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 <순수이성비판>
(Kritik der reinen Vernunft)(1788)
(철학사상 별책 제3 제16호)
김재호 /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 142쪽
(2018. 3. 18.)



  위대한 철학자의 삶을 되돌아보는 일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의 생애가 오늘 우리에게 삶의 교훈과 길잡이를 제공해 주는 성자(聖者)의 일생이 아니라면, 혹은 역사의 풍운 가운데 겪은 드라마틱한 운명으로 인해 흥분과 진한 감동을 주는 인간적 삶이 아니라면 우리는 굳이 왜 한 사상가의 삶에 주목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의 사상이 진공 가운데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 사상가의 삶의 경험들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이런 점에서 그의 사상을 보다 잘 이해하려는 노력과 맞닿아 있다.
(P.1)



  칸트는 ‘우리의 표상이 대상과 관계 맺는 것은 무엇에 근거하는가?’라는, 이전의 형이상학적 연구들이 소홀히 했던 본질적인 질문을 제기하고 이 문제에 답하는 것이 바로 형이상학의 전체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칸트는 ‘감성과 이성의 한계’라는 제목으로 종전의 생각을 확대하려던 계획을 수정하여 새로 ‘순수 이성의 비판’(Die Critick der reinen Vernunft)이라는 제목의 출판을 계획하고 있음을 예고한다. 약 3개월 후면 가능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순수 이성의 비판’이라는 책의 출판 계획은 그로부터 약 10년간의 침묵을 거쳐 이루어지게 된다. 1781년 칸트는 나이 57세에 드디어 자신의 주저(主著)『순수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 을 세상에 내어놓게 된다.
  그러나 칸트의 이러한 오랜 철학적 숙고의 산물인『순수이성비판』에 대한 독자들의 처음 반응은 대체로 냉정했다. 심지어 당시 유력한 학술지였던 ‘괴팅겐 비평지’에는 익명의 독자(Christian Garve인 것으로 알려져 있음)가 쓴 신랄한 혹평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칸트는 이러한 많은 비판이 대부분『순수이성비판』의 내용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하여 1783년에『순수이성비판』의 이해를 위한 입문서에 해당하는『형이상학서설』을 출판하게 된다.
  1785년 에는 도덕철학에 관한 칸트의 첫 번째 주요 저술인『도덕형이상학 원론』(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이 출판되어진. 1788년에 칸트는 두 번째 비판서로 불리는『실천이성비판』(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을, 1790년에는 그의 세 번째 비판서에 해당하는『판단력비판』(Kritik der Urteilskraft)을 출간하게 된다.
(P.7)



  ‘형이상학’의 잃어버린 이전의 위엄을 되찾고 ‘학’으로서의 가능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이성 능력’(Vernunftvermögen) 자체의 비판이 요구되어진다. 이성 능력의 비판이란 칸트에 따르면 정당한 요구를 하는 이성은 보호해 주지만 모든 근거 없는 이성의 월권에 대해서는 거절할 수 있는 ‘법정’(Gerichtshof)에 이성 자신을 세우는 일이다. 이러한 이성에 대한 비판, 즉 ‘순수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을 통해 형이상학의 가능성은 탐구될 수 있다. 요컨대 이성의 능력을 비판하는 일은 칸트에게서는 바로 “형이상학 일반의 가능 여부에 대한 결정․가능할 수 있는 형이상학의 원천․범위․한계 등의 규정을 의미한다.”
(P.11)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을 검사하는 것은, 즉 이러한 인식의 범위와 한계를 조사하는 것은 결국 선험적 인식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들, 즉 인간의 인식 능력 속에서 근거 지워지는 조건들을 조사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순수이성비판』은 우리 인식능력들에 관한 연구이기도 하다.
(P.13)



칸트가 이제 ‘모방’(nachahmen)하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유 방식의 전환의 본질’(das wesentliche Stück der Umänderungder Denkart)이다. 그것은 바로 인식 주체의 자발적인 행위에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때문에 칸트는 이러한 사유의 전환을 코페르니쿠스가 자신에 의해 관찰되어지는 천체의 원인을 관찰자 자신에서 찾으려고 한 시도에 비유하고 있다. 철학에서의 이러한 코페르니쿠스적인 시도는 인식이 지금까지와 같이 대상에 의존해서 대상들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상들이 우리 인식과 인식 능력들에 준거해야 한다고 가정해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가정’(假定)이 “형이상학의 과제들”(die Aufgaben der Metaphysik, B XVI, 한글판 32)을 해결하는 데 더 효용이 있을 것이라고 믿기에 칸트는 이제『순수이성비판』에서 대상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조건들을, 그리고 그 대상을 산출해내는 인식 능력들을 검토하게 된다.
(P.13)



초월적 감성학’에서 다루어진 우리의 인식 능력이 ‘감성’(Sinnlichkeit)이었다면 칸트는 이제 ‘초월 논리학’(transzendentale Logik )에서 우리의 또 다른 인식 능력인 ‘지성’(Verstand)에 관해 탐구한다. 칸트가『순수이성비판』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초월적 원리론’(transzendentale Elementarlehre)을 이처럼 ‘초월적 감성학’과 ‘초월논리학’으로 구분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의 인식이 서로 다른 두 가지 인식의 원천에서부터 생겨난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의 심성을 대상이 어떤 식으로든 촉발하는 한에서 표상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감성’(Sinnlichkeit)이라면 ‘지성’(Verstand)은 표상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자발적인 능력이다. 이 두 인식의 원천은 칸트에 따르면 그 기능이 고유하기에 엄격히 구별되어야 할 서로 다른 인식 능력이다. 따라서 ‘감성’과 관련된 학문인 ‘감성학’(Ästhetik)이 지성의 규칙들 일반을 다루는 학문인 ‘논리학’(Logik)과 구별되듯이 ‘초월 논리학’은 ‘초월적 감성학’과 구별되어진다.
(P.16)



  전통적으로 논리학이 넓은 의미에서의 ‘지성’(Verstand)으로 대표되는 ‘사유 능력’을 탐구한다고 할 때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유 능력을 의미한다. 즉, ‘개념의 능력으로서의 지성’(Verstand als Vermögen der Begriffe), ‘판단’(Urteile)에 관계하는 ‘판단력’(Urteilskraft), 그리고 ‘추론의 능력으로서의 이성’(Ver- nunft als Vermögen der Schlüsse)이 그것이다. 칸트는『순수이성비판』의 ‘초월 논리학’을 이러한 사유 능력에 상응해서‘초월적 분석론’(transzendentale Analytik)과 ‘초월적 변증론’(transzendentale Dialektik)으로 나눈다.
  ‘초월 논리학’의 첫 번째 부문에 해당하는 ‘초월적 분석론’은 ‘순수 개념’(reine Begriffe)의 원천으로서의 ‘지성 능력’을 탐구하는 ‘개념의 분석론’(Analytik der Begriffe)과 ‘규칙 아래에 포섭하는 능력’인 ‘판단력’(Urteilskraft)의 ‘이론’(Doktrin)에 해당하는 ‘원칙의 분석론’(Analytik der Grundsätze)으로 구성되어 있다.
‘초월적 분석론’은 무엇이 우리 인식의 대상인지를, 이러한 대상일반에 관해 사유하는 우리 인식 능력의 형식들은 무엇인지,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의 인식이 어떻게 대상과 관계 맺을 수 있는지를 해명해 준다.
  ‘초월 논리학’의 두 번째 부문은 우리 이성의 ‘잘못된 추론’에 관해 다룬다. 만약에 순수 이성이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서 ‘형이상학적 심리학’의 인식 대상, 혹은 ‘우주론’과 ‘신학’의 인식대상인 ‘무규정자’(Unbedingte)에 이르려고 할 때 순수 이성은 잘못된 추론에 빠지게 된다. 칸트는 이러한 초월 논리학의 부문을 ‘초월적 변증론’(transzendentale Dialektik)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것이 고대에 ‘변증론’(Dialektik)이 의미했던 ‘가상’(Schein)을 만들어내는 ‘기술’(Kunst)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초월적 변증론’은 순수 이성의 잘못된 추론으로부터 생겨나는 ‘형이상학적 가상’들을 폭로하고 비판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초월적 변증론’은 칸트에게서 ‘가상의 논리학’(Logik desScheins)을 의미한다.
(P.16)



초월 논리학’은 우리의 사유 형식이 그 대상과 맺는 관계에 관한 이론인 ‘초월적 인식’(transzendentale Erkenntnis)에 관한 것이다. 칸트에게서 ‘초월적 인식’이라는 말은 선험적인 ‘기원’(Ursprung)을 갖는 표상이 어떻게 성립하며, 이 선험적으로 성립된 표상이 경험에서 생겨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경험적 대상과 관계 맺을 수 있는가를 인식하는 일이다. 따라서 ‘초월 논리학’은 결국 그 자신 선험적인 기원을 가지면서도 경험의 대상과 선험적으로 관계 맺는 ‘순수 지성 개념들’에 관한 체계적 이론이다.
(P.18)



  ‘초월적 감성학’과 ‘초월 논리학’으로 이루어진 ‘초월적 원리론’(transzendentale Elementarlehre)이 순수 이성에서부터 생겨나는 철학적 이론이라는 ‘하나의 건축물’(ein Gebäude)의 재료와 요소들을 제공해 주고 그로 인해 이론적 이성 사용의 경계를 한정지을 수 있었다면 이제 ‘초월적 방법론’(transzendentale Methoden- lehre)에서 칸트는 마지막으로 그러한 순수 이성의 이론적 건축물을 건축하기 위한 설계도를 그리려고 한다.(A707ff./B735ff., 한글판 503 이하 참조) 즉 칸트가 ‘초월적방법론’에서 원하는 바는 한마디로 ‘순수 이성의 완전한 체계를 위한 형식적인 조건들을 규정’(A707f./B735f., 한글판 503)하는 것 이다.
(P.29)



『순수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은 ‘이성’(Vernunft)에 의한 ‘이성’ 자신의 비판을 의미한다. 정당한 요구는 보호해 주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즉 자신의 권한을 넘어서는 월권에 대해서는 그 요구를 거절하는 ‘법정’(Gerichtshof)에서 ‘이성’은 자신의 권한과 한계에 관해 스스로 묻는다. 이러한 ‘이성 능력’ 자체에 대한 비판은 잃어버린 형이상학의 위엄을 되찾고 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한 일이다. 우리 인식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서 대상인식을 시도한 모든 이전의 이성의 월권에서 벗어나서 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의 가능성을 밝히는 일은 이제 ‘선험적 종합 판단’으로 이루어진 형이상학적 진술의 가능성을 탐구하여 선험적 인식의 원천과 범위, 그리고 그 한계를 규정하는 일로 요약된다. 우리에게 가능한 경험의 대상은 시간․공간 중에 주어지는 ‘현상’이지 결코 인식 주관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사물 자체’일 수 없다는『순수이성비판』의 핵심 생각을 통해 칸트는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답하고 있다.
(P.36)



  서양의 근대 철학이 주체로서의 인간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기 시작하였다면 이러한 근대 철학의 문제 의식은 칸트에게서 본격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코페르니쿠스적인 사유의 전환, 즉 대상에 대한 관심에서 그 대상을 구성하는 ‘주체의 자발적인 행위’에 대한 관심으로의 전환을 통해 새로운 형이상학의 가능성을 탐구한 칸트의 저작『순수이성비판』은 이런 점에서 서양근대 철학의 발생과 발전을 이해하는 출발점이다. 또한 『순수이성비판』에서의 칸트의 철학적 문제 의식에 대한 바른 이해는 왜 그의 초월적 관념론이 이후 피히테, 셀링, 헤겔로 이어지는 독일관념론으로 발전해 갔는지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토대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칸트의 주저『순수이성비판』에서의 칸트의 철학적 문제에 대한 철저한 연구는 서양 근대 철학의 이해에 필수적이라 하겠다.
(P.37)



  서양 근대 철학의 보편적인 특징을 사유 주체로서의 인간에 대한 관심에서 찾는다면 이러한 근대 철학의 문제 의식은 칸트에게서 본격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칸트는 그의 저서『순수이성비판』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사유의 전환을 통해, 즉 대상에 대한 관심에서 그 대상을 가능하게 하는 ‘주체의 자발적인 행위’에 대한 관심으로의 전환을 통해, 대상 인식에 있어서 인간 인식능력의 자발성이 갖는 의미를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말하자면 대상 인식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사유의 주체가 어떤 능동적인 행위를― 사유함이라는 의미에서의 행위― 해야 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칸트는 근대 철학의 주된 관심이었던 사유 주체로서의 인간 인식 능력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의 문제 의식은 단순히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궁극적 물음은 사실 철학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전통적 형이상학의 근본 문제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전통적 형이상학의 주제였던 ‘존재’와 ‘사유’의 관계에 대한 해명은 칸트에게서 새로운 실마리를 찾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칸트는『순수이성비판』에서 자신의 작업이 “이제껏 숨겨져 왔던 형이상학의 전(全) 비밀을 드러나게 해줄 열쇠”(헤르츠에게 보낸 편지; AA X130) 이길 기대했었던 것 같다. 이처럼 칸트가 전통적 형이상학의 물음을 자신의『순수이성비판』의 주된 과제로 삼고 있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잘 보여 주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일견 ‘형이상학’이라 는 학문과는 무관해 보이는 ‘초월 논리학’(transzendentale Logik)’이라는 개념이다.
  칸트는『순수이성비판』의 전체 체계를 전통적인 논리학의 연구 대상이었던, ‘개념’(Begriffe), ‘판단’(Urteile), ‘추리’(Schlüsse) 라는 요소에 맞추어 구성하면서『순수이성비판』의 주된 본문을 ‘초월 논리학’이라 이름 붙이고 있다.
(P.47)



  칸트에 따르면 우리의 ‘인식’(Erkenntnis)은 두 가지 종류로 구분되어 진다. ‘직관’(Anschauung) 과 ‘개념’(Begriff)이 바로 그것이다.(정확히 말해, ‘직관 중에 주어지는 인식’과 ‘개념을 통한 인식’) ‘직관’이 개별적인 대상(Gegenstand)에 대한 ‘직접적인 표상’ (unmittelbare Vorstellung)을 의미한다면 ‘개념’은 다수의 사물에 공통적인 특징을 매개로 해서 대상과 관계 맺는 ‘간접적 표상’ (mittelbare Vorstellung)이다. 단지 인식주관의 상태의 변화를 의미하는 ‘감각’(Empfindung)과는 달리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대상과 관계 맺고 있다는 점에서 ‘직관’과 ‘개념’은 둘 다 ‘객관적 지각’(objektive Perzeption)이라 불린다. 이와 같이 어떤 식으로든 대상과 관계 맺고 있는 표상들을 칸트는 통틀어 ‘인식’(Erkenn- tnis)이라 부르고 있다.
​(P.51)



  진정한 의미에서 인식은, 칸트에 따르면, ‘직관’과 ‘개념’이라는 두 요소가 합쳐져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하나의 인식 능력만으로는 불완전한 인식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감성’(Sinnlichkeit)의 역할이 없는 인식은 ‘내용’(Inhalt)이 없는 공허한 사고에 불과하고 ‘지성’(Verstand)의 기능 없이는 ‘맹목적’(blind)인 인식에 이르고 만다.

  직관과 개념은 우리의 전(全) 인식의 지반이다. 이에 어떤 방식에서건 대응하는 직관이 없는 개념은 인식이 될 수가 없고, 개념이 없는 직관도 인식이 될 수가 없다.(A50/B74, 한글판 96)
  이 두 가지 성질은 우열(優劣)이 없다. 감성이 없으면 대상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오성[지성]이 없으면 대상은 도무지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오성이 없으면 대상은 도무지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내용이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이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A51/B75, 한글판 96이하, 글쓴이 강조)
(P.52)



  ‘감성’(Sinnlichkeit)과 ‘지성’(Verstand)이라는 두 인식 능력의 근원적 차이에 근거해서 ‘논리학’의 근본 성격을 ‘지성의 규칙들에 관한 학(學)’으로 규정한 칸트는 이제 ‘논리학’ 일반의 구체적 분류를 시도한다. 이러한 ‘논리학’의 세밀한 구별지움의 작업을 통해 칸트가 노리는 바는 한마디로 ‘초월 논리학’의 뜻과 의미를 명확히 드러내는 것이다. 즉 논리학 일반의 분류를 통해 밝혀지는 ‘일반 논리학’과 ‘초월 논리학’의 본질적인 특징들을 서로 비교함으로써, 칸트는 ‘초월 논리학’의 의미를 해명하려 할 뿐 아니라 나아가 이 이론 체계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한 선이해를 제공해 주고 있다.
(P.54)



  ‘일반 논리학’의 한 부분으로서 순수한 이성의 학(學), 즉 “순수 이성론”(reine Vernunftlehre)에 해당하는 ‘순수 논리학’ 본질적으로 규정해주는 특징은 바로 ‘보편성’과 ‘순수성’이었다. ‘보편성’(Allgemeinheit)은 ‘일반 논리학’을 다른 것과 구별시켜 주는 특징이었다. ‘일반 논리학’(allgemeine Logik)이 ‘보편적’(allgemein)인 까닭은, ‘일정한 대상에 관해 올바르게 사유하는 규칙’을 가르치는 ‘특수한 지성 사용의 논리학’과는 달리, 그것이 없이는 어떠한 지성의 사용도 불가능한 ‘단적으로 필연적인 사유의 규칙들’을 다루기 때문이다. 즉 이 필연적 사유의 규칙들은 우리 생각의 내용이 관계를 맺고 있는 사유의 대상에 전혀 의존적이지 않기 때문에 특정한 대상의 내용적 차이와는 상관없이 모든사유에 있어 타당한 보편적인 사유의 형식으로 기능한다. 이러한 보편적 사유 법칙으로서의 ‘일반 논리학’에서 ‘응용 논리학’을 분리해 내는 기준은 바로 ‘순수성’(Reinheit)이다. 이 ‘순수성’은 유에 있어서 모든 경험적인 조건들로부터의 독립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구체적으로 지성을 사용하는 데 있어 영향을 미치는 모든 심리적인 조건들을 배제한 이 ‘일반적이면서 동시에 순수한 논리학’은 지성 사용의 규준(Kanon)의 역할을 하는 ‘선험적 원칙들’을 다루게 되고, 이런 점에서 칸트는 ‘순수 논리학’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학’(Wissenschaft)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P.59)



  칸트가 ‘초월적 인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상들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대상들 일반에 관한 선험적 개념들’(Begriffe a priori von Gegenständen überhaupt)을 다루는 모든 인식을 말한다.
  칸트는 이 ‘대상들 일반에 관한 선험적 개념들’을 ‘순수 지성 개념들’(die reinen Verstandesbegriffe) 혹은 ‘범주’ (Kategorie)라고 부른다.
  ‘초월적 인식’이 ‘대상 일반에 관한 선험적 개념들’을 다루고, 그것도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 개념들의 선험적 가능성, 즉 선험적 기원의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초월 철학’은 인간의 선험적 인식 능력에 대한 연구와 무관하지 않다.

  대상들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대상들 일반[대상들]을 우리가 인식하는 방식을― 이것이 선천적으로[선험적으로] 가능한 한에서― 일반적으로 다루는 모든 인식을 나는 선험적[초월적]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들의 체계가 선험 철학[초월 철학]이라고 불릴 것이다.(B25, 한글판 68, 글쓴이 강조)

  ‘초월적 인식’이 대상들을 다루지 않고 ‘대상 일반에 관한 선험적 개념들’을 다룬다고 하는 말의 의미는, 결국 ‘대상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 방식’(unsere Erkenntnis- art von Gegenständen)을 다루는 것이 바로 ‘초월적 인식’임을 말한다.
(P.66)



  ‘초월 논리학’은 “이러한 인식들”의, 즉 ‘순수한 지성의 인식’(die reine Verstandeserkenntnis)과 ‘순수한 이성의 인식’(die reine Vernunfterkenntnis)의 ‘기원’(Ursprung)이 무엇인지, 그 인식의 ‘범위’(Umfang)는 어디까진지, 그리고 이러한 순수한 지성을 통한 대상 인식이 어떻게 ‘객관적 타당성’(objektive Gültigkeit)을 확보할 수 있는지를 규정하는 학문이다.
  ‘지성’(Verstnad)을 통한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 즉 그러한 인식의 기원과 범위, 그 객관적 타당성을 탐구하는 학문인 것이다.
(P.69)



  ‘일반 논리학’의 경우에서 밝혀졌듯이 ‘규준’(Kanon)으로 사용 해야 할 ‘분석론’이 ‘기관’(Organon)으로 오용될 때 ‘변증론’은 생겨난다. ‘초월적 분석론’이 ‘규준’으로 사용된다는 것은 ‘지성의 경험적 사용’(der empirische Gebrauch des Verstandes)에 관한 지침을 제시 해준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지성’을 그 한계를 넘어서 사용하여, 경험의 한계 밖에 있는 대상에게까지 적용하려 할 때, 그것은 ‘순수 지성 개념을 초험적으로 사용’(der transzenden- tale Gebrauch der reinen Verstandesbegriffe)하게 되는 것이고 이로 인해 ‘초월적 변증론’이 생겨나게 된다.(A139/178, 한글판 168; A238f./B297f., 한글판 231 참조) 그러나 인간의 ‘지성’은 그 한계를 넘어서 자신을 사용하게 하는 유혹으로 인해 우리에게 주어져 있지도 않은 대상에 관해 판단하는 위험에 빠지고 만다.
(P.86)




  우리의 인식이 대상과 ‘직접적으로’(unmittelbar)으로 관계 맺는 방법을 칸트는 ‘직관’(Anschauung)이라 부른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대상에 관한 ‘직관’을 자발적으로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직관’은 반드시 대상이 우리에게 주어짐으로써, 즉 대상이 우리 ‘심성’(Gemüt)을 어떤 식으로든 촉발함으로써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직관’의 생겨남은 수동적이다.
(P.94)




  대상의 촉발에 의해 표상이 생겨나 우리에게 주어 질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인식 능력을 칸트는 ‘감성’(Sinnlichkeit)이라 부른다. 따라서 ‘감성’은 표상을 받아들이는, 즉 ‘용의 능력’(Rezeptivität)이지만 또한 그렇기 때문에 대상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이 ‘감성’을 통해서만 대상에 관한 ‘직관’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이 ‘직관’을 가지고서 ‘지성’(Verstand)은 비로소 대상에 관한 사유를 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대상에 대해 사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의 사유가 대상이 주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감성’과 관계 맺어야만 한다.
(P.95)



  칸트는 ‘초월적 감성학’을 끝마치며 ‘맺음말’을 통해 지금까지 밝혀진 ‘시공 이론’이 자신의 초월 철학의 일부를 어떻게 해결 할 수 있었는지에 관해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다. 즉 ‘시간’과 ‘공간’이라는 순수직관의 형식은 감각 중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대상들에 관해 우리가 선험적인 종합 판단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감성의 조건들이며 동시에 그러한 선험적 종합판단들의 가능성의 근거가 되는 우리 인식의 원리들이다.
(P.119)



  칸트에게서 범주’(Kategorie)는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은『순수이성비판』의 의미와 체계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의 인식은 심성의 두 기본 원천, 즉 표상을 받아 들이는 능력인 ‘감성’(Sinnlichkeit)과 표상자신을 자발적으로 만들어 내는 능력인 ‘지성’(Verstand)으로부터 생겨난다. 그리고 이 두 인식의 원천은 서로 우열이 없을 뿐 아니라 혼돈되어서도 안 되는 독자적인 인식 능력이다.(A50ff./B74ff., 한글판 96 이하 참조) 따라서 칸트는『순수이성비판』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초월적 원리론’(transzendentale Elementarlehre)에서 이러한 근원적인 두 인식 원천에 관한 이론인 ‘초월적 감성학’(transzendentale Ästhetik)과 ‘초월 논리학’(transzendentale Logik)을 각각 구별하여 다루고 있다.
(P.12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