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2
어니스트 헤밍웨이 / 김욱동 / 민음사 / 456쪽
(2018. 6. 21.)
밤은 맑게 개었고, 그의 머릿속까지 밤공기처럼 싸늘하고 맑아지는 것 같았다. 그는 밑에 깔린 소나무가지 냄새와 솔 잎 향기, 잘린 가지에서 배어 나오는 좀 더 강열한 송진 냄새를 맡았다. 필라르, 하고 그는 생각했다. 필라르와 죽음의 냄새.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냄새는 이거야. 이 냄새, 이제 막 꺾은 클로버, 가축을 몰 때 짓밟는 샐비어, 나무 타는 연기, 가을에 낙엽 태우는 냄새, 그건 노스탤지어의 냄새가 틀림없어. 저 미줄라의 가을 거리에서 긁어모은 낙엽을 태우는 냄새. 하지만 어느 쪽이 더 좋으냐? 인디언들이 바구니를 만들 때 쓰는 향모? 훈제 가죽? 봄비 내린 뒤의 흙냄새? 갈리시아 곶의 당 떠러지 위쪽에서 가시금작화를 헤치고 걸을 때 나는 바다 냄새? 아니면 저물 녘 쿠바에 가까웠을 때 육지에서 불어오는 냄새? 그건 선인장 꽃이며 미모사며 가시솔나무의 향기였지. 그것도 아니면 배고픈 아침에 베이컨 튀기는 냄새가 더 좋으냐? 아니면 아침에 마시는 커피? 아니면 한 입 와삭 베어 물 때의 조너선 사과? 사과주스 공장에서 사과를 으깨는 향기? 오븐에서 갓 구워 낸 빵 냄새? 넌 지금 배가 고프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아직도 옆으로 누워 눈에 반사된 별빛으로 환한 동굴 입구를 지켜보고 있었다.
(P.30)
이제까지 네가 죽인 사람이 몇이나 되지? 하고 그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잘 몰라. 너는 사람을 죽일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나? 아니 없지. 하지만 죽여야만 해. 네가 죽인 사람 중에서 도대체 몇이나 진짜 파시스트였지? 극소수야. 하지만 그들은 모두가 아군과 대항하는 군대에 속한 적들이었잖아. 하지만 넌 스페인을 통틀어 어느 곳보다도 나바라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가. 그건 그래. 그런데도 너 그들을 죽였어. 그랬지. 만약 믿지 못하겠다면 저기 캠프까지 내려가 보란 말이다. 살인 행위가 잘못이란 것을 모르는가? 알고 있어. 그런데도 죽이는 거야? 그래. 그래도 넌 대의명분이 옳다고 절대적으로 믿는 거야? 그럼 믿고말고.
옳고말고, 하고 그는 확신에 차서는 아니지만 자랑스럽게 스스로에게 말했다. 난 민중을 믿고, 민중이 바라는 대로 자치(自治)를 할 권리가 있다고 믿어. 하지만 넌 살인 행위가 옳다고 믿어서는 안 돼, 하고 그는 스스로를 타일렀다. 불가피하게 살인 행위를 해야 하더라도, 옳은 일이라고 믿어서는 안 돼. 만약 그렇게 믿는다면 모든 일이 그릇되고 말 거야.
넌 사람을 몇 명쯤 죽였다고 생각하나? 자취를 남겨 놓고 싶지 않으니, 알수 없지. 그래도 알 텐데? 알지. 몇 명이야? 몇 명인지는 확실치 않지. 기차를 폭파해서 한꺼번에 여러 명을 죽였으니까. 아주 많이. 확실치는 않아. 그래도 그중에서 확실 한 수는? 스무 명은 넘을 거야. 그렇다면 그중에서 진짜 파시스트는 몇이나 되지? 두 명은 확실해. 아군이 그 두 놈을 우세라에서 포로로 잡았을 때 내가 총살해야 했으니까. 그때 마음에 거리끼지 않던가? 아니. 그렇다고 기분이 좋은 것도 아니었겠지? 그랬지. 난 또다시 그런 짓을 않겠다고 결심했거든 그래서 그런 일을 피해 왔어. 무장하지 않은 사람들을 죽이지 않으려고 피해 왔지.
어이, 이것 봐, 하고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이제 이런 생각은 집어치우는 게 좋겠어. 그건 너를 위해서도, 네 일을 위해서도 아주 해롭거든. 그러자 내면의 그가 다시 그에게 말했다. 어이, 내 말 잘 듣고 있는 거야? 넌 지금 아주 중대한 일을 하는 중이고, 또 난 네가 그것을 잘 깨닫고 있도록 해야 돼. 네 머리가 똑바로 돌아가도록 만들어 놓아야 한다고. 만약 네 머리가 완전히 똑바르지 않다면, 네가 지금 하는 일을 할 권리가 없기 때문이야. 그런 일은 모두 범죄 행위이며, 또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들에게 더 나쁜 화가 미치지 않도록 방지하는게 아닌 한 타인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는 없기 때문이야. 그러므로 그 점을 확실히 인식하고 자신에게 거짓말하는 일이 없도록해.
(P.105)
이젠 그만 닥치시지, 하고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넌 지금 몹시 건방지게 굴고 있어.
무슨 일이건 간에 너 자신을 속일 권리는 없는 거야, 하고 내면의 그가 계속 말했다.
알았어, 그는 자신에게 대답했다. 여러 모로 좋은 충고를 해 줘서 고마워. 그런데 내가 마리아를 사랑하는 건 괜찮은가?
그럼, 괜찮고말고, 하고 내면의 그가 대답했다.
순수한 유물론적 사회관에서는 사랑 같은 존재는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도대체 언제부터 그런 사회관을 갖게 됐지? 하고 내면의 그가 물었다.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었지. 또 가지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어. 넌 '자유', '평등', '박애'를 믿지.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를 신봉하고. 그러니 필요 이상의 변증법으로 자신을 속이지 마. 변증법 같은 건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일 뿐 너를 위한 것은 아니니까. 넌 그저 착취자가 되지 않기 위해 그걸 알아 둬야 할 뿐이지. 넌 이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정말 많은 일을 유보해 버렸지. 만약 이 전쟁에 패배한다면 그런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될 거야.
하지만 전쟁만 끝난다면 너도 네가 믿지 않는 것들을 내버릴 수 있어. 네가 믿지 않는 것도 산더미같이 많지만, 믿는 것도 산더미 같이 많아.
(P.107)
사람을 사랑하는 데 결코 자신을 속이지마. 남을 사랑한다는 것이야말로 보통 사람들 누구에게나 오는 행운이 아니야. 너도 전에는 한 번도 얻지 못했다가 이제야 겨우 얻었지 않은가. 마리아와 함께 누리는 게 비록 오늘 하루와 내일의 일부밖에 지속되지 않는 것이라 해도, 아니면 아주 오랫동안 지속된다 해도, 그건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거든. 자신이 얻지 못했다고 그런 것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인간은 어느 시대에나 있는 법이지. 하지만 확실히 말해 두지만, 사랑이라는 건 정말 존재 하고, 넌 지금 그것을 누리고 있으며, 그래서 비록 네가 내일 죽는다 해도 년 행복한 사나이 인 거야.
(P.108)
영감은 인류 역사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산에서 죽었는 지 알고 있다 해도 위안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일을 겪는 바로 그 순간에는 비슷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일 때문에 영향을 받지는 않기 때문이다. 어느 날 과부가 된 여자가 아내에게 사랑받던 다른 남편들 역시 죽었다는 소식을 듣더라도 조금도 위안이 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든 그렇지 않든 죽음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법이다. 죽음을 받아들였지만, 쉰두 살의 나이에 세 군데나 총상을 입고 산꼭대기에서 독 안에 든 쥐처럼 갇혀 있는 엘소르도에 게 죽음의 잔은 결코 달지 않았다.
그는 이런 일에 대해 혼자 농담을 지껄였지만 하늘과 먼 산 을 바라보며 술을 들이켰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바라지 않았다. 어차피 죽어야 한다면, 하고 그는 생각했다. 죽는 것이 확실하다면 죽을 수 있어. 하지만 이렇게 죽기는 끔찍이도 싫어.
죽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고, 그는 마음속에서 죽을 때의 모습을 그려 보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살아 있다는 것은 산비탈에서 바람에 나부끼는 곡식 들판이었다. 살아 있다는 것은 하늘에 떠도는 매였다. 살아 있다는 것은 도리깨질을 하고 왕겨를 불어 내는 먼지 자욱한 타작마당에 놓여 있는 질그릇 물동이였다. 살아 있다는 것은 두 다리 사이에 끼고 타는 말이요, 한쪽 다리로 누르고 있는 카빈총이요, 언덕이요, 골짜기요, 나무를 따라 흐르는 개울이요, 골짜기 저쪽 산비탈이요, 그 건너편 언덕들이었다.
(P.121)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할 일들을 얼마나 많이 모르고 있는가? 나는 오늘 죽지 않고 더 오래 살고 싶구나. 이 나흘 동안 삶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이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배운 것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것을 배운 것 같아, 하고 그는 생각했다. 난 노인이 되어 진실로 삶에 대해 아는 사람이 되고 싶어. 인간이란 언제까지나 계속 배워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사람마다 정해진 양밖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일까? 아무것도 모르면서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좀 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P.243)
“만약 눈만 오지 않았으면......” 필라르가 말했다. 그러자 (이를테면 이 여자가 한 팔로 그를 껴안기라도 한 것처럼) 육체적인 해방감을 맛볼 때처럼 그렇게 급격하지는 않지만, 천천히 그리고 이성적으로 그는 그녀의 말을 받아들여 증오감을 차츰 몰아내기 시작했다. 확실히 눈 때문이야. 눈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 거야. 눈 때문이거든. 눈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됐어. 한때 너도 다른 사람들처럼 눈 때문이라고 생각했잖아. 한때는 너도 네 자아를 잊어버렸지. 싸움터에서는 언제 나 자아를 잊어버려야 하거든. 그런 곳에서는 자아란 있을 수 없어. 너 자신이 있는 곳에 오직 패배만 있을 뿐이지.
(P.359)
그는 또다시 산비탈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난 이 세상을 떠나기 싫을 뿐이야. 이 세상을 떠나기가 정말로 싫어. 그리고 내 인생에서 뭔가 좋은 일을 했기를 바라. 내가 갖고 있던 재능이나마 그것으로 그렇게 시도해 봤지. '갖고 있는' 이 라는 뜻이겠지. 그래, '갖고 있는' 재능 말이야.
나는 내가 믿고 있던 것을 위해 지난 일 년 동안 싸워 왔지. 만약 우리가 여기서 승리를 거두면 우린 어디서나 승리를 거두게 될 거야. 이 세계는 아름다운 곳이고, 그것을 위해 싸울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지. 그래서 이 세계를 떠나기가 싫은 거야. 이렇게 훌륭한 삶을 보낼 수 있었으니 넌 행운아였어, 하고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할아버지의 삶처럼 그렇게 길지는 못했어도 할아버지 못지않게 훌륭한 삶을 살았어. 이 마지막 며칠 때문에 넌 누구 못지않게 훌륭한 삶을 보낼 수 있었지. 이런 행운을 얻고도 설마 불평할 생각은 하지 않겠지.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배운 것을 사람들에게 전할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어. 제기랄,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야 정신없이 그것을 배우고 있군. 카르코프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그 사람은 지금 마드리드에 있겠지. 바로 저 산맥을 넘어 평야 건너편에. 잿빛 바위와 솔밭과 히스와 가시금작화 숲을 빠져나가 노란 고원 지대를 가로질러 가면 바로 그곳에 그 도시가 하얗고 아름답게 솟아 있지. 그곳은 필라르가 들려준 도살장에서 짐승의 피를 마시는 할머니들의 이야기처럼 현실적이지. 진실한 것이 하나만 있다는 법은 없어. 모두가 진실인 거야. 아군의 것이건 적의 것이건 비행기는 하나같이 아름답거든 빌어먹을 비행기들, 하고 그는 생각했다.
(P.3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