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 한겨레출판 / 303쪽​
(2018. 6. 23.)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EBS 라디오가 책읽는 라디오를 표방하고
주말에 운전하며 라디오 채널을 여기저기 옮기다 보면
EBS에서 책을 읽어주는 방송이 나오곤 했다.
지금 언뜻언뜻 들었던 기억아 나는 책들이 "모비딕",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 클럽"이었다.
방송에서 읽어주는 내용이 야구에 대한 이야기, 삼미 슈퍼스타즈의 이야기들이어서
책 제목이 궁금해서 직접 찾아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알게된 책을 아주 오랜 후에야 읽게 되었다.

모두가 프로처럼 일해야 하는 것이 당연해진 것은 언제 부터일까
82년 프로야구가 생기고 대전이 연고지였던 OB가 우승을 했던 그시절 박철순의 22연승과 김유동의 한국시리즈 끝내기 만루홈런 이선희 선수의 눈물과 우승 만 기억하고 있던 내게 새로운 생각과 그 시절의 추억을 일깨워 준 이 책은 오래된 사진 첩을 다시 꺼내 보는 느낌이었다. 

그 시절 내가 몰랐던 프로야구의 또 다른 한 부분을 볼수 있던 소설이다.
그 시절 삼미는 작가 소설에서 쓴 것처럼 모든 프로 야구 팀들의 동네북 봉이었던 것으로 생각난다
한마디로 허접한 팀...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 삼미슈퍼스타즈 야구 

그러나 이제 나이를 먹고 생각이 쓸데 없이 길어져 가면서
소설에 작가가 얘기하고 있는 프로에 대해서 또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된다
언제부터 우리에게 사회라는 것이 프로만이 살아 남는 것이 당연한 사회로 인식되어 졌을까
이 약육강식의 시대에 자신만이 온전히 살아 남아야 하는 방법을 수련하기 위해
초등학생부터 온 국민이 전 국민의 프로화에 열정적으로 동참하고 있는 건 왜일까
많은 물음과 많은 생각을 해주게 해주는 소설이다  

 그래도 내가 응원하는 야구팀이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은 참 기쁜일이다.
튿히나 작년까지 삼미를 떠올릴 정도로 허우적대전 한화가 올 시즌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팬들에겐 기적 같은 일이다 ^^

==========​



  1982년은 그런 시절이었다.
  국민교육헌장의 암기에서부터 오후 다섯시만 되면 사람들을 '차렷' 시키던 국기 하강식, 시도 때도 없는 국기에 대한 맹세, 이 또한 빠지면 섭섭한 애국가 제창(4절까지), 쥐를 잡자, 반공의 날, 방첩의 날, 멸공의 날, 민방위의 날, 산불 조심, 그냥 불조심, 보리 혼식 주간, 간첩 신고 113...... 도대체 이 따위들이 어린이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생각할수록 골치가 아파왔지만 나는 소년이었고, 그저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세상을 살아갈 뿐이었다. 이거야 원,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쓰잘데기 없는 짓으로 별 희한한 역사라도 창조 하려는 걸까? 내심 궁금할 때도 있었지만 어쩌랴, 이제 모두지난 일 인데. 좋든 싫든. 아무튼 1982년은 그런 시절이었던 것이다. 북한은 종종 땅굴을 팠다. 진짜다.
(P.22)


  "명심해라, 경쟁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아버지는 그 말씀을 끝으로 그 작지만 방바닥이 따뜻하고, 창 너 머로 바다가 보이는 횟집의 방 안에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셨다. 당연히 그곳에는-마치 내가 해쳐가야 할 세상과도 같은-끝없는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파도들은 과연 심한 몸싸움을 벌이며 아버지의 말처럼 쉴 새 없는 경쟁을 펼치는 듯했고, 그 격렬한 해면(海面) 을 보고 있자니 더할 나위 없이 마음이 답답해져오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다들 저 바다를 헤치며 살아온 것이다, 혹은 살아갈 것이다. 피를 콧구멍에 끼우거나. 고등학교 동창에게 굽실거리며. 조지 워싱턴도, 링컨도, 인천법원의 김판사도, 한석봉도, 문제의 조부장도, 아버지도. 그리고 나도.​

  언뜻, 태어나서 처음으로
  산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구나, 라는 생각을, 나는, 했다.
(P.29)



  아름다운 것만 생각하고, 아름다운 것만 보며 자라나도 시원찮을 그 시절. 그렇게 우리는 원망과 분노와 사무친 원한 속에서 자신을 자학하며 자라나고 있었다. OB의 어린이 회원들이 박철순의 너클 볼을 연습하고, 신경식을 따라 다리 찢기를 연습하던 그 순간. 삼성 의 어린이 회원들이 이만수를 향해 “데끼리"를 외쳐대던 바로 그 순 간, MBC의 어린이 회원들이 "게브랄 티!”를 외쳐대던 바로 그 순간. 해태의 어린이 회원들이 2루에서 3루로 도루한 김일권에게 “홈스 틸!”을 목 놓아 외치던 그 순간, 5위인 롯데의 어린이 회원들이 “져도 좋다, 멋진 야구를!”의 플래카드를 하늘 높이 치켜들던 바로 그 순간-우리는 세상을 원망하며 인생을 자포자기히는 법부터 배워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져도 좋다, 멋진 야구를!”과 같은 말도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그런 배부른 말은 5위인 롯데의 팬들에게나 기능한 것이지.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결코 아니었던 것이 다. 그 길고 암울했던 82년의 전기 리그는 22연승의 불사조 박철순의 활약에 힘입어 0B베어스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우승을 확정 짓던 마지막 게임에서. 행가래를 치는 0B의 선수들과 덩달아 꽥꽥 거리던 또래의 리를 미련곰탱이들을 바라보며-나는 지금 이 순간, 북한이 쳐들어왔으면 좋겠다. 는 생각을 했다. 땅굴은 모두 완성되었겠지?
그리고 여름이 시작되었다.
(P.70)

​​
​​
  인천야구장은 예상과는 달리 한산했고. 예상했던 만큼 붐비고 있었다. 뭐랄까, 한산하다면 한산하다고도 말할 수 있고. 붐빈다면 붐
빈다고도 말할 수 있는 인파였던 것이다. 요컨대 올 사람들만 왔다는 얘기다. 실지로 그날의 인파는 대부분 삼미의 고별전을 보기 위 해 고의로 야구장을 찾은 인천의 팬들이었고. 그 속에 마지막 남은 원년의 리를 슈퍼스타즈-조성훈과 내가 끼어 있었다. 나는 인천야 구장의 길고 긴 벽돌담에 등을 기댄 채. 조성훈이 사온 박카스를 마시며 설레는 맘으로 이곳을 찾았던 82년의 봄날을 생각했다. 어느새 그로부터 3년의 세월이 지나 있었다. 예상과는 달리 짧은 세월이었고. 예상했던 만큼이나 길고 지루한 세월이었다.
  입장이 시작되었다. 예상치 못한 일은 정문을 들어설 때 일어났 다. 정문 좌우로. 삼미 슈퍼스타즈 선수들이 길게 열을 지어 문을 들 어서는 인천팬들을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수들은 “고맙습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보내주신 격려와 성원 잊지 않겠습 니다" 라는 평범한 인사말과 함께. 입장객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을 꼭 잡고 삼미 슈퍼스타즈 티셔츠와 야구모자, 그리고 수건을 안겨주었다. 왜 그랬을까. 나는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져왔다.
(P.115)

​​


  그날 밤 나는 새로운 사실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그저 평범하다고 생각해온 내 인생이 알게 모르게 삼미 슈퍼스타즈와 흡사했던 것처럼. 삼미의 야구 역시 평범하다면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야구였단 사실이다. 분명 연습도 할 만큼 했고. 안타도 칠 만큼 쳤다. 가끔 홈런도 치고. 삼진도 잡을 만큼 잡았던 야구였다. 즉 지지리도 못하는 야구라기보다는. 그저 평범한 야구를 했다는 쪽이 확실히 더 정확한 표현이다. 다시 말해 평범한 야구를 했던 삼미 슈퍼스타즈.
  이 얼마나 적확한 표현이란 말인가. 그러나 거기서 파생하는 또 하나의 의문. 확실히 평범한 야구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왜 삼미는 그토록 수치스럽고 치욕적인 팀으로 모두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걸까. 그것은 아마 기록과 순위의 문제 때문이겠지. 라고 나는 생각했으나. 곧 평범한 야구라면 최하위를 기록할 이유가 없다는 쪽으로 다시 생각의 흐름이 바뀌어갔다. 그렇다. 평범한 야구란 6개의 팀 중에서 3위나 4위를 달리는 팀의 야구를 일컫는 말일 테지. 그럼 왜?
  결론은 프로였다.

  평범한 야구 팀 삼미의 가장 큰 실수는 프로의 세계에 뛰어든 것 이었다. 고교야구나 아마야구에 있었더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팀  이 프로야구리는-실로 냉엄하고, 강자만이 살아남고, 끝까지 책임을 다해야 하고, 그래서 아름답다고 하며, 물론 정식 명칭은 '프로페셔널'인 세계에 무턱대고 발을 들여놓았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 인간이 평범한 인생을 산다면. 그것이 비록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한 인생이라 해도 프로의 세계에서는 수치스럽고 치욕적인 삶이 될 것이라 나는 생각했다.
  큰일이었다. 세상은 이미 프로였고, 프로의 꼴찌는 확실히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이었다. 아아, 실로 무서운 프로의 세계가 아닐 수 없다고 16살의 나는 생각했다. 그럼 평범한 삶보다 조금 못하거나 더 떨어지는 삶은 몇 위를 기록할 것인가? 몇 위라니? 그것은 야구로 치자면 방출이고, 삶으로 치자면 철거나 죽음이다. 그런 삶은 순위에 낄 자리가 없다. 평범한 삶을 살아도 눈에 흙을 뿌려야 할 만큼 치욕을 당하는 것이 프로의 세계니까.
​(P.125)



그날 밤 나는. 낡고 먼지 낀 내 방의 창문을 통해-저 캄캄한 어둠 속에 융기해 있는 새로운 세 개의 지층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부유층과 중산층. 그리고 서민층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지층들이었고. 각자가 묻힌 지층 속에서 오늘도 화석처럼 잠들어 있을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나는 보았다. 꽤 노력도 하고, 평범하게 살면서도 수치와 치욕을 겪으며 서민층에 묻혀 있는 수많은 얼굴들을. 무진장. 혹은 눈코 뜰 새 없이 노력하면서도 그저 그런 인간으로 취급받으며 중산층에 파묻혀 있는 수많은 얼굴들을. 그리고 도무지 그 안부를 알 길이 없는-이 프로의 세계에서 방출되거나 철거되어-저 수십 km 아래의 현무암층이나 석회암층에 파묻혀 있을 수많은 얼굴들을. 나는 보았다.
  세상의 지층은 그렇게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이 지진을 느끼지 못한 채 오늘도 편안히 잠들어 있는 사람들이 그저 놀랍기만 했다. 다들 그만한 자신감이 있다는 것인가? 다들 벌써 그토록 자신만만한 프로가 되었다는 말인가? 그게 아니라면 이 무슨 똥배짱인가.
한 가지 알 수 없는 것은. 만약 그렇다면-부유층에는 지랄에 가까울 정도로 노력하거나 결국 허리가 부러져 못 일어날 만큼 노력한 얼굴들이 묻혀 있어야 할 터인데. 16살의 내 머리로도 왠지 그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16살의 소년에게 세상은 한꺼번에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다시 슈퍼스타즈를 생각했다. 그리고 삼미의 팬이었던 나의 유년과. 현재를 생각했다. 0B와 삼성. 혹은 MBC나 해태의 팬이었 던 또래의 소년들에 비해 확실히 나는 염세적인 소년이었고. 자신감 이 없었으며. 세상을 어둡게 바라보고 있었다. 0B의 팬이 아니라면. 삼성의 회원이 아니라면. 아니 프로야구가 없었다면-그 소년들과 나의 차이점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결국 문제는 내가 삼미 슈퍼스타즈 소속이었던 데서 출발한 것이라고, 16살의 나는 결론을 내렸다. 그랬다. 소속이 문제였다. 소속이 인간의 삶을 바꾼다
(P.129)



  그날의 선거에서 우리는 노태우씨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부정이다! 개표 현황을 지켜본 나는 내일 아침이면 또 난리가 나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부정은 이내 밝혀질 것이고, 그날의 함성 은 다시 세상을 뒤흔들겠지.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쩌면 올해의 대입도 취소되기가 쉬워. 혁명의 과도기야. 일찍 자자.
  다음날 아침. 그러나 세상은 조용했다. 음 혁명 세력도 아침은 먹어야지, 라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점심이 지나도 마찬가지. 음 어디가 아픈가, 라고 생각했지만 저녁이 되자 세상은 평화롭기까지! 옳거니, 폭풍 전야구나. 엄청난 규모의 혁명이다. 각오해!
  그 다음 날 아침.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음 오늘도 아침은 먹어야지, 그러나 점심이 지나도 마찬가지. 저녁엔 어제보다 더한 평화가 찾아왔다. 죽었나? 기대했던 혁명은 그 후 십수 년이 지난 오늘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이미 유통 기한을 넘긴 셈이다.
  6월 항쟁의 '우리'와 대통령 선거일의 '우리'는 같은 '우리'인가? '우리'는 도대체 누구인가? '우리'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들을-나 는 낡았지만 최근에 청소를 한 내 방의 창틀 너머로 계속해서 던져 보았다. 어둠은 대답이 없었고, '우리'는 모두 잘 자고 있었다.
  그건 야구와 같은 거야. 선거에 대해 조성훈은 그렇게 얘기했다.  여당이 돼야 나라가 안정되지. 동네의 반장은 그렇게 얘기했다. 경 제가 흔들려선 안 돼. 아버지는 그렇게 얘기했다. 주변의 미물들은 그렇게 말한다 쳐도, 신문은-당선을 축하하며 화합과 안정을! 혁명의 주체가 되리라 생각했던 서민층과 중산층이, 실은 그 지층이 더욱 다져지길 원했다는 사실은-18살의 나로서는 감당키 힘든 충격이었다. 나는 다시는 혁명이란 거짓말을 믿지 않기로 했고 다시는 '우리'를 믿지 않기로 했다. 조성훈이 라면을 끓여왔다. 얼마 후 대입을 치렀다. 예상했던 대로 극히 우수한 성적이 나왔다. 또 예상과는 달리 조성후도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 결과에 내가 놀라워하자 놈은 오히려 놀랍다는 듯 “못하는 편은 아니었잖아?” 라 며 반문했다. 그랬다. 확실히, 못하는 편은 아니었다.
  원서를 썼다. 생각보다 갈 만한 학과 그리 많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지만 우수한 성적에게도, 평범한 성적에게도, 저조한 성적에게 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인생의 진로는 불과 일주일 사이에 결정났고, 4지 선다형의 교육은 4지 선다형의 진로만을 펼쳐놓았다.
  원서를 쓰면서, 나는 교육의 목표 역시 '소속'을 가리는 데 있었다는 중요한 비밀을 알게 되었다. 똥배짱이 아닌 이상은,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개발했다간 큰일이 나는 것이다. 눈치를 깠다면 당연히 타고난 저마다의 '소속'부터 개발해야 한다. 참, 계발(啓發)이었지 !
  개발괴발 원서를 써서 나는 일류대 경영학괴를, 조성훈은 철학과를 각기 지망했다. 둘 다 합격이었다.
(P.138)​



  “뭐 어때? 어차피 졸업장만 따면 되잖아." 철학을 전공했기 때문일까, 조성훈은 이 무렵부터 무언가를 꿰뚫는 듯한 말투로 종종 나를 놀라게 했다. 놈의 말을 듣고 보니 나는 과연 졸업장을 따기 위해 대학에 온 것이었고, 실제 일류대에 소속 된 이상 앞으로의 인생에 큰 어려움이 없을 거란 생각을 미음 한구석에 지니고 있었다. 즉 0B의 회원이라면-어떤 바보라도 야구장에서 남부럽잖은 행복을 느끼며 덩달아 우쭐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그랬다. 나는 이미 삼미의 잠바를 벗어던졌고, 세상이 인정하는 팀의 잠바를 입고 있었다. 이제 남은 일은 회원 지정석에서 플래카드를 흔들며 우리 삼성이 어쩌니. 우리 0B가 어쩌니 하는 식으로 우승한 인생을 논하는 것이었다. 내가 원한 것은 바로 그 소속감이 아니었던가. 학문의 성취나 이상의 실현 따위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 물론 대학 생활을 마라톤에 비유한다면 자신에 대한 도전과 끝없는 성취를 목적으로-42km가 넘는 길고 긴 거리를 혼신의 힘을 다해 질주하는 인간도 있겠지만 그런 인간은 그런 인간이고 나라면 쉬엄쉬엄 걷다가 놀다가 결국엔 '졸업'이라는 버스를 타고 결승점의 테이프를 끊어버리겠다. 이 말씀이다. 맨홀에 빠지는 일만 없다면 대학은 결국 그 버스를 제공해주기 마련이다. 나는 물론 후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내가 소속된 대학은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우승 팀일 것이고, 나는 이미 영원한 팀의 회원이 되어 있다. 말 그대로. 졸업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랬다. 목표는 졸업.
(P.147)

​​

  어느 날 아침, 나는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3차 구조조정의 대상자임을 통보하는 메일이었다. 순간 눈앞의 재떨이나 달력을 볼 새도 없이 뜨거운 눈물이 솟구쳤다.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나는 일찍 일어난 새가 아니라. 일찍 잠을 깬 벌레였다는 것을.
  저 역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된장 앞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첼리스트처럼, 과장은 갑작스런 존대를 하며 나를 달랬다. 자발적인. 사표를 쓰란. 얘기였다. 첼리스트의 마지막 연주는-사실 이 바닥이 얼마나 좁은지는. 잘 알고 계실 거라 믿습니다, 였다.
  눈물을 막은 것은 자존심이었다. 나는 말없이 짐을 정리한 후. 말 없이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그간 해온 일들에 비해 극히 간단한 절 차였고, 아무런 소음도 없었다. 터무니없을 만큼 세상은 여전했다. 세상이 여전한 이유는 반드시 누군가가 여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차장을 내려오다 잠시 벽에 손을 짚고 서 있었다.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서였다. 손바닥을 통해. 차고, 서늘하고, 완강한 콘크리 트의 기운이 전해져왔다. 내가 퇴출된 회사의 구조는 놀라울 만큼 튼튼한 것이었고, 놀랍게도 나는 그 구조물의 일부가 아니었다.
(P.223)



  올 여름은 왜 이렇게긴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하다가 나는 비로소. 시간은 원래 흘러 넘쳐흐르는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말이지 그 무렵의 시간은 말 그대로 철철 흘러넘치는 것이서서. 나는 언제나 새 치약의 통통한 몸통을 힘주어 누르는 기분으로 나의 시간을 향유했다. 신은 사실 인간이 감당키 어려울 만큼이나 긴 시간을 너구에게나 주고 있었다. 즉 누구에게라도, 새로 사온 치약만큼이나 완벽하고 풍부한 시간이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시간에 쫓긴다는 것은-돈을 대가로 누군가에게 자신의 시간을 팔고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니 지난 5년간 내가 팔았던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시간. 나의 삶이었던 것이다.

  알고 보면, 인생의 모든 날은 휴일이다.
(P.26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2
어니스트 헤밍웨이 / 김욱동 / 민음사 / 456쪽
(2018. 6. 21.)




  밤은 맑게 개었고, 그의 머릿속까지 밤공기처럼 싸늘하고 맑아지는 것 같았다. 그는 밑에 깔린 소나무가지 냄새와 솔 잎 향기, 잘린 가지에서 배어 나오는 좀 더 강열한 송진 냄새를 맡았다. 필라르, 하고 그는 생각했다. 필라르와 죽음의 냄새.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냄새는 이거야. 이 냄새, 이제 막 꺾은 클로버, 가축을 몰 때 짓밟는 샐비어, 나무 타는 연기, 가을에 낙엽 태우는 냄새, 그건 노스탤지어의 냄새가 틀림없어. 저 미줄라의 가을 거리에서 긁어모은 낙엽을 태우는 냄새. 하지만 어느 쪽이 더 좋으냐? 인디언들이 바구니를 만들 때 쓰는 향모? 훈제 가죽? 봄비 내린 뒤의 흙냄새? 갈리시아 곶의 당 떠러지 위쪽에서 가시금작화를 헤치고 걸을 때 나는 바다 냄새? 아니면 저물 녘 쿠바에 가까웠을 때 육지에서 불어오는 냄새? 그건 선인장 꽃이며 미모사며 가시솔나무의 향기였지. 그것도 아니면 배고픈 아침에 베이컨 튀기는 냄새가 더 좋으냐? 아니면 아침에 마시는 커피? 아니면 한 입 와삭 베어 물 때의 조너선 사과? 사과주스 공장에서 사과를 으깨는 향기? 오븐에서 갓 구워 낸 빵 냄새? 넌 지금 배가 고프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아직도 옆으로 누워 눈에 반사된 별빛으로  환한 동굴 입구를 지켜보고 있었다.
(P.30)



  이제까지 네가 죽인 사람이 몇이나 되지? 하고 그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잘 몰라. 너는 사람을 죽일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나? 아니 없지. 하지만 죽여야만 해. 네가 죽인 사람 중에서 도대체 몇이나 진짜 파시스트였지? 극소수야. 하지만 그들은 모두가 아군과 대항하는 군대에 속한 적들이었잖아. 하지만 넌 스페인을 통틀어 어느 곳보다도 나바라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가. 그건 그래. 그런데도 너 그들을 죽였어. 그랬지. 만약 믿지 못하겠다면 저기 캠프까지 내려가 보란 말이다. 살인 행위가 잘못이란 것을 모르는가? 알고 있어. 그런데도 죽이는 거야? 그래. 그래도 넌 대의명분이 옳다고 절대적으로 믿는 거야? 그럼 믿고말고.
  옳고말고, 하고 그는 확신에 차서는 아니지만 자랑스럽게 스스로에게 말했다. 난 민중을 믿고, 민중이 바라는 대로 자치(自治)를 할 권리가 있다고 믿어. 하지만 넌 살인 행위가 옳다고 믿어서는 안 돼, 하고 그는 스스로를 타일렀다. 불가피하게 살인 행위를 해야 하더라도, 옳은 일이라고 믿어서는 안 돼. 만약 그렇게 믿는다면 모든 일이 그릇되고 말 거야.
  넌 사람을 몇 명쯤 죽였다고 생각하나? 자취를 남겨 놓고 싶지 않으니, 알수 없지. 그래도 알 텐데? 알지. 몇 명이야? 몇 명인지는 확실치 않지. 기차를 폭파해서 한꺼번에 여러 명을 죽였으니까. 아주 많이. 확실치는 않아. 그래도 그중에서 확실 한 수는? 스무 명은 넘을 거야. 그렇다면 그중에서 진짜 파시스트는 몇이나 되지? 두 명은 확실해. 아군이 그 두 놈을 우세라에서 포로로 잡았을 때 내가 총살해야 했으니까. 그때 마음에 거리끼지 않던가? 아니. 그렇다고 기분이 좋은 것도 아니었겠지? 그랬지. 난 또다시 그런 짓을 않겠다고 결심했거든  그래서 그런 일을 피해 왔어. 무장하지 않은 사람들을 죽이지 않으려고 피해 왔지.
  어이, 이것 봐, 하고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이제 이런 생각은 집어치우는 게 좋겠어. 그건 너를 위해서도, 네 일을 위해서도 아주 해롭거든. 그러자 내면의 그가 다시 그에게 말했다. 어이, 내 말 잘 듣고 있는 거야? 넌 지금 아주 중대한 일을 하는 중이고, 또 난 네가 그것을 잘 깨닫고 있도록 해야 돼. 네 머리가 똑바로 돌아가도록 만들어 놓아야 한다고. 만약 네 머리가 완전히 똑바르지 않다면, 네가 지금 하는 일을 할 권리가 없기 때문이야. 그런 일은 모두 범죄 행위이며, 또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들에게 더 나쁜 화가 미치지 않도록 방지하는게 아닌 한 타인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는 없기 때문이야. 그러므로 그 점을 확실히 인식하고 자신에게 거짓말하는 일이 없도록해.
(P.105)​
​​


  이젠 그만 닥치시지, 하고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넌 지금 몹시 건방지게 굴고 있어.
  무슨 일이건 간에 너 자신을 속일 권리는 없는 거야, 하고 내면의 그가 계속 말했다.
  알았어, 그는 자신에게 대답했다. 여러 모로 좋은 충고를 해 줘서 고마워. 그런데 내가 마리아를 사랑하는 건 괜찮은가?
  그럼, 괜찮고말고, 하고 내면의 그가 대답했다.
  순수한 유물론적 사회관에서는 사랑 같은 존재는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도대체 언제부터 그런 사회관을 갖게 됐지? 하고 내면의 그가 물었다.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었지. 또 가지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어. 넌 '자유', '평등', '박애'를 믿지.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를 신봉하고. 그러니 필요 이상의 변증법으로 자신을 속이지 마. 변증법 같은 건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일 뿐 너를 위한 것은 아니니까. 넌 그저 착취자가 되지 않기 위해 그걸 알아 둬야 할 뿐이지. 넌 이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정말 많은 일을 유보해 버렸지. 만약 이 전쟁에 패배한다면 그런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될 거야.
  하지만 전쟁만 끝난다면 너도 네가 믿지 않는 것들을 내버릴 수 있어. 네가 믿지 않는 것도 산더미같이 많지만, 믿는 것도 산더미 같이 많아.
(P.107)​



  사람을 사랑하는 데 결코 자신을 속이지마. 남을 사랑한다는 것이야말로 보통 사람들 누구에게나 오는 행운이 아니야. 너도 전에는 한 번도 얻지 못했다가 이제야 겨우 얻었지 않은가. 마리아와 함께 누리는 게 비록 오늘 하루와 내일의 일부밖에 지속되지 않는 것이라 해도, 아니면 아주 오랫동안 지속된다 해도, 그건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거든. 자신이 얻지 못했다고 그런 것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인간은 어느 시대에나 있는 법이지. 하지만 확실히 말해 두지만, 사랑이라는 건 정말 존재 하고, 넌 지금 그것을 누리고 있으며, 그래서 비록 네가 내일 죽는다 해도 년 행복한 사나이 인 거야.
(P.108)



  영감은 인류 역사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산에서 죽었는 지 알고 있다 해도 위안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일을 겪는 바로 그 순간에는 비슷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일 때문에 영향을 받지는 않기 때문이다. 어느 날 과부가 된 여자가 아내에게 사랑받던 다른 남편들 역시 죽었다는 소식을 듣더라도 조금도 위안이 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든 그렇지 않든 죽음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법이다. 죽음을 받아들였지만, 쉰두 살의 나이에 세 군데나 총상을 입고 산꼭대기에서 독 안에 든 쥐처럼 갇혀 있는 엘소르도에 게 죽음의 잔은 결코 달지 않았다.
  그는 이런 일에 대해 혼자 농담을 지껄였지만 하늘과 먼 산 을 바라보며 술을 들이켰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바라지 않았다. 어차피 죽어야 한다면, 하고 그는 생각했다. 죽는 것이 확실하다면 죽을 수 있어. 하지만 이렇게 죽기는 끔찍이도 싫어.
  죽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고, 그는 마음속에서 죽을 때의 모습을 그려 보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살아 있다는 것은 산비탈에서 바람에 나부끼는 곡식 들판이었다. 살아 있다는 것은 하늘에 떠도는 매였다. 살아 있다는 것은 도리깨질을 하고 왕겨를 불어 내는 먼지 자욱한 타작마당에 놓여 있는 질그릇 물동이였다. 살아 있다는 것은 두 다리 사이에 끼고 타는 말이요, 한쪽 다리로 누르고 있는 카빈총이요, 언덕이요, 골짜기요, 나무를 따라 흐르는 개울이요, 골짜기 저쪽 산비탈이요, 그 건너편 언덕들이었다.
​(P.121)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할 일들을 얼마나 많이 모르고 있는가? 나는 오늘 죽지 않고 더 오래 살고 싶구나. 이 나흘 동안 삶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이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배운 것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것을 배운 것 같아, 하고 그는 생각했다. 난 노인이 되어 진실로 삶에 대해 아는 사람이 되고 싶어. 인간이란 언제까지나 계속 배워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사람마다 정해진 양밖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일까? 아무것도 모르면서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좀 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P.243)



  “만약 눈만 오지 않았으면......” 필라르가 말했다. 그러자 (이를테면 이 여자가 한 팔로 그를 껴안기라도 한 것처럼) 육체적인 해방감을 맛볼 때처럼 그렇게 급격하지는 않지만, 천천히 그리고 이성적으로 그는 그녀의 말을 받아들여 증오감을 차츰 몰아내기 시작했다. 확실히 눈 때문이야. 눈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 거야. 눈 때문이거든. 눈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됐어. 한때 너도 다른 사람들처럼 눈 때문이라고 생각했잖아. 한때는 너도 네 자아를 잊어버렸지. 싸움터에서는 언제  나 자아를 잊어버려야 하거든. 그런 곳에서는 자아란 있을 수 없어. 너 자신이 있는 곳에 오직 패배만 있을 뿐이지.
(P.359)

​​​

  그는 또다시 산비탈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난 이 세상을 떠나기 싫을 뿐이야. 이 세상을 떠나기가 정말로 싫어. 그리고 내 인생에서 뭔가 좋은 일을 했기를 바라. 내가 갖고 있던 재능이나마 그것으로 그렇게 시도해 봤지. '갖고 있는' 이 라는 뜻이겠지. 그래, '갖고 있는' 재능 말이야.
  나는 내가 믿고 있던 것을 위해 지난 일 년 동안 싸워 왔지. 만약 우리가 여기서 승리를 거두면 우린 어디서나 승리를 거두게 될 거야. 이 세계는 아름다운 곳이고, 그것을 위해 싸울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지. 그래서 이 세계를 떠나기가 싫은 거야. 이렇게 훌륭한 삶을 보낼 수 있었으니 넌 행운아였어, 하고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할아버지의 삶처럼 그렇게 길지는 못했어도 할아버지 못지않게 훌륭한 삶을 살았어. 이 마지막 며칠 때문에 넌 누구 못지않게 훌륭한 삶을 보낼 수 있었지. 이런 행운을 얻고도 설마 불평할 생각은 하지 않겠지.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배운 것을 사람들에게 전할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어. 제기랄,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야 정신없이 그것을 배우고 있군. 카르코프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그 사람은 지금 마드리드에 있겠지. 바로 저 산맥을 넘어 평야 건너편에. 잿빛 바위와 솔밭과 히스와 가시금작화 숲을 빠져나가 노란 고원 지대를 가로질러 가면 바로 그곳에 그 도시가 하얗고 아름답게 솟아 있지. 그곳은 필라르가 들려준 도살장에서 짐승의 피를 마시는 할머니들의 이야기처럼 현실적이지. 진실한 것이 하나만 있다는 법은 없어. 모두가 진실인 거야. 아군의 것이건 적의 것이건 비행기는 하나같이 아름답거든  빌어먹을 비행기들, 하고 그는 생각했다.
(P.39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1
어니스트 헤밍웨이 / 김욱동 / 민음사 / 484쪽
(2018. 6. 13.)




  "어디 손 좀 봅시다." 그녀가 말했다. 로버트 조던이 손을 내밀자 여자는 커다란 손으로 그의 손을 붙잡고 엄지손가락으로 손바닥을 비빈 뒤 한참 동안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손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도 따라 일어서자 그녀는 미소를 띠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손금이 어떻습니까?" 로버트 조던이 물었다. "난 그런 건 믿지 않습니다. 그러니 뭐라고 말해도 겁먹지 않아요."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못 봤어.” 그녀가 말했다.
  “아뇨, 아주머니는 뭔가 봤어요. 난 그저 호기심으로 알고 싶을 따름입니다. 그린 거 믿지 않아요.”
  “그럼. 월 믿는데?”
  “여러 가지를 믿죠. 하지만 그것만은 믿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라는 게 도대체 뭐지?”
  “내가 할 일 말입니다.”
  “그래, 난 지금 그걸 봤에”
  “그 밖에 또 월 봤는지 말해 주십시오.”
  “그 밖엔 본 거 없소.”
(P.71)
​​


   “영감님은 사람을 죽여 본 경험이 있습니까?” 로버트 조던은 어둠이 주는 편안함과 그날 하루를 같이 보냈다는 친밀감에서 안셀모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있었지. 몇 번인가 있었어. 하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그러지는 않았어. 내 생각에는 사람을 죽인다는 건 죄악이거든. 비록 상대가 우리가 꼭 죽여야만 하는 파시스트일지라도 말이야. 사람과 곰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어. 인간을 짐승의 형제라고 생각하는 집시들의 미신을 난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정말이지 난 사람을 죽이는 건 어떤 경우든 반대야.”
  “그래도 영감님은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그리고 또 앞으로도 죽일 테고. 하지만 만약 목숨이 붙어 있다면 앞으로는 아무도 해치지 않고 살아가고 싶어. 그러면 언젠가 내 죄를 용서받게 될 테지.” 
  “누구한테 용서 받아요?”
  “그걸 누가 알겠어? 이 세상엔 이제 하느님도 안 계시고 하느님의 아들도 성령도 모두 안 계시니 누가 용서해 줘? 난 잘 몰라.”
  “그럼 영감님한테는 이제 더 이상 하느님이 없다는 건가요?"
  “없어! 정말 없어. 만약 이 세상에 하느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하느님이 이 눈으로 똑똑히 보아 온 일들을 일어나게 하셨겠어? 그놈들이나 하느님을 믿으라지.”
  “그들도 하느님을 주장하고 있죠."
  “신앙 속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확실히 하느님이 없는 것이 섭섭해. 하지만 이제 인간은 자신에 대해 책임을 져야만 해."
  “그렇다면 사람을 죽인 죄를 용서해 주는 것도 영감 자신이 겠군요."
  “난 그렇게 믿어. 당신이 그런 식으로 분명히 말해 주니, 아마 틀림없이 그럴 거야. 하지만 하느님이 계시든 계시지 않든 사람을 죽이는 건 죄악이라고 생각해.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건 내게는 굉장히 중대한 일이거든. 피할 길이 없을 때엔 할 수 없이 사람을 죽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난 파블로 같은 족속은 아니야." 안셀모가 말했다.
​(P.85)



  아니, 그렇게 생각할 게 아니지, 하고 그는 자신을 타일렀다. 너라는 존재는 없어. 절대 아무일도 당하지 않는 사람은 없지. 나도 이 노인도 따지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야. 다만 네 임무를 완수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거든. 세상에는 꼭 필요한 명령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건 네 탓이 아니야. 지금 다리가 하나 있고, 그 다리가 인류의 장래를 결정하는 분기점이 될 수도 있는 거야. 이 전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것에 달려 있는 것처럼. 그러니 내가 할 일이라곤 한 가지밖에 없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을 완수해야 해. 빌어먹을, 오직 한 가지뿐! 하고 그는 생각했다. 정말 하나뿐이라면 그건 쉬운 일이지. 쓸데없는 걱정을 말란 말이다, 이 입만 나불거리는 녀석아, 하고 그는 혼잣말을 했다. 다른 일이나 생각해 봐.
(P.90)



  “입 닥쳐.” 파블로의 마누라가 쏘아붙였다. 그때 갑자기 그 날 오후에 본 조던의 손금이 머리에 떠오른 그녀는 공연히 화가 나서 한층 더 소리를 높였다. “닥쳐, 이 겁쟁이야! 닥쳐, 이 재수 없는 까마귀 같은 놈아. 닥치지 못해, 인간 백정 같으니!”
   “잘한다! 그래 가만히 있으마. 이젠 네년이 두목이니까. 그 아름다운 그림이나 언제까지나 들여다보고 있어. 하지만 내 가 바보가 아니라는 걸 잊지 마.” 파블로가 내뱉었다.
​  파블로의 마누라는 자신의 분노가 슬픔으로 변해 가고 모 든 희망과 약속이 위축되어 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기분은 처녀 시절부터 알고 있었고, 지금까지 살면서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또 이런 기분이 갑자기 들었고, 그녀는 이런 기분을 몰아내 다시는 자기에게 -자기에게도 공화국에게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그녀가 말했다. “자, 이제 식사하지. 마리아, 그 솥에 있는 음식을 그릇에 나눠 쥐.”
(P.116)



  “이 못생긴 얼굴에 당신도 반했나? 아냐, 지금 한 말은 농담이야. 자, 이 못생긴 걸 좀 봐 봐. 하지만 아무리 못생겼어도 상대방이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 동안은 그 사나이의 눈을 멀게 할수 있는 감정을 지니게 되는 법이지. 그 감정으로 상대방을 눈멀게 하고 자기 자신까지도 눈이 멀어 버리거든. 그러다가 어느 날 아무런 이유도 없이 진짜 타고난 그대로의 못생긴 얼굴이 그 사나이의 눈에 띄게 되는 거야. 그렇게 되면 상대방 사나이는 마침내 장님 신세를 면하게 되고, 여자 쪽도 그 사나이의 눈에 비치는 것처럼 자기가 못생겼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결국에는 애인도 자신의 감정도 모두 잃어버리고 마는 거지. 알겠니, 이 아가씨야?” 그녀가 아가씨의 어깨를 가법 게 두드렸다.
(P.193)​

​​​

  만약 공화국이 패배한다면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스페인에서 살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될까? 그렇다, 파시스트들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에서 이미 일어 나고 있는 사태로 보아 그렇게 될 것이 뻔하다고 그는 깨닫고 있었다.
  파블로는 돼지 같은 사내지만 다른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이런 일을 시키는 건 그들 모두를 배신하는 게 아닐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만약 그들 이 이일을 하지 않는다면, 두 기병 대대가 나타나서 일주일이면 그들을 이 산에서 깡그리 소탕할 것이다.
  그렇지 않아. 그들을 자유롭게 그냥 내버려 둔대도 이득이 될 것은 조금도 없었어. 모든 사람을 자유롭게 내버려 둬야 하고, 누구도 남을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말이지. 그러니까 그는 그것을 믿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렇다, 그는 그것을 믿고 있었다. 그리고 계획 사회나 그 밖의 일 들은 어떻게 되나? 그런 것들은 다른 사람들이 할 몫이 아닌 가. 그에게는 이 전쟁이 끝나면 따로 할 일이 있었다. 그가 이 전쟁에서 싸우는 것은 이 전쟁이 자기가 사랑하는 나라에서 일어났기 때문이고. 공화주의를 신봉하기 때문이며, 또 만약 이 전쟁에 진다면 공화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의 삶이 비참 해지기 때문이다. 이번 전쟁을 치르는 동안 그는 공산당의 통제를 받고 있다. 이곳 스페인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전쟁을 수행하는 데 가장 훌륭한 기율, 가장 건전하고 가장 진지한 기율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전쟁 동안 그들의 통제를 받아들인 것은 전쟁을 수행하는 데 그가 존경할 만한 계획과 기율을 지닌 유일한 당이었기 때문이다.
(P.314)



  하지만 그때까지는 네가 현재 누리고 있는 삶이나 앞으로 누릴 삶이 (바라건대) 오늘, 오늘 밤, 내일, 오늘, 오늘 밤, 내일, 이렇게 자꾸만 되풀이될거야,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니까 현재의 시간을 최대한으로 이용하고 그것에 감사하면 그만이야. 비록 다리 일이 실패로 돌아간다 해도. 지금으로서는 그리 희망이 있어 보이지 않지만 말이다.
  하지만 마리아만큼은 좋았어 . 참으로 좋았지. 아, 정말로 그랬어, 하고 그는 생각했다. 어쩌면 이것이 지금 내가 삶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일지도 몰라. 어쩌면 이것이 바로 내 삶이고, 내 삶의 연수는 칠십 년이 아니라 사십팔 시간, 아니 고작 육십 시간이나 열 시간이나 열두 시간일지도 몰라. 하루가 이십사 시간이니 꼬박 사흘은 칠십이 시간이 되거든  칠십 시간 동안 칠십 년에 못찮은 풍부한 삶을 누릴 수 없는 것은 아니야. 칠십 시간이 시작되는 순간까지 네 삶을 더없이 풍부하게 살아 왔고, 또 네가 어떤 나이에 이르렀다면 말이다.
(P.320)



  만약 네 삶의 칠십 년을 팔아서 칠십 시간을 산다 해도 지금의 나로서는 그런 가치가 있는 셈이야. 그 사실을 알게 되다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지. 그리고 만약 오랜 시간이나 앞으로 남은 삶도 없고, 또 지금부터의 시간도 없고 오직 있는 것이라곤 현재뿐이라면, 바로 이 현재야말로 찬양 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그것을 가지고 있기에 참으로 행복해. 
(P.321)
​​


  골츠는 아마 모든 것을 알고 있어서 네게 주어진 이틀 밤에 네 모든 삶을 살아야 한다고 보여 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것처럼 살면서, 네가 언제나 누려야 할 모든 것을 허락된 짧은 시간 안에 집중시켜야 한다고 알려 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훌륭한 신념이었어. 하지만 그는 마리아가 오직 상황 때문에 만들어졌다고는 믿지 않았다. 물론 그녀가 그의 상황은 말할 것도 없고 그녀 자신의 상황에서 나온 반동이 아닌 이상에는 말이다. 한 가지, 그녀의 상황은 썩 좋지 않아,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 틀림 없이 그렇게 썩 좋지가 않지.
  만약 지금의 상황이 이렇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이 상황이 좋다고 말해야 하는 법은 없었어. 내가 이제껏 느껴 온 것을 지금 느낄 수 있을지는 몰랐어, 하고 그는 생각했다.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나리라고도 말이야. 나는 전 생애를 걸고라도 이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 넌 그렇게 할 거야, 하고 다른 쪽의 그가 말했다. 넌 그렇게 할 거야. 넌 지금 그것을 갖고 있고, 그것은 너의 전 생애가 아니더냐. 지금 말이야. 지금 말고는 아무 것도 없어. 어제라는 것도 없고, 내일이라는 것도 없지. 도대체 몇 살이나 되어야 그것을 안다는 말이냐? 오로지 현재만 있을 뿐이야. 만약 그 현재가 겨우 이틀뿐이라면, 그 이틀이 네 모든 인생이며, 그 속의 모든 것은 그 비율로 존재하거든. 이게 네가 이틀 동안에 일생을 보내는 방법이야. 그리고 만약 네가 불평 집어치우고, 절대로 손에 넣을 수 없는 것만 바라지 않는다면, 넌 훌륭한 삶을 살 수 있을 거야. 훌륭한 삶이란 성서에서 말하는 그 기간으로 잴 수 있는 건 아니거든.
  그러니까 이제는 걱정하지 말고 현재 네가 갖고 있는 것을 누리고, 맡은 일이나 해. 그러면 넌 긴 인생을, 그것도 아주 즐거운 인생을 보낼 수 있을 거야. 최근 즐거운 삶을 누리지 않았던가? 뭘 그렇게 불평만 늘어놓고 있는 것이냐? 이런 일이라는 게 그런 거지, 하고 그는 자신을 타이르고, 그런 생각에 아주 만족했다. 그리고 중요한 건 네가 배운 것이 아니라 네가 만난사람들이지. 이렇게 농담을 하고 나니 기분이 좋았고, 그래서 그는 마리아한테로 돌아갔다.
(P.32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을 지키려는 고양이
나쓰카와 소스케 / 이선희 / 아르테 / 296쪽
(2018. 6. 9.)




  “책에는 힘이 있지.” 
  할아버지는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했다.
  평소에 워낙 과묵해서 손자에게도 거의 말을 하지 않았지만 책에 관해 말할 때에는 가느다란 눈을 한층 더 가늘게 뜨고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시대를 초월한 오래된 책에는 큰 힘이 담겨 있단다. 힘이 있는 수많은 이야기를 읽으면, 너 마음 든든한 친구를 많이 얻게 될 거야.”
(P.26)



  “유머 감각은 별로지만 마음만은 기특하군. 이 세상에는 이치가 통하지 않거나 부조리한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지. 고통으로 가득 찬 그런 세계를 살아갈 때 가장 좋은 무기는 이치도 완력도 아니야. 바로 유머지.” 
(P.37)



  “이 세상에 니체를 좋아한다는 사람은 손꼽을 수 없을 만큼많지.” 
  사내는 여전히 책에서 고개를 들지 않고 대답했다.
  “그런데 정말로 그의 작품을 읽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몇 마디 격언이나 골자가 빠진 요약만을 보고 유행하는 코트처럼 니체를 입는 사람이 많지 않을까? 너도 그런 타입 인가?”
  “책을 보기만 하는 학자는 결국 생각할 능력을 잃어버린다. 책을 보지 않을 때는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
(P.53)



  “책을 많이 읽는 건 좋은 일이야. 하지만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게 있어”
  린타로는 사내를 향해 할아버지의 말을 따라했다. 그 말을 듣고 하안 양복의 사내가 입을 다문 채 몸을 움찔거렸다. 팽팽한 긴장과 정적 속에서 린타로는 할아버지의 말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책에는 커다란 힘이 있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책의 힘이지 네 힘은 아니야.”
  “무턱대고 책을 많이 읽는다고 눈에 보이는 세계가 넓어지는 건 아니란다. 아무리 지식을 많이 채워도 네가 네 머리로 생각하고 네 발로 걷지 않으면 모든 건 공허한 가짜에 불과해.”
  “책이 네 대신 인생을 걸어가 주지는 않는단다. 네 발로 걷는 걸 잊어버리면 네 머릿속에 쌓인 지식은 낡은 지식으로 가득 찬 백과사전이나 마찬가지야. 누군가가 펼쳐주지 않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는 골동품에 불과하게 되지.” 
(P.64)



  “책을 읽는 건 산을 올라가는 것과 비슷하지.” 
  “책과 산이 비슷하다고요?” 린타로는 그제야 겨우 고개를 들었다. 할아버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차의 향기를 즐기듯 눈앞에서 천천히 찻잔 을 돌렸다.
  “책을 읽는다고 꼭 기분이 좋아지거나 가슴이 두근거리지는 않아. 때로는 한 줄 한 줄을 음미하면서 똑같은 문장을 몇 번이나 읽거나 머리를 껴안으면서 천천히 나아가기도 하지. 그렇게 힘든 과정을 거치면 어느 순간에 갑자기 시야가 탁 펼쳐지는 거란다. 기나긴 등산길을 다 올라가면 멋진 풍경이 펼쳐지는 것처럼 말이야."
  “독서에도 힘든 독서라는 게 있지. 물론 유쾌한 독서가 좋단다. 하지만 유쾌하기만 한 등산로는 눈에 보이는 경치에도 한계가 있어. 길이 험하다고 해서 산을 비난해서는 안 돼. 숨을 헐떡이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기는 것도 등산의 또 다른 즐거움이란다.” 할아버지는 뼈만 앙상한 가느다란 팔을 내밀어 린타로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기왕에 올라가려면 높은 산에 올라가거라. 아마 멋진 경치가 보일 게다.”
(P.124)



  “책이 팔리지 않는다는 말은 헛소리일 뿐입니다. 책은  아주 잘 팔리고 있어요. 실제로 '세계제일출판사'는 오늘 도 손님이 끊이지 않았거든요.”
  “혹시 빈정거림인가요?”
  “빈정거림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책을 파는 건 이주 쉬운 일이죠. 단순한 한 가지 원칙에서만 벗어나지 않으면 말이에요.”
  상대의 기세에 눌려 입을 다문 린타로를 즐거운 얼굴로 바라보면서, 사장은 숨겨놓은 마술의 비밀을 밝히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팔리는 책을 만든다'는 원칙입니다."
  사장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우리 출판사는 뭔가를 전하기 위해 책을 만드는 게 아닙니다. '세상이 원하는 책'을 만들고 있죠.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나 후세에 전해야 할 철학, 잔혹한 진실이나 난해한 진리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세상은 그런 걸 원하지 않아요. 출판사에 필요한 건 '세상에 무엇을 전하느냐'가 아닙니다. '세상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것'이죠.”
(P.184)



  “진리도, 윤리도, 철학도, 그런 건 아무도 관심이 없어요. 다들 삶에 지쳐서 자극과 치유만을 원하고 있죠 그런 사회에서 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책 자체가 모습을 바꾸는 수밖에 없습니다. 확실히 말하죠. 책에서 가장 중요한 건 팔리는 거라고! 아무리 걸작이라도 팔리지 않으면 사라지게 됩니다.” 
(P.188)



  “그 자리를 벗어나기 위한 위안, 문제를 뒤로 미루기만 하는 안이한 타협, 경박하고 단순한 자기만족을 위한 토론...... 나는 그런 걸 수도 없이 보았어. 때로는 책의 위기를 깨닫고 목소리를 높인 자도 있었지만 결국 큰 흐름을 바꾸지 못한 채 단지 떠내려가기만 할 뿐이었지. 네가 만 난 세 사람이 자신의 철학을 바꾼 결과, 하나같이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린 것처럼 말이야.”
(P.253)



  "책은 지식이나 지혜, 가치관이나 세계관처럼 많은 걸 안겨줘요. 몰랐던 것을 아는 건 즐겁고, 새로운 견해를 만나는 건 굉장히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에요. 하지만 책에는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힘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린타로는 가슴 안쪽에 떨어지는 가루눈처럼 허무한 생각을 열심히 손으로 받아서 말로 바꾸었다. 손으로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사라지는 소중한 일들의 한 조각만이라도 전하기 위해 허공을 바라보며 정신없이 걸었다.
자신에게 특별한 힘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뭔가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책에 관해 말하는 것뿐이다.​
  “계속 그렇게 생각하면서 책의 힘이 무엇인지 찾았어요. 그리고 고민하는 와중에 최근에 조금이나마 대답 같은 것에 도달한 것 같아요.”
  “어쩌면 책은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르쳐주는 게 아닐까요?”
  그렇게 큰 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소리가 낭랑하게 울리면서 허공을 가로질렀다.
  다음 순간, 모든 것을 집어삼킬 만한 깊은 정적이 캄캄한 통로에 내려앉았다.
  어둠을 향해 눈을 크게 떠도 여성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어딘가에 있을 여성을 향해 린타로는 말을 이었다.
   “책에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그려져 있어요. 괴로워하는 사람, 슬퍼하는 사람, 기뻐하는 사람,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 그런 사람들의 말과 이야기를 만나고 그들과 하나가 됨으로써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어요. 가까운 사람만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의 마음까지도."​
  린타로는 다시 힘주어 말했다.
  “남에게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된다, 약한 자를 괴롭히면 안 된다, 어려운 사람에게는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 런 건 당연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지만 요즘은 점점 당연하지 않게 되고 있어요. 당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왜 그래야 하지?'라고 묻는 사람들도 있죠. 왜 남에게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되는지 모르는 사람들도 많고요. 그런 사람들에게 설명하기는 쉽지 않아요. 이건 논리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책을 읽으면 알 수 있어요. 논리로 말하기보다 훨씬 소중한 것, 사람은 혼자 사는 게 아니 리는 걸 쉽게 알수 있죠.”
  린타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상대를 향해 열심히 말을 짜냈다.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 그걸 가르쳐주는 게 책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그 힘이 많은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힘을 주는 거예요." 
(P.26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섬​
김한민 / 워크룸프레스 / 144쪽
(2018. 6. 2.)




  “전 사실 읽지 못해요. 눈이 멀었거든요.
  완전히 멀진 않았지만 많이 흐려요.
  눈앞에 365일 안개가 꼈어요."
 
  “하지만 책은 정말 좋아해요.
  펼칠 때의 느낌,
  덮을 때의 느낌이 못 견디게 좋아요.
  펼칠 땐 바람이 일고, 가루가 막 흩어지죠.
  책마다 다르고 그래서 두근거리고."

​  “문장이란 게 있다면서요?
  너무 보고 싶어요. 놀라워요,
  글 쓰는 사람들은.
  아, 어떻게 하면, 문장과 문장을 이어서..."

  “바람을 일으킬까?"
​(P.24)



난 말이다, 평생 책을 만들어왔어.
근데 지나고 보니 진짜가 없는 거야.
처음엔 진짜로 시작하는데, 하다 보면 가짜가 되는 거야. 이상하지? 
매번 원래 하려던 말을 잊고 미궁에 빠져버려.
어찌어찌 마무리는 하지만 늘 뭔가 부족하지.
사람들은 그게 당연하대. 세상에 완성이 어딨냐. 그러다 보면 조금씩 나아진다?
개뿔! 거짓말이야. 불행히도 난 진실을 알았어. 완성이란게 있더라고!
(P.44)



기록은 그만큼 어려워.
내가 터득한 기술은
가능한 오래 핑퐁을 하는 법.

조바심이 나도
애가 타도
근질거려 죽겠어도 
계속 게임을 하는 거야.

몸이 기록할 때까지 계속.
 
그럼 나중엔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될 테고,

끌고 다니면서
산책까지 할 수도 있지.
 
너가 있는 세계 밖의 반응도 살필 수 있고
 
무한한 수의 세계들과 접속할 수도 있어.

​나중에는 그것들을
보관할 서랍이 모자라
때때로 하나씩
풀어줘야 할 때도 있는데,
신기한 건...

풀어줄 때쯤 되면 또 달라져 있어! 놀랍지 않아?
(P.63)



​이 작가는 무슨 심정으로 이 문장을 썼을까?
​“음 어쩌면..." 
 
쉿!
있어!
작가다!

살아 있어! 그럴 줄 알았어!
쫓아가자. 살금살금
소리 내지 않고 접근해야
가까이 가.
 
저자는 늘 도망을 다니지.
집힐듯 말듯.
숨바꼭질의 달인들이야.
숨바꼭질을 하다 보면
문장이 몸에 배인다는 걸 잘 알지.

네가 쫓아가지 않고는 못 배기게,
그러나
정작 잡을 순 없을 만큼의
거리를 들 줄 알지.

그런데 내가 깨달은 건, 
작가늘도 우릴 필요로 한다는 거야.
쫓아오는 사람 없이 가는  도망이
무슨 도망이겠어?

"그걸 어떻게 알아요?"
지칠 때쯤, 포기하는 시늉을 해봐.
 
기다려보잖아?

슬쩍 모습을 드러낼걸?
네가 오나 안 오나....

그런 게 저자들이야. 
(P.85)



암초에 걸렸어. 책을 파다 보면
반드시 문제란 걸 맞닥뜨리게 돼.​

물론 그 문제를 피해
나머지 부분만 팔 수도 있어.
 
하지만 신경이 쓰이지.
문제가 생각보다 클 수도 있고.
어떻게든 처리하지 않고는
아무 일도 안 되 겠다는 느낌이 강해진단다.
 
문제 위에 쌓인 먼지를 걷어내면 문제는 살아 움직여.
넌 그것과 씨름해야 해.
 
그건 도깨비 같아서 동물이
되었다, 괴물이 되었다,
자빠뜨려 보려고 해도
여의치 않고,​
 
두 다리 버티고 있기도 힘들지.
힘이 빠져 울고 싶어도 물고 늘어져야 해
넘어가면, 지금까지 쌓은 걸 녀석이 모두 망칠 수 있어. 

이 결투는 처음부터 불리한 게임

쓰지 말 이유는 수만 가진데,
써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는.
 
그래도 의지는 네 편이고
그게 널 버티게 하지.
 
문제 해결? 그건 다름 아닌 직면이야.
끝없는 직면.
직면한 채 문제가 던지는 모든 자극에
끝까지 반응할 수 있느냐.
 
질기게 버티면 어느 순간 제 풀에 지쳐서
너를피해버리지.
 
문제란 그런 거야.
문제도 너에게 질릴 수 있는 거지!
(P.9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