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닌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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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상 최대의 장난꾸러기 소설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작품을 읽어보면, 아무리 각주, 미주, 벼라 별 주석 같은 역자 훈수를 보태더라도 이이가 쏟아 놓은 단어의 홍수 속에서 제대로 이해하는 농담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책을 읽었으면 그날 안으로 잽싸게 독후감을 써야 하는데, 이제 시간은 바야흐로 2023년 12월, 우리나라 중늙은이들이 본격적으로 해를 잊을, 즉 망년忘年을 핑계로 날마다 천국행을 도모하고 있는 이때, 물론 핑계지만 3일이 지나 감상문을 쓰려 하니 읽을 당시의 기막힌 촌철살인의 장면과 행위와 하다못해 사람의 이름까지 다 잊고 말았다. 오호라. 이 작품을 발표한 것이 1957년의 미국.  나보코프는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의 부르주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워낙 고급 교육을 받은 데다가, 애초부터 빼어난 자질까지 가져 누구보다도 많은 지식을 함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이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작품 속에서 숨기지 않고 슬쩍, 슬쩍 드러내는 잘난 척을 결코 멈추지 않았는데, 이게 얄밉거나 뵈기 싫지 않은(‘보기 싫지 않다’보다 좀 센 표현으로 이게 어울릴까?) 희한한 재주까지 가졌다. 이 책에서도 나보코프는 음악, 미술, 문학 그것도 유럽과 아메리카를 두루 섭렵하여 작품 속 주인공들의 이름을 적재적소에 특징지을 수 있는 등장인물한테 엣다, 너는 이 이름으로 해라, 넌 이렇게 행동해라, 하는 바람에 독자가 읽다가 어어, 하면서 싱긋 웃음짓게 만드는 컷도 여럿 있었다. 도서관 열람실에선 맘놓고 웃지도 못하는데, 세상에 이런 일이. 글쎄 어느 장면, 어느 등장인물을 가지고 지금 이리 침을 튀는지 3일 전이었다면 이 자리에 척척 가져다 붙이겠다만 3일이면 소 한 마리 잡아서 이미 푹 고아 다 먹었을 시간이라 나도 못내 아쉽다. 하여간 나보코프, 소설 정말 잘 쓴다. 돌려차고 감아차고 옆으로 차면서 독자의 옆구리를 사정 보지 않고 간지르다가 결국 망명 러시아 지식인의 우울한 고독에 함께 마음 아파하는 일을 어쩌면 이리 맛있게 썼는지.


  티모페이 프닌.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점잖고 상당히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파벨 프닌 박사는 안과의사로 평생의 명예로 삼는 일은 레프 톨스토이 백작의 결막염을 치료해준 일이라고. 엄마는 독일 귀족의 따님이었다 하니 의사라고 같은 의사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잘 지내다가 이 집에도 불행의 구름이 덮쳤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그냥 저냥 지나가겠는데 가만히 보니까 혁명 러시아는 이게 사회주의/공산주의 국가가 아니라 레닌화化 한 독재체제인지라 도무지 견디지 못하고 러시아를 탈출해 체코 프라하 대학에서 사회학, 정치경제학 박사 학위를 따고 이후 15년간 파리 16구에 살다가 신대륙으로 이주했다. 유럽에 살 때는 아무리 더운 날씨에도 프록코트는 아닐지언정 넥타이와 조끼를 받쳐입은 슈트 차림이었지만, 세월이 흘러 완전무결한 대머리와 그은 피부, 깨끗하게 면도한 얼굴에 뿔테 안경을 쓴 신대륙의 52세 프닌 박사는 일광욕을 즐기고 스포츠 셔츠에 슬랙스 차림에다가 여성 앞에서도 버젓이 맨살 정강이를 노출시키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 양반의 지금 직업이 뉴욕 근방 도시에 있는 웬델 대학의 러시아어 교수다. 명문 웬델 대학에는 정식으로 러시아문학과가 없다. 프라하 대학에서 받은 사회학, 정치경제학 박사 학위는 20세기 중반이 되자 불용학위로 구별되어 이제는 그 타이틀로는 교편을 잡지도 못한다. 이를 어엿비 여긴 독문과 학과장 (알베리히의 아들)하겐 교수는 독문과에 러시아어 과목을 하나 배치하고 프닌을 교수로 초빙했다. 러시아어 중급반 수강인원 1명. 상급반도 1명인데 얜 출석부에 이름이 올랐다는 의미일 뿐이고 얼굴 한 번 본적 없다. 초급반 3명. 러시아어 실력으로 말할 것 같으면, 혁명 직후엔 파리, 이후엔 세계 주요 도시 각처에 뿌리를 내리고 살던 구 러시아 왕족, 귀족 나부랭이들의 커뮤니티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던 나이든 할머니 무리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지만 학생들에게는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실력있는 교사라기 보다는 혁명 후 혼돈기, 적백 내란기, 망명기에 자신이 겪었던 경험함을 재미있게 엮어서 드라마틱한 내용까지 보태 들려주기 때문이었다. 그럼. 실력 없으면 이런 거라도 해야지.


  자꾸 프닌 선생의 러시아어 실력을 이야기하게 되는 데, 어느 수준인지 보자. 프닌은 일단 강의 노트를 먼저 만든다. 러시아의 관용 속담과 민담, 신화 같은 것을 넘치게 인용하여 근사하게 작성을 하고 이것을 독문과 교원에게 영역을 부탁한다. 독문과 대학원생이 러시아 관용어를 제대로 번역할 수 있겠어? 그래도 한다. 번역해 영문으로 개발새발 쓴 것을 프닌이 아니라 밀러라는 조교가 수정을 하고 이번엔 하겐 박사의 비서 아이젠보르 양이 타이핑을 한다. 최종적으로 프닌 앞에 도착한 원고를 프닌 교수가 읽어보고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을 삭제만 한 후 수업에 들어간 교수는 눈을 원고에 박고 그냥 읽는 것으로 수업을 갈음하는 거다. 이 장면만 보면 모교 아르센 루팡 대학의 한모 교수가 생각난다. 김일성 대학 교수로 재직할 때부터 써먹던 강의노트를 시작과 동시에 그대로 칠판에 베껴 쓰던 학계의 전설적 인물. 나한테 F학점 줬다. 생존해 있느냐고? 어딜. 진짜로 김일성대학 교수 출신인데 벌써 갔지. 그땐 이런 교수들 몇몇 있었다. 선풍기에 시험지 날려서 가까이 떨어진 놈 A주던 시절. 헛갈리지 마시라. 멀리 간 시험지는 학점이 낮다. 가까이 떨어진 것이 멀리 간 것보다 무거울 것이고 그만큼 시험지에 답안을 많이 적은 것이 분명하니 A를 주어야 한다는 의견이 당시 국보의 채점법이었다.

  프닌 교수가 사실 나사가 좀 빠지기도 했다. 도대체 정신이 어디에 있는 사람인지 꼭 실수를 하고, 아니더라도 대개 이런 사람들한테 실수 또는 불운의 별이 빛을 모아서 쪼이는 법. 한 번은(작품이 시작하자마자) 크레모나 여성 클럽 부회장 주디스 클라이드 여사가 크레모나에서 열리는 금요 야간 강연회에 연사로 초빙을 해 가서 강연을 해주기로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강의록을 준비해 가방에 챙겨 두었다. 협회는 거마비와 함께 가장 효과적으로 도착하는 기차편을 소개했지만, 평소에 여러 팜플렛을 수집하는 프닌 박사는 그것보다 적어도 20분을 절약할 수 있는, 토요일만 특별 편성하는 열차를 알고 있어서 그 시간표에 입각해 열차에 탑승했다. 객석에 앉아 세상의 어두운 정보만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우둔함에 떠올리며 우쭐하고 있다가, 어머나, 지나가는 차장이 하시는 말씀이 이 열차는 크레모나에서 정차하지 않는단다. 그래서 열차 시간표를 디밀고 무슨 말씀이세요, 따지니까, 아이고, 승객님, 이건 5년 전 열차표 아닙니까요? 20분 벌려다가 졸지에 두 시간을 까먹게 생겼다. 프닌은 할 수 없이 위트처치 정거장에서 내려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네 시 버스를 타면 여섯 시에 도착한단다. 아직 시간이 있어 트렁크를 안내원에게 맡기고 배가 출출해진 프닌은 햄샌드위치를 하나 사 먹는다. 네시 5분전에 안내원에게 가서 가방을 달라며 손가락질을 하는데, 어 참, 손가락이 엉뚱한 가방을 가리켰다. 그리고 가방을 맡았던 안내원은 아내가 출산을 한다고 자리를 비운 상태. 이제 엉뚱한 가방을 지목한 프닌 교수에게 쉽게 가방을 바꿔줄 안내원이 있을 턱이 없지. 이때 네 시 버스가 승강장에 도착한다. 프닌 교수는 머리를 잽싸게 돌려본다. 저 버스를 타지 못하면 오늘 스케쥴은 끝이다. 다음 버스는 여덟 시에 있으니. 프닌은 가방 없이 맨몸으로 출발하고 짐은 돌아올 때 들러 가지고 가기로 결정하고 버스를 향해 헉헉 뜀박질을 한다.

  그렇게 도착한 크레모나 금요 야간 강연회. 앞줄 가운데 자리에 눈에 확 들어오는 관객이 한 명 있었다. 발트해 연안에 살던 친척 할머니 중 한 명. 자신의 옛 동창생. 부모 연배의 러시아어 전문가들. 이렇게 프닌의 인생은 꼬여만 간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도무지 거절을 하지 못한다는 거. 1925년 프랑스 파리 시절에 리자 보골레포브나 양, 검은색 실크 점퍼와 맞춤 스커트 차림의 막 20세가 된 의대생을 만나 연애를 한다. 이 당시 리자는 로제타 스톤(!) 여사가 운영하는 당시의 가장 파괴적인 뫼동 정신 요양소에서 근무하며 간혹 읽기 참혹한 수준의 시를 쓰기도 했는데, 그만 둘은 결혼을 해버리고 만다. 이게 프닌의 유일한 결혼이었고, 리자는 드디어 결혼식을 하기 시작한 거였다. 몇 년을, 그렇다고 오래는 아니고 잠깐 살다가, 신대륙으로 항해하는 여객선에 올랐을 때 리자의 배는 북통만 했었는데, 아이는 당연히, 라기보다 짐작하셨다시피 다른 남자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다른 남자’는 신대륙행 여객선 갑판에서 티모페이 프닌과 우정을 돈독하게 쌓아올린 에릭 빈트, 혹은 에릭 윈드, 또는 에리히 빈트,라는 이름의 아르헨티나 남자였고.

  혼인 전에 리자 보골레포브나였다가 리자 프닌이었다가 리자 빈트가 되었다가 후에 또다시 성이 바뀌는 이 여인은 티모페이 프닌이 나이가 더 들어 한 번 더 이혼을 결정하면서 득달같이 프닌을 찾아와 “당신의 아들이기도 한” 아이의 대학 학비와 생활비를 대달라고 요구하고, 마음 약한 프닌은 이걸 또 거절하지 못한다. 왜?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인간이라서.

  이 독후감을 읽으시는 분들은 여기까지만 알아두시라. 프닌이 이렇게 한심하고, 나사가 몇 개 풀려있고, 먹고 사는 분야의 실력도 엉망이고, 불운의 별이 그를 위하여 반짝이는 인간일 뿐이라고 여기시라. 사실이 그렇기도 하다. 그러나 이방의 땅에서 뿌리내리지 못하는 망명객을 향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변명도 언젠가는 한 번 준비되어 있을 것. 미국 땅에서 부유하는 루저의 삶 속에 마르지 않는 습기를 발견할 수 있을지 혹시 모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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