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뒤의 삶 창비세계문학 83
소니 라부 탄시 지음, 심재중 옮김 / 창비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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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상 최악의 식민지였던 벨기에 령 콩고의 수도 레오폴드빌에서 1947년에 ‘마르셀 응초니’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작가 소니 라부 탄시의 1979년, 32세 때 쓴 작품.
  역자 심재중은 작품해설에서 아프리카 문학의 ‘열대적 리얼리즘’이란 단어를 소개한다. ‘열대적’이란 말이 작 중에도 많이 등장해 작품해설을 읽을 때쯤이면 익숙하게 받아들일 정도가 되지만 옮긴이의 각주를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 소설에서 ‘열대적’ ‘열대성’이라는 어휘는 야만성, 동물성, 육체성, 폭력성, 상스러움 등을 포괄적으로 의미하는 용어이다.”  (10쪽)


  콩고의 현대사에 두 번째 대통령으로 기록되는 마셈바-데바는 군부 쿠데타로 실각을 했으나 청렴한 원칙주의자로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마셈바-데바의 후임으로 표범가죽 옷을 즐겨 입었던 마리앵 응구아비가 독재 체제로 변질하려는 때 대통령 관저에서 기관총 세례를 받고 사망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때 마셈바-데바가 암살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사형에 처해졌는데 시체가 행방불명되었다고 한다. 소니 라부 탄시의 <죽음 뒤의 삶>에서 ‘마르샬’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 마르샬이 마셈바-데바를 변주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구원의 영도자’라고 불리는 독재자에 저항하는 인물을 대표하는 것일 수도 있다.
  ‘구원의 영도자’와 이후 대를 잇는 숱한 영도자들의 공통점이 육식만 한다는 것과 권력의 연장을 위해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무수한 사람을 살상한다는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공통점으로, 이들의 뒤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거의 무한정으로 밀어주는 서양 열강들의 지지를 받는다는 점이다.
  하긴 콩고가 독립한 1960년부터 아프리카는 물론이고 라틴 아메리카에 소비에트 연방의 미사일을 배치시키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 소비에트가 문을 닫을 때까지 그러지 않았던 날들이 며칠이나 됐을까. 그 부작용으로 제 3세계에는 독재자들이 창궐할 수 있었으며,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많고 많은 제3 세계에서도 아프리카의 신생국에선 유독 끔찍한 독재와 쿠데타가 많았는데 대표적인 열대적 독재자가 우간다 통령 이디 아민이었을 듯. 그는 정적의 고기를 먹기까지 했으니. 당시 우리나라 소설가 송기숙은 집에 기르던 개 이름을 아민이라고 짓고 여차하면 옆구리를 발로 걷어차곤 했다는 소설을 썼는데, 송 선생의 진짜 속마음은 아민이 아니라 박정희였을 수도 있다. 읽어보시면 아는데, 단편의 제목을 잊어 아쉽게 됐다.
  책을 옮긴이가 내놓고 열대적, 열대성 등등을 거론했다는 거 하나만 봐도, 이 책 속에 좀 끔찍스러운 장면이 등장하리라, 라고 생각할 수 있고, 사실이 그렇다. 얼마나 열대적이냐 하면, 읽기가 수월하지 않을 정도로. 나도 이 얇은 책을 읽다가 집어 던질까, 하고 몇 번을 망설였는지 모른다. 좋다, 인용해보자.


  “영도자는 부관이 ‘그자를 데려왔습니다.’라고 외치며 자기 앞으로 떠밀어놓은 아홉 명의 인간 넝마들에게 다가가면서 아주 꾸밈없는 미소를 지었고, 수도에서 가장 큰 백화점이자 정부 전용 백화점인 사계절에서 파는 큼직한 고깃덩어리를 자르는데 쓰는 식사용 나이프를 찔러 넣었다. 칼날이 자신의 목 언저리 속으로 천천히 사라지는 동안 아버지-넝마는 눈살을 찌푸렸다. 영도자가 나이프를 빼내더니 먹고 있던 사계절의 고기 쪽으로 돌아서서 바로 그 피 묻은 칼로 고기를 잘라 먹었다.” (12쪽)


  “아버지-넝마는 대꾸하지 않았고, 영도자가 지퍼 달린 셔츠를 열 듯 신경얼기에서부터 샅굴 부위까지 아버지-넝마의 배를 갈랐고, 늘어뜨려진 내장에서 마지막 한 방울까지 피가 흘렀고, 아버지-넝마의 생명 전체가 두 눈 속으로 숨어들어서 넘쳐나는 생명의 전류처럼 그의 얼굴을 둘러쌌고, 두 눈꺼풀은 소리 없는 작열에 내맡긴 것 같았고, 아버지-넝마는 방금 정사를 끝낸 사람처럼 숨을 내쉬었고, 영도자가 식사용 나이프를 차례차례 그의 두 눈에 찔러 넣었고, 두 눈에서 나온 거무스레한 젤리가 볼 위로 흘러내렸고, 두 줄기 눈물이 목 언저리의 상처 속으로 흘러들었고, 아버지-넝마는 여전히 성행위를 막 끝낸 사람처럼 숨을 내쉬었다.” (13쪽)


  “그는 홀딱 벗은 알몸으로 영도자 앞에 끌려왔고 영도자는 아무렇지 않게 그의 ‘무슈’를 절단하여 이 나라 사람들이 즐겨 쓰는 표현대로 하자면, 그를 피고인 복장으로 만들어버렸다. 그의 발가락 여러 개가 고문실에 그대로 남아 있었고, 입술이 있던 자리에는 아무렇게나 너덜너덜해진 살점들이 붙어 있었고, 두 귀가 있던 자리에는 피가 두 개의 커다란 괄호 모양으로 엉겨 있었고, 퉁퉁 부어오른 얼굴에서 두 눈은 사라졌지만 시커먼 구멍 두 개 속에 검은 빛 두줄기가 남아 있었다. 사람의 형체조차 지워져버린 잔해물 속에 어떻게 생명이 그토록 고집스럽게 남아 있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그러나 뭇사람들의 생명은 모질다. 그들의 생명은 고집스럽다.”  (37쪽)


  이런 묘사를 견딜 수 있으면 책을 읽으시라. 난 억지로 읽었다. 정말 억지로. 사실은 돈이 아까워서. 게다가 비록 콩고 민주공화국 만큼은 아니지만 대한민국의 현대사에 있었던 독재가 어떤 형태로 진행되었는지 알고 있는 바라서 대를 이어 계속되는 폭력과 성 착취와 부정부패가 새삼스럽지도 않았으니 인상 깊게 읽을 수도 없었다. 차라리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가 쓴 <염소의 축제>를 권하겠다.
  이런 저작을 “첨예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형상화 했다”고 하니 참 그렇다. 아무리 그래도, 좀 적당히 하지,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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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1-21 0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호, 고맙습니다. 이 책은 넘기겠습니다. ㅎㅎㅎㅎ

Falstaff 2021-01-21 09:34   좋아요 0 | URL
옙. 열대성만 과하지 않았어도....말입니다. ㅋㅋㅋ

syo 2021-01-21 0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입을 떠어억 벌리고 봤어요. 저도 스킵- 이라고 쓰고보니 이 글 안 읽었어도 몰라서 안 봤을 것 같습니다ㅋㅋㅋㅋㅋ부끄럽다

Falstaff 2021-01-21 10:11   좋아요 2 | URL
아이고, 사이오 님이 부끄럽다면 세상 사람들은 어찌 숨을 쉬라고요! ㅋㅋㅋㅋ

coolcat329 2021-01-21 13: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열대적 리얼리즘...오 무섭네요. 이거 번역하신 분도 대단한거 같아요. 독재는 다 끔찍하지만 유독 아프리카는 그 잔인함이 상상을 초월하는거 같아요. 아휴...고생하셨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먼저 읽으시고 여러 사람 구하셨으니 보람을 느끼셔도 좋으실듯 합니다.

Falstaff 2021-01-21 13:54   좋아요 2 | URL
ㅋㅋㅋ 이리 말씀을 해주시니 고맙긴 하지만, 제발 창비 담당자가 읽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작품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냥 단순히 호오의 문제이니 말씀이죠.
사실 이런 독후감 쓰는 게,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목적이 아니면 쉽지 않긴 합니다. ㅋㅋㅋㅋㅋ

imspeaking 2021-03-18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읽다가 속이 뒤틀려서..문학이고 나발이고 적당해야지 원..이러던 참이었어요.

Falstaff 2021-03-18 09:15   좋아요 0 | URL
그죠. 너무 심했습니다.
 
술라
토니 모리슨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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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짧은 분량의 소설이지만 결코 만만하지 않다. 토니 모리슨의 겨우 두 번째 작품. 오하이오 주에 가상의 마을 메달리언 타운이 골짜기에 있었다. 아주 오래 전, 백인 농장주가 중요한 사업 또는 작업을 흑인 노예에게 맡기면서 일을 성공리에 잘 끝마치면 자유와 토지를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흑인 노예는 백인 나리가 만족할 만큼 훌륭하게 작업을 해냈는데, 백인 입장에서 자유를 주는 것은 뭐 별 일이 아니지만, 애초에 약속했던 골짜기 좋은 땅 대신에 마을 위쪽 언덕에서 강까지 쭉 펼쳐진 지역을 주었다. 이 언덕바지의 이름이 보텀. 영어로 Bottom. 왜? 언덕은 하늘, 즉 천국에서 가장 낮은 지역이라 하느님 입장에서 보면 신이 거주하는 지역의 바닥, 보텀이기 때문이다. 흑인은 더 이상 말을 보태지 않고 보텀 언덕에 터를 잡아 살기 시작했고, 이후 점점 흑인 집단촌으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세월은 어느 새 1960년대 이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도 바뀌어, 언덕에서 살다가 사업에 성공해 주머니가 두둑해진 흑인들은 지역을 떠나거나 백인들이 사는 골짜기 근방으로 내려가 겨울만 되면 불어 닥치는 모진 추위를 피해 될 수 있는 대로 안락하게 지내고 싶어 했고, 백인들은 눈 아래 훤히 펼쳐지는 풍광을 감상하기 위하여 흑인들이 떠난 보텀 지역으로 집을 옮기기도 했다. 그러다 이젠 보텀을 싹 밀어버리고 그곳에 메달리언 시티 골프장을 만들려 하고 있는 상태. 여기서 소설은 시작한다. 보텀과 보텀 속에서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저 사십 년도 넘는 과거, 1919년으로 시계를 되돌리면서.
  제1차 세계대전은 1918년 빼빼로 데이, 11월 11일에 끝난다. 많은 미군들은 주로 프랑스에서 몇 달간 충분한 휴식을 취하다가 대개 다음 해 중반을 지나고 난 다음에야 귀가하고는 했는데, 이건 흑인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에서는 인종갈등이 미국에 비하면 거의 없는 편이라 흑인 병사들이 주로 매춘부들이긴 했지만 프랑스 백인 여성들과 연애하는 일도 비일비재 했다. 흑인들이 가장 경계하고 조심했던 건 프랑스 남자들이나 경찰이 아니라 백인 미군 병사였다. 감히 검둥이 주제에 국가를 떠나 백인 여자와 관계를 해? 잔인한 린치를 당한 것이 한 두 명이 아니라고 전해진다. 흑인 병사는 심지어 총기도 지급하지 않았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전장에서 죽어간 시체들을 선별하고 묻어주는 일. 2차 세계대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인들은 흑인에게 여간해서는 총을 지급하지 않았다. 물론 서류 상으로는 지급을 했겠지만 실제로 그랬다고 EBS 다큐멘터리에서 봤다. 미국 내 흑인들은 주로 태평양 전쟁의 병참병으로 근무하면서 전쟁물자의 하역 업무에 집중배치 했다. 어떻게 흑인들을 믿고 총기를 주겠는가. 백인을 향해 겨눌 수도 있는데.
  책에서는 셰드릭이란 인물이 등장한다. 1917년에 징집되어 프랑스로 파병된다. 처음으로 독일군과 맞붙은 전투에서 돌격을 하는 찰라, 옆에서 함께 뛰던 병사의 머리 반쪽이 날아가고, 곧이어 나머지 반쪽도 핑그르르 돌면서 사라졌는데 머리 없는 몸통은 여전히 적진을 향해 뜀박질하는 것을 보고, 맛이 갔다. 1차 세계대전에서 데뷔한 무기가 기관총. 그래 1차 대전을 무대로 한 소설작품 속에 빗발치는 기관총을 무릅쓰고 몸통만 돌진하는 이 장면이 드물지 않게 등장한다. 그래서 셰드릭은 단 한 번의 전투에 영어로 paranoid, 우리말로 하면 피해망상증에 빠져버린다. 오래 군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1919년 강제 퇴역을 해 메달리언 타운에 들어오는 인물. 흑인인지 백인인지 모리슨은 끝까지 밝히지 않는다. 이이는 1920년 1월 3일부터 1965년까지 부려 45년 동안 전국 자살의 날, National Suicide Day를 공포하고 소 방울과 교수형 집행인의 밧줄을 들고 메달리언 타운에서 보텀까지 행진을 한다. 이이는 죽음과 죽어가는 것에 공포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을 예측하지 못한다는 것을 끔찍스러워 한다. 그래 일 년에 하루를 죽음에 바친다면 나머지 날들은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이란 기대로 엽기적인 자살의 날을 제정하게 된 것. 눈치 채셨나? 셰드릭은 45년 후인 1965년까지 생존해 있다가 이 작품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그러나 책의 주인공은 역시 술라 피스. 그리고 술라의 둘도 없는 친구 넬라. 애칭으로 넬. 넬은 그만두고 술라의 집안 내력을 잠깐 보자. 할머니 에바 피스가 젊어서 사랑했던 남자가 보이보이. 보이보이는 에바를 통해 첫 딸이자 술라의 엄마인 해나, 엄마와 같이 에바라고 이름을 지었지만 펄이라 불린 둘째 딸, 그리고 아들 랄프를 만들어놓고 다른 여자를 찾아 그냥 떠나버린다. 에바는 이웃에게 내일 오겠다고 아이들을 맡겨놓고 일 년 반 동안 훌쩍 나갔다가 다리 한 쪽이 없어진 대신 돈을 많이 벌어와 아이를 맡아준 이웃에게 10달러를 주고, 집도 짓기 시작한다. 나중에 동네 사람들이 무람없이 드나들 수 있는 복잡하게 커다란 집으로 확장될 때까지. 술라의 엄마 해나는 라커스와 결혼해 술라는 낳았는데, 술라가 세 살 때 남편이 죽어버린다. 과부가 된 해나는 이후 본격적으로 남성편력을 시작한다. 주로 친구와 이웃의 남편을 골라서 만백성 공평하게. 이런 가정교육을 통해 술라는 섹스라는 것이 즐겁고 빈번한 일이지만 별다를 것도 없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닫게 된다.
  술라의 이모 펄은 먼 곳으로 결혼해 가고, 외삼촌, 풀럼이라고 불리는 랄프는 1917년에 참전해 19년에 미국으로 귀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20년에 귀향을 한다. 술을 마시지는 않지만 완전히 무능력한 인간으로 변해버린 채. 그래 약에 취해 늘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는 풀럼을 견디지 못하는 엄마 에바, 어느 날, 지팡이에 의지해 절뚝거리며 아들의 침대에 가서 머리통을 꽉 안았다가 풀며 양쪽 뺨에 키스를 해주고, 침대 위에 등유를 듬뿍 뿌려준 다음, 방을 나가 신문지에 불을 붙여 확 불살라 죽여 버리고 만다. 아무도 못 봤다. 봤어도 말만 나가지 않으면 굳이 흑인이 죽은 이유를 백인 경찰이 조사하는 노고를 베풀지도 않는다. 동네 유부남에게 골고루 사랑의 은혜를 베풀던 술라의 엄마 해나 역시 어느 날 마당의 화덕에서 옷에 불이 붙어 타 죽어버리는데, 이층에서 그 모습을 발견한 할머니 에바는 이번엔 딸을 구하기 위해 창문을 깨고 그대로 자유낙하 하지만 딸을 구하지는 못한다. 대신 한 구석에서 자기 엄마가 타 죽는 걸 그냥 보고만 있던 술라를 마음 깊은 곳에 새겨둔다.
  술라도 한 건의 살인에 연루된다. 동네 꼬마 치킨 리틀을 나무에 올려주고 같이 내려오고 즐거운 한 때를 보내다가, 꼬마가 귀여워 두 팔을 잡고 뱅뱅 돌리던 술라. 하필이면 치킨 리틀을 뱅뱅 회전시켜주던 장소가 강가였는데, 손에 땀이 차고, 꼬마의 팔목에도 땀이 차, 술라의 손에서 치킨 리틀의 손목이 쑥 빠지면서 그만 깊은 강물 속으로 풍덩 빠지더니 순식간에 고요해진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절친한 친구 넬 말고는. 또 있을까?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넬은 무엇을 했을까. 걔는 그냥 보고만 있었다.
  그러나 토니 모리슨의 작품이 이런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야기만 따라가서는 모리슨의 진짜 맛을 즐길 수 없다. 물론 번역서를 즐기기 위해서는 좋은 역자를 통해야 하겠지만 (나는 역자 송은주에게 실망한 적이 없다. 내년엔 그이가 번역한 길고 긴 책을 읽을 예정이다.) 독자를 여러 가지로 생각하게 하고, 무엇보다 삶 자체에 대해 한 번은 되돌아볼 수 있게 만드는 깊은 사색이 들어 있다. 그렇다고 늘 심각한 것도 아니다. 때로는 날 것처럼 튀는 경쾌한 글도 있다. 이런 것, 즉 문장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산문의 아름다움을 토니 모리슨만큼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이도 별로 없는 듯하다.
  하나 더. 물론 흑인들이 주를 이루는 작품이고 그들의 가장 난처한 일 가운데 하나가 백인과 접촉하는 것이라고 고백하지만, 이 책에서 흑인이라는 정체성을 빼고, 그 자리에 그냥 보편적인 인간, 책의 ‘백인’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장애 한 가지 이상을 가지고 있는 나 아니면 당신을 놓더라도, 모리슨이 만들어가는 삶의 모습이 별로 손상될 것 같지 않아 보인다. 굳이 흑인문학이라 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 보편성을 지향하는 토니 모리슨이 이젠 더 이상 소설을 쓰지 못하는 것을 애달파 한다. 편히 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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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피리 범우문고 273
한하운 지음 / 범우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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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학생이었을 때 애송했던 시인. 그러나 요즘 한하운을 입에 올리는 독자를 별로 보지 못했다. 천형을 짊어진 시인.
  자료마다 조금씩 다른데, 1919년 혹은 1920년에 태어나 75년 김포 장릉 공원묘지에 묻힌다. 열여덟 살 때 한센 병에 걸린 것을 발견했고, 상태가 좋아져 북경대학 농학원을 졸업한 후 귀국해 함경남도 도청에서 잠깐 근무했다. 한센 병이 다시 도지는 바람에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이후 병을 다스리기 위해 일본과 북경에 유학을 다녀올 정도의 가산을 모두 탕진한데다, 소련군이 진주한 함흥에서 시위 사건에 연루되어 월남한다. 이어 당시 한센 병 환자들이 거의 다 그랬듯 유랑생활로 접어든다. 1949년에 등단해 《보리피리》 등의 시집을 출간한 후 십 년 만인 1959년에 한센 병 완치 판정을 받고, 1960년 이후엔 거의 나병 구제, 구나救癩사업에 전념하다 75년에 간경변으로 세상을 떴다.
  시인의 삶 자체가 드라마틱하다. <벌>에서처럼 “죄명은 문둥이…… / 이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벌”을 받은 한 생애를 버티면서도, “아무 법문의 어느 조항에도 없는 / 죄를 변호할 길이 없”는 시인의 시편 속에 한센 병의 고통 자체가 없을 수는 없다. 물론 개별 시인들 입장에서는 처절할 만큼 고통스럽겠지만, 21세기 우리나라 시인들 가운데 <병시病詩>라는 개념을 도입한 시인들은 생각도 하지 못할 만큼 완벽한 단절과 경멸과 가난과 폭력을 견뎌야 했던 그 시절 “문둥병 환자”, 자신이 “문둥이”라는 종bell을 옷자락에 달고 다닌 시인. 그러면서 한하운의 시는 궁상의 골짜기로 투신해버리지 않는다. 독자가 굳이 시인이 한센 병 환자 시절에 쓴 시라고 특정하지 않으면 서정적 민요가락 정도로 읽히는 한하운의 대표 시를 읽어보자.



  보리피리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靑山
  어린 때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인간세상)의 거리
  인간사人間事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몇 년의 산하)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ㄹ 닐니리.  (전문)


  이 시는 소록도에 세운 시비에 각자刻字해 놓았다. 이 시비詩碑는 소록도 자혜의원의 4대 원장인 일본인 수호(周放正秀)가 나환자들을 모아 완도에서 기암괴석을 목포로, 목포에서 목도로, 목도에서 소록도까지 날라 온 돌로, 아마 이청준 작 <당신들의 천국>의 모델이 됐던 것 싶은데, 1942년 6월 26일, 자신의 동상 제막식 날 이춘성이라는 이름의 환자가 수호 원장을 칼로 살해해버린 사건 당시, 동상 앞에 있던 상석 바로 그것이라고 한다. <보리피리> 시비가 소록도에 있다고 하니, 그건 또 당시 소록도에 거의 감금되어 있던 환자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결코 갈 수 없는 정지를 향한 아라리 같기도 하다. 시는 언제나 읽는 장소와 시간, 그리고 분위기가 중요하니까.
  그러나 내가 읽기로 한하운은 역시 그의 지독한 병이, 상당히 절제된 모습으로 시에 투영되어 있는 것이 더 절절하게 와 닿는다. 물론 건강한 독자가 시를 읽어서 느끼는, 느끼기만 하는, 환자들 입장에서는 심지어 불쾌할 수도 있을 불필요한 애틋함을 포함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찌할까. 그분들을 위해 좋게 읽은 시를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을.



  전라도 길
                ― 소록도로 가는 길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天安 삼거리를 지나도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절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千里 먼 전라도 길.  (전문)



  나는 한센 병의 정확한 증상을 모른다. 학창시절 경북의 한 음성 나환자촌(당시엔 그렇게 불렀다.)에 농촌활동을 가 본 적은 있다. 투입되기 전에 미리 나환자 전문 기관에서 교육을 받았다. 나병 균은 산소에서 3초 이상 살 수 없으니 의심스러우면 속으로 하나, 둘, 셋을 세고 다음 행동을 하면 안전하다고 배웠다. 환자 촌에 투입이 된 날 곧바로 주민들이 저녁식사 하는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동네에서 키운 돼지도 한 마리 잡았던가, 벌써 사십여 년 전 이야기니 확실한 기억은 아니다. 근데 술이 좀 오르자 이장님이 자신이 술을 마시던 밥주발을 우리 회장한테 주더니 소주를 그득하게 따라주었다. 회장은 다른 사람들이 다 볼 수 있게, 이장이 입을 댄 장소에다 자신의 입을 대고 소주 한 주발을 벌컥벌컥 마시고 까무러쳤다. 그 후, 우리는 그동안 투입된 어떤 봉사대들보다 환영받았다고, 퇴소하는 날 이장님께 직접 들었다. 그분들은 음성. 환자였다가 완치된 분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는데도, 그들이 키운 돼지나 닭은 시가보다 훨씬 싼 가격으로 팔 수 밖에 없었던 건 확실하게 기억난다. 그들도 속으로는 아끼고 또 아끼고 있던 것이 하나 씩은 있었으리.



  봄


  제일 먼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좁은 지역에도 한 포기의 꽃을 피웠더냐.


  하늘이 부끄러워
  민들레꽃 이른 봄이 부끄러워


  새로는 돋을 수 없는 빨간 모가지
  땅 속에서 움 돋듯 치미는 모가지가 부끄러워


  버들가지 철철 늘어진 계절 앞에서
  겨웁도록 울다 가는 청춘이요 눈물이요.


  그래도 살고 싶은 것은 살고 싶은 것은
  한 번밖에 없는 자살을 아끼는 것이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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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1-01-18 12: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시가 어려워서 거의 안 읽지만 폴스타프님의 시 리뷰는 꼼꼼하게 읽습니다. 이렇게라도 시를 읽자는 마음에서요 ☺ 근데 이 한하운이라는 시인...삶이 참...녹록지 않으셨네요. 그런 아픔이 있는데도 시는 그런 감정을 절제하고 밝고 자유롭게 쓰다니 참 강한 분이셨나봅니다.
<전라도 길>은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가도 가도 천리... 절름거리며 가는 길...이런 구절이 환자로서 시인의 힘든 삶을 표현한거 같아 슬프게 다가옵니다.

Falstaff 2021-01-18 12:27   좋아요 1 | URL
저도 요새 시들, 지독스럽게도 파편화된 작품들은 읽을 때마다 멀미가 심해져 도무지 읽어낼 수 없더라고요. 그래서 저 먼 시절, 교과서에서 배운 시인들의 시로 회귀하게 된 겁니다.
난해한 시들.... 이런 시와 시인들은 무죄입니다. 어차피 예술행위는 점점 소수의 전문교육을 받은 집단을 위해 발전하게 되어 있으니까요. 오히려 문학은 이런 점에서 다른 장르에 비해 늦은 감이 있습니다. 그럼 독자는 이런 경향을 따라야 하느냐? 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독자는 자기 수준에 맞는 작품을 애호하면 그걸로 끝나는 거 아니겠습니까. 저도 거창하지만 이런 의미에서 제게 맞는 시들을 골라 읽고 있는 셈입니다.
꼼꼼하게 읽어주신다니 고맙기 그지 없습니다. ^^

mini74 2021-01-18 13: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들과 마리안느와 마가렛 수녀님 이야기를 하다가 이 분 시도 같이 읽었지요. 일제강점기도 지독했지만 해방된 조국도 그들을 품어주진 않았죠. Falstaff님이 봉사 가셨더니 참 고마운 마음입니다 *^^*

Falstaff 2021-01-18 14:02   좋아요 1 | URL
한센 병 환자들 차별한 건 기원전부터 20세기 말까지 계속 비슷했던 걸로 압니다.
게다가 우리는 해방되자마자 전쟁도 겪고 해서 참 끔찍했을 거 같아요.
봉사 가서 저희가 뭘 도와준 거 보다, 오히려 세상 사는데 도움을 받은 것이 더 많을 겁니다. 아, 그러고보니 벌써 사십 년 전 이야깁니다. 으아.... ^^
 
나의 도시를 앨리스처럼 1
네빌 슈트 지음, 정유선 옮김 / 레인보우퍼블릭북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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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네빌 슈트. 1899년 런던 태생. 엔지니어로 항공기 개발 일을 했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오스트레일리아에 정착해 1960년에 사망할 때까지 글을 쓰며 살았다고 책 앞날개에 간략한 소개 글이 있다. 그리하여 네빌 슈트는 영국과 말레이 반도, 오스트레일리아의 광막한 목장지역 모두를 무대로 삼는 장편소설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19세기 후반, 오스트레일리아 서부의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주 북부의, 20세기 중반엔 거의 흔적만 남기고 사라져버릴 금광도시 홀스크리크에서 거금을 모아 영국 요크셔 주 드라필드로 옮겨간 제임스 맥파든이라는 남자가 있었다. 이이가 마흔여덟 살이 되던 1905년 3월, 귀족들의 취미인 승마를 즐기다가 그만 말에서 떨어져 목이 부러져 길지 않은 생을 마감한다.
  제임스의 아들 더글러스 맥파든은 스코틀랜드 퍼스에 있는 학교를 다녔는데 같은 학교를 다닌 동창 가운데 조크 댈하우지라는 공부 잘 하는 친구가 있어서 훗날 법률사무소 ‘댈하우지 & 피터스’의 파트너 변호사의 자격으로 더글러스 맥파든의 모든 법정 대리인이 된다. 세월이 흘러 이 가운데 피터스가 사망하고 새로이 노엘 스트래천이 주니어 파트너로 들어오지만 법인 이름 ‘댈하우지 & 피터스’를 굳이 변경하지 않았다. 또 세월이 흘러 1928년, 댈하우지 씨 역시 명이 다해 젊은 변호사 래스터 로빈슨이 주니어 파트너로 가세를 해 오늘에 이른다. 그러니 더글러스 맥파든과, 댈하우지를 대신한 자신의 법정대리인이자 작품 속의 관찰자이자 화자인 노엘 스트래천이 서로 먼 인연이 있다고 해도 무방하지만, 두 당사자는 더글러스가 생을 마치고, 모든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이를 알지 못한다.
  더글러스 맥파든은 평생 독신으로 검소한 삶을 살았고, 그의 누이 진 패짓에게 아들과 딸, 이렇게 두 명의 조카가 있어서 모든 재산을 조카에게 상속하기로 결심을 한 상태였다. 누이의 남편인 아서 패짓은 말레이시아 이포 부근에서 회사일로 자동차를 몰고 출장을 가다 나무에 정면충돌해 더글러스의 여동생을 애 둘 달린 과부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1935년에 더글러스는 스코틀랜드 남부의 에어에서 변호사 노엘 스트래천을 불러 새로이 유언장을 만드는데, 복잡한 거 다 빼고 말하자면 모든 재산을 남자 조카인 도널드 패짓에게 유증한다는 거. 만일 누이 진과 도널드가 더글러스보다 먼저 죽으면 더글러스가 장기 투숙하고 있는 호텔의 주인 내외에게 남겨줄 약간의 현금을 제외한 모든 재산은 도널드의 여동생, 엄마와 같은 이름을 받은 진 패짓에게 유증하되, 서른다섯 살까지 노엘 스트래천과 ‘댈하우지 & 피터스’ 법무법인에게 신탁 위임한다는 내용이다. 이것으로 더글러스는 잊자.
  세월이 흘러 1940년 12월 7일이 왔고, 일본의 폭격기들이 진주만에 무차별한 폭격을 가함으로써 미국은 태평양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이때 성인이 된 도널드 패짓은 어려서 말레이 반도에서 자라 현지 언어에 익숙하기도 했고, 순직한 아버지가 워낙 성실했던 터라 쿠알라셀랑고르 인근의 고무농장에 취직해 있었다. 또한 열아홉 살의 동생 진 역시 쿠알라룸푸르의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즉 한 가족이 모두 말레이 반도에 있다가 태평양 전쟁이 터졌고, 1941년 역사상 처음으로 북부 말레이반도의 빽빽한 삼림을 뚫고 싱가포르까지 진격한 일본군에게 가족 모두 포로로 떨어지고 만다. 어머니 진은 1942년에 폐렴으로 죽은 것이 확인 됐다. 강철 체력이던 도널드도 태국-버마간 철도 공사장으로 끌려가 모진 노동 끝에 말라리아, 이질, 괴사가 겹쳐 죽고 만다.
  이제 딸 진 패짓만 남아 더글러스 외삼촌의 큰 재산을 차지하게 되었는데, 그러려면 먼저 살아서 영국에 도착해야 할 터. 말레이 반도에서 포로들을 접수한 일본군은 남자들의 거의 대부분은 태국-버마의 철도 공사 현장으로 보내버리면 되는데, 결코 여자들과 아이들을 위해 따로 수용소를 만들 의향이 없어 나름대로 골칫거리였다. 그래서 일본군들은 자신들의 관할권 밖으로 한두 명의 호송병을 붙여 보내 다른 부대의 관할로 미뤄버리기에 급급한다.
  남자 포로들의 태국-버마 철도 건설에 관해서는 리처드 플래너건의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에서 잘 묘사가 되어 있으나 여자와 아이들 포로에 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진 패짓이 포함되어 있는 서른 댓 명의 포로들은 말라리아와 이질, 불규칙하고 열악한 음식과 의약품이 없는 환경 속에서 말레이 반도의 정글지역을 수백 킬로미터를 행진하며 반 이상이 죽는다. 이 죽음의 행렬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건강한 체질을 타고났고, 거기에 보태 성격적으로도 희망을 잃지 않는 낙천적인 기질을 가진 부류들이었다. 여기에 말레이 말에 익숙한 진 패짓이 자연스레 무리의 대변인 비슷하게 될 수밖에 없었을 것.
  어느 날 이들 앞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온 남자 포로 두 명이 등장한다. 말레이 반도의 철도를 뜯어 태국-버마 철도용 레일과 침목으로 운송을 하는 일을 하게 된 호주인 가운데 웨스트오스트레일리아의 광활한 황무지에서 목동으로 일하다가 참전을 한 조 하먼이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저 먼 변경사람답게 무뚝뚝한 친절이 몸에 밴 조 하먼은 여자들을 위해 돼지고기 덩어리와 약품과 비누도 훔쳐다 준다. 그러다가 자기 사령관이 애지중지하던 닭을 다섯 마리씩이나 훔쳐다 준 것이 발각이 나 두 손에 못이 박힌 상태로 심한 구타를 당해 짧은 생을 접고 만다.
  진 패짓은 여자와 아이들과 더불어 말레이 지역을 방랑 하다 한 촌 마을에 정착을 해서, 무려 영국에서 온 백인 여자와 아이들이 말레이 사람들과 똑같이 사롱을 입은 채 논농사를 지으며 삼 년간 버티다가 전쟁이 끝나 무사히 싱가포르를 거쳐 귀국한다.
  자, 스토리는 딱 여기까지만.
  1948년 1월에 더글러스 맥파든 영감이 사망을 했으니 이젠 진 패짓에게 35세까지 연 9백 파운드의 안정적인 수입이 생길 것이고, 35세가 되자마자 돈방석 위에 올라앉게 될 터. 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이제야 시작되며, 놀랍게도 러브스토리로 진행하게 된다.
  그러면 제목 <나의 도시를 앨리스처럼>이 무슨 뜻일까. 앨리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다. 영어 제목은 A Town Like Alice. 앨리스 같은 거리. 여기서 앨리스는 웨스트오스트레일리아에서 비교적 번창한 도시 ‘앨리스스프링스’를 말한다. 뭐 큰 도시는 아니고 그냥 일층짜리 건물이 비교적 조밀하게 모인 사막도시인데 오스트레일리아 사막 또는 황야 지역에서 상당히 큰 마을인 듯하다.
  따뜻한 책이다. 늙은 변호사 노엘 스트래천이 천성이 착하고 건강한 진 패짓과 나누는 우정을 깔고 새로이 싹이 트는 진과 한 청년의 사랑의 이야기. 가슴이 훈훈해지고 두 권 오백 여 페이지의 분량이 술술 읽혀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작가는 책을 시작하기 전에 실화를 바탕으로 썼다고 언질을 준다. 자기가 만난 가장 씩씩한 여성에 관한 글이라고.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래서 그런지 다 읽고나면, 좋은 작품인 건 분명한데 어딘지 도식화된 그림이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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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1-15 11: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하, 이거 재미날 거 같아서 보관함에 담아두기만 했는데....(중고로 뜨면 사려고요)
폴스타프 님 리뷰 읽어보니 왠지 안 읽어도 될 거 같은 느낌적 느낌이... ㅋㅋㅋㅋ

2021-01-15 1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15 1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oolcat329 2021-01-15 13:22   좋아요 1 | URL
하하...그쵸? ㅋㅋㅋ

Falstaff 2021-01-15 13:27   좋아요 1 | URL
이거 참... 쿨캣 님께 뭐라 말씀을 드려야할지.... 대략 난감...입니다. ㅋㅋㅋㅋ

hnine 2021-01-15 16: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늘 친절한 저자 소개로 시작하는 Falstaff님의 리뷰~ ^^
저 지금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를 다 읽고 리뷰 쓰려고 하던 참에 Falstaff님의 예전 서재 글을 보게 되었는데, 인정못받은 불쌍한 책들 리스트에 당당히 올라있더군요 ㅠㅠ
더구나 카탈로니아 찬가 다음으로 앙드레 브르통의 <나자>를 읽기 시작했는데 그 책도 그 리스트에 있지 뭡니까. 그래서, 더 흥미 팍팍 돋았습니다.

Falstaff 2021-01-15 16:39   좋아요 1 | URL
ㅋㅋㅋ <카탈로니아 찬가>는 다들 좋아하시는 작품입니다. 전 오웰하고 궁합이 참 안 맞아요. 동물농장도 그렇게 싫어한답니다. 1984는 기억도 나지 않고요. ^^
근데, <나자>는, 에구 참. 에구, 에구... 하여간 진도 안 나가는 작품이었어요.
하하하, 오래 전에 쓴 페이퍼인데 아직도 읽어주시는 분이 계시는 게 재미있습니다.
 
시몬마샤르의 환상 서문문고 318
베르톨트 브레히트 지음, 피종호 옮김 / 서문당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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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필 미국 극작가의 작품을 읽고 곧바로 독일 출신 극작가의 작품은 연이어 읽게 됐다. 굳이 나이로 구분해보자면,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유진 오닐,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와 테네시 윌리엄스, 이렇게 비교해야 하겠지만, 사실 세대 차이는 이들의 특징과 별로 관계가 없는 것 같다. 단적으로 이야기해서, 미국의 극작가들이 다루고 있는 단위가 주로 가족인 반면, 독일(어권) 극작가들은 한 나라, 도시 등 보다 넓은 사회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포착하려 하지 않았나, 하는 의미.
  이것은 필연적으로, 아니, 다시 말해야겠다. 아마추어 독자인 내가 느끼는 한에 있어서, 미국 극작가들의 인간 개별적인 감상이 훨씬 호소력이 있는 반면, 독일 극작가들의 작품에는 사회 현상에 대한 분석과 풍자가 두드러진다. 비록 내가 미국의 극작가들을 더 선호하지만 그렇다고 독일(어권) 극작가 역시 멀리 할 수 없는 이유다.
  여태 읽었던 브레히트는 단 한 권. 희곡 <서푼짜리 오페라>, <억척어멈과 그 아이들>, <갈릴레이의 생애>와 시집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들어있는 동서문화사 책이었다. 극작가의 절친한 친구가 작곡한 쿠르트 바일의 오페라 <마하고니 시의 흥망성쇠>의 대본을 통한 것까지 합하면 <시몬 마샤르의 환상>이 다섯 번째 만난 브레히트의 극작이지만, <마하고니…>는 읽지 않은 걸로 치자.
  이 작품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백억 프랑을 들여 견고하게 쌓은 마지노선을 우회해 프랑스를 침략한 독일군에게 어이없이 파리를 내준 1940년 6월 14일부터 6월 22일까지, 생마르탱 시市를 무대로 하고 있다. 6월 22일? 놀랍게도 세계대전 개전 초기인 1940년 6월 22일에 독일과 프랑스는 휴전한다. 물론 후세의 역사가들은 당시 휴전 협정에 서명한 비시 정부를 ‘괴뢰 정부’라 일축하지만, 하여튼 일신상의 이유로 나치에 협력하기로 결정한 앙리 필립 페텡 원수가 휴전 협정에 서명한 것은 사실이다. 이로써 프랑스는 비록 잠깐이지만 독일의 속국으로 편입된 것도.
  베르톨드 브레히트는 이 사실과 저 먼먼 15세기 시절 백년전쟁 당시의 샤를 7세, 즉 오를레앙의 처녀, 잔 다르크가 참전하고 화형을 당했던 시기와 뒤섞어 비교하는데, <오를레앙의 처녀>를 시간 날 때마다 탐독하던 생마르탱 시의 한 여관에 하녀로 일하는 소녀 시몬 마샤르의 꿈과 백일몽을 통해 당시 인물들과 등장인물이 겹치게 만들어 놓았다. 즉, 시몬의 꿈이나 백일몽 속에서 생마르탱의 시장은 샤를 7세로, 탈영한 프랑스 중대장 오노레 페텡은 부르군트 왕국의 공작으로, 여관 주인의 어머니 마리 수포는 샤를 7세의 모후 이자보 등으로 역할을 하게 된다. 다만 장소는 현재, 독일군이 코앞에 있거나 이미 진주한 생마르탱 시의 운송업을 겸해 화물차가 몇 대 있는 여관의 큰 마당에서.
  브레히트가 강조하고자 하는 건, 저 옛날 오를레앙의 처녀가 프랑스의 국법에 의하여 화형에 처해졌듯이, 1940년 6월의 생마르탱에서 잔 다르크의 화신이라 할 수 있는 시몬 마샤르 역시 프랑스 사람들로 구성된 법원의 판결에 의하여 모종의 조치가 취해진다는 것. 그럼 법원의 판사로 등장하는 인물들이 전부 친 나치 성향의 인물이냐? 오히려 그러면 그만인데, 그렇지 않다는데 더 큰 비극이 있다. 아니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거대한 환경의 변화에서 상류의 시민들이 자신의 보전을 위하여 소신을 버리는 행위일 수 있다.
  아쉽게도 브레히트의 작품으로는 특유의 반짝거림이 좀 덜하다. 물론 이건 바로 전에 테네시 윌리엄스의 명작을 읽을 후유증일 수도 있어서 전적으로 작가 탓을 할 수 없기도 하지만, 하여튼 독자가 읽기에 그랬다. 독자의 눈이 쓸데없이 높아져 그랬다 하더라도 다 그게 팔자라고 생각해 박하게 독후감을 쓴다고 독자를 원망하지는 말 것. 아무리 그래도 재미없는 건 재미없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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