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지키려는 고양이
나쓰카와 소스케 / 이선희 / 아르테 / 296쪽
(2018. 6. 9.)




  “책에는 힘이 있지.” 
  할아버지는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했다.
  평소에 워낙 과묵해서 손자에게도 거의 말을 하지 않았지만 책에 관해 말할 때에는 가느다란 눈을 한층 더 가늘게 뜨고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시대를 초월한 오래된 책에는 큰 힘이 담겨 있단다. 힘이 있는 수많은 이야기를 읽으면, 너 마음 든든한 친구를 많이 얻게 될 거야.”
(P.26)



  “유머 감각은 별로지만 마음만은 기특하군. 이 세상에는 이치가 통하지 않거나 부조리한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지. 고통으로 가득 찬 그런 세계를 살아갈 때 가장 좋은 무기는 이치도 완력도 아니야. 바로 유머지.” 
(P.37)



  “이 세상에 니체를 좋아한다는 사람은 손꼽을 수 없을 만큼많지.” 
  사내는 여전히 책에서 고개를 들지 않고 대답했다.
  “그런데 정말로 그의 작품을 읽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몇 마디 격언이나 골자가 빠진 요약만을 보고 유행하는 코트처럼 니체를 입는 사람이 많지 않을까? 너도 그런 타입 인가?”
  “책을 보기만 하는 학자는 결국 생각할 능력을 잃어버린다. 책을 보지 않을 때는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
(P.53)



  “책을 많이 읽는 건 좋은 일이야. 하지만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게 있어”
  린타로는 사내를 향해 할아버지의 말을 따라했다. 그 말을 듣고 하안 양복의 사내가 입을 다문 채 몸을 움찔거렸다. 팽팽한 긴장과 정적 속에서 린타로는 할아버지의 말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책에는 커다란 힘이 있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책의 힘이지 네 힘은 아니야.”
  “무턱대고 책을 많이 읽는다고 눈에 보이는 세계가 넓어지는 건 아니란다. 아무리 지식을 많이 채워도 네가 네 머리로 생각하고 네 발로 걷지 않으면 모든 건 공허한 가짜에 불과해.”
  “책이 네 대신 인생을 걸어가 주지는 않는단다. 네 발로 걷는 걸 잊어버리면 네 머릿속에 쌓인 지식은 낡은 지식으로 가득 찬 백과사전이나 마찬가지야. 누군가가 펼쳐주지 않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는 골동품에 불과하게 되지.” 
(P.64)



  “책을 읽는 건 산을 올라가는 것과 비슷하지.” 
  “책과 산이 비슷하다고요?” 린타로는 그제야 겨우 고개를 들었다. 할아버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차의 향기를 즐기듯 눈앞에서 천천히 찻잔 을 돌렸다.
  “책을 읽는다고 꼭 기분이 좋아지거나 가슴이 두근거리지는 않아. 때로는 한 줄 한 줄을 음미하면서 똑같은 문장을 몇 번이나 읽거나 머리를 껴안으면서 천천히 나아가기도 하지. 그렇게 힘든 과정을 거치면 어느 순간에 갑자기 시야가 탁 펼쳐지는 거란다. 기나긴 등산길을 다 올라가면 멋진 풍경이 펼쳐지는 것처럼 말이야."
  “독서에도 힘든 독서라는 게 있지. 물론 유쾌한 독서가 좋단다. 하지만 유쾌하기만 한 등산로는 눈에 보이는 경치에도 한계가 있어. 길이 험하다고 해서 산을 비난해서는 안 돼. 숨을 헐떡이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기는 것도 등산의 또 다른 즐거움이란다.” 할아버지는 뼈만 앙상한 가느다란 팔을 내밀어 린타로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기왕에 올라가려면 높은 산에 올라가거라. 아마 멋진 경치가 보일 게다.”
(P.124)



  “책이 팔리지 않는다는 말은 헛소리일 뿐입니다. 책은  아주 잘 팔리고 있어요. 실제로 '세계제일출판사'는 오늘 도 손님이 끊이지 않았거든요.”
  “혹시 빈정거림인가요?”
  “빈정거림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책을 파는 건 이주 쉬운 일이죠. 단순한 한 가지 원칙에서만 벗어나지 않으면 말이에요.”
  상대의 기세에 눌려 입을 다문 린타로를 즐거운 얼굴로 바라보면서, 사장은 숨겨놓은 마술의 비밀을 밝히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팔리는 책을 만든다'는 원칙입니다."
  사장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우리 출판사는 뭔가를 전하기 위해 책을 만드는 게 아닙니다. '세상이 원하는 책'을 만들고 있죠.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나 후세에 전해야 할 철학, 잔혹한 진실이나 난해한 진리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세상은 그런 걸 원하지 않아요. 출판사에 필요한 건 '세상에 무엇을 전하느냐'가 아닙니다. '세상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것'이죠.”
(P.184)



  “진리도, 윤리도, 철학도, 그런 건 아무도 관심이 없어요. 다들 삶에 지쳐서 자극과 치유만을 원하고 있죠 그런 사회에서 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책 자체가 모습을 바꾸는 수밖에 없습니다. 확실히 말하죠. 책에서 가장 중요한 건 팔리는 거라고! 아무리 걸작이라도 팔리지 않으면 사라지게 됩니다.” 
(P.188)



  “그 자리를 벗어나기 위한 위안, 문제를 뒤로 미루기만 하는 안이한 타협, 경박하고 단순한 자기만족을 위한 토론...... 나는 그런 걸 수도 없이 보았어. 때로는 책의 위기를 깨닫고 목소리를 높인 자도 있었지만 결국 큰 흐름을 바꾸지 못한 채 단지 떠내려가기만 할 뿐이었지. 네가 만 난 세 사람이 자신의 철학을 바꾼 결과, 하나같이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린 것처럼 말이야.”
(P.253)



  "책은 지식이나 지혜, 가치관이나 세계관처럼 많은 걸 안겨줘요. 몰랐던 것을 아는 건 즐겁고, 새로운 견해를 만나는 건 굉장히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에요. 하지만 책에는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힘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린타로는 가슴 안쪽에 떨어지는 가루눈처럼 허무한 생각을 열심히 손으로 받아서 말로 바꾸었다. 손으로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사라지는 소중한 일들의 한 조각만이라도 전하기 위해 허공을 바라보며 정신없이 걸었다.
자신에게 특별한 힘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뭔가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책에 관해 말하는 것뿐이다.​
  “계속 그렇게 생각하면서 책의 힘이 무엇인지 찾았어요. 그리고 고민하는 와중에 최근에 조금이나마 대답 같은 것에 도달한 것 같아요.”
  “어쩌면 책은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르쳐주는 게 아닐까요?”
  그렇게 큰 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소리가 낭랑하게 울리면서 허공을 가로질렀다.
  다음 순간, 모든 것을 집어삼킬 만한 깊은 정적이 캄캄한 통로에 내려앉았다.
  어둠을 향해 눈을 크게 떠도 여성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어딘가에 있을 여성을 향해 린타로는 말을 이었다.
   “책에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그려져 있어요. 괴로워하는 사람, 슬퍼하는 사람, 기뻐하는 사람,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 그런 사람들의 말과 이야기를 만나고 그들과 하나가 됨으로써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어요. 가까운 사람만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의 마음까지도."​
  린타로는 다시 힘주어 말했다.
  “남에게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된다, 약한 자를 괴롭히면 안 된다, 어려운 사람에게는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 런 건 당연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지만 요즘은 점점 당연하지 않게 되고 있어요. 당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왜 그래야 하지?'라고 묻는 사람들도 있죠. 왜 남에게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되는지 모르는 사람들도 많고요. 그런 사람들에게 설명하기는 쉽지 않아요. 이건 논리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책을 읽으면 알 수 있어요. 논리로 말하기보다 훨씬 소중한 것, 사람은 혼자 사는 게 아니 리는 걸 쉽게 알수 있죠.”
  린타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상대를 향해 열심히 말을 짜냈다.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 그걸 가르쳐주는 게 책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그 힘이 많은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힘을 주는 거예요." 
(P.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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