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 왕이 되려 한 남자 외 24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26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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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꼰대다. 꼰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고정관념이 한 번 박혔다하면 잘 고쳐지지가 않는다는 것. 키플링의 작품으로는 딱 한 권의 장편소설 <킴>을 읽었을 뿐. 그리고 곧바로 이이를 식민주의자, 국가주의적 애국자 정도로 생각했다. 물론 <킴>이 여간 재미있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속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런 낌새가 마땅하지 못했던 것. 그리하여 이 책을 읽게 된 것도 친애하는 서재 친구 잠자냥 님의 낚시에 걸려서였을 뿐이다. (원래 이이의 낚시 기술이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라서 '꾼'을 넘어 도사의 경지이긴 하지만.)
  근데 이 책으로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에 관해 생각이 바뀐다. 나는 처음엔 당연히 키플링이라고 하면 <정글북> 같은 아동 소설가로 생각했다가, <킴>으로 위에 쓴 고정관념까지 갖게 되었다. 그러나 예상 외로, 진짜 예상 외로 키플링의 이 단편소설집을 읽고 생각을 좀 바꾸기로 했다. 이이가 정치적으로 국수주의자에다가 제국주의자, 인종차별주의자, 식민주의자인 것은 맞지만, 소설가로 그의 작품에 한해서 얘기하자면, 키플링은 아동 소설가는 물론 아니고, 작품 속에 애국주의적인 분위기가 좀 있는 그냥 소설가, 장편보다는 단편소설에서 자신의 반짝이는 재능을 더욱 꽃피운 작가라고 생각하게 됐다.
  이 책은 키플링이 열아홉 살 때 쓴 작품 <백 가지 슬픔의 문>에서 시작해 작품을 쓴 순서대로 예순한 살 때의 작품 <알라의 눈>까지 스물다섯 편의 단편소설을 묶었다. 그러니 그의 전 생애를 걸친 작품 경향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텐데, 가장 놀랐던 것은 참 다양하다는 것. 저 잉글랜드의 전통 고딕소설부터 시작해 언뜻 에드가 포를 연상할 수 있는 괴기극도 있다가, 인간 본성 속에 든 권력욕을 조망하기도 하고, 순진한 어린아이의 심성을 효과적인 방법으로 비뚤게 만들어버리는 교조적 기독교 교육 같은 것도 있고, 헨리 제임스가 쓴 <나사의 회전>과 유사한 혼령이 등장하는 어려운 작품도 포함되어 있다. 그야말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명멸했던 온갖 소설장르를 한 권의 책으로 다 즐길 수 있다.
  이 가운데 재미있게 또는 공감이나 감정이입을 해가며 읽은 작품 세 개를 꼽는다면 첫째가 <매애, 매애, 검은 양>, 둘째가 <‘그들’>이요 셋째가 표제작이기도 한 <왕이 되려 한 남자>이지만 다른 것들도 이들과 견줄 수 있는 작품들이 수두룩하다. 단편집 좀 읽은 독자들도 키플링의 이 단편집처럼 고르게 수준 있는 것들만 골라 실은 책은 발견하기 쉽지 않을 듯하다.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키플링의 단편들이 내 취향은 아니다. 단편의 경우에 나는 작년에 우연히 발견한 독일 여자 유디트 헤르만의 《단지 유령일 뿐》 같은 지극한 심리소설을 좋아한다. 키플링은 헤르만과 거의 반대편에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내가 좋아하는 단편소설의 결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키플링은 충분히 즐길 만했고, 즐겼다.
  이이는 인도에서 태어나 유소년 시절을 보내고, 부모와 떨어져 영국에서 학교를 다닌다. 이때 자신의 경험 일부를 <매애, 매애, 검은 양>에서 묘사한 것일 수도 있을 텐데, 학교를 마치고는 기자 신분으로 다시 인도로 가 7년을 보낸다. 그래서 그랬는지 작품에서도 인도나 아프리카의 원시성이 뚝뚝 떨어지는 날것의 단어들이 곧바로 시각을 자극하기도 하는 반면, 영국을 무대로 해서는 문제적 작가 피터 애크로이드를 읽는 것처럼 삶의 비의나 역사 이면의 오리무중(알라의 눈)을 헤매는 혼돈을 그려내기도 하니, 그의 다양한 문법은 말 그대로 종횡무진이다.
  그건 책을 구성하고 있는 작품이 19세에서 61세까지 무려 42년에 걸쳐 쓴 것으로, 식민지와 세계대전을 경험하고 전쟁 중에 아들을 먼저 보낸 작가의 파란만장이 다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책을 읽는 독자야 짧은 시간에 세월을 휙 지나갈 수 있으나 작가는 한 시간, 한 시간 속에 자신의 모든 성취와 실수와 후회와 안타까움과 사랑과 질투와 미움과 그냥 그런 순간들로 채웠기 때문이리라. 그러니 사실 독자라는 것, 책을 사서 읽는 일이 얼마나 큰 특권이냐는 말이지. 작가라는 이름의 인간들은 오직 독자를 위해 그리 오랜 세월의 경험과 축적을 남김없이 드러내 보여주면 우리는 그냥 읽고 즐기기만 하면 되니까.
  이 독후감을 읽어주신 분들이여, 오랜만에 만나는 일품 뷔페,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 왕이 되려 한 남자 외 24편》의 일독을 미루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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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3-08 09: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이 단편집 정말 물건이죠? ㅎㅎ 저의 낚시에 걸려서 좋은 책을 만나신 듯하여 뿌듯합니다. 제 낚시 솜씨도 인정해주시니 참으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ㅎㅎㅎ
아무튼 저도 이 단편집으로 키플링을 다시 봤습니다. 다른 분들도 이 단편집을 만나서 그런 행운을 누리시길~!

Falstaff 2021-03-08 09:41   좋아요 3 | URL
ㅋㅋㅋ 이런 책만 미끼로 걸어주시면 황공무지입지요!
덕분에 좋은 책,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동두천 문학과지성 시인선 9
김명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7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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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의 한자어는 모두 한글로 바꾸고, 띄어쓰기 없이 한자어를 작은 글씨로 이어 썼다.



  시인 김명인은 1946년생. 다섯 살 때 한국전쟁을 만나 역사적 기록이 되기도 했던 50~51년 겨울의 추위와 굶주림을 경험했다. 울진이 고향이라 태평양을 바라보며 호연지기를 키웠을 것 같지만 추위와 주림의 경험은 바다의 이미지를 삼각파도와, 구겨지는 모랫벌과 찢겨 지나가는 푸른 깃대와, 귓뺨을 후려치는 파도와, 방파제 끝에서 뒤집히는 파도와, 흩어진 암초와, 부서지는 물거품과, 얼음보다 차갑게 비벼대는 물보라와, 모래를 몰고 와 온몸에 끼얹는 바람과, 여태 돌아오지 않는 어부들과, 살갗에 깊이깊이 찔려오는 낚시 바늘과, 원양선을 타다 온 주정꾼 친구들로 바뀌게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경기도 동두천읍 보산리에 있던 학교에 발령받아 국어교사 생활을 하며, 당시에 기지촌이었던 이유로 보육원에 소속된 고아들과 보산리 포주의 아이들 간의 지긋지긋하고 폭력적인 패싸움을 수시로 겪으며 몇 년을 보내다 군역을 위해 서울로 온다. 입대해서 하필이면 베트남 파병을 가게 되어, 시인의 말대로 하면 자신의 앞날과 더 이상 관련되지 않도록 지워 버리고 싶은 기억을 쌓는다. 게다가 이 시대의 시인을 필두로 한 작가들은 1970년 전태일의 분신으로 현실참여의 눈을 뜨기 시작했으니 김명인도 예외는 아니었을 터.
  이 시집의 초판이 나온 시점도 재미있다. 1979년 10월 25일. 책이 종로서적의 진열대에 채 깔리기도 전에 독재자가 총에 맞아 죽는다. 이이가 등단한 것이 1973년, 세는 나이로 스물여덟 살 때. 그 후 육 년이 흘러 첫 시집을 낸 것이 바로 《동두천東豆川》이다. 당시는 금속활자 시대였으니, 만일 조판을 하기 전에 독재자가 죽었다면 시인은 시집을 다시 만들었을까? 나는 이것도 궁금했다. 시집이 문학과지성에서 나왔지만, 반시동인 김명인의 시들은 문지 쪽이라기보다 창비 성향이 더 짙다. 내가 김명인을 처음 읽어본 것이 1981년에 나온 무크지 <실천문학> 2호에서였다고 기억하는데(아닐 수도 있다), 당시 함께 실린 시들의 주인을 보면, 백기완, ‘늘봄’이란 필명만 밝힌 문익환, 양성우, 황색예수전을 쓴 김정환 등이었으니 그때의 기억이 강렬해서 아직도 이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다.
  《동두천東豆川》을 읽어보니까 저 옛 시절,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시집이다. 제목을 보자마자 문득 생각이 났다. ‘송천동 바닷가 그 고아원에서’라는 부제를 단 <켄터키의 집 I>.


  봄과 여름에 정든 모습들 모두 어디로 갔느냐
  바다는 더 조용하고 소문에는
  그해 전쟁도 이미 끝난 겨울에
  아이들은 더러 먼 친척을 따라 떠나가고 날마다
  골짜기를 덮으며 눈 내려서
  추위에 그슬린 주먹들도 깨진
  유리창에 매달린 얼굴들도
  그렇게 쉽사리 서로를 용서하지 않았다

  (중략)

  다시 겨울이 오기 전에 몇 명은
  시집간 여자를 수소문하여 떠나가고 남아 있어도
  자라서는 뿔뿔이 새벽 안개 속으로 흩어졌지만
  모른다 어느 길 어느 모퉁이에서
  어른이 되어서도 우두커니
  누가 길을 잃고 아직도 서성거리고 있겠는지
  그렇게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기야 하는지  (부분)


  이 시를 보면 ‘켄터키의 집’은 송천동 바닷가에 있었던 고아원인 거 같다. 흠. 아래한글 2010은 ‘고아원’을 허용하는데, 한글 2018에선 ‘보육원’이 맞다. 거참 이것도 세월의 힘이다. 어쨌든 고아원에 있던 원생들이 뿔뿔이 그곳을 떠나 앞으로 어떻게 살게 될지 암담한 심정을 그린 듯하다. 근데 왜 켄터키의 집일까. 1연에서 밝혔다. ‘전쟁도 끝난 겨울’이라고. 전쟁을 매개로 고아가 된 아이들, 그들 가운데 특별히 미군을 부계로 둔 고아를 염두에 둔 시라고 제목은 가르쳐준다. 시인이 이 시를 쓰게 된 계기는 “월급 만 삼천 원을 받으면서 우리들은 / 선생이 되어 있었고 / 스물 세 살 나는 늘 / 마차산 골짜기의 허둥대는 바람 소리와 / 쏘리 쏘리 그렇게 미안하다며 흘러가던 물소리와 / 하숙집 깊은 밤중만 위독해지던 시간들을 / 만났다 끝끝내 가르치지 못한 남학생들과 / 아무것도 더 가르칠 것 없던 여학생들을” (<동두천東豆川 II> 부분)에서 보듯 미군 주둔기지촌이었던 동두천에 교사로 부임해 본 것들에서 기인한다고 보인다. 그래 동두천 이야기로 넘어가면, <동두천東豆川 I>에서 시인은


  기차가 멎고 눈이 내렸다 그래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신호등
  불이 켜지자 기차는 서둘러 다시 떠나고
  내 급한 생각으로는 대체로 우리들도 어디론가
  가고 있는 중이리라 혹은 떨어져 남게 되더라도
  저렇게 내리면서 녹는 춘삼월 눈에 파묻혀 흐려지면서 (1연, 부분)

  기차를 타고 동두천에 도착을 한다. 학교 교사를 하지만 현장은 세상의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시인이 기대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막막함은 더 깊은 곳에도 있었다 매일처럼
  교무실로 전갈이 오고
  담임인 내가 뛰어가면
  교실은 어느 새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태어나서 죄가 된 고아들과
  우리들이 악쓰며 매질했던 보산리 포주집 아들들이
  의자를 던지며 패싸움을 벌이고
  화가 나 나는 반장의 면상을 주먹으로 치니
  이빨이 부러졌고 


  함께 울음이 되어 넘기던 책장이여 꿈꾸던
  아메리카여  (<동두천東豆川 II> 부분)

  오래지 않아 시인은 입대하기 위해 서울로 돌아왔으나 사회인으로의 첫 발자국이었던 그곳을 어찌 잊을 수 있었겠는가. 주사가 있었는지 술만 마셨다 하면 동료 교사들과 싸움을 벌이곤 했더라도 그쪽 소식은 계속 들려왔다.


  우리들이 가르치던 여학생들은 더러 몸을 버려 학교를 그만두었고
  소문이 나자 남학생들도 덩달아 퇴학을 맞아
  지원병이 되어 군대에 갔지만
  우리들은 첩첩 안개 속으로 다시 부딪혀 떠나면서
  모르기 때문에 무엇이든 이 세상 것은
  알려고 해선 안 된다고 믿었다.  (<동두천東豆川 III> 부분)


  내가 국어를 가르쳤던 그 아이 혼혈아인
  엄마를 닮아 얼굴만 희었던
  그 아이는 지금 대전 어디서
  다방 레지를 하고 있는지 몰라 연애를 하고
  퇴학을 맞아 고아원을 뛰쳐 나가더니
  지금도 기억할까 그 때 교내 웅변 대회에서
  우리 모두를 함께 울게 하던 그 한 마디 말
  하늘 아래 나를 버린 엄마보다는
  나는 돈 많은 나라 아메리카로 가야 된대요 

  (중략)


  그래 너는 아메리카로 갔어야 했다
  국어로는 아름다운 나라 미국 네 모습이 주눅들 리 없는 합중국合衆國이고
  우리들은 제 상처에도 아플 줄 모르는 단일 민족
  이 피가름 억센 단군의 한 핏줄 바보같이
  가시같이 어째서 너는 남아 우리들의 상처를
  함부로 쓰시느냐 몸을 팔면서
  침을 뱉느냐 더러운 그리움으로
  배고픔 많다던 동두천 그런 둘레나 아직도 맴도느냐
  혼혈아야 내가 국어를 가르쳤던 아이야  (<동두천東豆川 IV> 부분)


  이렇게 9번까지 이어지는 연작시가 일종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게 되는 일을 평론가 김치수는 책 뒤의 해설에서 “시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시가 스스로 씌어지는 경우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라 설명하며 “그것은 시인들 자신이 오랫동안 마음 속에 품고 있던 <할 이야기>가 시인 자신들의 오랜 사유와 절제와 인내를 통해서 이미 내부에서 하나의 결정 작용을 일으키면서 자연스럽게 시로 변모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이런 시는 동두천 이후의 기억 또는 경험, 그러나 시인의 말을 완전히 믿는다면 자신과 더 이상 관련되지 않게 지워버리고 싶은 일 가운데 하나인 베트남 연작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어린 시절의 바닷가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는데, 김명인의 시는 대체로 긴 편이라 인용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 그건 직접 사 읽어보시는 건 어떨까. 아니면 <어떤 소년少年 어부>라고 제목을 일러드리니, 검색해 보시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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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투 대산세계문학총서 95
알렉산드르 쿠프린 지음, 이기주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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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알렉산드르 쿠프린을 설명하기를, “러시아의 국민작가”라고 했다. 물론 이 말은 LDT, 레르몬토프,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의 시대가 저문 이후의 러시아를 말할 텐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러시아 국민작가의 우리말 번역서가 겨우 달랑 <결투> 한 권이란 것이 좀 너무한 기분이 든다. 그래 먼저 작가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를 해야 하겠다.
  1870년에 이미 영락해버린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쿠프린. 거기다가 다음 해에 아버지마저 생을 접어 극빈의 생활을 하다가 여섯 살에 들어간 보육원(옛 고아원)에서, 책의 앞날개에는 군인의 꿈을 갖게 되어 1880년 제2 모스크바 군사학교에 입학한다고 적혀 있는데, 열 살 어린아이가 무슨 꿈과 야망이 있었겠는가. 그저 보육원에서 빨리 나갈 수 있어서 그 길을 선택했다는데 만 원 건다. 군사학교를 십 년 만에 졸업하고 보병부대 소위로 임관한 쿠프린은 1894년 8월, 겨우 4년 만에 군인의 꿈을 접고 전업작가의 길을 걷는다. 4년의 군 생활을 위해 10년의 군사학교를 견딘 셈. 쿠프린은 애초에 군인이 체질에 맞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 19년에 파리로 망명을 떠난 쿠프린은 생활고와 향수병을 이기지 못하고 깊이 병이 든 몸으로 1937년에 귀국하지만 38년에 식도암으로 생을 접는다. 이러니 스탈린 치하의 소비에트에서 무려 20년 동안 망명했던 쿠프린을 ‘작가소개’에서처럼 국민작가로 광고하는 것이 좀 부담스럽긴 하다. 오히려 이 책 <결투>를 읽으며 그의 이력에 눈길이 가는 건, 보육원 출신의 가난뱅이 육군 초급장교 생활 겨우 4년 만에 작파한 일. 19세기 말 당시 20대 초반의 쿠프린의 시각에서 본 러시아 군대의 모습이 작품에 그대로 녹아 있다고 해야겠기 때문이다. 직접체험보다 더 좋은 재료는 없을 테니. 
  작품은 모두 스물세 개의 챕터로 되어 있다. 마지막 장은 에필로그. 독자는 마지막 장을 읽을 때까지 결말을 알 수 없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내가 아무리 내용을 상세하게 이야기해도 에필로그만 말하지 않으면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부르스 윌리스가 유령이란다, 정도의 반전은 기대하지 마시라.
  작품은 18xx년 봄, 소러시아, 그러니까 폴란드, 우크라이나 접경지역에 주둔한 슐코비치 보병연대가 5월에 군단장의 부대 사열을 받기까지와 사열의 후일담, 정확하게 6월 2일까지를 그리고 있다. 편재는 연대장 슐코비치 대령. 주인공이 배속된 대대장은 레흐 중령. 중대장 말더듬이 슬리바 대위, 고참 소대장은 33세쯤 먹은 콧수염 기른 대머리 익살꾼 네트킨 중위,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으로 말하자면 안경잡이 게오르기 알렉세예비치 로마쇼프 소위. 로마쇼프는 소위로 부임하고 겨우 2년차라니까 군대생활이 1년 조금 넘는다.
  소위들의 특기는 사실 '실수하기'다. 동서고금이 같다. 로마쇼프 역시 마찬가지라서 늙은 피터슨 대위의 아내 라이사 알렉산드로브나 피터슨과 내연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이제 연애도 끝물이다. 여사의 취미가 뭔가 하면, 연대로 부임해오는 신임 장교들에게 수청들라 해놓고 홀딱 단물 빼먹는 것. 피터슨 대위는 질투가 많지만 이제 늙어 오히려 아내의 눈치만 두릿두릿 보는 신세로 전락해 군 내부에서 아내의 어린 애인의 앞날에 온갖 훼방을 놓는 것으로 복수한다. 근데 문제는 여사 역시 남편 못지않은 질투를 자랑한다는 거. 여기서 질투란 어린 애인들이 다른 여성에게 눈을 돌릴 때 불타오르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로마쇼프 소위의 성격은 내성적이고 사변적이다. 사실 군인보다 문관 기질이 더 승한데 발을 잘못 디딘 것. 영락없이 작가 자신의 분신이다. 원래 로마쇼프의 계획은 임관하고 첫 두 해 동안 기본적인 고전문학을 섭렵하고,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체계적으로 학습해서 이후 본격적으로 군인 아카데미에 진학, 졸업 후 모스크바나 페테르부르크로 전출을 가는 거였지만, 세상에 마음대로 되는 게 있나 어디. 로마쇼프는 동료 장교들을 따라 만날 보드카 잔치에다가 피터슨 여사와 불장난에 날 새는 줄 모르니 애초에 계획은 그른 일이었다.
  로마쇼프의 고참 가운데 니콜라예프 중위가 있었는데, 이이가 참모본부의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위해 일 년 내내 열공 중이었다. 이미 두 번 연달아 미역국을 자셨고 이번이 세 번째 도전. 니콜라예프도 몰랐고 당연히 로마쇼프도 모르는 것이 있었다. 니콜라예프의 아내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는 이 촌구석에 있는 연대가 너무도 지긋지긋해서 이번에 또 남편이 바나나 껍질을 밟는다면 다른 남자 팔짱 끼고 깨끗하게 정리해서 대도시로 떠날 예정임을. 겉으로 보기에 그리도 얌전하고, 정숙하고, 내조 스타일이고, 가사의 여왕이 말이지. 문제는 로마쇼프가 알렉산드라한테 반해 날이면 날마다 이들의 집에 가 밥도 먹고 저녁 시간을 보낸다는 거. 그걸 피터슨 여사가 듣고는, 자신과의 사이가 소원해진 이유가 알렉산드로브나를 사랑하게 됐기 때문이라고 단정한다.
  우주는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진리. 피터슨 여사는 사랑에 눈이 멀어 로마쇼프에게 사랑을 청하고, 요구하다가 애걸하더니 드디어 증오하는 단계에 이르렀고, 아직은 짙은 호감 이상이 아닌 로마쇼프와 알렉산드로브나의 관계를 과장해서 익명으로 니콜라예프 중위에게 날이면 날마다 편지질을 한다. 근데 이 커플에게만 그랬겠나. 확실히 언급하는 건 아니지만 연대와 군인 부인들 거의 다가 둘의 관계를 의심하는 거 같은 분위기다.
  여기에 19세기 러시아 군대에서 실제로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 일상들. 여태까지 에피소드는 주인공을 둘러싼 발화지점을 설명한 거고, 이 소설이 다른 것들과 비교해 눈에 띄는 건 역시 군대 이야기다. 역자 해설을 보면 이이가 군 복무 중에도 여러 편의 중, 단편을 썼다고 하니 자연스럽게 자신이 실제로 겪고 있는 일이나 상황에 초점을 맞추었을 듯하다. 게다가 직접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사물이나 행위, 행사의 세부 묘사가 강력하다. 예를 들어 우리의 로마쇼프 소위가 대열의 제일 앞에서 자기 소대원들을 이끌고 (분열)행진을 할 때, 자신의 머릿속에서 대중들의 반응, 군단장과 연대장의 칭찬 등을 상상하는 광경과 실제로 자기 소대가 행진하는 것의 어처구니없는 보색대비 장면은 놀라울 정도였다.
  이이를 통해서만 19세기 러시아 군대의 혹독한 군사훈련, 검열을 위해 가혹하게 병사들을 닦달하는 제식훈련, 장교와 하사관에 의하여 벌어지는 병사들에 대한 잔혹한 학대, 밤마다 방탕하게 벌어지는 음주와 도박과 성매수 행위, 일부 장교들의 엽기적 취향 등을 압축적으로, 그래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결투>가 1905년에 출간된 작품이다. 시대와 꼭 비교할 필요는 없지만, 21장에 알코올 중독자이지만 뛰어나게 ‘현명한 자’인 나잔스키 중위가 크게 친하다고는 할 수 없는 주인공 로마쇼프 소위에게 장황한 연설을 하는 장면이 조금 과하게 계몽적이란 생각이 들긴 했지만 20세기 초반에 등장한 뛰어난 리얼리즘 소설이라고 주장하지 않을 수 없다.
  기대했던 것보다 재미있었다. 작가 연보를 보면 이이의 작품이 꽤 많다. 다른 작품들도 속속 번역되어 나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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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3-04 09: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솔제니친 자신은 물론 <수용소군도>에서도 모진고문이나 핍박, 살해위협에도 고국인 러시아로 되돌아가는 경우가 많아 놀랐어요. 이분도 그랬네요.(혁명이후도 살벌했을텐데) 아마도 귀소본능은 동서고금 막론하고 마찬가지겠지만 고문당했을땐 좀 이해가 안가요.🤔

Falstaff 2021-03-04 10:09   좋아요 3 | URL
심지어 파스테르나크는 지바고 써서, 노벨문학상 받으러 가고 싶으면 가라, 대신 한 번 가면 다신 못 온다, 라는 말에 깨갱, 하면서 안 갔잖아요. 러시아 사람들이 더 그런 거 같더라고요. 에이모 토울스가 쓴 <모스크바의 신사>에서 우리의 로스토브 백작도 메트로폴 호텔에서 탈출해 결국 고향으로 가고요. ㅋㅋㅋㅋ
저는 지금도 이민 생각하고 있는 걸요. 쐬주 마시면 짱돌 던져 죽여버리는 이란 회교 민주 공화국으로요. 술 좀 끊어볼까 싶어서.... ㅠㅠ

미미 2021-03-04 10:22   좋아요 2 | URL
반대로 러시아로 이민가시는거 어떨까요?보드카도 워낙 독한데 엄청 마신다니 놀라서 끊게 되실수도 있잖아요ㅋㅋ아무쪼록 살아계시는 편이 팔스타프님 페이퍼 기다리는 저를포함 알라디너들에게 이롭죠.헤헤

Falstaff 2021-03-04 10:34   좋아요 3 | URL
아, 러시아요! 좋은 아이디업니다!
블라디보스톡은 게다가 가깝기도 하잖아요! ㅋㅋㅋ
팔뚝 만한 해삼도 많이 나는 해삼위!!! 근데 좀 추워서 그거 하나가 그렇네요.

잠자냥 2021-03-04 10: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오오. 이거 읽으셨구나! 저 이거 얼마 전에 중고로 뜬 거 샤샤샥 사놨어요. 기대했던 것보다 재밌다고 하셨으니 더 기대해 봅니다.

Falstaff 2021-03-04 10:32   좋아요 3 | URL
근데 주의할 것이 있으니, 여성들이 그리도 듣기 싫어하는 군대 이야기라는 겁니다.
처음부터 끝까지요. 에효... 읽으면서도 똑같은 생각을 했답니다. 헌책이면 싼 맛에... ㅎㅎ

잠자냥 2021-03-04 10:52   좋아요 2 | URL
옛썰! 괜찮습니다. 축구 이야기는 없을 테니까요. ㅋㅋㅋㅋㅋㅋㅋ

2021-03-04 1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04 1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04 1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04 1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리의 클로딘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지음, 윤진 옮김 / 민음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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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면 나도 참 성격이 좋다.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이 이름만 가지고 겁 없이 사서 읽은 책이 <암고양이>와 <여명>. <암고양이>를 읽고 나서 솔직한 감상이, 이게 뭐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여성 작가 가운데 20세기 초반의 프랑스에서 성가를 드높이던 사람이 콜레트라며. 근데 이게 다야? 싶었지만 그래도 눈에 보이면 약간 주저하면서도 사 읽기를 멈추지 않았으니. 이번에도 사실 그리 크게 기대하지 않고 읽었는데, 아우, 이거 다시 생각해봐야겠네. 첫 번째 콜레트가 <파리의 클로딘>이었다면 다른 책들도 좀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을 거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그렇게 생각한다.

  작품의 각주를 보면, 이 책의 전편 격인 <학교의 클로딘>이란 전작이 있어서, 클로딘의 고향인 몽티니에서의 학창시절을 그린 듯하다. 몽티니 저택에서 연체동물, 특별히 달팽이를 연구하던 아버지가 클로드가 책을 출판하려 하는데 파리의 출판사들이 제대로 협조하지 않는 거 같아서 제대로 열 받은 아버지의 뜻대로 아버지, 콜레트, 어마어마한 크기의 멜론 닮은 젖가슴 두 짝을 달고 다니는 유모 멜리, 암고양이 팡셰트, 이렇게 세 명과 한 마리가 파리로 이사한 다음에 클로딘에게 생긴 일들을 적어놓았다.

  다시 앞으로. 내게 첫 콜레트가 <암고양이>였다. 그 작품에 당연히 암고양이가 나온다. 얼마나 유혹적이고 팜 파탈적인 제목인가, 암고양이. 근데 제목과 비해 작품의 임팩트가 덜했다. 그래서 재미가 적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파리의 클로딘>을 읽으면 저절로 클로딘, 작품의 일인칭 주인공이니 작가 자신일 수도 있는 등장인물 자신이 여지없는 암고양이 자체인 것을 알게 된다. 생각과 행동, 만일 동물도 생각이라는 것이 있다면 생각, 행동, 둘 다. 고양이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본능에 기반한 충동과 행동. <암고양이>를 이제 다시 읽어보면 어떨까?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렇게 어떤 계기가 있어 전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책을 다시 읽는 일은 사실 의미 있는 책 읽기가 될 수 있다. 완전히 다른 감상이 될지도 모르니까.

  내용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파리로 이사한 클로딘 가족.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티푸스 증상과 비슷한 일종의 뇌척수염에 걸려 몇 달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하는 바람에 긴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 클로딘. 짧은 머리카락으로 바뀐 건 비록 향수병 비슷하게 고향 몽티니를 그리워하지만 이제 완전히 파리에 정착했다는, 소녀에서 처녀로 변신했다는 의미로 접수해도 무방하다.

  파리에 대단히 부유한 쾨르 고모가 사는 것도 여태 클로딘이 몰랐을 정도로 아버지는 가족까지 모른 척한 채 오직 학문에만 몰두하는 건 몽티니에서나 파리에서나 마찬가지다. 자연스럽게 고모의 존재를 알게 되고, 방문하고, 고모의 외손자, 그러니까 클로딘의 오촌 조카뻘 되는 미남자 마르셀을 알게 된다. 클로딘은 마르셀을 보고 첫 눈에 이렇게 생각한다.

  “세상에, 남자가 어떻게 저렇게 예쁠까! 금발에 영국소녀 같은 파란 눈, 발그레한 얼굴, 어찌나 탐스러운지 그대로 먹어버리고 싶네.”

  또한 아들과 불편한 관계를 갖고 지내는 마르셀의 아버지이자 외신기자이며 홀아비인 르노도 클로딘 가족과 유대를 이어가게 되고.

  아주 여성스러워서 일종의 동성애 분위기가 풍기는 마르셀은 매우 잘생긴 청년 샤를리와 우정 이상의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게 열일곱 살 무렵의 폐쇄적 우정인지 정말로 동성애로 발전한 단계인지는 매우 애매하다.

  이때 클로딘의 나이 열일곱. 지금의 열일곱, 고등학교 이학년 여학생들 생각하면 오산. 당시엔 결혼 적령기에 근접한 처녀로 어려서 클로딘과 함께 영성체를 받은 친구 클레르는 한 달 뒤에 결혼해서 공장 관리인으로 취직한 남편을 따라 멕시코로 가게 결정이 되었을 정도이며, 학교 친구 뤼스는 삼촌에게 침대 서비스를 해주는 대가로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다. 이러니 클로딘도 가장 큰 관심사는 남자와 결혼일 수밖에. 실제로 후반에 접어들면 청혼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난 앞에서 클로딘 자신이 암고양이라고 이야기했다. 누군가의 손길을 받고 싶고, 스스로 자신의 몸을 비비며 가르릉거리는 짐승. 동시에 사나운 발톱을 숨기고 있는 포유류. 클로딘이 기다리는 건 잘 생긴, 미남의 손길과 입술. 그러나 아무리 미남이라도 자신이 원하는 남자여야 하는 법. 클로딘 스스로가 갈망하는 자의 손길과 입술이라면 흔연하게 모든 것을 맡기겠지만, 아닌 자가 손끝이라도 닿아보려 했다가는 사나운 손톱에 남아나지 않을 터이니 조심해야 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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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3-02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 시리즈인 거 같던데 읽어보니 뒷이야기도 궁금해서 계속 나오길 바라는데... 아직 소식이 없네요.

Falstaff 2021-03-02 12:24   좋아요 0 | URL
이런 거 후딱 번역 좀 하지 말입니다. 쯧쯧쯧....
 
보물섬 열린책들 세계문학 135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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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티븐슨, 하면 딱 두 권이 떠오른다. <보물섬>과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스티븐슨은 서른한 살 때 <보물섬>을 발표하기 전까지 영국 가정의 연 평균 소득의 반 정도도 벌어오지 못하는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가장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매사에 주눅이 들어 <바다의 요리사, 또는 보물섬>을 청소년 잡지에 투고하고, 일 년 후에 단행본으로 내고서도 자기가 쓴 허튼 소설이 대박을 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가 당시 영국 수상이었던 윌리엄 글래드스턴이 새벽 두 시까지 책을 읽느라고 잠을 못 잤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범국가적 난리가 나서, 저자 스티븐슨이 깜짝 놀라 까무러쳐 이틀 후에 깨어났다는 농담이 전해지기도 한다. 이후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각지에 갑자기 해적 관련 소설이 들불처럼 번져 1885년에 헨리 라이더 해거드의 <솔로몬 왕의 보물>이 등장하기도 한단다. 내가 읽어본 또 다른 해적 소설은 이탈리아 사람 에밀리오 살가리의 1900년 작품 <산도칸 - 몸프라쳄의 호랑이들>로, 움베르토 에코의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에서 주인공 소년 얌보가 열광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소년시절에 <보물섬>을 읽었던 거 같다. 집안 폭삭 망해 책장사 하는 친구가 정여사에게 맡겨버린 어린이 세계명작전집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을까, 아니면 그거 말고 동네 어두컴컴한 만화가게에서 열다섯 권으로 된 만화로 읽었을까는 기억나지 않는다. 활자로 읽은 기억이 있는 거 보니까 전집 속에 들어있지 않았나 싶다. 전에 에코가 책 속에서 자주 언급하는 <산도칸>을 읽어보니, 해적 소설이 도무지 봐줄 만하지 않았음에도 다시 같은 장르인 <보물섬>을 무려 새 책으로 사서 읽은 것도 이유가 있었는데, 지금은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뭐 인생이니까. 어느 책에서 스티븐슨의 <보물섬>을 상찬했던 듯싶다.
  <보물섬>, 정말 재미있다. 나는 당연히 그릇이 영국 수상 정도는 아니라서 새벽 두 시까지 <보물섬>을 파지는 못했어도, 와, 정말 한 번 손에 들고 첫 장을 넘기기만 하면, 배가 고프거나 화려한 안주가 있어 술을 부르지 않는 한, 책을 내려놓기 힘들다. 나는 읽기만 하면 저절로 스토리가 떠오를 줄 알았다. 소년시절에 읽은 게 기억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살면서 숱하게 본 만화, 영화, 만화영화, 인용문 등을 통해서 말 그대로 저절로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눈앞에 훤하게 그려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착각. 아예 처음부터 처음 듣는 이야기 같았다. 그 이야기를 해보자.
  17xx년, ‘벤보우 제독 여관’에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의 늙은 뱃사람이 장기 투숙을 하는 것으로 <보물섬>은 시작한다. 빌리 본즈. 개암색 피부에 타르를 발라 땋은 머리, 낡은 파란 외투, 짙은 칼자국이 뺨을 장식한 남자가 선원용 궤짝을 끌고 들어와 금화 서너 닢을 화자인 나 짐 호킨스의 아버지이자 여관 주인의 프론트에 던져준 험상궂은 늙은이는 아직 소년인 내게 외다리 뱃사람이 오는지 살펴보라는 심부름을 시키고 대가로 매달 첫 날 4페니 은화를 한 개씩 주고는 했다. 분명히 매달이라고 했으니 적어도 ‘선장’이라 불리는 이 무법의 선장은 반년이 넘게 여관에 머물렀다고 봐야겠다.
  그러던 어느 날, 검둥개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두 손가락이 잘린 전직 해적이 선장을 만나러 왔다가 오른쪽 어깨에 칼을 맞고 도망하고, 이어서 무시무시한 완력을 지닌 장님 선원이 또 선장을 찾아와 검은 딱지를 전해주고 간다. 검은 딱지란 해적들 사이에서 용인되어 왔던 딱지를 받는 사람의 지위를 정지하겠다는 표시란다. 이 때는 선장이 날이면 날마다 하도 술을 퍼마셔 거의 죽을똥말똥 할 시기여서 급격하게 흥분한 선장은 해적 잔당들과 싸움 한 번 해보지 못하고 그만 급성 뇌일혈로 숟가락 놔버린다. 며칠 전 부친상을 당한 짐과 갓 과부가 된 어머니는 드디어 선장의 궤짝을 열어 당연히 자신들이 받아야 할 액수만큼의 돈을 취하고자 한다. 궤짝 속에는 여러 가지 잡동사니들과 각 나라의 금화들이 많이 섞여 있는데, 어머니가 오직 영국의 금화만을 원해 그것을 고르는 사이에 옛 해적들이 들이닥쳐 별로 챙기지도 못하고 도망을 해야 해, 짐은 별 생각 없이 대신 기름먹인 천, 유포로 싼 뭉치 하나를 들고 여관집을 빠져나간다.
  짐 호킨스네 가족이 평소에 존경하며 의지했던 인물이 있었다. 정식 면허증을 가지고 있는 현명한 의사이자 지역의 용감한 치안판사인 리브지 선생. 금화 몇 닢과 유포 뭉치를 들고 그를 찾아가니 대지주 트롤리니 씨와 함께 있다. 그들 앞에서 유포 뭉치를 펴보니까, 에그머니, 그게 바로 보물섬의 지도, 어디에 금화와 금괴가 묻혀 있고, 어디에 은괴가, 또 어디에 무기와 화약을 숨겨놓았노라, 라고 x자로 표시를 해놓은 거였다. 대지주는 보물섬의 지도를 그린 해적 플린트를 잘 알고 있었다. 해적은 무슨, 스티븐슨이 소설은 이렇게 썼어도 당시에 국가에서 허락하고 세금을 뜯어간 사략선 쯤 되겠지. 하여튼 플린트라는 해적 선장의 용맹함과 사나움, 거친 언동 같은 걸 자세히 알고 있는지라, 이 지도가 사실일 것이라고 보자마자 믿어버린다. 그리하여 앉은 자리에서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보물을 찾아 떠나기로, 대지주, 의사, 소년 짐 호킨스가 합의를 하게 되는데, 그냥 가서 보물 찾아오면 재미가 없으니 사건을 만들기로 작정한 작가 스티븐슨이 절묘한 한 가지 장치를 마련한다. 바로 대지주 트롤리니 씨의 입이 가볍다, 가볍다를 넘어서 주둥이가 싸다, 하는 점.
  대지주는 당장 브리스톨로 가서 브랜들리 씨의 중개로 잘 빠진 2백 톤 급 범선 히스파니올라 호를 구입하고, 술집 <망원경>의 주인인 키다리 존 실버를 요리사로 고용한다. 이 존 실버로 말할 거 같으면 키다리라니까 당연히 키가 크고, 건장한데다, 희고 평범한 얼굴엔 총명한 기운이 반짝이지만, 왼쪽 다리가 엉덩이 바로 아래에서 절단된 외다리였다. 사람 좋은 요리사 실버를 통해 항해사와 갑판장 등 여러 명의 선원을 배에 태우고, 대지주가 서면으로 고용한 스몰렛 선장과 함께 드디어 항해를 떠나기에 이르는데, 브리스톨에서 대지주는 자기가 금화와 금괴를 찾으러 보물섬에 간다고 얼마나 떠들고 다녔는지, 닻을 올리기도 전에 모든 선원들이 그걸 알고 있었던 거였다. 저 바닷가 외진 여관까지 좇아왔던 해적 무리들이 가만히 있었겠어? 이렇게 시작부터 선상폭동과 배반과 배신과 싸움과 폭력을 깔고 스티븐슨은 보물섬을 향해 쌍돛을 펴드니 앞으로 남은 것을 한 마디로 하면 그야말로 우여곡절. 그건 안 알려드림.
  그런데 문제는, 나이 들어 읽을 기회가 되어 이게 문제인지 알지, 소년시절에는 결코 몰랐을 문제점은, 작품이 기본적으로 ‘식민주의’ 또는 ‘제국주의’ 소설이라는 것. 총과 대포를 극적으로 발전시킨 유럽은 대항해시대를 본격적으로 펼치고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아시아로 향한다. 이때 국가적으로도 함부로 없애지 못하는 세력이 있었으니 바로 사략선 집단. 이건 영국이나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다 마찬가지였다. 그래 해적들은 지중해와 카리브해, 인도양 등에서 해적질을 해가며 이에 상응하는 재화를 국가와 왕실에 세금이란 명목으로 상납을 해 국부에 결코 작지 않은 공헌을 한다. 이들과 군대에 의한 노략질은 기본적으로 제3세계에서 약탈을 해 온 물품이었음은 말 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카리브 해를 배경으로 하는 <보물섬>이나 말레이 반도의 해적 이야기인 <산도칸>이나 기본은 다 똑같다. 이제 식민 또는 제국주의 시대가 끝나고도 오래 지났지만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의 국민으로 <보물섬>을 읽는 기분이 상쾌하지는 않지만, 그걸 염두에 두기에는 <보물섬>이 너무 재미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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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3-01 10:1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 이거 저의 어린 시절 페이버릿 작품 중 하나! 정말 재밌죠? 어른의 눈으로도 재미나다니 저도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Falstaff 2021-03-01 15:38   좋아요 0 | URL
옙. 진짜 재미납니다.
손에 들지 말아야지, 한 번 들었다 하면 도무지 놓을 수가 없어요!

2021-03-01 1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01 15: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21-03-01 1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보물섬을 어릴 적에 무슨 전집에서 읽고 티비에서 보여준 만화로 본 것 같은데 기억이 전혀 안나네요. 이렇게 재미있다니 저도 도전해봐야겠어요. 일전에 잠자냥 님이 왕자와 거지도 언급하셔서 그것도 사뒀는데 허허 이것참 큰일이네요? 🙄

Falstaff 2021-03-01 15:43   좋아요 2 | URL
큰일은요 뭘. 보물섬이 명작이란 말은 아니고요, 킬링 타임 비슷하게 재미로만 읽으시면 대빵입니다. 왕자와 거지는 안 읽어봤는데 암만해도 잠자냥 님 낚시 같아요. 5월 쯤에 올리버 트위스트 읽고 그거 재미나면 왕자와 거지 미끼를 함 물어보려 합니다.

얄라알라 2021-03-01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면 ‘로빈슨 크루소,‘ ‘80일~‘ ‘소공녀....‘ 어렸을 때 넋놓고 읽고 또 읽고 또 읽고 읽고 했던 책들도 식민주의.. 그렇네요. 보물섬은 만화로 봤을 때, 주인공이 너무 멋지게 그려졌는데 소설로 읽으면 삽화마다 편차가 커서 그냥 멋진 왕자 모습으로 기억하고 싶었던 적도 있어요

Falstaff 2021-03-01 15:50   좋아요 0 | URL
아, 보물섬은 벌써 읽어보셨군요! 전형적인 선인과 악인이 등장하지만 존 실버는 매력적인 캘릭터였습니다. 악당은 악당인데 하여튼 읽어봐야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인물.
제국주의적 성향 운운은 좀 미뤄야 하겠습니다. 세월이 많이 지났고 유감이지만 또 그걸 까탈잡을 만하지도 않으니까요.

hnine 2021-03-01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물섬>이라는 어린이 잡지도 있었어요. 위의 책과 전혀 상관없는 어린이 월간 만화 잡지였지요 ^^
인생의 분기별로 읽어야 하는 책이 있는 것 같아요. 어렸을때 읽었어도 어른이 되어, 그것도 청년기, 중년기, 장년기에 따라 달리 읽힐 수 있는 책들이요.

Falstaff 2021-03-01 15:54   좋아요 0 | URL
옙. 보물섬이란 잡지, 기억납니다. 저는 소년중앙 창간호 세대라서 보물섬을 사 읽지는 못했지만 조카들은 확실히 읽었습니다.
좋은 어린이용 책은 심지어 아주 나중에 읽어도 재미 있더군요. 전 몽테크리스토 백작, 삼총사 같은 알렉상드르 뒤마 작품을 어금니 빠지고 읽었는데 정말 재미나더군요.
헤세는 10대 후반이 적령기 같았습니다. ㅎㅎㅎ

coolcat329 2021-03-01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닌 줄 알면서도 <보물섬> 은 어린이 책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라 어른인 제가 읽기엔 유치할거라 생각했는데 ‘대빵‘ 재밌다니 적어둡니다~~

Falstaff 2021-03-01 17:03   좋아요 0 | URL
ㅋㅋㅋ 얩, 서두르실 필요는 없.....지않나 싶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