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 한겨레출판 / 303쪽
(2018. 6. 23.)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EBS 라디오가 책읽는 라디오를 표방하고
주말에 운전하며 라디오 채널을 여기저기 옮기다 보면
EBS에서 책을 읽어주는 방송이 나오곤 했다.
지금 언뜻언뜻 들었던 기억아 나는 책들이 "모비딕",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 클럽"이었다.
방송에서 읽어주는 내용이 야구에 대한 이야기, 삼미 슈퍼스타즈의 이야기들이어서
책 제목이 궁금해서 직접 찾아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알게된 책을 아주 오랜 후에야 읽게 되었다.
모두가 프로처럼 일해야 하는 것이 당연해진 것은 언제 부터일까
82년 프로야구가 생기고 대전이 연고지였던 OB가 우승을 했던 그시절 박철순의 22연승과 김유동의 한국시리즈 끝내기 만루홈런 이선희 선수의 눈물과 우승 만 기억하고 있던 내게 새로운 생각과 그 시절의 추억을 일깨워 준 이 책은 오래된 사진 첩을 다시 꺼내 보는 느낌이었다.
그 시절 내가 몰랐던 프로야구의 또 다른 한 부분을 볼수 있던 소설이다.
그 시절 삼미는 작가 소설에서 쓴 것처럼 모든 프로 야구 팀들의 동네북 봉이었던 것으로 생각난다
한마디로 허접한 팀...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 삼미슈퍼스타즈 야구
그러나 이제 나이를 먹고 생각이 쓸데 없이 길어져 가면서
소설에 작가가 얘기하고 있는 프로에 대해서 또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된다
언제부터 우리에게 사회라는 것이 프로만이 살아 남는 것이 당연한 사회로 인식되어 졌을까
이 약육강식의 시대에 자신만이 온전히 살아 남아야 하는 방법을 수련하기 위해
초등학생부터 온 국민이 전 국민의 프로화에 열정적으로 동참하고 있는 건 왜일까
많은 물음과 많은 생각을 해주게 해주는 소설이다
그래도 내가 응원하는 야구팀이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은 참 기쁜일이다.
튿히나 작년까지 삼미를 떠올릴 정도로 허우적대전 한화가 올 시즌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팬들에겐 기적 같은 일이다 ^^
==========
1982년은 그런 시절이었다.
국민교육헌장의 암기에서부터 오후 다섯시만 되면 사람들을 '차렷' 시키던 국기 하강식, 시도 때도 없는 국기에 대한 맹세, 이 또한 빠지면 섭섭한 애국가 제창(4절까지), 쥐를 잡자, 반공의 날, 방첩의 날, 멸공의 날, 민방위의 날, 산불 조심, 그냥 불조심, 보리 혼식 주간, 간첩 신고 113...... 도대체 이 따위들이 어린이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생각할수록 골치가 아파왔지만 나는 소년이었고, 그저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세상을 살아갈 뿐이었다. 이거야 원,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쓰잘데기 없는 짓으로 별 희한한 역사라도 창조 하려는 걸까? 내심 궁금할 때도 있었지만 어쩌랴, 이제 모두지난 일 인데. 좋든 싫든. 아무튼 1982년은 그런 시절이었던 것이다. 북한은 종종 땅굴을 팠다. 진짜다.
(P.22)
"명심해라, 경쟁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아버지는 그 말씀을 끝으로 그 작지만 방바닥이 따뜻하고, 창 너 머로 바다가 보이는 횟집의 방 안에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셨다. 당연히 그곳에는-마치 내가 해쳐가야 할 세상과도 같은-끝없는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파도들은 과연 심한 몸싸움을 벌이며 아버지의 말처럼 쉴 새 없는 경쟁을 펼치는 듯했고, 그 격렬한 해면(海面) 을 보고 있자니 더할 나위 없이 마음이 답답해져오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다들 저 바다를 헤치며 살아온 것이다, 혹은 살아갈 것이다. 피를 콧구멍에 끼우거나. 고등학교 동창에게 굽실거리며. 조지 워싱턴도, 링컨도, 인천법원의 김판사도, 한석봉도, 문제의 조부장도, 아버지도. 그리고 나도.
언뜻, 태어나서 처음으로
산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구나, 라는 생각을, 나는, 했다.
(P.29)
아름다운 것만 생각하고, 아름다운 것만 보며 자라나도 시원찮을 그 시절. 그렇게 우리는 원망과 분노와 사무친 원한 속에서 자신을 자학하며 자라나고 있었다. OB의 어린이 회원들이 박철순의 너클 볼을 연습하고, 신경식을 따라 다리 찢기를 연습하던 그 순간. 삼성 의 어린이 회원들이 이만수를 향해 “데끼리"를 외쳐대던 바로 그 순 간, MBC의 어린이 회원들이 "게브랄 티!”를 외쳐대던 바로 그 순간. 해태의 어린이 회원들이 2루에서 3루로 도루한 김일권에게 “홈스 틸!”을 목 놓아 외치던 그 순간, 5위인 롯데의 어린이 회원들이 “져도 좋다, 멋진 야구를!”의 플래카드를 하늘 높이 치켜들던 바로 그 순간-우리는 세상을 원망하며 인생을 자포자기히는 법부터 배워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져도 좋다, 멋진 야구를!”과 같은 말도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그런 배부른 말은 5위인 롯데의 팬들에게나 기능한 것이지.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결코 아니었던 것이 다. 그 길고 암울했던 82년의 전기 리그는 22연승의 불사조 박철순의 활약에 힘입어 0B베어스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우승을 확정 짓던 마지막 게임에서. 행가래를 치는 0B의 선수들과 덩달아 꽥꽥 거리던 또래의 리를 미련곰탱이들을 바라보며-나는 지금 이 순간, 북한이 쳐들어왔으면 좋겠다. 는 생각을 했다. 땅굴은 모두 완성되었겠지?
그리고 여름이 시작되었다.
(P.70)
인천야구장은 예상과는 달리 한산했고. 예상했던 만큼 붐비고 있었다. 뭐랄까, 한산하다면 한산하다고도 말할 수 있고. 붐빈다면 붐
빈다고도 말할 수 있는 인파였던 것이다. 요컨대 올 사람들만 왔다는 얘기다. 실지로 그날의 인파는 대부분 삼미의 고별전을 보기 위 해 고의로 야구장을 찾은 인천의 팬들이었고. 그 속에 마지막 남은 원년의 리를 슈퍼스타즈-조성훈과 내가 끼어 있었다. 나는 인천야 구장의 길고 긴 벽돌담에 등을 기댄 채. 조성훈이 사온 박카스를 마시며 설레는 맘으로 이곳을 찾았던 82년의 봄날을 생각했다. 어느새 그로부터 3년의 세월이 지나 있었다. 예상과는 달리 짧은 세월이었고. 예상했던 만큼이나 길고 지루한 세월이었다.
입장이 시작되었다. 예상치 못한 일은 정문을 들어설 때 일어났 다. 정문 좌우로. 삼미 슈퍼스타즈 선수들이 길게 열을 지어 문을 들 어서는 인천팬들을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수들은 “고맙습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보내주신 격려와 성원 잊지 않겠습 니다" 라는 평범한 인사말과 함께. 입장객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을 꼭 잡고 삼미 슈퍼스타즈 티셔츠와 야구모자, 그리고 수건을 안겨주었다. 왜 그랬을까. 나는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져왔다.
(P.115)
그날 밤 나는 새로운 사실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그저 평범하다고 생각해온 내 인생이 알게 모르게 삼미 슈퍼스타즈와 흡사했던 것처럼. 삼미의 야구 역시 평범하다면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야구였단 사실이다. 분명 연습도 할 만큼 했고. 안타도 칠 만큼 쳤다. 가끔 홈런도 치고. 삼진도 잡을 만큼 잡았던 야구였다. 즉 지지리도 못하는 야구라기보다는. 그저 평범한 야구를 했다는 쪽이 확실히 더 정확한 표현이다. 다시 말해 평범한 야구를 했던 삼미 슈퍼스타즈.
이 얼마나 적확한 표현이란 말인가. 그러나 거기서 파생하는 또 하나의 의문. 확실히 평범한 야구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왜 삼미는 그토록 수치스럽고 치욕적인 팀으로 모두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걸까. 그것은 아마 기록과 순위의 문제 때문이겠지. 라고 나는 생각했으나. 곧 평범한 야구라면 최하위를 기록할 이유가 없다는 쪽으로 다시 생각의 흐름이 바뀌어갔다. 그렇다. 평범한 야구란 6개의 팀 중에서 3위나 4위를 달리는 팀의 야구를 일컫는 말일 테지. 그럼 왜?
결론은 프로였다.
평범한 야구 팀 삼미의 가장 큰 실수는 프로의 세계에 뛰어든 것 이었다. 고교야구나 아마야구에 있었더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팀 이 프로야구리는-실로 냉엄하고, 강자만이 살아남고, 끝까지 책임을 다해야 하고, 그래서 아름답다고 하며, 물론 정식 명칭은 '프로페셔널'인 세계에 무턱대고 발을 들여놓았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 인간이 평범한 인생을 산다면. 그것이 비록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한 인생이라 해도 프로의 세계에서는 수치스럽고 치욕적인 삶이 될 것이라 나는 생각했다.
큰일이었다. 세상은 이미 프로였고, 프로의 꼴찌는 확실히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이었다. 아아, 실로 무서운 프로의 세계가 아닐 수 없다고 16살의 나는 생각했다. 그럼 평범한 삶보다 조금 못하거나 더 떨어지는 삶은 몇 위를 기록할 것인가? 몇 위라니? 그것은 야구로 치자면 방출이고, 삶으로 치자면 철거나 죽음이다. 그런 삶은 순위에 낄 자리가 없다. 평범한 삶을 살아도 눈에 흙을 뿌려야 할 만큼 치욕을 당하는 것이 프로의 세계니까.
(P.125)
그날 밤 나는. 낡고 먼지 낀 내 방의 창문을 통해-저 캄캄한 어둠 속에 융기해 있는 새로운 세 개의 지층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부유층과 중산층. 그리고 서민층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지층들이었고. 각자가 묻힌 지층 속에서 오늘도 화석처럼 잠들어 있을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나는 보았다. 꽤 노력도 하고, 평범하게 살면서도 수치와 치욕을 겪으며 서민층에 묻혀 있는 수많은 얼굴들을. 무진장. 혹은 눈코 뜰 새 없이 노력하면서도 그저 그런 인간으로 취급받으며 중산층에 파묻혀 있는 수많은 얼굴들을. 그리고 도무지 그 안부를 알 길이 없는-이 프로의 세계에서 방출되거나 철거되어-저 수십 km 아래의 현무암층이나 석회암층에 파묻혀 있을 수많은 얼굴들을. 나는 보았다.
세상의 지층은 그렇게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이 지진을 느끼지 못한 채 오늘도 편안히 잠들어 있는 사람들이 그저 놀랍기만 했다. 다들 그만한 자신감이 있다는 것인가? 다들 벌써 그토록 자신만만한 프로가 되었다는 말인가? 그게 아니라면 이 무슨 똥배짱인가.
한 가지 알 수 없는 것은. 만약 그렇다면-부유층에는 지랄에 가까울 정도로 노력하거나 결국 허리가 부러져 못 일어날 만큼 노력한 얼굴들이 묻혀 있어야 할 터인데. 16살의 내 머리로도 왠지 그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16살의 소년에게 세상은 한꺼번에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다시 슈퍼스타즈를 생각했다. 그리고 삼미의 팬이었던 나의 유년과. 현재를 생각했다. 0B와 삼성. 혹은 MBC나 해태의 팬이었 던 또래의 소년들에 비해 확실히 나는 염세적인 소년이었고. 자신감 이 없었으며. 세상을 어둡게 바라보고 있었다. 0B의 팬이 아니라면. 삼성의 회원이 아니라면. 아니 프로야구가 없었다면-그 소년들과 나의 차이점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결국 문제는 내가 삼미 슈퍼스타즈 소속이었던 데서 출발한 것이라고, 16살의 나는 결론을 내렸다. 그랬다. 소속이 문제였다. 소속이 인간의 삶을 바꾼다
(P.129)
그날의 선거에서 우리는 노태우씨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부정이다! 개표 현황을 지켜본 나는 내일 아침이면 또 난리가 나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부정은 이내 밝혀질 것이고, 그날의 함성 은 다시 세상을 뒤흔들겠지.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쩌면 올해의 대입도 취소되기가 쉬워. 혁명의 과도기야. 일찍 자자.
다음날 아침. 그러나 세상은 조용했다. 음 혁명 세력도 아침은 먹어야지, 라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점심이 지나도 마찬가지. 음 어디가 아픈가, 라고 생각했지만 저녁이 되자 세상은 평화롭기까지! 옳거니, 폭풍 전야구나. 엄청난 규모의 혁명이다. 각오해!
그 다음 날 아침.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음 오늘도 아침은 먹어야지, 그러나 점심이 지나도 마찬가지. 저녁엔 어제보다 더한 평화가 찾아왔다. 죽었나? 기대했던 혁명은 그 후 십수 년이 지난 오늘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이미 유통 기한을 넘긴 셈이다.
6월 항쟁의 '우리'와 대통령 선거일의 '우리'는 같은 '우리'인가? '우리'는 도대체 누구인가? '우리'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들을-나 는 낡았지만 최근에 청소를 한 내 방의 창틀 너머로 계속해서 던져 보았다. 어둠은 대답이 없었고, '우리'는 모두 잘 자고 있었다.
그건 야구와 같은 거야. 선거에 대해 조성훈은 그렇게 얘기했다. 여당이 돼야 나라가 안정되지. 동네의 반장은 그렇게 얘기했다. 경 제가 흔들려선 안 돼. 아버지는 그렇게 얘기했다. 주변의 미물들은 그렇게 말한다 쳐도, 신문은-당선을 축하하며 화합과 안정을! 혁명의 주체가 되리라 생각했던 서민층과 중산층이, 실은 그 지층이 더욱 다져지길 원했다는 사실은-18살의 나로서는 감당키 힘든 충격이었다. 나는 다시는 혁명이란 거짓말을 믿지 않기로 했고 다시는 '우리'를 믿지 않기로 했다. 조성훈이 라면을 끓여왔다. 얼마 후 대입을 치렀다. 예상했던 대로 극히 우수한 성적이 나왔다. 또 예상과는 달리 조성후도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 결과에 내가 놀라워하자 놈은 오히려 놀랍다는 듯 “못하는 편은 아니었잖아?” 라 며 반문했다. 그랬다. 확실히, 못하는 편은 아니었다.
원서를 썼다. 생각보다 갈 만한 학과 그리 많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지만 우수한 성적에게도, 평범한 성적에게도, 저조한 성적에게 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인생의 진로는 불과 일주일 사이에 결정났고, 4지 선다형의 교육은 4지 선다형의 진로만을 펼쳐놓았다.
원서를 쓰면서, 나는 교육의 목표 역시 '소속'을 가리는 데 있었다는 중요한 비밀을 알게 되었다. 똥배짱이 아닌 이상은,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개발했다간 큰일이 나는 것이다. 눈치를 깠다면 당연히 타고난 저마다의 '소속'부터 개발해야 한다. 참, 계발(啓發)이었지 !
개발괴발 원서를 써서 나는 일류대 경영학괴를, 조성훈은 철학과를 각기 지망했다. 둘 다 합격이었다.
(P.138)
“뭐 어때? 어차피 졸업장만 따면 되잖아." 철학을 전공했기 때문일까, 조성훈은 이 무렵부터 무언가를 꿰뚫는 듯한 말투로 종종 나를 놀라게 했다. 놈의 말을 듣고 보니 나는 과연 졸업장을 따기 위해 대학에 온 것이었고, 실제 일류대에 소속 된 이상 앞으로의 인생에 큰 어려움이 없을 거란 생각을 미음 한구석에 지니고 있었다. 즉 0B의 회원이라면-어떤 바보라도 야구장에서 남부럽잖은 행복을 느끼며 덩달아 우쭐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그랬다. 나는 이미 삼미의 잠바를 벗어던졌고, 세상이 인정하는 팀의 잠바를 입고 있었다. 이제 남은 일은 회원 지정석에서 플래카드를 흔들며 우리 삼성이 어쩌니. 우리 0B가 어쩌니 하는 식으로 우승한 인생을 논하는 것이었다. 내가 원한 것은 바로 그 소속감이 아니었던가. 학문의 성취나 이상의 실현 따위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 물론 대학 생활을 마라톤에 비유한다면 자신에 대한 도전과 끝없는 성취를 목적으로-42km가 넘는 길고 긴 거리를 혼신의 힘을 다해 질주하는 인간도 있겠지만 그런 인간은 그런 인간이고 나라면 쉬엄쉬엄 걷다가 놀다가 결국엔 '졸업'이라는 버스를 타고 결승점의 테이프를 끊어버리겠다. 이 말씀이다. 맨홀에 빠지는 일만 없다면 대학은 결국 그 버스를 제공해주기 마련이다. 나는 물론 후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내가 소속된 대학은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우승 팀일 것이고, 나는 이미 영원한 팀의 회원이 되어 있다. 말 그대로. 졸업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랬다. 목표는 졸업.
(P.147)
어느 날 아침, 나는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3차 구조조정의 대상자임을 통보하는 메일이었다. 순간 눈앞의 재떨이나 달력을 볼 새도 없이 뜨거운 눈물이 솟구쳤다.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나는 일찍 일어난 새가 아니라. 일찍 잠을 깬 벌레였다는 것을.
저 역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된장 앞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첼리스트처럼, 과장은 갑작스런 존대를 하며 나를 달랬다. 자발적인. 사표를 쓰란. 얘기였다. 첼리스트의 마지막 연주는-사실 이 바닥이 얼마나 좁은지는. 잘 알고 계실 거라 믿습니다, 였다.
눈물을 막은 것은 자존심이었다. 나는 말없이 짐을 정리한 후. 말 없이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그간 해온 일들에 비해 극히 간단한 절 차였고, 아무런 소음도 없었다. 터무니없을 만큼 세상은 여전했다. 세상이 여전한 이유는 반드시 누군가가 여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차장을 내려오다 잠시 벽에 손을 짚고 서 있었다.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서였다. 손바닥을 통해. 차고, 서늘하고, 완강한 콘크리 트의 기운이 전해져왔다. 내가 퇴출된 회사의 구조는 놀라울 만큼 튼튼한 것이었고, 놀랍게도 나는 그 구조물의 일부가 아니었다.
(P.223)
올 여름은 왜 이렇게긴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하다가 나는 비로소. 시간은 원래 흘러 넘쳐흐르는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말이지 그 무렵의 시간은 말 그대로 철철 흘러넘치는 것이서서. 나는 언제나 새 치약의 통통한 몸통을 힘주어 누르는 기분으로 나의 시간을 향유했다. 신은 사실 인간이 감당키 어려울 만큼이나 긴 시간을 너구에게나 주고 있었다. 즉 누구에게라도, 새로 사온 치약만큼이나 완벽하고 풍부한 시간이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시간에 쫓긴다는 것은-돈을 대가로 누군가에게 자신의 시간을 팔고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니 지난 5년간 내가 팔았던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시간. 나의 삶이었던 것이다.
알고 보면, 인생의 모든 날은 휴일이다.
(P.2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