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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 - 피터 버거의 지적 모험담
피터 L. 버거 지음, 노상미 옮김 / 책세상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해야한다고 했는데, 나는 모르는 것에 대해 침묵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잡다한 인생사에 관한 이야기라 쉬워보일법도 했지만 사회학적인 지식이 전무한데다가 무슨무슨 ism과 내가 모르는 인물들이 끊임없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쉽지 않은 책읽기가 되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사회학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을 습득하려고 하기 보다는 그저 80인생을 살아온 인생의 선배가 들려주는 세상살이 정도로 받아들이는것이 나에게는 유익할 듯 싶었다. 할아버지의 그 긴 여정을 한 책에 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사회에서도 조금만 고참이 되면 신참들에게 '내가 말이지~'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밤새 늘어놓으려고 하는데, 80살 정도 산 할아버지라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얼마나 많을까. 게대가 현존하는 사회학의 대가라고 하지 않나! 잘만 듣는다면 결국 나의 인생에 피가되고 살이되는 말일테니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할아버지의 인생사를 들어보았다. (그러나 이내 눈이 감기고...)



< 할아버지의 가르침 - 1. 다양한 경험 >

 

 흔히들 다양한 경험이 사람을 성장시킨다고 하는데, 피터 버거야말로 정말 (사회학의 연구로 귀결될 수 있는) 경험을 통해 성장한 사람이 아니었나 싶다. 오스트리아 사람으로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20대 초반에는 먹고 살기 바쁜 와중에도 학구열에 불타 야간 대학교를 다니면서 열심히 공부, 그리고 박사학위 취득. 연이은 징집으로 생각지도 않게 사회학자를 사회복지사로 착각한 인사관리자에 의해 군대 내 정신상담소에 배치된다. 그리고 동부와 서부, 남부를 오가는 교직생활에 이어 연구소 소속으로 각국의 문화를 체험하러 돌아다닌 끝에 한국에도 방문했다! 개인적으로도 뭐든지 먼저 해보고 판단하는 경험주의자에 가까운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지금으로썬 그렇다.) 일단 후회도 없을 뿐 더러, 좋은 결과던 아니든 피드백이 되어 조금 더 나은 내일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책에도 종종 나오는, 이렇게 해보았더니 실패의 경험이 생겨 다음번에는 실수하지 않을 수 있었다, 라는 말들이 대가의 입에서 나오니 경험에 대한 나의 생각에 좀 더 확신이 든다.


<할아버지의 가르침 - 2. 다양한 만남>


 피터 버거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했다. 성격유형검사인 MBTI로 따지면 그야말로 외향적 성향(E타입)을 가진 사람, 즉 사람만나고 떠드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 속할게 분명하다. 저서들을 보면 공동 저작들이 많은데,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을 즐기는 성향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리라. 저자가 이야기하는 '커피하우스법칙 - 적당한 사람들을 불러다가 충분히 오랫동안 함께 앉혀 놓으면 흥미로운 것들이 나오기 마련 '이라는 것에서도 결국 사고라는 것이 혼자할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과의 이야기와 토론에서 더 큰 시너지를 낼 수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혹은 의지로 버거 할아버지는 수많은 사람을 만나는데, 재미있는 것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자신의 입장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뉴스쿨의 세명의 교수를 통해 사회학을 보는 관점을 형성했고, 동료가 바라보는 종교의 관점에 대응하여 자신의 이론을 펼쳤으며, 한편 유난스런 페미니즘 학생들 덕분에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이 생긴것 처럼 말이다. 확실히 사람의 영향은 크다. 지금의 나는 나와 관계맺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기도, 정반대로 나타나기도 한다. 피터버거 할아버지의 인간형도 수많은 사람들의 합집합처럼 느껴진다. 


<할아버지의 가르침 - 3. 웃음 >


 자신의 말에 웃음으로 답하는 사람을 만나면 아무래도 호감이 가기 마련이다. 웃음과 함께하는 대화에서는 긴장이 풀려 말이 술술 나오는 반면, 싸늘한 분위기에서는 아무래도 점점 움츠러들어 번데기가 되어가는 경우를 다들 경험해 보지 않았는지? 피터 버거는 천성적으로 유머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유쾌하게 이야기하면서도 자기 할 얘기는 다 하는 점이 대가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가 느껴진다. (아쉽게도, 그 코드가 보편적인 것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말이다. 책 말미에도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모르겠는 유머를 한가닥 늘어놓는 걸 보면 확실히 개그 욕심이 있으신듯 싶다.) 그런데 책을 읽고 나면 그 웃음은 감성, 즉 남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성격에서 나오는게 아닐까 한다. 책 말미에 움직이는 기차 장난감보다는 그안의 사람들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더라는 어릴적 회상을 들으며 특히나 그랬다. 웃음의 근원은 사람에 대한 따스한 시선에서 나오는 것이고 결국 이런 인간에 대한 애정이 그렇게 많은 사람을 만나고 웃고 소통할 수 있는 근원이 아니었을까.



 다양한 경험, 만남, 그리고 웃음을 가지고 살자! 라고 교훈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저 사회학적 지식이 전무한 내가 이 책을 통해 얻어갈 수 있는 것들을 찾아본다면 이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은 것일 뿐이다. 다시한번 이야기하지만 학문적으로 내가 범접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았고, 그래서 오히려 나같은 비전공자혹은 사회학에 관심이 덜한 사람들에게는 조금은 붕뜬 구석이 없지 않았다. (전문지식을 전달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신변잡기식도 아닌.) 나와 전혀 무관한 사람이 수백페이지에걸쳐 자긴 이렇게 이렇게 살았어라고 써놓은 것만큼 재미없는 것이 또 있을까. 그래도 긍정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건 나보다 먼저 살아간 사람들의 삶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역사와 인물에 대해 배우는 것 아닌가라는 훈훈한 마무리로, 쉽지만 어려웠던 <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의 읽고 쓰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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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opuha 2012-07-25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피하우스 법칙' 저도 이걸 즐겨하는 사람 중에 하나인 것 같아요. 그래서 혼자서 뭘 생각하면 가라앉는 데 반해 여러 사람들과 함께하면 기발한 아이디어가 나오더라고요. 리뷰 재미있네요^^

일개미 2012-07-25 15:03   좋아요 0 | URL
부끄러운 글인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ㅜ 커피하우스 법칙 좋지요. 특히 요새같이 더운때는 커피숍에 죽치고 앉아 책읽고 놀고 수다떠는게 최고인 듯 합니다ㅎ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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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성경을 신앙의 근거로 여기는 나에게는 제3자의 눈으로 종교적 텍스트를 바라보는 관점이 그저 신기할 뿐이다. 특히나 기독교라하면 그런 동네북도 없을만큼 까이는 요즘, 종교적인 텍스트를 다루면서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도 들었다. 그러나 꽤나 객관적으로, 역사적인 근거를 통해 종교적인 텍스트를 읽고 쓰는 것이 우리의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이 책은 설명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우리나라만큼은 안까이나보다.) 물론 그렇다고 저자가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가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숨을 내쉬며 종교, 신앙, 믿음에 대한 관념을 비판하기에 여념이 없다. 여튼 나같은 예수쟁이와 종교학을 전공한 저자에 관점이 근본적으로 다른 마당에 모든 면에서 관점의 일치를 보기는 힘들었으나, 저돌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밀고가는 부분에서는 왠지 모를 진정성 같은게 느껴졌으며, 또 몇몇 부분은 꽤나 동감이 가기도한 그런 책이었다. 

 시작은 책읽기에 관한 것이다. 저자는 책을 읽는 다는 것은 저자의 무의식에 접속하는 것. 맨 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책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저자의 무의식에 빠져버리고 마는 것이므로 결국 미쳐버린다는 얘기다. 자신 내부의 검열로 인해 가려서 읽게 됨으로 미치치 않고 이해한다고 하는 것인데, 제대로 읽으면 미쳐버리고 만다는 주장은 너무 극단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논지에 반감이 들어서 덕분에 나도 책 읽기에 대한 나름의 정의를 내려보았는데 이런 시간이야 말로 책 읽기를 통해 가질 수 있는 가장 유익한 시간이 아닐까 싶다.

 책읽기가 무엇인지 정의내리기 전에, 책이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Book의 어원은 '무엇인가 적혀있는 나무판의 묶음' 이라고한다. 초기의 책이라는 것은 정보의 묶음이었을 것이다. 책이던 쓰는 것이던, 읽는 것이던 시작은 정보의 습득에서 시작한다. 정보의 양이 한정적일 때, 우리는 그 정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를테면 구구단처럼말이다. 그저 외우기만 하면 될 뿐, 그 이상의 무언가는 필요 없다. 그러나 정보의 양이 무한에 가까울정도로 크다면? 결국 우리는 어떤 필터를 가지고 그것들을 걸러낼 수 밖에 없다. 세상에 널려있는 정보들을 취사선택하여 자신만의 것으로 만드는 힘. 그것이 바로 해석이고 관점이다. 그래서 무한한 정보의 바다에서는 책이라는 것이 단순한 지식의 묶음에서 관점이 있는 편향적인 어떤 것으로 변화한다. 이를테면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같은 책으로.

 결국 책은 글쓴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드러내는 도구인 것이다. 그래서 잘 쓰여진 책은 저자의 의도가 명백히 드러난다. 저자가 열심히 A를 이야기했는데 독자가 B로 받아들인 것? 그것은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이 그냥 '오독(誤讀)이다. 이를테면 (저자가 언급했던) 루터가 성경을 읽고 또 읽으면서 자신이 미친게 아닐까 생각했던 것은 성경을 제대로 읽고있는 자신이 오히려 미쳤다고 생각할 만큼 중세 교회가 타락했다는 것이리라. 성경은 명백하게 이야기한다. 구원은 돈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여기에 무의식의 여지가 있는가? 중세 교회의 행태들, 특히나 왜곡된 구원관과 그로 인한 면죄부를 파는 행위는 명백히 오독으로부터 근거한 것이다. 오독이 아니라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의도적인 왜곡이라고 볼 수 밖에.   

 책읽기에 대한 관점은 공감보다는 그렇지 않은 부분이 더 많았지만, 혁명에 관한 관점은 흥미로웠다. 저자가 말하길, 세상을 바꾸는 힘은 폭력이 아니라 텍스트를 고쳐읽고 다시 쓰는데서 나오며 혁명이라고해서 폭력이 선행하거나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나 역시 이 부분에서는 상당히 공감하였는데, 내가 저자의 의도를 제대로 짚어냈는지 아니면 나만의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사회를 개혁한다는 것은 구조를 바꾸는 문제이지 단순히 지배계층을 바꾸는 차원에 문제가 아니다. 이를테면 상하관계를 만드는 틀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는데, 아무리 누군가를 제거하고 그 자리를 차지해 봤자 시간이 지나면 똑같이 타인을 억압하는 사회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었다고 해도, 결국 지배계층 교체 이상의 의미가 될 수 없었던 것은 왕을 정점으로한 계급사회라는 구조가 변하지 않았기때문인 것과 같다. 결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면 폭력이 아니라, 그 구조 자체를 변화시켜야한다. 이 구조의 변화가 텍스트를 고쳐 읽고 고쳐써서 새로운 사회 시스템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면 (글쓴이의 말을 빌리자면) 저자와 나의 무의식이 통한 것이리라.

 그러나 이렇게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나와는 근본적인 입장차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에는 또 다시 고개를 저을 수 밖에 없었다. 역시나, 종교에 대한 관점이다. 저자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기반인 성경과 코란을 들고 나오면서 이를 통한 사회의 구조적 변화에는 환영하면서도, 태생인 종교적인 경전으로서의 의미는 부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것들은 사회 변혁을 위해 쓰여진 것들이 아니라, 인간의 내세, 구원, 가치관에 관한 이야기 아닌가! 여튼 목적에 맞지 않는 사용을 통해서도 의미있는 결과가 나오는 것을 보면 성경과 코란은  꽤나 위대한 책들인가보다. 이와 관련된 저자의 종교에 대한 관점은 더 논하고 싶지 않지만, (중세 해석자 혁명 이후 종교의 딱지를 떼고 세속화된) 기독교가 타자를 억압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대목에서는 예수쟁이로써 한마디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의 왜곡된 관점이 타자를 억압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었다는 것 인정한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책은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고, 오히려 저자의 말대로 성경을 읽고 또 읽는다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무한한, 그리고 이타적인 사랑 뿐이라는 것이다. 

 이 책을 읽는동안 한가지 숙제를 발견했다. 책을 읽는 다는 것이 무의식의 접속이든 아니든지간에, 텍스트를 읽고 또 고쳐쓰는 것이 혁명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책을 읽어야하는 것인가하는 것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내내 이야기하는 성경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책 중에 하나이다. 그만큼 통시적으로 검증이 되었다는 것이고, 또한 종교의 틀 안에서 보았을때 그 자체로도 권위가 있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또 고쳐 읽는 기준으로 삼는 것은 어찌보면 쉬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보가 난무하는 오늘날에 과연 어떤 것을 텍스트로 삼아야 하는지는 쉽게 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여러모로 나와는 관점이 달랐지만 읽는 동안 지루하지는 않았다. 개인적으로 자신만의 확고한 주장을 가진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라 비록 나와는 평행선을 달릴 수 밖에 없는 주제를 이야기하더라도 '아 그렇게 생각할 수 있구나' 하고 받아들였던 것 같다. 어쩌면 학교 같은 온실에 곱게자란 화초가 아니라 기존의 틀에 갖히지 않고 어떻게든 제도권 밖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는 의지가 느껴지는 글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무엇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유익한 시간이 아니었나싶다. 책 읽기를 통한 혁명을 사회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적용시켜본다면 이 책을 적극적으로 읽고 쓰는 또 다른 방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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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언어 안에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한다. 언어라는 정의를 좀 더 광의적으로 사용한다면, 그것이 단순히 문자가 아니라, 다른 매개체, 이를테면 음악이나 그림 혹은 춤, 역시 자신의 의도를 표현하는 언어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 시벨리우스의 음악을 들을때면 광활한 북구의 파노라마가 떠오르는 것은 그의 음악에 대한 배경지식과 학습의 효과일 수도 있지만, 조국인 핀란드의 자연을 떠올리며 곡을 써내려간 작곡가의 의도가 감상자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건축 역시 인간의 언어의 한가지로 건축가의 의도가 물리적인 실체로 표현되는 것이다. 의도가 물리적으로 표현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요소가 한정된 자원이다. 단지 재정적인 조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적인 요건과 시공환경등을 총체적으로 포함한 의미에서 자원을 이야기한다. 주어진 자원 한도 내에서 의도를 최대한 살리는 것이 건축 설계의 과정이라고 본다면 설계는 가끔은 제로섬(zero-sum) 게임이라는 생각도 든다. 한가지를 취하면 한가지를 잃게되는 본질적으로는 자원배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외부로부터 거리가 깊은 단일한 박스의 공간이 있다고 치자. 이 공간은 열손실은 적겠지만 채광에는 취약하다. 반대의 경우 - 박스를 두개로 나누어 깊이가 얕은 공간- 를 택한다고해도 채광에는 유리하지만 열손실이 크다는 약점이 있다.

 설계의 과정이 쉽지 않은 이유는 이러한 진퇴양난 속에 다루어야할 수많은 변수들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애초에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은 무한한 자유로움을 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앞이 깜깜한 일이기도 하다. 정답 찾기에만 익숙했던 정규교육만을 받아오던 사람에게는 어쩌면 피하고 싶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조금은 불경스럽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설계의 행위는 어쩌면 세상을 만들어낸 창조주(Creator)를 떠올리게한다. 결정권을 가지고 나의 의지대로 실현해 나가는 과정은 분명히 절대자의 쾌감을 느끼게한다. 그러나 창조물에게 나는 왜 이렇게 불완전하게 만들어졌냐는 비난을 듣지 않으려면 절대자는 무수히 많은 변수들을 통제하고 예측할 수 있어야한다. 
 
 그러기에 설계라는 것은 고도의 지적인 작업이다. 그러나 단순히 지적인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결국은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실체로 드러나는 일이기때문에 미학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미학 역시 정답이 없다. 구조의 명쾌함에서 오는 아름다움도 있겠지만, 구조적인 불안정성, 혹은 비대칭이나 대비와 같이 다양한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그러나 화장을 떡칠한 중학생들이 아름다워보이지 않는 것 같이 모든 것이 아름다움의 기준을 통과하는 것은 아니다. 그 기준을 정해보는 것은 수많은 논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이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오늘날, 탱자탱자 놀면서도 돈많고 멋부리고 여자꼬시는 건축가의 이미지가 소비되고 있다. 환상을 심어주는 대중매체에게 건축가는 그런게 아니에요, 더 심오하고 한편으로는 실제적인 것을 다루는 사람들이에요 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지만 방법이 없다. 여튼, 그들이 생각하는 방향은 아니지만, 건축가라는 것이 몇 안되는 간지나는 부류의 직업이라는 것은 동의한다.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니. 대단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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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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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냐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그것과 닮았다. 죄와 벌은 많은 것을 이야기하지만 한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사랑이야말로 도스토예프스키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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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29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이대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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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심문관에 나오는 예수의 이미지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온갖 비난을 쏟아냈지만 그는 (나를, 당신을, 혹은 우리를) 말없이 안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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