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 <순수이성비판>
(Kritik der reinen Vernunft)(1788)
(철학사상 별책 제3 제16호)
김재호 /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 142쪽
(2018. 3. 18.)



  위대한 철학자의 삶을 되돌아보는 일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의 생애가 오늘 우리에게 삶의 교훈과 길잡이를 제공해 주는 성자(聖者)의 일생이 아니라면, 혹은 역사의 풍운 가운데 겪은 드라마틱한 운명으로 인해 흥분과 진한 감동을 주는 인간적 삶이 아니라면 우리는 굳이 왜 한 사상가의 삶에 주목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의 사상이 진공 가운데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 사상가의 삶의 경험들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이런 점에서 그의 사상을 보다 잘 이해하려는 노력과 맞닿아 있다.
(P.1)



  칸트는 ‘우리의 표상이 대상과 관계 맺는 것은 무엇에 근거하는가?’라는, 이전의 형이상학적 연구들이 소홀히 했던 본질적인 질문을 제기하고 이 문제에 답하는 것이 바로 형이상학의 전체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칸트는 ‘감성과 이성의 한계’라는 제목으로 종전의 생각을 확대하려던 계획을 수정하여 새로 ‘순수 이성의 비판’(Die Critick der reinen Vernunft)이라는 제목의 출판을 계획하고 있음을 예고한다. 약 3개월 후면 가능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순수 이성의 비판’이라는 책의 출판 계획은 그로부터 약 10년간의 침묵을 거쳐 이루어지게 된다. 1781년 칸트는 나이 57세에 드디어 자신의 주저(主著)『순수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 을 세상에 내어놓게 된다.
  그러나 칸트의 이러한 오랜 철학적 숙고의 산물인『순수이성비판』에 대한 독자들의 처음 반응은 대체로 냉정했다. 심지어 당시 유력한 학술지였던 ‘괴팅겐 비평지’에는 익명의 독자(Christian Garve인 것으로 알려져 있음)가 쓴 신랄한 혹평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칸트는 이러한 많은 비판이 대부분『순수이성비판』의 내용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하여 1783년에『순수이성비판』의 이해를 위한 입문서에 해당하는『형이상학서설』을 출판하게 된다.
  1785년 에는 도덕철학에 관한 칸트의 첫 번째 주요 저술인『도덕형이상학 원론』(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이 출판되어진. 1788년에 칸트는 두 번째 비판서로 불리는『실천이성비판』(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을, 1790년에는 그의 세 번째 비판서에 해당하는『판단력비판』(Kritik der Urteilskraft)을 출간하게 된다.
(P.7)



  ‘형이상학’의 잃어버린 이전의 위엄을 되찾고 ‘학’으로서의 가능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이성 능력’(Vernunftvermögen) 자체의 비판이 요구되어진다. 이성 능력의 비판이란 칸트에 따르면 정당한 요구를 하는 이성은 보호해 주지만 모든 근거 없는 이성의 월권에 대해서는 거절할 수 있는 ‘법정’(Gerichtshof)에 이성 자신을 세우는 일이다. 이러한 이성에 대한 비판, 즉 ‘순수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을 통해 형이상학의 가능성은 탐구될 수 있다. 요컨대 이성의 능력을 비판하는 일은 칸트에게서는 바로 “형이상학 일반의 가능 여부에 대한 결정․가능할 수 있는 형이상학의 원천․범위․한계 등의 규정을 의미한다.”
(P.11)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을 검사하는 것은, 즉 이러한 인식의 범위와 한계를 조사하는 것은 결국 선험적 인식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들, 즉 인간의 인식 능력 속에서 근거 지워지는 조건들을 조사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순수이성비판』은 우리 인식능력들에 관한 연구이기도 하다.
(P.13)



칸트가 이제 ‘모방’(nachahmen)하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유 방식의 전환의 본질’(das wesentliche Stück der Umänderungder Denkart)이다. 그것은 바로 인식 주체의 자발적인 행위에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때문에 칸트는 이러한 사유의 전환을 코페르니쿠스가 자신에 의해 관찰되어지는 천체의 원인을 관찰자 자신에서 찾으려고 한 시도에 비유하고 있다. 철학에서의 이러한 코페르니쿠스적인 시도는 인식이 지금까지와 같이 대상에 의존해서 대상들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상들이 우리 인식과 인식 능력들에 준거해야 한다고 가정해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가정’(假定)이 “형이상학의 과제들”(die Aufgaben der Metaphysik, B XVI, 한글판 32)을 해결하는 데 더 효용이 있을 것이라고 믿기에 칸트는 이제『순수이성비판』에서 대상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조건들을, 그리고 그 대상을 산출해내는 인식 능력들을 검토하게 된다.
(P.13)



초월적 감성학’에서 다루어진 우리의 인식 능력이 ‘감성’(Sinnlichkeit)이었다면 칸트는 이제 ‘초월 논리학’(transzendentale Logik )에서 우리의 또 다른 인식 능력인 ‘지성’(Verstand)에 관해 탐구한다. 칸트가『순수이성비판』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초월적 원리론’(transzendentale Elementarlehre)을 이처럼 ‘초월적 감성학’과 ‘초월논리학’으로 구분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의 인식이 서로 다른 두 가지 인식의 원천에서부터 생겨난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의 심성을 대상이 어떤 식으로든 촉발하는 한에서 표상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감성’(Sinnlichkeit)이라면 ‘지성’(Verstand)은 표상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자발적인 능력이다. 이 두 인식의 원천은 칸트에 따르면 그 기능이 고유하기에 엄격히 구별되어야 할 서로 다른 인식 능력이다. 따라서 ‘감성’과 관련된 학문인 ‘감성학’(Ästhetik)이 지성의 규칙들 일반을 다루는 학문인 ‘논리학’(Logik)과 구별되듯이 ‘초월 논리학’은 ‘초월적 감성학’과 구별되어진다.
(P.16)



  전통적으로 논리학이 넓은 의미에서의 ‘지성’(Verstand)으로 대표되는 ‘사유 능력’을 탐구한다고 할 때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유 능력을 의미한다. 즉, ‘개념의 능력으로서의 지성’(Verstand als Vermögen der Begriffe), ‘판단’(Urteile)에 관계하는 ‘판단력’(Urteilskraft), 그리고 ‘추론의 능력으로서의 이성’(Ver- nunft als Vermögen der Schlüsse)이 그것이다. 칸트는『순수이성비판』의 ‘초월 논리학’을 이러한 사유 능력에 상응해서‘초월적 분석론’(transzendentale Analytik)과 ‘초월적 변증론’(transzendentale Dialektik)으로 나눈다.
  ‘초월 논리학’의 첫 번째 부문에 해당하는 ‘초월적 분석론’은 ‘순수 개념’(reine Begriffe)의 원천으로서의 ‘지성 능력’을 탐구하는 ‘개념의 분석론’(Analytik der Begriffe)과 ‘규칙 아래에 포섭하는 능력’인 ‘판단력’(Urteilskraft)의 ‘이론’(Doktrin)에 해당하는 ‘원칙의 분석론’(Analytik der Grundsätze)으로 구성되어 있다.
‘초월적 분석론’은 무엇이 우리 인식의 대상인지를, 이러한 대상일반에 관해 사유하는 우리 인식 능력의 형식들은 무엇인지,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의 인식이 어떻게 대상과 관계 맺을 수 있는지를 해명해 준다.
  ‘초월 논리학’의 두 번째 부문은 우리 이성의 ‘잘못된 추론’에 관해 다룬다. 만약에 순수 이성이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서 ‘형이상학적 심리학’의 인식 대상, 혹은 ‘우주론’과 ‘신학’의 인식대상인 ‘무규정자’(Unbedingte)에 이르려고 할 때 순수 이성은 잘못된 추론에 빠지게 된다. 칸트는 이러한 초월 논리학의 부문을 ‘초월적 변증론’(transzendentale Dialektik)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것이 고대에 ‘변증론’(Dialektik)이 의미했던 ‘가상’(Schein)을 만들어내는 ‘기술’(Kunst)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초월적 변증론’은 순수 이성의 잘못된 추론으로부터 생겨나는 ‘형이상학적 가상’들을 폭로하고 비판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초월적 변증론’은 칸트에게서 ‘가상의 논리학’(Logik desScheins)을 의미한다.
(P.16)



초월 논리학’은 우리의 사유 형식이 그 대상과 맺는 관계에 관한 이론인 ‘초월적 인식’(transzendentale Erkenntnis)에 관한 것이다. 칸트에게서 ‘초월적 인식’이라는 말은 선험적인 ‘기원’(Ursprung)을 갖는 표상이 어떻게 성립하며, 이 선험적으로 성립된 표상이 경험에서 생겨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경험적 대상과 관계 맺을 수 있는가를 인식하는 일이다. 따라서 ‘초월 논리학’은 결국 그 자신 선험적인 기원을 가지면서도 경험의 대상과 선험적으로 관계 맺는 ‘순수 지성 개념들’에 관한 체계적 이론이다.
(P.18)



  ‘초월적 감성학’과 ‘초월 논리학’으로 이루어진 ‘초월적 원리론’(transzendentale Elementarlehre)이 순수 이성에서부터 생겨나는 철학적 이론이라는 ‘하나의 건축물’(ein Gebäude)의 재료와 요소들을 제공해 주고 그로 인해 이론적 이성 사용의 경계를 한정지을 수 있었다면 이제 ‘초월적 방법론’(transzendentale Methoden- lehre)에서 칸트는 마지막으로 그러한 순수 이성의 이론적 건축물을 건축하기 위한 설계도를 그리려고 한다.(A707ff./B735ff., 한글판 503 이하 참조) 즉 칸트가 ‘초월적방법론’에서 원하는 바는 한마디로 ‘순수 이성의 완전한 체계를 위한 형식적인 조건들을 규정’(A707f./B735f., 한글판 503)하는 것 이다.
(P.29)



『순수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은 ‘이성’(Vernunft)에 의한 ‘이성’ 자신의 비판을 의미한다. 정당한 요구는 보호해 주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즉 자신의 권한을 넘어서는 월권에 대해서는 그 요구를 거절하는 ‘법정’(Gerichtshof)에서 ‘이성’은 자신의 권한과 한계에 관해 스스로 묻는다. 이러한 ‘이성 능력’ 자체에 대한 비판은 잃어버린 형이상학의 위엄을 되찾고 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한 일이다. 우리 인식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서 대상인식을 시도한 모든 이전의 이성의 월권에서 벗어나서 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의 가능성을 밝히는 일은 이제 ‘선험적 종합 판단’으로 이루어진 형이상학적 진술의 가능성을 탐구하여 선험적 인식의 원천과 범위, 그리고 그 한계를 규정하는 일로 요약된다. 우리에게 가능한 경험의 대상은 시간․공간 중에 주어지는 ‘현상’이지 결코 인식 주관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사물 자체’일 수 없다는『순수이성비판』의 핵심 생각을 통해 칸트는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답하고 있다.
(P.36)



  서양의 근대 철학이 주체로서의 인간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기 시작하였다면 이러한 근대 철학의 문제 의식은 칸트에게서 본격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코페르니쿠스적인 사유의 전환, 즉 대상에 대한 관심에서 그 대상을 구성하는 ‘주체의 자발적인 행위’에 대한 관심으로의 전환을 통해 새로운 형이상학의 가능성을 탐구한 칸트의 저작『순수이성비판』은 이런 점에서 서양근대 철학의 발생과 발전을 이해하는 출발점이다. 또한 『순수이성비판』에서의 칸트의 철학적 문제 의식에 대한 바른 이해는 왜 그의 초월적 관념론이 이후 피히테, 셀링, 헤겔로 이어지는 독일관념론으로 발전해 갔는지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토대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칸트의 주저『순수이성비판』에서의 칸트의 철학적 문제에 대한 철저한 연구는 서양 근대 철학의 이해에 필수적이라 하겠다.
(P.37)



  서양 근대 철학의 보편적인 특징을 사유 주체로서의 인간에 대한 관심에서 찾는다면 이러한 근대 철학의 문제 의식은 칸트에게서 본격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칸트는 그의 저서『순수이성비판』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사유의 전환을 통해, 즉 대상에 대한 관심에서 그 대상을 가능하게 하는 ‘주체의 자발적인 행위’에 대한 관심으로의 전환을 통해, 대상 인식에 있어서 인간 인식능력의 자발성이 갖는 의미를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말하자면 대상 인식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사유의 주체가 어떤 능동적인 행위를― 사유함이라는 의미에서의 행위― 해야 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칸트는 근대 철학의 주된 관심이었던 사유 주체로서의 인간 인식 능력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의 문제 의식은 단순히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궁극적 물음은 사실 철학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전통적 형이상학의 근본 문제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전통적 형이상학의 주제였던 ‘존재’와 ‘사유’의 관계에 대한 해명은 칸트에게서 새로운 실마리를 찾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칸트는『순수이성비판』에서 자신의 작업이 “이제껏 숨겨져 왔던 형이상학의 전(全) 비밀을 드러나게 해줄 열쇠”(헤르츠에게 보낸 편지; AA X130) 이길 기대했었던 것 같다. 이처럼 칸트가 전통적 형이상학의 물음을 자신의『순수이성비판』의 주된 과제로 삼고 있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잘 보여 주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일견 ‘형이상학’이라 는 학문과는 무관해 보이는 ‘초월 논리학’(transzendentale Logik)’이라는 개념이다.
  칸트는『순수이성비판』의 전체 체계를 전통적인 논리학의 연구 대상이었던, ‘개념’(Begriffe), ‘판단’(Urteile), ‘추리’(Schlüsse) 라는 요소에 맞추어 구성하면서『순수이성비판』의 주된 본문을 ‘초월 논리학’이라 이름 붙이고 있다.
(P.47)



  칸트에 따르면 우리의 ‘인식’(Erkenntnis)은 두 가지 종류로 구분되어 진다. ‘직관’(Anschauung) 과 ‘개념’(Begriff)이 바로 그것이다.(정확히 말해, ‘직관 중에 주어지는 인식’과 ‘개념을 통한 인식’) ‘직관’이 개별적인 대상(Gegenstand)에 대한 ‘직접적인 표상’ (unmittelbare Vorstellung)을 의미한다면 ‘개념’은 다수의 사물에 공통적인 특징을 매개로 해서 대상과 관계 맺는 ‘간접적 표상’ (mittelbare Vorstellung)이다. 단지 인식주관의 상태의 변화를 의미하는 ‘감각’(Empfindung)과는 달리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대상과 관계 맺고 있다는 점에서 ‘직관’과 ‘개념’은 둘 다 ‘객관적 지각’(objektive Perzeption)이라 불린다. 이와 같이 어떤 식으로든 대상과 관계 맺고 있는 표상들을 칸트는 통틀어 ‘인식’(Erkenn- tnis)이라 부르고 있다.
​(P.51)



  진정한 의미에서 인식은, 칸트에 따르면, ‘직관’과 ‘개념’이라는 두 요소가 합쳐져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하나의 인식 능력만으로는 불완전한 인식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감성’(Sinnlichkeit)의 역할이 없는 인식은 ‘내용’(Inhalt)이 없는 공허한 사고에 불과하고 ‘지성’(Verstand)의 기능 없이는 ‘맹목적’(blind)인 인식에 이르고 만다.

  직관과 개념은 우리의 전(全) 인식의 지반이다. 이에 어떤 방식에서건 대응하는 직관이 없는 개념은 인식이 될 수가 없고, 개념이 없는 직관도 인식이 될 수가 없다.(A50/B74, 한글판 96)
  이 두 가지 성질은 우열(優劣)이 없다. 감성이 없으면 대상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오성[지성]이 없으면 대상은 도무지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오성이 없으면 대상은 도무지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내용이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이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A51/B75, 한글판 96이하, 글쓴이 강조)
(P.52)



  ‘감성’(Sinnlichkeit)과 ‘지성’(Verstand)이라는 두 인식 능력의 근원적 차이에 근거해서 ‘논리학’의 근본 성격을 ‘지성의 규칙들에 관한 학(學)’으로 규정한 칸트는 이제 ‘논리학’ 일반의 구체적 분류를 시도한다. 이러한 ‘논리학’의 세밀한 구별지움의 작업을 통해 칸트가 노리는 바는 한마디로 ‘초월 논리학’의 뜻과 의미를 명확히 드러내는 것이다. 즉 논리학 일반의 분류를 통해 밝혀지는 ‘일반 논리학’과 ‘초월 논리학’의 본질적인 특징들을 서로 비교함으로써, 칸트는 ‘초월 논리학’의 의미를 해명하려 할 뿐 아니라 나아가 이 이론 체계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한 선이해를 제공해 주고 있다.
(P.54)



  ‘일반 논리학’의 한 부분으로서 순수한 이성의 학(學), 즉 “순수 이성론”(reine Vernunftlehre)에 해당하는 ‘순수 논리학’ 본질적으로 규정해주는 특징은 바로 ‘보편성’과 ‘순수성’이었다. ‘보편성’(Allgemeinheit)은 ‘일반 논리학’을 다른 것과 구별시켜 주는 특징이었다. ‘일반 논리학’(allgemeine Logik)이 ‘보편적’(allgemein)인 까닭은, ‘일정한 대상에 관해 올바르게 사유하는 규칙’을 가르치는 ‘특수한 지성 사용의 논리학’과는 달리, 그것이 없이는 어떠한 지성의 사용도 불가능한 ‘단적으로 필연적인 사유의 규칙들’을 다루기 때문이다. 즉 이 필연적 사유의 규칙들은 우리 생각의 내용이 관계를 맺고 있는 사유의 대상에 전혀 의존적이지 않기 때문에 특정한 대상의 내용적 차이와는 상관없이 모든사유에 있어 타당한 보편적인 사유의 형식으로 기능한다. 이러한 보편적 사유 법칙으로서의 ‘일반 논리학’에서 ‘응용 논리학’을 분리해 내는 기준은 바로 ‘순수성’(Reinheit)이다. 이 ‘순수성’은 유에 있어서 모든 경험적인 조건들로부터의 독립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구체적으로 지성을 사용하는 데 있어 영향을 미치는 모든 심리적인 조건들을 배제한 이 ‘일반적이면서 동시에 순수한 논리학’은 지성 사용의 규준(Kanon)의 역할을 하는 ‘선험적 원칙들’을 다루게 되고, 이런 점에서 칸트는 ‘순수 논리학’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학’(Wissenschaft)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P.59)



  칸트가 ‘초월적 인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상들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대상들 일반에 관한 선험적 개념들’(Begriffe a priori von Gegenständen überhaupt)을 다루는 모든 인식을 말한다.
  칸트는 이 ‘대상들 일반에 관한 선험적 개념들’을 ‘순수 지성 개념들’(die reinen Verstandesbegriffe) 혹은 ‘범주’ (Kategorie)라고 부른다.
  ‘초월적 인식’이 ‘대상 일반에 관한 선험적 개념들’을 다루고, 그것도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 개념들의 선험적 가능성, 즉 선험적 기원의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초월 철학’은 인간의 선험적 인식 능력에 대한 연구와 무관하지 않다.

  대상들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대상들 일반[대상들]을 우리가 인식하는 방식을― 이것이 선천적으로[선험적으로] 가능한 한에서― 일반적으로 다루는 모든 인식을 나는 선험적[초월적]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들의 체계가 선험 철학[초월 철학]이라고 불릴 것이다.(B25, 한글판 68, 글쓴이 강조)

  ‘초월적 인식’이 대상들을 다루지 않고 ‘대상 일반에 관한 선험적 개념들’을 다룬다고 하는 말의 의미는, 결국 ‘대상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 방식’(unsere Erkenntnis- art von Gegenständen)을 다루는 것이 바로 ‘초월적 인식’임을 말한다.
(P.66)



  ‘초월 논리학’은 “이러한 인식들”의, 즉 ‘순수한 지성의 인식’(die reine Verstandeserkenntnis)과 ‘순수한 이성의 인식’(die reine Vernunfterkenntnis)의 ‘기원’(Ursprung)이 무엇인지, 그 인식의 ‘범위’(Umfang)는 어디까진지, 그리고 이러한 순수한 지성을 통한 대상 인식이 어떻게 ‘객관적 타당성’(objektive Gültigkeit)을 확보할 수 있는지를 규정하는 학문이다.
  ‘지성’(Verstnad)을 통한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 즉 그러한 인식의 기원과 범위, 그 객관적 타당성을 탐구하는 학문인 것이다.
(P.69)



  ‘일반 논리학’의 경우에서 밝혀졌듯이 ‘규준’(Kanon)으로 사용 해야 할 ‘분석론’이 ‘기관’(Organon)으로 오용될 때 ‘변증론’은 생겨난다. ‘초월적 분석론’이 ‘규준’으로 사용된다는 것은 ‘지성의 경험적 사용’(der empirische Gebrauch des Verstandes)에 관한 지침을 제시 해준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지성’을 그 한계를 넘어서 사용하여, 경험의 한계 밖에 있는 대상에게까지 적용하려 할 때, 그것은 ‘순수 지성 개념을 초험적으로 사용’(der transzenden- tale Gebrauch der reinen Verstandesbegriffe)하게 되는 것이고 이로 인해 ‘초월적 변증론’이 생겨나게 된다.(A139/178, 한글판 168; A238f./B297f., 한글판 231 참조) 그러나 인간의 ‘지성’은 그 한계를 넘어서 자신을 사용하게 하는 유혹으로 인해 우리에게 주어져 있지도 않은 대상에 관해 판단하는 위험에 빠지고 만다.
(P.86)




  우리의 인식이 대상과 ‘직접적으로’(unmittelbar)으로 관계 맺는 방법을 칸트는 ‘직관’(Anschauung)이라 부른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대상에 관한 ‘직관’을 자발적으로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직관’은 반드시 대상이 우리에게 주어짐으로써, 즉 대상이 우리 ‘심성’(Gemüt)을 어떤 식으로든 촉발함으로써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직관’의 생겨남은 수동적이다.
(P.94)




  대상의 촉발에 의해 표상이 생겨나 우리에게 주어 질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인식 능력을 칸트는 ‘감성’(Sinnlichkeit)이라 부른다. 따라서 ‘감성’은 표상을 받아들이는, 즉 ‘용의 능력’(Rezeptivität)이지만 또한 그렇기 때문에 대상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이 ‘감성’을 통해서만 대상에 관한 ‘직관’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이 ‘직관’을 가지고서 ‘지성’(Verstand)은 비로소 대상에 관한 사유를 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대상에 대해 사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의 사유가 대상이 주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감성’과 관계 맺어야만 한다.
(P.95)



  칸트는 ‘초월적 감성학’을 끝마치며 ‘맺음말’을 통해 지금까지 밝혀진 ‘시공 이론’이 자신의 초월 철학의 일부를 어떻게 해결 할 수 있었는지에 관해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다. 즉 ‘시간’과 ‘공간’이라는 순수직관의 형식은 감각 중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대상들에 관해 우리가 선험적인 종합 판단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감성의 조건들이며 동시에 그러한 선험적 종합판단들의 가능성의 근거가 되는 우리 인식의 원리들이다.
(P.119)



  칸트에게서 범주’(Kategorie)는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은『순수이성비판』의 의미와 체계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의 인식은 심성의 두 기본 원천, 즉 표상을 받아 들이는 능력인 ‘감성’(Sinnlichkeit)과 표상자신을 자발적으로 만들어 내는 능력인 ‘지성’(Verstand)으로부터 생겨난다. 그리고 이 두 인식의 원천은 서로 우열이 없을 뿐 아니라 혼돈되어서도 안 되는 독자적인 인식 능력이다.(A50ff./B74ff., 한글판 96 이하 참조) 따라서 칸트는『순수이성비판』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초월적 원리론’(transzendentale Elementarlehre)에서 이러한 근원적인 두 인식 원천에 관한 이론인 ‘초월적 감성학’(transzendentale Ästhetik)과 ‘초월 논리학’(transzendentale Logik)을 각각 구별하여 다루고 있다.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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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농담이다
김중혁 / 민음사 / 2016 / 244쪽
(2018. 3. 8.)

슬픔에 대한 질량 보존의 법칙(p.190) 표현이 너무 좋다



  화성이라는 곳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는 길은 무척 멀게 느껴지겠지만 돌아오는 길은 훨씬 가까울 것이다. 수개월이 걸린다고 해도 떠날 때보다는 가깝게 느껴질 것이다. 반대의 경우일 수도 있다.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클 때는, 떠나 온 곳이 몹시 그리울 때는, 돌아가는 길이 멀게 느껴진다. 돌아갈 곳이 있는 자의 슬픔이다. 송우영은 그런 슬픔이 어떤 종류의 슬픔일지 궁금했다. 돌아갈 곳이 없는 자의 슬픔은 이제 잘 알게 됐다. 더 이상 보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슬픔과 함께 알게 됐다. 어머니와 함께했던 시간으로는 이제 돌아 갈 수 없고, 어머니의 부재는 그 시간을 통째로 뒤덮을 것이다. 곧 기쁨으로 변할 수 있는 슬픔이란 온전한 슬픔이 아닌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곧 슬픔으로 변할 기쁨 역시 온전한 기쁨이 아닌 것은 아닐까.
​(P.30)


송우영은 술기운이 깊어지면서 자신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것인지 세미에게 관심을 얻고 싶어하는 것인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병 속에서 튀어나오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송우영이 일부러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있는 중 인지도 몰랐다. 굳이 꺼낼 필요가 없는 이야기도 있고, 병 속에 들어 있는 것만으로 충분한 이야기도 있다. 코미디를 할 때도 그런 혼동이 자주 있었다. 웃긴 이야기들은 이미 그 자체로 웃긴 이야기들인지, 아니면 자신이 하면서 웃겨지는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송우영은 웃긴 이야기를 더 웃기게 할수 있다. 웃기지 않은 이야기도 웃기게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송우영이 웃기지 못한 이야기는 그 자체로 웃기지 않았던 이야기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P.123)


  강차연은 찻잔을 비우고 집을 나섰다. 비는 그치고, 오후의 하늘에 무지개가 펼쳐져 있었다. 어떤 색이라고 말하기 힘든 수많은 색의 모임이었다. 공기와 물방울들과 빛이 허공에서 미로처럼 얽혀 있었다. 복잡한 것들이 때로는 단순하게 아름다워 보일 때도 있다는 걸 강차연은 예전에 배웠다. 마음이 썩어 들어가도 겉모습은 평온해 보일 수도 있다는 걸 강차연은 예전에 알았다. 강차연은 자동차 안에 가만히 앉아 무지개를 바라보았다. 어디로도 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기에 있고 싶지도 않았다. 갈 수도 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남아 잃는 건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어디로도 가지 못하는 자신이 계속 부풀어오르는 것 같다고 강차연은 느꼈다.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위아래로만 움직였다 낙하하고, 다시 계단을 오르고, 다시 떨어지고,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또다시 뛰어내리는 일만 반복하고 있었다.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움직이지 못 하니까 계속 팽창하기만 했다. 이러다가 펑 하고 터질지도 몰랐다. 몸이 팽창하니까 마음과 마음의 결속도 느슨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몸속의 모든 장기들도 밀도가 없어지는 것 같 았다 하나하나 옅어지기만 하는 것 같았다. 강차연은 자신의 팔뚝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옅어지고 있지 않은지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P.183)


  “누군가 슬퍼할 거 라는 이유 때문에 그걸 얘기하지 않으면 슬픔이 사라질 거 같아? 절대 아냐. 세상에 슬픔은 늘 같은 양으로 존재해. 슬픔을 뚫고 지나가야 오히려 덜 슬플 수 있다고."
  “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이해하기 힘들어요. 얼마나 슬플까, 얼마나 기쁠까, 대체 얼마나 아플까." 
  “당연하지, 바보야. 당연한 거야. 그걸 이해할 수 있다고 떠느는 놈들이 사기꾼이야. 감정은 절대 전달 못 해. 누군가가 '슬프다'라고 얘기해도, 그게 전달되겠어? 각자 자기 방식대로 그걸 받아들이는 거야. 진짜 아픈 사람은 자신이 아픈 걸 10퍼센트도말 못 해. 우린 그냥......, 뭐라고 해야 하나, 그냥 각자 알아서들 버티는 거야. 이해 못해 준다고 섭섭할 일도 없어. 어차피 우린 그래. 어차피 우린 이해 못하니까 속이지는 말아야지. 위한답시고 거짓말하는 것도 안 되고, 상처받을까 봐 숨기는 것도 안 돼. 그건 다 위선이야.”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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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교수의 정신없는 하루​
잘 폴 몽쟁(글), 로랑 모로(그림) / 박아르마 / 함께읽는책 / 2012 / 76쪽
(2018. 3. 5.)


  "우리는 매일 태양이 뜨고 지는 것을 본다. 마치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는 착각이 들게 말이다. 그러나 바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
  그는 하늘의 변회를 그저 지켜만 보고도 천체의 움직임을 그리고 계산하였다. 흔히 그럴 법한 경험에 속아 넘어가지 않은 것이다...... 자신의 경험을 통해 우주로 하여금 문제에 답하도록 만들었다. 판사가 증인을 진술하게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자연으로 하여금 자신이 만든 생각의 규칙을 따르도록 만들었다. 자연을 연구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는 그 스스로 과학의 대상을 세운 것이다!
우주의 중심은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다. 의식의 중심은 객체가 아니라 나의 정신이다...... 이 같은 혁명이 어디에 있겠는가!”
(P.18)


  “인간의 지식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먼저 뱀장어 수프의 독특한 맛처럼 경험을 통해 알수 있는 것, 그리고 다른 한편, 수학이나 철학에서처럼 이성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되는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것이 그것입니다. 나는 수학 문제를 풀기 위해 명백한 정의, 즉 방정식 등에서 출발합니다. 반면 철학으로는 정의를 내리려고 노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자들은 수많은 질문을 합니다.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우리는 언제 먹는가?...... 결국 철학이 정의하려고 애쓰는 것은, '나의 이성 그 자체를 어떤 목적에 따라 사용해야 하는가'입니다. 철학은 마지막 목적, 즉 인간 이성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는 학문입니다. 말하자면 철학은 '완전한 지혜란 무엇인지 사유해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철학'이 아닌 '철학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P.28)


“아! 우리의 경이롭고 가혹한 주인인 이성...... 여러분의 이성은 기부할 수 없는 질문들 즉 신은 존재하는가, 우리의 영혼은 영원불멸한가, 우 리는 자유로운가 등에 관한 질문들로 우리를 짓누릅니다.
나는 신이 존재함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나는 또한 신이 존재하지 않음도 증명할 수 있습니다. 너무나 혼란스럽다고 솔직히 말해 보세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와 같은 문제에 접근하기 전에 이성을 비판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즉 학문은 법정에 출두해야 합니다. 그곳에서 학문은 그가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바를 보이고 그 한계 또한 드러낼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학문이 모든 문제에 답을 줄 수는 없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즉 내가 무언가를 깨닫기 위해서는 그 무언가를 공간과 시간 속에 들어가도록 해야 합니다. 공간과 시간은 조건이자, 나의 정신이 일제의 경험을 하게 되는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을 공간과 시간 속에서 연구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여러분은 이제 왜 우리가 신앙에 골몰할 필요가 없는지 이해했을 것입니다. 혹 여러분이 아무것도 이해 하지 못했다면, 아마도 나를 쾨니히스베르크의 위대한 중국인(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테지요......"
(P.30)


  “내 마음을 늘 새롭게, 더 한층
 감탄과 경외심으로 가득 채우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내 머리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이고 다른 하나는 내 가슴속에 있는 도덕법칙이다.”
(P.66)
​​

  자연과학자들은 외부의 사물을 있는 그대로 관찰한 다음 사물의 법칙과 원리를 만들어 지식 혹은 진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철학자에게 외부의 사물이나 대상은 지식 혹은 진리를 얻기 위한 재료에 불과하며 경험을 통해 받아 들인 외부의 대상으로 지식과 진리를 만들어 내는 것은 결국 인간 개개인의 주관적인 이성이 된다. 그렇다면 외부에서 받아들인 지식은 이성과 어떻게 작용하여 철학적 진리가 되는 것일까? 칸트는 선천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이성은 경험과도 관계없고, 심리적인 의식 작용과도 관계없는 순수이성이라고 말한다. 즉 선천적인 이성의 기능이 바로 순수이성이며, 이는 이성이 그 자신 스스로를 비판할 때 주어진디는 것이다. 이렇듯 논리적으로 판단하고 추리하는 이성이 선천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져 있고, 이 선척적 이성이 정당한 판단과 추리를 할 때 인간은 진리를 얻을 수 있다는 칸트의 생각은 이후 철학에서 이성을 중요시하게 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P.71)


  소크라테스는 “거짓말하지 말라”, “빌린 물건은 꼭 돌려 주어라" 등 절대적인 도덕을 강조했으나, 살다보면 우리는 거짓말도 하고 이런저런 핑계로 빌린 물건을 돌려주지 못하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도덕의 상대성을 생각 해 볼 수 있다. 누군가 좋은 동기로 도덕적인 행동을 하였지만 결과가 나쁘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탓할 수 있을까? 칸트는 탓할 수 없다고 말한다. 즉 도덕적인 행위는 동기가 중요하지 결과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칸트는 이런 관점에서 모든 인간에게는 선을 행하려는 의지가 있다는 뜻의 '선의지'를 주장한다. 이 세상에는 언제 어디서나 통용되는 선의 가치가 있으며 사람들은  이 선을 행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다. 그러나 선의지를 행하기는 결코 쉽지 않으므로 교육과 경험을 통해 선의지를 실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었다. 칸트는 실천하지 않는 도덕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므로 도덕적 행위를 의무로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선의지가 아닌 개인의 이기적인 욕심에 따른 행위가 '의무에 맞는 행위'라면, 실천해야 한다는 명령에 따라 행하는 것은 '의무에서 우러나오는 행위'로, '거짓말하지 말라', '부모에게 효도해라'. '약속을 지켜라'와 같은 의무가 바로 후자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런 행위를 실천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으므로 이런 행위를 실천할 수 있게 법으로 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칸트의 '정언적 명령'이다. 즉 '돈 많이 벌면 부모에 게 효도하겠다'와 같이 어떤 조건이나 상황 아래에서만 타당한 그런 행위가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행해야 하는 의무적인 도덕법칙인 것이다. 그래서 칸트는 의무적인 도덕법칙은 '할 수 있다'가 아니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결과가 아닌 동기에 중요성을 두는 칸트의 도덕철학이다.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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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
(김영하와 함께하는 여섯 날의 문학 탐사)
김영하 / 문학동네 / 220쪽
(2018.3.4.)




  여러분도 잘 알고 있다시피 저는 작가입니다. 작가니까 책을 씁니다. 지금까지 아마 스무 권 정 도의 책을 출간했을 겁니다. 그런데 읽은 것은 몇 권일까요? 저는 다독가는 아니지만 아마 태어나서 지금까지 최소 수천 권은 읽었을 겁니다. 이 비대칭성에 저는 늘 압도되곤 합니다. 수천 권을 읽고 고작 스무 권을 쓴 셈인데 대부분의 작기들이 그렇습니다. 많이 읽고, 그에 훨씬 못 미치는 책을 써냅니다. 양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질에 있어서도 대체로 읽은 것보다 못한 것을 써서 세상에 남깁니다. 지금 제 서가에 있는 책들은  짧게는 몇 년, 길게는 몇천 년을 살아남은 것들입니다. 지금 제 
앞에 놓여 있기까지 그 책들은 시대와 언어를 초월해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오래 살아남은 책들, 사람들이 흔히 고전이라 부른 책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나갈 생각입니다.
(P.9)​


  어떤 이들은 고전이 진부할 것이라 지레짐작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래 살아남은 고전은 처음부터 나름의 방식으로 새로웠는데 지금 읽어도 새롭게 다가옵니다. 다시 말해 지금 읽어도 새로운 것은 쓰인 당시에도 새로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전이라고 해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 역시 당대의 진부함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고전은 당대의 뭇 책들과 놀랍도록 달랐기 때문에 살아남았고 그렇기에 진부함과는 정반대에 서 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낡거나 진부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책들은 살아남았 고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고 후대로 전승되었을 겁니다.
(P.16)


​  비극은 대부분 우리보다 나은 사람이 내재된 성격적 결함으로 파멸히는 얘기입니다. 반대로 희극은 우리보다 못한 이가 우스꽝스런 행동을 하는 것을 편안한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나리오를 쓰려고 한다면 적어도 자기가 쓰는 것이 비극인지 희극인지를 결정해야 하고, 그에 따라 걸맞은 덕성 혹은 모자람을 인물에게 부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또한 “비극에서 우리를 가장 매혹하는 것 은 급전急轉과 발견”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어 극작의 초심자 들이 “사건의 결합보다 조사措辭와 성격 묘사에서 성공을 거둔다”고 말하는데, 이는 플롯을 성격보다 더 높이 평가하는 그의 이론과 일치합니다. 그는 극에서 중요한 것은 인물의 성격보다 '사건의 결합', 즉 플롯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 플롯에서 중요한 것은 스토리를 완전히 달리 보게 만드는 반전, 그리고 그 반전을 통해 주인공이 획득하게 되는 새로운 인식이라고 보았습니다.
(P.26)
​​

  독서는 왜 히는가? 세상에는 많은 답이 나와 있습니다. 저 역시 여러 이유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독서는 우리 내면에서 자라나는 오만(휴브리스)과의 투쟁일 겁니다. 저는 호메로스의『오디세이아』와 소포클레스의『오이디푸스 왕』을 읽으며 '모르면서도 알고 있다고 믿는 오만과 '우리가 고대로부터 매우 발전했다고 믿는 자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P.29)


  그후로도 저는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독서를 통해 셀 수 없이 많은 인물을 만나고, 세계의 거의 모든 도시를 여행했으며, 평생 한 번도 겪어볼 일이 없는 사건들에 연루되었습니다. 그 기억과 경험은 고스란히 제 안에 남아 있고 그 세계는 제가 직접 경험한 현실보다 훨씬 더 크고 풍부합니다. 이 세계가 모두 가짜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책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고 저라는 인간의 정신 안에서 고유한 방식으로 유일무이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환상에 빠져 현실을 잘못 보아서는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환상이고, 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현실일까요? 인간이 그것을 분명히 구분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현실 에 너무 집착해 자기 내면의 정신적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 문 제는 아닐까요?
(P.66)​


  『돈키호테』와『마담 보바리』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작품이 아닙니다. 어리석은 미치광이 돈키호테와 광기 어린 사랑으로 자신을 망쳐버린 에마 보바리는 세르반테스와 플로베르가 창조한 인물이지만, 그들에게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야기 속의 세계가 계속되기를 바라고, 그 안에 머물기를 원하는 우리가 거기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인물들에 매료되고 자기도 모르게 책장을 넘기며 그들의 뒤를 따라갑니다. 그러는 사이 그들이 우리의 의식에 침투해 우리의 일부를 돈키호테와 에마 보바리로 바꾸어 놓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읽은 소설은 우리가 읽음으로써 비로소 우리의 일부가 됩니다. 한번 읽어버린 소설은 더이상 우리 자신과 분리할 수 없습니다.『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은 사람이라면 나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나가사와의 말은 그런 면에서 일리가 있습니다. 같은 책을 읽었다는 것은 두 사람의 자아 안에 공유할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디는 뜻이니까요.
  동시에 소설도 우리를 통해 증식을 거듭합니다. 그렇게 이야기와 인간이 하나가 되면서 이야기의 우주가 무한히 확장해 갑니다.  한때 저는 인간이 이야기의 숙주라 생각했습니다. 이야기가 유전자처럼 인간을 탈 것으로 삼아 다음 세대로 전승된다고 믿었던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졌습니다. 세상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한 대부분의 것들을 이야기로부터 배웠고, 그것을 기준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그 해석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인간이라면, 그런 인간은 과연 무엇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인간이 바로 이야기입니다.
  돈키호테와 에마 보바리는 비록 현실의 존재는 아니지만 김영하라는 생물학적 존재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살아남을 것이고 앞으로도 증식을 거듭할 겁니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 그것은 인간이라는 어떤 우월한 존재가 책이라는 대량생산품을 소비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라는 이야기가 책 이라는 작은 틈을 통해 아주 잠깐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세계와 영겁의 시간에 접속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바로 이야기이고, 이야기가 바로 우주입니다. 이야기의 세계는 끝이 없이 무한하니까요.
(P.67)

​​​
  우리는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 소설의 감취진 중심부를 찾습니다. 이것이 바로 소설을 읽을 때 우리 머릿속에서 무의식 적으로 소박하게 또는 성찰하면서 의도적으로 가장 많이 하는 작업입니다. 소설과 다른 문학 서사의 차이는 감춰진 중심부가 있디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겠습니다. 소설에는 우리가 그 존재를 믿으며 찾는 감취진 중심부가 있습니다.
  소설의 중심부는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을까요? 소설을 만드는 모든 것이 그 재료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중심부는 우리가 단어 하나하나를 따라 좇아간 소설의 표면과는 멀리 떨어진 배후 너머에 있어서 보이지 않고 쉽게 찾을 수 없는, 거의 계속 움직여서 잡을 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이 중심부의 징후는 사방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설의 모는 세부 사항, 즉 거대한 풍경의 표면에서 마주친 모는 것은 서로 연결됩니다.
(P.83)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주제나 교훈을 얻기 위함도 아니고, '감춰진 중심부'에 도달하기 위한 여정도 아닙니 다. 소설을 읽는 동안 우리는 분명히 어떤 교훈을 얻은 것 같기도 하고, 주제를 찾아낸 것 같기도 하고, '중심부를 열심히 찾아 헤매다 얼추 비슷한 곳에 당도한 것도 같은데, 막상 다 읽고 나면 그게 아니었다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소설을 읽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헤매기 위해서일 겁니다. 분명한 목표라는 게 실은 아무 의미도 없는 이상한 세계에서 어슬렁거리기 위해서입니다. 소설은 세심하게 설계된 정신의 미로입니다. 그것은 성으로  향하는 K의 여정과 닮았습니다. 저멀리 어슴푸레 보이는 성을 향해 길을 따라 걸어가지만 우리는 쉽게 그 성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대신 낯선 인물들을 만나고 어이없는 일을 겪습니다. 일상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정들을 경험하기도 하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문제를 곰곰이 짚어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서점 서가에 꽂힌 그 수많은 책들 중에서 우리가 굳이 소설을 집어드는 이유는, 고속도로로 달리는 것에 싫증이 난 운전자가 일부러 작은 지방도로로 접어드는 이유와 비슷합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의 이성은 줄거리를 예측하고, 작가의 의도를 가늠하고, 인물의 성격을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의 누군가와 비교하기도 합니다. 반면 우리의 감성은 작가가 써놓은 적확하고 아름다운 문장에 탄복하기도 하고, 예리한 인물 묘사에 공감하기도 하고, 주인공이 처한 고난에 가슴 아파하기도 합니다. 이성과 감성이 적절히 균형을 이룰 때, 우리의 독서는 만족스러운 경험이 됩니다. 때로 이성에 이끌렸다가 때로 감성에 이끌렸다가 하면서 우리의 정신은 책 속에 구현된 그 이상한 세계를 점차 이해해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세계의 일원이 됩니다.
(P.101)


  소설을 읽음으로써 우리가 얻은 것은 고유한 헤맴, 유일 무이한 감정적 경험입니다. 이것은 교환이 불가능하고, 그렇기 때문에 가치가 있습니다. 한 편의 소설을 읽으면 하나의 얇은 세계가 우리 내면에 겹쳐집니다. 저는 인간의 내면이란 크레페 케이크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상이리는 무미건조한 세계 위에 독서와 같은 정신적 경험들이 차곡차곡 겹을 이루며 쌓이면서 개개인마다 고유한 내면을 만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P.104)


  소설이 이렇게 엄연한 자연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면, 독자는 이 자연을 어떻게 인식하고 경험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 자연이 히말라야의 봉우리나 아마존의 정글처럼 함부로 다가가기 어려운 것이라면 어떨까요? 독자들은 이런 책들과 어떤 투쟁을 벌이는 것이며, 그런 도전의 결실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제가 나보코프의 『롤리타』나 도스토엡스기의 『죄와 벌』, 미셸 우엘베의 『소립자』,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조나탕  리텔의『착한 여신들』같은 작품을 읽으며 무수히 떠올린 질문들 이었습니다. 이런 소설들을 읽는 것은 정신적으로 높은 수준의 긴장을 요구합니다. 윤리적으로나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주인공과 그들의 행위를 받아들이는 것도 어렵고,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감당하는 것도 힘겹습니다. 그러나 작가 들은 꾸준히 이런 작품을 써왔고, 많은 독자들이 이런 작품들 을 사랑했습니다. 독지는 작품의 일점일획도 고칠 수 없습니 다. 그러니 오직 이를 감당하는 일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습 니다. 그런데도 이 책들을 읽으려는 독자들의 줄은 여전히 줄지 않고 있습니다.
(P.120)


  한갓 독자에 불과한 제가 작가의 무의식을 파헤치려고 노력하고, 소설을 작가(나보코프가 연기한 나보코프?)가 읽기를 원한 대로 읽지 않으려 애를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소설을 읽는 행위가 끝없는 투쟁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소설은 일종의 자연입니다. 독자는 그것의 일점일획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 자연을 탐험하면서 독자는 고통과 즐거움을 모두 느낍니다. 아름다운 운해를 보면서 감탄하는 등산객처럼 소설의 어떤 대목에서 독지는 미적 쾌감을 느끼면서 행복해합니다. 그러나 어떤 대목에서는 이 탐험을 계속 할 것인가 회의에 빠지기도 합니다. 심한 정신적 고통을 느낄 때도 있고 도덕적 아노미 상태에서 허우적거리기도 합니다. 독자는 소설이라는 자연을 극복하기 위해 나름의 투쟁을 전개합 니다. 우회로를 찾아보기도 하고, 작가의 의도를 넘겨짚어보기도 하고, 소설 속의 모든 문장을 의심의 눈초리로 살펴보기도 합니다.
  『롤리타』와『이방인』 같은 작품의 주인공과 그들의 비윤리적 비상식적 행위를 견디는 것은 어쩌면 상대적으로 쉬운 일 일지도 모릅니다. 더 어려운 투쟁은 바로 작품의 매력과 싸우 는 것입니다. 우리가 500페이지에 달하는 소아성에자의 회고 록을 읽는 이유,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인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장례를 치르자마자 여자친구와 해변에서 노닥거리고, 햇볕이 눈이 부시다며 사람을 총으로 쏘아 죽이는 인물의 내면을 따라가고, 전당포 노파와 그의 여동생을 도끼로 살해한 후에도 참회하지 않는 인물의 행동을 지켜보는 이유는 나보코프와 카뮈와 도스토옙스키가 쓴 그 작품들에 우리가 매력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들은 우리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우리는 완독을 할 수 있었을 겁니다.
(P.134)​


  이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도덕하거나 사회적 통념과는 벗어난 행동을 하는 인물 의 이야기에 나는 왜 매력을 느끼는가? 나는 괴물인가? 니체 식으로 말하자면, 혹시 나는 너무 어두운 심연을 지나치게 오래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평범하고 도덕적인 삶을 영위하는 내가 이런 이야기에 매혹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인가? 저는 이런 의문들과 싸우며 한 권 한 권을 읽어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다행히도 이런 작품들은 세계명작 혹은 고전으로 불리고, 아름답고 우아한 장정으로 제책되이, 근엄한 교수님의 해설을 달고 우리 책꽂이에 꽂혀 우리를 안심시킵니다.
그래도 뭔가 있을 거야? 안 그래? 분명 뭔가가 있기는 있을 겁 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책을 읽는 우리의 자아가 안전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책들은 독자와 힘 겨루기를 합니다. 그 책들을 읽고 나면 독자의 자아는 읽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기 어렵습니다. 이전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인물과 생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런 인물과 사상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는(아니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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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진 여인들
(Women in Love)(1920)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 손영주 / 을유문화사 / 828쪽
​(2018.3.3.)




  자매가 걸어가는 길은 광부들의 계속되는 발길로 시커멓게 다져졌고, 철제 울타리를 따라 밭과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울타리에 달린, 길로 통하는 계단은 오가는 광부들의 무명바지에 닳아 반짝였다. 자매는 좀 더 가난한 집들 사이로 들어섰다. 거친 천으로 된 앞치마를 두른 여자들이 그 구역 끝머리에서 팔짱을 끼고 서서 잡담하면서 토박이들의 그 길고 지칠 줄 모르는 시선으로 브랑웬 자매가 지나가는 걸 빤히 지켜보았다. 애들은 욕을 해댔다.
  구드룬은 약간 얼떨떨한 상태로 계속 걸음을 옮겼다. 이것이 인간의 삶이라면, 이들이 완전한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들이라면, 그 바깥에 있는 나의 세상은 과연 뭘까? 그녀는 자신의 녹색 스타킹과 커다란 녹색 벨루어 모자, 그리고 짙은 파란색의 부드러운 코트를 의식했다. 그러자 마치 심장이 오그라든 채 아주 불안정한 대기 위를 걷고 있는 듯, 금방이라도 땅으로 곤두박질칠 것만 같 았다. 그녀는 두려웠다.
  구드룬은 캄캄하고 창조되지 않은 적대적인 세계의 이 같은 침해에 오랫동안 단련된 어슐라에게 바짝 달라붙었다. 그러나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기라도 하듯 구드룬의 마음은 내내 울부짖고 있었다. '다시 돌아가고 싶어, 도망치고 싶단 말이야. 난 알고 싶지 않아 이런 것이 존재한다는 걸 알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계속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P.14)


  사람은 우연히 태어나 우연히 죽을 수 있다. 아니, 그럴 수가 없는 것인가? 인간 각각의 삶은 모두 순전한 우연을 따르고, 오직 유(類)나 속(屬)이나 종(種)만이 보편적인 의미를 갖는 것인가? 아니면, 아예 순전한 우연 따위란 없는 것인가? 발생하는 모든 것은 보편적인 의미를 갖는 것일까? 그런 걸까? 버킨은 크라이치 부인이 자신의 존재를 잊었듯이 그녀의 존재를 잊은 채 거기 그렇게 서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P.37)


  “인종이란 게 상업적인 면을 갖고 있을 수도 있죠.” 그가 말했다. “사실은 그래야만 합니다. 인종이란 가족과 같은 것이거든요. 먹여 살릴 양식을 마련해야만 하지요. 그리고 양식을 마련하려면 다른 가족들, 다른 나라들과 싸워야만 합니다. 왜 그래선 안 된다는 건 지 난 모르겠는데요.”
  허마이어니가 다시 거만하면서도 침착하게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대답했다 “난 경쟁심을 자극하는 건 언제나 잘못된 거라고 생각해요. 증오를 불러일으키거든요. 그리고 증오란 계속 쌓이는 법이고요.”
  “하지만 남들과 같이지려는 경쟁심을 완전히 없애 버릴 수는 없잖습니까.” 제럴드가 말했다. “그건 생산과 진보를 위해 꼭 필요한 자극제 가운데 하나죠.”
  “아니에요.” 허마이어니가 느릿느릿 대꾸했다. “난 그것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한마디 안 할 수가 없겠는데.” 버킨이 말했다. “나는 경쟁심이라는 걸 협오해요.”
(P.41)
​​

  “지식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지식 이외의 모든 것을 잃는 것 아닌가요?” 그녀가 딱할 지경으로 물었다. “예컨대 만일 내가 꽃에 대해서 안다고 하면 난 꽃 자체는 잃어버리고 그것에 대한 지식만 갖게 되는 것 아닌가요? 우리는 본질을 그림자와 바꿔치기하고 있지 않나요? 우린 이 죽은 지식을 위해 삶을 내놓고 있는 것 아닌가요? 그렇다면 안다는 것이 결국 내게 무엇을 뜻하는 걸까 요? 이 모든 앎이라는 것이 내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걸까요? 아무 의미도 없는 거예요.”
  “당신은 그저 말을 만들어 내고 있을 뿐이오.” 그가 말했다. “지식이 당신에겐 전부죠. 심지어 당신의 동물주의라는 것도 당신의 머리가 원하는 것일 뿐이오. 당신은 동물이 되기를 바라는 게 아니 라, 정신적인 짜릿함을 만끽하기 위해서 당신 자신의 동물적인 기능을 관찰하고 싶어 하는 거란 말이오. 당신의 동물주의는 전적으로 부차적이오...... 게다가 가장 완고히고 지독하게 말라비틀어진 주지주의보다도 더 퇴폐적이죠. 일정과 동물적 본능에 대한 당신의 이러한 사랑이야말로 주지주의의 최악의 마지막 형태가 아니고 뭐란 말입니까? 열정과 본능이라...... 당신은 이런 것들을 더없이 원하긴 하지만, 그건 당신 머리, 당신의 의식 속에서 그러 겁니다. 모든 게 당신 머릿속에서만, 그 두개골 속에서만 일어난단 말이오. ……당신은 그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의식하지 않으려는 것일 뿐이오. 말하자면 당신이란 사람한테 딱 어울리는 거짓을 원하는 거란 말입니다” 버킨의 공격에 허마이어니는 딱딱하게 굳어 독기를 뿜었다. 어슐라는 놀라움과 부끄러움에 뒤덮여 서 있었다. 그들이 서로를 얼마나 증오하는지 보니 정말 무시무시했다.
(P.61)


  “난 새로운 종교를 원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새로운 걸 받아들일 사람들이 아니라고 생각해. 그들이 새로움을 원하는 게 틀림없긴 하지. 그렇지만 우린 우리가 초래한 이 삶을 똑바로 노려보고, 그걸 거부하고, 우리 자신의 옛 우상들을 완전히 부숴 버리는 일은 절대 안 할 거야. 낡은 것을-심지어 자신의 내부에 있는 것까지도-없애 버리려는 아주 강한 열망이 있어야만 새로운 것이 도래하는 거지.” 제럴드는 버킨을 찬찬히 지켜보았다.
  “이 삶을 부숴 버려야 한다는 건가? 몰아서 내쫓아야 한다는 거야?” 제럴드가 물었다.
  “이 삶이라...... 맞아. 이 삶을 완전히 때려 부숴야지. 안 그러면 꽉 끼는 가죽 안에 든 것처럼 그 안에서 쪼그라들어 말라 죽게 될 거에 한 치도 더 늘어나지는 않을 테니까.”
(P.81)


  “난 말이지,” 그가 말했다.
  “사람은 정말로 순수한 하나의 활동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해....... 사랑을 그런 하나의 순수한 활동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 그렇다고 해서 내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아니지.”
  “자넨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해 본 적이 있나?” 제럴드가 물었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버킨이 대답했다.
  “최종적으로는 아니란 말인가?” 제럴드가 말했다 최종적으로는...... 궁극적으로는...... 아니지.” 버킨이 말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야.” 제릴드가 말했다.
  “그러고는 싶나?” 버킨이 물었다.
  제럴드는 거의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눈을 번뜩이며 오랫동안 버킨을 바라보았다.
  “모르겠어.” 그가 말했다.
  “난 그러고 싶어...... 사랑을 하고 싶다고.” 버킨이 말했다.
  “그래?”
  “응, 난 사랑의 최종성을 원해.
  “사랑의 최종성이라.” 제릴드가 버킨의 말을 되뇌었다. 그러고는 잠시 있더니, “딱 한 여자만?”이라고 덧붙여 물었다. 들판을 따라 누렇게 물결치는 석양에 버킨의 얼굴이 긴장된, 그리고 알 수 없는 확고부동함으로 환히 빛났다. 제럴드는 여전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 한 여자” 버킨이 말했다.
  그러나 제릴드에게 버킨의 대답은 확신에 차 있다기보다는 고집을 부리는 것처럼 들렸다.
  “난 여자를 믿지 않아 그리고 여자만이 내 삶을 완성시킬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제럴드가 말했다
  “자네 삶의 중심도 핵심도 아니라는 건가-자네와 한 여자 사 이의 사랑이?” 버킨이 물었다.
  버킨을 바라보는 제럴드의 눈이 야릇하고 겁나는 미소를 띠며 가늘어졌다.
  “난 그렇게 느껴 본 적이 없어.” 그가 말했다.
  “그런 적이 없다고? 그렇다면 자네에겐 삶의 중심이 어디에 놓여 있나?”
  “모르겠어...... 그게 바로 누가 나한테 좀 말해 줬으면 하는 거야. ......내가 아는 한내 삶은 중심이란 게 없어. 사회적인 메커니즘에 의해 인위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거지.” 버킨은 어려운 문제를 풀기라도 하는 듯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P.86)


  허마이어니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만약 우리가 정신에 있어서는 모두가 하나이고 평등하며 모두가 형제라는 것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나머지는 문제 될 게 없을 거예요. 서로 트집 잡고 시기하는 일이나 파괴하는, 오로지 파괴만 하는 권력 투쟁 따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거예요.” 이 말에 대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떠났을 때 버킨이 쓰디쓴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그건 그렇지 않아요, 정반대요, 허마이어니. 우리는 정신에 있어서 모두 다르고 평등하지 않아요...... 그건 우연한 물질적 조 건들에 기초한 사회적 차이들일 뿐이오. 추상적으로 혹은 수리적으로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고 말할 수는 있을지 모르죠. 누구나 배고픔과 목마름을 느끼고 두 개의 눈, 한 개의 코, 그리고 두 개 의 다리를 갖고 있으니까. 수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모두 같은 거죠. 그렇지만 정신적으로는 순전한 차이만이 존재할 뿐이어서, 평등이니 불평등이니 하는 것은 문제 되지 않아요. 바로 이런 두 가지 지식의 토대 위에 국가를 세워야 하는 겁니다. 당신의 민주주의는 새빨간 거짓이에요....... 당신이 말하는 인간의 형제애라는 것을 수리적인 추상 개념 이상의 어떤 것에 적용한다면 그건 완전한 허위란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처음에 우유를 마시고, 모두가 빵과 고기를 먹으며, 모두가 자동차를 타고 싶어 한다-여기에 형제애의 시작과 끝이 들어 있죠. 하지만 여기에 평등은 없어요.
  그러나 나, 나 자신, 나 자신인 나, 나는 평등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정신에 있어서 나는, 한 개의 별이 다른 별과 떨어져 있듯이 별개이고, 질적으로 양적으로 달라요. 국가를 바로 그 사실 위에 세우란 말이오. 한 인간은 다른 인간보다 나을 것이 없어요. 모두가 평등해서가 아니라 서로가 본질적으로 타자이기 때문이고, 그래서 비교 조항이 존재 하지 않는 겁니다. 비교하기 시작하는 순간, 한 사람이 다른 사람 보다 훨씬 더 나아 보이죠. 당신이 상상하는 불평등이란 전부 본래 있는 겁니다.
  난 모든 사람이 세상의 재화 중에서 자기 몫을 가지기를 바라요. 그래서 그들의 성가신 요구에서 벗어나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말이오. '이제 당신이 원하는 걸 가졌잖아, 세상의 물건들 중에서 정당한 당신 몫을 챙기지 않았느냐고. 그러니 같은 말밖에 못하는 이 명청아, 이제 네 일이나 신경 쓰고 나 좀 방해하지 마라”
(P.160)


  자매는 슬레이트 지붕에 거무스름한 벽돌담을 한 집들 사이로 걸어 내려갔다. 다가오는 일몰의 묵직한 황금빛 매력이 탄광촌을 온통 뒤덮었고, 아름다움으로 도금된 추악함은 감각을 마비시키는 듯했다. 시커먼 석탄가루로 뒤덮인 길 위로 선명한 석양이 한층 따스하게, 한층 강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붉게 타는 하루의 끝으로부터, 제멋대로 생긴 그 모든 지저분함 위로 마법이 드리워졌다.
  “기분 나쁜 아름다움을 갖고 있어, 이곳은.” 매혹당해 괴로운 것이 분명한 구드룬이 말했다 “어딘지 모르게 저 안에서 진하고 뜨거운 매력이 느껴지지 않아? 난 느껴지는데. 정말로 마비되는 것 같아” 그들은 광부들의 주택가를 지나고 있었다. 몇 집이 공동으로 쓰는 뒤뜰에서 광부 하나가 이 더운 저녁에 몸을 씻고 있는 것이 보였다. 두툼한 커다란 면바지가 흘러내려 허리까지 훤히 드러나 있었다. 이미 다 씻은 광부들은 담벼락 쪽으로 등을 향한 채 쭈그리고 앉아 이야기를 하거나, 순전한 육체적 안온함 속에 말없이 지친 몸을 쉬고 있었다. 그들의 강한 억양이 들려왔는데, 그 심한 사투리가 신기하게도 핏속까지 어루만져 주었다. 그것은 애무하는 노동자들의 품속에 구드룬을 감싸 안는 듯했다. 대기 전제가 육체적인 남자들로 공명했으며, 매력적인 노동과 남자다움으로 빽빽히 들어차 있었다. 그런데 그 지역 전제가 그랬기 때문에, 그곳 주민들은 이를 잘 깨닫지 못했다.
(P.178)


  "나요? ...... 난 옳지 않아요.” 그가 되받아 소리쳤다. “내게 유일하게 옳은 구석이 있다면, 적어도 난 내가 옳지 않다는 걸 안다는 거예요. 나는 내 겉모습이 싫어요. 인간으로서의 나 자신을 혐오한단 말입니다. 인간은 거대한 거짓말 집합체고, 거대한 거짓은 조그마한 진리보다 열등합니다. 인간은 개인보다 열등한, 아니 훨씬 더 못한 존재예요. 왜냐하면 개인은 때때로 진리를 행할 수도 있지만 인간은 거짓의 나무니까요. ......인간들은 사랑이 가장 위대하다고 말하죠. 그 더러운 거짓말쟁이들은 그렇게 말하기를 고집 한단 말이오. 그런데 그들이 하고 있는 짓을 좀 봐요! 사랑이 가장 위대하다느니, 자비가 가장 위대하다느니 이런 말을 계속 되풀이하는 수백만 인간들을 좀 보란 말입니다-그리고 그들이 내내 뭘 하고 있는지 좀 보라고요. 그들이 하는 일을 통해, 당신은 그들이 자기가 뱉은 말은커녕 자기 행동을 고수할 엄두도 못 내는 더러운 거짓말쟁이이자 겁쟁이들이라는 걸 알게 될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랑이 가장 위대하다는 사실이 바뀌는 건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그들이 어떻게 하느냐가 그들 말의 진리를 바꾸는 건 아니잖아요, 네?” 어슐라가 슬픈 듯이 말했다.
  “완전히 바꾸죠. 그들의 말이 행여 진리라면, 그들은 그것을 완수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이 거짓말을 계속하기 때문에 마침내 미쳐 날뛰게 된 거죠. 사랑이 가장 위대하다는 말은 거짓이에요. 차라리 증오가 가장 위대하다고 말하는 게 낫죠. 극과 극은 평형을 이루니까. ......인간들이 원하는 건 증오예요...... 증오뿐이란 말입니다. 그러고는 정의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증오를 얻어 내죠. 모두가 다 바로 자신을 그 사랑이라는 것으로 부터 증류시켜 니트로글리세린으로 변모시킨단 말입니다. ......인간을 죽이는 것은 바로 그 거짓이에요. 증오를 원한다면 그럽시다....... 죽음과 살해, 고문과 폭력적인 파괴-다 내버려 두잔 말입니다, 단 사랑이란 이름으로는 말고요. ......난 인간을 험오해요. 다 쓸려 없어져 버리면 좋겠어요. 인간은 사라져도 돼요. 내일 당장 모든 인간이 없어져 버린다고 해도 절대적 상실이 도래하는 건 아니에요. 참다운 현실은 고스란히 남아 있을 거니까. 아니, 오히려 더 나은 상태가 될 겁니다. 그때가 되면 진정한 생명의 나무는 유령처럼 끔찍스럽게 주렁주렁 무겁게 달린 사해(死海)의 열매를, 수많은 인간 복제품들의 견딜 수 없는 짐을, 치명적인 거짓의 엄청난 무게를 벗어던지게 될 겁니다”
(P.197)


  “사랑이 있는 게 아니라면, 뭐가 있는 건가요?” 그녀가 거의 비웃으면서 외쳤다.
  “뭔가가요.” 그는 전력을 다해 자신의 영혼과 싸우면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뭐라고요?”
  그는 그녀가 이렇듯 적대적인 상태에 있는 동안엔 의사소통을 할 수 없기에 한동안 잠자코 있었다.
  뭔가에 완전히 몰두한 듯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엄연하고 비개인적이며 책임을 초월한 최종적인 내가 존재합니다 마찬가지로 최종적인 당신도 존재하죠. 내가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 건 바로 그곳에서예요-감정적인, 사랑의 지평에서가 아니라-아무런 말도 합의 조건도 존재하지 않는 그런 곳에서 말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엄연한 미지의 두 존재요, 완전히 낯선 두 생물이죠. 거기서 난 당신에게 다가가길, 당신이 내게 다가오길 원해요. ......그리고 그곳엔 그 어떤 책무도 있을 수가 없어요. 행동 규범이 없으니까, 그리고 그 어떤 이해도 거둬들여진 적이 없으니까요. 상당히 비인간적이죠, ......그렇기 때문에 어떤 형태의 힐책도 존재하 지 않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모든 것들의 울타리 바깥에 있어서 이미 알려진 것이 전혀 적용되지 않으니까요. 우린 오로지 충동을 따를 수 있을 뿐이에요. 바로 앞에 놓여 있는 것을 취하고,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으며,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주는 것도 없으며, 오로지 각자 근원적 욕망에따라 취할 따름이지요."
  버킨의 말은 전혀 예기치 못했고 너무나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어서, 어슐라는 멍하니 거의 의식을 잃은 채 이 말을 듣고 있었다 “그건 그냥 순전히 이기적인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순전하다는 건 맞아요. 그렇지만 이기적인 건 절대로 아닙니다 왜냐하면 난 내가 당신한테서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내가 당신에게 다가갈 때 나는 나 자신을 미지의 것에 넘겨주는 것이고, 미지의 세계로 완전히 발가벗겨진 상태여서, 아무 거리낄 것도 방어할 것도 없어요. 오직 우리 둘 다 모든 것을, 심지어 우리 자신까지도 벗어던져, 존재하기를 멈추겠다는, 그리하여 완벽한 우리 자신이 우리 안에서 생겨나게 하겠다는 우리 둘 사이의 맹세만이 필요합니다” 그녀는 자기 식의 논리로 곰곰이 따져 보았다.
  “하지만 당신이 날 원하는 건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잖아요?” 그녀가 우겼다.
  “아니, 그렇지 않아요. 내가 당신을 믿기 때문이에요...... 내가 정말로 당신을 믿는 거라면 말이죠.”
(P.228)


  옛날식 사랑은 끔찍한 속박이요, 일종의 강제 징병 같았다. 그는 자신의 가슴속에 있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사랑이니 결혼이니 아이들이니 하는 것들, 그리고 만족스러운 가정과 부부 생활이라는 끔찍한 사생활 속에서 다 함께 부대끼는 삶은 생각만 해도 혐오스러웠다. 그는 뭔가 좀 더 깨끗하고 좀 더 개방된, 말하자면 좀 더 상쾌한 것을 원했다. 부부간의 뜨겁고 비좁은 친밀함이란 것이 혐오스러웠다. 결혼한 작자들이 문을 걸어 잠그고는 자기들만의 연대 속으로 스스로를 가두어 버리는 꼴이라는, 설령 극서이 사랑이라고 할지라도 역겨웠다. 그것은 언제나 작을 지어 사적인 집이나 방 안에 고립되어 있는 불신 가득한 부부들의 공동체였으며, 이를 넘어서는 그 어떤 삶도, 그 어떤 다른직접적이고 사심 없는 관계도 용인하지 않았다. 그것은 한 쌍의 만화경이자, 결혼한 한 쌍이라는 단절되고 분리주의적인 무의미한 실제 였다. 물론 그가 난잡한 관계를 결혼보다 훨씬 더 나쁜 것으로 여기고 증오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불륜이란 그저 합법적인 결혼에 대한 반작용에 불과한, 또 다른 종류의 짝짓기에 불과했다. 반작용은 작용보다 더 지겹고 넌덜머리가 났다.
(P.314)


  세상의 이치 속에서 자란 제럴드는 입장을 바꾸었다. 평등에 개의치 않았다. 사랑이니 자기희생이니 하는 기독교적 태도는 모두 시대에 뒤진 진부한 것들이었다. 그는 지위나 권위란 이 세상에 응당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에 대해 점잔 빼며 위선적으로 말하는 건 아무 쓸모가 없었다. 기능적으로 꼭 필요하다는 간단한 이유만으로 그것들의 존재는 당연했다. 지위와 권위가 전부이자 최후의 목적은 아니었다. 기계의 일부와 같은 것이었다. 우연히 제럴드 자신은 통제하는 중심부가, 노동자 집단은 다양하게 통제 받는 부분들이 된 것이다. 다만 우연히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중심에 있는 바퀴통이 백 개의 바퀴들을 돌린다고 흥분하는 건, 우주가 태양 주위를 돈다고 흥분하는 것이나 같았다. 결국 달과 지구, 토성과 목성, 그리고 금성도 각기 저마다 태양과 똑같이 우주의 중심이 될 똑같은 권리를 가졌다고 말하는 건 바보짓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주장은 오직 혼란을 향한 욕망에서나 나오는 것이다.
  결론에 이르기 위해 생각을 하는 귀찮은 짓을 하는 대신, 제릴드는 결론으로 껑충 뛰었다. 민주적 평등이라는 문제는 멍청한 문제라고 여겨 몽땅 버렸다. 중요한 것은 사회의 거대한 생산 기계였다. 그것이 완벽하게 일하도록 모든 것을 충분히 생산하도록,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 기능상의 등급과 중요도에 따라 좀 더 많든 적든 합당한 몫을 받게끔 하고, 그러고 나서 먹고살 생필품이 공급되면, 누가 뭐라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 한 각자 재미있고 입맛 당기는 대로 하게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리하여 제럴드는 거대한 산업의 질서를 잡기 위해 일에 착수 했다. 여행을 통해, 그리고 여행 중의 독서를 통해 그는 삶의 가장 본질적인 비밀은 조화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조화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는 않았다. 그 단어가 만족스러웠고, 자기만의 결론에 도달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조화라는 신비스러운 말을 조직이라는 실용적인 말로 번역하여, 이미 확립되어 있는 세상에 강제로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자신의 철학을 실행에 옮겨 갔다.
(P.358)


제럴드는 점차 모든 것을 장악해 갔다. 그러면서 엄청난 개혁이 시작되었다. 모든 부서에 전문 기술자들이 배치되었다. 조명과 지하의 견인 작업, 그리고 동력 공급을 위한 거대한 발전소가 설치 되었다. 모든 탄광에 전기가 공급되었다. 거대한 철인이라 불리는 절단기와 같은 광부들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새로운 기계들과 별난 도구들이 미국에서 건너왔다. 탄광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돌아갔다. 모든 통제권이 광부들의 손에서 빠져나갔고 채탄 청부제가 폐지되었다. 모든 것이 가장 정확하고 정밀한 과학적 방법으로 운영되었고, 교육받은 전문가들이 모든 곳을 장악했으며, 광부들은 그저 기계적 도구로 전락해 버렸다. 그들은 예전보다 훨씬 더 열심히 일해야 했다. 일은 끔찍했고, 그 기계적인 속성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것에 복종했다. 그들의 삶에서 즐거움은 사라졌고, 그들이 점점 더 기계화되어 감에 따라 희망도 소멸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새로운 상황을 받아들였다. 심지어 이로부터 더 큰 만족을 얻기까지 했다. 그들은 처음엔 제럴드 크라이치를 증오해 그에게 무슨 짓인가 하자고, 그를 죽여 버리자고 맹세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모종의 치명적인 만족감을 느끼며 모든 걸 받아들였다. 제럴드는 그들의 대사제(大司祭) 였으며, 그들이 진정으로 실감하는 종교를 대표했다. 제럴드의 아버지는 이미 잊혔다. 엄격하고 지독하며 비인간적이지만, 다름 아닌 바로 그 파괴성으로 인해 만족스러운 새로운 세상, 새로운 질서가 온 것이었다. 사람들은 거대하고 경이로운 기계에 속하게 된 것을 흡족해했다. 그것이 자신들을 파멸시키고 있는데도, 그 기계야말로 그들이 원하는 것이었다. 인간이 생산한 것 가운데 최고 의 것이요, 가장 경이롭고 초인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감정이나 이성을 초월한, 진정으로 신과 같은 이 위대하고 초인적인 것에 속함으로써 한껏 고양되었다. 그들 가슴속의 심장은 죽었지만 그들의 영혼은 만족했다. 그것이 그들이 원하는 바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제럴드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다만 그들 앞에 서서 그들이 원하는 바를 주었을 뿐, 즉 삶을 순전한 기계적 원칙에 복속시키는 위대하고 완벽한 시스템에 참여하도록 했을 뿐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종류의 자유였다. 해제의 위대한 첫 발걸음이자 혼란의 위대한 첫 단계였으며, 유기적인 것을 기계적인 원칙으로 대체하는 일이었고, 유기적 목적, 유기적 통일의 파괴였으며, 모든 유기적 단위를 거대한 기계적 목적으로 종속시키는 위대한 첫 단계였다 그것은 순수한 유기적 붕괴였고 순수한 기계적 조직화였다. 이것이 혼란의 최초이자 가장 멋진 상태인 것이다.
(P.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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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젊었지만 구드룬은 영국 사회의 내막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고, 그녀에게 출세하겠노라는 이상 따원 없었다. 출세를 한다는 건 또 하나의 겉치레 쇼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걸, 출세란 가짜 페니 대신 반 크라운짜리 가짜 동전을 갖는 것과 다름없다는 걸, 무자비한 젊은이답게 철저히 냉소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가치를 매기는 통화라는 것 전체가 가짜였다. 물론 그녀의 냉소주의는, 거짓된 동전이 통용되는 세상에서는 1파운드짜리 불량 금화가 4분의 1페니짜리 불량 동전보다 낫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 었다. 그러나 부자든 가난뱅이든 그녀는 그 둘을 똑같이 경멸했다.
   그녀는 꿈을 꾸었던 자신을 이미 비웃고 있었다. 그 꿈들은 손쉽게 이루어질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영혼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충동이 엉터리 가짜라는 걸 지나치리만치 잘 인식하고 있었다. 제럴드가 낡아 빠진 구식 회사로부터 제법 이익을 내는 산업을 만들어 낸들 그녀에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낡아 빠진 회사든 신속히 멋들어지게 조직된 산업이든, 그녀에겐 별다른 의미가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그것들은 악화(惡貨) 였다. ......물론 그녀도 겉으로는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중요한 건 겉보기였다. 속으로는 어차피 하찮은 짓거리였으니까.
(P.675)


"그건 Kunstwerk(예술 작품)이에요, 예술 작품이란 말입니다 예술품이지, 어떤 무엇의 그림이 아니에요, 뭔가를 그린 게 절대로 아니란 말입니다. 그건 그 자체 말고는 어떤 것과도 전혀 상관이 없어요. 이런저런 일상 세계와는 아무 상관 없단 말입니다. 그 둘은 전혀 관련이 없어요. 그것들은 서로 다른 별개의 차원에 존재하는 거고, 하나를 다른 하나로 번역한다는 건 바보짓만도 못힙니다. 그건 모든 계획을 흐리고 천지를 혼란에 빠뜨리는 짓입니다 아시겠습니까, 행동의 상대적 세계와 예술의 절대적 세계는 절대로 혼동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절대로 그렇게 하면 안 된단 말입니다!
  “맞아.” 구드룬이 흥분하여 랩소디처럼 지껄여 댔다. “그 둘은 분명히 그리고 영원히 별개야. 서로 아무 관계가 없다고. 와 내 예술, 그건 서로 아무 관계가 없어. 내 예술은 다른 세계에 있고, 난 이 세계에 있는 거야.”
(P.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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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드룬과 뢰르케는 야릇하고 엉큼하며 한없이 도발적인 묘한 게임을 했다. 마치 삶에 대해 어떤 심원한 이해를 하고 있다는 듯 이, 세상은 감히 알려는 엄두조차 못 내는 무시무시한 핵심 비밀 을 자기들만 전수받은 것처럼 행동했다. 그들의 소통은 모두 야릇 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외설로 이루어졌다. 
  원시 예술의 외설적 암시는 그들의 피난처였고, 감각의 내적인 신비는 숭배의 대상이었다. 예술과 삶은 그들에게 각각 현실과 비현실이었다.
   “물론, 삶은 정말로 중요한 게 아니에요-중심은 예술이죠. 인간이 자기 삶에서 무엇을 하는가는 de rapport(별 상관이 없 죠), 별 의미가 없어요.” 구드룬이 말했다.
  “맞아요, 그래요, 바로 그겁니다.” 조각가가 답했다. “예술 안에서 무엇을 하느냐, 그게 바로 인간 존재의 숨결입니다. 삶에서 뭘 하느냐, 그건 문외한들이나 법석을 떠는 사소한 거죠.”​
  이상하게도 구드룬은 이런 대화에서 우쭐함과 해방감을 느꼈다. 영원히 안착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당연히 제럴드는 사소한 존재였다-그녀가 예술가인 한 그녀의 삶에서 사랑은 일시적인 것 중 하나였다. 그녀는 클레오파트라를 떠올렸다-클레오파트라는 예술가였던게 틀림없어. 남자에게서 핵심을 거둬들인 거야. 최고의 감흥을 수확한 다음 껍데기는 내던져 버리는 거지. 메리 스튜어트도 그랬고, 애인들과 숨을 헐떡이며 무대를 좇아다녔던 엘레오노라 두제도 그랬고. 이들이 사랑에 대한 대중적 전형이지. 결국 연인이란 이 미묘한 앎을 수송하기 위한 연료, 여성 예술의 연료, 감각적인 이해에 대한 순수하고 완벽한 앎의 예술을 위한 연료가 아니고 무엇이랴.
(P.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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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은 인간 없이는 살 수 없다” 프랑스의 어떤 위대한 종교적  스승은 이렇게 말했다 - 하지만 이는 분명 거짓이다. 신은 인간 없이 살 수 있다. 신은 어룡과 마스토돈 없이도 살 수 있었다. 이 괴물들은 창조적으로 발전하는 데 실패했고, 그래서 신이, 창조의 신비가, 그들을 없애 버렸다. 마찬가지로 인간 역시 창조적으로 변화하고 발전하는데 실패한다면, 그 신비는 인간도 없애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영원한 창조의 신비는 인간을 제거하고, 그 자리를 더 훌륭한 피조물로 대체할 수 있다. 말이 마스토돈의 자리를 차지한것처럼.
  이러한 생각은 버킨에게 상당한 위로가 되었다. 만일 인간이 막 다른 골목으로 내달려 스스로를 소진했다면, 영원한 창조의 신비는 더 훌륭하고 경이로운, 어떤 새롭고 더 사랑스러운 어떤 다른 종족을 낳아 창조의 구현(具現)을 계속 수행할 것이다. 게임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창조의 신비는 영원토록 헤아릴 수 없고 완전무결하며 고갈될 줄 모른다. 여러 종족들이 왔다가 갔고, 여러 종들이 사라져 버렸지만, 언제나 새로운 종족들이, 더 사랑스러운, 혹은 똑같이 사랑스러원 종족들이, 매번 경이를 뛰어넘으며 생겨났다. 샘의 원천은 더럽힐 수도 없고 찾아낼 수도 없다. 거기에는 한계가 없다. 그것은 기적들을 낳는다. 그 자신의 시간 속에 완전히 새로운 종족과 종들을, 의식의 새로운 형상들을, 몸의 새로운 형상들을, 존재의 새로운 단위들을 창조해 낼 수 있다.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창조의 신비가 가진 가능성들에 비견해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자신의 맥박이 그 신비로부터 직접 맥박 치게 하는 것, 이것이 완벽이요 형언할 수 없는 만족을 준다. 인간이냐 비인간이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완벽한 맥박이 형언할 수 없는 존재, 아직 태어나지 않은 기적 같은 종족들과 함께 고동치고 있는 것이다.
(P.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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