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진 여인들
(Women in Love)(1920)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 손영주 / 을유문화사 / 828쪽
(2018.3.3.)
자매가 걸어가는 길은 광부들의 계속되는 발길로 시커멓게 다져졌고, 철제 울타리를 따라 밭과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울타리에 달린, 길로 통하는 계단은 오가는 광부들의 무명바지에 닳아 반짝였다. 자매는 좀 더 가난한 집들 사이로 들어섰다. 거친 천으로 된 앞치마를 두른 여자들이 그 구역 끝머리에서 팔짱을 끼고 서서 잡담하면서 토박이들의 그 길고 지칠 줄 모르는 시선으로 브랑웬 자매가 지나가는 걸 빤히 지켜보았다. 애들은 욕을 해댔다.
구드룬은 약간 얼떨떨한 상태로 계속 걸음을 옮겼다. 이것이 인간의 삶이라면, 이들이 완전한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들이라면, 그 바깥에 있는 나의 세상은 과연 뭘까? 그녀는 자신의 녹색 스타킹과 커다란 녹색 벨루어 모자, 그리고 짙은 파란색의 부드러운 코트를 의식했다. 그러자 마치 심장이 오그라든 채 아주 불안정한 대기 위를 걷고 있는 듯, 금방이라도 땅으로 곤두박질칠 것만 같 았다. 그녀는 두려웠다.
구드룬은 캄캄하고 창조되지 않은 적대적인 세계의 이 같은 침해에 오랫동안 단련된 어슐라에게 바짝 달라붙었다. 그러나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기라도 하듯 구드룬의 마음은 내내 울부짖고 있었다. '다시 돌아가고 싶어, 도망치고 싶단 말이야. 난 알고 싶지 않아 이런 것이 존재한다는 걸 알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계속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P.14)
사람은 우연히 태어나 우연히 죽을 수 있다. 아니, 그럴 수가 없는 것인가? 인간 각각의 삶은 모두 순전한 우연을 따르고, 오직 유(類)나 속(屬)이나 종(種)만이 보편적인 의미를 갖는 것인가? 아니면, 아예 순전한 우연 따위란 없는 것인가? 발생하는 모든 것은 보편적인 의미를 갖는 것일까? 그런 걸까? 버킨은 크라이치 부인이 자신의 존재를 잊었듯이 그녀의 존재를 잊은 채 거기 그렇게 서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P.37)
“인종이란 게 상업적인 면을 갖고 있을 수도 있죠.” 그가 말했다. “사실은 그래야만 합니다. 인종이란 가족과 같은 것이거든요. 먹여 살릴 양식을 마련해야만 하지요. 그리고 양식을 마련하려면 다른 가족들, 다른 나라들과 싸워야만 합니다. 왜 그래선 안 된다는 건 지 난 모르겠는데요.”
허마이어니가 다시 거만하면서도 침착하게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대답했다 “난 경쟁심을 자극하는 건 언제나 잘못된 거라고 생각해요. 증오를 불러일으키거든요. 그리고 증오란 계속 쌓이는 법이고요.”
“하지만 남들과 같이지려는 경쟁심을 완전히 없애 버릴 수는 없잖습니까.” 제럴드가 말했다. “그건 생산과 진보를 위해 꼭 필요한 자극제 가운데 하나죠.”
“아니에요.” 허마이어니가 느릿느릿 대꾸했다. “난 그것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한마디 안 할 수가 없겠는데.” 버킨이 말했다. “나는 경쟁심이라는 걸 협오해요.”
(P.41)
“지식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지식 이외의 모든 것을 잃는 것 아닌가요?” 그녀가 딱할 지경으로 물었다. “예컨대 만일 내가 꽃에 대해서 안다고 하면 난 꽃 자체는 잃어버리고 그것에 대한 지식만 갖게 되는 것 아닌가요? 우리는 본질을 그림자와 바꿔치기하고 있지 않나요? 우린 이 죽은 지식을 위해 삶을 내놓고 있는 것 아닌가요? 그렇다면 안다는 것이 결국 내게 무엇을 뜻하는 걸까 요? 이 모든 앎이라는 것이 내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걸까요? 아무 의미도 없는 거예요.”
“당신은 그저 말을 만들어 내고 있을 뿐이오.” 그가 말했다. “지식이 당신에겐 전부죠. 심지어 당신의 동물주의라는 것도 당신의 머리가 원하는 것일 뿐이오. 당신은 동물이 되기를 바라는 게 아니 라, 정신적인 짜릿함을 만끽하기 위해서 당신 자신의 동물적인 기능을 관찰하고 싶어 하는 거란 말이오. 당신의 동물주의는 전적으로 부차적이오...... 게다가 가장 완고히고 지독하게 말라비틀어진 주지주의보다도 더 퇴폐적이죠. 일정과 동물적 본능에 대한 당신의 이러한 사랑이야말로 주지주의의 최악의 마지막 형태가 아니고 뭐란 말입니까? 열정과 본능이라...... 당신은 이런 것들을 더없이 원하긴 하지만, 그건 당신 머리, 당신의 의식 속에서 그러 겁니다. 모든 게 당신 머릿속에서만, 그 두개골 속에서만 일어난단 말이오. ……당신은 그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의식하지 않으려는 것일 뿐이오. 말하자면 당신이란 사람한테 딱 어울리는 거짓을 원하는 거란 말입니다” 버킨의 공격에 허마이어니는 딱딱하게 굳어 독기를 뿜었다. 어슐라는 놀라움과 부끄러움에 뒤덮여 서 있었다. 그들이 서로를 얼마나 증오하는지 보니 정말 무시무시했다.
(P.61)
“난 새로운 종교를 원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새로운 걸 받아들일 사람들이 아니라고 생각해. 그들이 새로움을 원하는 게 틀림없긴 하지. 그렇지만 우린 우리가 초래한 이 삶을 똑바로 노려보고, 그걸 거부하고, 우리 자신의 옛 우상들을 완전히 부숴 버리는 일은 절대 안 할 거야. 낡은 것을-심지어 자신의 내부에 있는 것까지도-없애 버리려는 아주 강한 열망이 있어야만 새로운 것이 도래하는 거지.” 제럴드는 버킨을 찬찬히 지켜보았다.
“이 삶을 부숴 버려야 한다는 건가? 몰아서 내쫓아야 한다는 거야?” 제럴드가 물었다.
“이 삶이라...... 맞아. 이 삶을 완전히 때려 부숴야지. 안 그러면 꽉 끼는 가죽 안에 든 것처럼 그 안에서 쪼그라들어 말라 죽게 될 거에 한 치도 더 늘어나지는 않을 테니까.”
(P.81)
“난 말이지,” 그가 말했다.
“사람은 정말로 순수한 하나의 활동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해....... 사랑을 그런 하나의 순수한 활동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 그렇다고 해서 내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아니지.”
“자넨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해 본 적이 있나?” 제럴드가 물었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버킨이 대답했다.
“최종적으로는 아니란 말인가?” 제럴드가 말했다 최종적으로는...... 궁극적으로는...... 아니지.” 버킨이 말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야.” 제릴드가 말했다.
“그러고는 싶나?” 버킨이 물었다.
제럴드는 거의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눈을 번뜩이며 오랫동안 버킨을 바라보았다.
“모르겠어.” 그가 말했다.
“난 그러고 싶어...... 사랑을 하고 싶다고.” 버킨이 말했다.
“그래?”
“응, 난 사랑의 최종성을 원해.
“사랑의 최종성이라.” 제릴드가 버킨의 말을 되뇌었다. 그러고는 잠시 있더니, “딱 한 여자만?”이라고 덧붙여 물었다. 들판을 따라 누렇게 물결치는 석양에 버킨의 얼굴이 긴장된, 그리고 알 수 없는 확고부동함으로 환히 빛났다. 제럴드는 여전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 한 여자” 버킨이 말했다.
그러나 제릴드에게 버킨의 대답은 확신에 차 있다기보다는 고집을 부리는 것처럼 들렸다.
“난 여자를 믿지 않아 그리고 여자만이 내 삶을 완성시킬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제럴드가 말했다
“자네 삶의 중심도 핵심도 아니라는 건가-자네와 한 여자 사 이의 사랑이?” 버킨이 물었다.
버킨을 바라보는 제럴드의 눈이 야릇하고 겁나는 미소를 띠며 가늘어졌다.
“난 그렇게 느껴 본 적이 없어.” 그가 말했다.
“그런 적이 없다고? 그렇다면 자네에겐 삶의 중심이 어디에 놓여 있나?”
“모르겠어...... 그게 바로 누가 나한테 좀 말해 줬으면 하는 거야. ......내가 아는 한내 삶은 중심이란 게 없어. 사회적인 메커니즘에 의해 인위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거지.” 버킨은 어려운 문제를 풀기라도 하는 듯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P.86)
허마이어니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만약 우리가 정신에 있어서는 모두가 하나이고 평등하며 모두가 형제라는 것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나머지는 문제 될 게 없을 거예요. 서로 트집 잡고 시기하는 일이나 파괴하는, 오로지 파괴만 하는 권력 투쟁 따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거예요.” 이 말에 대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떠났을 때 버킨이 쓰디쓴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그건 그렇지 않아요, 정반대요, 허마이어니. 우리는 정신에 있어서 모두 다르고 평등하지 않아요...... 그건 우연한 물질적 조 건들에 기초한 사회적 차이들일 뿐이오. 추상적으로 혹은 수리적으로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고 말할 수는 있을지 모르죠. 누구나 배고픔과 목마름을 느끼고 두 개의 눈, 한 개의 코, 그리고 두 개 의 다리를 갖고 있으니까. 수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모두 같은 거죠. 그렇지만 정신적으로는 순전한 차이만이 존재할 뿐이어서, 평등이니 불평등이니 하는 것은 문제 되지 않아요. 바로 이런 두 가지 지식의 토대 위에 국가를 세워야 하는 겁니다. 당신의 민주주의는 새빨간 거짓이에요....... 당신이 말하는 인간의 형제애라는 것을 수리적인 추상 개념 이상의 어떤 것에 적용한다면 그건 완전한 허위란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처음에 우유를 마시고, 모두가 빵과 고기를 먹으며, 모두가 자동차를 타고 싶어 한다-여기에 형제애의 시작과 끝이 들어 있죠. 하지만 여기에 평등은 없어요.
그러나 나, 나 자신, 나 자신인 나, 나는 평등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정신에 있어서 나는, 한 개의 별이 다른 별과 떨어져 있듯이 별개이고, 질적으로 양적으로 달라요. 국가를 바로 그 사실 위에 세우란 말이오. 한 인간은 다른 인간보다 나을 것이 없어요. 모두가 평등해서가 아니라 서로가 본질적으로 타자이기 때문이고, 그래서 비교 조항이 존재 하지 않는 겁니다. 비교하기 시작하는 순간, 한 사람이 다른 사람 보다 훨씬 더 나아 보이죠. 당신이 상상하는 불평등이란 전부 본래 있는 겁니다.
난 모든 사람이 세상의 재화 중에서 자기 몫을 가지기를 바라요. 그래서 그들의 성가신 요구에서 벗어나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말이오. '이제 당신이 원하는 걸 가졌잖아, 세상의 물건들 중에서 정당한 당신 몫을 챙기지 않았느냐고. 그러니 같은 말밖에 못하는 이 명청아, 이제 네 일이나 신경 쓰고 나 좀 방해하지 마라”
(P.160)
자매는 슬레이트 지붕에 거무스름한 벽돌담을 한 집들 사이로 걸어 내려갔다. 다가오는 일몰의 묵직한 황금빛 매력이 탄광촌을 온통 뒤덮었고, 아름다움으로 도금된 추악함은 감각을 마비시키는 듯했다. 시커먼 석탄가루로 뒤덮인 길 위로 선명한 석양이 한층 따스하게, 한층 강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붉게 타는 하루의 끝으로부터, 제멋대로 생긴 그 모든 지저분함 위로 마법이 드리워졌다.
“기분 나쁜 아름다움을 갖고 있어, 이곳은.” 매혹당해 괴로운 것이 분명한 구드룬이 말했다 “어딘지 모르게 저 안에서 진하고 뜨거운 매력이 느껴지지 않아? 난 느껴지는데. 정말로 마비되는 것 같아” 그들은 광부들의 주택가를 지나고 있었다. 몇 집이 공동으로 쓰는 뒤뜰에서 광부 하나가 이 더운 저녁에 몸을 씻고 있는 것이 보였다. 두툼한 커다란 면바지가 흘러내려 허리까지 훤히 드러나 있었다. 이미 다 씻은 광부들은 담벼락 쪽으로 등을 향한 채 쭈그리고 앉아 이야기를 하거나, 순전한 육체적 안온함 속에 말없이 지친 몸을 쉬고 있었다. 그들의 강한 억양이 들려왔는데, 그 심한 사투리가 신기하게도 핏속까지 어루만져 주었다. 그것은 애무하는 노동자들의 품속에 구드룬을 감싸 안는 듯했다. 대기 전제가 육체적인 남자들로 공명했으며, 매력적인 노동과 남자다움으로 빽빽히 들어차 있었다. 그런데 그 지역 전제가 그랬기 때문에, 그곳 주민들은 이를 잘 깨닫지 못했다.
(P.178)
"나요? ...... 난 옳지 않아요.” 그가 되받아 소리쳤다. “내게 유일하게 옳은 구석이 있다면, 적어도 난 내가 옳지 않다는 걸 안다는 거예요. 나는 내 겉모습이 싫어요. 인간으로서의 나 자신을 혐오한단 말입니다. 인간은 거대한 거짓말 집합체고, 거대한 거짓은 조그마한 진리보다 열등합니다. 인간은 개인보다 열등한, 아니 훨씬 더 못한 존재예요. 왜냐하면 개인은 때때로 진리를 행할 수도 있지만 인간은 거짓의 나무니까요. ......인간들은 사랑이 가장 위대하다고 말하죠. 그 더러운 거짓말쟁이들은 그렇게 말하기를 고집 한단 말이오. 그런데 그들이 하고 있는 짓을 좀 봐요! 사랑이 가장 위대하다느니, 자비가 가장 위대하다느니 이런 말을 계속 되풀이하는 수백만 인간들을 좀 보란 말입니다-그리고 그들이 내내 뭘 하고 있는지 좀 보라고요. 그들이 하는 일을 통해, 당신은 그들이 자기가 뱉은 말은커녕 자기 행동을 고수할 엄두도 못 내는 더러운 거짓말쟁이이자 겁쟁이들이라는 걸 알게 될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랑이 가장 위대하다는 사실이 바뀌는 건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그들이 어떻게 하느냐가 그들 말의 진리를 바꾸는 건 아니잖아요, 네?” 어슐라가 슬픈 듯이 말했다.
“완전히 바꾸죠. 그들의 말이 행여 진리라면, 그들은 그것을 완수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이 거짓말을 계속하기 때문에 마침내 미쳐 날뛰게 된 거죠. 사랑이 가장 위대하다는 말은 거짓이에요. 차라리 증오가 가장 위대하다고 말하는 게 낫죠. 극과 극은 평형을 이루니까. ......인간들이 원하는 건 증오예요...... 증오뿐이란 말입니다. 그러고는 정의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증오를 얻어 내죠. 모두가 다 바로 자신을 그 사랑이라는 것으로 부터 증류시켜 니트로글리세린으로 변모시킨단 말입니다. ......인간을 죽이는 것은 바로 그 거짓이에요. 증오를 원한다면 그럽시다....... 죽음과 살해, 고문과 폭력적인 파괴-다 내버려 두잔 말입니다, 단 사랑이란 이름으로는 말고요. ......난 인간을 험오해요. 다 쓸려 없어져 버리면 좋겠어요. 인간은 사라져도 돼요. 내일 당장 모든 인간이 없어져 버린다고 해도 절대적 상실이 도래하는 건 아니에요. 참다운 현실은 고스란히 남아 있을 거니까. 아니, 오히려 더 나은 상태가 될 겁니다. 그때가 되면 진정한 생명의 나무는 유령처럼 끔찍스럽게 주렁주렁 무겁게 달린 사해(死海)의 열매를, 수많은 인간 복제품들의 견딜 수 없는 짐을, 치명적인 거짓의 엄청난 무게를 벗어던지게 될 겁니다”
(P.197)
“사랑이 있는 게 아니라면, 뭐가 있는 건가요?” 그녀가 거의 비웃으면서 외쳤다.
“뭔가가요.” 그는 전력을 다해 자신의 영혼과 싸우면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뭐라고요?”
그는 그녀가 이렇듯 적대적인 상태에 있는 동안엔 의사소통을 할 수 없기에 한동안 잠자코 있었다.
뭔가에 완전히 몰두한 듯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엄연하고 비개인적이며 책임을 초월한 최종적인 내가 존재합니다 마찬가지로 최종적인 당신도 존재하죠. 내가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 건 바로 그곳에서예요-감정적인, 사랑의 지평에서가 아니라-아무런 말도 합의 조건도 존재하지 않는 그런 곳에서 말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엄연한 미지의 두 존재요, 완전히 낯선 두 생물이죠. 거기서 난 당신에게 다가가길, 당신이 내게 다가오길 원해요. ......그리고 그곳엔 그 어떤 책무도 있을 수가 없어요. 행동 규범이 없으니까, 그리고 그 어떤 이해도 거둬들여진 적이 없으니까요. 상당히 비인간적이죠, ......그렇기 때문에 어떤 형태의 힐책도 존재하 지 않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모든 것들의 울타리 바깥에 있어서 이미 알려진 것이 전혀 적용되지 않으니까요. 우린 오로지 충동을 따를 수 있을 뿐이에요. 바로 앞에 놓여 있는 것을 취하고,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으며,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주는 것도 없으며, 오로지 각자 근원적 욕망에따라 취할 따름이지요."
버킨의 말은 전혀 예기치 못했고 너무나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어서, 어슐라는 멍하니 거의 의식을 잃은 채 이 말을 듣고 있었다 “그건 그냥 순전히 이기적인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순전하다는 건 맞아요. 그렇지만 이기적인 건 절대로 아닙니다 왜냐하면 난 내가 당신한테서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내가 당신에게 다가갈 때 나는 나 자신을 미지의 것에 넘겨주는 것이고, 미지의 세계로 완전히 발가벗겨진 상태여서, 아무 거리낄 것도 방어할 것도 없어요. 오직 우리 둘 다 모든 것을, 심지어 우리 자신까지도 벗어던져, 존재하기를 멈추겠다는, 그리하여 완벽한 우리 자신이 우리 안에서 생겨나게 하겠다는 우리 둘 사이의 맹세만이 필요합니다” 그녀는 자기 식의 논리로 곰곰이 따져 보았다.
“하지만 당신이 날 원하는 건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잖아요?” 그녀가 우겼다.
“아니, 그렇지 않아요. 내가 당신을 믿기 때문이에요...... 내가 정말로 당신을 믿는 거라면 말이죠.”
(P.228)
옛날식 사랑은 끔찍한 속박이요, 일종의 강제 징병 같았다. 그는 자신의 가슴속에 있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사랑이니 결혼이니 아이들이니 하는 것들, 그리고 만족스러운 가정과 부부 생활이라는 끔찍한 사생활 속에서 다 함께 부대끼는 삶은 생각만 해도 혐오스러웠다. 그는 뭔가 좀 더 깨끗하고 좀 더 개방된, 말하자면 좀 더 상쾌한 것을 원했다. 부부간의 뜨겁고 비좁은 친밀함이란 것이 혐오스러웠다. 결혼한 작자들이 문을 걸어 잠그고는 자기들만의 연대 속으로 스스로를 가두어 버리는 꼴이라는, 설령 극서이 사랑이라고 할지라도 역겨웠다. 그것은 언제나 작을 지어 사적인 집이나 방 안에 고립되어 있는 불신 가득한 부부들의 공동체였으며, 이를 넘어서는 그 어떤 삶도, 그 어떤 다른직접적이고 사심 없는 관계도 용인하지 않았다. 그것은 한 쌍의 만화경이자, 결혼한 한 쌍이라는 단절되고 분리주의적인 무의미한 실제 였다. 물론 그가 난잡한 관계를 결혼보다 훨씬 더 나쁜 것으로 여기고 증오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불륜이란 그저 합법적인 결혼에 대한 반작용에 불과한, 또 다른 종류의 짝짓기에 불과했다. 반작용은 작용보다 더 지겹고 넌덜머리가 났다.
(P.314)
세상의 이치 속에서 자란 제럴드는 입장을 바꾸었다. 평등에 개의치 않았다. 사랑이니 자기희생이니 하는 기독교적 태도는 모두 시대에 뒤진 진부한 것들이었다. 그는 지위나 권위란 이 세상에 응당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에 대해 점잔 빼며 위선적으로 말하는 건 아무 쓸모가 없었다. 기능적으로 꼭 필요하다는 간단한 이유만으로 그것들의 존재는 당연했다. 지위와 권위가 전부이자 최후의 목적은 아니었다. 기계의 일부와 같은 것이었다. 우연히 제럴드 자신은 통제하는 중심부가, 노동자 집단은 다양하게 통제 받는 부분들이 된 것이다. 다만 우연히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중심에 있는 바퀴통이 백 개의 바퀴들을 돌린다고 흥분하는 건, 우주가 태양 주위를 돈다고 흥분하는 것이나 같았다. 결국 달과 지구, 토성과 목성, 그리고 금성도 각기 저마다 태양과 똑같이 우주의 중심이 될 똑같은 권리를 가졌다고 말하는 건 바보짓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주장은 오직 혼란을 향한 욕망에서나 나오는 것이다.
결론에 이르기 위해 생각을 하는 귀찮은 짓을 하는 대신, 제릴드는 결론으로 껑충 뛰었다. 민주적 평등이라는 문제는 멍청한 문제라고 여겨 몽땅 버렸다. 중요한 것은 사회의 거대한 생산 기계였다. 그것이 완벽하게 일하도록 모든 것을 충분히 생산하도록,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 기능상의 등급과 중요도에 따라 좀 더 많든 적든 합당한 몫을 받게끔 하고, 그러고 나서 먹고살 생필품이 공급되면, 누가 뭐라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 한 각자 재미있고 입맛 당기는 대로 하게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리하여 제럴드는 거대한 산업의 질서를 잡기 위해 일에 착수 했다. 여행을 통해, 그리고 여행 중의 독서를 통해 그는 삶의 가장 본질적인 비밀은 조화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조화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는 않았다. 그 단어가 만족스러웠고, 자기만의 결론에 도달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조화라는 신비스러운 말을 조직이라는 실용적인 말로 번역하여, 이미 확립되어 있는 세상에 강제로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자신의 철학을 실행에 옮겨 갔다.
(P.358)
제럴드는 점차 모든 것을 장악해 갔다. 그러면서 엄청난 개혁이 시작되었다. 모든 부서에 전문 기술자들이 배치되었다. 조명과 지하의 견인 작업, 그리고 동력 공급을 위한 거대한 발전소가 설치 되었다. 모든 탄광에 전기가 공급되었다. 거대한 철인이라 불리는 절단기와 같은 광부들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새로운 기계들과 별난 도구들이 미국에서 건너왔다. 탄광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돌아갔다. 모든 통제권이 광부들의 손에서 빠져나갔고 채탄 청부제가 폐지되었다. 모든 것이 가장 정확하고 정밀한 과학적 방법으로 운영되었고, 교육받은 전문가들이 모든 곳을 장악했으며, 광부들은 그저 기계적 도구로 전락해 버렸다. 그들은 예전보다 훨씬 더 열심히 일해야 했다. 일은 끔찍했고, 그 기계적인 속성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것에 복종했다. 그들의 삶에서 즐거움은 사라졌고, 그들이 점점 더 기계화되어 감에 따라 희망도 소멸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새로운 상황을 받아들였다. 심지어 이로부터 더 큰 만족을 얻기까지 했다. 그들은 처음엔 제럴드 크라이치를 증오해 그에게 무슨 짓인가 하자고, 그를 죽여 버리자고 맹세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모종의 치명적인 만족감을 느끼며 모든 걸 받아들였다. 제럴드는 그들의 대사제(大司祭) 였으며, 그들이 진정으로 실감하는 종교를 대표했다. 제럴드의 아버지는 이미 잊혔다. 엄격하고 지독하며 비인간적이지만, 다름 아닌 바로 그 파괴성으로 인해 만족스러운 새로운 세상, 새로운 질서가 온 것이었다. 사람들은 거대하고 경이로운 기계에 속하게 된 것을 흡족해했다. 그것이 자신들을 파멸시키고 있는데도, 그 기계야말로 그들이 원하는 것이었다. 인간이 생산한 것 가운데 최고 의 것이요, 가장 경이롭고 초인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감정이나 이성을 초월한, 진정으로 신과 같은 이 위대하고 초인적인 것에 속함으로써 한껏 고양되었다. 그들 가슴속의 심장은 죽었지만 그들의 영혼은 만족했다. 그것이 그들이 원하는 바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제럴드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다만 그들 앞에 서서 그들이 원하는 바를 주었을 뿐, 즉 삶을 순전한 기계적 원칙에 복속시키는 위대하고 완벽한 시스템에 참여하도록 했을 뿐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종류의 자유였다. 해제의 위대한 첫 발걸음이자 혼란의 위대한 첫 단계였으며, 유기적인 것을 기계적인 원칙으로 대체하는 일이었고, 유기적 목적, 유기적 통일의 파괴였으며, 모든 유기적 단위를 거대한 기계적 목적으로 종속시키는 위대한 첫 단계였다 그것은 순수한 유기적 붕괴였고 순수한 기계적 조직화였다. 이것이 혼란의 최초이자 가장 멋진 상태인 것이다.
(P.363)
아직 젊었지만 구드룬은 영국 사회의 내막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고, 그녀에게 출세하겠노라는 이상 따원 없었다. 출세를 한다는 건 또 하나의 겉치레 쇼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걸, 출세란 가짜 페니 대신 반 크라운짜리 가짜 동전을 갖는 것과 다름없다는 걸, 무자비한 젊은이답게 철저히 냉소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가치를 매기는 통화라는 것 전체가 가짜였다. 물론 그녀의 냉소주의는, 거짓된 동전이 통용되는 세상에서는 1파운드짜리 불량 금화가 4분의 1페니짜리 불량 동전보다 낫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 었다. 그러나 부자든 가난뱅이든 그녀는 그 둘을 똑같이 경멸했다.
그녀는 꿈을 꾸었던 자신을 이미 비웃고 있었다. 그 꿈들은 손쉽게 이루어질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영혼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충동이 엉터리 가짜라는 걸 지나치리만치 잘 인식하고 있었다. 제럴드가 낡아 빠진 구식 회사로부터 제법 이익을 내는 산업을 만들어 낸들 그녀에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낡아 빠진 회사든 신속히 멋들어지게 조직된 산업이든, 그녀에겐 별다른 의미가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그것들은 악화(惡貨) 였다. ......물론 그녀도 겉으로는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중요한 건 겉보기였다. 속으로는 어차피 하찮은 짓거리였으니까.
(P.675)
"그건 Kunstwerk(예술 작품)이에요, 예술 작품이란 말입니다 예술품이지, 어떤 무엇의 그림이 아니에요, 뭔가를 그린 게 절대로 아니란 말입니다. 그건 그 자체 말고는 어떤 것과도 전혀 상관이 없어요. 이런저런 일상 세계와는 아무 상관 없단 말입니다. 그 둘은 전혀 관련이 없어요. 그것들은 서로 다른 별개의 차원에 존재하는 거고, 하나를 다른 하나로 번역한다는 건 바보짓만도 못힙니다. 그건 모든 계획을 흐리고 천지를 혼란에 빠뜨리는 짓입니다 아시겠습니까, 행동의 상대적 세계와 예술의 절대적 세계는 절대로 혼동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절대로 그렇게 하면 안 된단 말입니다!”
“맞아.” 구드룬이 흥분하여 랩소디처럼 지껄여 댔다. “그 둘은 분명히 그리고 영원히 별개야. 서로 아무 관계가 없다고. 나와 내 예술, 그건 서로 아무 관계가 없어. 내 예술은 다른 세계에 있고, 난 이 세계에 있는 거야.”
(P.696)
구드룬과 뢰르케는 야릇하고 엉큼하며 한없이 도발적인 묘한 게임을 했다. 마치 삶에 대해 어떤 심원한 이해를 하고 있다는 듯 이, 세상은 감히 알려는 엄두조차 못 내는 무시무시한 핵심 비밀 을 자기들만 전수받은 것처럼 행동했다. 그들의 소통은 모두 야릇 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외설로 이루어졌다.
원시 예술의 외설적 암시는 그들의 피난처였고, 감각의 내적인 신비는 숭배의 대상이었다. 예술과 삶은 그들에게 각각 현실과 비현실이었다.
“물론, 삶은 정말로 중요한 게 아니에요-중심은 예술이죠. 인간이 자기 삶에서 무엇을 하는가는 de rapport(별 상관이 없 죠), 별 의미가 없어요.” 구드룬이 말했다.
“맞아요, 그래요, 바로 그겁니다.” 조각가가 답했다. “예술 안에서 무엇을 하느냐, 그게 바로 인간 존재의 숨결입니다. 삶에서 뭘 하느냐, 그건 문외한들이나 법석을 떠는 사소한 거죠.”
이상하게도 구드룬은 이런 대화에서 우쭐함과 해방감을 느꼈다. 영원히 안착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당연히 제럴드는 사소한 존재였다-그녀가 예술가인 한 그녀의 삶에서 사랑은 일시적인 것 중 하나였다. 그녀는 클레오파트라를 떠올렸다-클레오파트라는 예술가였던게 틀림없어. 남자에게서 핵심을 거둬들인 거야. 최고의 감흥을 수확한 다음 껍데기는 내던져 버리는 거지. 메리 스튜어트도 그랬고, 애인들과 숨을 헐떡이며 무대를 좇아다녔던 엘레오노라 두제도 그랬고. 이들이 사랑에 대한 대중적 전형이지. 결국 연인이란 이 미묘한 앎을 수송하기 위한 연료, 여성 예술의 연료, 감각적인 이해에 대한 순수하고 완벽한 앎의 예술을 위한 연료가 아니고 무엇이랴.
(P.727)
“신은 인간 없이는 살 수 없다” 프랑스의 어떤 위대한 종교적 스승은 이렇게 말했다 - 하지만 이는 분명 거짓이다. 신은 인간 없이 살 수 있다. 신은 어룡과 마스토돈 없이도 살 수 있었다. 이 괴물들은 창조적으로 발전하는 데 실패했고, 그래서 신이, 창조의 신비가, 그들을 없애 버렸다. 마찬가지로 인간 역시 창조적으로 변화하고 발전하는데 실패한다면, 그 신비는 인간도 없애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영원한 창조의 신비는 인간을 제거하고, 그 자리를 더 훌륭한 피조물로 대체할 수 있다. 말이 마스토돈의 자리를 차지한것처럼.
이러한 생각은 버킨에게 상당한 위로가 되었다. 만일 인간이 막 다른 골목으로 내달려 스스로를 소진했다면, 영원한 창조의 신비는 더 훌륭하고 경이로운, 어떤 새롭고 더 사랑스러운 어떤 다른 종족을 낳아 창조의 구현(具現)을 계속 수행할 것이다. 게임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창조의 신비는 영원토록 헤아릴 수 없고 완전무결하며 고갈될 줄 모른다. 여러 종족들이 왔다가 갔고, 여러 종들이 사라져 버렸지만, 언제나 새로운 종족들이, 더 사랑스러운, 혹은 똑같이 사랑스러원 종족들이, 매번 경이를 뛰어넘으며 생겨났다. 샘의 원천은 더럽힐 수도 없고 찾아낼 수도 없다. 거기에는 한계가 없다. 그것은 기적들을 낳는다. 그 자신의 시간 속에 완전히 새로운 종족과 종들을, 의식의 새로운 형상들을, 몸의 새로운 형상들을, 존재의 새로운 단위들을 창조해 낼 수 있다.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창조의 신비가 가진 가능성들에 비견해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자신의 맥박이 그 신비로부터 직접 맥박 치게 하는 것, 이것이 완벽이요 형언할 수 없는 만족을 준다. 인간이냐 비인간이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완벽한 맥박이 형언할 수 없는 존재, 아직 태어나지 않은 기적 같은 종족들과 함께 고동치고 있는 것이다.
(P.7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