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두천 문학과지성 시인선 9
김명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7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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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의 한자어는 모두 한글로 바꾸고, 띄어쓰기 없이 한자어를 작은 글씨로 이어 썼다.



  시인 김명인은 1946년생. 다섯 살 때 한국전쟁을 만나 역사적 기록이 되기도 했던 50~51년 겨울의 추위와 굶주림을 경험했다. 울진이 고향이라 태평양을 바라보며 호연지기를 키웠을 것 같지만 추위와 주림의 경험은 바다의 이미지를 삼각파도와, 구겨지는 모랫벌과 찢겨 지나가는 푸른 깃대와, 귓뺨을 후려치는 파도와, 방파제 끝에서 뒤집히는 파도와, 흩어진 암초와, 부서지는 물거품과, 얼음보다 차갑게 비벼대는 물보라와, 모래를 몰고 와 온몸에 끼얹는 바람과, 여태 돌아오지 않는 어부들과, 살갗에 깊이깊이 찔려오는 낚시 바늘과, 원양선을 타다 온 주정꾼 친구들로 바뀌게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경기도 동두천읍 보산리에 있던 학교에 발령받아 국어교사 생활을 하며, 당시에 기지촌이었던 이유로 보육원에 소속된 고아들과 보산리 포주의 아이들 간의 지긋지긋하고 폭력적인 패싸움을 수시로 겪으며 몇 년을 보내다 군역을 위해 서울로 온다. 입대해서 하필이면 베트남 파병을 가게 되어, 시인의 말대로 하면 자신의 앞날과 더 이상 관련되지 않도록 지워 버리고 싶은 기억을 쌓는다. 게다가 이 시대의 시인을 필두로 한 작가들은 1970년 전태일의 분신으로 현실참여의 눈을 뜨기 시작했으니 김명인도 예외는 아니었을 터.
  이 시집의 초판이 나온 시점도 재미있다. 1979년 10월 25일. 책이 종로서적의 진열대에 채 깔리기도 전에 독재자가 총에 맞아 죽는다. 이이가 등단한 것이 1973년, 세는 나이로 스물여덟 살 때. 그 후 육 년이 흘러 첫 시집을 낸 것이 바로 《동두천東豆川》이다. 당시는 금속활자 시대였으니, 만일 조판을 하기 전에 독재자가 죽었다면 시인은 시집을 다시 만들었을까? 나는 이것도 궁금했다. 시집이 문학과지성에서 나왔지만, 반시동인 김명인의 시들은 문지 쪽이라기보다 창비 성향이 더 짙다. 내가 김명인을 처음 읽어본 것이 1981년에 나온 무크지 <실천문학> 2호에서였다고 기억하는데(아닐 수도 있다), 당시 함께 실린 시들의 주인을 보면, 백기완, ‘늘봄’이란 필명만 밝힌 문익환, 양성우, 황색예수전을 쓴 김정환 등이었으니 그때의 기억이 강렬해서 아직도 이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다.
  《동두천東豆川》을 읽어보니까 저 옛 시절,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시집이다. 제목을 보자마자 문득 생각이 났다. ‘송천동 바닷가 그 고아원에서’라는 부제를 단 <켄터키의 집 I>.


  봄과 여름에 정든 모습들 모두 어디로 갔느냐
  바다는 더 조용하고 소문에는
  그해 전쟁도 이미 끝난 겨울에
  아이들은 더러 먼 친척을 따라 떠나가고 날마다
  골짜기를 덮으며 눈 내려서
  추위에 그슬린 주먹들도 깨진
  유리창에 매달린 얼굴들도
  그렇게 쉽사리 서로를 용서하지 않았다

  (중략)

  다시 겨울이 오기 전에 몇 명은
  시집간 여자를 수소문하여 떠나가고 남아 있어도
  자라서는 뿔뿔이 새벽 안개 속으로 흩어졌지만
  모른다 어느 길 어느 모퉁이에서
  어른이 되어서도 우두커니
  누가 길을 잃고 아직도 서성거리고 있겠는지
  그렇게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기야 하는지  (부분)


  이 시를 보면 ‘켄터키의 집’은 송천동 바닷가에 있었던 고아원인 거 같다. 흠. 아래한글 2010은 ‘고아원’을 허용하는데, 한글 2018에선 ‘보육원’이 맞다. 거참 이것도 세월의 힘이다. 어쨌든 고아원에 있던 원생들이 뿔뿔이 그곳을 떠나 앞으로 어떻게 살게 될지 암담한 심정을 그린 듯하다. 근데 왜 켄터키의 집일까. 1연에서 밝혔다. ‘전쟁도 끝난 겨울’이라고. 전쟁을 매개로 고아가 된 아이들, 그들 가운데 특별히 미군을 부계로 둔 고아를 염두에 둔 시라고 제목은 가르쳐준다. 시인이 이 시를 쓰게 된 계기는 “월급 만 삼천 원을 받으면서 우리들은 / 선생이 되어 있었고 / 스물 세 살 나는 늘 / 마차산 골짜기의 허둥대는 바람 소리와 / 쏘리 쏘리 그렇게 미안하다며 흘러가던 물소리와 / 하숙집 깊은 밤중만 위독해지던 시간들을 / 만났다 끝끝내 가르치지 못한 남학생들과 / 아무것도 더 가르칠 것 없던 여학생들을” (<동두천東豆川 II> 부분)에서 보듯 미군 주둔기지촌이었던 동두천에 교사로 부임해 본 것들에서 기인한다고 보인다. 그래 동두천 이야기로 넘어가면, <동두천東豆川 I>에서 시인은


  기차가 멎고 눈이 내렸다 그래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신호등
  불이 켜지자 기차는 서둘러 다시 떠나고
  내 급한 생각으로는 대체로 우리들도 어디론가
  가고 있는 중이리라 혹은 떨어져 남게 되더라도
  저렇게 내리면서 녹는 춘삼월 눈에 파묻혀 흐려지면서 (1연, 부분)

  기차를 타고 동두천에 도착을 한다. 학교 교사를 하지만 현장은 세상의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시인이 기대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막막함은 더 깊은 곳에도 있었다 매일처럼
  교무실로 전갈이 오고
  담임인 내가 뛰어가면
  교실은 어느 새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태어나서 죄가 된 고아들과
  우리들이 악쓰며 매질했던 보산리 포주집 아들들이
  의자를 던지며 패싸움을 벌이고
  화가 나 나는 반장의 면상을 주먹으로 치니
  이빨이 부러졌고 


  함께 울음이 되어 넘기던 책장이여 꿈꾸던
  아메리카여  (<동두천東豆川 II> 부분)

  오래지 않아 시인은 입대하기 위해 서울로 돌아왔으나 사회인으로의 첫 발자국이었던 그곳을 어찌 잊을 수 있었겠는가. 주사가 있었는지 술만 마셨다 하면 동료 교사들과 싸움을 벌이곤 했더라도 그쪽 소식은 계속 들려왔다.


  우리들이 가르치던 여학생들은 더러 몸을 버려 학교를 그만두었고
  소문이 나자 남학생들도 덩달아 퇴학을 맞아
  지원병이 되어 군대에 갔지만
  우리들은 첩첩 안개 속으로 다시 부딪혀 떠나면서
  모르기 때문에 무엇이든 이 세상 것은
  알려고 해선 안 된다고 믿었다.  (<동두천東豆川 III> 부분)


  내가 국어를 가르쳤던 그 아이 혼혈아인
  엄마를 닮아 얼굴만 희었던
  그 아이는 지금 대전 어디서
  다방 레지를 하고 있는지 몰라 연애를 하고
  퇴학을 맞아 고아원을 뛰쳐 나가더니
  지금도 기억할까 그 때 교내 웅변 대회에서
  우리 모두를 함께 울게 하던 그 한 마디 말
  하늘 아래 나를 버린 엄마보다는
  나는 돈 많은 나라 아메리카로 가야 된대요 

  (중략)


  그래 너는 아메리카로 갔어야 했다
  국어로는 아름다운 나라 미국 네 모습이 주눅들 리 없는 합중국合衆國이고
  우리들은 제 상처에도 아플 줄 모르는 단일 민족
  이 피가름 억센 단군의 한 핏줄 바보같이
  가시같이 어째서 너는 남아 우리들의 상처를
  함부로 쓰시느냐 몸을 팔면서
  침을 뱉느냐 더러운 그리움으로
  배고픔 많다던 동두천 그런 둘레나 아직도 맴도느냐
  혼혈아야 내가 국어를 가르쳤던 아이야  (<동두천東豆川 IV> 부분)


  이렇게 9번까지 이어지는 연작시가 일종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게 되는 일을 평론가 김치수는 책 뒤의 해설에서 “시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시가 스스로 씌어지는 경우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라 설명하며 “그것은 시인들 자신이 오랫동안 마음 속에 품고 있던 <할 이야기>가 시인 자신들의 오랜 사유와 절제와 인내를 통해서 이미 내부에서 하나의 결정 작용을 일으키면서 자연스럽게 시로 변모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이런 시는 동두천 이후의 기억 또는 경험, 그러나 시인의 말을 완전히 믿는다면 자신과 더 이상 관련되지 않게 지워버리고 싶은 일 가운데 하나인 베트남 연작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어린 시절의 바닷가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는데, 김명인의 시는 대체로 긴 편이라 인용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 그건 직접 사 읽어보시는 건 어떨까. 아니면 <어떤 소년少年 어부>라고 제목을 일러드리니, 검색해 보시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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