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언어 안에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한다. 언어라는 정의를 좀 더 광의적으로 사용한다면, 그것이 단순히 문자가 아니라, 다른 매개체, 이를테면 음악이나 그림 혹은 춤, 역시 자신의 의도를 표현하는 언어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 시벨리우스의 음악을 들을때면 광활한 북구의 파노라마가 떠오르는 것은 그의 음악에 대한 배경지식과 학습의 효과일 수도 있지만, 조국인 핀란드의 자연을 떠올리며 곡을 써내려간 작곡가의 의도가 감상자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건축 역시 인간의 언어의 한가지로 건축가의 의도가 물리적인 실체로 표현되는 것이다. 의도가 물리적으로 표현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요소가 한정된 자원이다. 단지 재정적인 조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적인 요건과 시공환경등을 총체적으로 포함한 의미에서 자원을 이야기한다. 주어진 자원 한도 내에서 의도를 최대한 살리는 것이 건축 설계의 과정이라고 본다면 설계는 가끔은 제로섬(zero-sum) 게임이라는 생각도 든다. 한가지를 취하면 한가지를 잃게되는 본질적으로는 자원배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외부로부터 거리가 깊은 단일한 박스의 공간이 있다고 치자. 이 공간은 열손실은 적겠지만 채광에는 취약하다. 반대의 경우 - 박스를 두개로 나누어 깊이가 얕은 공간- 를 택한다고해도 채광에는 유리하지만 열손실이 크다는 약점이 있다.

 설계의 과정이 쉽지 않은 이유는 이러한 진퇴양난 속에 다루어야할 수많은 변수들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애초에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은 무한한 자유로움을 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앞이 깜깜한 일이기도 하다. 정답 찾기에만 익숙했던 정규교육만을 받아오던 사람에게는 어쩌면 피하고 싶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조금은 불경스럽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설계의 행위는 어쩌면 세상을 만들어낸 창조주(Creator)를 떠올리게한다. 결정권을 가지고 나의 의지대로 실현해 나가는 과정은 분명히 절대자의 쾌감을 느끼게한다. 그러나 창조물에게 나는 왜 이렇게 불완전하게 만들어졌냐는 비난을 듣지 않으려면 절대자는 무수히 많은 변수들을 통제하고 예측할 수 있어야한다. 
 
 그러기에 설계라는 것은 고도의 지적인 작업이다. 그러나 단순히 지적인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결국은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실체로 드러나는 일이기때문에 미학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미학 역시 정답이 없다. 구조의 명쾌함에서 오는 아름다움도 있겠지만, 구조적인 불안정성, 혹은 비대칭이나 대비와 같이 다양한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그러나 화장을 떡칠한 중학생들이 아름다워보이지 않는 것 같이 모든 것이 아름다움의 기준을 통과하는 것은 아니다. 그 기준을 정해보는 것은 수많은 논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이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오늘날, 탱자탱자 놀면서도 돈많고 멋부리고 여자꼬시는 건축가의 이미지가 소비되고 있다. 환상을 심어주는 대중매체에게 건축가는 그런게 아니에요, 더 심오하고 한편으로는 실제적인 것을 다루는 사람들이에요 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지만 방법이 없다. 여튼, 그들이 생각하는 방향은 아니지만, 건축가라는 것이 몇 안되는 간지나는 부류의 직업이라는 것은 동의한다.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니. 대단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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