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ta meta ta physica)
(철학사상 별책 제7권 제9호)
전헌상 /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 228쪽
(2018. 1. 31.)
<형이상학> 요약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가장 보편적이고 일차적인 진리들에 대한 사유의 기록이다. 그는 모든 앎 중에서 최상의 종류의 앎이 어떤 것인가를 묻고, 그것은 일차적인 원리와 원인들에 대한 앎이라고 주장한다. 이 앎에 대한 추구의 과정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있는 것으로서의 있는 것에 대한 지식의 존재를 선언하고, 그것의 주요 주제와 범위를 논구한다. 이 논의는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들의 일차적 원리, 즉 실체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형이상학>의 핵심을 이룬다고도 할 수 있을 이 탐구의 과정에서, 기체, 질료, 형상, 본질, 보편자, 능력, 활동 등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주요 개념들이 차례로 등장하고, 분석되고, 연관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러나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또다시 감각적인 실체의 분석에서 시작해 비감각적이고 운동하지 않는 실체의 탐구로 나아간다. 그에게 있어 이 실체는 신이며, 신에 대한 그의 논구는 종종 그의 형이상학적 탐구의 종착지로 간주되고 있다.
(P.4)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과 관련된 가장 흥미로운 사실 중의 하나는 아마도 ‘형이상학’이라는 말 자체가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점일 것이다. ‘형이상학’에 해당하는 희랍어 표현 ‘ta meta ta physica’는 후대의 한 편집자 — 통상 로도스의 안드로니코스로 추정된다 — 에 의해 붙여진 이름일 뿐,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형이상학> 안에 포함된 내용을 지칭하기 위해서건, 혹은 그 내용이 다루고 있는 철학의 분야를 지칭하기 위해서이건, 그 표현을 사용한 적이 없기때문이다. ‘ta meta ta physica’가 정확히 어떤 의도로 붙여진 제목인가도 논란거리이다. 직역하면 이 표현은 ‘자연적인 것들 다음에 오는 것들’을 의미한다. 한 가지 해석에 따르면, 이 표현은 <형이상학>이 ‘자연적인 것들을 넘어서 있는 것들’, 혹은 자연학적 탐구 다음에 탐구되어야 할 것들을 주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반면 또 하나의 해석은 문제의 표현이 순전히 편집과정과 관련된 우연적 사실, 즉 <형이상학>의 필사본이 <자연학>의 필사본의 바로 다음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붙여진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어느 해석이 옳은가에 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P.4)
편집자의 손을 거쳐 우리에게 전해진 <형이상학> 텍스트는 모두 열네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권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권(A)은 도입부의 역할을 하며, 여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지혜’(sophia) 개념을 명확히 규정하면서, 철학사적 조망을 덧붙이고 있다. 2권(α)은 주로 방법론에 관한 논의를 담고 있는 짧은 논고이고, 3권(B)은 일련의 철학적 아포리아들의 모음이다. 4권(Γ)에서 비로소 형이상학적 논의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는데, 우선 있는 것으로서의 있는 것을 탐구하는 학문의 존재가 천명되고, 이어 모순율에 관한 논의가 이어진다. 5권(Δ)은 일종의 철학 용어 사전으로, 30여개의 철학적 개념이 설명되고 있다. 6권(Ε)은 있는 것으로서의 있는 것에 대한 학문을 다시 짧게 다루고 있다. 이어지는 7(Ζ), 8(Η), 9(Θ)권은 통상 형이상학의 핵심 내용으로 간주되는 것으로, 실체라는 공통적 주제를 다루고 있다. 흔히 고대 철학에서의 에베레스트 산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7권은, 실체로 간주되는 네 가지 후보에 관한 복잡한 논의들을 그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 논의는 8권에서 계속 이어지며, 9권에서는 능력(dynamis)와 활동(energeia)의 구분이 도입되면서, 7, 8권에서 제기된 여러 문제들이 새로운 관점에서 조망되고 또 해소된다. 10(Ι)권은 ‘하나’에 관한 논의들을 포함하고 있고, 11권(Κ)은 자연학의 몇몇 부분의 요약으로 구성되어 있다. 12권(Λ)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시 실체의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는데, 여기에서의 논의는 후반부에서 신에 대한 논의로 종결된다. 13(Μ)권과 14(Ν)권은 수학적 존재와 이데아에 관한 논의를 포함하고 있다.
(P.5)
<형이상학>은 하나의 일관된 계획을 따라 조직적으로 쓰인 저술로 보기 어렵다.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인 상호참조가 지속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체적으로 <형이상학>은 독립적인 소논문들의 결합체라는 인상을 준다. 개별 논의들의 구조 역시 단순치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그 논의들은 종종 그 안에 다양한 층위(層位)와 단계(段階)를 포함하고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내용을 오랜 시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수정하고 보충해 나갔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정은 <형이상학>이라는 텍스트에 접근하는 독자에게 추가적인 주의와 섬세성을 요구한다. 텍스트의 어떤 한 부분에 나타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언명을 단순히 그의 최종 입장으로 간주할 수 없으며, 그것과 충돌하는 언명을 다른 부분에서 발견했을 때 이것을 치명적 내적 모순으로 쉽게 치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은, 그래서,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철학적 사유의 난해성뿐만 아니라, 그 사유를 담고 있는 텍스트 자체의 복합성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 중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영역으로 남아 있다.
(P.6)
지혜(sophia)
<형이상학>I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앎의 다양한 형태들을 구분하고 그 최상의 단계를 ‘지혜’로 규정한다. 지혜는 최상의 원리들과 원인들에 대한 앎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정의가, 우리가 통상 최상의 지식에 귀속시키는 여러 속성들에 잘 부합한다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련의 철학사적 고찰을 통해 기존의 철학자 — 지혜를 추구하는 자— 들이 탐구 속에서 점차로 드러난 것이 결국 자신이 <자연학>에서 구분했던 네 종류의 원인이었음을,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그들이 추구했던 것이 지혜였음을 보이고자 한다.
(P.11)
실체(ousia)
실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의 중심 개념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혹은 일차적 의미에서 있는 것이 무엇인가가 존재론의 핵심 물음이라면, 그에게 있어서 그 물음은 무엇이 실체인가라는 물음으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실체 개념의 중요성은 이미 <범주론>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난다. 그곳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있는 것’이 이야기되는 여러 가지 방식을 구분하면서, 여러 범주들 중 실체의 우선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나아가 실체들을 제1실체(개체들)와 제2실체(종, 유들)로 구분하고, 전자의 우선성을 주장한다. 결국 <범주론>에서 가장 일차적인 의미에서 존재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제1실체라 부르고 있는 개체들이다.
<형이상학>에서 개진되고 있는 실체론은 <범주론>의 그것과는 몇 가지 중요 한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무엇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는 더 이상 <범주론>에서 제1실체로 불렸던 것들, 즉 구체적 개체들을 일차적인 의미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주장하지 않는다. 그 지위는, <형이상학>에서는, 형상이 넘겨받게 된다. 형상과 질료의 구분이 실체의 문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점도 <형이상학>에서의 실체론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P.11)
능력(가능태)(dynamis)
활동(energeia)과 대비되는 개념. 능력과 활동의 구분은 ‘X가 있다’— ‘혹은 그것이 X이다’ — 라는 언명이, 때로는 X가 그것을 X이게 하는 고유의 활동을 현실적으로 하고 있다는 의미로, 때로는 단지 그것이 그런 활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응한다. 전자의 경우 X는 능력으로서(dynamei) — 가능적으로 — 있으며, 후자의 경우 X는 활동으로서(energeiai) — 현실적으로— 있다.
능력과 활동의 구분은 실체의 본성과 관련된 몇몇 주요한 문제들을 해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우선 이 구분은 형상과 질료를 각각 주어진 대상의 활동과 능력으로 이해함으로써, 형상과 질료가 어떻게 결합해서 단일한 대상을 형성하는가의 문제를 해소할 수 있도록 만든다. 이 구분은 또한 정의의 단일성, 즉 어떻게 정의의 복합적 요소들이 하나의 통일체를 형성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제공하게 된다.
(P.13)
신(theos)
신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들은 종종 그의 형이상학 체계의 정점으로 간주된다. 신에 대한 그의 관심은 궁극적으로, 영원하고 부동하는 존재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한다. 흔히 <형이상학>의 핵심 부분이라고 간주되는 VII-IX의 논의들은 기본적으로 감각적 대상들을 그 주제로 삼고 있다. 실체에 대한 분석, 능력-활동의 구분은 모두 우리 주위에서 일상적으로 관찰되는 대상들, 일반적으로 실체라 간주되는 것들의 특성들에 대한 철학적 고찰들의 결과이다. 그렇다면 이런 감각적
대상들이 존재하는 것들의 전부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감각적이고 운동을 하는 대상들의 첫 번째 원인으로서의 어떤 존재가 요청된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 존재가 가져야만 할 여러 특성들을 사변적으로 따져간다. 그리고 그는 그 특성들을 만족시키는 존재는 신외의 다른 것일 수 없다고 결론 내린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신은 그 자신은 다른 것에 의해 운동하게 되지 않으면서도 다른 것들을 운동시키는 존재이다. 신의 고유한 활동은 사유이다. 그런데 신적 사유는 최상의 사유이어야 하고, 최상의 사유는 최상의 대상에 대한 사유이어야 하므로, 신적 사유는 곧 자신의 사유에 대한 사유가 된다.
* 사변-적思辨的 : 경험에 의하지 않고 순수한 이성에 의하여 인식하고 설명하는. 또는 그런 것.
(P.14)
“모든 인간들은 본성상 알기를 원한다.”라는 유명한 구절로 시작되는 <형이상학>의 모두(冒頭)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게 가능한 다양한 앎의 형태를 발생적으로 구분한다. 이 발생적 계열은 감각에서 시작해서 기억, 경험을 거쳐 기술로 이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중에서 특히 경험과 기술의 차이를 집중적으로 논의하면서, 여기서 드러난 기술의 특징을 궁극적으로 지혜의 본성과 연결시킨다.
(P.35)
기술은 경험을 통해 얻어진 여러 관념들로부터 유사한 것들에 대한 단일한 보편적 판단이 산출되었을 때 생겨나게 된다.(981a1-12)
기술은 경험과 많은 유사성을 가지며, 사실 후자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경험이 단순히 다수의 사례들에 대한 단일한 판단이고, 그 판단의 근거가 그 사례들 각각에 대해서 과거에 그 판단이 참이었다는 사실이라면, 기술은 어떤 특정한 유형에 대한 단일한 판단이고, 그 판단은 일차적으로 개별적 사례들이 아니라 그것들을 하나로 묶는 특정한 유형에 적용되는 것이다.
(P.37)
지혜(sophia)
경험에 대한 기술의 우월성에 대한 고찰은 앎 일반에 있어서의 우월성의 기준에 대한 고찰로 나아간다. 이 고찰은 최상의 종류의 앎이 있다면 그것이 어떤 성격을 가질 것인가를 우리에게 알려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혜가 바로 그 최상의 앎이라고 주장한다.
(P.40)
난관에 부딪혀 경이로움을 느끼는 사람은 자신이 무지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무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사람들이 철학을 하기 시작했다면, 앎을 위해서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지 어떤 쓸모를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982b11-21)
철학, 즉 지혜의 추구는 경이로움으로부터 출발한다. 이해의 범위를 벗어나 있는 것과 맞닥뜨렸을 때 느끼는 경이감, 그것은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과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하는 욕구를 동시에 유발한다. 그리고 인간은 그 난관(aporia)를 벗어나는 일이 가지는 어떤 생활 속에서의 유용성 때문이 아니라, 앎 자체에 대한 욕구 때문에 지혜를 추구하는 것이다. 지혜의 추구는 또한 진정한 자유의 실현이기도 하다.
(P.44)
원리가 되는 원인들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함은 분명한데 (왜냐하면 우리는 각각의 것에 대해서 그것의 최초의 원인을 알고 있다고 생각할 때에야 비로소 그것을 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원인들은 네 가지 방식으로 이야기되는데, 그 하나의 원인은 실체, 혹은 본질이고 (왜냐하면 “왜”는 각각의 것에 대한 설명으로 환원되고, 최초의 “왜”는 원인이자 원리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질료, 혹은 기체이며, 세 번째는 운동이 비롯하는 바, 네 번째는 이것에 대립되는 원인, 즉 목적, 혹은 좋음이다.(왜냐하면 이것이 모든 생성과 운동의 끝점이기 때문이다.) (983a24-32)
(P.45)
보편적 지식의 대상이 되는 비감각적인 존재, 이것을 플라톤은 이데아라 불렀다. 그는 모든 감각적 대상들은 그것에 대응되는 이데아를 따라 불린다고 말했다. 즉 F라는 성격을 갖는다고 이야기되는 감각적 대상은 바로 그것이 F의 이데아와 어떤 방식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 된다는 것이다. 감각적 대상에서 구현되는 F라는 성격과 F의 이데아 사이에 성립하는 이 관계를 플라톤은 ‘분유’(methexis)라 불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관계의 원형이 이미 피타고라스학파의 이론에서 발견된다고 말한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사물들이 수들에 대한 모방(mimēsis)을 통해 그것들의 본성을 가진다고 이야기했는데, ‘분유’는 이 ‘모방’을 이름만 바꾸어 놓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방’, ‘분유’가 정확히 어떤 관계인가에 대한 확정된 답을 그들은 주지 않았다.
<형이상학>을 통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이 수행하고 있는 탐구를 여러 가지의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그것은 ‘지혜’, ‘철학’(지혜의 추구), 그리고 종종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지식’으로 불리며, 때때로 ‘제일철학’(protē philosophia)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일철학의 일차성에 대해,일견 독립적으로 보이는, 두 가지 상이한 방식의 설명을 우리에게 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그는 제일철학을, 한편으로는 “있는 것으로서의 있는 것에 대한 지식”으로, 또 한편으로는 “분리되어 있고 운동하지 않는 것에 대한 지식”으로 규정하고 있다. 일견 제일철학에 관한 상기의 두 규정은 전혀 다른 종류의 일차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자의 규정에 따르면, 제일철학은 그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아우르는 가장 보편적인 진리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차적이며, 후자의 규정에 따르면, 그것은 감각적 실체들 너머에 존재하는 부동의 실체에 대한 진리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차적이다.
(P.56)
형이상학적 탐구는 난점(aporia)들의 파악에서 출발한다. 즉 그 탐구의 출발점은 그것에서 문젯거리가 되는 것들을 보다 분명하고 철저하게 기술하는 일이다.
철학적 난점은 일종의 결박이며, 철학적 탐구는 우리로 하여금 그 결박으로부터 풀려나도록 하는 작업이다. 철학적 난점에 직면한 사람은 그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되었음을 깨닫는다. 난점에 직면한 사람은 자신이 결박되어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이 결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을 옴짝달싹 못하게 하고 있는 결박의 성격을 분명하게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주어진 주제에 관한 난점들의 정확히 어떤 측면이 그의 사고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도록 만들고 있는지를 분명히 파악해야만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상반되는 의견들의 구체적 내용과 그 의견들을 그럴법한 것으로 만들고 있는 근거들이 명료하고 철저하게 기술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간과되어온 주제들이 있다면, 그것 역시 논의의 장으로 불러들여야 할 것이다.
(P.57)
있는 것으로서의 있는 것에 대한 지식이 하나의 독립적인 지식의 갈래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그러나, 한 가지 난점이 해소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난점은 ‘있는 것’이라는 표현이 다의적이라는 사실이다. 어떤 것이 ‘있는 것’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방식은 단일한 것이 아니라 다양하다.
‘있는 것’은 분명 다의적이다. 그러나 그 다의성은 아무런 연관 없는 여러 의미가 우연히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그러한 극단적이고 우연적인 다의성이 아니다. ‘있는 것’의 다의성은, 그 다양한 의미가 그곳으로 수렴되는 하나의 초점, 그 다양한 의미의 원천이 되는 하나의 핵심적 의미와 관련되어 있다. 바로 이러한 초점적 의미가 있음으로 해서, 있는 것으로서의 있는 것에 대한 단일한 독립적 지식이 성립할 수 있게 된다.
(P.59)
모든 탐구 중에서 가장 어렵고(chalepōtaton) 참을 알기 위해 무엇보다도 필수적인(pros to gnōnai talēthes anagkaiotaton) 것은, 있는 것과 하나가 사물의 실체인지, 그리고 그것 각각이,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이고 하나인지, 혹은 우리가 무엇이 있는 것이고 하나인지를 밑에 놓인 다른 어떤 본성이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탐구해야 하는지이다.(1001a4-8)
(P.64)
어떤 주제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그것의 원리들을 아는 사람이다. 그런데 철학자는 가장 보편적인 대상 — 있는 것으로서의 있는 것 — 에 대한 앎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며, 가장 보편적인 대상에 대한 지식의 원리들은 모든 원리들 중에서도 가장 확실한 원리들이다. 따라서 철학자는 가장 확실한 원리가 무엇인지를 말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그것에 대해 오류를 범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하며, 단순히 참으로 가정된 것이 아니라 진리성을 확정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어야 하며, 있는 것들에 대한 모든 지식의 기반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이러한 기술에 합당한 원리일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후대에 ‘모순율’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명제를 그 답으로 제시한다. 모순율은 논증이라는 것을 성립시키는 데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역할을 하는 명제이며, 따라서 모든 공리들의 원리라고도 말할 수 있다.
(P.67)
모든 현상이 참이라는 주장에 이르는 논리에는 중요한 틈이 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x가 어떤 사람에게는 F라는 속성을 가지는 것으로, 또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F라는 속성을 가지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사실로부터, x가 동시에 F이고 -F인 것이 참이라고, 혹은 x가 F인 것도 참이고 x가 -F인 것도 참이라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x는 특정한 어떤 조건하에서 F인 것이고, 그 조건과는 다른 어떤 조건 하에서 -F인 것이다. 이 사실을 두고 마치 x가 어떤 동일한 지평에서 F이자 -F인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된다.
(P.85)
형상과 질료(hylē)의 구분이 실체의 문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점도 Met.에서의 실체론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Cat.에서는 그 구분 자체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형상-질료의 구분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적 입장의 변화에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미쳤는가는 그의 사유 전반에 대한 고찰 위에서 신중하게 다루어져야 할 중요한 문제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할 만 한 점은 Cat.에서와는 달리 Met.에서는 단순히 “실체는 무엇인가?”가 아닌, “X의 실체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물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Cat.에서 존재하는 것들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로 간주되었던 구체적 개체들이, Met.에서는 더 이상 나누어질 수 없는(individuus) 최종적 단위가 아닌, 존재론적으로 더 기본적인 것으로 취급되어야 할 어떤 요소들로 구성된 복합체로 파악된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구체적 감각적 개체들은 형상과 질료의 복합체인 것이다. 또 다시 우리는 형상-질료 구분의 무게를 확인하게 된다.
(P.92)
<형이상학>에서 무엇이 실체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그의 최종적 답은 극히 우회적이고 복합적인 방식으로 주어진다. 그는 “이것이 최초에 제기했던 문제에 대한 나의 답이다.”라는 식의 명시적인 신호를 주지 않는다. 통상 그의 최종적 답으로 간주되는 것, 즉 형상(eidos)은 애초에 그가 실체의 후보로 제시하는 네 가지 중에 포함되지도 않는다. 형상은 본질에 대한 그의 길고 복잡다단한 논의의 과정 속에서 조금씩, 그것의 도입이 거의 계획되지 않은 것 같은 인상까지 주면서,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식으로 논의를 전개시켜 나간 것일까? 이것은 그의 존재론뿐만 아니라 그의 철학적 방법론과 관련해서도 흥미로운 문제이다. 이 의미심장한 물음에 대한 답이 무엇이든, 그 결과로 우리가 가지게 된 것은, 종종 “고대 철학의 에베레스트 산”이라고까지 불려지는 Met. VII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성찰이다.
(P.93)
진실로 옛날에도 지금도, 영원히 탐구되고 영원히 당혹케 하는 문제, 즉 있는 것은 무엇인가의 문제는 곧 실체가 무엇인가의 문제이다.
(1028b2-4)
있는 것이라는 규정이 일차적으로 실체에 적용되기 때문에, 형이상학의 영원한 문제,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결국 실체가 무엇인가의 문제로 귀착된다.
(P.95)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선 어떤 대상의 ‘본질’이라고 이야기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에서 시작한다. 본질 개념 자체에 대한 논의는 그러나 곧 그것이 적용되는 대상에 대한 논의로 전이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과연 복합체가 본질을 가지는가라는 물음을 통해서, 어떤 것이 일차적인 의미에서 본질을 가지기 위해서 만족시켜야 할 조건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차후에 그 의미가 좀 더 심화된 수준에서 고찰되게 될 여러 명제들을 제시하게 된다. 예를 들어, 일차적 의미에서 본질을 가지는 것은 여러 범주들 중 실체뿐이며, 일차적 의미에서의 정의의 대상이 되는 것이며, 비우연적인 단일성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복합체가 일차적 의미에서의 본질을 가질 수 없다는 점에 대한 확장된 분석(VII5), 본질과 그것이 귀속되는 대상 간의 동일성에 대한 논의(VII 6)를 거친 뒤, 아리스토텔레스는 생성에 대한 분석(VII 7-9)에 이어, 정의(horismos)의 부분들과 통일성에 관한 논의(VII 10-12)로 나아간다. 이 과정 속에서 본질이라는 주제는 점차적으로, 실체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관련해서 그가 (Met.에서의) 제시하고 있는 최종적 답이라고 통상 간주 되는 것, 즉 형상(eidos)에 대한 논의로 확장된다.
(P.103)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정의는 본질의 언어적 상관물(linguistic correlate)이다. 즉 정의는 본질을 드러내는 언어적 표현이며, 역으로 본질은 정의를 통해 표현되는 속성이다. 따라서 만일 X의 실체가 X의 본질과 동일시된다면, X의 실체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우리는 ‘X’의 정의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통해 규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그에게 있어서 정의는 — 적어도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의 정의는 — 단순히 주어진 단어의 의미를 밝히는 복합적 언어적 표현 이상의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의가 되기 위해서 그러한 표현이 만족시켜야할 특정한 조건들이 있으며, 오직 실체를 지칭하는 이름만이 그러한 정의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P.108)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선 생겨남의 일반적 구조에 대한 논의 로부터 시작한다. 생겨남에는 세 가지의 요소가 개입된다. (1)생겨나는 것 (2)그 생겨남이 비롯하는 바, 그리고 마지막으로 (3)그 생겨남을 야기하는 것. 그는 특히 (1)과 (2)의 항목에 초점을 맞추어, 그것들을 형상과 질료의 구분과 연결시켜 설명한다. 생겨남은 오직 감각적 대상들에게서만 일어나는 현상이며, 생겨남의 결과물은 어떤 구체적 개체이다. 그런데 이 구체적 개체는 형상과 질료의 결합체이다. 이 구분은 생겨남의 설명 구조와 다음과 같이 관련된다. 생겨남은 반드시 미리 있는 어떤 것 — (2)의 요소 — 을 필요로 하는데 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바로 질료이다. 그렇다면 생겨나는 것 —(1)의 요소 — 은 무엇인가? 그것은 형상과 질료의 결합체, 특정 질료 속
에서 현실화된 특정 형상이다.
(P.119)
생겨남은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한다. 즉, 생겨남은 항상 무 인가로부터의 생겨남이고, 무엇인가의 생겨남이며, 무엇인가에 의한 생겨남이다.
생겨나는 것은 모두 어떤 것에 의해서(hypo tinos), 어떤 것으로부터(ek tinos), 어떤 것(ti)이 된다.(1032a13-14).
완전한 무로부터의 생겨남은 불가능하다. 어떤 것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생겨남의 과정을 통해 지속하는 어떤 것이 이미 존재하고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생겨나는 것의 질료이다.
(P.119)
엄밀한 의미에서 형상은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본질도 마찬가지이다. 생겨남은 그 본성상 어떤 것으로부터의 생겨남이므로, 형상 역시 생겨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이 무엇으로부터 생겨난 것인가를 묻게 될 것이고, 그 답으로 주어진 것에 대해 또다시 그것은 또 무엇으로부터 생겨났는가를 묻게 될 것이다. 결국 우리는 무한퇴행에 빠지게 된다.
(P.121)
어떤 대상의 질료적 부분과 형상적 부분을 구분 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그 대상에 있어서 정의의 대상이 되는 것이 어떤 부분인가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대상의 본질을 이루는 부분이 그것의 실체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본질은 정의에 의해서 포착되는 것이고, 따라서 어떤 대상에 있어서 그것에 대한 정의 속에서 포착되는 것만이 그 대상의 본질이 될 것이고,그것이 실체가 될 것이다. 이제 여기에 형상-질료의 구분이 도입된다. 감각적 대상들은 형상과 질료로 이루어지는 복합체이며, 이 둘 중 정의에 의해 포착되는 부분은 형상이다. 따라서 이 형상이 그 대상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며, 대상 전체가 아니라 그것의 형상이 일차적 실체가 되는것이다. 감각적 개체를 가장 기초적인 존재론적 단위로 생각했던 <범주론>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가 <형이상학>에서는 중대한 변화를 노정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P.128)
아리스토텔레스는, 본질에 대한 논의 과정 속에서, 엄밀한 의미에서 정의의 대상이 되는 것은 실체라고 말한 바 있다. 이제 형상과 질료의 구분은 정의의 대상에 관한 물음에 새로운 차원을 더하게 된다. 감각적 실체들 — 통상적으로 실체라고 이야기되는 것들 — 이 형상과 질료로 이루어진 복합체라면, 그리고 엄밀한 의미에서의 정의의 대상이 되는 것이 실체라면, 우리는 형상, 질료, 그리고 양자의 복합체 중 어떤 것이 엄밀한 의미에서의 정의의 대상이 되는 가를 물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답은 명확하다. 오직 형상만이 정의의 대상이 되며, 질료는, 그것이 지성적 질료이건 감각적 질료이건, 정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관이나 감각에 의해 포착된다.
(P.131)
진정한 의미에서의 실체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단일성을 이루는 것이다. 단일성을 성취하지 못한 것은 단지 더미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단지 더미에 불과할 수 있었던 것을 결합시켜, 진정한 의미에서의 하나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동물들을 이루는 여러 자연적 원소들,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구성되는 팔, 다리, 등등의 신체의 부분들을 결합시켜, 상호 연관된 방식으로 작동하는 하나의 유기체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그 동물의 영혼이다. 그렇다면 통일체를 이루고 하나의 것으로서 활동하는 것들이 실체의 대표적 예들이 될 것이라면 ―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그 대표적인 예들은 생물들이다 ― 우리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한 존재들을 그러한 단일한 존재로 만들어 주는 것은, 그 존재 전체가 아니라, 그것의 형상 ― 동물의 경우에는 영혼 ― 이므로,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일차적 의미에서 실체라 불려야 할 것은 그것의 형상이라고 말이다.
(P.143)
다음의 인용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왜 사람이 있는가?” 혹은 “왜 (그것이) 사람인가?”와 같은 질문은 사실 “왜 이러이러한 질료가 사람이라는 상태로 있는가?”의 축약된 형태라고 분석한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문제의 질료를 그러한 상태로 있도록 만드는 원인의 역할을 하는 것이 될 것인데, 그 역할을 하는 것은 형상이다. 형상은, 질료가 특정한 규정성을 가진 어떤 것으로서 존재하도록 만드는 원인이라는 측면에서, 다시 한 번 실체로서의 위치를 확인받는다.
Met. VII-IX에서의 실체에 관한 논의를 거치면서 과연 ‘하나’와 ‘있는 것’이 실체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답이 분명해진다. 그의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x의 실체라고 이야기 되어야 할 것이 x를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그리고 그것을 진정한 의미에서의 하나로 만드는 것이라는 점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x를 있는 것, 어떤 하나로 만드는 것은, ‘있는 것’ 자체, ‘하나’ 자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x를 있는 것으로, 그리고 어떤 하나로 만드는 것은, x 안에 내재하는 형상인 것이다.
(P.163)
신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들은 종종 그의 형이상학 체계의 정점으로 간주된다. 이 논의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Met. XII 6-10이지만, 그는 이미 여러 곳에서 그가 이 논의들을 지속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신에 대한 그의 관심은 궁극적으로, 영원하고 부동하는 존재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한다. 흔히 Met.의 핵심 부분이라고 간주되는 VII-IX의 논의들은 기본적으로 감각적 대상들을 그 주제로 삼고 있다. 실체에 대한 분석, 능력-활동의 구분은 모두 우리 주위에서 일상적으로 관찰되는 대상들, 일반적으로 실체라 간주되는 것들의 특성들에 대한 철학적 고찰들의 결과이다. 그렇다면 이런 감각적 대상들이 존재하는 것들의 전부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감각적이고 운동을 하는 대상들의 첫 번째 원인으로서의 어떤 존재가 요청된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 존재가 가져야만 할 여러 특성들을 사변적으로 따져 간다. 그가 보기에 그 특성들을 만족시키는 존재는 신외의 다른 것일 수 없다.
(P.168)
만일 신이 우리는 가끔 가지는 좋은 상태에 항상 있다면, 이것은 경탄을 자아내는 일이며, 그것이 더 좋은 상태라면 더욱더 그러하다. 또 신은 더 좋은 상태에 있다. 또 삶은 신에게도 속한다. 사유의 활동이 삶이고 신은 바로 그 활동이기 때문이다. 또 신의 독립적 활동은 가장 좋고 영원한 삶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은 살아 있는 것이고, 영원하고, 가장 좋으며, 따라서 삶과 연속적이고 영원한 지속이 신에게 속한다고 말한다. ‘어떤 이것’이 신이기 때문이다.(1072b24-30)
우선 그것이 사유가 아니라 능력라면, 그것에게 있어 연속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피로한 일이어야 마땅하다. 그 다음으로, 그 경우 정신 이외에 보다 더 고귀한 어떤 것, 즉 사유되는 것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 사유함과 사유는 가장 나쁜 것을 사유하는 자에게도 속할 것이고, 따라서 이것이 피해야만 하는 것이라면, (보지 않는 것도 때로는 보는 것보다 나으니 말이다) 사유는 최선의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유는, 만일 그것이 최선의 것이라면, 자기 자신을 사유하며, 그 사유는 사유의 사유(noēseōs noēsis)이다.(1074b27-35)
위의 인용문의 유명한 마지막 문장은 XII 9의 핵심적 명제로 간주된다. 동시에 그것은 고래(古來)로 가장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된 문장이기도 하다. 사유의 사유라는 귀결에 이르는 사고 과정은 비교적 선명하다. 정신에게 있어 최선의 상태가 사유 활동에 있다면, 그 사유의 대상은 그 사유 자체일 수밖에 없다. 정신의 사유 활동이 최상의 상태이고, 최상의 사유는 곧 최상의 대상에 대한 사유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유의 사유라는 개념이 신의 사유의 내용을 거의 공허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하는 점이다. 신적 사유의 내용이 오직 그 사유 자체라면, 그 결과로 우리가 가지게 되는 신의 모습은 ― 한 학자가 붙인 재미있는 호칭을 인용하자면 ― 일종의 “나르키소스-신”이다. 그는 오직 자기 자신만을 사유하며, 자신이 사유하고 있음만을 사유할 뿐이다.
(P.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