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트존스 거리
돈 드릴로 지음, 전승희 옮김 / 창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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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라고 하기는 좀 그렇고, 하여간 20세기 후반의 가장 대표적인 작가 네 명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돈 드릴로의 세번째 작품. 이 네 명의 작가를 최근에 하도 여러 번 거명해서 이젠 조금 지긋지긋한 느낌도 난다. 토머스 핀첨, 돈 드릴로, 필립 로스, 그리고 코맥 매카시. 하여튼 난 이 네 명 가운데 토머스 핀천이 제일 좋다는 것만. 좋잖아? 잠깐이라도 다른 생각했다 하면 여지없이 미노타우로스의 미궁으로 빠지는 바람에 끝없이 집중을 요구해 다 읽을 때쯤 해서는 심신이 너덜너덜해지게 만드니 말이지. 이런 면에서 핀천 만큼 대책 없이 심통을 부리지는 않지만 돈 드릴로도 묵직한 한 방이 있다.

  드릴로의 작품은 주로 1980년대 이후에 쓴 것들로, 전미 도서상을 받으며 비평적 성공을 거두었다고 하는 1985년 작 <화이트 노이즈>, 대중적 성공까지 거머쥔 88년의 <리브라>, 1992년 펜포크너 상을 받은 <마오 II>를 먼저 읽고, 이어서 2016년 <제로 K>, 2020년 작 <침묵>까지 가게 된다. 책 뒤에 실린 역자해설에 이이가 “1971년부터 78년까지 여섯 편의 장편소설을 출간하고 ‘컬트’ 작가로 위치를 확고히 했다”고 하는데 데뷔 초기엔 어떤 책을 썼을까, 궁금해했다가 1973년에 출간한 이 책 <그레이트존스 거리>를 읽어보고 드디어 원풀이 했다. 70년대 작품으로 치면 이이를 포스트 모더니즘 작가라고 칭했던 것이 이해가 된다.


  나는 영미 대중음악에 관해 잘 알지 못한다. 록 밴드 가운데 제일 좋아하는 팀 역시 내 또래 세대라면 거의 당연히 열광했던 빅 브라더 앤 더 홀딩 컴퍼니와 리드 싱어 재니스 조플린이다. 당연히 조플린 전집도 가지고 있고, 조플린을 모델로 했다고 생각하는 베티 미들러 주연의 DVD <더 로즈>도 있었는데 술김에 친구 줘버리고는 지금 열라 후회하는 중이다. 생각만 해도 눈물이 앞을 가린다. 재니스 조플린은 스물일곱 살인 1970년에 그만 코카인 과다 섭취로 갑작스럽게 죽고 마는데, 같은 해에, 같은 나이인 지미 헨드릭스 역시 약물 과다 섭취로 앞서거니뒤서거니 해서 갈 길 갔다. 헨드릭스는 42년 11월, 조플린은 43년 1월생이니 미국식으로 같은 나이 맞다. 1973년에 출간한 <그레이트존스 거리>가 이 죽음(들)을 모델로 하지는 않았지만 작품을 쓰는데 적어도 계기가 된 사건이 됐다는 건 그럴 듯해 보인다.


  작품의 주인공 버키 웬덜릭이 화자 ‘나’로 등장하는데, 자신이 겪었던 한 기억, 그의 말에 의하면 이 책은 “잿빛 공간을 가로지르는 기나긴 여행에 대하여, 공과국의 꿈에 에로틱한 테러를 나누어 주는 한 남자의 주변환경에 대하여 이야기”한 것이라고 정의한다.

  버키 웬덜릭은 한 시절 로큰롤의 영웅이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이제 그에게 남은 진정성 있는 죽음을 위해서라면 그의 의지, 즉 ‘자신의 손으로 죽고, 가능하면 이국의 도시에서 죽어야만 죽음이 성공적인 모범사례가 될 수 있다고 여긴다’는 걸 깨닫는다. 말이 한 세대의 영웅이자 우상이지, 영웅 또는 우상 본인은 이게 얼마나 큰 스트레스일까. 부담감을 이기지 못한 벅, 버키는 휴스턴 공연을 하다가 슬그머니 그룹에서 빠져나와 그대로 비행기에 몸을 싣고 그에게는 오염된 성지이자 고향인 뉴욕으로 가버리고 만다.

버키가 정착한 곳이 그레이트존스 거리에 있는 삼층짜리 아파트의 2층, 창틀이 휘어 찬 겨울 황소바람이 틈새로 숭숭 들어와 옷가지로 막아야 하고, 전원을 꼽지 않은 냉장고엔 비닐 레코드와 카세트테이프가 빼곡하게 차 있으며, 난방조차 지극히 낮은 열효율을 자랑하는 다 찌그러진 건물이었다. 1층엔 정신이 조금 이상한 여자 미클 화이트가 날 때부터 두개골이 거의 없어 뭉글뭉글한 머리통을 가지고 있는 지적 장애아를 키우고 있는데 아이는 이름이 없다. 낳고 4개월 이상 살지 못할 줄 알아서 이름 지어줄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아이 아빠는 순회 서커스단에 팔아 돈이나 만들거나 의과대학에 무상 제공해 연구 대상으로 사용하게 하자고 했지만 세상의 거의 모든 엄마처럼 애초에 이도 들어가지 않을 얘기였다. 그리하여 여태 데리고 살며 죽을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인데, 음, 여기까지 하자.

  3층엔 에디 페니그, 본명인 에드워드 B. 페니그로 작품을 발표한다는 작가가 살고 있다. 시인이기도 하나 주로 소설을 쓴다. 미스터리, 공상과학, 낮 방송의 연속극 대본, 단막극, 그리고 포르노까지. 하지만 독자들 누구도 똥과 자신을 구별하지 못한다고 자조 어린 목소리로 말한다. 지금 페니그의 고민은 새로운 장르인 아동 포르노 문학을 쓰고 있는데 조금도 진도가 나가지 않는 거란다. 아직까지 문학 전체를 통틀어서 다룬 적이 없는 유일한 분야로 자신의 작품에는 성인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는, 아이들에 대한 포르노가 아니라 아이들을 위한 포르노를 쓰려 한다는 것. 이게 팔릴까? 하는 질문에 페니그는 한 마디로 잘라버린다. “시장성? 셀로판지에 새똥을 싸서 팔아도 사는 사람은 있는 거야.” 그러나 그의 노력은 당연히 실패로 끝나버리고 만다.

  이 아파트의 2층은 버키의 집이 아니다. 텍사스에 있는 작은 은행의 은행장, 공공시설회사 이사, 자동차대리점 동업자인 사업가의 외동딸 오펄의 집으로, 오펄은 가족들로부터 도망해 로큰롤에서 안식처를 구하다가, 멕시코에서 버키를 만났다. 꿈은 코카인을 상용하는 하드록 밴드의 리드싱어가 되는 것이었지만 현실에서는 스튜디오 파티에서 탬버린을 치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둘은 짧지 않은 동안 한쌍으로 지내면서 둘 사이에 진정한 연결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리하여 서로 더 열심히 가고, 더 많이 가지고, 무엇보다 더 먼저 죽으려 했으나 이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오펄이 “시간이 흐르지 않는 나라로 여행을 떠나”버렸다.


  버키가 아파트로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소속사 트렌스페러노이아의 운영자이자 버키의 매니저인 글롭키가 피난처를 찾아낸다. 버키가 번 ‘막대한’ 돈을 투자하는 과정에 절대로 크지 않은 부동산을 매입했고, 이 아파트 역시 그런 과정에 지금은 회사 소유로 되어 있어서 금방 찾아낸 것도 모자라 마스터 키로 문을 열고 빈 방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던 것. 이후 글롭키는 일종의 비서를 통해 얼마 안 되는 현금을 버키에게 주기도 하지만, 버키 입장에서 생각하면 당연히 당장 현금으로 받을 수 있어야 하는 거금은 절대 손에 쥐어지지 않는다. 큰 단위로 투자를 진행하고 있어서 계약을 파기하지 않으면 현금화가 안 되는데, 파기했다 하면 어마어마한 손실을 감당해야 한단다. 대강 감 잡히시지? 버키는 책이 끝날 때까지 많은 현금을 쥐기는커녕 흘깃 쳐다보지도 못한다.

  그리고 등장하는 이상한 소녀 스키피. 어떤 사람이 전해주라는 포장물을 안고 있었다. 꾸러미를 보관해달라고 부탁을 하며 때가 되면 누가 와서 가져갈 거라는 말을 한다. 버키, 속도 좋지. 그키피에게 하는 대답이, 너네들이 꾸러미를 가지러 왔는데, 내가 의식이 없거나 죽었거나, 여기에 없으면 그냥 문을 박차고 들어와 가져가면 돼. 그리고는 신경 꺼버린다. 며칠 후, 드디어 모로코 사막에서 따뜻한 날씨를 즐기고 뉴욕으로 돌아온 오펄. 그녀의 옛 희망은? 맞다. 코카인 상용하는 하드록 밴드. 오펄은 꾸러미를 보자마자 단번에 알아맞춘다. 그건 롱아일랜드에 있는 미국 정부의 극비 연구실에서 유출된 것으로 지상최고의 마약이 될 원료 샘플이란다. 가격을 책정하지도 못할 수준이라고. 아니나 달라, 이 샘플을 얻기 위해 주로 영국에서 유럽의 판권을 좌우하는 거물도 뜨고, 연예기획사 트랜스페러노이아와 깊은 관련이 있는 해피밸리 농장공동체에서도 지하세계의 천재과학자 페퍼 박사의 시험을 거쳐야 한다는 단서는 붙지만 무지막지한 관심을 표명하는데, 대강 아시지? 미국 영화, 소설에서 마약이 등장하면 몇 명이 죽어나가야 한다는 거.

  이 와중에 뭐 조연 출연자는 다음으로 하고, 어쨌든 지상최고의 마약을 일정기간 보관하고 있었던 버키 웬덜릭도 무사하지 못하리라는 건 당연하다. 게다가 버키가 공연, 방송, 기타 등등을 통해 벌어들인 막대한 현금을 보유하고 있는 집단까지 개입을 하고 있으니 말이지.

  미국 사람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고독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레이트존스 거리, 기도할 때처럼 피로의 순간, 버키는 스스로 절반은 성스러운 사람이 된 것 같고, 알 수 없는 시련이 다가올 것에 대비해 에너지를 축적하는데 몰두하고 있었으나, 그 결과는 알려드리지 않겠다. 이 모든 일련의 과정과 사건들이 저 앞에서 말한 “잿빛 공간을 가로지르는 기나긴 여행”이었으며 자신만의 공화국, 즉 사생활의 꿈에 대한 테러였다는 것을 차츰차츰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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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2-01-31 10:3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술김에 <더 로즈>를 친구에게 넘기셨다니….. 술이 정말 잘못했네요. 한동안 술 끊고 싶었을 듯합니다만…. 한편으로는 골드문트 님이 술 취했을 때 옆에 있으면 클래식 음반 막 넘기는 거 아닌가 싶어서 ㅋㅋㅋㅋㅋㅋ 술 좀 멕여보고 싶네요! 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2-01-31 11:56   좋아요 3 | URL
흑흑흑... 술이 웬숩니다. 술김에 그거 나한테 있는데 너 줄게, 쉽게 약속을 해버리는 겁니다. 그럼 술 깨자마자 아침부터 완전 해탈의 경지, 미네르바를 구경합니다.
남아일언풍선껌이긴 해도 한 번 뱉은 말은 돌이킬 수 없으니 눈물을 머금고 줘버리고 말았습니다. 흑흑흑....
그래서 코비드 세상이 조금은 좋습니다. 혼술이 95% 이상이니까요. 흑흑흑....
 
성난 군중으로부터 멀리
토머스 하디 지음, 서정아.우진하 옮김, 이현우 / 나무의철학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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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 이 어이없는 편집자야. 작품의 스토리를 ˝해제˝라는 제목으로 책의 가장 앞에 배치하면 독자는 어떻게 하라고. 식스 센스에서 브루스 윌리스가 유령이라고? 알려줘서 고마워, 이럴 줄 알았어?
나, 2백쪽 넘게 읽었다가 무슨 지랄 났다고 새삼스레 해제 들춰보고는 지금 괴멸이다, 괴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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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2-01-30 09: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저 표지의 ‘우먼 인 레드’는 어찌 되는데요?

Falstaff 2022-01-30 10:07   좋아요 2 | URL
총 650쪽 분량에 지금 220 부근인데요, 빨간 드레스의 아가씨가 누군지는 알겠는데 왜 토끼는 줄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제가 읽었다고 유부님한테도 해제를 말해드릴 수는 없잖아요. ㅋㅋㅋ

잠자냥 2022-01-30 09:5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재미는 있는데 참 짜증나쥬 ㅋㅋㅋㅋ

Falstaff 2022-01-30 10:08   좋아요 3 | URL
빅토리아 시대 로맨스 물 가운데 짜증나지 않는 거, 전 아직도 못 읽어봤습니다.
ㅋㅋㅋㅋㅋ 그래도 하디는 재미라도 있지요! ㅋㅋㅋㅋㅋㅋ

새파랑 2022-01-30 1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앞에 해제가 있으면 일단 읽으면 안되는군요 ㅋ 골드문트님의 빡침이 느껴집니다 ㅜㅜ

잠자냥 2022-01-30 12:26   좋아요 2 | URL
심지어 이 책 해제는 굉장히 문제가 많습니다~ ㅎㅎㅎ

새파랑 2022-01-30 12:37   좋아요 1 | URL
아~ 그렇군요 ㅋ 스포에 문제도 좀 있군요~~ 그런데 전 아직 <더버빌가의 테스>도 못읽었어요 😅 읽고싶은데 ㅋ

Falstaff 2022-01-30 20:37   좋아요 3 | URL
책 앞에 해제가 있어도 좋습니다. 서문이 있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데, 이 책의 해제를 앞에 놓는다는 건 말도 안 됩니다. 물론 알라딘의 명사 중의 명사께서 쓴 해제라서 함부로 얘기하면 줘 터진다는 건 알고 있지만, 완벽한 스포에다가..... 에잇, 저도 깡다구가 없어서 더 이상 뭐라 못하겠습니다.
다만 여러 광고문구에 속아서 이 책을 페미니즘 우짜고 저짜고 하는 거에 현혹되신 분들이 많은 거 같아 그런 독자께 심심한 위로를 전합니다.
 
모험적 독일인 짐플리치시무스 대산세계문학총서 163
한스 폰 그리멜스하우젠 지음, 김홍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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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과지성사에서 찍은 대산세계문학총서의 빽빽한 활자로 본문만 765 쪽에 달하는 장편 소설이다. 열심히 읽어서 사흘 반 걸렸다. 17세기 초반을 화려하게 물들였던 독일의 30년 전쟁을 무대로 했다. 30년 전쟁은, 아이고, 정말 복잡하기 이를 바가 없는 신교와 구교도 간의 정치싸움으로 역사책을 읽어봐도 도무지 어떤 이들이 신교를, 어떤 이들이 가톨릭을 옹호했는지 막 헷갈리는 복잡한 양상을 띈다. 이건 당시 보헤미아와 독일이 수다한 영방領邦들로 구성된 봉건사회라서 각 영주에 따라 지지하는 종교가 달랐기 때문이다. 여기에 소문난 잔칫집에 먹을 거 없나 기웃거리는 이웃집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까지 종교를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막 들쑤셨으니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느라고 당시 그곳 농민과 평민들의 삶이 얼마나 팍팍했을 지는 안 보고도 눈에 훤할 지경이다.
  애초엔 신성로마제국이 보헤미아의 개신교도를 잡아 죽이려고 시작했다가 나중엔 프랑스, 스웨덴, 덴마크, 영국, 네덜란드 등이 독일 땅을 조금이라도 차지하려 들어와 전 독일 백성들에게 총체적인 약탈을 감행한 인류가 저지른 가장 추악한 전쟁이다. 하긴 역사상 추악하지 않은 전쟁은 한 번도,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억지로 전쟁의 의의를 찾자고 하면,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독일 내에서 가톨릭, 루터파, 칼뱅파가 동등한 지위를 확보했다는 정도. 당시 엉망이 된 독일을 구경할 수 있는 작품으로 아달베르트 슈티프터가 쓴 <보헤미아의 숲>을 꼽을 수 있겠다. 또 우리나라에서 유명세를 타는 인기작가 스테판 츠바이크가 대본을 쓴(혹은 대본작업에 참여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오페라 <평화의 날>. 요새 함락 직전에 수하 병사를 한 명이라도 살리고 싶은 사령관이, 요새 안에 살고 있는 주민과 병사들 가운데 나가고 싶은 사람은 요새에서 나가 생명을 보전하라고 주문하며, 용감한 아내와 함께 마지막 옥쇄를 각오하는 순간 베스트팔렌 조약서에 서명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와 공격군의 사령관과 포옹하면서 종전의 평화를 만끽하는 장면이 피날레다. 내용은 좋지만 음악은 지겨워 듣기 곤혹스럽다.

 

  작가 야코프 크리스토펠 폰 그리멜스하우젠은 1622년인지 23년인지 하여튼 이 근방에 헤센 지방의 제국 직할시 겔른하우젠에서 이미 기둥뿌리 뽑힌 귀족가문의 후예로 태어났다. 말만 귀족이지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그리멜스하우젠은 겨우 열두 살이던 1635년에 황제군에 붙잡혀 시동 노릇을 하면서 전선을 전전하는 신세로 떨어진다. 그래 비트슈토크 전투와 브라이자흐 포위전에도 참가한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 너무 어려 총을 잡지는 않았을 것으로 짐작한단다. 그런데, 황제군에 붙잡힌 1635년은 30년 전쟁이 이미 4기로 넘어가 이젠 종교전쟁이라기보다 본격적으로 누가누가 독일땅과 독일 국민들을 효과적으로 더럽게 약탈, 노략질하는가 하는 경연의 장으로 변질해서 애초에 종교전쟁의 ‘더러운 근엄함’과 ‘유치한 성스러움’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여튼 그리멜스하우젠은 이 때부터 1648년 조약 조인 때까지 때로는 황제군, 때로는 포로로 잡힌 스웨덴 신교군에서 이리저리 병역을 치룰 수밖에 없었는데, 열두 살의 소년이 어느새 스물다섯 살의 청년이 됐고, 전쟁이 끝나고 1년 후에 같은 부대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하사관의 딸과 결혼해, 오메, 금슬도 좋지, 열 명의 자식을 두었다. 사는 틈틈이 소설을 썼고, 쉰 살이 넘어 자기가 사는 렌헨 지방이 엉뚱하게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전쟁터가 되자 폐허가 되는 걸 막기 위해 다시 군에 입대해, 전쟁의 와중에 숟가락 놨다고 하는데, 총맞아 죽었는지, 낙마해 죽었는지, 급성 맹장염인지, 술에 취해 다리 위에서 아직도 뜨끈한 개똥을 밟아 미끈덩, 미끄러져 다리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물에 빠져 죽었는지는 내 검색실력으로 알 도리가 없다. 하여튼 55세에 갔다. 독일 문학을 전공하는 학생에게는 중요한 인물인지 모르지만 아시아 변방의 독자 입장에선 이 작품 하나 정도만 기념으로 읽어보면 충분하리라.

 

  슈테른펠스 폰 푹스하임이라는 황제군의 용맹한 사령관이 있었다. 이이는 개전 초기에 적은 수의 병사를 규합하여 불꽃 같은 맹렬함으로 적군을 물리치기를 수십 번이었는데, 적군 입장에서 얼마나 눈엣가시였는지 언제 하루 날을 잡아 막대한 대군을 보내 아예 거덜을 내리라 작정을 했다. 아무리 세상 없는 폰 푹스하임이라도 병력의 수에서 너무 차이가 나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병사들을 이끌고 지형상 유리한 숲으로 숨어들어갔다. 그럼에도 사령관에게 워낙 학을 뗀 적군은 아예 씨를 도려낼 각오를 하고 중대 단위로 집단을 이루어 숲을 뒤지기 시작했다.
  요새에 남아있던 사령관의 스코틀랜드 출신 아내 수잔나 램지 폰 푹스하임 여사는 이때 마침 산달을 맞아 오늘 낼 하고 있다가 사령관이 요새를 비운 사이에 점령당한 것을 알고 단신으로 말을 타고 슈페사르트 숲으로 숨어든다. 아무리 급해도 산달에 말을 타다니! 젊은 푹스하임 부인은 말에서 내려 나무기둥에 등을 기댄 채 울부짖기 시작했고, 운명적 공명이었는지 이를 저 멀리서 농사 짓고 사는 멜히오 씨가 듣고 부인을 집에 들여 곧바로 아들을 받는다. 부인은 멜히오 씨 부부에게 아이의 부모 이름을 알려주고, 세례를 받게 해달라고 유언을 한 다음 곧바로 절명하고 만다. 마음 좋아 나중에 복을 받는 멜히오 씨는 부인의 유언대로 아이를 성당에 데려가 앞으로 열 몇 해 동안 키워줄 아기에게 자기 이름을 붙여, 멜히오 슈테른펠스 폰 푹스하임이란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게 해주고 순박하게 완전 촌놈으로, 무구한 소년으로 키운다.
  폰 푹스하임 사령관은 요새도 떨어졌지, 만삭의 아내는 혼자 말을 타고 숲에 들어가 죽었다고 하지, 도무지 인간이 왜 살고, 우라질 전쟁은 왜 하는지 삶의 회의에 젖는다. 아직도 봉건주의가 팽만한 독일 지역이라, 스페인이나 프랑스, 영국이었다면 이 허무함을 채우기 위해 대항해를 떠나는 범선이라도 탔겠건만, 전적으로 종교에 귀의하여 온몸에 사슬을 감고 사는 “은자”hermit가 되기로 하고, 진짜로 거의 완벽한 은자 생활에 접어든다. 귀족 가운데 귀족인 폰 푹스하임은 겨우 자기 몸이나마 눕힐 정도의 초막을 짓고 냉난방 시설도 갖추지 않은 채 백이숙제의 예를 좇아 고사리만 뜯어먹다가 항문이 째지는 불상사를 당한 이후, 간혹 덫에 걸린 날짐승이나 토끼 같은 걸 구워 주변 동네 목사한테 얻은 소금만 뿌려 단백질 보충을 하고는 했다. 이러길 십여 년.
  이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러흘러, 멜히오 씨의 의붓아들은 정식 이름인 멜히오 슈테른펠스라고 불리지 않고 그냥 ‘아들’이라 불렸는데, 이 아들이 열두 살이 됐을 때, 일단의 황제군이 슈페사르트 숲의 멜히오 씨 댁에 쳐들어와 가축을 다 잡아먹고, 가지고 가지 못할 거 같은 가구와 비싼 유리창 같은 건 다 때려부수고, 그것도 모자라 불까지 홀랑 지른 다음에, 갑자기 눈알이라도 돌아갔는지 겨우 열 몇 살 밖에 되지 않은 아들의 누이이자 농부 멜히오의 친딸 우르겔레를 강간한다. 이 와중에 가족을 뿔뿔이 흩어져 십 수년이 지나야 다시 상봉을 할 터이지만, 우르겔레는 그 때 그랬는지, 이후에 그랬는지 이미 유명을 달리한 후다. 아들은 자기 이름도 모르고 숲 속을 헤매다 거의 헐벗은 옷을 입고 그저 죽지 않을 만큼만 양식을 먹고 늘 기도만 올리고 있는 미친 사람처럼 보이는 은자의 제자로 들어가게 된다. 은자가 물어보기를, “이름이 뭐냐?”, 아들이 대답하는데, “아들이요.”
  “아니, 늬 아버지가 널 어떻게 부르느냐고?” “아버지가 누구예요.” “널 낳고 키워준 남자 말이다.” “아, 우린 아부지라고 불러요.” “그래, 아부지는 뭐라고 불렀냐?” “아들이요.” “하, 이거 갈수록 태산이로세. 이제부터 널 짐플리치우스라고 하겠다.”
  짐플리치우스는 ‘천둥벌거숭이’라는 뜻. 이후 얼마 동안 은자와 천둥벌거숭이는 함께 기도하고, 조악한 음식을 먹고, 험한 자리에서 자면서 세상의 이치와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고 배운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은자는 이제 자기가 죽을 날이 온 것을 알고, 천둥벌거숭이와 함께 땅을 판다. 그 속에 들어가 짐플리치우스에게 유언을 하기를,
  “더욱 더 긴 시간을 두고 자신을 깨닫는 훈련을 많이 해야 한다.”
  “사악한 사람과는 상대를 하지 말아야 한다. 해로움이 말할 수 없이 크기 때문이다.”
  “항심을 지켜라. 끝까지 버티는 자는 복을 받는 법이다.”
  그리고 정말로 편안하게 죽는다.
  이제 숲에서 나온 어린 짐플리치우스. 그는 곧바로 체포되어 이상하게 자신의 모습을 닮아 의아해하는 황제군의 스코틀랜드 출신의 사령관 램지 대령에게 불려가 대령의 시동으로 임명된다. 램지 사령관은 그에게 풀 네임을 선물하니 바로, 짐플리치우스 짐플리치시무스..
  여기서 책의 각주에 램지 사령관이 짐플리치우스의 외삼촌이란 걸 밝히는 바람에 여태까지 혹시, 싶었던 독자의 김을 빼버린다. 그리하여 평소에 이런 정보를 밝히기 극히 싫어하는 나로 하여금 독후감 초장에 주인공의 족보를 열어 보이게 만들었다. 아니면 적어도 5백쪽 이상 읽어야 혹시, 하는 의심이 밝혀질 건데 말이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작품은 피카레스크 소설의 전형으로 읽힌다. 짐플리치우스는 평생 자신의 삶에 명문銘文이 될 은자의 유언을 따라 살고자 하지만, 세상살이가 어디 그렇게 되나? 은자의 고귀한 유언은 숲을 떠나자마자 한 줄기 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짐플리치우스는 특유의 영리한 지능과 점점 자라면서 어마무시하게 고귀하고 잘 생긴 청년으로 성장하는 것도 모자라, 기운 센 천하장사마저 비록 쉽게는 아니지만 싸워 이길 수 있는 완력을 지니게 된다. 때에 따라 황제군이었다가, 체포당해 스웨덴 군에 복무하고, 다시 또 상황이 바뀌면 저쪽 군대에 들어가며, 사냥꾼이란 별호로 전국이 이 별호 아래에 벌벌 떠는 최상의 약탈자, 노략꾼이 되기도 한다. 그러면서 절대로 인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고 하여튼 좌충우돌하는 짐플리치우스의 한 평생이 기다리고 있다. 이야기는 재미있다. 처음과 중간까지. 그러다가 중간을 넘어가면서 21세기 독자 입장에서는 비슷한 에피소드가 하도 자주 나와 점점 지겨워지기 시작하고, 나중엔 막 염증이 날 때쯤, 드디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가 창궐해, 지구의 중심에 들어가 물의 대왕을 만나고, 지옥의 루시퍼까지 등장하면, 슬슬 멀미가 나기 시작한다.
  그러니 정말로 읽어보실 분은 마음을 단디 하셔야 한다는 걸, 세 번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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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1-28 13: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열심히 읽어서 3일반!;;;;

Falstaff 2022-01-28 13:12   좋아요 2 | URL
ㅎㅎㅎ 이 책이 그렇습니다. ^^;;;

잠자냥 2022-01-28 13:1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저 이 책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해서 읽다가..... 와,,, 초반 읽는데 이거 증말 내 취향 아니구나 잘못 걸렸구나 싶어서 포기하고 반납했습니다. ㅋㅋㅋㅋㅋ 골드문트 님 리뷰 특히 마지막 문단 읽다 보니 역시 잘 반납한 거 같습니다. ㅋㅋㅋㅋ 물의 대왕이랑 루시퍼라니...ㅋㅋㅋㅋ

Falstaff 2022-01-28 13:19   좋아요 3 | URL
ㅋㅋㅋ 잘 하셨습니다. 저도 후반에 가서는 거의 졸음 반, 책 반 이렇게 읽었어요.

stella.K 2022-01-28 14: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끝까지 잘 읽으시는 것 같습니다.ㅋㅋ

Falstaff 2022-01-28 16:44   좋아요 3 | URL
아휴, 쉽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루시퍼 나올 때부터는 까무러치는 줄 알았습지요. ㅜㅜ

coolcat329 2022-01-28 14:2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포기안하시고 읽으셨으니 보람있으시겠어요. ㅎ
소설의 시조같은 (맞나요?ㅎㅎ) 이 책 문학청년 골드문트님과 어울리네요. 👍

Falstaff 2022-01-28 16:45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 저 문청 아녜요. 그저 책 읽는 거 재미있어서 계속 파고 있는 중입니다.

바람돌이 2022-01-28 16: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 진짜 30년전쟁이라기에 음 볼까하고 리뷰를 꼼꼼히 읽다가 마지막에 가서 파삭!!!! 갑자기 예전에 본 캐빈어쩌고 하던 공포영화가 생각나 막 웃었습니다. 공포영화 컨셉에 충실하게 숲속 오두막의 귀신으로 시작했다가 지구멸망까지 가던 영화였는데 제목이???? 이놈의 기억력...ㅠㅠ 하여튼 취향은 아닌걸로
.. ㅠㅠ

Falstaff 2022-01-28 16:48   좋아요 2 | URL
정말 마지막 편은, 작품의 분량을 늘이기 위해서 되도 않는 이야기를 가져다 땜빵하는 거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갑자기 난데없이 심각한 종교 이야기가 나오고 해서, 아휴, 참. 그것만 빼면 전반적으로 괜찮았는데 아쉽게 된 것이지요. ^^;;;
 
서머싯 몸 단편선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92
서머싯 몸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21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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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 이렇게 뻔한 신파 얘기들을 눈부시게 쓸 수 있는 거야? 21세기 알로까진 독자들 입장에선 뻔히 어떻게 끝날 줄 알면서도, 짐작한대로 결말이 나더라도 그냥 재미있는 거, 이거, 이게 진짜 서머싯 몸의 특기잖여? 그렇잖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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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2-01-27 21: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이구...또 좋군요.😪

Falstaff 2022-01-28 07:45   좋아요 2 | URL
넵. 재미난 책은 많습니다. 돈하고 시간이 읎어서 그렇지....ㅋㅋㅋ

잠자냥 2022-01-27 23: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런 저 아직 시작 안 했는데 이러면 당장 읽고 싶어지잖습니까?!

Falstaff 2022-01-28 07:46   좋아요 1 | URL
저도 1권 읽고 터울을 둔 다음에 2권 읽을 거예요. 천천히 읽으셔요!

페넬로페 2022-01-27 23: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시나 서머싯 몸은 글을 잘 쓰는가 봅니다^^

Falstaff 2022-01-28 07:46   좋아요 2 | URL
뭐 ‘재미‘에 있어서는 은메달 줘도 섭섭한 작가니까요. ^^

바람돌이 2022-01-28 00: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서머싯 몸 읽은지 너무 오래돼서 좋았다는 기억밖에는 없는데 그렇단 말이죠. ㅎㅎ

Falstaff 2022-01-28 07:47   좋아요 0 | URL
넵. 몸은 아무거나 읽어도 재미있습지요. ^^
 
난쟁이와 저녁식사를 - 신현정 시선집
신현정 지음 / 북인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김사인은 자신의 시 <바보사막>을 이렇게 시작했다.

 

  “눈부신 가을볕 더는 성가셔 슬쩍 피해 가셨단 말이지.”

 

  “검붉게 술에 탄 얼굴”의 시인 신현정이 “앞자락 풀어헤치고 광화문 네거리 둥둥 떠 흘러” 갔다고도 했는데 그건, 그 강을 건너지 말라고 그렇게 애원을 해도 결국 물을 건너다 빠져 죽은 저 예전 공무도하가의 백수광부白首狂夫에 빗대 이야기한 것이었다. 그의 죽음을 김사인은 이런 식으로 애도했다. 시의 제목 <바보사막>이 시선집 ≪난쟁이와 저녁식사를≫을 제외하면 죽기 1년 전인 2008년에 랜덤하우스에서 나온 신현정의 마지막 시집의 제목이다. 아쉽게도 지금은 품절이라 괜찮은 상태의 헌책도 구하기 쉽지 않지만.
  나도 시집은 주로 메이저 출판사에서 찍은 것들을 읽는다. 거의 대부분이 그렇다. 그것들만 읽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은 시집이 나오고 또 사라진다. 신현정이란 시인도 얼굴만 익었을 뿐 그의 시 한 편을 읽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메이저 출판사 창비에서 나온 김사인의 시집 안에 위에 인용한 그의 죽음을 애도한 시 <바보사막>을 읽고 신현정의 시집 한 권을 읽기로 작정을 했다.

 

  신현정은 1948년 왕십리에서 태어난다. 당시 서울 “특별시”에서는 수세식 화장실이 없어 모두 자유낙하식 화장실에서 용변을 모았다가 한두 달에 한 번씩 나지막하게 “변소치알~, 변소치알~”을 외치는 (이렇게 얘기하면 그분들께 송구하기 이를 데 없으나 그때를 기념하기 위해 당시에 썼던 말로 그대로 하자면) 똥 퍼 아저씨를 불러 화장실을 비웠는데, 이렇게 모은 분뇨를 가져다 버린 곳 가운데 가장 큰 곳이 왕십리였다. 그리하여 생긴 말이 “왕십리 똥파리”다.
  이이의 이력을 보자. 11번, 15번, 23번 버스 타고 가다가, 흰 폴라 교복 입고 다닌 성신사대부속여고 여학생들과 함께 동선동에서 내리면 바라 보이는 경동중학교를 졸업했단다. 고등학교는 어디를 다녔는지 나와있지 않지만, 당시에 흔히 그랬듯이 경동고등학교를 다녔다고 치고, 고등학교 다닐 때 서울대에서 주최한 전국고교생 문예콩쿠르에서 시 부문 최우수 상을 받아버린다. 제목이 <아기 새와 능금나무>란다. 내가 부모였더라도 참 고민이 컸을 거 같다. 당시 서울 소재 고등학교에는 소위 5대 공립과 5대 사립이라고 해서 경동고등학교도 5대 공립 안에 포함되는 명문 학교였는데, 다른 곳도 아니고 서울대에서 주최하는 글짓기 대회에서 떡하니 최우수 상을 받았으니 바람 하나는 제대로 들었을 터이다. 그러니 그냥 공부에 전념하면 소위 스카이 한 군데 졸업해서 좋은 직장에 취직해 그냥저냥 중산계급으로 먹고 살 수 있을 것을, 1967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미아리 공동묘지 바로 옆댕이에 붙어 있던 미도극장 길 건너 서라벌 예술대학에 입학해 오정희의 1년 후배가 된다. 하긴 스카이 졸업해봐야 지가 기껏 봉급쟁이밖에 더 하니?
  1967년에 입학했지만 당시엔 군 복무기간이 어마어마하게 길어 남학생들은 대강 8년 동안 학적을 유지했었다. 그리하여 1974년에 서라벌 중학교로 교생실습을 가서 소년 골드문트와 조우하는 행운을 누렸으며, 틀림없이 소년 골드문트로부터 좋은 영향을 받아 같은 해 <그믐밤의 수繡>로 월간문학 신인상을 받고 시인 협회에 이름을 등록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1975년에 서라벌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부임하지만, 애재라, 골드문트와 다시 만나는 건 그가 죽은 다음 이 시집을 통해서가 유일하다. 그 다음부터는 세상 사는 일이 뭐 다 비슷비슷하게 비극적이니 그냥 취직해 살았고, 과 후배와 결혼을 했고, 특별하게 시를 썼으며, 얼굴이 벌겋게 탈 때까지 술을 마시기도 했다가, 그래서 그랬는지 비교적 젊은 나이에 간암으로 세상을 등졌다. 어차피 세상 하직하면 한 줄만 남는 게 인생이다. 신현정은 죽어서 시인으로 남았다. 나는? 학생으로 남을 예정.

 

  김사인은 신현정을 애도하는 시의 제목을 <바보사막>으로 했으니 이이의 대표 시가 이것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래 신현정의 오리지널 <바보사막> 전문을 옮겨보자. 미리 독자의 양해를 구해야 한다. 신현정은 시행마다 한 줄을 떼어 썼다. 즉 한 줄 읽고 난 다음에 여유를 가지고 잠깐 있다가 다음 행을 읽으라는 뜻이지만 그렇게 시를 옮기면 지면, 아니지, 당신의 화면을 너무 많이 차지하게 되어 행과 행 사이의 빈 행은 삭제해버리고 그냥 행들을 연달아 쓰겠다. 다만 한 행을 읽고 잠시 뜸을 들였다가 다음 행을 감상하시기만 바랄 뿐.

 


  오늘 사막이라는 머나먼 여행길에 오르는 것이니
  출발하기에 앞서
  사막은 가도가도 사막이라는 것
  해 별 낙타 이런 순서로 줄지어 가되
  이 행렬이 조금의 흐트러짐이 있어도
  또 자리가 뒤바뀌어도 안 된다는 것
  아 그리고 그리고는 난생 처음 낙타를 타본다는 것
  허리엔 가죽 수통을 찬다는 것
  달무리 같은 크고 둥근 터번을 쓰고 간다는 것
  그리고 사막 한가운데에 이르러서
  단검을 높이 쳐들어
  낙타를 죽이고는
  굳기름을 꺼내 먹는다는 것이다
  오 모래 위의 향연이여.  (전문)

 


  이 시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사막은 머나먼 여행길이라고 처음부터 단정을 하고, 시는 시작한다. 즉, 사막을 횡단하는 일은 여행길을 끝까지 가는 일이니까, 사람에게 가장 힘든 여행길, 즉 한 세상 살아가는 걸 뜻하겠지. 낙타를 타고 해와 별을 따라. 근데 왜 바보일까? 없이는 갈 수 없을 낙타를 죽여 굳기름을 빼먹어서? 황금알을 한 방에 얻기 위해 암탉의 배를 가른 욕심쟁이처럼 사막의 한가운데서 자신의 다리를 편하게 해줄 낙타를 찌르고 향연을 벌여서?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이 시에 대한 내 생각은 틀렸다. 그렇다. 당신 생각이 옳다.
  이 시선집의 특징은 신현정이 생전에 낸 시집 네 권에서 좋은 것들을 뽑아 찍었다. 1983년의 첫 시집 ≪대립≫, 2003년에 낸 ≪염소와 풀밭≫, 05년의 ≪자전거 도둑≫, 08년 ≪바보사막≫. 실린 순서는 거꾸로, 1부가 ≪바보사막≫에서 발췌한 것이고 4부가 ≪대립≫에서 뽑은 것이다. 1983년에 처음으로 시집을 찍었다고? 당시에 21세기의 신현정처럼 시를 쓸 수는 없었다. 이미 모더니즘으로 튼튼한 자리를 지켜온 중견시인이 아닌 바에 전(全)의 시대에 말랑말랑하게 자연과 아름다움을 노래했다가는 뼈도 못 추릴 만큼 문학적 린치를 당했을 터이니. 그러나 신현정은 애초에 투쟁과는 좀 거리가 있는 사람이라 나중에 노래할 사막조차도 처음엔 이렇게 애매하게 노래해야 했으리라.

 


  사막의 시간

 

  사막을 걷는 낙타처럼 온몸이 사막이 되어 사막을 가는, 한 방울의 물을 아끼며 먼 길을 가는 대상隊商의 고단한 얼굴과 함께 그것만이 소중한 시간, 모든 것 다 고요히 사막으로 정지돼 있는 사막의 시간은 오직 그것만이 시간인 한 방울의 물을 아끼는 사막의 시간.  (전문)

 

  그런데, 내가 읽기에 가장 좋았던 글들은 세번째 시집 ≪자전거 도둑≫에 있었다. 신현정 특유의 감수성이 잘 나타났다고 읽었다. 이중에서도 제일 좋았던 시를 소개한다. 역시 행과 행은 원래 한 줄 씩 띄어 있지만 붙여서 쓰겠다.

 


  일진日辰

 


  오늘따라 나팔꽃이 줄 지어 핀 마당 수돗가에
  수건을 걸치고 나와
  이 닦고 목 안 저 속까지 양치질을 하고서
  늘 하던 대로 물 한 대야 받아놓고
  세수를 했던 것인데
  그만 모가지를 올려 씻다가 하늘 저 켠까지 보고 말았다
  이때 담장을 튕겨져 나온 보라빛 나팔꽃 한 개가
  내 눈을 가렸기 망정이지
  하늘 저 켠을 공연스레 다 볼 뻔하였다.  (전문)

 


  요즘엔 다 아파트에 살아서, 나도 오래도록 아파트에서 살다가, 이 시를 읽자마자 저 먼 옛 시절을 소환했다. 여름이건 겨울이건 마당 펌프가나 수돗가에서 내의 차림으로 양치하고 머리도 감고, 세수도 하고 발가락 사이에 비누칠도 하던 시절. 겨울이면 솥에 끓인 물을 한 바가지 들고 그거 하나로 찔끔찔끔 찬 기운만 없애 놓고 몸을 덜덜 떨면서도 씻을 거 다 씻던 광경. 나팔꽃이 피었다니 여름날 새벽이었나봐. 나도 지금 아파트 팔고 시골집 하나 사서 이사가면 세수하다가 하늘을 얼핏 올려다보고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어림도 없다. 시인이니까 하늘도 공연히 볼 뻔했다고 눙칠 수 있는 것이지, 아무나 이런 재주를 타고난 게 아니니까. 독자는 그저 시 읽고 아련하게 옛 생각 한 번 하면 그걸로 장땡인 거다.
  아, 신현정. 조금 더 살다 가지. 겨우 만 61년을 살고 가버렸다. 늙은 골드문트가 좋은 기운을 한 번 더 줬을지 어떻게 알고. 뭐 다 인생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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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2-01-27 09:4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니, 소년 골드문트에게 좋은 영향을 받은 시인이라니 궁금해집니다! 안타깝네요 정말 늙은 골드문트의 좋은 기운을 받았어야 하는데...

Falstaff 2022-01-27 10:14   좋아요 3 | URL
시는 제 타입이 아니라 약간 아쉬웠습니다.
소년 금순이가 좋은 기를 줘 등단까지만 한 걸로. 대신 교생 신현정에게 술 좋아하는 영향을 받은 걸로 하면 공평할까 싶네요. ㅋㅋㅋㅋ

mini74 2022-01-27 17: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진 이린 시 참 좋네요. 나팔꽃 한 개 란 표현도 하늘을 공연스레 다 볼 뻔했다는 너스레도 ㅋㅋ 골드문트님 문학계의 산증인 같단 생각이 가끔 들어요 ㅎㅎ

Falstaff 2022-01-27 19:39   좋아요 1 | URL
그죠, 거 참, 재미있는 십니다.
저야 뭐. ㅋㅋㅋ 뒷담화 조금 알고 있다는 거 말고는 ^^;;;

coolcat329 2022-01-27 19: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이 시인과 인연이 있으시군요.
왕십리 똥파리 ㅋㅋ 아 이런 이야기 참 재밌네요.

Falstaff 2022-01-27 19:42   좋아요 2 | URL
ㅎㅎㅎ 어떻게 해서 대학에 갔는데, 집이 왕십리인 아주 독특한 선배가 있었어요. 아직도 친하게 지냅니다. 그 선배 앞에서 왕십리 똥파리 어쩌구저쩌구 했다가 ㅋㅋㅋ 재미난 추억이 있습니다.

coolcat329 2022-01-27 19:46   좋아요 2 | URL
네 ㅋㅋ제가 80년대 초딩이었는데 그때 왕십리 똥파리 엄청 유행이었어요 ㅋㅋㅋ

바람돌이 2022-01-28 01: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시 시는..... 제가요. 알라딘 서재지인님들이 <시와 산책>이라는 책 너무 좋대서 2번이나 읽으려고 시도했거든요. 책도 얇아요. 근데 2번 다 실패했어요. 안 잃히더라구요. 공감이 안가요. 아 정말 이토록 메마른 감성이라니....ㅠ.ㅠ

Falstaff 2022-01-28 07:48   좋아요 0 | URL
조금 오래된 시집을, 도서관에서 대출해 읽으세요.
제 경우에 국한해 말씀드리면, 시 읽는 건 정말 훈련이 필요하더라고요.
에휴... 저도 요새 우리 시 읽으면 흰 건 종이요, 검은 건 글씨랍니다. ㅠㅠ

hnine 2022-01-28 05: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기새와 능금나무> 제목이 어째 처음 듣는 제목이 아닌 것 같아 아무리 기억을 짜내도 기억은 나지 않고 ㅠㅠ

Falstaff 2022-01-28 07:50   좋아요 0 | URL
혹시 존 골즈워디의 <능금나무 아래서>를 연상하시는 거 아닌지요.
그 작품이 딱 청춘의 아리아리한 추억을 긁는 듯하잖습니까. ^^;;

hnine 2022-01-28 08:31   좋아요 1 | URL
아뇨, 말씀하신 <능금나무 아래서>는 대학생때 아마 극장에서 영화로 봤던 그 작품인 것 같네요. <썸머스토리>라는 제목으로 상영했었던.
<아기새와 능금나무>는 훨씬 더 어릴때, 초등학생때였나, 창작동화집 같은 책으로 읽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내용이 생각나질 않는거예요 ㅠㅠ

Falstaff 2022-01-28 08:33   좋아요 0 | URL
오 그럼 정말 이 시인이 써서 최우수상을 받은 바로 그 시일 확률이 높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