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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전야
산도르 마라이 지음, 강혜경 옮김 / 솔출판사 / 2004년 3월
평점 :
품절
아, 이거 참. 분명히 신판데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후벼 파도 괜찮은 건지 모르겠다. 맞다. 신파만큼 독자의 감정에 호소하는 것도 없다. 하여튼 마라이, 이 양반 글 쓰는 건 정말 못 말린다. 이번에도 일종의 삼각관계. 역시 20세기 초반, 조상이 독일에서 내려왔음 직한 귀족 시민계급 주인공의 경험을 써내려간다. 그의 이름은 크리스토프 쾨뮈베스. 시기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났으니 1920년대 초 정도로 보이는 시절.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초가을 오후부터 다음날 오전 일곱 시 정도까지.
크리스토프의 직업은 판사다. 젊은 판사. 처음엔 형사부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유망한 신입이었다가 가정법원으로 발령을 받아 지금은, 만일 이런 게 있다면, 이혼 전문 판사로 자리를 잡은 거 같다. 이이가 집무실에서 다음날 재판이 예정되어 있는 이혼소송의 서류를 검토하는데 소송의 두 당사자들의 이름만 보고도 누군지 딱 알아맞힌다.
남편은 임레 그라이너 박사. 북헝가리 태생. 조상은 역시 독일에서 건너온 이주민으로 할아버지는 유리 세공업자, 아버지는 그냥 수공업자라고 칭했다. 아버지는 살기가 팍팍해서 미국으로 돈 벌러 가 처음엔 곧잘 송금도 해주고 그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연락이 딱 두절되고 이후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었다. 그래 어쩔 수 없이 외갓집에 얹혀사는 신세로 전락했으나, 외삼촌이 약간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자기 누이, 즉 그라이너 박사의 엄마에겐 어떠한 복지도 제공하지 않았다. 대신 그라이너 박사를 의과대학에 보내 졸업시켜 뛰어난 의사로 키워주었다. 하긴 그것만 해도 그 시절에 그게 얼만가. 그라이너 박사는 쾨뮈베스 판사의 초등학교, 중등학교, 대학 동창이며 학창시절부터 겸손하고 조용하며 수줍음 많은 성격으로 친하게 지내고 싶었지만 서로 내성적이라 그저 아는 척만 하고 지낸 사이다. 지금은 개업의인 동시에 사립 요양소 소속 실험실 소장도 겸하고 있으며, 이름난 의사로 돈도 숱하게 벌고 있다.
아내는 안나 파체카스. 벌써 서른 살이 넘은 여성으로 시골학교 장학관의 딸이다. 이 장학관으로 말씀드릴 거 같으면 헝가리 판 고리오 영감. 시골학교인데 아무리 장학관이라도 살림이 풍족했을 리가 없다. 오직 딸 하나를 키우는 아버지가 부다페스트의 기숙학교를 보내고 최상의 드레스와 순정품 진주목걸이 등의 사치품들을 무한 공급해주어 안나는 어려서부터 궁핍한 생활이라고는 책 속에서만 있는, 자신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인 줄 알고 큰다. 9년 전 여름에 우리의 쾨뮈베스 판사가 부다와 페스트를 가르는 다뉴브 강 위에 떠 있는 마르기트 섬에서 미혼이었던 파체카스 양을 처음 만난 적이 있는데 이후에 그저 ‘아는 사이’로 여기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물론 얼굴도 모르는 옆집 아가씨가 시집간다고 해도 마음이 좋지 않은 것이 남자들 속셈이라서 자기가 결혼하고 두 달인가 지나서 임레 그라이너 박사가 안나 파체카스와 결혼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던 가벼운 충격은 아직도 잊지 않고 있었다.
독후감 시작할 때 이야기한 ‘일종의 삼각관계’라고 함은 30대 후반에 달한 판사 크리스토프 쾨뮈베스 박사와 의사 임레 그라이너 박사 그리고 그의 아내 안나 파체카스와의 관계를 말한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변화한 수많은 것들과 심하게 와해되어버린 공동체적 삶의 형태에 대한 그리움을 추구하는 당대 헝가리의 문호 산도르 마라이는 이들 간의 관계를 내놓고 난삽하게 만들지 않는다. 할아버지 크리스토프 1세는 아홉 명으로 구성된 대법관 가운데 한 명이었으며, 아버지 가브리엘 쾨뮈베스도 말수가 적고 절도있는 강인함으로 이름을 드높인 판사여서 법조계에선 쾨뮈베스 학파의 창시자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구도를 잡은 작가는 삼각관계라는 세속적 단어가 사실 그리 어울리지 않을 수준의 심리묘사를 통해, 사랑이라기보다 사랑한다고 믿으면서 지속해나가는 결혼의 정체를 탐구하고 있다.
부부. 이들이 견고하게 유지하고 있다고 오해하고 있는 사랑. 이런 건 사실 말이 되지 않는다. 특히 마라이의 소설에서 드러나는 사랑은 부부간 둘 중의 한 명이 배우자의 모든 것, 육체적 혼인의 순결은 당연하고 가슴 속에 담고 있는 모든 감정을 소유하는 상태를 진정한 사랑이라고 규정한다. 이 책에서도 임레 그라이너 박사는 외과의사이면서 내과도 보고, 최면시술을 행하는 정신과 전문의이기도 한데, 이이가 사고하는 범위와 톨러런스, tolerance, 이걸 우리말로 뭐라 해야 하나, 가끔은 외래어 그대로 이야기하는 편이 쉬운데 말씀이지, 좋다, 관용적 허용치, ‘일상의 도덕률로 허용하는 한계’가 거의 없다. 바로 앞에 독후감을 쓴 <결혼의 변화> 1부의 주인공 일롱카 여사도 비슷한데, 이들의 공통점은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기 위해 그토록 애를 쓰고 있다는 걸 자신들은 모르고 있다는 점.
예를 들어, 아내가 예전에 한 남자를 연모, 한 침상에 누워본 것도 아니고 그저 깊이 연모했고 지금도 그걸 깨끗하게 지우지 못한 채 간혹 그리워하고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래? 그때마다 커피 한 잔 내려주고 어깨를 쓰다듬은 다음 조용히 방문을 닫고 옛 추억에 젖게 도와줘? 그럼 당신은 보살이다. 낌새가 보이면 그때마다 깨져도 아깝지 않은 것들만 골라서 바람벽에 집어 던지며 포악을 떨어? 그럼 당신은 지질이다. 아내의 경우가 아니고 배우자 누구라도 마찬가지다. 다만 자신의 가슴속에 그런 일이 있다, 지금도 그 새끼 생각만 해도 찌릿찌릿하다, 이런 낌새를 보이지 않는 에티켓을 서로 지켜줘야 하는 거 아냐? 이게 내 생각. 만일 눈치 챈다고 해도 알면서 모른 척, 둔하기가 나무늘보 엉덩잇살인 시늉을 하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싶다. 배우자의 전부를 가지고, 알고 사는 부부는 없다. 그게 인생이니까.
근데 소설에서 명색이 주인공 정도가 되려면 부부 가운데 한 명이 아니고 두 명 다 좀 이상한 성격을 가져야 한다. 이들이 왜 이혼을 하려는가 하면, 흠. 이건 알려드리면 안 되겠다. 하여튼 크리스토프 쾨뮈베스 판사는 퇴근을 하고 아내와 함께 일곱 시부터 시작한 전쟁 후 부르주아들의 검소한 다과모임에 참석한 다음 자정 가까운 시간에 귀가를 했는데, 내일 자신이 이혼 판결을 해야 하는 당사자 임레 그라이너 박사가 집에서 판사와의 면담을 기다리고 있는 거였다. 그리하여 새벽, 여섯시 반까지 그라이너 박사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마라이의 특기, 장황한 독백이 이때부터 흥미진진 이어지기 시작한다. 진짜 재미있으니 동네 도서관에라도 방문 해보심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