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거위가
전예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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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예진은 스물여덟 살 때인 2019년에 <어느 날 거위가>로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며칠 후면 5년차에 접어드는 작가.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눈썹을 휘날릴 시기렸다? 책에는 데뷔작부터 2021년까지 쓴 단편소설 여덟 편이 실렸다. 지금은 장편소설을 쓰고 있으며 올해 2023년 말이나 늦어도 24년 초까지는 완성하고 싶다고,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관하는 ARKO 문학나눔 관련 영상을 통해 말한다. 유튜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도 ARKO 문학나눔 책으로 동네 도서관 신간 서가에 꽂혀 있는 것을 발견해서, 솔직하게 말하면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신진작가의 책이라 읽었다. 문지에서 나온 신인들 책이 읽어볼 만하다. 이번에도 기대를 갖고 열람실로 올라갔다.


  제일 먼저 나오는 단편의 제목이 <팬티>다. 그래, 그래. 바지를 뜻하는 팬츠 말고, 소위 ‘빤쓰’라 불리기도 하는 그 ‘팬티’ 맞다. 2019년에 잡지 『Axt』에 실렸던 작품으로 데뷔작을 빼고는 가장 먼저 발표한 것처럼 보인다. 조금은 도발적인 제목의 작품이 제일 앞에 실렸기도 하고, 다중의 눈길을 끄는 제목인 것도 맞아서 그런지 이 책을 소개하는 여러 서평을 봐도 <팬티>를 먼저 거론하는 것들이 많다. 어떻게 됐느냐 하면, 나무에 팬티가 걸려 있는 설치미술과 관련한 이야기다. 여기에 이제 노령에 접어들려고 하는 강상미라는 이름의 여성이 끼어든다. 모 광고회사의 부장으로 일하다가 은퇴한 강상미는 적지 않은 수의 늙은이들이 그러하듯이 젊은이들과 원활한 소통을 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아파트 단지 안의 나뭇가지 가득 팬티가 걸려 있는 것은 마땅치 못하다. 프리랜서로 일하는 옆집 103호 30대 여성은 스트링과 망사팬티에만 불만이다. 이 두 팬티가 여성의 성 상품화와 깊게 관련이 되어 있다면서. 나중에 보면 정작 자발적으로 망사 팬티를 걸려고 하는 여성은 전혀 그런 뜻도 없지만.

  이렇듯 책에 실린 전예진의 작품 모두 메타포다. 전방 위수지역에서 닭을 튀겨 파는 치킨집 주인은 군부대로 배달을 나갔다가 성인 네 명이 삶아 먹어도 남을 큼지막한 거위로 변신metamorphosis한 장준태 병장과 이현우 상병을 데려왔다가, 거위가 닭튀김을 얼마나 잘 먹는지, 별 해괴한 일을 겪는 이야기(어느 날 거위가). 기획팀장으로 성격을 조금 까칠하다는 평가가 있으나 몇 년 일 하나만큼은 잘하고 있던 유귀동 차장은 경영진이 바뀌면서 줄줄이 자리에서 물러나는 그룹의 한 명으로 지금은 1층 로비의 그림 속 여인으로 역시 변신해 있다(점심 같이 먹을래요?). 오빠 김수민은 어려서부터 소아비만으로 진단을 받더니 이후 체형이 조금씩 바뀌어 드디어 고래로 변신해 바다로 떠나 연락이 없고(숨통), 우울한 미래의 어느 날엔 해수면이 치솟아 모든 아파트 건물은 방수처리를 했어도 아파트에 따라 5층, 7층까지는 물 속에 잠겨 있는데 고모는 불법으로 잠수 배달운송을 하기도 한다(우리 집에 놀러 와). 돈도 잘 버는 데다가 요리실력도 좋은 친구 집에 연어회를 사가지고 늦게 도착한 호진은 팔, 다리, 나중엔 목이 뎅거덩 부러지는 좀비로 변하고 만다(좋아질 거예요). 부모가 날이면 날마다 격렬한 부부싸움을 하다가 드디어 이혼을 실행하려 하는 찰나에 할머니가 손녀들 데리고 동해안 바닷가 콘도미니엄으로 바람을 쐬러 가는 이야기인 <파도를 보는 일> 정도만 자주 읽은 순소설의 형태를 하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해서 독자는 조금도 쫄 거 없다. 전예진은 그래도 순한 맛의 메타포를 사용했다. 독자는 작품을 읽으면서 지금 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고, 하고 있는지 즉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 면에서 (2022년 기준) 작가의 17년 지기라고 주장하는 경기도 포천의 한 책방 주인 말마따나 “리얼리즘 적”이라 생각하는 것도 어색하지 않다. 좀 어울리지 않지? 메타포와 리얼리즘이라니까? 그것도 선입견이다. 대부분의 문학 또는 예술 행위 자체가 메타포의 효과적인 활용일 수 있으니. (아쭈, 아마추어가 이렇게 막 말해도 괜찮은 거야?) 이왕 그러려면 전예진처럼 누구나 알 수 있는 편한 서술이면 더 좋은 거 아닌가 싶다. 나도 매운 맛은 좀 정도껏 매운 게 좋다.

  다만, 작품 속 등장인물이 변신하고, 변신하고 또 변신하는 바람에 책 뒤편으로 가면 뭐 그런가보다, 하는 마음이 된다는 점. 장편을 쓰고 있다는데 이번엔 어떤 변신을 만들고 있으려나, 싶어지는 거. 설마 변신이 전예진의 패턴은 아니겠지? 좋다, 장편 하나를 더 읽어보고 이이의 독자가 될지 말지 따져보겠다. 건필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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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4-01-14 1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전예진 거위랑 팬티 소설 흥미롭게 읽고 다음 소설도 궁금했는데 소설집 나왔군요. (친구가 행사한다고 저 작가 찾길래 나온 학과 염탐해서 과사무실로 연결해보라고 알려주기도,..온라인 흥신소) 나중에 읽어봐야겠습니더. 나아아중에…

Falstaff 2024-01-14 19:19   좋아요 1 | URL
아오, 굉장해요! 요즘 작가 프로필에서는 여간해서 학교, 학과, 출생 연도, 고향... 이런 거 찾기가 무지 힘들잖아요. ㅎㅎㅎ 정말 온라인 흥신소 어울립니다. 연두 게이샤 맛있더라고요. 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4-01-14 22:15   좋아요 1 | URL
일단 가격이 착해서 가격 대비로 신선도가 좋죠 ㅋㅋㅋ 이 집요함을 어둠의 경로 말고 세상에 도움 되는 데 써야 하는데...글쎄 쓸데가 없는 것 같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해변의 카프카 (상)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사상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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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한테 무라카미 하루키에 관한 환상을 심어준 인간은 잊지 않고 있다. 삼십여 년 전에 문학과지성사를 통해 시집을 출간하고 이후 잡문, 특히 장르를 불문한 음악과 오디오 이야기로 책을 팔다가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잡동사니 설레발꾼이 된 “방송인” 김갑수다. 이십오 년 전에 찍은 음악 단행본 <삶이 괴로워서 음악을 듣는다>를 읽어봤다. 최고급 종이에 천연색 사진이 많아 320쪽 분량이라도 원고의 양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도 명색이 전직 (현직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르지만) 시인이라고 독자로 하여금 마음을 후벼 파는 단어와 문장로 정말 기막히게 영색이 되어 있었다. 이 책에서 김갑수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자주 인용했다. 책은 오래전에 내다 버려서 정확한 인용이 아니지만 생각나는 대로 읊어보자면,

  “다시 무라카미 하루키. 나는 이 음악을 흘러나올 때마다 저 북국의 숲 속에서 먼 북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다시 무라카미 하루키”라고 했으니 적어도 <삶이 괴로워서…>에서 무라카미를 대여섯 반 써먹지 않았을까? 그래 나는 틀림없이 무라카미에게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는 줄 알았다. 나중에 무라카미의 기행 에세이 <먼 북소리>를 찾아 읽었고, 끝내 잘난 척을 견디지 못하고 읽다가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 말았다. 무라카미는 나하고 전혀 맞지 않았던 거였다. 차라리 처음부터 <1973년의 핀볼>로 치고 나갈 것을 그랬다. <먼 북소리> 때문에 시간이 더 걸렸다. <노르웨이의 숲>을 읽을 때까지. 이후 무라카미는 내 독서목록에서 지워졌다. 물론 그렇다고 안 읽겠다는 건 아니니까, 김창석 번역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었다고 이야기하니, 모 작가가 내게 무라카미의 <1Q84>를 이야기했다. 아주 짧게. 그 책에서 <잃어버린…>은 교도소에나 가야 읽을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하더라고. 하도 곤혹스럽게 읽은 <잃어버린…>이며, 읽지는 않았지만 궁금해하던 무라카미 하루키라서, 혹시 모르잖아? 하는 마음으로 사 읽었다.

  평행우주. 달이 두 개인 지구. 레오슈 야나체크가 1926년에 작곡한 <신포니에타>, 이 작품이 나오기 2년 전에 숨을 거둔 체코의 유대인 작가 카프카. 그리고 잠자. 살인청부업자이자 여주인공 이오마메는 미니스커트를 입은 채로 도시고가도로의 비상탈출구를 빠져나감으로 차원을 달리하는 공간으로 이동을 하고, 초등학교를 같이 다닌 대필작가인 남주인공 덴고 역시 초월세상에서 이오마메를 만난다.

  여기에 이들을 추적하는 일단의 무리. 그리하여 이야기는 사건으로 흘러가고 작품을 읽어가면서 더욱 긴박한 상태에 치닫게 되는데, 한국인 출신 무적의 인간병기가 등장해 이오마메에게 친절하게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통을 쏘아 안전하게 자살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기도 하고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같은 건 교도소 독방에 갇혀야만 읽을 수 있을 거란 진리도 가르쳐준다. 어처구니없다. 그거 하나 확인하려고 책을 사서 두 권짜리 두꺼운 걸 다 뒤졌다니. 근데 솔직히 <1Q84>도 그렇고 <노르웨이의 숲>도 그렇고, 아주 적당하게 야해서 재미있지 않았어? 딱 선을 지키더라고.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거야?


  이제 <해변의 카프카>로 넘어가서, 헌책이라도 왜 내가 <해변의 카프카>를 샀느냐 하면, 잠시 미쳤던 거다. 내 음반장에 사놓고 안 들은 것이 별로 없다. 즉, 있기는 있는데 거의 없다는 말이다. 이 가운데 하나가 필립 글래스가 작곡한 <해변의 아인슈타인>. 뭔가가 비슷하잖아? 이 이유가 제일 중요했다. 그래서 덥석 문 것이 <해변의 카프카>였다. 읽어 보시면 카프카의 어떤 작품에서 힌트를 받아 작품을 쓰게 됐다고, 바득바득 우기지 않는 한, 내가 알고 있는 카프카와는 별로 연관이 없다. 무라카미가 카프카를 동경하고 영향을 받고, 비슷하게 쓰고자 했는지는 모르지만, 이 책에서도 평행우주와 차원을 여는 열쇠의 등장은 먼저 읽은 <1Q84>와 같다. 근데 어느 책이 먼저야? <해변의 카프카>가 2002년, <1Q84>가 2009년. 50대의 무라카미는 마음먹고 평행우주와 다른 세계와의 통로, 외계인 같은 것을 팔아먹기로 했던 것 같군 그래. 좋아, 좋아. 잘 팔리기만 하면 대빵이지 다음이 뭐 중요해.

  이 책에서도 외계 생물체가 등장한다고? 그렇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지구에는 확실하게 없는 이상한 생물이 등장해 차원의 통로를 향해 어기적, 어기적 방바닥에 점액질을 묻히며 기어가는 장면이 등장한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무라카미 광팬들에게 돌 맞을 지 모르지만) 작가가 딱 그 자리에 어울리는 충격적인 장면을 만들긴 해야겠는데 맞춤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말도 안 되는 어처구니없는 생명체가 등장한 것일 뿐, 인 것처럼 보인다. 뭐 글 쓰다 보면, 책 읽다 보면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다.

  외계 생명체까지는 아니어도 외계에서 온 것 같은 미확인비행물체, UFO가 작품 초반에 등장한다. 전쟁이 끝나고 1년이 지난 1946년 3월에서 4월 사이에 육군 정보부 제임스 P. 워런 소령의 지시로 로버트 오코넬 소위와 통역 해럴드 카타야마 상사가 야마나시현 OO시 현장에서 초등학교 여교사, 현지 내과 개업의, 현지 경찰관 두 명, 여섯 명의 초등학생을 인터뷰한 것으로 그동안 미 국방부의 극비문서로 분류되어 있다가 40년이 지나 일반 공개가 허용된 자료이다.

  1944년 11월 7일. 근방 초등학교 여교사는 학생 열여섯 명을 인솔하여 밥공기 산에 올라 식용버섯 채취 작업을 하고 있었다. 산 위로 오르고 있던 오전 열 시 조금 지나서 먼 하늘 위에 은색으로 선명하게 반짝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확실히 금속에 반사되는 빛이었다. 두랄루민 같은 은색의 섬광이 형태가 보이지 않을 정도의 까마득한 높이에 떠올라 있었다. 남편이 전사한 여교사는 어제 밤에 평소 성적으로 보수적인 남편이 꿈에 나와 평소라면 생각지도 못한 온갖 자세와 각도를 달리하는 체위로 몇 번이나 사랑을 해서 까마득한 오르가슴 끝에 잠이 깨고 여운을 잊지 못해 자위도 한 번 하고 출근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아직 한참 남았을 월경이 심하게 터지고 말았다. 아이들이 버섯을 따고 있는 산 중턱에서. 선생은 손수건으로 비상조치를 일단 했다. 그러나 조금 후 전시 피난령으로 도쿄에서 살다가 내려온 나카타 소년이 선생에게 혈액이 잔뜩 묻은 손수건을 주워 가져왔고,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난 교사는 나카타의 귀싸대기를 연달아 후려갈겼는데 자신도 얼마나 그랬는지 모를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 나카타가 드디어 죽은 듯이 쓰러지고 주위를 살펴보니 다른 모든 아이들도 쓰러져 누워 있었다. 교사는 큰일이다 싶어 그리 멀지는 않은 학교로 달려가 아이들을 구조해줄 교사, 수위, 경찰을 불러 아이들에게 갔고, 나카타를 제외한 아이들은 얼마 후 정신을 차렸는데 그동안의 일은 전혀 기억할 수 없었다. 나카타는 끝내 깨어나지 못해 큰 도시의 대학병원을 거쳐 육군 병원으로 후송되어 몇 달 후에 정신이 돌아왔다. 그러나 부모등 가족관계, 일본이라는 나라, 글자, 등등 완전한 백지 상태로 리셋이 되어 버렸으며 어떠한 인위적인 배움은 더 이상 받아들이지 못해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정신지체자들에게 주는 보조금과, ‘고양이와 대화할 수 있는 능력’으로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아주는 수수료로 먹고 살게 되었다. 속이 완전히 빈 남자. 즉, 특별한 능력이 있는 사람의 영혼이 대신 들어와 특별한 일을 하고 빠져나갈 수도 있는 차원의 교차로에 몸을 걸친 사람이다. 즉, 이이가 평행우주를 매개하는 일을 할 뿐이니 주인공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제 독후감을 마무리해야 할 분량임에도 난 아직 주인공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다. 왜? 마누라가 곰국도 안 끓여 놓고 나 혼자 두고 여행 갔거든. 집에 혼자 있어서 심심하거든. 그래서 좀 더 쓰고 싶거든. 지겨워도 좀 참으시라. 야한 것도 나올 지 모르니까.


  주인공 ‘나’는 홀수 장chapter의 화자로 나온다. 이름은 다무라 카프카. 당연히 성은 진짜, 이름이 가명이다. 열다섯 살. 큰 키에 건장한 몸, 정기적으로 무게 운동을 해 어깨가 떡 벌어졌고 같은 또래 사내 아이 중엔 완력도 만만치 않다. 그래 가끔 싸움을 해서 게임 값도 물어주고 그랬다. 이렇게 몸만 성숙한 게 아니다. 정서적으로는 더 성숙해서 피아노 음율만 듣고, 베토벤은 아니고 그렇다고 슈만도, 브람스도 아니니 슈베르트일 것이라고 짐작할 정도이며, 존 콜트레인의 소프라노 섹소폰으로 재즈 세계의 카덴차와 비브라토를 몽땅 즐길 수 있는 고수이며, <아라비안 나이트>를 읽고 이야기만이 아니라 이야기가 상징하는 세계, 그 무궁무진한 메타포의 물결을 따라 즐길 줄도 안다. 만일 <해변의 카프카>를 읽으면서 “나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터프한 열다섯 소년의 행적을 좇고 있다.”라고 생각한다면 애초에 책을 덮는 것이 낫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다무라 카프카의 나이를 열다섯 살이라고 한 것 역시 염병할 메타포일 것이다. 카프카는 세상의 모든 지식, 이라 말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모든 ‘문화’를 흡수하는데 천재적인 소양이 있는 외톨이다. 그가 알고 있는 지식의 양에다 습득할 수 있는 추가적 정보의 양은 정확하게 무라카미 하루키의 것과 같다. 그러니 이런 아이가 학교, 사회, 가정에 적응할 수 있겠느냐고.

  다무라 카프카는 열다섯 살이 되는 생일, 아버지 서재에서 훔쳐낸 40만엔, 오래되고 자그마한 순금 라이터, (의외로 한 번도 휘두르지 않을)날카로운 잭나이프, 성능이 뛰어난 손전등, 짙은 색 레보 선글래스, 해변에서 누나와 둘이 찍은 사진 한 장, 아버지의 휴대전화를 배낭에 걸머지고 집을 뛰쳐나간다. 소위 가출. 애초에 추운 북쪽으로는 갈 생각이 없었다. 이제 다신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니 따뜻한 남쪽나라로 가겠다고 마음먹은 카프카는 밤버스를 타고 다카마쓰 시로 향한다. 도중에 한 번 쉰 휴게소에서 만난 같은 버스 탑승자 사쿠라. 카프카는 사쿠라에게 친 누나 같은 감정을 느끼고, 미용사 사쿠라도 마찬가지여서 자신의 휴대전화 번호를 가르쳐준다. 혹시 급한 일이 생기면 연락하라면서.

  다카마쓰 시의 허름한 호텔에 여장을 푼 카프카는 다카마쓰 시의 전통있는 가문의 부자가 만든 사립 도서관을 방문하게 되고, 관장 사에키 씨, 관리인 오시마 상과 좋은 관계를 맺는다. 여태 거론한 이름의 등장인물들은 서로 만나자마자 마치 운명의 만남인 듯, 친밀한 관계를 쉽게 만들고 호의적이며 서로 최선의 방법으로 배려한다. 그러다가, 카프카는 잠깐 의식을 잃는다. 깨 보니 작은 산사의 뒤편 숲 속이었는데 온몸에 피칠갑을 하고 있었다. 자기 몸은 한 군데도 다친 곳이 없이. 수돗가에서 대충 몸을 닦은 카프카는 아버지의 휴대전화로 새벽 한시에 사쿠라에게 전화를 걸어 찾아가고 사쿠라의 방에서 신세를 진다. 열다섯 살의 사쿠라는 자기의 의지와 관계없이 하늘을 향해 불쑥 솟아오른 생식기 때문에 미칠 지경이다. 그걸 눈치 챈 사쿠라는 카프카와 선입견 없는 대화로 마치 동생에게 하듯 손으로 소위 ‘유사 성행위’를 해주고 편한 잠으로 이끈다.

  자, 이쯤에서 진짜 이야기. 다무라 카프카의 아버지 다무라 씨는 일본이 알아주는 조각가다. 그는 일찍이 카프카에게 예언을 했다.


  “너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관계를 맺을 것이며, 그것도 모자라 누나와도 관계를 할 것이다.”


  가출을 한 다무라 카프카의 뇌리 속에는 이 저주 같은 예언이 횡행한다. 그리하여 도서관 관장 사에키 씨가 내 어머니가 아닐까, 사쿠라는 내 누나가 아닐까, 하는 몽상을 아주 자주 한다. 그리고 실제로 쉰한 살의 사에키 씨와 열다섯 살의 카프카는 관계를 한다. 여러 번. 포르노만큼은 아니지만 매우 상세하게, 다양한 부위와 다양한 체위로. 열두 살의 롤리타를 범하는 서른일곱 살의 험버트와 열다섯 살의 카프카 위에 올라 만족을 향해 몸부림치는 쉰한 살의 사에키. 나보코프는 여러 차례인데 반해, 무라카미 하루키는 내가 알기로 이것 때문에 비난받는 걸 한 번도 못 봤다. 왜 그럴까? 소년 카프카가 아줌마한테 먼저 하자 그랬기 때문일까?

  무라카미는 물론 비난을 의식해서 그런 건 아니었겠지만, 작품 속에서 아마 3백 번은 메타포, 세상의 모든 현상이 다 메타포라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도쿄에 있는 아버지의 살해자가 다카마쓰 시를 떠난 적이 없는 다무라 카프카가 되며, 쉰한 살의 여인이 열다섯 살의 소년 위에 올라탄 것도 오이디푸스적 메타포가 될 수 있었으며, 카프카의 꿈 속에서 환상적인 삽입성교를 하는 사쿠라 역시 메타포에 입각한 누나가 될 수 있다. 가설에 의하면. 내 재주로는 도저히 풀 수 없었던 무라카미의 가설에서는 말이다. 그건 그렇고 무라카미 소설 몇 개 안 읽어봤지만, 이 양반이 여자들의 큰 젖가슴에 무슨 로망이 있는 거 같지 않으슈? 인터코스 말고 여자가 남자에게 해주는 “유사성행위”하고. 참 이런 방면으로 독특하단 말씀이지.


  다른 우주에서 다시 만난 카프카와 가설에 의한 어머니일 수도 있는 사에키. 카프카는 오에 겐자부로의 할아버지가 조성했을 지도 모르는 시코쿠 숲 속에 있는 평행우주로 건너간다. 그곳에서 기껏 다시 만난 가설 상의 어머니 사에키는 카프카가 바라는 것과 반대로 다시 저쪽, 카프카가 온 우주, 이승으로 돌아갈 것을 당부한다. 저쪽 우주에서 가설의 아들 카프카가 할 일은:


  “내가 다무라 군에게 원하는 건 단 한 가지뿐이야. 나를 기억해주는 것. 다무라 군만 나를 기억해준다면, 다른 모든 사람이 다 나를 잊어도 괜찮아.”


  카프카도 사에키 자신처럼 남은 생을 이미 죽어버린 사람, 나를 그리워하는 고독 속에서 살란다. 이게 결론인데, 읽는 순간, 왜 그렇게도 웃기든지. 두 우주를 이해하며, 오직 한 남자를 그리워하느라 온 생을 고독하고 고통스럽게 지내 색깔마저 흐린 반토막의 그림자만 지닌 사에키 본인이 “나를 기억해줘.”라니, 웃기지 않아? 무라카미 상, 나를 웃겼어!

  나를 기억해줘……. 난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이런 개 같은 유언은 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이런:


  “나를 네 기억에서 놔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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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4-01-10 06: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Falstaff님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제가 평소 생각하는 유언이 ˝나를 기억하지 마˝ 라서 순간 반가웠네요(반가워할 일인지^^;)

Falstaff 2024-01-10 07:11   좋아요 2 | URL
ㅎㅎㅎ 잘 읽어주신 것이지요 뭘...
반가워하실 일 맞습니다! 뭘 기억해달라고, 무슨 미련이 남아서 말입니다. 저도 반가운 걸요. ^^

coolcat329 2024-01-10 1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이 <1Q84>랑 비슷한 설정이군요. <노르웨이의 숲>같은 그런 소설인 줄 알았어요. 저는 하루키가 좋지도 싫지도 아무 감정이 없는데 하루키 팬들이 열광하는 거 보면서 뭔가가 있긴 있구나 싶었어요.
<1Q84> 를 저도 읽었는데 황당한 설정인데도 단숨에 읽을 정도로 재미가 있었는데 이상하게 끌리진 않더라구요.
오히려 단편집이랑 달리기 에세이가 더 여운이 남았어요.

나를 기억해 줘 ㅋㅋㅋㅋㅋ 아휴 코미디맞네요. ㅋㅋㅋㅋㅋ

Falstaff 2024-01-10 16:57   좋아요 0 | URL
아휴, 이제야 댓글을 답니다. 일정이 끝나서 오랜만에 삼겹살, 홍어, 무채, 김치, 쐬주 하다보니까.... ㅎㅎㅎ
괜히 무라카미한테 감정 가질 필요 없습지요. 그렇다고 괜한 팬심도 우습고요. 사는 게 다 그렇지요 뭐.

stella.K 2024-01-10 10: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지금까지 팔님 읽은 리뷰중 쵝오십니다. 웃겨서 죽는 줄. ㅎㅎㅎ 일단 별 두개신 것부터 보고 이거 뭔가 심상치 않겠구나 했습니다. 근데 역시나. ㅋㅋ 저도 이거 많이 줘야 세개 밖에 못 주겠던데 하루키 팬이 워낙 많으니 차라리 리뷰를 포기했습죠. 갈수록 뭔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근데 정말 하루키는 갈수록 잘 모르겠더만요. 이번에 나온 소설도 왠지 이 작품이 생각 나는 것 같아 포기했습니다.
정말 문학도 권력인가 싶기도 하더군요. 그런 비정상적인 성행위를 하면서 다른 작가가 이렇게 썼으면 변퉤라고 할텐데 하루키가 하니까 예술이 되잖아요. ㅋ
근데 김갑수는 왜요? 전 그 사람 잘 모르겠지만 말 하나는 청산유수더군요. 요즘 뭐하며 사는지 모르겠어요.
암튼 덕분에 웃으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아, 그래도 하루키 단편하고 에세이는 재밌긴 해요.

Falstaff 2024-01-10 16:59   좋아요 1 | URL
앗, 그렇습니까! ㅎㅎㅎㅎ
저도 두 별 주는 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세상에 무라카미 상 팬들이 오죽 많아야지요. 근데 솔직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게 아니라 알고 싶지 않은 거... 아닙니까?
무라카미 상이 그래도 문장이 좋아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저한테 훨씬 더 까였을 겁니다. 21세기 초엽의 세계문학 미스테리 가운데 하나가 이 양반이 언제나 노벨문학상 후보 1순위라는 거. ㅎㅎㅎ 노벨 문학상을 요즘 알아주긴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Falstaff 2024-01-10 17:07   좋아요 0 | URL
아, 김갑수요?
ㅎㅎㅎ 웃겨서요. 그냥 그렇습니다.

잠자냥 2024-01-10 13: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오 하루키 상 진짜 에로적 상상력은 빈곤한 거 같아요. 늘 그 변주에 변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같은 건 교도소 독방에 갇혀야만 읽을 수 있을 거란 진리도 가르쳐준다. 어처구니없다. 그거 하나 확인하려고 책을 사서 두 권짜리 두꺼운 걸 다 뒤졌다니.˝
˝마누라가 곰국도 안 끓여 놓고 나 혼자 두고 여행 갔거든. 집에 혼자 있어서 심심하거든. 그래서 좀 더 쓰고 싶거든. 지겨워도 좀 참으시라. 야한 것도 나올 지 모르니까.˝

하루키 소설보다 재밌는 리뷰입니다. ㅎㅎ

Falstaff 2024-01-10 17:02   좋아요 0 | URL
저한테는 길고 길고 험한 무라카미 하루키 찾는 항해였습니다. 결국 조난 당한 거 같습니다만. ㅋㅋㅋㅋ
인생이 다 그렇지요 뭐. 재미있으셨다니 즐겁네요! ㅋㅋ

망고 2024-01-10 15: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하루키 소설이 취향이 아닌 1인으로서 리뷰 정말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ㅎㅎㅎ

Falstaff 2024-01-10 17:03   좋아요 1 | URL
아요, 고맙습니다. 워낙 이 양반 팬이 많아서 정말 몇 번을 다시 쓰고, 고쳐 쓰고, 돌아보자 불조심, 조마조마 했던 거였는데 의외로 저하고 비슷하신 분이 많아서 다행이었답니다. ^^
 
발터 하젠클레버의 아들
발터 하젠클레버 지음, 장순란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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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는 <아들>. 읽으면서 파우스트는 아니더라도 메피스토펠레는 생각이 많이 났다. 제목이 짧아서 그런가, 아니면 자전적 작품이라서 그랬나, 원제 앞에 작가의 이름을 가져다 붙였다.

  발터 하우젠클레버(1890~1940)는 라인강 서쪽 지역, 아헨 지방 부르주아 시민 계급 유대인 의사 카를 게오르그 하젠클레버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젠클레버의 젊은 시절까지가 중요한 이유는 이이의 청소년기 자체가 바로 <아들>의 줄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발터의 어머니 마틸데 안나는 조현병, 정신질환으로 발터를 임신한 상태에서 오래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당연히 정상적인 어머니의 역할을 할 수 없었으며, 발터의 기억에 별로 남아 있지 않은 상태로 생을 마감한다. 가뜩이나 어머니의 정을 알지 못하고 자라는 발터에게 아버지는 너무나 가혹하고 엄격한, 수구적, 유대적 가치관을 가진 인물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위하여, 반드시 성공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주기 위해서 그랬을 것이지만 아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못했다. 아주 잡도리를 했는데 이게 유대인답게 학교 공부 측면에서는 훨씬 심했다. 소위 말하는 유대식 교육법. 역자 해설에 장순란을 이런 장면을 인용했다.


  “숙제를 못하면 승마용 채찍으로 자주 얻어맞았다. (…) 내가 학교에 지각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알면서도 아버지는 30분이 걸리는 등굣길을 등교 시간 10분 전까지 공부하다가 가도록 강요했다. 정신없이 급히 학교로 달려가다가 거의 매일 아침 먹은 것을 토해야 했다.”


  발터 하젠클레버가 이 정도면 그래도 착한 아들이다. 조금만 격렬한 사춘기를 겪었다 해도 벌써 아버지 금고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얼마를 훔쳐내 드런 집구석에서 도망했다가 돈 떨어진 다음에 기어 들어와 의사 아버지한테 맞아 죽었을 것이다. 나는 희곡을 읽는 내내 아들의 험한 청춘이 불쌍했던 것처럼 철없는 아버지도 불쌍했다. 어찌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자신은 분명히 아들을 위한 최선의 훈육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들에겐 지울 수 없는 흉터를 남겨버리고 여차하면 인생도 거덜이 날 수 있다.


  “나를 때리기 전에, 제발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세요. (…) 잠옷을 입고 잠들기 전, 내 몸은 회초리에 맞아서 줄자국이 나 있었죠! (…) 선생님조차 동정했고 내게 더 이상 벌을 내리지 않았어요. 아버지! 저는 모든 수모와 곤경을 다 치렀어요.”


  정말 이런 부모들 있다. 나도 몇 명 봤다. 아이를 들들 볶는 부모. 이런 부모한테 말 잘 듣는 체질로 태어난 아이들은 속으로 점점 찌그러지는지는 몰라도 부모가 소원하는 대로 좋은 대학 가고 좋은 나라로 유학도 가고, 그래서 마지막까지 부모 등골 빼먹는데, 부모는 그것도 모자라, 특수대학원에 진학하라고 더 닦달을 하니 그만 최고 대학의 기숙사에서, 이제 공부는 지긋지긋해서 못 하겠다고, 목매달아 버리는 것도 봤다. 이 작품에서 아들은 몰랐을 것이다. 주인공 아들이 아들 노릇을 처음 해보는 것처럼, 아버지도 주인공 아들의 경우엔 언제나 초보 아버지였다는 것을. 반면에 아버지는 자신이 초보 아버지여서 미숙하고 몰랐다는 점은 용서가 되지 않는다. 힘이 있고 돈이 있고 권세가 있어서 늘 아들에게 상처를 주었으니. 인생 뭐 있니. 그냥 내버려 두지. 부르주아 의사가 자식이라고 딱 한 명 있는데, 하고 싶은 거 좀 하라고 하지. 꼭 의학이나 법학을 시키려다 인생 쫑난다. 하긴 그게 말이 쉽지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작품 속에서 주인공 ‘아들’은 대학입학고사 아비투어에서 장렬하게 미역국을 먹는 것으로 시작한다. 문제를 몰라서 못 푼 것이 아니라 1800년경에 있었던 아스페른 전투에 관한 서술이었는데, 갑자기 대공국 제후비들과 함께 끝없이 뻗어가는 가로수 길이 아스라하게 떠오르면서 역사고 수학이고 다 망쳐버렸다는 거였다. 속내를 남자 가정교사에게 털어놓았고, 남자 가정교사는 아들을 이해했으며, 결과를 아버지에게 전보로 알려줄 수밖에 없었는데, 아들의 아비투어 낙방은 한 가정의 가장이기도 한 가정교사의 해고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의 하젠클레버는 열여덟 살에 영국의 옥스포드에 입학해 법학을 공부하다가 스위스 로잔 대학으로 옮겼다. 이후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1914년까지 공부했는데 문학과 철학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문학과 철학 전공이었는지, 여전히 법학을 공부했고 관심만 두었는지는 위키피디아에 나오지 않는다.


  <아들>에서 아들이 대학입학자격고사에 낙방한 때가 스무 살.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3수 실패 정도 된다. 가정교사도 남자, 여자 각 한 명씩 두고 학업에 전념시켰음에도 좋은 꼴을 보지 못한 아버지는 잔뜩 열이 받아 있다. 아버지는 스무 살 아들이 아직 미성년이기 때문에 전적인 지배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여전히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언사를 퍼붓는다. 머리통 다 큰 아들 역시 이젠 더 이상 고분고분하지 않을뿐더러 이렇게 사느니 자유롭게 죽어버리고 말겠다는 생각까지 한다. 대학입학에 떨어졌으며 자신이 바라는 문학이나 연극을 할 수 있는 길도 사라져버렸다고. 그러나 이제 메피스토펠레를 닮았지만 결코 메피처럼 근본적인 악마는 아닌 친구의 도움으로 집을 나가버린다.

  친구는 아들을 자유로운 젊은이들의 모임인 “환희의 유지를 위하여” 클럽의 비밀모임으로 안내한다. 이 모임에 연미복을 입고 등장한 아들은 아버지의 구속에서 탈피하자는 내용의 극렬한 웅변을 쏟아내고 한 방에 젊은이들의 영웅으로 등극한다. 청년들은 아들을 어깨에 올린 채로 가두행진을 하며 모든 아버지에 대한 투쟁에 박차를 가하자고 외친다.

  스타덤에 오른 아들. 그에게 제공된 매춘부 아드리엔을 보내자 호텔방에 찾아온 친구. 그는 아들에게 권총을 한 정 건넨다. 체홉이 그랬던가? 권총이 등장하면 최소 한 번은 발사를 해야 하는 법이라고? 친구는 아들에게 진지하게 친부살해를 언급한다. 물론 작품 속에 등장하는 친부살해는, 비록 정말로 친부 살해의 씬이 나오더라도 오이디푸스 적인 친부살해를 포함해서 거의 대부분 메타포이다. 하여간 아들은 친구가 준 권총을 주머니에 넣은 채 아버지가 보낸 형사들에게 체포당해 수갑이 채우진 상태로 아버지 집에 도착한다.

  드디어 부자상봉. 아들에게 우호적인 형사는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아들의 수갑을 풀어주고 퇴장해서 단 둘이 남은 아버지와 아들. 아버지는 늘 가지고 다니는 말채찍을 들었다가 놓고 다시 들었다 놓았으며, 그럴 때마다 아들은 호주머니에서 권총을 슬쩍 뽑았다 넣고 다시 뽑았다가 놓는다. 그렇게 마지막 절정을 향해 치닫는 부자의 갈등. 체홉의 의견이 옳았을까?


  짠하고 아쉬운 아버지와 아들. 젊은 시절에 읽었다면 당연히 아들의 입장에만 서 있었을 텐데, 이제 양육까지 모든 의무를 다 마친 나는 둘 다 안타까웠다. 부르주아 댁의 귀한 아들이 어리광부린다고 여기지 말기. 있는 사람이건 없는 사람이건 사는 건 다 힘들고, 대개 불행하며, 세상의 어떤 부모도 하여간 한 가지 이상의 방법으로 자식들을 절망시키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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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4-01-09 21: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마지막 어떻게 되었을까 설마 ㅠㅠ
저는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가 생각이 나네요. 아버지도 아들도 다 불쌍해요.
사망한 해가 1940년이라 설마 하고 찾아봤더니 역시나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네요.ㅠㅠ
폴스타프님 글 읽으며 마음이 아팠는데 더 아프네요.

Falstaff 2024-01-10 05:39   좋아요 1 | URL
연극의 대본이라서 대개 파국으로 끝나기는 합니다. 그렇다고 가르쳐드릴 수는 없지요. ㅎㅎㅎ
유대인에게 특히 1930~40년대에 걸친 10년은 생각하기도 싫은 시기일 겁니다. 이후 계속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한테 생각하기 싫은 시대를 만들어주고 있기는 합니다만.
 
프닌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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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상 최대의 장난꾸러기 소설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작품을 읽어보면, 아무리 각주, 미주, 벼라 별 주석 같은 역자 훈수를 보태더라도 이이가 쏟아 놓은 단어의 홍수 속에서 제대로 이해하는 농담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책을 읽었으면 그날 안으로 잽싸게 독후감을 써야 하는데, 이제 시간은 바야흐로 2023년 12월, 우리나라 중늙은이들이 본격적으로 해를 잊을, 즉 망년忘年을 핑계로 날마다 천국행을 도모하고 있는 이때, 물론 핑계지만 3일이 지나 감상문을 쓰려 하니 읽을 당시의 기막힌 촌철살인의 장면과 행위와 하다못해 사람의 이름까지 다 잊고 말았다. 오호라. 이 작품을 발표한 것이 1957년의 미국.  나보코프는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의 부르주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워낙 고급 교육을 받은 데다가, 애초부터 빼어난 자질까지 가져 누구보다도 많은 지식을 함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이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작품 속에서 숨기지 않고 슬쩍, 슬쩍 드러내는 잘난 척을 결코 멈추지 않았는데, 이게 얄밉거나 뵈기 싫지 않은(‘보기 싫지 않다’보다 좀 센 표현으로 이게 어울릴까?) 희한한 재주까지 가졌다. 이 책에서도 나보코프는 음악, 미술, 문학 그것도 유럽과 아메리카를 두루 섭렵하여 작품 속 주인공들의 이름을 적재적소에 특징지을 수 있는 등장인물한테 엣다, 너는 이 이름으로 해라, 넌 이렇게 행동해라, 하는 바람에 독자가 읽다가 어어, 하면서 싱긋 웃음짓게 만드는 컷도 여럿 있었다. 도서관 열람실에선 맘놓고 웃지도 못하는데, 세상에 이런 일이. 글쎄 어느 장면, 어느 등장인물을 가지고 지금 이리 침을 튀는지 3일 전이었다면 이 자리에 척척 가져다 붙이겠다만 3일이면 소 한 마리 잡아서 이미 푹 고아 다 먹었을 시간이라 나도 못내 아쉽다. 하여간 나보코프, 소설 정말 잘 쓴다. 돌려차고 감아차고 옆으로 차면서 독자의 옆구리를 사정 보지 않고 간지르다가 결국 망명 러시아 지식인의 우울한 고독에 함께 마음 아파하는 일을 어쩌면 이리 맛있게 썼는지.


  티모페이 프닌.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점잖고 상당히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파벨 프닌 박사는 안과의사로 평생의 명예로 삼는 일은 레프 톨스토이 백작의 결막염을 치료해준 일이라고. 엄마는 독일 귀족의 따님이었다 하니 의사라고 같은 의사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잘 지내다가 이 집에도 불행의 구름이 덮쳤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그냥 저냥 지나가겠는데 가만히 보니까 혁명 러시아는 이게 사회주의/공산주의 국가가 아니라 레닌화化 한 독재체제인지라 도무지 견디지 못하고 러시아를 탈출해 체코 프라하 대학에서 사회학, 정치경제학 박사 학위를 따고 이후 15년간 파리 16구에 살다가 신대륙으로 이주했다. 유럽에 살 때는 아무리 더운 날씨에도 프록코트는 아닐지언정 넥타이와 조끼를 받쳐입은 슈트 차림이었지만, 세월이 흘러 완전무결한 대머리와 그은 피부, 깨끗하게 면도한 얼굴에 뿔테 안경을 쓴 신대륙의 52세 프닌 박사는 일광욕을 즐기고 스포츠 셔츠에 슬랙스 차림에다가 여성 앞에서도 버젓이 맨살 정강이를 노출시키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 양반의 지금 직업이 뉴욕 근방 도시에 있는 웬델 대학의 러시아어 교수다. 명문 웬델 대학에는 정식으로 러시아문학과가 없다. 프라하 대학에서 받은 사회학, 정치경제학 박사 학위는 20세기 중반이 되자 불용학위로 구별되어 이제는 그 타이틀로는 교편을 잡지도 못한다. 이를 어엿비 여긴 독문과 학과장 (알베리히의 아들)하겐 교수는 독문과에 러시아어 과목을 하나 배치하고 프닌을 교수로 초빙했다. 러시아어 중급반 수강인원 1명. 상급반도 1명인데 얜 출석부에 이름이 올랐다는 의미일 뿐이고 얼굴 한 번 본적 없다. 초급반 3명. 러시아어 실력으로 말할 것 같으면, 혁명 직후엔 파리, 이후엔 세계 주요 도시 각처에 뿌리를 내리고 살던 구 러시아 왕족, 귀족 나부랭이들의 커뮤니티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던 나이든 할머니 무리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지만 학생들에게는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실력있는 교사라기 보다는 혁명 후 혼돈기, 적백 내란기, 망명기에 자신이 겪었던 경험함을 재미있게 엮어서 드라마틱한 내용까지 보태 들려주기 때문이었다. 그럼. 실력 없으면 이런 거라도 해야지.


  자꾸 프닌 선생의 러시아어 실력을 이야기하게 되는 데, 어느 수준인지 보자. 프닌은 일단 강의 노트를 먼저 만든다. 러시아의 관용 속담과 민담, 신화 같은 것을 넘치게 인용하여 근사하게 작성을 하고 이것을 독문과 교원에게 영역을 부탁한다. 독문과 대학원생이 러시아 관용어를 제대로 번역할 수 있겠어? 그래도 한다. 번역해 영문으로 개발새발 쓴 것을 프닌이 아니라 밀러라는 조교가 수정을 하고 이번엔 하겐 박사의 비서 아이젠보르 양이 타이핑을 한다. 최종적으로 프닌 앞에 도착한 원고를 프닌 교수가 읽어보고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을 삭제만 한 후 수업에 들어간 교수는 눈을 원고에 박고 그냥 읽는 것으로 수업을 갈음하는 거다. 이 장면만 보면 모교 아르센 루팡 대학의 한모 교수가 생각난다. 김일성 대학 교수로 재직할 때부터 써먹던 강의노트를 시작과 동시에 그대로 칠판에 베껴 쓰던 학계의 전설적 인물. 나한테 F학점 줬다. 생존해 있느냐고? 어딜. 진짜로 김일성대학 교수 출신인데 벌써 갔지. 그땐 이런 교수들 몇몇 있었다. 선풍기에 시험지 날려서 가까이 떨어진 놈 A주던 시절. 헛갈리지 마시라. 멀리 간 시험지는 학점이 낮다. 가까이 떨어진 것이 멀리 간 것보다 무거울 것이고 그만큼 시험지에 답안을 많이 적은 것이 분명하니 A를 주어야 한다는 의견이 당시 국보의 채점법이었다.

  프닌 교수가 사실 나사가 좀 빠지기도 했다. 도대체 정신이 어디에 있는 사람인지 꼭 실수를 하고, 아니더라도 대개 이런 사람들한테 실수 또는 불운의 별이 빛을 모아서 쪼이는 법. 한 번은(작품이 시작하자마자) 크레모나 여성 클럽 부회장 주디스 클라이드 여사가 크레모나에서 열리는 금요 야간 강연회에 연사로 초빙을 해 가서 강연을 해주기로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강의록을 준비해 가방에 챙겨 두었다. 협회는 거마비와 함께 가장 효과적으로 도착하는 기차편을 소개했지만, 평소에 여러 팜플렛을 수집하는 프닌 박사는 그것보다 적어도 20분을 절약할 수 있는, 토요일만 특별 편성하는 열차를 알고 있어서 그 시간표에 입각해 열차에 탑승했다. 객석에 앉아 세상의 어두운 정보만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우둔함에 떠올리며 우쭐하고 있다가, 어머나, 지나가는 차장이 하시는 말씀이 이 열차는 크레모나에서 정차하지 않는단다. 그래서 열차 시간표를 디밀고 무슨 말씀이세요, 따지니까, 아이고, 승객님, 이건 5년 전 열차표 아닙니까요? 20분 벌려다가 졸지에 두 시간을 까먹게 생겼다. 프닌은 할 수 없이 위트처치 정거장에서 내려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네 시 버스를 타면 여섯 시에 도착한단다. 아직 시간이 있어 트렁크를 안내원에게 맡기고 배가 출출해진 프닌은 햄샌드위치를 하나 사 먹는다. 네시 5분전에 안내원에게 가서 가방을 달라며 손가락질을 하는데, 어 참, 손가락이 엉뚱한 가방을 가리켰다. 그리고 가방을 맡았던 안내원은 아내가 출산을 한다고 자리를 비운 상태. 이제 엉뚱한 가방을 지목한 프닌 교수에게 쉽게 가방을 바꿔줄 안내원이 있을 턱이 없지. 이때 네 시 버스가 승강장에 도착한다. 프닌 교수는 머리를 잽싸게 돌려본다. 저 버스를 타지 못하면 오늘 스케쥴은 끝이다. 다음 버스는 여덟 시에 있으니. 프닌은 가방 없이 맨몸으로 출발하고 짐은 돌아올 때 들러 가지고 가기로 결정하고 버스를 향해 헉헉 뜀박질을 한다.

  그렇게 도착한 크레모나 금요 야간 강연회. 앞줄 가운데 자리에 눈에 확 들어오는 관객이 한 명 있었다. 발트해 연안에 살던 친척 할머니 중 한 명. 자신의 옛 동창생. 부모 연배의 러시아어 전문가들. 이렇게 프닌의 인생은 꼬여만 간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도무지 거절을 하지 못한다는 거. 1925년 프랑스 파리 시절에 리자 보골레포브나 양, 검은색 실크 점퍼와 맞춤 스커트 차림의 막 20세가 된 의대생을 만나 연애를 한다. 이 당시 리자는 로제타 스톤(!) 여사가 운영하는 당시의 가장 파괴적인 뫼동 정신 요양소에서 근무하며 간혹 읽기 참혹한 수준의 시를 쓰기도 했는데, 그만 둘은 결혼을 해버리고 만다. 이게 프닌의 유일한 결혼이었고, 리자는 드디어 결혼식을 하기 시작한 거였다. 몇 년을, 그렇다고 오래는 아니고 잠깐 살다가, 신대륙으로 항해하는 여객선에 올랐을 때 리자의 배는 북통만 했었는데, 아이는 당연히, 라기보다 짐작하셨다시피 다른 남자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다른 남자’는 신대륙행 여객선 갑판에서 티모페이 프닌과 우정을 돈독하게 쌓아올린 에릭 빈트, 혹은 에릭 윈드, 또는 에리히 빈트,라는 이름의 아르헨티나 남자였고.

  혼인 전에 리자 보골레포브나였다가 리자 프닌이었다가 리자 빈트가 되었다가 후에 또다시 성이 바뀌는 이 여인은 티모페이 프닌이 나이가 더 들어 한 번 더 이혼을 결정하면서 득달같이 프닌을 찾아와 “당신의 아들이기도 한” 아이의 대학 학비와 생활비를 대달라고 요구하고, 마음 약한 프닌은 이걸 또 거절하지 못한다. 왜?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인간이라서.

  이 독후감을 읽으시는 분들은 여기까지만 알아두시라. 프닌이 이렇게 한심하고, 나사가 몇 개 풀려있고, 먹고 사는 분야의 실력도 엉망이고, 불운의 별이 그를 위하여 반짝이는 인간일 뿐이라고 여기시라. 사실이 그렇기도 하다. 그러나 이방의 땅에서 뿌리내리지 못하는 망명객을 향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변명도 언젠가는 한 번 준비되어 있을 것. 미국 땅에서 부유하는 루저의 삶 속에 마르지 않는 습기를 발견할 수 있을지 혹시 모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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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개
하인리히 뵐 지음, 안인길 옮김 / 미래의창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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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곱 권째 하인리히 뵐의 책을 읽었다. <카탈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부터 뵐을 읽어서 권력의 남용과 이에 따른 시민의 피해와 저항 같은 사회문제에 천착하는 작가인 줄 알았던 것이, 이제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다. 나중에 <카탈리나…>가 예외적인 작품이란 걸 알았다. 이후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와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거치면서 이이의 관심사가 전쟁과 전쟁 후 폐허가 된 도시와 독일인들이란 것을 저절로 알게 됐다. 스스로 징집되어 2차 세계대전 당시에 포병으로 참전했다가 부상도 당하고 꾀병도 부리고 하다가 탈영해 미군 포로가 된 경험도 있어서, 전쟁의 참상과 전쟁 자체가 인간을 얼마나 하찮은 미물로 만들기도 하고, 겁쟁이로도 만들며, 얼마나 지독한 악마로 만들기도 하는지 지긋지긋하게 경험을 해 누구보다 진심으로 반전주의자가 되었을 터이다.

  이 작품집 《하얀 개》는 작가의 비교적 초기 작품 가운데 미발표작을 모아 1995년에 사후출판한 책으로 첫 작품 <불타는 가슴>만 1936년 (또는) 37년, 나머지는 1947년, 1949~1951년 작품이라고 역자 해설에 쓰여 있다. 나는 사후 출판일 경우엔 원고를 왜 살아생전 발표하지도 않고 책에 싣지도 않았을까, 하고 의심하는 인간이다. 윌리엄 트레버의 유고작품집 《마지막 이야기들》 독후감에서도 비슷한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다시피. 특히 《하얀 개》의 경우엔 초기작품 위주 미발표 작품의 모음이라서, 작가가 자신이 쓴 결과물을 잊었다는 건 별로 호소력이 없고, 어떤 연유가 됐든 간에 하여간 마음에 그리 차지 않아 나중에 손을 볼 의향으로 가지고 있거나, 다섯 편의 극도로 짧은 단편의 경우엔 일단 작품의 스케치나 메모를 한 것 정도로 가지고 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독자는 어쨌거나 읽기만 하면 된다. 그럼에도 굳이 의심을 숨기지 않는 이유는, 여섯 편의 ‘단편소설 같은 단편소설’의 경우에(다섯 편의 극도로 짧은 단편소설은 단편소설 같지 않지?) 뵐의 다른 단편집에 실린 작품과 비교해 별로 빠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숨을 거둘 때까지 책상서랍에 꿍쳐 놓았던 이유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열아홉, 스무 살에 쓴 <불타는 가슴>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폐허의 쾰른이 무대가 아닐까 싶기도 했었음에야. 하긴 좋은 작가는 보통 청소년 시절부터 애늙은이 경향이 심하긴 하지만.


  물론 내가 뵐의 작품에 관한 선입견이 있어서 <불타는 가슴>을 전후 폐허 독일일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읽어보시라. 아마 내 짐작도 얼핏 타당하다고 여기실 것이다. 1936년이면 파시즘 국가 나치 독일의 거의 모든 국민들이 유대인 차별/탄압은 물론이고 “총통 각하가 명령하면 우리는 싸운다!” 연호하며 군비증강에 혈안이 된 시절이다. 어쨌거나 군수산업은 나라에 물자와 돈이 활발하게 돌게 만들어 독일인의 생활이 다른 서구 유럽과 동등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살인적 불경기에서는 벗어났을 때이다. 아무리 이랬던 시기의 12월이라도, 열여섯 살 먹은 하인리히 페르코닝 소년은 처음으로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으로 작품을 시작하니 뵐의 성향을 알고 있는 독자가 애초에 단편 <불타는 가슴>을 읽기 시작하자마자 무대가 대도시이긴 하지만, 그리고 단 한 번도 무너진 집이나 건물, 깨진 보도블록 같은 묘사가 나오지도 않지만 파괴된 거리의 즐비한 폐허를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어서 “한 노신사가 젊고 뻔뻔한 창녀를 따라 어느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라고 이어지며, 하인리히도 대략 열일곱 살 된 창녀차림의 예쁜 소녀, 결국 창녀로 밝혀지는 소녀 수잔네와 급속하게 친하게 되는데 말이지. 독자인 나는 당연히 전후 궁핍한 시절에 먹고 살기 위하여 어린 나이에도 몸을 팔 수밖에 없는 상황을 상상했다. 어쨌거나 제일 중요한 문제는 살아야 한다는 것이니까. 수잔네는 창녀이면서도 구원과 종교를 말하고, 하인리히의 가슴에 기댄 채 도스토옙스키가 괴테를 천재적으로 모방했다는 말에도 귀를 기울이며, 이름부터 심상치 않은 베네딕트와 막달레나 커플과 친해지는 등 사랑은 계급과 종교의 범주를 초월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제로 열아홉 또는 스무 살에 썼다는 얘기다.


  그래도 재미있는 건 역시 사랑 이야기다. <실락원>. <실락원>하면 하여튼 나한텐 와타나베 준이치가 쓴 무지무지하게 야한 유부녀와 유부남의 치정 이야기인데, 뵐의 <실락원>은 다른 의미에서 괜찮게 읽었다. 작가 본인도 그랬지만 작품의 남자 주인공 ‘그’도 전쟁터로 떠나 7년만에 귀향한다. 다른 곳에 비해 그나마 덜 파괴된 고향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꿈엔들 잊힐리야, 마리아 X를 찾아간다. 건물은 극도로 쇠락해있고, 어두운 복도 맨 마지막 쪽방이 마리아의 방. 지칠 대로 지친 그는 방문을 두드린다. 적막. 더 거세게 두드린다. 그래도 아무 응답이 없다. 그러다가 문에 종지쪽지가 붙어있는 것을 발견한다.

  “일곱 시에 돌아옴. 열쇠는 옆방에 있음. M.”

  ‘나’는. 시점이 자주 바뀐다. 뵐의 작품에서 종종 그랬듯이 ‘그’가 등장했다가 곳곳에서 ‘나’로 바뀐다. 여기서 ‘나’는 옆방문을 두드렸고 조금 있다가 문이 열려 얇은 목걸이를 단 여인이 고개만 내밀고 열쇠를 건네며, 틀림없이 벌거벗었을 이 여자는 이렇게 말한다.

  “아, 당신이 침대 위에 걸려 있는 분이시군요”

  “예, 아마도……”

  여인의 직업은 뭘까? 여인과 친하게 지내는 것 같은 마리아는 또 어떻게 돈을 벌어 생활했을까? 이게 속물인 독자가 궁금했던 거였다. 하여간 나는 마리아의 방을 열고 들어간다. 그리고 7년 전의 마리아에 관한 회상. 나의 가슴에 고개를 묻은 마리아. 정수리까지 곧고 깨끗하게 뻗은 가르마. 내 오른쪽 가슴에서 팔딱팔딱 뛰던 심장의 고동. 그리고 몸의 의식.

  그의 사색은 계속 깊어진다. 방에서 은근히 산포하는 부드러운 비누와 옷 냄새. 그리고 약간의 담배연기가 빚은 깨끗한 냄새. 전후 시절에 비누와 깨끗한 속옷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7시 20분 전. 그는 방을 나와 천천히 어두운 복도를 걸어 역시 어두운 계단을 내려간다. 과연 떠나야 하는가? 곰곰이 생각한 그는 갈 수밖에 없다고, 지금 가는 게 더 좋을 거라고 믿는다.

  나는 여기까지 읽으면서 속으로 말했다. “그래, 생각 잘했다. 한 번 보면 뭐해!”

  인생이 그렇지. <실락원>의 주인공, ‘그’였다가 갑자기 ‘나’로도 변하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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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1-05 0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프닌>
화요일. 발터 하젠클라버, <발터 하젠클라버의 아들>
수요일. 무라카미 하루키, <해변의 카프카>
목요일. 전예진, 《어느 날 거위가》
금요일. 루이스 어드리크, <정육점 주인들의 노래클럽>

stella.K 2024-01-05 11:24   좋아요 1 | URL
오, 드디어 다음 주 수요일 저도 읽은 책이 나오는군요. 작년인가 재작년에 읽고 리뷰는 안 썼던 것 같은데 팔님 어떻게 읽으셨을지 궁금하네요. 그럼 새해 첫 주말 잘 보내세요.^^

Falstaff 2024-01-05 15:42   좋아요 1 | URL
음... 무라카미 아니면 어드리크 둘 가운데 하나겠지요. 다른 세 권은 신간이거든요. ㅎㅎ

yamoo 2024-01-05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인과 군중...이거 읽다가 관뒀으묘~~ 완역도 아니고 끊임없는 등장인물때문에...
뵐은 카타리나로 종결 볼까 합니다. 카타리나가 너무 좋아 읽기 시작한 <여인과 군상>이었는데...완역되어도 읽기 힘들거 같아요. 뵐의 특유한 문체는 읽는 맛이 있긴 하지만...^^;;

Falstaff 2024-01-05 15:43   좋아요 0 | URL
윽. 완역도 아닙니까? 알고는 못 읽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