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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끌 같은 나
빅토리아 토카레바 지음, 승주연 옮김 / 잔(도서출판) / 2020년 3월
평점 :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저 거대한 철의 장막 속에서 이렇게 발랄한 여성 주인공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할 수 있다니, 나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1937년생 작가라면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시절에 젊은 시절을 보냈을 텐데 그 젊음의 감각을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의 자본주의 유입, 그리고 연방 해체 시절까지도 유지하고 있는 듯하다.
위와 같은 오해는 작가의 연령대가 내 작은 고모들이나 이모 또래라서, 페레스트로이카라고 해봤자 1980년대 중반에 있던 일, 토카레바의 50대 초반에 불과해서 작가적 역량을 최대치로 끌어 올린 시기라는 점을 간과했기 때문이었다. 내 고모나 이모들의 50대엔 이미 변할 수 없는 기성세대의 고정관념이 가득 차 있었다고 참으로 시건방지게 단정하고 있었으니 말이지. 고모님들, 이모님, 미안해.
어린 토카레바는 또래에서 두각을 낼 정도의 재주가 있었던 듯하다. 근데 그 재주라는 것이 레닌그라드의 초중등학교에서나 빛을 발하는 수준이었다. 공부를 잘했으나 원래 희망이었던 의사가 되기 위해 의과대학에 진학할 수준까지는 안 되고, 두 번째로 선택한 림스키코르사코프 페테르부르크 음악학교에서 4년 동안이나 공부한 피아노 연주자의 길로도 성공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토카레바는 결국 호구지책으로 모스크바 변두리 학교의 음악 교사를 했다. 근데 이것도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여겨 또다시, 이때가 1963년인데, 주립 영화 연구소에 들어가 배우가 되려 한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토카레바는 배우가 아니라 시나리오 등의 작가가 될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 표제작 <티끌 같은 나>에서 영화 평론가이자 영화사 에디터인 키라 세르게예브나라는 인물을 자연스럽게 그려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토카레바는 열두 살 때 체호프의 <로스차일드의 바이올린>을 읽고 문학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 책에서도 어떻게 해서든 체호프와 연결이 되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유>에서 심혈관전문의 안나의 할아버지가 많고 많은 문인 가운데 체호프와 아는 사이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나는 어째 체호프보다 푸시킨을 인용한 것이 더 눈에 들어왔다. 예를 들어 위에서 말한 ‘체호프와 아는 사이인 안나의 할아버지’를 낳은 증조할머니가 명문가 자매와 찍은 사진이 있었고, 자매의 이름은 체호프 말고 푸시킨의 <예프게니 오네긴>에 나오는 자매, 올가와 타티아나이다.
<티끌 같은 나>에서 주인공 안젤라에게 실연당한 백만장자 니콜라이는 자기를 버린 애인을 강제로 정신병원에 집어넣는다면 안젤라가 병원의 침대에 앉아서 카드를 펼쳐놓고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기계적으로 반복해서 “3 · 7 · 에이스 카드, 3 · 7 · 에이스 카드……”라고 중얼거릴 거라고 상상하는 장면도 나온다. 이것 역시 푸시킨의 <스페이드의 여왕>에서 주인공 헤르만Germann이 백작 부인에게 얻어낸 마법의 수자들이다. 젊은 나이에 회고록을 쓰기 시작하는 인노겐치라는 남자도 있다. 마르트노프카 마을에서 모스크바로 무작정 상경한 안젤라를 먹여주고 재워주는 키라 세르게예브나의 남편이며 전직 브레즈네프의 연설문 담당비서. 브레즈네프가 죽은 다음에 당연히 실업자 신세로 전락해, 이젠 시간이 남아돌아 회고록을 쓰는데 이이의 롤 모델이 피멘, 역시 푸시킨의 <보리스 고두노프> 등장인물이다. 다만 피멘과 달리 회고록을 쓰지 않는 시간에 기도하는 대신 장을 보고 식사 후에 설거지를 할 뿐.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역자 승주연은 체호프 인용문은 주석을 달아 어느 작품의 어떤 등장인물에서 차용했음을 밝히는 반면, 푸시킨 인용에 관해서는 피멘의 경우를 제외하면 모두 침묵으로 일관한다. 하긴 푸시킨의 예들은 우리나라의 경우 “사뿐히 즈려밟고”나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같은 일상용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알고 있을 정도니까.
빅토리아 토카레바. 이이의 작품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쿨하다.
뛰어난 사람을 주인공으로 발탁하지 않는다. 전부 여자다. 그리고 인생이 늘 그렇듯이 토카레바의 작품들 역시 모두 희비극이다. 상황이 아무리 어렵고, 슬프고, 니콜라이 레스코프 말대로 소금물로 세수를 할지언정 툭툭 던지는 촌철의 삶의 유머가 있다. 이제 더 이상 러시아는 먼지가 풀풀 날리는 황량한 벌판도 아니고, 비밀경찰의 손에 언제 끌려갈지 몰라 넥타이까지 다 한 채로 잠을 자던 프롤레타리아 독재 시절도 아니다. 그리하여 토카레바의 작품에서는 예전의 러시아 문학을 통해 학습했던 안나 공작부인과 라스콜니코프를 찾을 수 없다. 시베리아 유형지도 없다. 대신 그 자리를 새롭게 메우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한 단어, 자본주의. 그리고 자유.
아직 토카레바의 자본주의와 자유는 조금 덜 익었다. 새롭게 러시아의 카지노 허브가 될 카자흐 마을 마르트노프카에서 중증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와, 한때는 교직에 있었으나 역시 알코올 중독에 발목을 잡혀 지금은 소 치는 일을 하는 어머니 사이의, 흰 피부, 파란 눈동자의 동네 명가수, <티끌 같은 나> 속 우리의 주인공 안젤라는 모스크바로 가겠다고 선언을 해버린다. 이를테면 무작정 상경.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영화비평가 키라 세르게예브나의 집에서 묵는 대신 집안일을 깔끔하게 처리해주는 안젤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 무척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재산인 몸을 이용해 흔히 하는 말로 팔자를 고쳤지만, 순식간에 휘리릭,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이야기. 그래서 다시 처음 시작했던 지점으로 가야 했으나, 자신이 품고 있던 마음속 킬리만자로의 눈을 향해 두려움 없이 새 발자국을 찍는다.
표제작을 예로 들자. 위가 아주 간략하게 쓴 작품의 내용이다. 얼핏 보면 시어도어 드라이저가 쓴 <시스터 캐리>와 유사한 분위기일 수 있지만, 드라이저처럼 무게도 잡지 않고 무겁지도 않고, 더구나 비극도 아니다. 이미 읽어보신 분들이 동의할지 모르겠으나, 안젤라가 모스크바에 도착해 맞부딪힐 수밖에 없는 천민자본주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돈을 매개로, 돈을 위하여 굴러가고 안젤라 역시 자신의 꿈을 단지 시작해보기 위해서 알츠하이머에 걸린 90세 먹은 노인의 간병인, 신흥갑부 저택의 입주 가정부 등을 전전한다. 자신의 노래를 받고 녹음하기 위한 돈 5천 달러를 모으기 위해. 그러다가 안젤라에게 5천 달러를 건네주고 접촉 없이 그녀의 침대에서 한 이불을 덮고 숙면에 빠지는 억만장자 니콜라이의 정부가 되고, 영화에 잠깐 출연을 하면서 감독을 사랑하게 된다. 안젤라는 늙은 니콜라이와 몇 백만 달러를 버리고 못생겼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사브라스킨 감독에게 갔다가 가진 돈을 몽땅 사기당하는 이야기.
이 주제로 에밀 졸라나 시어도어 드라이저, 프랭크 노리스가 소설을 썼으면 적어도 6백 쪽 분량에다가 두 명은 죽어 자빠지고, 네댓 명은 교도소에 가야 끝을 본다. 토카레바와 같은 세대의 우리나라 작가가 썼다면 안젤라는 거부 니콜라이의 아이를 낳고 사정상 몸을 피해 갖은 고생을 하며 아이를 홀로 키우지만 결국 학교에 갈 나이가 되어 다시 니콜라이 앞에 나타나 아이를 건네주며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미워도 다시 한 번.” 그러나 토카레바는 시종 경쾌하다. 물론 갖가지 난관에 처한 안젤라의 상황이 경쾌할 리가 있겠는가. 당하는 일마다 어처구니없고, 황당하고, 어렵고, 길이 보이지 않더라도 안젤라는 어떻게 해서든지 하여튼 벽을 깨보고자 한다. 어떠한 방법이든지 간에. 그의 멘토라고 할 수도 있는 키라 세르게예브나 역시 마찬가지. 그러나 안젤라는 쿨하다. 평생 자신의 복지를 약속할 수 있는 니콜라이의 아이를 임신하고도 곧바로 낙태 수술을 받는 건 물론이고, 적어도 몇 백만 달러를 더 얻을 수 있음에도 니콜라이와의 결별을 선택한다. 그러니까 쉬운 얘기로, 토카레바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안젤라는 당시의 젊고 예쁜 여자들과 다르다. 토카레바의 어법 역시 여태까지의 작가들과 다르다. 아주 독특하게 시크하고 쿨한 발언만으로도 이이의 다른 책을 찾아볼 충분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나는 토카레바가 만든 등장인물들이 기존 내가 알던 주인공들과 다른 점, 다른 행동 방식이 마음에 딱 들었다. <이유> 역시 빼어난 작품이라는 데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이유>의 주인공 마리나의 좀 구태한 사랑이 표제작의 안젤라에 비해 덜 좋았다. 중편 셋, 단편 둘이 실려 있는데 어느 한 작품 처지는 것이 없다. 당신의 지갑을 여는데 머뭇거리지 마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