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김경하 / 문학동네 / 136쪽
(2018. 2. 4.) 


   
1793년에 제작된 다비드의 유화 <마라의 죽음>을 본다. 욕조 속에서 피살된 자코뱅 혁명가 장 폴마라의 모습이 그려져 있 다. 머리에는 터번처럼 생긴 수건을 두르고 있고 욕조 밖으로 늘어뜨려진 손은 펜을 쥐고 있다. 흰색과 청색 사이에 마라가 피를 흘리며 절명해있다. 작품 전체의 분위기는 차분하고 정적이다. 어디선가 레퀴엠이 들려오고 있는 것만 같다. 그를 찌른 칼은 화면 아래쪽에 배치되어 있다.
  나는 이미 여러 차례 그 그림을 모사해보았다. 가장 어려운 부분은 마라의 표정이다. 내가 그린 마리는 너무 편안해 보여서 문제다. 다비드의 마라에게선
불의의 기습을 당한 젊은 혁명가의 억울함도, 세상 번뇌에서 벗어난 자의 후련함도 보이지 않는다. 다비드의 마리는 편안하면서 고통스럽고 증오하면서도 이해한다. 한 인간의 내부에서 대립하는 이 모든 감정들을 다비드는 죽은 자의 표정을 통해 구현했던 것이다. 이 그림을 처음 보는 사람의 시선은 가장 먼저 마라의 얼굴에 머문다. 표정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리하여 시선은 크게 방향으로 움직인다. 한쪽 손에 들린 편지로 시선이 옮기지거나 아니면 욕조 밖으로 비어져나와 늘어진 다른 팔을 따라간다. 죽은 마리는 편지와 펜. 이 두 사물을 끝까지 놓치지 않고 있다. 거짓 편지를 핑계로 접근한 테러리스트는 답장을 쓰려던 마라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 마라가 끝까지 움켜쥔 펜이 차분하고 고요한 이 그림에 긴장을 부여한다. 다비드는 멋지다. 격정이 격정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건조하고 냉정할 것. 이것은 예술가의 지상 덕목이다.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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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는 주로  역사책이나 여행안내서를 읽는다. 일을 끝내고 돈을 받으면 나는 여행을 떠난다. 여행안내책자들은 복잡한 사실들을 간단하고 명쾌하게 축약해놓는다. 한 도시에는 수 십만 개 의 인생이 있고 수백 년의 역사가 있고, 인생과 역사가 교직하면서 만들어온 흔적이 있다. 그 모든 것을 여행안내책자 들은 단 몇 줄로 줄여버린다. 이를테면 파리에 대한 소개는 이렇게 시작한다. “파리는 세속적인 곳이라기보다는 종교적, 정치적, 예술적 자유의 성지이고 그 자유를 알리는 외침이거나 그것에 대한 숨은 바람이다. 파리는 관용의 정신으로 로베스피에르, 귀리, 와일드, 사르트르, 피카소, 호치민, 조이스, 그리고 호메이니와 같은 사상가, 예술가, 혁명가, 그리고 많은 비범한 사람들에게 망명처를 제공해주있다. 파리는 19세기의 뛰어난 도시계획의 훌륭한
산물이지만 파리의 음악과 예술, 극장이 그러한 것 처럼 건축물도 중세풍에서부터 아방가르드적인 것, 아니 아방 가르드를 넘어서는 것까지 다양한 양식의 건물이 어우러져 있다. 역사와 새로움, 문화와 문명 그 자체의 자기 인식인 파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 모두가 그것을 창조해냈을 것이다."
   파리에 대해서 더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 이런 까닦에 나는 여행안내서 읽기를 즐긴다. 그것은 역사서도 마찬가지이다. 압 축할 줄 모르는 자들은 뻔뻔하다. 자 신의 너저분한 인생을 하릴 없이 연장해가는 자들도 그러하다. 압축의 미학을 모르는 자들은 삶의 비의를 결코 알지 못하고 죽는다.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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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한 고객은 고흐를 좋아한다고 내게 말했 다. 나는 그녀에게 고흐의 풍경화와 자화상 중에서 어느 쪽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고객은 머뭇거리더니 자회상이 더 좋다고 말했다. 고호의 자화상에 탐닉하는 자들을 나는 유심히 바라본 다. 그는 고독한 사람이다. 자신의 내면을 한 번이라도 들여다본 사람이다. 그리고 그 경험이 고통스러우면서도 내밀한 쾌감이라 는 것을 이는 사람이다. 그리고 누군가 이런 질문을 내게 던진 다면, 그 역시 고독한 인간이다. 그러나 고독한 자들이 모두 내 고객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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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살해하도록 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나는 사람들이 무의식 깊은 곳에 김금해두었던 욕망을 끄집어내고 싶을 뿐이다. 일단 풀려난 욕망은 자기증식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상상력은 비약하기 시작하고 궁극엔 내 의뢰인이 될 소질을 스스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고객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되면 나는 그 사람을 만난다. 물론 사무실이 아닌 곳에서 말이다. 때로는 술을 마시기도 하고 함께 전시회나 영회를 보기도 한다. 드문 일이지만 정말 중요한 고객인 경우에는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이때 중요한 고객이란 많은 돈을 지불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내 창작에 중요한 자극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뜻한다. 그런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지만 만나게 되면 기쁘기 한량없다. 그러나 고객 앞에서는 절대로 그런 티를 내지 않는다. 그들은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내 이름도 고향도 출신 학교도 심지어 취미도 알지 못한다. 나는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함으로써 내 취향을 은폐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상정한 어떤 인간 유형에서 자꾸만 벗어나는 나라는 인간을 향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는다. 하기야 당연한 일이다. 누구도 신에 대해서 너무 많이 알 수는 없는 법이다.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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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려움은 흔히 혐오의 외피를 쓰곤 하죠. 자전거를 배우려면 쓰러지는 쪽으로 핸들을 꺾어야 해요. 그리고 힘차게 페달을 밟으면 되죠." 
  그녀는 한참을 말없이 그의 말을 곱씹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침묵이 수긍의 표시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절 두려워하잖아요. 제 실재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을 말이에요. 그래서 비디오를 들고 나은 거죠? 아닌가요? 정작 쓰러지는 쪽으로 핸들을 꺾어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당신일 수도 있어요."
(P.108)  
    

  그녀의 몸은 붓대롱이 되고 머리카락은 붓이 되어 움직인다. 그 모습을 푸른색 뷰파인더를 통해 좇고 있는 c. 어느새인가 이 비디오의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는 방식에 익숙해져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길을 걸어도 프레임으로 시야를 구획하고, 비디오에 담겨진 것들, 자신이 편집한 것들을 그의 두 눈으로 본 것보다 더 신뢰한다, 아니 애착한다. 그리하여 비디오 는 다시 그의 무기가 되고, 작지만 안전한 도피처가 된다. 그게 어쩌면 그가 이 매력적인 행위예술가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이유 인지도 모른다. c는 그의 세계, 그에 의해 칭조된, 그에 의해 반영된, 그에 의해 포획된 이 세계에 아직은 머무르고 싶은 것일 게다. 어느새 그녀는 곡조 모를 노래마저 흥얼거린다. 그녀가 어쩌면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결코 이 거리를 좁히지 못하리라. 세계와 자신, 오브제와 렌즈, 그가 만나왔던 여지들과 자신, 그들 사이에 놓인 강을 결코 좁히지 못할 것이라는 비감한 절망이 몰려들었다.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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