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1 ​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 김정매 / 민음사 / 474쪽 ​
(The rainbow 1915)
​(2018. 2. 14.) 



  여자는 이와 다른 형태의 삶을 원했다. 그것은 피의 교접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여자의 집은 농장과 대저택이 있는 읍내와 신작로와 그 너머의 세계를 향했다. 여자는 일어서서, 도시와 관청이 들어서 있고 남자들의 활발한 활동이 전개되는 먼 세계를 바라보았다. 그곳은 마술의 나라로, 온갖 비밀이 알려지고 욕망이 성취되는 곳으로 보였다. 여자는 바깥을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남자들은 고동치는 생식의 열기에 등을 돌리고, 권력을 쥐고 창의적으로 움직였다. 아니, 생식의 열기를 뒤에 남긴 채. 그 너머의 세계에 속한 것들을 발견하고 그들의 시야와 활동 범위와 자유를 넓히려고 길을 떠나는 것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브랑원 집안 남자들은 생식의 충만한 삶을 향하여 안으로 고개를 돌렸으며. 그 삶은 생경한 그대로 그들의 혈관 속으로 흘러들었다.
  여자는 욕구에 못이겨 집 앞에 서서 남자들이 활동하는 세계를 전체적으로 바라보았고. 한편 남편은 뒷마당에 서서 하늘과 추수와 짐승과 토지 쪽으로 눈을 돌렸다. 아내는 남자들이 지식을 향해 투쟁해 나가며 성취한 결과를 보려고 애썼으며. 정복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바싹 귀를 기울였다. 아내의 깊고 깊은 욕망은 미지의 세계의 변두리에서 한창 벌어지고 있는 싸움터에 가 있었다. 그 아우성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기 때문이다. 아내는 전쟁에 대해 알고 싶었을 뿐만 아니라. 그 속에 끼어들어 싸우고 싶었다.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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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사는 아주 구차한 데다 남자로서 별로 능률적이지도 못했지만, 상류 인사들과 어울렸다. 여자는 목사의 아이들이 태어나는 것을 보았고. 엄마의 치마 끝을 졸졸 따라다니는 것을 눈여겨보았다. 그 아이들은 이미 자신의 아이들과는 구분되어 있었다. 하지만 왜 자신의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보다 열등해야 하나? 왜 목사의 아이들이 그녀의 아이들보다 우월한 위치를 차지해야 한단 말인가? 왜 처음부터 목사의 아이들에게 우월권이 부여되어야 하나? 그건 금전 탓도 아니요, 계급 탓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건 바로 교육과 경험의 문제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바로 이것을, 이 교육을, 이 고차원적인 존재의 형태를 자식들에게 부여해, 자식들도 지상에서 지고의 생을 누리게 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자식들은, 적어도 그녀가 애지중지하는 자식들은, 그 고장에서 내로라하는 활력 있는 사람들과 동등한 위치를 차지할 만한 완벽한 성품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뒤처진 채, 무명의 막일꾼으로 남을 수는 없었다. 왜 그들이 일생 동안 무명의 숨 막히는 생활을 해야 하나? 행동의 자유 없이 고초를 겪을 이유가 뭐란 말인가?(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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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랑원은 그 어떤 충동을 받아 아내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아직도 홑이불을 움켜쥐고 있는 아내의 손을 가만히 쥐었다. 아내는 회갈색 눈을 뜨더니 그를 보았다. 아내는 그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남자라는 건 알아보았다. 산고 중인 한 여자가 자신에게 임신을 시킨 사나이를 보는 그런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것은 비인성적인 시선이었고 극한의 순간에 수컷과 암컷 사이에 서 오가는 시선이었다. 아내는 다시 눈을 감았다. 펄펄 끓는 뜨거운 행복감이 그에게 도도히 몰려오더니 그의 심장과 내장을 다 태워버리고는 다시 무한의 공간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파열시킬 듯한 고통이 아내에게 다시 닥쳐왔을 때 브랑원은 그만 고개를 돌려버렸다.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괴로웠던 가슴이 평안을 되찾았으므로 마음은 기뻤다. 그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현관 쪽으로 걸어가 밖으로 나갔다. 브랑원은 얼굴을 쳐들어 비를 맞았다.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암흑이 계속 그를 내리친다고 느꼈다.
  밤이 눈에 안 보이게 그를 빠르게 후려치자, 브랑원은 말문이 막히고 압도당했다. 그는 겸허한 마음으로 집 안을 향해 몸을 돌렸다. 삶의 세계뿐 아니라 무한하고 영원하며 불변하는 세계도 있었던 것이다.
(P.145)


  "왜 그렇게 자주 나가세요?" 
  "당신이 날 원하지 않으니까."
  아내는 잠시 말이 없었다.
  "당신은 이제 나하고 같이 있는 걸 원치 않아요."
  브랑원은 깜짝 놀랐다. 아내가 이런 진실을 어떻게 알아 냈지? 나만의 비밀인 줄 알았는데.
  "저......"
  브랑원이 말을 시작했다.
  “무언가를 찾고 싶어서 그러시지요.”
  브랑원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랬던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그렇게 관심을 끌려고 하지 마세요. 당신은 어린애가 아니에요.”
  “난 불평하지 않아요.”
  브랑원이 대꾸했다. 그렇지만 자신이 불평한다는건 내 심으로 잘 알고 있었다.
  “관심을 충분히 못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지요? 얼마나 받으면 충분해요? 당신은 나의 관심을 충분히 못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나를 어떻게 아세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게끔 무슨 노력이나 해봤어요?"
  브랑원은 깜짝 놀라 어안이 벙벙해졌다.
  “당신의 관심이 적다고 말한 적은 없어요."
  브랑원이 대꾸했다.
  “난 당신이 날 사랑하려고 하는지 몰랐어요. 그래, 뭘 원하오?”
  "당신이 우리 관계를 좋지 않게 만들고 있이요, 관심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 내가 어떻게 당신을 원하겠어요?"
  “당신은 지금도 내가 당신을 원하는 걸 방해하고 있어."
   침묵이 흘렀다. 그들은 낯선 사람들이었다.
  “그래, 딴 여자를 원해요?"
  “아니, 내가 어떻게 다른 여자를 원하겠어요?”
  브랑원이 천천히 말했다.
  “당신 형처럼 말이에요.”
  브랑원은 부끄럽게 느끼며 잠시 잠자코 있었다.
  “그 여자가 어떻다는 거예요?”
  브랑원이 말했다.
  “난 그 여자가 싫었어요.”
  “아니, 좋아했지요.”
  아내는 물고 늘어지며 말했다.
  브랑원은 경이로워서 아내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아내가 그의 속마음을 그토록 태연스럽게 들추어내 말하다니. 그래 브랑원은 화가 치밀었다. 아내는 무슨 권리로 저렇게 떡하니 앉아서 이런 말들을 늘어놓는단 말인가? 저 여자는 분명 그의 아내인데, 무슨 권리로 남남처럼 이런 식으로 말을 한단 말인가?
  “난 싫었어요.”
  브랑원이 말했다.
  “난 여자를 원치 않아요.”
  “아뇨, 당신은 아주버님같이 되고 싶어 하지요.”
(P.166)


  남편이 들어왔다. 얼굴은 목제품처럼 생기가 없이 굳었고 옹고집에 차 있었다. 남편은 차를 마시려고 식탁에 앉아서 고개를 흉측스럽게 찻잔 위로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의 손은 찬물로 씻어 빨개졌고 손톱 안에는 흙이 동그랗게 끼어 있었다. 남편은 계속 차를 마셨다.
  애나가 남편에게서 참을 수 없는 점은 지금 같은 그의 부정적인 둔한 태도였다. 흙투성이의 추한 물건 같은 그 둔감성이었다. 남편의 마음은 자기 자신에게 몰두해 있었다 자신에게 골몰한 인간과 한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거북스러운일인가. 바로 마주 보는 자리에 보기 싫은 흉물이 편안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어떤 것도 남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자아 속으로 모든 것을 빨아들일 수 있을 따름이었다.
(P.280)


  남편이 자신에게서 해방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내에게도 궁극적인 해방이란 있을 수 없었다. 명확한 형태 없는 야릇한 상태로 아내는 생각만 간절히 하면서 그 고통 속에서 계속 지내야 했다. 아내는 마치 폭풍우 가운데서 이리 저리 불리는 따스하고도 광채 나는 구름 같았다. 따스한 몽롱함 가운데서 무궁한 풍요를 느꼈기에 아내의 영혼은 남편에게 큰 소리로 항의했다. 남편이 그녀를 못살게 괴롭히며 파괴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P.334)


  아내가 남편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을 때 남편의 표정은 변하지 않고 단지 더 강렬해질 뿐이었다. 얼굴은 한곳에 열중해 있어 뻘겋고 시커멨다. 인간의 얼굴이라기보다는, 무엇에 몰두한 강한 빛을 띠고 있었다. 어쩌다 남편과 시선이 마주치면, 남편의 눈에서 노란 불빛이 튀어나오면서 암흑이 덮쳐와 그녀의 의식을 몽롱케 했고 전기가 통하는 듯 느꼈다. 그러면 남편은 야릇한 미소를 살짝 지었다. 그녀는 최면술에 걸린 것같이 나른해서 눈을 돌렸다가 감아 버렸다. 그러면 둘은 팽팽한 어둠 속에 함께 잠겨 들었다. 남편에겐 한곳에 열중해 눈에 띄지 않는 검은 고양이 새끼와 같은 면이 있었다.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지만 서서히 그 존재를 느끼도록 해서 은밀하고도 강력하게 아내를 사로잡았다. 그는 아내에게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 속에 있는 그 어떤 것에 호소했다. 그러면 그녀의 어두운 무의식에서 그것이 나와 미묘하게 반응을 보였다.
  그들 부부는 절대로 빛 속에 있지 않고 평범한 낮의 뒤 안길을 끊임없이 찾아들면서 정열적이며 전기가 흐르는 암흑 속에 함께 머물렀다. 남편은 빛 속에서는 의식을 잃고 잠자는 것 같았다. 암흑이 남편을 자유롭게 했을 때만 아내가 남편을 알아보았고, 그러면 남편은 금빛처럼 달아오르는 눈으로 어둠 속에서 자신의 의도와 욕망을 직시할 수 있었다. 그러면 아내는 최면에 걸려서 남편의 꿰뚫는 듯한 거친 목소리에 그녀의 영혼이 부드럽게 뛰어오르며 응답했다. 암혹이 깨어나 전기가 통하고 미지의 암시가 압도적으로 밀려왔다.
  이제 와서야 그들은 서로를 진정 이해했다. 아내는 낮이요, 빛이었고, 남편은 옆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불과했으나 밤이 오면 관능적인 힘으로 압도해 왔다.
(P.394)


  “할머니, 누군가가 절 사랑하게 될까요?"
  "얘야. 널 사랑하는 사람은 많지 않니? 식구들이 전부 널 사랑하는데."
  “그렇지만 이다음에 내가 크면 누가 날 사랑할까요2”
  “그래, 어떤 남자가 널 사랑할 거야. 네 천성이 그러니까, 그런데 너에게서 뭘 바라서가 아니라 너 자체가 좋아서 널 사랑하는 사람이면 좋겠다. 우리 모두에게는 원하는 사람을 바랄 권리가 있으니까.”
  어슐라는 이런 말을 듣고 겁이 났다.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발밑에 짚을 땅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 할머니에게 꼭 달라붙었다. 그곳에는 평화와 안정이 있었다. 이곳 할머니의 평화로운 침실로부터 보다 더 큰 세계로 문이 열렸다. 그것은 아주 광활한 과거의 세계여서 그곳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이 자그맣게 보였다. 광활한 지평선 위에 사랑과 출생과 죽음과 삶의 작은 단위와 형상들이 널려 있었다. 위대한 과거 속에서 작은 개인이 중요하다는 점을 안 것은 커다란 위안이었다.
(P.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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