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개
하인리히 뵐 지음, 안인길 옮김 / 미래의창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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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곱 권째 하인리히 뵐의 책을 읽었다. <카탈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부터 뵐을 읽어서 권력의 남용과 이에 따른 시민의 피해와 저항 같은 사회문제에 천착하는 작가인 줄 알았던 것이, 이제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다. 나중에 <카탈리나…>가 예외적인 작품이란 걸 알았다. 이후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와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거치면서 이이의 관심사가 전쟁과 전쟁 후 폐허가 된 도시와 독일인들이란 것을 저절로 알게 됐다. 스스로 징집되어 2차 세계대전 당시에 포병으로 참전했다가 부상도 당하고 꾀병도 부리고 하다가 탈영해 미군 포로가 된 경험도 있어서, 전쟁의 참상과 전쟁 자체가 인간을 얼마나 하찮은 미물로 만들기도 하고, 겁쟁이로도 만들며, 얼마나 지독한 악마로 만들기도 하는지 지긋지긋하게 경험을 해 누구보다 진심으로 반전주의자가 되었을 터이다.

  이 작품집 《하얀 개》는 작가의 비교적 초기 작품 가운데 미발표작을 모아 1995년에 사후출판한 책으로 첫 작품 <불타는 가슴>만 1936년 (또는) 37년, 나머지는 1947년, 1949~1951년 작품이라고 역자 해설에 쓰여 있다. 나는 사후 출판일 경우엔 원고를 왜 살아생전 발표하지도 않고 책에 싣지도 않았을까, 하고 의심하는 인간이다. 윌리엄 트레버의 유고작품집 《마지막 이야기들》 독후감에서도 비슷한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다시피. 특히 《하얀 개》의 경우엔 초기작품 위주 미발표 작품의 모음이라서, 작가가 자신이 쓴 결과물을 잊었다는 건 별로 호소력이 없고, 어떤 연유가 됐든 간에 하여간 마음에 그리 차지 않아 나중에 손을 볼 의향으로 가지고 있거나, 다섯 편의 극도로 짧은 단편의 경우엔 일단 작품의 스케치나 메모를 한 것 정도로 가지고 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독자는 어쨌거나 읽기만 하면 된다. 그럼에도 굳이 의심을 숨기지 않는 이유는, 여섯 편의 ‘단편소설 같은 단편소설’의 경우에(다섯 편의 극도로 짧은 단편소설은 단편소설 같지 않지?) 뵐의 다른 단편집에 실린 작품과 비교해 별로 빠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숨을 거둘 때까지 책상서랍에 꿍쳐 놓았던 이유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열아홉, 스무 살에 쓴 <불타는 가슴>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폐허의 쾰른이 무대가 아닐까 싶기도 했었음에야. 하긴 좋은 작가는 보통 청소년 시절부터 애늙은이 경향이 심하긴 하지만.


  물론 내가 뵐의 작품에 관한 선입견이 있어서 <불타는 가슴>을 전후 폐허 독일일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읽어보시라. 아마 내 짐작도 얼핏 타당하다고 여기실 것이다. 1936년이면 파시즘 국가 나치 독일의 거의 모든 국민들이 유대인 차별/탄압은 물론이고 “총통 각하가 명령하면 우리는 싸운다!” 연호하며 군비증강에 혈안이 된 시절이다. 어쨌거나 군수산업은 나라에 물자와 돈이 활발하게 돌게 만들어 독일인의 생활이 다른 서구 유럽과 동등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살인적 불경기에서는 벗어났을 때이다. 아무리 이랬던 시기의 12월이라도, 열여섯 살 먹은 하인리히 페르코닝 소년은 처음으로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으로 작품을 시작하니 뵐의 성향을 알고 있는 독자가 애초에 단편 <불타는 가슴>을 읽기 시작하자마자 무대가 대도시이긴 하지만, 그리고 단 한 번도 무너진 집이나 건물, 깨진 보도블록 같은 묘사가 나오지도 않지만 파괴된 거리의 즐비한 폐허를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어서 “한 노신사가 젊고 뻔뻔한 창녀를 따라 어느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라고 이어지며, 하인리히도 대략 열일곱 살 된 창녀차림의 예쁜 소녀, 결국 창녀로 밝혀지는 소녀 수잔네와 급속하게 친하게 되는데 말이지. 독자인 나는 당연히 전후 궁핍한 시절에 먹고 살기 위하여 어린 나이에도 몸을 팔 수밖에 없는 상황을 상상했다. 어쨌거나 제일 중요한 문제는 살아야 한다는 것이니까. 수잔네는 창녀이면서도 구원과 종교를 말하고, 하인리히의 가슴에 기댄 채 도스토옙스키가 괴테를 천재적으로 모방했다는 말에도 귀를 기울이며, 이름부터 심상치 않은 베네딕트와 막달레나 커플과 친해지는 등 사랑은 계급과 종교의 범주를 초월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제로 열아홉 또는 스무 살에 썼다는 얘기다.


  그래도 재미있는 건 역시 사랑 이야기다. <실락원>. <실락원>하면 하여튼 나한텐 와타나베 준이치가 쓴 무지무지하게 야한 유부녀와 유부남의 치정 이야기인데, 뵐의 <실락원>은 다른 의미에서 괜찮게 읽었다. 작가 본인도 그랬지만 작품의 남자 주인공 ‘그’도 전쟁터로 떠나 7년만에 귀향한다. 다른 곳에 비해 그나마 덜 파괴된 고향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꿈엔들 잊힐리야, 마리아 X를 찾아간다. 건물은 극도로 쇠락해있고, 어두운 복도 맨 마지막 쪽방이 마리아의 방. 지칠 대로 지친 그는 방문을 두드린다. 적막. 더 거세게 두드린다. 그래도 아무 응답이 없다. 그러다가 문에 종지쪽지가 붙어있는 것을 발견한다.

  “일곱 시에 돌아옴. 열쇠는 옆방에 있음. M.”

  ‘나’는. 시점이 자주 바뀐다. 뵐의 작품에서 종종 그랬듯이 ‘그’가 등장했다가 곳곳에서 ‘나’로 바뀐다. 여기서 ‘나’는 옆방문을 두드렸고 조금 있다가 문이 열려 얇은 목걸이를 단 여인이 고개만 내밀고 열쇠를 건네며, 틀림없이 벌거벗었을 이 여자는 이렇게 말한다.

  “아, 당신이 침대 위에 걸려 있는 분이시군요”

  “예, 아마도……”

  여인의 직업은 뭘까? 여인과 친하게 지내는 것 같은 마리아는 또 어떻게 돈을 벌어 생활했을까? 이게 속물인 독자가 궁금했던 거였다. 하여간 나는 마리아의 방을 열고 들어간다. 그리고 7년 전의 마리아에 관한 회상. 나의 가슴에 고개를 묻은 마리아. 정수리까지 곧고 깨끗하게 뻗은 가르마. 내 오른쪽 가슴에서 팔딱팔딱 뛰던 심장의 고동. 그리고 몸의 의식.

  그의 사색은 계속 깊어진다. 방에서 은근히 산포하는 부드러운 비누와 옷 냄새. 그리고 약간의 담배연기가 빚은 깨끗한 냄새. 전후 시절에 비누와 깨끗한 속옷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7시 20분 전. 그는 방을 나와 천천히 어두운 복도를 걸어 역시 어두운 계단을 내려간다. 과연 떠나야 하는가? 곰곰이 생각한 그는 갈 수밖에 없다고, 지금 가는 게 더 좋을 거라고 믿는다.

  나는 여기까지 읽으면서 속으로 말했다. “그래, 생각 잘했다. 한 번 보면 뭐해!”

  인생이 그렇지. <실락원>의 주인공, ‘그’였다가 갑자기 ‘나’로도 변하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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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1-05 0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프닌>
화요일. 발터 하젠클라버, <발터 하젠클라버의 아들>
수요일. 무라카미 하루키, <해변의 카프카>
목요일. 전예진, 《어느 날 거위가》
금요일. 루이스 어드리크, <정육점 주인들의 노래클럽>

stella.K 2024-01-05 11:24   좋아요 1 | URL
오, 드디어 다음 주 수요일 저도 읽은 책이 나오는군요. 작년인가 재작년에 읽고 리뷰는 안 썼던 것 같은데 팔님 어떻게 읽으셨을지 궁금하네요. 그럼 새해 첫 주말 잘 보내세요.^^

Falstaff 2024-01-05 15:42   좋아요 1 | URL
음... 무라카미 아니면 어드리크 둘 가운데 하나겠지요. 다른 세 권은 신간이거든요. ㅎㅎ

yamoo 2024-01-05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인과 군중...이거 읽다가 관뒀으묘~~ 완역도 아니고 끊임없는 등장인물때문에...
뵐은 카타리나로 종결 볼까 합니다. 카타리나가 너무 좋아 읽기 시작한 <여인과 군상>이었는데...완역되어도 읽기 힘들거 같아요. 뵐의 특유한 문체는 읽는 맛이 있긴 하지만...^^;;

Falstaff 2024-01-05 15:43   좋아요 0 | URL
윽. 완역도 아닙니까? 알고는 못 읽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