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다
(김영하와 함께하는 여섯 날의 문학 탐사)
김영하 / 문학동네 / 220쪽
(2018.3.4.)
여러분도 잘 알고 있다시피 저는 작가입니다. 작가니까 책을 씁니다. 지금까지 아마 스무 권 정 도의 책을 출간했을 겁니다. 그런데 읽은 것은 몇 권일까요? 저는 다독가는 아니지만 아마 태어나서 지금까지 최소 수천 권은 읽었을 겁니다. 이 비대칭성에 저는 늘 압도되곤 합니다. 수천 권을 읽고 고작 스무 권을 쓴 셈인데 대부분의 작기들이 그렇습니다. 많이 읽고, 그에 훨씬 못 미치는 책을 써냅니다. 양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질에 있어서도 대체로 읽은 것보다 못한 것을 써서 세상에 남깁니다. 지금 제 서가에 있는 책들은 짧게는 몇 년, 길게는 몇천 년을 살아남은 것들입니다. 지금 제
앞에 놓여 있기까지 그 책들은 시대와 언어를 초월해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오래 살아남은 책들, 사람들이 흔히 고전이라 부른 책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나갈 생각입니다.
(P.9)
어떤 이들은 고전이 진부할 것이라 지레짐작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래 살아남은 고전은 처음부터 나름의 방식으로 새로웠는데 지금 읽어도 새롭게 다가옵니다. 다시 말해 지금 읽어도 새로운 것은 쓰인 당시에도 새로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전이라고 해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 역시 당대의 진부함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고전은 당대의 뭇 책들과 놀랍도록 달랐기 때문에 살아남았고 그렇기에 진부함과는 정반대에 서 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낡거나 진부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책들은 살아남았 고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고 후대로 전승되었을 겁니다.
(P.16)
비극은 대부분 우리보다 나은 사람이 내재된 성격적 결함으로 파멸히는 얘기입니다. 반대로 희극은 우리보다 못한 이가 우스꽝스런 행동을 하는 것을 편안한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나리오를 쓰려고 한다면 적어도 자기가 쓰는 것이 비극인지 희극인지를 결정해야 하고, 그에 따라 걸맞은 덕성 혹은 모자람을 인물에게 부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또한 “비극에서 우리를 가장 매혹하는 것 은 급전急轉과 발견”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어 극작의 초심자 들이 “사건의 결합보다 조사措辭와 성격 묘사에서 성공을 거둔다”고 말하는데, 이는 플롯을 성격보다 더 높이 평가하는 그의 이론과 일치합니다. 그는 극에서 중요한 것은 인물의 성격보다 '사건의 결합', 즉 플롯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 플롯에서 중요한 것은 스토리를 완전히 달리 보게 만드는 반전, 그리고 그 반전을 통해 주인공이 획득하게 되는 새로운 인식이라고 보았습니다.
(P.26)
독서는 왜 히는가? 세상에는 많은 답이 나와 있습니다. 저 역시 여러 이유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독서는 우리 내면에서 자라나는 오만(휴브리스)과의 투쟁일 겁니다. 저는 호메로스의『오디세이아』와 소포클레스의『오이디푸스 왕』을 읽으며 '모르면서도 알고 있다고 믿는 오만과 '우리가 고대로부터 매우 발전했다고 믿는 자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P.29)
그후로도 저는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독서를 통해 셀 수 없이 많은 인물을 만나고, 세계의 거의 모든 도시를 여행했으며, 평생 한 번도 겪어볼 일이 없는 사건들에 연루되었습니다. 그 기억과 경험은 고스란히 제 안에 남아 있고 그 세계는 제가 직접 경험한 현실보다 훨씬 더 크고 풍부합니다. 이 세계가 모두 가짜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책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고 저라는 인간의 정신 안에서 고유한 방식으로 유일무이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환상에 빠져 현실을 잘못 보아서는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환상이고, 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현실일까요? 인간이 그것을 분명히 구분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현실 에 너무 집착해 자기 내면의 정신적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 문 제는 아닐까요?
(P.66)
『돈키호테』와『마담 보바리』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작품이 아닙니다. 어리석은 미치광이 돈키호테와 광기 어린 사랑으로 자신을 망쳐버린 에마 보바리는 세르반테스와 플로베르가 창조한 인물이지만, 그들에게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야기 속의 세계가 계속되기를 바라고, 그 안에 머물기를 원하는 우리가 거기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인물들에 매료되고 자기도 모르게 책장을 넘기며 그들의 뒤를 따라갑니다. 그러는 사이 그들이 우리의 의식에 침투해 우리의 일부를 돈키호테와 에마 보바리로 바꾸어 놓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읽은 소설은 우리가 읽음으로써 비로소 우리의 일부가 됩니다. 한번 읽어버린 소설은 더이상 우리 자신과 분리할 수 없습니다.『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은 사람이라면 나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나가사와의 말은 그런 면에서 일리가 있습니다. 같은 책을 읽었다는 것은 두 사람의 자아 안에 공유할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디는 뜻이니까요.
동시에 소설도 우리를 통해 증식을 거듭합니다. 그렇게 이야기와 인간이 하나가 되면서 이야기의 우주가 무한히 확장해 갑니다. 한때 저는 인간이 이야기의 숙주라 생각했습니다. 이야기가 유전자처럼 인간을 탈 것으로 삼아 다음 세대로 전승된다고 믿었던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졌습니다. 세상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한 대부분의 것들을 이야기로부터 배웠고, 그것을 기준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그 해석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인간이라면, 그런 인간은 과연 무엇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인간이 바로 이야기입니다.
돈키호테와 에마 보바리는 비록 현실의 존재는 아니지만 김영하라는 생물학적 존재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살아남을 것이고 앞으로도 증식을 거듭할 겁니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 그것은 인간이라는 어떤 우월한 존재가 책이라는 대량생산품을 소비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라는 이야기가 책 이라는 작은 틈을 통해 아주 잠깐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세계와 영겁의 시간에 접속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바로 이야기이고, 이야기가 바로 우주입니다. 이야기의 세계는 끝이 없이 무한하니까요.
(P.67)
우리는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 소설의 감취진 중심부를 찾습니다. 이것이 바로 소설을 읽을 때 우리 머릿속에서 무의식 적으로 소박하게 또는 성찰하면서 의도적으로 가장 많이 하는 작업입니다. 소설과 다른 문학 서사의 차이는 감춰진 중심부가 있디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겠습니다. 소설에는 우리가 그 존재를 믿으며 찾는 감취진 중심부가 있습니다.
소설의 중심부는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을까요? 소설을 만드는 모든 것이 그 재료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중심부는 우리가 단어 하나하나를 따라 좇아간 소설의 표면과는 멀리 떨어진 배후 너머에 있어서 보이지 않고 쉽게 찾을 수 없는, 거의 계속 움직여서 잡을 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이 중심부의 징후는 사방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설의 모는 세부 사항, 즉 거대한 풍경의 표면에서 마주친 모는 것은 서로 연결됩니다.
(P.83)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주제나 교훈을 얻기 위함도 아니고, '감춰진 중심부'에 도달하기 위한 여정도 아닙니 다. 소설을 읽는 동안 우리는 분명히 어떤 교훈을 얻은 것 같기도 하고, 주제를 찾아낸 것 같기도 하고, '중심부를 열심히 찾아 헤매다 얼추 비슷한 곳에 당도한 것도 같은데, 막상 다 읽고 나면 그게 아니었다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소설을 읽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헤매기 위해서일 겁니다. 분명한 목표라는 게 실은 아무 의미도 없는 이상한 세계에서 어슬렁거리기 위해서입니다. 소설은 세심하게 설계된 정신의 미로입니다. 그것은 성으로 향하는 K의 여정과 닮았습니다. 저멀리 어슴푸레 보이는 성을 향해 길을 따라 걸어가지만 우리는 쉽게 그 성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대신 낯선 인물들을 만나고 어이없는 일을 겪습니다. 일상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정들을 경험하기도 하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문제를 곰곰이 짚어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서점 서가에 꽂힌 그 수많은 책들 중에서 우리가 굳이 소설을 집어드는 이유는, 고속도로로 달리는 것에 싫증이 난 운전자가 일부러 작은 지방도로로 접어드는 이유와 비슷합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의 이성은 줄거리를 예측하고, 작가의 의도를 가늠하고, 인물의 성격을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의 누군가와 비교하기도 합니다. 반면 우리의 감성은 작가가 써놓은 적확하고 아름다운 문장에 탄복하기도 하고, 예리한 인물 묘사에 공감하기도 하고, 주인공이 처한 고난에 가슴 아파하기도 합니다. 이성과 감성이 적절히 균형을 이룰 때, 우리의 독서는 만족스러운 경험이 됩니다. 때로 이성에 이끌렸다가 때로 감성에 이끌렸다가 하면서 우리의 정신은 책 속에 구현된 그 이상한 세계를 점차 이해해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세계의 일원이 됩니다.
(P.101)
소설을 읽음으로써 우리가 얻은 것은 고유한 헤맴, 유일 무이한 감정적 경험입니다. 이것은 교환이 불가능하고, 그렇기 때문에 가치가 있습니다. 한 편의 소설을 읽으면 하나의 얇은 세계가 우리 내면에 겹쳐집니다. 저는 인간의 내면이란 크레페 케이크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상이리는 무미건조한 세계 위에 독서와 같은 정신적 경험들이 차곡차곡 겹을 이루며 쌓이면서 개개인마다 고유한 내면을 만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P.104)
소설이 이렇게 엄연한 자연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면, 독자는 이 자연을 어떻게 인식하고 경험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 자연이 히말라야의 봉우리나 아마존의 정글처럼 함부로 다가가기 어려운 것이라면 어떨까요? 독자들은 이런 책들과 어떤 투쟁을 벌이는 것이며, 그런 도전의 결실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제가 나보코프의 『롤리타』나 도스토엡스기의 『죄와 벌』, 미셸 우엘베의 『소립자』,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조나탕 리텔의『착한 여신들』같은 작품을 읽으며 무수히 떠올린 질문들 이었습니다. 이런 소설들을 읽는 것은 정신적으로 높은 수준의 긴장을 요구합니다. 윤리적으로나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주인공과 그들의 행위를 받아들이는 것도 어렵고,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감당하는 것도 힘겹습니다. 그러나 작가 들은 꾸준히 이런 작품을 써왔고, 많은 독자들이 이런 작품들 을 사랑했습니다. 독지는 작품의 일점일획도 고칠 수 없습니 다. 그러니 오직 이를 감당하는 일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습 니다. 그런데도 이 책들을 읽으려는 독자들의 줄은 여전히 줄지 않고 있습니다.
(P.120)
한갓 독자에 불과한 제가 작가의 무의식을 파헤치려고 노력하고, 소설을 작가(나보코프가 연기한 나보코프?)가 읽기를 원한 대로 읽지 않으려 애를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소설을 읽는 행위가 끝없는 투쟁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소설은 일종의 자연입니다. 독자는 그것의 일점일획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 자연을 탐험하면서 독자는 고통과 즐거움을 모두 느낍니다. 아름다운 운해를 보면서 감탄하는 등산객처럼 소설의 어떤 대목에서 독지는 미적 쾌감을 느끼면서 행복해합니다. 그러나 어떤 대목에서는 이 탐험을 계속 할 것인가 회의에 빠지기도 합니다. 심한 정신적 고통을 느낄 때도 있고 도덕적 아노미 상태에서 허우적거리기도 합니다. 독자는 소설이라는 자연을 극복하기 위해 나름의 투쟁을 전개합 니다. 우회로를 찾아보기도 하고, 작가의 의도를 넘겨짚어보기도 하고, 소설 속의 모든 문장을 의심의 눈초리로 살펴보기도 합니다.
『롤리타』와『이방인』 같은 작품의 주인공과 그들의 비윤리적 비상식적 행위를 견디는 것은 어쩌면 상대적으로 쉬운 일 일지도 모릅니다. 더 어려운 투쟁은 바로 작품의 매력과 싸우 는 것입니다. 우리가 500페이지에 달하는 소아성에자의 회고 록을 읽는 이유,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인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장례를 치르자마자 여자친구와 해변에서 노닥거리고, 햇볕이 눈이 부시다며 사람을 총으로 쏘아 죽이는 인물의 내면을 따라가고, 전당포 노파와 그의 여동생을 도끼로 살해한 후에도 참회하지 않는 인물의 행동을 지켜보는 이유는 나보코프와 카뮈와 도스토옙스키가 쓴 그 작품들에 우리가 매력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들은 우리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우리는 완독을 할 수 있었을 겁니다.
(P.134)
이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도덕하거나 사회적 통념과는 벗어난 행동을 하는 인물 의 이야기에 나는 왜 매력을 느끼는가? 나는 괴물인가? 니체 식으로 말하자면, 혹시 나는 너무 어두운 심연을 지나치게 오래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평범하고 도덕적인 삶을 영위하는 내가 이런 이야기에 매혹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인가? 저는 이런 의문들과 싸우며 한 권 한 권을 읽어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다행히도 이런 작품들은 세계명작 혹은 고전으로 불리고, 아름답고 우아한 장정으로 제책되이, 근엄한 교수님의 해설을 달고 우리 책꽂이에 꽂혀 우리를 안심시킵니다.
그래도 뭔가 있을 거야? 안 그래? 분명 뭔가가 있기는 있을 겁 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책을 읽는 우리의 자아가 안전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책들은 독자와 힘 겨루기를 합니다. 그 책들을 읽고 나면 독자의 자아는 읽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기 어렵습니다. 이전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인물과 생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런 인물과 사상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는(아니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P.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