅋ

Falstaff 2024-01-19 20:35   좋아요 1 | URL
하여간 누보 로망 책은 읽기가 여간 어려워야지요.
ㅎㅎㅎ 동무들이 걍 한 번 써본 건데요 뭐. 최수철을 필두로 당시 설대 불문과 출신 작가들이 누보 로망 식으로 많이 썼잖습니까. 폼은 나더라고요.
 
사기꾼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장인숙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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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다시 발자크. 발자크는 눈에 띄기만 하면 읽는다! 게다가 이건 발자크 표 인생극 “휴먼 코미디”가 아니고 무려 희곡이기도 하다. 어찌 일독이 없을 수 있을까? 장인숙이 쓴 역자해설을 보면, <사기꾼>은 1841년에 쓰여졌으며 초연은 1851년에 당대 가장 유명한 배우 프레데리크 르메트르가 맡았다. 그러나 공연이 성공이었는지 실패였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에 의하면 발자크가 빚을 갚기 위해 여러 사업을 시도했다가 어떻게 그렇게 알뜰하게 말아먹었는지, 거의 전 종목을 해 자시고, 이 와중에 애초에 작가로 등장하기 전에 시도했다가 난타 당해버리고 만 연극계로 눈길을 돌린다. 그리하여 과감하게 선언하기를 1년에 서른 편의 희곡을 쓰겠다, 사실 발자크의 필력으로 보면 1년에 희곡 서른 편이 그렇게 무리한 분량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하여간 츠바이크는 평전을 통해 연간 서른 편이라면 발자크가 연극과 희곡을 우습게 알고 있었던 증거라고 들이밀었다.

  프랑스 문학을 전공한 역자의 해설을 읽어보면,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을 탁 집어 알려주어 갑자기 눈 앞에 환하게 밝아지기도 한다. 장인숙 교수는 말한다.


  “이 희곡에서 작가는 몰리에르 희극의 전형적인 등장인물 구도에 따라 남편과 부인, 과년한 딸 그리고 하인들로 구성된 동시대의 평범하고 안락한 가정이 어떤 위기에 직면해 있는지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래서 일단 가방끈이 긴 사람 의견을 들어보는 것이 좋다. 나는 <사기꾼>을 읽으면서 후배작가 에밀 졸라의 루공-마카르 총서 가운데 <돈>과 <이전투구>의 무대인 파리 증권시장을 연상하며 주인공 메르카데를 어떻게 졸라의 사카르와 비교할까 만 궁리했지, 시기를 18세기도 아닌 17세기로 돌릴 건 아예 생각하지도 못했다. 당연히 <타르튀프>를 읽어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지. 위 인용문을 읽자마자 애꿎은 허벅지만 한 대 얻어 터졌지 뭐야.

  그런데, 발자크의 인생극 가운데 파리의 증권거래소의 선물거래를 다룬 작품이 어째 생각나지 않는다. 내가 읽은 열 권의 발자크 가운데는 없다. 다 합해서 아흔 편이 넘는 인생극 가운데엔 있겠지. 이왕 인생극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사기꾼> 역시 희곡이 아니라 소설로 썼더라면 근사한 인생극 드라마가 될 뻔했다. 희곡, 연극 공연을 위한 텍스트라 해피 엔드로 마감을 해서 그렇지 소설이었다면 <고리오 영감>처럼 비감한 결말로 얼마든지 유도할 수 있었을 텐데. 오히려 몰리에르의 전통을 따르느라 엉뚱한 인물이 나타나 억지 해피엔드를 만든 기분이 든다. 물론 이 극을 초연한 1851년의 파리지앵들은 갈채했을지 몰라도 21세기 독자는 내 입장에서는 아쉽다. 비극으로 만들었다면 그냥 주인공이 권총 자살하는 것으로 끝냈을 지도 모르겠다. 이것도 전통이잖여?


  주인공은 오귀스트 메르카데. 참 다양한 사람들에게 약 32만 프랑의 빚을 지고 있다. 막이 오르면 1년 8개월 동안 월세를 내지 않은 파리의 방 열한 개짜리 고급 주택의 집주인이 메르카데한테 밀린 월세 더하기 월세의 복리 이자를 내든지, 집을 비우든지 선택을 하라고 추궁한다. 무려 11년 동안 살아온 세입자에게 그간 정도 많이 들었을 텐데, 원래 그런 거 다 봐주면 건물주 노릇 못 하는 것이라 집주인 브레디프는 얄짤없다. 그러나 메르카데 손엔 미쇼냉이란 작자가 발행한 4만7천여 프랑의 부도 어음 한 장. 이제 메르카데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무남독녀 외동딸 쥘리를 지참금 없이 백만장자에게 시집보내 사위의 돈으로 급한대로 자신의 부채를 끄거나 연기하고, 다른 사업으로 기사회생을 도모하는 일.

  사기꾼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상당한 수준의 부자라고 과시하는 것이다. 메르카데 선생도 급여를 주지도 못하면서 집사와 하녀, 요리사를 두고 있고, 아내에게 최고급의 드레스를 입혀 잘생긴 드 메리쿠르 청년과 함께 이태리어 극장에 다니게 했다. 당연히 메르카데는 상당한 수의 채권자들에게 날마다 들들 볶이지만 딸 팔아 위기를 모면하려는 한 큐를 위해 아내를 통해 드 메리쿠르 청년에게 딸의 중매를 부탁했고, 그리하여 막이 올라가는 날, 지방에 상당한 토지를 가지고 있는 드 라 브리브가 청혼자의 자격으로 메르카데 씨의 집을 방문할 예정이다. 프랑스 전통 희극의 공식에 의하여 메르카데 씨의 외동딸 쥘리는 당연히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으니 이름을 아돌프 미나르, 라고 하는 회계사이다. 회계사는 회계사이지만 아직 새끼 회계사라서 천 몇 프랑의 월급을 받을 뿐이라 전망이 밝지는 않다.

  쥘리 아가씨는 아빠한테 자신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미나르를 집으로 불러 아빠와 면담을 주선한다. 매르카데 씨는 원래 고도 선생하고 동업을 해 사업이 번창했다가 동업은 언제는 끝나는 일이라 고도 씨가 15만 프랑을 가지고, 나머지 모든 것은 물론 남겨두고, 인도로 떴다. 이후 8년 동안은 승승장구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양길에 접어들어 지금은 주식 공매수도를 전문으로 하다가 거덜이 난 상태. 고도가 돌아와 약속대로 인도에서 사업에 성공할 경우 생긴 이익의 절반을 메르카데에게 준다면 단박에 회복할 수 있겠지만 말이지. 이런 정황을 딸이 사랑하는 미나르에게 이야기하고, 32만 프랑의 빚을 상속할 수 있으면 결혼을 허락하겠다, 이렇게 뜸을 들이다가, 솔직히 말해서 말이지, 그거 말고라도, 자네 월급이 겨우 천 프랑인데 날 때부터 좋은 옷, 좋은 음식 먹고 자란 쥘리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 지금은 너네들 둘이지만 곧 세 명, 네 명, 다섯 명, 어쩌면 열 명이 될 지도 모르는데?

  근데 사실은 미나르가 자기 동업자 고도 선생의 친아들이다. 부부가 인도로 떠나면서 갓 낳은 아돌프를 메르카데의 회계사였던 뒤발 씨에게 맡기고 떠나버렸던 것. 하는 걸 보니 사업에 성공해도 어디 약속대로 하겠어? 미나르는 미련이 가득 남기는 했으나, 사랑하는 쥘리의 복지와 행복을 위하여 사랑을 포기하고 만다.

  이렇게 끝나면 극이 아니지. 메르카데는 젊은 백만장자 드 라 브리브에게 저녁 만찬을 대접하기 위하여 요리사 비르지니의 돈으로 식자재를 사오게 하고, 자신의 채권자 가운데 한 명인 베르들랭에게 현란하게 구라를 쳐 은식기를 빌려오는 동시에 천 에퀴를 빌어 결혼식에 쓸 자재를 들여온다. 마포에 드 라 브리브의 황포돗배만 들어오면 인생이 바뀌는 거야, 이러면서.

  드디어 도착한 드 라 브리브. 이것도 완전 사기꾼이다. 둘 다 잿밥에만 마음이 있어서 드 라 브리브는 장인짜리를 보자마자 지참금 이십만 프랑을 요구한다. 이에 촉이 좋은 주인공 메르카데 선생은 단박에 거품인 줄 알고 그가 브리브에 가지고 있는 토지의 현 시가, 근저당 설정 금액 등을 정확하게 판정해 드 라 브리브로 하여금 좌절하게 만든다. 그리고 조금 후, 자신이 가지고 있는 4만7천 프랑짜리 부도어음의 발행인인 미쇼냉이 드 라 브리브인 것이 밝혀진다. 이제 결혼 이야기는 파투가 나고, 그렇다고 가난한 회계사인 미나르를 사위로 삼을 수도 없으며, 오늘 밤 당장 모든 채권자가 한 곳에 모여 우리의 주인공 메르카데 선생을 감방에 보내려 서류작업을 시작한다는 첩보가 들어와 메르카데는 인생 마지막 사기를 도모하기에 이르는데.

  걱정하지 마시라, 몰리에르를 전범으로 해서 쓴 작품이라 결말은 행복할지니.

  그건 그렇고, 20세기 모든 시기를 걸쳐 전 세계 젊은이들을, 고도가 누구니? 의문에 휩싸이게 했던 그 양반이 알고 보니 사실 인도로 갔었는데, 그 고도를 계속 기다려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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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신漁神을 찾아서
장웨이 지음, 최창륵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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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앞날개의 작가 소개는 이렇게 쓰여 있다.


  “산둥성 룽커우시에서 태어났다. 고교 진학 대신 고무공장에서 일했으며, 중등교육과정을 이수한 뒤에도 농업과 어업에 종사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단편소설을 발표했으며 「음성聲音」(1982)과 「어떤 맑은 연못一潭淸水」(1984)이 중국작가협회 주최 전국우수단편소설상을 수상하며 유명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음성聲音」의 한자어를 발음하면 “성음”이다. 거꾸로 쓴 거 아니다. 책에 그리 나와있다.)


  작가 장웨이는 1956년에 태어나 청소년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고무공장 직공도 하고, 농사도 짓고 물고기도 잡고 했던 모양이다. 앞날개 작가 소개를 읽으면 그러면서 소설을 써 성공한 입지전적 인물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사실을 알고 보면 1980년에 고향 룽커우시가 있는 얀타이 현에 있는 얀타이 대학 국어과를 졸업했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은 《장웨이 중단편소설선張煒中短篇小說選》으로 세 편의 긴 중편 또는 짧은 장편을 실었는데 등장인물이 산골 농부와 어부(어신을 찾아서), 바다를 면한 소도시(바닷가 호루라기)와 농촌(원두막의 밤)이며, 거의 모두 교육을 받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이라, 혹시 중학교만 졸업하고 고등학교과정은 이수만 한 작가의 환경과 직결되지는 않을까, 생각을 할 수 있다. 나도 그랬다.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공장 노동자와 농사, 어업에 종사하면서 빈 시간에 무수한 책을 읽고 글쓰기에 흥미를 느껴 소설을 쓴다는 것이. 어쩌면 출판사도 장웨이의 청소년 시절을 유독 강조함으로써 독자의 흥미를 조금이라도 더 유발하고자 했을 지도 모른다. 아니겠지만. 악마처럼 거만한 문학과지성사가 그렇게 얍삽하게 머리를 굴리지 않았겠지. 그렇겠지. 뭐. 그래도 1980년 대학 졸업이니까, 이 당시 중국에서는 학교를 불문하고 대학이란 곳에 진학한 하나만 가지고도 머리가 상당히 좋다고 알아주던 시절이니 밝혔을 거 같은데 말씀이야.

  왜 이거 가지고 까탈을 유난하게 부리고 지랄이냐 하면, 두번째 작품 <바닷가 호루라기>를 읽다가, 이게 1987년 초에 완성했으니까 서른두 살이었는데, 바닷가에서 작은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해 도시의 친구들을 배불리 먹여주곤 하는 천사표 늙은이, 빼빼 마른 것도 모자라 몸에 힘줄만 남은 라오진터우 영감이, 젊은 시절을 회상하는 적지 않은 부분을 읽으면서, ① 지금 내가 왜 이걸 읽고 있나, ② 작품집에서 이런 건 좀 빼고 출판해도 될 거 같은 걸? ③ 하긴 문학과지성사가 가오가 있지 전편을 번역 출간해야 했겠지, ④ 스무 살 짜리가 습작한 것 같기도 하고 도대체 이거, ⑤ 애당초 이 작가의 책을 번역할 필요가 있었을까? 이렇게 교만을 떨었는데, 당연히 두번째 작품 <바닷가 호루라기> 하나에 대해서만 그랬다는 말이니 너무 웃지들 마시고요, 소설가도 정식으로 작법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을 거라는 황당한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바닷가 호루라기>는 마지막 스무 페이지를 남기고 도저히 읽어줄 수 없어서 세번째 실린 <원두막의 밤>으로 넘어갔다.


  근데 내가 아직 소설책 읽는 데 지극하게 얇은 소양밖에 없는 증거가 있으니, 이 장웨이란 56년 잔나비띠 작가가 해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후보로 오르고 있다는 거 아닌가 말이지. 밥 딜런도 받는 상이니 장웨이라고 못 받을 이유는 없지만, 미국하고 관계가 단단히 틀어진 중국의 시인, 작가가 당분간은 노벨문학상을 받지는 못할 것 같으니까 조금은 위안이 되긴 한다. 알고 보니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작품을 번역해 출간했다. 특히 문학과지성사에서 낸 대산세계문학총서 144번에 빛나는 단편집 《흥분이란 무엇인가》에는 작가를 스타덤에 올려놓았다는 <음성>과 <어떤 맑은 연못>이 다 실려 있다. 시집이 아닌 대산세계문학총서는 대충 다 읽은 듯한데, 어쿠, 이 책을 빼먹었다. 그래서 이 양반을 몰랐던 거다. 뭐 기회가 생기면 읽고 아니면 말고지 구태여 찾아 읽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이 두 권 말고 <도연명의 유산>과 <제나라는 어디로 사라졌을까>는 에세이. 안 읽을 거 같다.


  또 한 마디 할 것은, 책방 알라딘에서는 책의 제목을 《어신漁神을 찾아서》라고, 문학과지성사 출간 원본은 <어신魚神을 찾아서>라고 했다. “어”의 한자어 魚자 앞에 삼수변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사소한 문제이긴 하지만, 뜻이 달라진다. 어신漁神은 고기잡이의 신, 신기에 가까운 고기잡이 내공을 가진 고수를 말하고, 어신魚神은 물고기 신, 용왕처럼 물고기의 모양을 하고 있는 신이다. 내 경우엔 알라딘에서 책구경을 먼저 해서 어신漁神, 귀신 같은 어부라고 생각했으며 즉각 궈스싱의 희곡 <물고기 인간>을 떠올렸다. 내가 읽은 모든 책 가운데 <물고기 인간>에 나오는 낚시의 신이라 불리는 영감과 비슷한 수준의 낚시꾼은 청새치와 사투를 벌인 끝에 잡아 매달고 오다가 상어한테 다 뜯어 먹히고 만 노인 말고는 없다. 그 노인도 낚시의 신 수준하고 비교가 되지 않지만 하여튼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고기잡이 노인이니까 좀 후까시를 해주면 그렇다는 말씀.

  주인공 화자는 이제 백살에 육박하는 노인이다. 그래도 기억력이 여전히 생생해서 팔십 여 년 전 이야기를 해주는 것을 좋은 소일거리라, 자리를 턱, 잡고 저 멀고 먼 까마득한 시절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 작품을 발표한 것이 2015년. 그러니 시대적 배경은 1930년대 초반 중국의 두메산골이다. 화자 ‘나’는 큰 산의 깊은 곳, 깊고도 깊어서 이웃집이라고 해도 산 하나를 넘어야 있을 법하게 깊은 산골에서 돌덩이로 쌓은 집에서, 작은 돌투성이 밭을 개간해 고구마도 심고, 토란도 심고, 감자도 심어 주식으로 삼았다. 가끔 운 나쁜 짐승도 잡아 단백질 보충도 하고 그랬는데, 아주 드물게, 정말 정말 드물게 물고기 한 마리를 얻으면 그야말로 집안에 난리가 났다. 기껏 미꾸라지 한 두 마리, 그것도 죽어 바짝 마른 바람에 썩지 않은 미꾸라지 두 마리를 구했을 때도 물을 끓이고 미꾸라지를 넣고, 그 위에 각종 야채를 올려 푹푹 곤 다음 엄마, 아빠, ‘나’, 세 식구가 침을 뚝뚝 흘리며 맛나게 먹었던 기억이 있다.

  나이가 좀 들자 아버지는 ‘나’의 손을 잡고 산 두 개를 넘어 강줄기가 있는 골짜기의 학교, 당연히 서당 수준이긴 하지만 하여튼 학교를 가게 했고, 방 두 칸 집은 안방과 교실로 쓰는 큰 방 하나로 되어 있었는데, 가끔 안방에서 물고기 비린내가 풍기는 바람에 ‘나’의 코가 흥분,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 암만해도 돋보기를 낀 사팔눈의 영감 선생이 집 옆에 딸린 연못 속에는 아무리 더워도 발도 담그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물고기 요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 같아서, ‘나’는 하루 날을 잡아 연못에 훤히 내려다보이는 바위 위에 납짝 엎드려 해가 으슥할 때까지 연못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선생이 연못 옆에 쪼그려 앉아 작은 대나무를 드리우고 있었는데 미동도 하지 않고 오래 그러고 있다가 난데없이 대나무를 휙 잡아당겨보니 자루의 끝에는 역시 대나무로 만든 망, 그물 역할을 하는 망이 달렸고, 그 속에 한 뼘 정도의 물고기가 두어 마리 들어 있었던 거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아호, 환호성을 질렀고, 선생은 나를 불러 치도곤을 내렸으며, 아빠를 불러오라 명을 하더니 기어코 퇴학을 시켜버리고 말았다. 워낙 산골이라 물고기는 이렇게 귀했던 거였다.

  아버지는 생각보다 평온해 했다. 이왕 끝까지 공부하지 못할 것, 공부를 한다고 해서 꼭 좋은 사람, 부자, 기타 등등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스스로 어떤 일을 해 성공할 것인지 정해보라고 했다. ‘나’는 며칠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큰 물고기를 잡는 사람’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말을 들은 아버지는 눈을 감고도 물고기가 머무는 곳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하는 일이라서, 무엇보다 먼저 ‘어신’부터 찾아야 한다고 했다. 한 번 본 적 있는 바, 정말 대단한 사람으로 신선처럼 혼자 지내고, 족장님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고기잡이의 고수란다. 그저 보통 사람의 외모를 하고 있으며 스스로를 절대 어신이라고 말하지도 않고, 어신이라 생각도 하지 않는다. 자주 이사를 다니는데 점점 깊은 산골로 들어가 겉보기엔 가난뱅이 같지만 살면서 부족함 없는 생활을 영위한다는 말씀. 사실은 아버지 젊은 시절에 어신을 찾아가 제자가 되려 했지만 도무지 고기 잡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아 중도 작파하고 집으로 돌아와 ‘나’의 엄마와 결혼해 ‘나’를 낳고 자족하면서 나름대로 괜찮은 삶을 살고 있는 거란다.

  이 착한 아버지는 ‘나’를 이끌고 몇날 며칠을 걸어 드디어 어신, 이라고 아버지가 말하는 80대 노인을 찾아간다. 스승님, 제가 왔습니다. 저 말고 이 아이를 제자, 아니, 아들로 받아 주십시오. 얘야, 스승님께 아버지라고 불러라. 그리하여 ‘나’는 늙고 늙은 어신의 양아들이 되어 어신의 모든 것을 옆에서 관찰하기 시작한다.

  여기까지는 어신漁神 이야기. 작 후반에 가서 이 어신을 생을 마감하고, 그가 유일하게 사랑했으나 인연을 맺지 못한 다른 어신漁神을 만나는 이야기가 재미있게 그려지고, 이후 마지막으로 이번엔 진짜 어신魚神이 등장하며 작품을 맺는다. 그러니 제목을 魚神이라 해도, 어신漁神이라고 해도 상관없을 듯. 재미있는 것이 남자 어신은 수영에 서툴고 물에 들어가기 싫어한다. 작은 연못이나 개울에서 큰 물고기를 맨손으로 잡는 천하신공의 소유자. 이름하여 한수旱手. 건조한 손. 반면에 이 어신이 평생 사랑해 마지 않은, 꿈엔들 잊으리까, 이젠 노파가 된 여인 어신은 물이 풍족하게 가득한 큰 호수에서 본 모습을 보이는 수수水手. 물의 손. 이 두 늙은이의 평생에 걸친 이루어지지 못한 순결한 사랑도 재미있다.

  그러나 분명 내가 소설을 읽는 소양이 부족해 생긴 일이겠지만 두번째 작품 <바닷가 호루라기>를 끝까지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나와 맞지 않아서, 셋보다 많은 별점은 주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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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1-17 13: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왜 그렇게 문지를 미워하십니까? ㅎㅎ
삼수변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차이가 있군요. 첨 알았습니다.
작가에 대한 주례사가 좋던데 노벨문학상이 주목할 정도면 상을 타던 못 타던 꽤 유명한가 봅니다.
이러고 저러고 지간에 세계 정세가 좀 안정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안정있고 독서가 있는 거지 나라 안팎이 어수선한데 책이 눈에 들어오나요? 참 거시기한 요즘입니다.
잘 읽고 갑니다.

Falstaff 2024-01-17 16:01   좋아요 1 | URL
창비만큼 안 미워해요. ㅋㅋㅋㅋ 이 사람들이 좋은 작품 많이 찍는데 미워할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근데 거만하긴 오지게 거만해요.

자기 주장을 세상에 외치는 것이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뿐인 세대가 있습니다. 이젠 한 발 뒷방으로 꺼져주는 것이 고마운 시점에 달한 인간들 말입니다. 저도 혹시 이런 무리들에 이미 편입된 건 아닌지 가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은 단 한 번도 안정되어본 적이 없고, 언젠가 여의도 만한 혜성이 지구에 떨어질 때까지도 그런 세상은 오지 않을 거 같습네다. 크크크크크.....

Falstaff 2024-01-17 16:04   좋아요 0 | URL
굉장히 유명한 출판계 뒷담화인데요, 한 때 잘 나가다가 난데없이 미국으로 이민가더니 다시 돌아와 활동하는, 한때 인기있던 소설가의 작품 속에 그로테스크한 폭력적 인물로 aw라는 작자가 나옵니다. 이 aw가 키보드에서 문지의 첫 자음이라는 유언비어가.... ㅋㅋㅋㅋ.... 있었습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