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하젠클레버의 아들
발터 하젠클레버 지음, 장순란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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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는 <아들>. 읽으면서 파우스트는 아니더라도 메피스토펠레는 생각이 많이 났다. 제목이 짧아서 그런가, 아니면 자전적 작품이라서 그랬나, 원제 앞에 작가의 이름을 가져다 붙였다.

  발터 하우젠클레버(1890~1940)는 라인강 서쪽 지역, 아헨 지방 부르주아 시민 계급 유대인 의사 카를 게오르그 하젠클레버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젠클레버의 젊은 시절까지가 중요한 이유는 이이의 청소년기 자체가 바로 <아들>의 줄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발터의 어머니 마틸데 안나는 조현병, 정신질환으로 발터를 임신한 상태에서 오래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당연히 정상적인 어머니의 역할을 할 수 없었으며, 발터의 기억에 별로 남아 있지 않은 상태로 생을 마감한다. 가뜩이나 어머니의 정을 알지 못하고 자라는 발터에게 아버지는 너무나 가혹하고 엄격한, 수구적, 유대적 가치관을 가진 인물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위하여, 반드시 성공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주기 위해서 그랬을 것이지만 아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못했다. 아주 잡도리를 했는데 이게 유대인답게 학교 공부 측면에서는 훨씬 심했다. 소위 말하는 유대식 교육법. 역자 해설에 장순란을 이런 장면을 인용했다.


  “숙제를 못하면 승마용 채찍으로 자주 얻어맞았다. (…) 내가 학교에 지각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알면서도 아버지는 30분이 걸리는 등굣길을 등교 시간 10분 전까지 공부하다가 가도록 강요했다. 정신없이 급히 학교로 달려가다가 거의 매일 아침 먹은 것을 토해야 했다.”


  발터 하젠클레버가 이 정도면 그래도 착한 아들이다. 조금만 격렬한 사춘기를 겪었다 해도 벌써 아버지 금고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얼마를 훔쳐내 드런 집구석에서 도망했다가 돈 떨어진 다음에 기어 들어와 의사 아버지한테 맞아 죽었을 것이다. 나는 희곡을 읽는 내내 아들의 험한 청춘이 불쌍했던 것처럼 철없는 아버지도 불쌍했다. 어찌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자신은 분명히 아들을 위한 최선의 훈육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들에겐 지울 수 없는 흉터를 남겨버리고 여차하면 인생도 거덜이 날 수 있다.


  “나를 때리기 전에, 제발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세요. (…) 잠옷을 입고 잠들기 전, 내 몸은 회초리에 맞아서 줄자국이 나 있었죠! (…) 선생님조차 동정했고 내게 더 이상 벌을 내리지 않았어요. 아버지! 저는 모든 수모와 곤경을 다 치렀어요.”


  정말 이런 부모들 있다. 나도 몇 명 봤다. 아이를 들들 볶는 부모. 이런 부모한테 말 잘 듣는 체질로 태어난 아이들은 속으로 점점 찌그러지는지는 몰라도 부모가 소원하는 대로 좋은 대학 가고 좋은 나라로 유학도 가고, 그래서 마지막까지 부모 등골 빼먹는데, 부모는 그것도 모자라, 특수대학원에 진학하라고 더 닦달을 하니 그만 최고 대학의 기숙사에서, 이제 공부는 지긋지긋해서 못 하겠다고, 목매달아 버리는 것도 봤다. 이 작품에서 아들은 몰랐을 것이다. 주인공 아들이 아들 노릇을 처음 해보는 것처럼, 아버지도 주인공 아들의 경우엔 언제나 초보 아버지였다는 것을. 반면에 아버지는 자신이 초보 아버지여서 미숙하고 몰랐다는 점은 용서가 되지 않는다. 힘이 있고 돈이 있고 권세가 있어서 늘 아들에게 상처를 주었으니. 인생 뭐 있니. 그냥 내버려 두지. 부르주아 의사가 자식이라고 딱 한 명 있는데, 하고 싶은 거 좀 하라고 하지. 꼭 의학이나 법학을 시키려다 인생 쫑난다. 하긴 그게 말이 쉽지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작품 속에서 주인공 ‘아들’은 대학입학고사 아비투어에서 장렬하게 미역국을 먹는 것으로 시작한다. 문제를 몰라서 못 푼 것이 아니라 1800년경에 있었던 아스페른 전투에 관한 서술이었는데, 갑자기 대공국 제후비들과 함께 끝없이 뻗어가는 가로수 길이 아스라하게 떠오르면서 역사고 수학이고 다 망쳐버렸다는 거였다. 속내를 남자 가정교사에게 털어놓았고, 남자 가정교사는 아들을 이해했으며, 결과를 아버지에게 전보로 알려줄 수밖에 없었는데, 아들의 아비투어 낙방은 한 가정의 가장이기도 한 가정교사의 해고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의 하젠클레버는 열여덟 살에 영국의 옥스포드에 입학해 법학을 공부하다가 스위스 로잔 대학으로 옮겼다. 이후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1914년까지 공부했는데 문학과 철학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문학과 철학 전공이었는지, 여전히 법학을 공부했고 관심만 두었는지는 위키피디아에 나오지 않는다.


  <아들>에서 아들이 대학입학자격고사에 낙방한 때가 스무 살.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3수 실패 정도 된다. 가정교사도 남자, 여자 각 한 명씩 두고 학업에 전념시켰음에도 좋은 꼴을 보지 못한 아버지는 잔뜩 열이 받아 있다. 아버지는 스무 살 아들이 아직 미성년이기 때문에 전적인 지배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여전히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언사를 퍼붓는다. 머리통 다 큰 아들 역시 이젠 더 이상 고분고분하지 않을뿐더러 이렇게 사느니 자유롭게 죽어버리고 말겠다는 생각까지 한다. 대학입학에 떨어졌으며 자신이 바라는 문학이나 연극을 할 수 있는 길도 사라져버렸다고. 그러나 이제 메피스토펠레를 닮았지만 결코 메피처럼 근본적인 악마는 아닌 친구의 도움으로 집을 나가버린다.

  친구는 아들을 자유로운 젊은이들의 모임인 “환희의 유지를 위하여” 클럽의 비밀모임으로 안내한다. 이 모임에 연미복을 입고 등장한 아들은 아버지의 구속에서 탈피하자는 내용의 극렬한 웅변을 쏟아내고 한 방에 젊은이들의 영웅으로 등극한다. 청년들은 아들을 어깨에 올린 채로 가두행진을 하며 모든 아버지에 대한 투쟁에 박차를 가하자고 외친다.

  스타덤에 오른 아들. 그에게 제공된 매춘부 아드리엔을 보내자 호텔방에 찾아온 친구. 그는 아들에게 권총을 한 정 건넨다. 체홉이 그랬던가? 권총이 등장하면 최소 한 번은 발사를 해야 하는 법이라고? 친구는 아들에게 진지하게 친부살해를 언급한다. 물론 작품 속에 등장하는 친부살해는, 비록 정말로 친부 살해의 씬이 나오더라도 오이디푸스 적인 친부살해를 포함해서 거의 대부분 메타포이다. 하여간 아들은 친구가 준 권총을 주머니에 넣은 채 아버지가 보낸 형사들에게 체포당해 수갑이 채우진 상태로 아버지 집에 도착한다.

  드디어 부자상봉. 아들에게 우호적인 형사는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아들의 수갑을 풀어주고 퇴장해서 단 둘이 남은 아버지와 아들. 아버지는 늘 가지고 다니는 말채찍을 들었다가 놓고 다시 들었다 놓았으며, 그럴 때마다 아들은 호주머니에서 권총을 슬쩍 뽑았다 넣고 다시 뽑았다가 놓는다. 그렇게 마지막 절정을 향해 치닫는 부자의 갈등. 체홉의 의견이 옳았을까?


  짠하고 아쉬운 아버지와 아들. 젊은 시절에 읽었다면 당연히 아들의 입장에만 서 있었을 텐데, 이제 양육까지 모든 의무를 다 마친 나는 둘 다 안타까웠다. 부르주아 댁의 귀한 아들이 어리광부린다고 여기지 말기. 있는 사람이건 없는 사람이건 사는 건 다 힘들고, 대개 불행하며, 세상의 어떤 부모도 하여간 한 가지 이상의 방법으로 자식들을 절망시키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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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4-01-09 21: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마지막 어떻게 되었을까 설마 ㅠㅠ
저는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가 생각이 나네요. 아버지도 아들도 다 불쌍해요.
사망한 해가 1940년이라 설마 하고 찾아봤더니 역시나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네요.ㅠㅠ
폴스타프님 글 읽으며 마음이 아팠는데 더 아프네요.

Falstaff 2024-01-10 05:39   좋아요 1 | URL
연극의 대본이라서 대개 파국으로 끝나기는 합니다. 그렇다고 가르쳐드릴 수는 없지요. ㅎㅎㅎ
유대인에게 특히 1930~40년대에 걸친 10년은 생각하기도 싫은 시기일 겁니다. 이후 계속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한테 생각하기 싫은 시대를 만들어주고 있기는 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