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2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 김정매 / 민음사 / 474쪽 ​
(The rainbow 1915)
(2018. 2. 18.) 



  최대 다수의 행복이 중요한 모든 것이었다. 집단적 인류 모두에게 최대의 행복이 되는 것이 개인적으로도 최대의 행복이었다. 그러므로 개인 각자는 국가를 지지하는 데 헌 신해야 하며 모든 사람의 최대의 행복을 위해 일해야 했다. 간혹 개인이 국가의 상태를 개선하기도 하지만, 그건 언제나 국가를 손상시키지 않고 보존한다는 한도 내에서만 가능했다.
  그러나 공동사회의 최대 행복이 개인의 영혼에 진정한 성취감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 점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한 개인의 영혼이 그렇게까지 중요하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는 개인이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한도 내에서만 중요하다고 믿었다.
  공동사회의 최대 행복이 평범한 개인에게 최대의 행복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는 깨닫지 못했으며, 또 천성으로 깨달을 능력이 없었다. 공동사회가 수백만 명의 인구를 대표하므로 그만큼 개인보다 수백만배 더 중요한 것이 틀림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공동사회가 많은 사람의 추상제이지 결코 많은 사람들 자체가 아니라는 점을 잊었던 것이다. 공동체의 행복이라는 말은 하나의 추상적인 공식이 되어버려서 보통 사람들에 대한 호소력이나 가치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니 '공동의 행복'은 보통 사람들을 괴롭히는 말로 변해 버렸고, 낮은 차원에서 저속하고 보수적인 물질주의를 나타낼 뿐이었다.
(P.133)

​​
  어슐라는 잉거 선생 곁을 떠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토요일 밤, 승객들로 북적거리는 기차역에 들어서니 기뻤다. 불빛이 밝게 비치고 사람들이 붐비는 기차간에 앉아 있으니 기뻤다. 그러나 아는 사람을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얘기하고 싶지가 않아서였다. 그녀는 붐비는 사람들에 면역이 된 채 홀로 앉아 있었다.
  환한 불빛 아래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이 광경은 내면에 있는 커다란 암흑과 공허의 가장자리 지대에 불과했다. 어슐라는 북적거리고 부분적으로 불빛이 비치는 이 가장자리 지대에 있고 싶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캄캄한 공간이란 공허한 실체만이 있기 때문이었다.
(P.155)


그들은 종교를 택했으나, 허위적인 교리는 빼버렸다. 잉거 선생은 종교를 완전히 인간적으로 만들었다. 어슐라는 자기가 알고 있던 모든 종교가 결국은 인간의 열망에다가 특별한 옷을 입힌 것이란 사실을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열망은 진실한 것이었다. 그런데 입힌 옷은 거의 국가적인 취향이나 필요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리스 사람들은 발가 벗은 아폴론 신을 섬겼고 기독교인들은 흰옷 입은 그리스도를, 불교도들은 싯다르타 왕자를, 이집트 사람들은 오시리스 신을 섬겼다. 갖가지 종교는 지역적인 것이나 종교 자체는 보편적인 것이었다. 기독교는 지엽적인 분파였다. 아직은 지엽적인 여러 종교들이 하나의 종교로 동화되지는 못했다. 종교에는 공포와 사랑이라는 두 가지 커다란 동기가 있었다. 공포의 동기는 사랑의 동기만큼이나 위대했다. 기독교는 공포에서 도피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한 예수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P.156)


  어슐라는 종교에 관해 아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많은 글에서 요점을 파악했다. 철학에서는 인간의 욕망이 진리와 모든 선의 기준이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진실은 인간을 초월해서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인간의 지성과 감성의 산물이란 결론에 도달했다. 두려위할 것은 실제로 아무것도 없었다. 종교에 있이 공포의 동기는 저열한 것이며, 그러므로 공포는 몰록신을 숭배하던 고대 힘의 숭배자들에게나 주어버려야 한다. 우리는 계몽된 정신의 소유자이기에 힘을 숭배하지는 않는다. 힘이란 금전과 나폴레옹 식의 우매함으로 퇴보한다.
(P.157)


  어슐라는 브런트 선생, 하비 선생, 스코필드 선생과 다른 모든 교사들이 마지못해 못할 짓을 하는 걸 보았다. 그들은 많은 아이들을 반항이 허락되지 않는 기계적인 틀 속에 억지로 집어넣고, 이 전체의 틀을 복종과 주목만이 통하는 기계 상태로 만든 후, 잡다한 지식의 파편들을 받아 들이라고 명령하는 수치스러운 작업을 하고 있었다. 첫 번 째로 중요한 과업은 예순 명의 아이들을 하나의 마음, 하나의 존재 상태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태는 학생들의 의지 위에 군림하는 담임교사의 의지와 학교 당국의 의지를 통해 자동적으로 조성되어야 했다. 요점은 교장과 교사들이 하나로 통일된 권위 있는 의지를 보여야 하며, 그렇게 되면 학생들은 하나의 의지로 통합되어 이를 추종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P.235)


  매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어슐라에게 있어서 여성의 해방이란 진실하고 깊은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어슐라는 어딘가에서, 그 어떤 점에서 자신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꼈다. 자유롭고 싶었다. 그래서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일단 자유롭게만 되면 그 어딘가에 갈 수 있으니까. 아! 자신을 초월한 그 경이롭고 진실한 어딘가. 마음속 깊이에서 느끼는 어딘가에 말이다.
  부모에게서 떨치고 나와 자신의 생활비를 마련함으로써 어슐라는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는 일을 향해서 강력하고 잔인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전보다 더 많은 자유를 누리게 되니까, 자유가 더 필요함을 더욱 절실히 깨달았다. 많은 것을 하고 싶었다. 위대하고 아름다운 서적들을 읽고 풍요하게 되길 바랐다.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싶고 또 이것들을 영원히 즐기고 싶었다. 훌륭하고 자유로운 사람들을 알고 싶었다. 그러고도 무어라 이름할 수 없는 욕구가 항상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P.281)


  “세상에는 사랑할 만한 남자들이 많아요. 단지 한 사람 만 있는 것은 아니에요."
  어슐라가 말했다. 내심으로는 스크레벤스키를 생각하고 있었다. 위니프레드 잉거를 생각하면 가슴이 공허했다. 
  “그렇지만 애정과 욕정을 구별해야 돼요.” 매기가 말했다. 그리고 다소 경멸하는 투로 덧붙여 말했다.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쉽게 욕정을 품겠지만, 그렇게 쉽게 사랑은 하지 않을 거예요."
  “그래요." 
  어슐라가 강렬한 어조로 힘주어 대답했다. 거의 광분한 것 같은 괴로운 표정이 얼굴에 나타났다.

  “욕정은 애정의 일부에 지나지 않지요. 그리고 오래 지속되지 못하기 때문에 더 굉장한 것으로 보여요.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욕정만으로는 절대로 행복하지 못하지요,” 
  어슐라는 인생에 있어 기쁨과 행복, 영원성을 확고하게 바라보며 살았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매기는 비애와 사물의 불가피한 사멸을 쳐다보고 살았다. 어슐라는 삶의 손아귀 속에 혹독하게 고통을 겪었으나 매기는 언제나 홀로 초연해 있었다. 그래서 깊은 생각에 애잔하게 잠겨 있으면서 이를 즐기다시피 했다. 어슐라가 성 필립스 초등학교에서 보낸 마지막 겨울 동안 두 선생 사이의 우정은 절정에 이르렀다.
  바로 이 겨울 동안에 어슐라는 매기가 근본적으로 홀로  담을 쌓고 외롭게 살아가는 것을 매우 가슴 아프게 괴로워 했고, 또 이를 몹시 즐겼다. 매기는 어슐라가 자신의 삶의 한계에 대항하며 투쟁하는 것을 즐기면서 또한 괴로워했다. 그다음에 이들은 사이가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매기가 담을 쌓은 채 계속 남아 있어야 하는 삶의 형태에서 어슬라는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P.290)


  한 해 동안 대학의 매력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교수들은 인생과 지식의 심오한 신비를 전수받은 사제가 아니었다. 결국 교수들이란 아주 몸에 배어버려 그 존재조차 망각해 버린 상품을 취급하는 중개인에 불과했다. 라틴어란 무엇인가? 아주 많은 지식이라는 잡화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라틴어 시간은 일종의 상점에 불과했다. 그 곳에서 학생이 골동품을 사고 골동품의 시장가를 알아보는데 전반적으로 별 매력 없는 골동품이었다. 어슐라는 골동품 상점에서 중국과 일본의 골동품에 진저리가 난 것처럼 라틴 골동품에도 싫증이 났다. '골동품', 바로 이 말만 들어도 혼이 나가고 생기가 쏙 빠지는 것 같았다.
  왠지 몰라도 학업에 대한 활력이 싹 빠져나갔다. 모든 것이 가짜고 겉치레로만 보였다. 겉치레뿐인 고딕 양식의 아치, 걸발림뿐인 평화, 겉치레뿐인 라틴어 어법, 겉치레 뿐인 프랑스의 위엄, 또 겉치레뿐인 초서의 소박성, 말하자면 이 모든 것이 고물 상점으로 학생들이 시험을 치르기 위해 장비를 구입하는 곳이었다. 이런 것은 시내의 큰 공장들과 비교해 보면 하잘것없는 유흥장에 불과했다.
  차츰 이런 생각이 어슐라의 마음속 깊이 파고들었다. 대학이란 종교적인 수도원도 아니고, 그렇다고 순수 학문의 도장도 아니었다. 그곳은 작은 양성소로 학생이 장차 돈을 벌기 위해서 훈련을 더 받는 곳이었다. 대학 자체는 공장을 위해서 있는 자그맣고 불완전한 실험실에 불과했다.
  어슐라는 또다시 냉혹하고 흉측스러운 환멸을 맛보았다. 이와 같은 암흑과 비통한 침울에서 절대로 완전하게 벗어 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의 밑에는 흉측스러운 밑층이 영원히 깔려 있다는 걸 깨달았다.
(P.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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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1 ​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 김정매 / 민음사 / 474쪽 ​
(The rainbow 1915)
​(2018. 2. 14.) 



  여자는 이와 다른 형태의 삶을 원했다. 그것은 피의 교접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여자의 집은 농장과 대저택이 있는 읍내와 신작로와 그 너머의 세계를 향했다. 여자는 일어서서, 도시와 관청이 들어서 있고 남자들의 활발한 활동이 전개되는 먼 세계를 바라보았다. 그곳은 마술의 나라로, 온갖 비밀이 알려지고 욕망이 성취되는 곳으로 보였다. 여자는 바깥을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남자들은 고동치는 생식의 열기에 등을 돌리고, 권력을 쥐고 창의적으로 움직였다. 아니, 생식의 열기를 뒤에 남긴 채. 그 너머의 세계에 속한 것들을 발견하고 그들의 시야와 활동 범위와 자유를 넓히려고 길을 떠나는 것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브랑원 집안 남자들은 생식의 충만한 삶을 향하여 안으로 고개를 돌렸으며. 그 삶은 생경한 그대로 그들의 혈관 속으로 흘러들었다.
  여자는 욕구에 못이겨 집 앞에 서서 남자들이 활동하는 세계를 전체적으로 바라보았고. 한편 남편은 뒷마당에 서서 하늘과 추수와 짐승과 토지 쪽으로 눈을 돌렸다. 아내는 남자들이 지식을 향해 투쟁해 나가며 성취한 결과를 보려고 애썼으며. 정복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바싹 귀를 기울였다. 아내의 깊고 깊은 욕망은 미지의 세계의 변두리에서 한창 벌어지고 있는 싸움터에 가 있었다. 그 아우성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기 때문이다. 아내는 전쟁에 대해 알고 싶었을 뿐만 아니라. 그 속에 끼어들어 싸우고 싶었다.
(P.12)

​ 
  목사는 아주 구차한 데다 남자로서 별로 능률적이지도 못했지만, 상류 인사들과 어울렸다. 여자는 목사의 아이들이 태어나는 것을 보았고. 엄마의 치마 끝을 졸졸 따라다니는 것을 눈여겨보았다. 그 아이들은 이미 자신의 아이들과는 구분되어 있었다. 하지만 왜 자신의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보다 열등해야 하나? 왜 목사의 아이들이 그녀의 아이들보다 우월한 위치를 차지해야 한단 말인가? 왜 처음부터 목사의 아이들에게 우월권이 부여되어야 하나? 그건 금전 탓도 아니요, 계급 탓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건 바로 교육과 경험의 문제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바로 이것을, 이 교육을, 이 고차원적인 존재의 형태를 자식들에게 부여해, 자식들도 지상에서 지고의 생을 누리게 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자식들은, 적어도 그녀가 애지중지하는 자식들은, 그 고장에서 내로라하는 활력 있는 사람들과 동등한 위치를 차지할 만한 완벽한 성품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뒤처진 채, 무명의 막일꾼으로 남을 수는 없었다. 왜 그들이 일생 동안 무명의 숨 막히는 생활을 해야 하나? 행동의 자유 없이 고초를 겪을 이유가 뭐란 말인가?(P.14)
​​​

  브랑원은 그 어떤 충동을 받아 아내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아직도 홑이불을 움켜쥐고 있는 아내의 손을 가만히 쥐었다. 아내는 회갈색 눈을 뜨더니 그를 보았다. 아내는 그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남자라는 건 알아보았다. 산고 중인 한 여자가 자신에게 임신을 시킨 사나이를 보는 그런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것은 비인성적인 시선이었고 극한의 순간에 수컷과 암컷 사이에 서 오가는 시선이었다. 아내는 다시 눈을 감았다. 펄펄 끓는 뜨거운 행복감이 그에게 도도히 몰려오더니 그의 심장과 내장을 다 태워버리고는 다시 무한의 공간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파열시킬 듯한 고통이 아내에게 다시 닥쳐왔을 때 브랑원은 그만 고개를 돌려버렸다.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괴로웠던 가슴이 평안을 되찾았으므로 마음은 기뻤다. 그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현관 쪽으로 걸어가 밖으로 나갔다. 브랑원은 얼굴을 쳐들어 비를 맞았다.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암흑이 계속 그를 내리친다고 느꼈다.
  밤이 눈에 안 보이게 그를 빠르게 후려치자, 브랑원은 말문이 막히고 압도당했다. 그는 겸허한 마음으로 집 안을 향해 몸을 돌렸다. 삶의 세계뿐 아니라 무한하고 영원하며 불변하는 세계도 있었던 것이다.
(P.145)


  "왜 그렇게 자주 나가세요?" 
  "당신이 날 원하지 않으니까."
  아내는 잠시 말이 없었다.
  "당신은 이제 나하고 같이 있는 걸 원치 않아요."
  브랑원은 깜짝 놀랐다. 아내가 이런 진실을 어떻게 알아 냈지? 나만의 비밀인 줄 알았는데.
  "저......"
  브랑원이 말을 시작했다.
  “무언가를 찾고 싶어서 그러시지요.”
  브랑원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랬던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그렇게 관심을 끌려고 하지 마세요. 당신은 어린애가 아니에요.”
  “난 불평하지 않아요.”
  브랑원이 대꾸했다. 그렇지만 자신이 불평한다는건 내 심으로 잘 알고 있었다.
  “관심을 충분히 못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지요? 얼마나 받으면 충분해요? 당신은 나의 관심을 충분히 못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나를 어떻게 아세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게끔 무슨 노력이나 해봤어요?"
  브랑원은 깜짝 놀라 어안이 벙벙해졌다.
  “당신의 관심이 적다고 말한 적은 없어요."
  브랑원이 대꾸했다.
  “난 당신이 날 사랑하려고 하는지 몰랐어요. 그래, 뭘 원하오?”
  "당신이 우리 관계를 좋지 않게 만들고 있이요, 관심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 내가 어떻게 당신을 원하겠어요?"
  “당신은 지금도 내가 당신을 원하는 걸 방해하고 있어."
   침묵이 흘렀다. 그들은 낯선 사람들이었다.
  “그래, 딴 여자를 원해요?"
  “아니, 내가 어떻게 다른 여자를 원하겠어요?”
  브랑원이 천천히 말했다.
  “당신 형처럼 말이에요.”
  브랑원은 부끄럽게 느끼며 잠시 잠자코 있었다.
  “그 여자가 어떻다는 거예요?”
  브랑원이 말했다.
  “난 그 여자가 싫었어요.”
  “아니, 좋아했지요.”
  아내는 물고 늘어지며 말했다.
  브랑원은 경이로워서 아내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아내가 그의 속마음을 그토록 태연스럽게 들추어내 말하다니. 그래 브랑원은 화가 치밀었다. 아내는 무슨 권리로 저렇게 떡하니 앉아서 이런 말들을 늘어놓는단 말인가? 저 여자는 분명 그의 아내인데, 무슨 권리로 남남처럼 이런 식으로 말을 한단 말인가?
  “난 싫었어요.”
  브랑원이 말했다.
  “난 여자를 원치 않아요.”
  “아뇨, 당신은 아주버님같이 되고 싶어 하지요.”
(P.166)


  남편이 들어왔다. 얼굴은 목제품처럼 생기가 없이 굳었고 옹고집에 차 있었다. 남편은 차를 마시려고 식탁에 앉아서 고개를 흉측스럽게 찻잔 위로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의 손은 찬물로 씻어 빨개졌고 손톱 안에는 흙이 동그랗게 끼어 있었다. 남편은 계속 차를 마셨다.
  애나가 남편에게서 참을 수 없는 점은 지금 같은 그의 부정적인 둔한 태도였다. 흙투성이의 추한 물건 같은 그 둔감성이었다. 남편의 마음은 자기 자신에게 몰두해 있었다 자신에게 골몰한 인간과 한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거북스러운일인가. 바로 마주 보는 자리에 보기 싫은 흉물이 편안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어떤 것도 남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자아 속으로 모든 것을 빨아들일 수 있을 따름이었다.
(P.280)


  남편이 자신에게서 해방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내에게도 궁극적인 해방이란 있을 수 없었다. 명확한 형태 없는 야릇한 상태로 아내는 생각만 간절히 하면서 그 고통 속에서 계속 지내야 했다. 아내는 마치 폭풍우 가운데서 이리 저리 불리는 따스하고도 광채 나는 구름 같았다. 따스한 몽롱함 가운데서 무궁한 풍요를 느꼈기에 아내의 영혼은 남편에게 큰 소리로 항의했다. 남편이 그녀를 못살게 괴롭히며 파괴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P.334)


  아내가 남편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을 때 남편의 표정은 변하지 않고 단지 더 강렬해질 뿐이었다. 얼굴은 한곳에 열중해 있어 뻘겋고 시커멨다. 인간의 얼굴이라기보다는, 무엇에 몰두한 강한 빛을 띠고 있었다. 어쩌다 남편과 시선이 마주치면, 남편의 눈에서 노란 불빛이 튀어나오면서 암흑이 덮쳐와 그녀의 의식을 몽롱케 했고 전기가 통하는 듯 느꼈다. 그러면 남편은 야릇한 미소를 살짝 지었다. 그녀는 최면술에 걸린 것같이 나른해서 눈을 돌렸다가 감아 버렸다. 그러면 둘은 팽팽한 어둠 속에 함께 잠겨 들었다. 남편에겐 한곳에 열중해 눈에 띄지 않는 검은 고양이 새끼와 같은 면이 있었다.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지만 서서히 그 존재를 느끼도록 해서 은밀하고도 강력하게 아내를 사로잡았다. 그는 아내에게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 속에 있는 그 어떤 것에 호소했다. 그러면 그녀의 어두운 무의식에서 그것이 나와 미묘하게 반응을 보였다.
  그들 부부는 절대로 빛 속에 있지 않고 평범한 낮의 뒤 안길을 끊임없이 찾아들면서 정열적이며 전기가 흐르는 암흑 속에 함께 머물렀다. 남편은 빛 속에서는 의식을 잃고 잠자는 것 같았다. 암흑이 남편을 자유롭게 했을 때만 아내가 남편을 알아보았고, 그러면 남편은 금빛처럼 달아오르는 눈으로 어둠 속에서 자신의 의도와 욕망을 직시할 수 있었다. 그러면 아내는 최면에 걸려서 남편의 꿰뚫는 듯한 거친 목소리에 그녀의 영혼이 부드럽게 뛰어오르며 응답했다. 암혹이 깨어나 전기가 통하고 미지의 암시가 압도적으로 밀려왔다.
  이제 와서야 그들은 서로를 진정 이해했다. 아내는 낮이요, 빛이었고, 남편은 옆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불과했으나 밤이 오면 관능적인 힘으로 압도해 왔다.
(P.394)


  “할머니, 누군가가 절 사랑하게 될까요?"
  "얘야. 널 사랑하는 사람은 많지 않니? 식구들이 전부 널 사랑하는데."
  “그렇지만 이다음에 내가 크면 누가 날 사랑할까요2”
  “그래, 어떤 남자가 널 사랑할 거야. 네 천성이 그러니까, 그런데 너에게서 뭘 바라서가 아니라 너 자체가 좋아서 널 사랑하는 사람이면 좋겠다. 우리 모두에게는 원하는 사람을 바랄 권리가 있으니까.”
  어슐라는 이런 말을 듣고 겁이 났다.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발밑에 짚을 땅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 할머니에게 꼭 달라붙었다. 그곳에는 평화와 안정이 있었다. 이곳 할머니의 평화로운 침실로부터 보다 더 큰 세계로 문이 열렸다. 그것은 아주 광활한 과거의 세계여서 그곳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이 자그맣게 보였다. 광활한 지평선 위에 사랑과 출생과 죽음과 삶의 작은 단위와 형상들이 널려 있었다. 위대한 과거 속에서 작은 개인이 중요하다는 점을 안 것은 커다란 위안이었다.
(P.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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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김경하 / 문학동네 / 136쪽
(2018. 2. 4.) 


   
1793년에 제작된 다비드의 유화 <마라의 죽음>을 본다. 욕조 속에서 피살된 자코뱅 혁명가 장 폴마라의 모습이 그려져 있 다. 머리에는 터번처럼 생긴 수건을 두르고 있고 욕조 밖으로 늘어뜨려진 손은 펜을 쥐고 있다. 흰색과 청색 사이에 마라가 피를 흘리며 절명해있다. 작품 전체의 분위기는 차분하고 정적이다. 어디선가 레퀴엠이 들려오고 있는 것만 같다. 그를 찌른 칼은 화면 아래쪽에 배치되어 있다.
  나는 이미 여러 차례 그 그림을 모사해보았다. 가장 어려운 부분은 마라의 표정이다. 내가 그린 마리는 너무 편안해 보여서 문제다. 다비드의 마라에게선
불의의 기습을 당한 젊은 혁명가의 억울함도, 세상 번뇌에서 벗어난 자의 후련함도 보이지 않는다. 다비드의 마리는 편안하면서 고통스럽고 증오하면서도 이해한다. 한 인간의 내부에서 대립하는 이 모든 감정들을 다비드는 죽은 자의 표정을 통해 구현했던 것이다. 이 그림을 처음 보는 사람의 시선은 가장 먼저 마라의 얼굴에 머문다. 표정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리하여 시선은 크게 방향으로 움직인다. 한쪽 손에 들린 편지로 시선이 옮기지거나 아니면 욕조 밖으로 비어져나와 늘어진 다른 팔을 따라간다. 죽은 마리는 편지와 펜. 이 두 사물을 끝까지 놓치지 않고 있다. 거짓 편지를 핑계로 접근한 테러리스트는 답장을 쓰려던 마라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 마라가 끝까지 움켜쥔 펜이 차분하고 고요한 이 그림에 긴장을 부여한다. 다비드는 멋지다. 격정이 격정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건조하고 냉정할 것. 이것은 예술가의 지상 덕목이다.
(P.7)
​  
 
도서관에서는 주로  역사책이나 여행안내서를 읽는다. 일을 끝내고 돈을 받으면 나는 여행을 떠난다. 여행안내책자들은 복잡한 사실들을 간단하고 명쾌하게 축약해놓는다. 한 도시에는 수 십만 개 의 인생이 있고 수백 년의 역사가 있고, 인생과 역사가 교직하면서 만들어온 흔적이 있다. 그 모든 것을 여행안내책자 들은 단 몇 줄로 줄여버린다. 이를테면 파리에 대한 소개는 이렇게 시작한다. “파리는 세속적인 곳이라기보다는 종교적, 정치적, 예술적 자유의 성지이고 그 자유를 알리는 외침이거나 그것에 대한 숨은 바람이다. 파리는 관용의 정신으로 로베스피에르, 귀리, 와일드, 사르트르, 피카소, 호치민, 조이스, 그리고 호메이니와 같은 사상가, 예술가, 혁명가, 그리고 많은 비범한 사람들에게 망명처를 제공해주있다. 파리는 19세기의 뛰어난 도시계획의 훌륭한
산물이지만 파리의 음악과 예술, 극장이 그러한 것 처럼 건축물도 중세풍에서부터 아방가르드적인 것, 아니 아방 가르드를 넘어서는 것까지 다양한 양식의 건물이 어우러져 있다. 역사와 새로움, 문화와 문명 그 자체의 자기 인식인 파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 모두가 그것을 창조해냈을 것이다."
   파리에 대해서 더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 이런 까닦에 나는 여행안내서 읽기를 즐긴다. 그것은 역사서도 마찬가지이다. 압 축할 줄 모르는 자들은 뻔뻔하다. 자 신의 너저분한 인생을 하릴 없이 연장해가는 자들도 그러하다. 압축의 미학을 모르는 자들은 삶의 비의를 결코 알지 못하고 죽는다.
​(P.9)
​  
 
  언젠가 한 고객은 고흐를 좋아한다고 내게 말했 다. 나는 그녀에게 고흐의 풍경화와 자화상 중에서 어느 쪽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고객은 머뭇거리더니 자회상이 더 좋다고 말했다. 고호의 자화상에 탐닉하는 자들을 나는 유심히 바라본 다. 그는 고독한 사람이다. 자신의 내면을 한 번이라도 들여다본 사람이다. 그리고 그 경험이 고통스러우면서도 내밀한 쾌감이라 는 것을 이는 사람이다. 그리고 누군가 이런 질문을 내게 던진 다면, 그 역시 고독한 인간이다. 그러나 고독한 자들이 모두 내 고객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P.11)
​ 

  나는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살해하도록 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나는 사람들이 무의식 깊은 곳에 김금해두었던 욕망을 끄집어내고 싶을 뿐이다. 일단 풀려난 욕망은 자기증식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상상력은 비약하기 시작하고 궁극엔 내 의뢰인이 될 소질을 스스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고객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되면 나는 그 사람을 만난다. 물론 사무실이 아닌 곳에서 말이다. 때로는 술을 마시기도 하고 함께 전시회나 영회를 보기도 한다. 드문 일이지만 정말 중요한 고객인 경우에는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이때 중요한 고객이란 많은 돈을 지불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내 창작에 중요한 자극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뜻한다. 그런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지만 만나게 되면 기쁘기 한량없다. 그러나 고객 앞에서는 절대로 그런 티를 내지 않는다. 그들은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내 이름도 고향도 출신 학교도 심지어 취미도 알지 못한다. 나는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함으로써 내 취향을 은폐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상정한 어떤 인간 유형에서 자꾸만 벗어나는 나라는 인간을 향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는다. 하기야 당연한 일이다. 누구도 신에 대해서 너무 많이 알 수는 없는 법이다.   
(P.14)    
​  ​   

   “두려움은 흔히 혐오의 외피를 쓰곤 하죠. 자전거를 배우려면 쓰러지는 쪽으로 핸들을 꺾어야 해요. 그리고 힘차게 페달을 밟으면 되죠." 
  그녀는 한참을 말없이 그의 말을 곱씹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침묵이 수긍의 표시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절 두려워하잖아요. 제 실재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을 말이에요. 그래서 비디오를 들고 나은 거죠? 아닌가요? 정작 쓰러지는 쪽으로 핸들을 꺾어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당신일 수도 있어요."
(P.108)  
    

  그녀의 몸은 붓대롱이 되고 머리카락은 붓이 되어 움직인다. 그 모습을 푸른색 뷰파인더를 통해 좇고 있는 c. 어느새인가 이 비디오의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는 방식에 익숙해져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길을 걸어도 프레임으로 시야를 구획하고, 비디오에 담겨진 것들, 자신이 편집한 것들을 그의 두 눈으로 본 것보다 더 신뢰한다, 아니 애착한다. 그리하여 비디오 는 다시 그의 무기가 되고, 작지만 안전한 도피처가 된다. 그게 어쩌면 그가 이 매력적인 행위예술가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이유 인지도 모른다. c는 그의 세계, 그에 의해 칭조된, 그에 의해 반영된, 그에 의해 포획된 이 세계에 아직은 머무르고 싶은 것일 게다. 어느새 그녀는 곡조 모를 노래마저 흥얼거린다. 그녀가 어쩌면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결코 이 거리를 좁히지 못하리라. 세계와 자신, 오브제와 렌즈, 그가 만나왔던 여지들과 자신, 그들 사이에 놓인 강을 결코 좁히지 못할 것이라는 비감한 절망이 몰려들었다.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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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이라면 어떻게 일해햐 하는가
김경준 / 원앤원부스 / 300쪽

(2018. 2. 2.) 



(믿고 싶어 하는 것과 믿어야 하는 것은 따로 있다)

집단적 최면이 아니라 실제 진실을 알아야한다.
허황된 명분에 속지 말고 현실을 냉철히인식하라.

  우리나라 사람들은 개인의 감정 표현은 비교적 솔직하지만, 대외적 명분과 체면에 있어서는 대단히 이중적이다. 합리적 사고의 전통이 짧아서인지, 대외적인 체면을 깎인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커다란 위험을 김수해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대 외적 체면과 관련된 문제는 이중적인 태도를 가질 수빆에 없는 경우를 흔히 본다.
  우리 사회가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가치와 개인이 실제로 행동하는 가치는 분명히 다르다.​
  우리 사회와 집단은 이중적이다. 개인이 생존하려면 허황된 명분에 속지 말고 현실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이야 한다.
(P.26)


(회사생활을 개인 비지니스로파악하라)

자신의 가치를 회사에 판다고 생각하라.
조직이 나를 버릴 수 없도록 나의 가치를 높여라.

  회사생활을 개인 비즈니스로 파악하리는 것은 자신의 가치를 회시에 판다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자신의 가치보다 낮은 가격에 팔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지신의 가치보다 비싸게 팔 수 있다면 개인에게는 좋은 일이다.
  동시에 비즈니스는 언제나 깨질 수 있다. 회사가 나를 버렸다고 배신 운운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직원이 사표를 냈을 때 회사가 직원을 배신자라고 비난하는 것도 마친가지로 시대착오다. 비즈니스에는 상호이익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미래를 내다보고 일시적 손실은 감수할 수 있어도 징기적 손실을 감수할 비즈니스 파트너는 없다.

  비즈니스에서는 항상 자신만의 고유한 제품이나 서비스로 고객에게 가치를 제공하려 한다. 마찬가지로 개인도, 회사에 대해서 자신만의 가치와 서비스로 회사에 가치를 제공하려고 해야 한다. 나를 고용하는 것이 회사에 이익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분야에서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소위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조직에게 나를 돌보아달라고 요 구하기 전에, 조직이 나를 버릴 수 없도록 나의 가치를 높이 는 것이 진정한 전문가다.
(P.41)


(자기 인생의 CEO가되어라)

자신의 인생의 책임을 지고 경영하라.
자신이 경영하고 결정하고 책임져야 한다.

  기업의 CEO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자기 인생 의 CEO도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처한 환경, 헤쳐 나가야 할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세상을 보는 자신의 관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현실에 기반한 자신의 전략이 있어야 한다. 전략을 실천해 나갈 의지와 노력이 따라야 한다.

  외부환경을 나름대로 이해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사회변화를 막연히 남들이 말하는 대로, 신문에서 떠드는 대로 별 생각 없이 받아들인다면 문제가 있다. 세련되지 않아도 좋다 자신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래야 자기 논리가 생긴다. 남보다 잘한다는 것이 꼭 1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일반적인 기준에서 자신에게 경쟁력이 있으면 된다. ​

  자신 인생의 CEO가 되라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 책임을 지고 경영하리는 말에 다름 아니다. 기업의 CEO가 남의 눈
으로 세상을 보고, 자기 회사의 역량을 과대평가하고, 비현실적인 전략을 전개하고 있다면, 회사는 망하기 십상이다 마찬가지로 자신 인생을 성공적으로 경영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보는 자기 관점을 가지고, 자신의 역량을 냉정하게 이해 하고, 현실적인 개인전략을 염두에 두고 노력해야 한다.
(P.47)


(
몸담은 회사와 사업의 본질을 철저히 이해하라)

사업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의외로 않다.
사업의 본질에 대한 자신만의 관점이 있어야 한다.

인터뷰에서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자신의 경험과 비교해 컨설턴트의 경험이 적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흔하다. '나는 이 업종에 20년 이상 근무했다. 그런데 접한 지 불과 한 달도 안 된 너희들이 무엇을 알겠는가?'
  이럴 경우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의 경험은 가치가 있다. 그러나 세세한 업무를 안다는 것과 업종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 10년을 근무해도 자신의 회사가 무엇을 하는 회사인지 모르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단 1년을 근무 해도 회사와 사업의 본질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몸담은 기간이 길다고 사업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중간관리지급 이상이 되면 전체적인 시각을 가져야 한다. 전체적 시각은 올바른 의사결정을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경영자가 되기 위한 사고의 훈련과정으로서도 필요하다. 나아가 회사를 떠나 자기 사업을 준비하기 위해서도 사업을 보는 시각은 필요하다. 자신이 몸담은 회사가 하는 사업의 본질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회사를 오래 다녔다고 사업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생각을 깊이 해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리고 미래의 경영자가 되기 위해서는 사업의 본질에 대한 자신만의 관점이 있어야 한다. 전문경영인이든 자기사업을 하든 경영자는 사업의 개념을 창조하고 혁신해 나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당장 자기 회사가 하는 사업의 본질을 한번 직접 생각해보기 바란다. 그리고 자기의 관점을 단련시키길 바란다.
(P.75)


(직급에 따라 요구하는 능력은 달라진다)


사원, 관리자, 경영자에게 필요한 능력은 각각 다르다.
맡은 자리가 요구하는 능력이 무엇인지를 잘 생각하라.

  유능한 사원이 유능한 부장, 유능한 임원이 되어 궁극적으로 탁월한 CEO가 될 수 있을까?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라는 속담대로 탁월한 CEO 재목은 사원때부터 탁월함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유능한 사원이 무능한 부장이 될 수 있고, 유능한 부장이 무능한 임원이나 CEO가 되는 경우도 실제로 많이 있다.

  사원, 대리 같은 실무자에게 요구되는 능력은 우선 성실함과 꼼꼼함이다. 즉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실수 없이 처리하기
만 하면 된다. 과장 정도의 중간관리자가 되면 실무처리 능력과 직원관리 능력, 상하 간 의사소통 능력이 필요해진다.
  부서장이되면 리더십과 대내외적 네트워킹이 중요해지는 단계다 특히 직원들과 신뢰관계를 형성하고, 업무에 적절한 인원을 배정하며,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등 소위 사람을 다루 는 능력이 필요하다.


  환경이 변하면 적응해야 살아남듯이, 직급이 올라가고 역할이 바뀌면 이에 적응해야 성공할 수 있다. 과거의 성공경험을
절대시하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 사원이나 대리로 인정받았던 덕목들이 관리자나 부서장이 되어서는 오히려 극복해야 할
약점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회사 내에서 승진을 하거나, 전직을 해 입사한 회시에서 다른 업무가 맡겨졌다면, 그 자리가 요구히는 능력이 무엇인지 를 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P.84)


(자기관점이 없으면 보이는 것도 없다)

아는 만큼 느끼고. 느낀 만큼 보인다.
자기 분야에서 자기만의 관점을 가져라.

자기관점이 없으면 보이는 것이 없다. 난봉꾼이 평생을 살아도 보고 듣는 것은 술집과 여자 외에는 없는 것과 마찬가다.
자기 분야에서 자기만의 관점을 가지도록 노력하라. 노력 없이는 앎이 없고, 앎이 없이는 느낌이 없으며, 느낌이 없으면
보이는 것이 없는 법이다
(P.87)

​​
(바닷물을 끓이려고 하지 말라)

좋은 답안도 너무 늦게 나오면 이미 쓸모가 없다.
주어진 상황에서 사안에 맞는 해결책을 모색하라.

“경영은 불확실성 하에서 정확한 해답을 찾아내는 것이 핵심은 아니다. 정확한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잘못된 답을 가지 고 있는 것이 잘못된 문제에 완벽한 해답을 가지고 있는 것보다 낫다는 사실을 알았다.” 세계적인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의 말이다. 경영학은 기능 한 범위 내에서 실용적인 답을 찾는 것이다.

  경험이 적은 직원에게 뜨고서 작성을 시키면, 자료를 찾는 데 시간을 너무 많이 쏟는 경우가 흔히 있다. 내가 보기에 필요한 자료는 다 찾았는데도, 자료가 부족하다며 계속 자료타령을 한다.
  이럴 때 나는 “바닷물을 끓이려 하지 마라.”라고 이야기한다. 어떤 주제라도 관련된 자료는 찾을수록 끝이 없고, 아무리 찾아도 딱 들어맞는 것은 대개 없다. 이럴 경우, 무작정 자료를 찾기보다는 일정 시점에서 찾기를 멈추고, 사용 가능한 자료를 조합해서 목적에 맞는 정보를 적시에 정리하는 것이 보고서 작성의 노하우다.

  기업은 궁극의 진리를 탐구하는 곳이 아니다. 주어진 상황에서 기능한 합리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는 곳이다. 그러니 사안에 맞는 해결책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조사를 하건, 보고서를쓰건, 어떤 일을 하건 이 점을 명심하라.
(P.100)


(호기심이 없으면 발전이 없다)

능력 있는 직원은 새로운 일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무능한 직원은 새로운 일을 맡을까 두렵다.

  크든 작든 자기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은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동네 슈퍼를 보더라도 잘되는 집은 주인부터 다르다. 항상 호기심을 가지고 손님을 관찰하고, 잘 팔리는 물건을 파악하고, 진열하는 방법을 고민한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능력 있는 직원은 호기심이 있다. 기존에 하던 일도 더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고, 새로운 일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반면 능력이 없는 직원은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고 매사를 귀찮아한다.
  관찰은 의심을 낳고, 의심은 분석을 낳고, 분석은 또 다른 창조를 낳는다. 자기분야에서 성공하려면 호기심을 가져라. 호기심은 창조의 엔진을 돌리는 힘이다.
(P.111)


(익숙하지 않은 것도 적극적으로 접하라)

익숙한 것만 해서는 넓어지지 않는다.
적극적 태도로 새로운 일을 통해 배워라.

  사회생활을 하면서 익숙하지 않은 일을 자주 접하게 된다. 평소 해보지 않았거나 관심이 별로 없던 분야의 일을 하게 될 때다. 이럴 때 사람들의 반응은 다르게 나타난다. 한번 부딪쳐 보려는 사람과, 새로운 것에 대해 부담을 느끼고 일단 피하려는 사람으로 나뉜다.
  이것은 능력이 아니라 태도의 차이다. 적극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은 새로운 일을 통해 배우고 경험의 폭을 넓혀 나간다. 반면 소극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은 편안하지만 시야가 좁아지기 쉽다. 이것은 업무뿐 아니라 평소의 생활과도 관련이 있는 문제다.

  업무도 마찬가지다. 평생 익숙한 일만 하고 살 수는 없다. 물론 매일매일 새로운 일만 접한다면 스트레스를 견디기 어려을 것이다. 그러나 항상 익숙한 일만 하고, 익숙한 사람만 만나서는 변화와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새로운 일에 대한 부담감과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있다. 사람들에 따라 '적극적이냐, 소극적이냐' 하는 조그만 태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이 작은 차이가 시간이 흐르면 커다란 간격이 된다.
(P.120)


(논리적으로 이해시키되 감정에 호소할 줄 알이야 한다)

사람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논리적 설득보다 감정적 호소에 더 강력하게 반응한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특징은 사고능력과 복잡한 감정이다. 흔히 좌뇌, 우뇌로 표현되듯이 이성과 감성은 인간의 정신을 양분한다. 물론 동물들도 두려움, 슬픔, 분노와 같은 단순한 감정은 느낀다. 그러나 아름다움, 애상, 그리움과 같은 복잡한 감정은 인간의 고유한 것이라고 한다.
  사람들을 움직일 때 논리적 이해는 필수적이다. 그리고 감 정적 호소가 따른다면 더욱 효과적이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감정적 측면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감정에 호소할 줄 알
이야 한다. 감정에 호소한디는 것은 값싼 동정심을 유발하는 것과 다르다. 상대방에 대한 감정이입을 의미한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듯이, 인간은 논리와 감정의 두 날개로 난다. 그리고 비즈니스 세계에서도 의외로 감정의 날개는 논리의 날개보다 강한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비즈니스 세계 역시 인간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논리적인 설득에 반응하지만, 사실 감정적 호소에는 더 강력하게 반응한다. 회의에서 논리적으로 설득되는 것을 납득하는 사람일지라도, 감정적으로 모욕당한 것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잘 생각해보라.
(P.171)


(일하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을 구별하라)

말하는 사람들이 큰소리치는 것에 현흑되지 말라.
일하는 사람을 알아보고 그를 역할모델로 삼아라.

회사는 일하는 곳이다. 일하는 곳에는 일하는​ 사람이 많아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말하는 사람이 많 고, 심하면 말하는 사람이 큰소리치는 경우도 있다. 정치적 집단이나 시민단체는 말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니 말하는 사람들이 큰소리치는 것이 당연하지만, 일하는 회사에서도 이런 일은 종종 있다.
  말하는 사람들이 큰소리치는 회사가 생기는 이유는 무엇일 까? 그것은 조직이 커질수록 일 잘하는 사람보다는 말 잘하
는사람이 눈에 잘 띄기 때문이다.


(상사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라)

욕먹던 상사만큼 존경받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상사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시야를 넓혀준다.

  회사에서 일을 하다 보면 역할에 따라 생각이 다르다는 점을 자주 느끼게 된다. 각자 자기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때문이
다. 직급에 따른 생각의 차이가 때로는 심각한 갈등을 빚기도 한다. 대개 윗사람들은 아랫사람들이 말을 안 듣는다고 불만 이고, 아랫사람들은 윗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윽박만 지른다고 불만을 터뜨리는 경우가 많다.
  입장에 따른 생각 차이를 완전히 해소하기는 어렵다. 어차피 사람은 자기 입장에서 사물을 보는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 문이다. 그러나 상사를 이해하고 상사의 입장에서 사물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소위 역지사지(易之思之)라고 입장을 바꾸어 보면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마련이다. 상사도 자기 입장을 이해해주는 사림에게 신뢰가 가기 마련이다.

  리더십은 하루아침에 생겨나지 않는다. 상사의 리더십을 욕하기는 쉬워도, 욕먹던 상사만큼 존경받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평소에 상사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상사의 리더십을 관찰해서 타산지석으로 삼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P.206)


(좋은 행동은 의식적으로 습관으로 만들어라)

행동은 의식적으로 하는 것이라 꾸준하지 못하다.
좋은 것은 습관으로 만들어 무의식적으로 행해야 한다.

  오래 사는 사람의 특징 중 하나가 좋은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조금 먹고, 많이 움직이는 것이 대표적인 좋은 습관이다. 마찬가지로 성공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좋은 습관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매시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게으름 피우지 않고, 사람을 진실하게 대하며, 새로운 지식에 대해 개방적이다.

  습관은 무의식적으로 하는 것이다. 반복되면서 특별한 의지를 요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단 습관이 되면 꾸준히 그러나 분명하게 사람을 바꾸는 힘이 나온다. 반면 행동은 의식적으로 하는 것이다. 행동을 할 때마다 의지가 필요하고 의식적으로 반복해야 한다. 행동을 꾸준히 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좋은 행동보다 좋은 습관이 강력하다. 따라서 좋은 것은 습관으로 만들어야 한다.

  좋은 것은 의식적으로 습관으로 만들어라. 습관은 무의식적으로 좋은 것을 반복하게 하는 힘이 있다. 그리고 한 번 습관 이 되면 의식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오래가는 법이다. 반면에 나쁜 습관은 빨리 고치는 것이 좋다. 나쁜 습관은 무의식중에
자신을 좀먹기 때문이다. “좋은 습관은 최고의 시녀지만, 나쁜 습관은 최악의 주인입니다.”리는 말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보라.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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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ta meta ta physica)
(철학사상 별책 제7권 제9호)
전헌상 /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 228쪽

(2018. 1. 31.) 



 <형이상학> 요약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가장 보편적이고 일차적인 진리들에 대한 사유의 기록이다. 그는 모든 앎 중에서 최상의 종류의 앎이 어떤 것인가를 묻고, 그것은 일차적인 원리와 원인들에 대한 앎이라고 주장한다. 이 앎에 대한 추구의 과정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있는 것으로서의 있는 것에 대한 지식의 존재를 선언하고, 그것의 주요 주제와 범위를 논구한다. 이 논의는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들의 일차적 원리, 즉 실체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형이상학>의 핵심을 이룬다고도 할 수 있을 이 탐구의 과정에서, 기체, 질료, 형상, 본질, 보편자, 능력, 활동 등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주요 개념들이 차례로 등장하고, 분석되고, 연관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러나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또다시 감각적인 실체의 분석에서 시작해 비감각적이고 운동하지 않는 실체의 탐구로 나아간다. 그에게 있어 이 실체는 신이며, 신에 대한 그의 논구는 종종 그의 형이상학적 탐구의 종착지로 간주되고 있다.
(P.4)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과 관련된 가장 흥미로운 사실 중의 하나는 아마도 ‘형이상학’이라는 말 자체가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점일 것이다. ‘형이상학’에 해당하는 희랍어 표현 ‘ta meta ta physica’는 후대의 한 편집자 — 통상 로도스의 안드로니코스로 추정된다 — 에 의해 붙여진 이름일 뿐,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형이상학> 안에 포함된 내용을 지칭하기 위해서건, 혹은 그 내용이 다루고 있는 철학의 분야를 지칭하기 위해서이건, 그 표현을 사용한 적이 없기때문이다. ‘ta meta ta physica’가 정확히 어떤 의도로 붙여진 제목인가도 논란거리이다. 직역하면 이 표현은 ‘자연적인 것들 다음에 오는 것들’을 의미한다. 한 가지 해석에 따르면, 이 표현은 <형이상학>이 ‘자연적인 것들을 넘어서 있는 것들’, 혹은 자연학적 탐구 다음에 탐구되어야 할 것들을 주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반면 또 하나의 해석은 문제의 표현이 순전히 편집과정과 관련된 우연적 사실, 즉 <형이상학>의 필사본이 <자연학>의 필사본의 바로 다음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붙여진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어느 해석이 옳은가에 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P.4)


  편집자의 손을 거쳐 우리에게 전해진 <형이상학> 텍스트는 모두 열네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권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권(A)은 도입부의 역할을 하며, 여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지혜’(sophia) 개념을 명확히 규정하면서, 철학사적 조망을 덧붙이고 있다. 2권(α)은 주로 방법론에 관한 논의를 담고 있는 짧은 논고이고, 3권(B)은 일련의 철학적 아포리아들의 모음이다. 4권(Γ)에서 비로소 형이상학적 논의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는데, 우선 있는 것으로서의 있는 것을 탐구하는 학문의 존재가 천명되고, 이어 모순율에 관한 논의가 이어진다. 5권(Δ)은 일종의 철학 용어 사전으로, 30여개의 철학적 개념이 설명되고 있다. 6권(Ε)은 있는 것으로서의 있는 것에 대한 학문을 다시 짧게 다루고 있다. 이어지는 7(Ζ), 8(Η), 9(Θ)권은 통상 형이상학의 핵심 내용으로 간주되는 것으로, 실체라는 공통적 주제를 다루고 있다. 흔히 고대 철학에서의 에베레스트 산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7권은, 실체로 간주되는 네 가지 후보에 관한 복잡한 논의들을 그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 논의는 8권에서 계속 이어지며, 9권에서는 능력(dynamis)와 활동(energeia)의 구분이 도입되면서, 7, 8권에서 제기된 여러 문제들이 새로운 관점에서 조망되고 또 해소된다. 10(Ι)권은 ‘하나’에 관한 논의들을 포함하고 있고, 11권(Κ)은 자연학의 몇몇 부분의 요약으로 구성되어 있다. 12권(Λ)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시 실체의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는데, 여기에서의 논의는 후반부에서 신에 대한 논의로 종결된다. 13(Μ)권과 14(Ν)권은 수학적 존재와 이데아에 관한 논의를 포함하고 있다.
(P.5)


  <형이상학>은 하나의 일관된 계획을 따라 조직적으로 쓰인 저술로 보기 어렵다.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인 상호참조가 지속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체적으로 <형이상학>은 독립적인 소논문들의 결합체라는 인상을 준다. 개별 논의들의 구조 역시 단순치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그 논의들은 종종 그 안에 다양한 층위(層位)와 단계(段階)를 포함하고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내용을 오랜 시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수정하고 보충해 나갔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정은 <형이상학>이라는 텍스트에 접근하는 독자에게 추가적인 주의와 섬세성을 요구한다. 텍스트의 어떤 한 부분에 나타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언명을 단순히 그의 최종 입장으로 간주할 수 없으며, 그것과 충돌하는 언명을 다른 부분에서 발견했을 때 이것을 치명적 내적 모순으로 쉽게 치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은, 그래서,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철학적 사유의 난해성뿐만 아니라, 그 사유를 담고 있는 텍스트 자체의 복합성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 중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영역으로 남아 있다.
(P.6)


지혜(sophia)

  <형이상학>I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앎의 다양한 형태들을 구분하고 그 최상의 단계를 ‘지혜’로 규정한다. 지혜는 최상의 원리들과 원인들에 대한 앎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정의가, 우리가 통상 최상의 지식에 귀속시키는 여러 속성들에 잘 부합한다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련의 철학사적 고찰을 통해 기존의 철학자 — 지혜를 추구하는 자— 들이 탐구 속에서 점차로 드러난 것이 결국 자신이 <자연학>에서 구분했던 네 종류의 원인이었음을,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그들이 추구했던 것이 지혜였음을 보이고자 한다.​
​(P.11)


실체(ousia)

  실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의 중심 개념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혹은 일차적 의미에서 있는 것이 무엇인가가 존재론의 핵심 물음이라면, 그에게 있어서 그 물음은 무엇이 실체인가라는 물음으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실체 개념의 중요성은 이미 <범주론>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난다. 그곳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있는 것’이 이야기되는 여러 가지 방식을 구분하면서, 여러 범주들 중 실체의 우선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나아가 실체들을 제1실체(개체들)와 제2실체(종, 유들)로 구분하고, 전자의 우선성을 주장한다. 결국 <범주론>에서 가장 일차적인 의미에서 존재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제1실체라 부르고 있는 개체들이다.
  <형이상학>에서 개진되고 있는 실체론은 <범주론>의 그것과는 몇 가지 중요 한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무엇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는 더 이상 <범주론>에서 제1실체로 불렸던 것들, 즉 구체적 개체들을 일차적인 의미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주장하지 않는다. 그 지위는, <형이상학>에서는, 형상이 넘겨받게 된다. 형상과 질료의 구분이 실체의 문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점도 <형이상학>에서의 실체론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P.11)


능력(가능태)(dynamis)

  활동(energeia)과 대비되는 개념. 능력과 활동의 구분은 ‘X가 있다’— ‘혹은 그것이 X이다’ — 라는 언명이, 때로는 X가 그것을 X이게 하는 고유의 활동을 현실적으로 하고 있다는 의미로, 때로는 단지 그것이 그런 활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응한다. 전자의 경우 X는 능력으로서(dynamei) — 가능적으로 — 있으며, 후자의 경우 X는 활동으로서(energeiai) — 현실적으로— 있다.
  능력과 활동의 구분은 실체의 본성과 관련된 몇몇 주요한 문제들을 해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우선 이 구분은 형상과 질료를 각각 주어진 대상의 활동과 능력으로 이해함으로써, 형상과 질료가 어떻게 결합해서 단일한 대상을 형성하는가의 문제를 해소할 수 있도록 만든다. 이 구분은 또한 정의의 단일성, 즉 어떻게 정의의 복합적 요소들이 하나의 통일체를 형성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제공하게 된다.
(P.13)


신(theos)
  신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들은 종종 그의 형이상학 체계의 정점으로 간주된다. 신에 대한 그의 관심은 궁극적으로, 영원하고 부동하는 존재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한다. 흔히 <형이상학>의 핵심 부분이라고 간주되는 VII-IX의 논의들은 기본적으로 감각적 대상들을 그 주제로 삼고 있다. 실체에 대한 분석, 능력-활동의 구분은 모두 우리 주위에서 일상적으로 관찰되는 대상들, 일반적으로 실체라 간주되는 것들의 특성들에 대한 철학적 고찰들의 결과이다. 그렇다면 이런 감각적
대상들이 존재하는 것들의 전부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감각적이고 운동을 하는 대상들의 첫 번째 원인으로서의 어떤 존재가 요청된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 존재가 가져야만 할 여러 특성들을 사변적으로 따져간다. 그리고 그는 그 특성들을 만족시키는 존재는 신외의 다른 것일 수 없다고 결론 내린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신은 그 자신은 다른 것에 의해 운동하게 되지 않으면서도 다른 것들을 운동시키는 존재이다. 신의 고유한 활동은 사유이다. 그런데 신적 사유는 최상의 사유이어야 하고, 최상의 사유는 최상의 대상에 대한 사유이어야 하므로, 신적 사유는 곧 자신의 사유에 대한 사유가 된다.
* 사변-적思辨的 : 경험에 의하지 않고 순수한 이성에 의하여 인식하고 설명하는. 또는 그런 것.
(P.14)


  “모든 인간들은 본성상 알기를 원한다.”라는 유명한 구절로 시작되는 <형이상학>의 모두(冒頭)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게 가능한 다양한 앎의 형태를 발생적으로 구분한다. 이 발생적 계열은 감각에서 시작해서 기억, 경험을 거쳐 기술로 이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중에서 특히 경험과 기술의 차이를 집중적으로 논의하면서, 여기서 드러난 기술의 특징을 궁극적으로 지혜의 본성과 연결시킨다.
(P.35)


기술은 경험을 통해 얻어진 여러 관념들로부터 유사한 것들에 대한 단일한 보편적 판단이 산출되었을 때 생겨나게 된다.(981a1-12)

  기술은 경험과 많은 유사성을 가지며, 사실 후자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경험이 단순히 다수의 사례들에 대한 단일한 판단이고, 그 판단의 근거가 그 사례들 각각에 대해서 과거에 그 판단이 참이었다는 사실이라면, 기술은 어떤 특정한 유형에 대한 단일한 판단이고, 그 판단은 일차적으로 개별적 사례들이 아니라 그것들을 하나로 묶는 특정한 유형에 적용되는 것이다.
(P.37)


혜(sophia)

  경험에 대한 기술의 우월성에 대한 고찰은 앎 일반에 있어서의 우월성의 기준에 대한 고찰로 나아간다. 이 고찰은 최상의 종류의 앎이 있다면 그것이 어떤 성격을 가질 것인가를 우리에게 알려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혜가 바로 그 최상의 앎이라고 주장한다.
(P.40)


  난관에 부딪혀 경이로움을 느끼는 사람은 자신이 무지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무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사람들이 철학을 하기 시작했다면, 앎을 위해서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지 어떤 쓸모를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982b11-21)

  철학, 즉 지혜의 추구는 경이로움으로부터 출발한다. 이해의 범위를 벗어나 있는 것과 맞닥뜨렸을 때 느끼는 경이감, 그것은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과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하는 욕구를 동시에 유발한다. 그리고 인간은 그 난관(aporia)를 벗어나는 일이 가지는 어떤 생활 속에서의 유용성 때문이 아니라, 앎 자체에 대한 욕구 때문에 지혜를 추구하는 것이다. 지혜의 추구는 또한 진정한 자유의 실현이기도 하다.
(P.44)


​  원리가 되는 원인들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함은 분명한데 (왜냐하면 우리는 각각의 것에 대해서 그것의 최초의 원인을 알고 있다고 생각할 때에야 비로소 그것을 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원인들은 네 가지 방식으로 이야기되는데, 그 하나의 원인은 실체, 혹은 본질이고 (왜냐하면 “왜”는 각각의 것에 대한 설명으로 환원되고, 최초의 “왜”는 원인이자 원리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질료, 혹은 기체이며, 세 번째는 운동이 비롯하는 바, 네 번째는 이것에 대립되는 원인, 즉 목적, 혹은 이다.(왜냐하면 이것이 모든 생성과 운동의 끝점이기 때문이다.) (983a24-32)
(P.45)


  보편적 지식의 대상이 되는 비감각적인 존재, 이것을 플라톤은 이데아라 불렀다. 그는 모든 감각적 대상들은 그것에 대응되는 이데아를 따라 불린다고 말했다. 즉 F라는 성격을 갖는다고 이야기되는 감각적 대상은 바로 그것이 F의 이데아와 어떤 방식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 된다는 것이다. 감각적 대상에서 구현되는 F라는 성격과 F의 이데아 사이에 성립하는 이 관계를 플라톤은 ‘분유’(methexis)라 불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관계의 원형이 이미 피타고라스학파의 이론에서 발견된다고 말한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사물들이 수들에 대한 모방(mimēsis)을 통해 그것들의 본성을 가진다고 이야기했는데, ‘분유’는 이 ‘모방’을 이름만 바꾸어 놓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방’, ‘분유’가 정확히 어떤 관계인가에 대한 확정된 답을 그들은 주지 않았다.


  <형이상학>을 통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이 수행하고 있는 탐구를 여러 가지의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그것은 ‘지혜’, ‘철학’(지혜의 추구), 그리고 종종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지식’으로 불리며, 때때로 ‘제일철학’(protē philosophia)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일철학의 일차성에 대해,일견 독립적으로 보이는, 두 가지 상이한 방식의 설명을 우리에게 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그는 제일철학을, 한편으로는 “있는 것으로서의 있는 것에 대한 지식”으로, 또 한편으로는 “분리되어 있고 운동하지 않는 것에 대한 지식”으로 규정하고 있다. 일견 제일철학에 관한 상기의 두 규정은 전혀 다른 종류의 일차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자의 규정에 따르면, 제일철학은 그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아우르는 가장 보편적인 진리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차적이며, 후자의 규정에 따르면, 그것은 감각적 실체들 너머에 존재하는 부동의 실체에 대한 진리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차적이다.
(P.56)


  형이상학적 탐구는 난점(aporia)들의 파악에서 출발한다. 즉 그 탐구의 출발점은 그것에서 문젯거리가 되는 것들을 보다 분명하고 철저하게 기술하는 일이다.
  철학적 난점은 일종의 결박이며, 철학적 탐구는 우리로 하여금 그 결박으로부터 풀려나도록 하는 작업이다. 철학적 난점에 직면한 사람은 그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되었음을 깨닫는다. 난점에 직면한 사람은 자신이 결박되어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이 결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을 옴짝달싹 못하게 하고 있는 결박의 성격을 분명하게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주어진 주제에 관한 난점들의 정확히 어떤 측면이 그의 사고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도록 만들고 있는지를 분명히 파악해야만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상반되는 의견들의 구체적 내용과 그 의견들을 그럴법한 것으로 만들고 있는 근거들이 명료하고 철저하게 기술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간과되어온 주제들이 있다면, 그것 역시 논의의 장으로 불러들여야 할 것이다.
(P.57)


  있는 것으로서의 있는 것에 대한 지식이 하나의 독립적인 지식의 갈래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그러나, 한 가지 난점이 해소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난점은 ‘있는 것’이라는 표현이 다의적이라는 사실이다. 어떤 것이 ‘있는 것’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방식은 단일한 것이 아니라 다양하다.
  ‘있는 것’은 분명 다의적이다. 그러나 그 다의성은 아무런 연관 없는 여러 의미가 우연히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그러한 극단적이고 우연적인 다의성이 아니다. ‘있는 것’의 다의성은, 그 다양한 의미가 그곳으로 수렴되는 하나의 초점, 그 다양한 의미의 원천이 되는 하나의 핵심적 의미와 관련되어 있다. 바로 이러한 초점적 의미가 있음으로 해서, 있는 것으로서의 있는 것에 대한 단일한 독립적 지식이 성립할 수 있게 된다.
(P.59)


​  모든 탐구 중에서 가장 어렵고(chalepōtaton) 참을 알기 위해 무엇보다도 필수적인(pros to gnōnai talēthes anagkaiotaton) 것은, 있는 것과 하나가 사물의 실체인지, 그리고 그것 각각이,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이고 하나인지, 혹은 우리가 무엇이 있는 것이고 하나인지를 밑에 놓인 다른 어떤 본성이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탐구해야 하는지이다.(1001a4-8)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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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주제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그것의 원리들을 아는 사람이다. 그런데 철학자는 가장 보편적인 대상 — 있는 것으로서의 있는 것 — 에 대한 앎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며, 가장 보편적인 대상에 대한 지식의 원리들은 모든 원리들 중에서도 가장 확실한 원리들이다. 따라서 철학자는 가장 확실한 원리가 무엇인지를 말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그것에 대해 오류를 범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하며, 단순히 참으로 가정된 것이 아니라 진리성을 확정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어야 하며, 있는 것들에 대한 모든 지식의 기반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이러한 기술에 합당한 원리일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후대에 ‘모순율’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명제를 그 답으로 제시한다. 모순율은 논증이라는 것을 성립시키는 데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역할을 하는 명제이며, 따라서 모든 공리들의 원리라고도 말할 수 있다.
(P.67)


  모든 현상이 참이라는 주장에 이르는 논리에는 중요한 틈이 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x가 어떤 사람에게는 F라는 속성을 가지는 것으로, 또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F라는 속성을 가지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사실로부터, x가 동시에 F이고 -F인 것이 참이라고, 혹은 x가 F인 것도 참이고 x가 -F인 것도 참이라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x는 특정한 어떤 조건하에서 F인 것이고, 그 조건과는 다른 어떤 조건 하에서 -F인 것이다. 이 사실을 두고 마치 x가 어떤 동일한 지평에서 F이자 -F인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된다.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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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상과 질료(hylē)의 구분이 실체의 문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점도 Met.에서의 실체론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Cat.에서는 그 구분 자체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형상-질료의 구분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적 입장의 변화에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미쳤는가는 그의 사유 전반에 대한 고찰 위에서 신중하게 다루어져야 할 중요한 문제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할 만 한 점은 Cat.에서와는 달리 Met.에서는 단순히 “실체는 무엇인가?”가 아닌, “X의 실체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물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Cat.에서 존재하는 것들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로 간주되었던 구체적 개체들이, Met.에서는 더 이상 나누어질 수 없는(individuus) 최종적 단위가 아닌, 존재론적으로 더 기본적인 것으로 취급되어야 할 어떤 요소들로 구성된 복합체로 파악된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구체적 감각적 개체들은 형상과 질료의 복합체인 것이다. 또 다시 우리는 형상-질료 구분의 무게를 확인하게 된다. ​
​(P.92)


  <형이상학>에서 무엇이 실체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그의 최종적 답은 극히 우회적이고 복합적인 방식으로 주어진다. 그는 “이것이 최초에 제기했던 문제에 대한 나의 답이다.”라는 식의 명시적인 신호를 주지 않는다. 통상 그의 최종적 답으로 간주되는 것, 즉 형상(eidos)은 애초에 그가 실체의 후보로 제시하는 네 가지 중에 포함되지도 않는다. 형상은 본질에 대한 그의 길고 복잡다단한 논의의 과정 속에서 조금씩, 그것의 도입이 거의 계획되지 않은 것 같은 인상까지 주면서,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식으로 논의를 전개시켜 나간 것일까? 이것은 그의 존재론뿐만 아니라 그의 철학적 방법론과 관련해서도 흥미로운 문제이다. 이 의미심장한 물음에 대한 답이 무엇이든, 그 결과로 우리가 가지게 된 것은, 종종 “고대 철학의 에베레스트 산”이라고까지 불려지는 Met. VII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성찰이다.
(P.93)


​  진실로 옛날에도 지금도, 영원히 탐구되고 영원히 당혹케 하는 문제, 즉 있는 것은 무엇인가의 문제는 곧 실체가 무엇인가의 문제이다.
(1028b2-4)

  있는 것이라는 규정이 일차적으로 실체에 적용되기 때문에, 형이상학의 영원한 문제,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결국 실체가 무엇인가의 문제로 귀착된다.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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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선 어떤 대상의 ‘본질’이라고 이야기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에서 시작한다. 본질 개념 자체에 대한 논의는 그러나 곧 그것이 적용되는 대상에 대한 논의로 전이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과연 복합체가 본질을 가지는가라는 물음을 통해서, 어떤 것이 일차적인 의미에서 본질을 가지기 위해서 만족시켜야 할 조건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차후에 그 의미가 좀 더 심화된 수준에서 고찰되게 될 여러 명제들을 제시하게 된다. 예를 들어, 일차적 의미에서 본질을 가지는 것은 여러 범주들 중 실체뿐이며, 일차적 의미에서의 정의의 대상이 되는 것이며, 비우연적인 단일성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복합체가 일차적 의미에서의 본질을 가질 수 없다는 점에 대한 확장된 분석(VII5), 본질과 그것이 귀속되는 대상 간의 동일성에 대한 논의(VII 6)를 거친 뒤, 아리스토텔레스는 생성에 대한 분석(VII 7-9)에 이어, 정의(horismos)의 부분들과 통일성에 관한 논의(VII 10-12)로 나아간다. 이 과정 속에서 본질이라는 주제는 점차적으로, 실체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관련해서 그가 (Met.에서의) 제시하고 있는 최종적 답이라고 통상 간주 되는 것, 즉 형상(eidos)에 대한 논의로 확장된다.
(P.103)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정의는 본질의 언어적 상관물(linguistic correlate)이다. 즉 정의는 본질을 드러내는 언어적 표현이며, 역으로 본질은 정의를 통해 표현되는 속성이다. 따라서 만일 X의 실체가 X의 본질과 동일시된다면, X의 실체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우리는 ‘X’의 정의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통해 규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그에게 있어서 정의는 — 적어도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의 정의는 — 단순히 주어진 단어의 의미를 밝히는 복합적 언어적 표현 이상의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의가 되기 위해서 그러한 표현이 만족시켜야할 특정한 조건들이 있으며, 오직 실체를 지칭하는 이름만이 그러한 정의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P.108)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선 생겨남의 일반적 구조에 대한 논의 로부터 시작한다. 생겨남에는 세 가지의 요소가 개입된다. (1)생겨나는 것 (2)그 생겨남이 비롯하는 바, 그리고 마지막으로 (3)그 생겨남을 야기하는 것. 그는 특히 (1)과 (2)의 항목에 초점을 맞추어, 그것들을 형상과 질료의 구분과 연결시켜 설명한다. 생겨남은 오직 감각적 대상들에게서만 일어나는 현상이며, 생겨남의 결과물은 어떤 구체적 개체이다. 그런데 이 구체적 개체는 형상과 질료의 결합체이다. 이 구분은 생겨남의 설명 구조와 다음과 같이 관련된다. 생겨남은 반드시 미리 있는 어떤 것 — (2)의 요소 — 을 필요로 하는데 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바로 질료이다. 그렇다면 생겨나는 것 —(1)의 요소 — 은 무엇인가? 그것은 형상과 질료의 결합체, 특정 질료 속
에서 현실화된 특정 형상이다.
(P.119)​


  생겨남은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한다. 즉, 생겨남은 항상 무 인가로부터의 생겨남이고, 무엇인가의 생겨남이며, 무엇인가에 의한 생겨남이다.​

생겨나는 것은 모두 어떤 것에 의해서(hypo tinos), 어떤 것으로부터(ek tinos), 어떤 것(ti)이 된다.(1032a13-14).​

  완전한 무로부터의 생겨남은 불가능하다. 어떤 것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생겨남의 과정을 통해 지속하는 어떤 것이 이미 존재하고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생겨나는 것의 질료이다.
(P.119)​


  엄밀한 의미에서 형상은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본질도 마찬가지이다. 생겨남은 그 본성상 어떤 것으로부터의 생겨남이므로, 형상 역시 생겨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이 무엇으로부터 생겨난 것인가를 묻게 될 것이고, 그 답으로 주어진 것에 대해 또다시 그것은 또 무엇으로부터 생겨났는가를 묻게 될 것이다. 결국 우리는 무한퇴행에 빠지게 된다.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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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대상의 질료적 부분과 형상적 부분을 구분 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그 대상에 있어서 정의의 대상이 되는 것이 어떤 부분인가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대상의 본질을 이루는 부분이 그것의 실체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본질은 정의에 의해서 포착되는 것이고, 따라서 어떤 대상에 있어서 그것에 대한 정의 속에서 포착되는 것만이 그 대상의 본질이 될 것이고,그것이 실체가 될 것이다. 이제 여기에 형상-질료의 구분이 도입된다. 감각적 대상들은 형상과 질료로 이루어지는 복합체이며, 이 둘 중 정의에 의해 포착되는 부분은 형상이다. 따라서 이 형상이 그 대상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며, 대상 전체가 아니라 그것의 형상이 일차적 실체가 되는것이다. 감각적 개체를 가장 기초적인 존재론적 단위로 생각했던 <범주론>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가 <형이상학>에서는 중대한 변화를 노정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P.128)


  아리스토텔레스는, 본질에 대한 논의 과정 속에서, 엄밀한 의미에서 정의의 대상이 되는 것은 실체라고 말한 바 있다. 이제 형상과 질료의 구분은 정의의 대상에 관한 물음에 새로운 차원을 더하게 된다. 감각적 실체들 — 통상적으로 실체라고 이야기되는 것들 — 이 형상과 질료로 이루어진 복합체라면, 그리고 엄밀한 의미에서의 정의의 대상이 되는 것이 실체라면, 우리는 형상, 질료, 그리고 양자의 복합체 중 어떤 것이 엄밀한 의미에서의 정의의 대상이 되는 가를 물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답은 명확하다. 오직 형상만이 정의의 대상이 되며, 질료는, 그것이 지성적 질료이건 감각적 질료이건, 정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관이나 감각에 의해 포착된다.
(P.131)


  진정한 의미에서의 실체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단일성을 이루는 것이다. 단일성을 성취하지 못한 것은 단지 더미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단지 더미에 불과할 수 있었던 것을 결합시켜, 진정한 의미에서의 하나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동물들을 이루는 여러 자연적 원소들,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구성되는 팔, 다리, 등등의 신체의 부분들을 결합시켜, 상호 연관된 방식으로 작동하는 하나의 유기체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그 동물의 영혼이다. 그렇다면 통일체를 이루고 하나의 것으로서 활동하는 것들이 실체의 대표적 예들이 될 것이라면 ―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그 대표적인 예들은 생물들이다 ― 우리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한 존재들을 그러한 단일한 존재로 만들어 주는 것은, 그 존재 전체가 아니라, 그것의 형상 ― 동물의 경우에는 영혼 ― 이므로,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일차적 의미에서 실체라 불려야 할 것은 그것의 형상이라고 말이다.
(P.143)


  다음의 인용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왜 사람이 있는가?” 혹은 “왜 (그것이) 사람인가?”와 같은 질문은 사실 “왜 이러이러한 질료가 사람이라는 상태로 있는가?”의 축약된 형태라고 분석한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문제의 질료를 그러한 상태로 있도록 만드는 원인의 역할을 하는 것이 될 것인데, 그 역할을 하는 것은 형상이다. 형상은, 질료가 특정한 규정성을 가진 어떤 것으로서 존재하도록 만드는 원인이라는 측면에서, 다시 한 번 실체로서의 위치를 확인받는다.

  ​
  Met. VII-IX에서의 실체에 관한 논의를 거치면서 과연 ‘하나’와 ‘있는 것’이 실체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답이 분명해진다. 그의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x의 실체라고 이야기 되어야 할 것이 x를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그리고 그것을 진정한 의미에서의 하나로 만드는 것이라는 점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x를 있는 것, 어떤 하나로 만드는 것은, ‘있는 것’ 자체, ‘하나’ 자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x를 있는 것으로, 그리고 어떤 하나로 만드는 것은, x 안에 내재하는 형상인 것이다.
(P.163)


​  신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들은 종종 그의 형이상학 체계의 정점으로 간주된다. 이 논의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Met. XII 6-10이지만, 그는 이미 여러 곳에서 그가 이 논의들을 지속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신에 대한 그의 관심은 궁극적으로, 영원하고 부동하는 존재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한다. 흔히 Met.의 핵심 부분이라고 간주되는 VII-IX의 논의들은 기본적으로 감각적 대상들을 그 주제로 삼고 있다. 실체에 대한 분석, 능력-활동의 구분은 모두 우리 주위에서 일상적으로 관찰되는 대상들, 일반적으로 실체라 간주되는 것들의 특성들에 대한 철학적 고찰들의 결과이다. 그렇다면 이런 감각적 대상들이 존재하는 것들의 전부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감각적이고 운동을 하는 대상들의 첫 번째 원인으로서의 어떤 존재가 요청된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 존재가 가져야만 할 여러 특성들을 사변적으로 따져 간다. 그가 보기에 그 특성들을 만족시키는 존재는 신외의 다른 것일 수 없다.
(P.168)


  만일 신이 우리는 가끔 가지는 좋은 상태에 항상 있다면, 이것은 경탄을 자아내는 일이며, 그것이 더 좋은 상태라면 더욱더 그러하다. 또 신은 더 좋은 상태에 있다. 또 삶은 신에게도 속한다. 사유의 활동이 삶이고 신은 바로 그 활동이기 때문이다. 또 신의 독립적 활동은 가장 좋고 영원한 삶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은 살아 있는 것이고, 영원하고, 가장 좋으며, 따라서 삶과 연속적이고 영원한 지속이 신에게 속한다고 말한다. ‘어떤 이것’이 신이기 때문이다.(1072b24-30)


​  우선 그것이 사유가 아니라 능력라면, 그것에게 있어 연속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피로한 일이어야 마땅하다. 그 다음으로, 그 경우 정신 이외에 보다 더 고귀한 어떤 것, 즉 사유되는 것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 사유함과 사유는 가장 나쁜 것을 사유하는 자에게도 속할 것이고, 따라서 이것이 피해야만 하는 것이라면, (보지 않는 것도 때로는 보는 것보다 나으니 말이다) 사유는 최선의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유는, 만일 그것이 최선의 것이라면, 자기 자신을 사유하며, 그 사유는 사유의 사유(noēseōs noēsis)이다.(1074b27-35) 

위의 인용문의 유명한 마지막 문장은 XII 9의 핵심적 명제로 간주된다. 동시에 그것은 고래(古來)로 가장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된 문장이기도 하다. 사유의 사유라는 귀결에 이르는 사고 과정은 비교적 선명하다. 정신에게 있어 최선의 상태가 사유 활동에 있다면, 그 사유의 대상은 그 사유 자체일 수밖에 없다. 정신의 사유 활동이 최상의 상태이고, 최상의 사유는 곧 최상의 대상에 대한 사유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유의 사유라는 개념이 신의 사유의 내용을 거의 공허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하는 점이다. 신적 사유의 내용이 오직 그 사유 자체라면, 그 결과로 우리가 가지게 되는 신의 모습은 ― 한 학자가 붙인 재미있는 호칭을 인용하자면 ― 일종의 “나르키소스-신”이다. 그는 오직 자기 자신만을 사유하며, 자신이 사유하고 있음만을 사유할 뿐이다.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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