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1
어니스트 헤밍웨이 / 김욱동 / 민음사 / 484쪽
(2018. 6. 13.)
"어디 손 좀 봅시다." 그녀가 말했다. 로버트 조던이 손을 내밀자 여자는 커다란 손으로 그의 손을 붙잡고 엄지손가락으로 손바닥을 비빈 뒤 한참 동안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손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도 따라 일어서자 그녀는 미소를 띠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손금이 어떻습니까?" 로버트 조던이 물었다. "난 그런 건 믿지 않습니다. 그러니 뭐라고 말해도 겁먹지 않아요."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못 봤어.” 그녀가 말했다.
“아뇨, 아주머니는 뭔가 봤어요. 난 그저 호기심으로 알고 싶을 따름입니다. 그린 거 믿지 않아요.”
“그럼. 월 믿는데?”
“여러 가지를 믿죠. 하지만 그것만은 믿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라는 게 도대체 뭐지?”
“내가 할 일 말입니다.”
“그래, 난 지금 그걸 봤에”
“그 밖에 또 월 봤는지 말해 주십시오.”
“그 밖엔 본 거 없소.”
(P.71)
“영감님은 사람을 죽여 본 경험이 있습니까?” 로버트 조던은 어둠이 주는 편안함과 그날 하루를 같이 보냈다는 친밀감에서 안셀모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있었지. 몇 번인가 있었어. 하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그러지는 않았어. 내 생각에는 사람을 죽인다는 건 죄악이거든. 비록 상대가 우리가 꼭 죽여야만 하는 파시스트일지라도 말이야. 사람과 곰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어. 인간을 짐승의 형제라고 생각하는 집시들의 미신을 난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정말이지 난 사람을 죽이는 건 어떤 경우든 반대야.”
“그래도 영감님은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그리고 또 앞으로도 죽일 테고. 하지만 만약 목숨이 붙어 있다면 앞으로는 아무도 해치지 않고 살아가고 싶어. 그러면 언젠가 내 죄를 용서받게 될 테지.”
“누구한테 용서 받아요?”
“그걸 누가 알겠어? 이 세상엔 이제 하느님도 안 계시고 하느님의 아들도 성령도 모두 안 계시니 누가 용서해 줘? 난 잘 몰라.”
“그럼 영감님한테는 이제 더 이상 하느님이 없다는 건가요?"
“없어! 정말 없어. 만약 이 세상에 하느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하느님이 이 눈으로 똑똑히 보아 온 일들을 일어나게 하셨겠어? 그놈들이나 하느님을 믿으라지.”
“그들도 하느님을 주장하고 있죠."
“신앙 속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확실히 하느님이 없는 것이 섭섭해. 하지만 이제 인간은 자신에 대해 책임을 져야만 해."
“그렇다면 사람을 죽인 죄를 용서해 주는 것도 영감 자신이 겠군요."
“난 그렇게 믿어. 당신이 그런 식으로 분명히 말해 주니, 아마 틀림없이 그럴 거야. 하지만 하느님이 계시든 계시지 않든 사람을 죽이는 건 죄악이라고 생각해.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건 내게는 굉장히 중대한 일이거든. 피할 길이 없을 때엔 할 수 없이 사람을 죽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난 파블로 같은 족속은 아니야." 안셀모가 말했다.
(P.85)
아니, 그렇게 생각할 게 아니지, 하고 그는 자신을 타일렀다. 너라는 존재는 없어. 절대 아무일도 당하지 않는 사람은 없지. 나도 이 노인도 따지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야. 다만 네 임무를 완수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거든. 세상에는 꼭 필요한 명령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건 네 탓이 아니야. 지금 다리가 하나 있고, 그 다리가 인류의 장래를 결정하는 분기점이 될 수도 있는 거야. 이 전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것에 달려 있는 것처럼. 그러니 내가 할 일이라곤 한 가지밖에 없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을 완수해야 해. 빌어먹을, 오직 한 가지뿐! 하고 그는 생각했다. 정말 하나뿐이라면 그건 쉬운 일이지. 쓸데없는 걱정을 말란 말이다, 이 입만 나불거리는 녀석아, 하고 그는 혼잣말을 했다. 다른 일이나 생각해 봐.
(P.90)
“입 닥쳐.” 파블로의 마누라가 쏘아붙였다. 그때 갑자기 그 날 오후에 본 조던의 손금이 머리에 떠오른 그녀는 공연히 화가 나서 한층 더 소리를 높였다. “닥쳐, 이 겁쟁이야! 닥쳐, 이 재수 없는 까마귀 같은 놈아. 닥치지 못해, 인간 백정 같으니!”
“잘한다! 그래 가만히 있으마. 이젠 네년이 두목이니까. 그 아름다운 그림이나 언제까지나 들여다보고 있어. 하지만 내 가 바보가 아니라는 걸 잊지 마.” 파블로가 내뱉었다.
파블로의 마누라는 자신의 분노가 슬픔으로 변해 가고 모 든 희망과 약속이 위축되어 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기분은 처녀 시절부터 알고 있었고, 지금까지 살면서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또 이런 기분이 갑자기 들었고, 그녀는 이런 기분을 몰아내 다시는 자기에게 -자기에게도 공화국에게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그녀가 말했다. “자, 이제 식사하지. 마리아, 그 솥에 있는 음식을 그릇에 나눠 쥐.”
(P.116)
“이 못생긴 얼굴에 당신도 반했나? 아냐, 지금 한 말은 농담이야. 자, 이 못생긴 걸 좀 봐 봐. 하지만 아무리 못생겼어도 상대방이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 동안은 그 사나이의 눈을 멀게 할수 있는 감정을 지니게 되는 법이지. 그 감정으로 상대방을 눈멀게 하고 자기 자신까지도 눈이 멀어 버리거든. 그러다가 어느 날 아무런 이유도 없이 진짜 타고난 그대로의 못생긴 얼굴이 그 사나이의 눈에 띄게 되는 거야. 그렇게 되면 상대방 사나이는 마침내 장님 신세를 면하게 되고, 여자 쪽도 그 사나이의 눈에 비치는 것처럼 자기가 못생겼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결국에는 애인도 자신의 감정도 모두 잃어버리고 마는 거지. 알겠니, 이 아가씨야?” 그녀가 아가씨의 어깨를 가법 게 두드렸다.
(P.193)
만약 공화국이 패배한다면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스페인에서 살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될까? 그렇다, 파시스트들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에서 이미 일어 나고 있는 사태로 보아 그렇게 될 것이 뻔하다고 그는 깨닫고 있었다.
파블로는 돼지 같은 사내지만 다른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이런 일을 시키는 건 그들 모두를 배신하는 게 아닐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만약 그들 이 이일을 하지 않는다면, 두 기병 대대가 나타나서 일주일이면 그들을 이 산에서 깡그리 소탕할 것이다.
그렇지 않아. 그들을 자유롭게 그냥 내버려 둔대도 이득이 될 것은 조금도 없었어. 모든 사람을 자유롭게 내버려 둬야 하고, 누구도 남을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말이지. 그러니까 그는 그것을 믿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렇다, 그는 그것을 믿고 있었다. 그리고 계획 사회나 그 밖의 일 들은 어떻게 되나? 그런 것들은 다른 사람들이 할 몫이 아닌 가. 그에게는 이 전쟁이 끝나면 따로 할 일이 있었다. 그가 이 전쟁에서 싸우는 것은 이 전쟁이 자기가 사랑하는 나라에서 일어났기 때문이고. 공화주의를 신봉하기 때문이며, 또 만약 이 전쟁에 진다면 공화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의 삶이 비참 해지기 때문이다. 이번 전쟁을 치르는 동안 그는 공산당의 통제를 받고 있다. 이곳 스페인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전쟁을 수행하는 데 가장 훌륭한 기율, 가장 건전하고 가장 진지한 기율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전쟁 동안 그들의 통제를 받아들인 것은 전쟁을 수행하는 데 그가 존경할 만한 계획과 기율을 지닌 유일한 당이었기 때문이다.
(P.314)
하지만 그때까지는 네가 현재 누리고 있는 삶이나 앞으로 누릴 삶이 (바라건대) 오늘, 오늘 밤, 내일, 오늘, 오늘 밤, 내일, 이렇게 자꾸만 되풀이될거야,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니까 현재의 시간을 최대한으로 이용하고 그것에 감사하면 그만이야. 비록 다리 일이 실패로 돌아간다 해도. 지금으로서는 그리 희망이 있어 보이지 않지만 말이다.
하지만 마리아만큼은 좋았어 . 참으로 좋았지. 아, 정말로 그랬어, 하고 그는 생각했다. 어쩌면 이것이 지금 내가 삶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일지도 몰라. 어쩌면 이것이 바로 내 삶이고, 내 삶의 연수는 칠십 년이 아니라 사십팔 시간, 아니 고작 육십 시간이나 열 시간이나 열두 시간일지도 몰라. 하루가 이십사 시간이니 꼬박 사흘은 칠십이 시간이 되거든 칠십 시간 동안 칠십 년에 못찮은 풍부한 삶을 누릴 수 없는 것은 아니야. 칠십 시간이 시작되는 순간까지 네 삶을 더없이 풍부하게 살아 왔고, 또 네가 어떤 나이에 이르렀다면 말이다.
(P.320)
만약 네 삶의 칠십 년을 팔아서 칠십 시간을 산다 해도 지금의 나로서는 그런 가치가 있는 셈이야. 그 사실을 알게 되다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지. 그리고 만약 오랜 시간이나 앞으로 남은 삶도 없고, 또 지금부터의 시간도 없고 오직 있는 것이라곤 현재뿐이라면, 바로 이 현재야말로 찬양 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그것을 가지고 있기에 참으로 행복해.
(P.321)
골츠는 아마 모든 것을 알고 있어서 네게 주어진 이틀 밤에 네 모든 삶을 살아야 한다고 보여 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것처럼 살면서, 네가 언제나 누려야 할 모든 것을 허락된 짧은 시간 안에 집중시켜야 한다고 알려 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훌륭한 신념이었어. 하지만 그는 마리아가 오직 상황 때문에 만들어졌다고는 믿지 않았다. 물론 그녀가 그의 상황은 말할 것도 없고 그녀 자신의 상황에서 나온 반동이 아닌 이상에는 말이다. 한 가지, 그녀의 상황은 썩 좋지 않아,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 틀림 없이 그렇게 썩 좋지가 않지.
만약 지금의 상황이 이렇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이 상황이 좋다고 말해야 하는 법은 없었어. 내가 이제껏 느껴 온 것을 지금 느낄 수 있을지는 몰랐어, 하고 그는 생각했다.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나리라고도 말이야. 나는 전 생애를 걸고라도 이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 넌 그렇게 할 거야, 하고 다른 쪽의 그가 말했다. 넌 그렇게 할 거야. 넌 지금 그것을 갖고 있고, 그것은 너의 전 생애가 아니더냐. 지금 말이야. 지금 말고는 아무 것도 없어. 어제라는 것도 없고, 내일이라는 것도 없지. 도대체 몇 살이나 되어야 그것을 안다는 말이냐? 오로지 현재만 있을 뿐이야. 만약 그 현재가 겨우 이틀뿐이라면, 그 이틀이 네 모든 인생이며, 그 속의 모든 것은 그 비율로 존재하거든. 이게 네가 이틀 동안에 일생을 보내는 방법이야. 그리고 만약 네가 불평 집어치우고, 절대로 손에 넣을 수 없는 것만 바라지 않는다면, 넌 훌륭한 삶을 살 수 있을 거야. 훌륭한 삶이란 성서에서 말하는 그 기간으로 잴 수 있는 건 아니거든.
그러니까 이제는 걱정하지 말고 현재 네가 갖고 있는 것을 누리고, 맡은 일이나 해. 그러면 넌 긴 인생을, 그것도 아주 즐거운 인생을 보낼 수 있을 거야. 최근 즐거운 삶을 누리지 않았던가? 뭘 그렇게 불평만 늘어놓고 있는 것이냐? 이런 일이라는 게 그런 거지, 하고 그는 자신을 타이르고, 그런 생각에 아주 만족했다. 그리고 중요한 건 네가 배운 것이 아니라 네가 만난사람들이지. 이렇게 농담을 하고 나니 기분이 좋았고, 그래서 그는 마리아한테로 돌아갔다.
(P.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