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섬
김한민 / 워크룸프레스 / 144쪽
(2018. 6. 2.)
“전 사실 읽지 못해요. 눈이 멀었거든요.
완전히 멀진 않았지만 많이 흐려요.
눈앞에 365일 안개가 꼈어요."
“하지만 책은 정말 좋아해요.
펼칠 때의 느낌,
덮을 때의 느낌이 못 견디게 좋아요.
펼칠 땐 바람이 일고, 가루가 막 흩어지죠.
책마다 다르고 그래서 두근거리고."
“문장이란 게 있다면서요?
너무 보고 싶어요. 놀라워요,
글 쓰는 사람들은.
아, 어떻게 하면, 문장과 문장을 이어서..."
“바람을 일으킬까?"
(P.24)
난 말이다, 평생 책을 만들어왔어.
근데 지나고 보니 진짜가 없는 거야.
처음엔 진짜로 시작하는데, 하다 보면 가짜가 되는 거야. 이상하지?
매번 원래 하려던 말을 잊고 미궁에 빠져버려.
어찌어찌 마무리는 하지만 늘 뭔가 부족하지.
사람들은 그게 당연하대. 세상에 완성이 어딨냐. 그러다 보면 조금씩 나아진다?
개뿔! 거짓말이야. 불행히도 난 진실을 알았어. 완성이란게 있더라고!
(P.44)
기록은 그만큼 어려워.
내가 터득한 기술은
가능한 오래 핑퐁을 하는 법.
조바심이 나도
애가 타도
근질거려 죽겠어도
계속 게임을 하는 거야.
몸이 기록할 때까지 계속.
그럼 나중엔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될 테고,
끌고 다니면서
산책까지 할 수도 있지.
너가 있는 세계 밖의 반응도 살필 수 있고
무한한 수의 세계들과 접속할 수도 있어.
나중에는 그것들을
보관할 서랍이 모자라
때때로 하나씩
풀어줘야 할 때도 있는데,
신기한 건...
풀어줄 때쯤 되면 또 달라져 있어! 놀랍지 않아?
(P.63)
이 작가는 무슨 심정으로 이 문장을 썼을까?
“음 어쩌면..."
쉿!
있어!
작가다!
살아 있어! 그럴 줄 알았어!
쫓아가자. 살금살금
소리 내지 않고 접근해야
가까이 가.
저자는 늘 도망을 다니지.
집힐듯 말듯.
숨바꼭질의 달인들이야.
숨바꼭질을 하다 보면
문장이 몸에 배인다는 걸 잘 알지.
네가 쫓아가지 않고는 못 배기게,
그러나
정작 잡을 순 없을 만큼의
거리를 들 줄 알지.
그런데 내가 깨달은 건,
작가늘도 우릴 필요로 한다는 거야.
쫓아오는 사람 없이 가는 도망이
무슨 도망이겠어?
"그걸 어떻게 알아요?"
지칠 때쯤, 포기하는 시늉을 해봐.
기다려보잖아?
슬쩍 모습을 드러낼걸?
네가 오나 안 오나....
그런 게 저자들이야.
(P.85)
암초에 걸렸어. 책을 파다 보면
반드시 문제란 걸 맞닥뜨리게 돼.
물론 그 문제를 피해
나머지 부분만 팔 수도 있어.
하지만 신경이 쓰이지.
문제가 생각보다 클 수도 있고.
어떻게든 처리하지 않고는
아무 일도 안 되 겠다는 느낌이 강해진단다.
문제 위에 쌓인 먼지를 걷어내면 문제는 살아 움직여.
넌 그것과 씨름해야 해.
그건 도깨비 같아서 동물이
되었다, 괴물이 되었다,
자빠뜨려 보려고 해도
여의치 않고,
두 다리 버티고 있기도 힘들지.
힘이 빠져 울고 싶어도 물고 늘어져야 해
넘어가면, 지금까지 쌓은 걸 녀석이 모두 망칠 수 있어.
이 결투는 처음부터 불리한 게임
쓰지 말 이유는 수만 가진데,
써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는.
그래도 의지는 네 편이고
그게 널 버티게 하지.
문제 해결? 그건 다름 아닌 직면이야.
끝없는 직면.
직면한 채 문제가 던지는 모든 자극에
끝까지 반응할 수 있느냐.
질기게 버티면 어느 순간 제 풀에 지쳐서
너를피해버리지.
문제란 그런 거야.
문제도 너에게 질릴 수 있는 거지!
(P.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