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레고메나

임마누엘 칸트 / 염승준 / 책세상 / 229쪽

(2018. 7. 22.)

이 책은 이미누엘 칸트의《학문으로서 출현 가능한 미래의 모든 형이상힉을 위한 프를레고메나Prolegomena zu einer jeden kunftigen Metaphysik, die als wissenschaft wird auftretne konnen》(이하《프를레고메나》) 가운데 “초월적 주요 물음에 관하여 첫째 부분 : 순수 수학이 어떻게 가능한가?”와 “초월적 주요 물음에 관하여 둘째 부분 : 순수 자연과학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제외한 전체를 옮긴 것이다. 그리고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역자 나름대로 주해를 붙였다.

《프를레고메나》는 칸트가《순수이성 비판》을 출간하고 나서 2년 뒤에 이 책에 대한 오해와 비판을 해소하기 위해 발표한 저작이다. 《순수이성 비판》의 근본 사상과 핵심 내용을 압축해 쉽게 풀어 쓴 것이기 때문에 두 책은 구조도 비슷하다. 그럼에도 문고라는 성격상 분량의 제약 때문에 전체를 번역하지 못하고 부득이하게《순수이성 비판》의 '초월적 변증론'에 상응하는《프롤레고메나》의 세 번째 부분만을 옮기게 되었다. 이 부분을 선택한 것은 칸트가《순수이성 비판》 2판 서론에서뿐만 아니라《프롤레고메나》에서도 독자에게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순수 사변 이성의 인식 원리들과 인식 요소들 간의 유기적 관계이고, 여기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칸트는 순수이성의 유기적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순수이성은 이성 자체 안에서...... 예외 없이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분리된 영역이어서, 누구라도 모든 여타의 부분들 과 접촉함 없이는 순수이성의 어떤 부분도 건드릴 수 없고, 사전에 자신의 위치와 다른 모든 부분에 들림없이 영향을 끼치지 않고서는 어떤 것도 이행할 수 없다.” 이 말은 곧 '초월적 감성론에서 감성의 선험적 형식인 '공간과 '시간은 '초월적 분석론'과 '초월적 변증론'에서 다루고 있는 '지성개념들'과 '초월적 이념들'과 엄격하게 구분되면서도 상호 연결 되어서 영향을 끼치지 않고서는 어떤 기능도 수행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은《순수이성 비판》의 목차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P.11)

만약 형이상학이 학문이라면, 어떻게 형이상학이 다른 학문들처럼 보편적이고 지속적인 동의의 상황에 처할수 없겠는가? 만약 형이상학이 학문이 아니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형이상학이 학문이라는 위장 아래서 끊임없이 허풍을 떨고 인간의 지성으로 하여금 결코 완수될 수 없지만 사라지지도 않을 희망에의 기대를 품게 하는가?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신의 앎 혹은 무지를 드러내게 될지라도 이 근거 없는 학문의 본성에 대해서 반드시 한 번은 어떤 확실한 것이 수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현재의 토대 위에서는 이 근거 없는 학문이 얼마 지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학문이 끊임없이 진전하는 동안 지혜 자체이고자 하는, 그리고 모든 사람이 지혜의 신탁(神託)을 묻는 이 형이상학이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동일한 위치에 서성거리고 있다는 점은 비웃음을 살 만하다. 실제로 형이상학의 많은 추종자들이 사라졌고, 다른 학문에서 뛰어난 학식이나 재능을 나타내는데 충분히 자긍심을 갖는 그런 사람들이 굳이 여기〔형이상학〕에서 그들의 명성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를 하지 않는다. 그밖에 다른 모든 여타의 것들에는 무지한 자들조차 여기〔형이상학〕에서는 주제넘게도 중요한 판년을 내린다. 왜냐하면 이 (형이상학이라는) 지대(地帶) 위에서는 천박하기만 한 끊임없는 지껄임과 정확함을 구별하기 위한 어떤 확실한 척도도, 그리고 분동(分銅)도 존재 하지 않기 때문이다.

​(P.20)

순수이성은 이성 자체 안에서 그렇게 예외 없이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분리된 영역이어서, 누구라도 여타의 모든 부분들과 접촉하지 않고는 순수이성의 어떤 부분도 건드릴 수 없고, 사전에 모든 부분에 자신의 위치와 다른 부분에 틀림없이 영향을 끼치지 않고서는 어떤 것도 이행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판단을 내부에서 고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순수이성의 영역 밖에 있을수 없으며, 각부분의 타당성과 각 부분이 이성 자체 안의 나머지 것들에 대해 갖는 관계에 의존해 있고, 마치 유기체의 사지의 구조처럼, 각 부분의 목적은 전체의 완벽한 개념으로부터만 파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만약 비판이 전체적으로 순수이성의 최소한의 요소들에까지 성공적으로 완수되지 않는다면, 누군가는 그러한 비판이 결코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고, 또 사람들은 이 능력들의 영역에 관하여 모든 것을 규정하고 결정해야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무 것도 규정하지도 결정하지도 못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P.32)

​​

형이상학적 인식은 순전히 선험적 판단들만을 포함해야 하며, 그것은 이 인식 원천들의 특이성이 요구하는 바이다. 판단들은 이때 판단들이 어떠한 근원을 갖든지 간에, 혹은 판단들의 논리적 형식에 따라 어떠한 성질을 갖든지 간에, 내용에 있어서는 판단의 구별이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내용에 따라서 판단들은 단지 설명적이어서 인식의 내용에 어떤 것도 추가하지 못하거나, 혹은 확장적이어서 주어진 인식을 확대하거나 한다. 첫째 판단들은 분석판단으로, 둘째 판단들은 종합판단으로 부를 수 있다.

분석적 판단들은 술어에서 주어의 개념에 이미 실재로 생각되는 것 외에 어떤 다른 것도 말하지 않는다. 비록〔주어의 개념 안에서 이미 실재로 생각되는 것이〕그다지 명료하지 않고, 그렇게 의식적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말이다. 만약 내가 “모든 물체는 연장적이다”라고 말하면, 나는 물체에 대한 나의 개념을 전혀 확장하지 못한다. 저 개념의 연장성은, 비록 명확하게 말한 것은 아니지만, 판단에 앞서 실제로 생각되어지는 것을 통해서 물체의 개념을 분해한 것일 뿐 이다. 따라서 그 판단은 분석적이다. 이와 반대로 '몇몇의 물체는 무겁다'라는 명제는 물체에 대한 일반적 개념 안에서 실제로 생각되어지지 않는 무엇인가를 포함한다. 따라서 그 명제는 나의 개념에 무엇인가를 덧붙임으로써 나의 인식을 확대하고, 바로 그런 점에서 종합적 판단이라고 일컬어야 한다.

(P.40)

근본적으로 형이상학적 판단들은 모두 종합적이다. 사람들은 형이상학에 속하는 판단들과 본래적으로 형이상학적인 판단들을 구별해야 한다. 형이상학에 속히는 판단들 가운데 대부분의 판단들은 분석적이지만, 그것들은 단지 학문의 목적이 전적으로 지향하고, 언제나 종합적인 형이상학적 판단들을 가능하게 할 수단을 형성할 뿐이다. 만약 개념들이 형이상학에 속한다면, 실례를 들자면 실체의 개념, 그 개념들의 순전한 분해로부터 발원히는 판단들 또한 필연적으로 형이상학에 속할 것이다. 예를 들면 '실체는 단지 주체로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등등. 그리고 그와 같은 다수의 분석판단들을 매개로 우리는 그 개념들의 정의에 접근하고자 한다. 그러나 순수한 지성개념의 분석은(그와 같은 것을 형이상학이 포함한다) 형이상학에 속하지 않는('공기는 탄력적인 유체이고, 그 것의 탄력성은 알려져 있는 어떠한 한냉(寒冷)의 정도에 의해서도 제거되지 않는다') 다른 모든 개념의, 그러니까 또한 경험적인 개념의 분해 이외의 다른 방식으로는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비록 그 개념은 본래 형이상학적이지만, 그 분석 판단 자체는 본래적으로 형이상학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이 학문은 어떤 특별함과 그 학문의 고유성을 그 학문의 선험적 인식의 생산 안에서 갖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험적 인식은 따라서 그 학문이 다른 모든 지성인식들과 공통적으로 갖는 것으로부터 구별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사물들에서 실체인 모든 것은 고정불변하다'리는 명제는 종합적이고 전형적으 로 형이상학적인 명제다.

(P.48)

우리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 독단론에 넌더리가 나고 동시에 우리에게 아무것도, 심지어 허락된 무지의 평온 상태마저 약속하지 않는 회의주의에 넌더리가 나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인식의 중요성에 의해 강요되어, 우리가 소유한다고 믿었던 것들과 혹은 순수이성이리는 이름하에 우리에게 제공된 모든 것과 관련해 오랜 경험에서 비롯된 불신으로, 우리에게는 남은 것은 단지 '형이상학이 도대체 가능한가?' 하는 하나의 비판적인 물음이다. 이 비판적 물음에 대한 답변에 의해서만 우리는 우리 미래의 거동을 정할수 있 다. 그러나 이러한 물음은 현실적인 형이상학의 어떠한 종류의 주장들을 반박하는 데에서 대답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왜냐하면 우리는 현재 어떤 형이상학도 타당한 것으로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학문의 문제성 있는 개념에서 답변되지 않으면 안된다.

《순수이성 비판》에서 나는 이 물음에 관해서 종합적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순수이성 자신 안에서 연구했고, 이 원천 안에서 그 요소들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순수한 사용의 원칙들을 원리들에 따라 규정하려고 했다. 이것은 쉽지 않은 작업으로 점차로 체계 속으로 파고들어가 생각할 수 있는 결연한 독자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이성 자신 이외에 주어진 것으로써의 어떤 것도 토대로 삼지 않는 것이고, 따라서 어떠한 실재 사실에도 의지함 없이 인식을 이성의 근원적인 맹아로부터 발전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에 반해《프롤레고메나》는 예행연습이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학문을 실현시키기 위해 학문 자체를 진술하기보디는 사람들이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은〔《프롤레고메나》〕사람들이 이미 신뢰할 만한 것으로 알고 있는 어떤 것에 의지해야 한다. 거기서부터 사람들은 안심하고 출 발해서 사람들이 아직 모르는 원천들로 올라갈 수 있고, 그 원천들의 발견은 우리에게 사람들이 알았던 것을 설명해줄 뿐만 아니라, 전부 상술한 원천들에서 기인하는 많은 인식들의 범위를 구체화하게 해줄 것이다.《프롤레고메나》의, 특히 미래의 형이상학을 준비해야 하는《프롤레고메나》의 방법적 태도는 따라서 분석적이 된다.

​(P.54)

《순수이성 비판》에서 나의 가장 큰 주안점은 어떻게 내가 항상 인식의 종류들을 신중하게 구별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 뿐만 아니라, 각각의 인식의 종류들에 속하는 모든 개념들을 그것들의 공통적인 원천에서 어떻게 끌어낼 수 있는가에 있었다. 나는 개념들이 어디에서 파생했는지를 가르치는 것을 통해서 개념들의 사용을 확실하게 규정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선험적 개념들의 열거, 범주화 그리고 자세한 설명에 있어서, 다시 말해서 원칙들에 따라서 인식하는 일찍이 누구도 짐작한바 없는, 그러나 평가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히 귀중 한 이점을 얻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것 없이 형이상학에서 모든 것은 엉터리 광시곡(狂詩曲)으로서 사람들은 자신이 소유한 것이 충분한 것인지 아닌지, 혹은 무엇인가가 빠 지지 않았는지 그리고 어딘가에서 빠지지 않았는지를 알 수 없다. 당연히 이러한 장점을 사람들은 오직 순수한 철학에서만가질 수 있고, 이것이 철학의 본질을 이룬다.

나로서는 지성의 모든 판단의 네 가지 논리적 기능들 안에서 범주들의 근원을 발견했기 때문에, 이념들의 근원을 이성 추리들의 세 가지 기능들에서 찾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순수이성개념들(초월적 이념들)이 현존한다면 순수이성개념들은, 사람들이 순수이성개념들을 타고난 것으로 간주하려고 하지 않는 한, 동일한 이성활동 외에 어느 곳에서도 만날수 없기 때문이다.

이성추리들의 형식적 차이는 이성추리들을 필연적으로 정언적, 가언적 그리고 선언적 이성추리로 분류하게 한다. 이성추리의 형식적 차이에 근거한 이성개념들은 첫째로 완전한 주체의 이념(실체), 둘째로 조건들의 완전한 계열의 이념, 셋째로 가능한 것의 절대적인 전체의 이념 안에서의 모든 개념의 규정을 포함한다. 첫째 이념은 인간의 영혼과 관련된 것이었고, 둘째 이념은 우주론적인 것이며, 셋째 이념은 신학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세 이념들은 각각의 고유한 방법에 따라 변증법을 초래했기 때문에, 그에 의거하여 순수한 이성의 전체 변증법의 구별이 근거하게 된다. 즉 오류추리론, 이율배반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순수이성의 이상으로 구별되게 된다. 이러한 도출을 통해서 사람들은 순수이성의 모든 주장들이 여기서 충분히 완전하게 제시되고 그 어떤 유일한 것도 빠질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중받게 된다. 왜냐하면 순수이성의 모든 주장들이 자신들의 원천으로 삼는 이성능력 자체는 그렇게 함으로써 완전하게 측정되기 때문이다.

(P.68)

​​​​

이성이 자신(이성〕의 의지에 반해서 자신〔이성〕의 비밀스 러운 변증론-이성은 이 변증론을 독단론이라고 거짓 주 장한다-을 밝히는 유일하게 가능한 경우는, 이성이 일반적으로 인정된 원칙에서 주장을 근거짓고, 마찬가지로 공인 된 다른 원칙에서 추론 방식의 정당성을 가지고 그 반대를 정확하게 추론하는 경우이다.

(P.86)

​​

회의주의는 본래 형이상학에서, 그리고 단속 없는 그것(형이상학〕의 변증학에서 발생 한다. 처음에 회의주의는 단지 이성의 경험적 사용을 위해서 이것(경험적 사용)을 넘어가는 모든 것을 실속 없고 기만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점차로 사람들은 동일한 선험적 원칙들-사람들은 이러한 동일한 원칙들을 경험에서 사용하고, 부지불식간에 얼핏 보면 경험이 도달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끌고 간다-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챘기 때문에, 경험의 원칙들에서조차 의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것(경험의 원칙)에서는 어떠한 곤경도 없다. 왜냐하면 건강한 지성은 이 점에서 언제나 자신의 권리들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어디까지 이성을 신뢰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왜 단지 거기까지이고 더 멀리까지는 이성을 신뢰할수 없는지를 규정한 수 없는 특별한 혼란이 학문 안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은 단지 형식을 갖추고, 원칙들로부터 이끌어진 우리의 이성사용의 경계규정을 통해서만 제거 될 수 있고, 미래에 발생할수 있는 이러한 문제의 재발을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가능한 경험을 넘어서 사물들 자체일 수 있는 것에 대해 우리가 어떠한 규정된 개념도 줄 수 없다는 것은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적으로 경험을 멀리하는 그것들 (사물들 자체〕에 대한 물음 앞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왜냐하면 경험은 이성에게 단 한 번도 완전한 충족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성〕은 우리를 물음들에 대한 답에서 언제나 뒤로 물러나게 하고, 물음들의 완전한 해명과 관련해서 우리 를 불만족스럽게 한다. 누구든지 이러한 것을 순수이성의 변증론에서 충분히 볼 수 있괴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변증론은 타당한 주관적 근거를 갖는다.

​(P.106)

영혼이라는 것이 도대체 본래 무엇인지를 묻지 않고서, 그리고 만약 어떠한 경험개념도 그것〔영혼)에 대해서 충분하지 않다면, 비록 우리가 그것〔비물질적 존재의 이성개념)의 객관적 실재성을 전혀 증명할 수 없다 할지라도, 필요한 경우 (단순한 비물질적 존재의) 이성개념을 이러한 필요성 때문에 승인하는 것 없이. 우리가 우리의 영혼의 본성으로부터 가장 명확한 주체의 의식으로까지 도달한디는 것을 누가 견뎌낼 수 있겠는가? 그리고 마찬가지로 누가 그것(주관〕의 현상들이 물질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확신에 도달하는 것을 견뎌낼 수 있겠는가? 누가 세계의 영속(永續)과 크기, 자유 혹은 자연필연성에 대한 모든 우주론적인 물음에 있어서 한갓 경험적 인식에 만족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어떻게 시작을 하든지 간에, 경험적 원칙들에 따라서 주어진 모든 대답은 언제나 새로운 물음을 낳을 수 있고 이러한 새로운 물음은 마찬가지로 대답을 요구하며 그것을 통해서 결국 이성의 만족을 위한 모든 물리적 설명의 방식들의 불충분함을 분명 하게 입증하니 말이다.

(P.107)

모든 잘못된 기술, 모든 허황된 지혜는 오래 지속될 수 없 다. 왜냐하면 결국 그것(모든 잘못된 기술, 모든 허황된 지혜) 스스로 자신을 파괴하고, 그것의 최상의 발달Kultur은 동시에 그것의 몰락의 시점이기 때문이다. 형이상학과 관련해서 이 시간이 지금 도래했다는 것을 그 상황이 증명해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형이상학은 그 밖에 학문들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검토된 모든 열의에도 불구하고, 학식 있는 시민들 아래에서 쇠퇴한다. 대학의 오래된 연구 제도는 아직 형이상학의 잔영을 보존하고 있고, 학문들의 유일한 학술원은 때때로 포상을 통해 형이상학 안에서 이런 저런 시도를 하도록 사람들을 움직이지만, 형이상학은 더 이상 근본적인 학문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가령 사람들이 위대한 형이상학자라고 부르고자 하는 어떤 기지 있는 사람이 이러한 선의의, 그러나 어느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는 찬사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는 스스로 판단해보는 것이 좋다.

그러나 비록 모든 독단적인 형이상학이 쇠퇴할 시간이 의심할 여지 없이 도래했다고 할지라도, 근본적이고 완성된 이성 비판을 매개로 독단적 형이상학의 쇠퇴에 반대해서 형이상학의 부활의 시간이 이미 도래했디는 것을 말할 수 있 기 위해서는 몇 가지 부족한 점이 있다. 하나의 경향이 그것과 반대되는 경향으로 넘어가는 모든 이행들은 무관심의 상태로부터 일어나는데, 이러한 시기는 한 저자에게 있어서 가장 위험한 것이지만,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학문에 있어서는 가장 바람직한 시기다. 왜냐하면 만약 이전 결합들과의 완전한 단절 뒤에 편협한 정신이 사라지고 나면, 그 마음들은 다른 계획에 의한 동맹을 위한 제안들을 경청하는 최상의 상태에 있게 되기 때문이다.

(P.132)

내가 이《프롤레고메나》에 대해 이 책이 비판의 영역에서 탐색을 활발하게 하고, 사변적인 영역에서 자양분이 부족한 듯 보이는 철학의 일반적allgemein 정신에 많은 새로운 것을 약속할 수 있고 생명을 건강하게 유지시킬 수 있는 대상을 제공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할 때 나는, 이미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내가《비판》에서 인도한 가시밭길에 불만과 지겨움을 품게 된 누군가가 나에게 어디서 이러 한 희망을 근거 짓는지를 물을 것이라는 점을 말이다.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저항할 수 없는 필연성의 법칙에서”이다.

인간 정신이 형이상학적 탐색을 언젠가 완전히 포기하게 된다는 것은, 오염된 공기를 들이마시지 않기 위해 호흡을 멈춘다는 것처럼,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세계에는 언제나 형이상학이 있으되, 특히 사유하는 사람들에게는 공적인 표준 척도가 없는 한에서, 모두가 자신의 방식대로 형이상학을 재단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형이상학이라 불리었던 것들은 꼼꼼하게 검사하는 재능을 가진 어떤 사람도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형이상학을 완전히 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결국 순수이성 자체의 비판이 시도되어야 하고, 만약 비판이 현존한다면 탐색되어야 하고, 보편적인 검사에 부쳐져야 한다. 왜냐하면 한갓 지식욕 이상의 욕망이 끝까지 강요하는 것을 제거할 어떤 수단도 없기 때문이다.

(P.133)

“인간의 이성은 어떤 종류의 자기 인식에 있어서 특수한 운명을 갖는다. 인간의 이성은 이성의 자연본성 자체로부터 부과된 것이기에 피할 수도 없고 인간 이성의 모든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어서 대답할 수도 없는 문제들로 인해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칸트가《순수이성 비판》서문에서 독자에게 처음으로 건네는 말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인간의 이성은 '이성의 자연본성 자제로부터 부과되는 '대답할 수 없는 문제'들로 인해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 이 '대답 할 수 없는 문제가 인간 이성을 혼돈과 당착에 빠뜨렸으며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를 전쟁의 역사로 만들었다. 우리가 인간이고, 인간의 이성이 이와 같은 '특수한 운명'을 가지고 있다면 이러한 이성의 운명은 우리 모두의 운명이 된다.

(P.162)​

칸트는 이처럼 동일한 이성의 분열로 발생한 독단주의, 회의주의 같은 적대자를 “우리 자신 안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서양 형이상학에서 등장한 모든 주의나 주장 들은, 시대순 혹은 주제별로 잘 정리된 '서양 철학사'를 통해 서 배울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스스로가 자신의 이성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철학은 배울 수 있 는 것이 아니다, 다만 스스로 철학함만을 배을 수 있다는 칸트의 말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P.163)​

​​

칸트의 주저《순수이성 비판》이나 이 책의 번역 텍스트인 《프를레고메나》셋째 부분의 주제인 '어떻게 형이상학 일반이 가능한가?'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은, 과연 우리의 이성이 '대답할 수 없는 문제', 즉 형이상학적 문제들로 인해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단 한 번도 인간 이성의 자연본성 자체로부터 부과된 대답할 수 없는 문제들로 괴로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형이상학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기능한가? 단 한 번도 자기 자신이 독단주의자, 회의주의자, 무정부주의자라는 자기반성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칸트 비판철학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형이상학적 문제들을 문제로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형이상학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물음을 던질 수 있겠는가?

누군가가 칸트 철학을 읽고 공부하려는 이유가 칸트 철학 의 권위 때문이라거나, 칸트 철학이 서양 철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 반드시 넘어야 할 산맥이라서, 또는 칸트 이후의 독일관념론자인 피히테. 셸링, 헤겔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칸트 철학의 초대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칸트 철학이 난해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그의 책이 외국어인 독일어로 쓰였기 때문도, 난해한 개념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대답할 수 없는 문제'가 나의 실존적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며, 이성 스스로가 이성 자신에게 부과하는 문제를 감지하지 못한 채 이성이 이성 자신에게 언제나 낯선 타자로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이성이 언제나 낯선 타자로 남아 있는 사람에게 칸트 철학은 무미건조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일 뿐이다.

(P.167)

칸트는《프롤레고메나》서문에서 지금까지 형이상학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어떤 확실한 측정 단위나 분동(分銅)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형이상학적 문제들에 대한 모든 작업은 일시적으로 정지되어야 하며, 형이상학이 도대체 가능한 것인지 아닌지를 묻는 것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확신시키는 것이 자신의 목적이라고 밝힌다. 이 말은 형이상학의 가능성 여부를 묻기 이전에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기존의 형이상학이 제시한 답들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이 '동굴의 비유에서 인간이 이성을 통해 존재와 인식의 근거인 이데아를 직관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 칸트는 인간 이성이 이데아와 같은 형이상학적 대상을 인식할수 있는지를 먼저 문제 삼는다는 점에서 두 철학자가 인간 이성의 인식 능력을 논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칸트가 '대답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한 기존 형이상학자들의 답으로부터 우선 자유로워야 한다고 말한 것은, 마치 '동굴의 비유'에서 죄수 한 사람이 자신을 묶고 있던 속박과 무지로부터 벗어나는 수행의 과정과 동일한 맥락에서 비교될 수 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는 진리에 대한 사랑인 에로스를 통해 동굴 안 죄수는 '태양의 빛'에 도달하고자 했다면, 칸트가 행한 순수이성 비판은 이성 자신이 능동적으로 자신의 이성을 법정에 세운다.

(P.174)

순수이성 비판이란 책들과 체계에 대한 비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 능력 일반을, 이성이 모든 경험으로부터 독립해서 추구함직한 모든 인식과 관련해서 비판함을 뜻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도대체 형이상학이라는 것이 가능한지 불가능한 지를 결정하고, 형이상학의 원천과 범위 그리고 한계를 규정 하되, 그것들을 모두 원리로부터 수행함을 뜻한다.

철학의 대상이 인간 이성 밖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 이성 능력 일반'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 바로 칸트 철학이 서양 철학사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로 평가받는 이유다.

(P.17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

진은영 / 그린비 / 296쪽

(2018. 7.15.)

순수이성비판을 이보다 더 쉽게 설명할수 있을까?

순수이성비판의 이해를 위해 꼭 필요한 필독서

​​

사람들이 철학에 성공적으로 입문하기 위해서 처음 공부해 볼 만한 철학자로 꼽는 이는 바로 칸트이다. 칸트에서 시작하세요!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내 주변에 칸트에서 시작해서 철학공부를 중도포기한 사람은 없었다. 칸트에게 매혹된다는 것은 사실 철학에 매혹된다는 것과 동의어다. 칸트. 정말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의 철학자다. 그러나 헤겔이 이미 말했듯이 익숙하다(bekannt)고 해서 잘 알고 있는(erkannt) 것은 아니다. 칸트는 제대로 알려 진 철학자는 아니다. 제대로 알기에는 칸트는 너무나 어렵다. 그러나 누군가 일단 칸트를 견뎌낼 수 있다면 그는 어떤 철학의 가시밭길도 걸을 수 있으리라. 칸트는 철학의 통과의례다.

(P.17)

우리가 한 사람의 삶을. 그리고 그의 사유를 이해하는 데 진정으로 필요한 것으로 무엇일까? 소크라테스는 칼리클레스라는 젊은이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가 상대방의 영혼을 이해하고 그 삶의 태도가 정당한지 충분히 살펴보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자네는 그것을 모두 갖추고 있네. 즉 지식과 호의와 솔직함이 그것이네” (플라톤,『고르기아스』). 우리가 이해하려는 사람이 만일 철학자라면. 더구나 칸트와 같이 위대한 철학자라면 이 말은 더욱 타당하다.『순수이성비판』을 단 한 번이라도 펼쳐본 사람이라면 칸트라는 철학자를 이해하기 위해서 아주 많은 사전 지식이 필요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지식이 아니다. 우리가 낯선 영혼을 이해하기 위해 정말 그렇게 많은사전 정보가 필요하다면 이미 그 정보로 인해서 그 영혼은 우리에게 더 이상 낯설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 영혼을 이해하려던 시도 자체가 부질없이 되고 만다. 우리가 우리의 한 부분처럼 익숙해져 전혀 놀라울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 존재를 이해하려고 왜 그토록 수고로이 움직이겠는가? 무엇을 알기 위해서 좀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감정은 소크라테스가 마지막 조건으로 꼽았던 솔직함의 부족에서 비롯된다.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흉금을 털어놓고 솔직하게 말하는 면이 부족한 사람은 필요 이상으로 소심하고 모든 문제를 어렵게 생각하는 법이라고.

지식에 관해서라면 우리는 칸트가 자신의 철학을 이해시키기 위해 그의 학생들에게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칸트를 끝까지 읽기 위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솔직함이다. 한 철학자의 견고한 사유체계가 우리의 사유체계 속에 쉽게 녹이들기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이 거장의 글을 읽는 내내 우리를 밀쳐내는 굉장한 저항을 느낀다. 그러나 어떠랴! 고분고분하지 않은 글을 쓰는 것은 우리 모두의 꿈이기도 한 것을. 그러므로 누군가 칸트를 읽을 수 없다면 그것은 단 한 가지 이유 에서이다. 그는 이 철학자에게 호감이 부족한 것이다. 매혹된 영혼에게 저항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P.18)

​​

계몽을 칸트의 용어로 선명하게 정의해 보자. “계몽이란 우리가 마땅히 스스로 책임져야 할 미성년의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대한 답변」). 여기서 칸트는 근대 이전의 역사 전체를 미성년이라고 규정한다. 미성년이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지신의 이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지금까지 인류는 교회나 봉건 영주의 율법에 따르는 예속의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다. 칸트는 근대철학자로서 근대인이 미성년의 상태에서 벗어날 것을, 즉 계몽될 것을 권고 한다. 그렇다면 인류는 미성년 상태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그는 “미성년의 원인이 이성의 결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사람의 지도 없이도 이성을 시용할 수 있는 결단과 용기의 결핍에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계몽의 모토는 다음과 같다. "감히 알려고 하라(Sapere aude)! 너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우리가 칸트를 근대철학자로 규정할 때 그것은 칸트가 미성년에서 벗어나 스스로 이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지려는 계몽의 정조를 가 지고 철학적 작업을 수행했던 철학자라는 점을 의미한다. 특히 그의 비판서 시리즈는 그가 '계몽' 이라는 근대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얼마나 철저하게 해답을 모색했는지를 잘 드러내준다. 이미 우리는 칸트가 계몽의 문제의식 아래 세 가지 방식으로 물음을 제기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순수이성비판』은 그 중에서도'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라는 첫번째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쓰여진 책이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답하는 책이 바로『실천이성비판』이다. 나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이 마지막 물음세 충실히 답하기 위해『판단력비판』과 많은 역사, 종교철학의 저작들이 쓰여졌다.

(P.38)

칸트는 이성이 무엇인가를 입법할 수 있는 능력, 즉 외재적으로 주어진 율법 대신 내재적으로 고유한 법칙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임을 증명하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선험성에 대한 두 가지 테제(내재적, 입법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선험적'이란 단어의 뜻은 분명하지 않다. 여기서는 선험적인 것은 필연적으로 내재적이고 입법적이리는 점만을 분명히 해두고 넘어가자.

(P.42)

라이프니츠는 인식의 객관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본유관념(생득관념. innate idea)을 상정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절대적으로 가지고 있는 관념으로서 모두에게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다. 본유관념은 다른 설명 없이도 그 자체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절대적이고 단순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라이프니츠가 보기에 절대적 단순개념은 미리 주어진 인식의 기본전제이어야만 한다. 단순개념이 본유적으로 주어져 있어야 하고 이것을 토대로 해서만 사림들은 자신만의 주관적 관념이 아닌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객관적 지식들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즉 단순개념들은 우리가 인식하고 서로 소통하기 위한 일종의 사유의 알파벳과 같은 것이다. 또한 우리가 지닌 단순개념들은 인간 전체가 공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의부의 대상과 일치한다. 신이 모든 것이 일치하도록 미리 예정해 놓았기 때문이다(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 본유관념과 예정 조화설 덕택에 라이프니츠는 인식의 객관성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문제해결방식이 산뜻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른 문제를 뒤에 감추고 있었다. 칸트가 올바르게 지적했듯 예정조화는 “철학이 생각해낸 것 가운데 가장 기묘한 허구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 예정조화는 논증할 수도 반증할 수도 없다는 점에서 독단론이며, 인간의 주어진 조건 이외에 신의 존재를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너무 종교적이었다.

(P.45)​

영국 경험론자들 중 로크와 흄은『순수이성비판』에서 중요하게 거론되는 철학자다. 로크와 같은 영국의 경험론자는 라이프니츠보다 훨씬 모던한 사상가였다. 그는 라이프니츠와 달리 철저하게 인간적인 것들의 한계 내에서 사고하려고 노력했다. 사실상 그는 합리론의 시초였던 데카르트 철학에 대한 여러 가지 불만에서 철학을 시작하였다. 그는 합리론자들이 말하는 이성의 본유관념을 중세 스콜라철학의 잔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본유관념 없이 인간이 진리를 획득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해 골몰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인간 정신에는 본유관념 따위는 없다. 인간의 정신은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석판과 같은 상태로 태어난다. 그렇다면 어떻게 지식을 획득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경험이다! 경험이라는 분필로 우리는 석판에 쓰기 시작하는 것이다.

로크가 말하는 인간 사유의 알파벳은 단순관념(simple idea)이다. 그런데 이 단순관념은 이성에 의해 주어지는 것. 즉 라이프니츠와 같은 합리론지들의 생각처럼 본유적인 것이 아니라 경험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노랑'이나 '뜨거움' 같은 것이 단순관 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경험적인 단순관념들을 합성해서 우리는 보다 복잡한 복합관념(complex idea)으로 나아가며 지식의 체계를 형성할 수 있다.

(P.46)​

흄은 23세가 되던 1734년 무렵부터『인간본성론』(1740년 출간) 이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은 매우 충격적인 주장을 담고 있었다. 우 리는 어느 것에 관해서도 객관적 인식을 가질 수 없다! 로크의 경우 경험에서 인식의 근거를 찾았을 뿐 객관적 인식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흄은 객관적 인식의 불가능성을 강변했다. 흄의 주장은 철학자들에게는 마치 철학의 종말처럼, 철학 자체를 벼랑으로 내모는 행위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인간은 아무런 객관성도 가질 수 없다'는. 속어도 비어도 한 마디 섞이지 않은 얌전하고 신사적인 이 문장이 어째서 그토록 과격한 것일까? 철학이란 본디 객관적 지식을 주장하는 학문들에 대해 그것들이 진정 객관성을 갖추 있는지를 따져 묻는 학문이다. 특히 근대철학은 어느 시기의 철학보다도 오직 객관성에 대한 들뜬 사랑으로 다른 모든 중요한 철학적 문제들을 잊어버릴 만큼 객관성을 추구했다. 그리고 다른 것들이 제각기 지녔다고 주장하는 객관성의 정도를 평가하며 객관성의 심판관을 자처해 오던 터였다. 우리는 신 없이도 혹은 신이 아주 조금만 도와 주면 객관적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 이것이 근대철학의 프라이드였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흄의 주장은 근대철힉에게는 사형선고와 다름이 없었다.

(P.47)​

칸트는 그 충격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흄으로 인해 독단의 짐에서 깨어났다!" 잠에서 깨어나긴 했지만 거기는 철학자가 있기에 는 너무 추운 방이었다. 따라서 칸트는 어떻게든 사유의 부싯돌을 가지고 새로운 불을 피워야 했다. 어떻게 독단론을 피해가면서도 경험론의 아포리아(aporia. 막다른 골목)에 부딪치지 않을 것인가? 칸트는 먼저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라이프니츠는 말했다. 우리는 전부 다 알 수 있다.' 이건 과도한 자신감이다. 흄은 말했다. '우리는 아무것 도 알 수 없다. 이건 과도한 절망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물어야 겠다.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는지 그리고 또 무엇을 알 수 없는지 따져 묻자. 그리하여 이성의 능력을 검토하고 인식의 한계를 확실히 밝히자. 이로써 그는 이른바 선험철학이라는 새로운 철학의 흐름을 만들게 된다.

(P.49)

​​

위대한 연설가가 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조언이 있다. “처음 1분이 기장 중요하다. 그 1분 인에 청중을 매혹시키지 못하면 좋은 연설은 불가능하다." 위대한 저자가 되려는 이들에게도 똑같은 조언이 기능 할 것이다. 모든 위대한 저술들은 처음 몇 줄만으로도 인생에 지위질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순수이성비판』서문의 첫 구절 또한 그렇다.

인간의 이성은 자신이 하는 어떤 종류의 인식에 있어서는 다음과 같은 특수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 즉 인간의 이성은 자신이 거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대답할 수도 없는 문제로 괴로워하는 운명이다. 거부할 수 없는 문제가 이성 자체의 본성에 의해서 이성에 부여되어 있기 때문이요. 대답할 수 없음은 그 문제가 인간 이성의 모든능력 있기 때문이다.(A Ⅶ)

많은 이들이 첫 구절에서『순수이성비판』을 독파해야 할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을 느꼈다고들 한다. 칸트철학에 딴지를 걸기로 작정한 헤겔이 가장 먼저 비판해야겠다고 결심한 것도 이 첫 구절이었다. 헤겔은 인간이 대답할 수 없는 문제를 자신에게 부과한다는 것은 일종의 궤변이라고 비난했다.『순수이성비판』의 서문은 칸트의 옹호자 이든 비판자이든 그 글을 읽어기는 사람들을 자극하는 문장으로 가득 하다. 거기에는 저자의 핵심적 문제의식을 풍부하게 드러내주는 내용들이 담겨 있다.『순수이성비판』의「서론」(Einleitung)도 마찬가지다. 칸트철학의 문제의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개념으로서 언급되는 코페르니쿠스적인 '사고 방식의 전환' (B WI)이 서문에 담겨 있다면 '선험적 종합판단은 어떻게 가능한가?' 리는 칸트철학의 가장 중요한 물음은「서론」속에 담겨 있다.

인간 이성의 특수한 운명. 그것은 형이상학의 싸움터(B XV)에 뛰어들면서 칸트가 던진 첫 마디였다. 경험론자와 합리론자들의 대립, 흄이라는 혁명적 회의론자의 등장으로 칸트가 철학을 하던 시기의 사상계는 그 어느 때보다도 아수라장이었다. 이 철학적 아수라장에 뛰어들면서 칸트는 "쯧쯧 이 한심한 놈들. 다 들렸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그 싸움터에서 선배나 동료철학자들의 개인적 오류 대신 '인간 이성의 특수한 운명' 을 발견했다. 그가 보기에 인간 이성에는 피할 수 없는 곤경이 존재한다. 철학사에서 계속 등장했던 영혼의 불멸성이나 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은 이성의 성향상 물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것은 이성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성이 자신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는 곤경은 왜 발생할까? 이성은 늘 원칙을 사용해서 경험을 요리한다. 그런데 이 원칙들 을 쓰다 보면 경험적 사실들에만 국한하여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꾸 경험적 사실들을 넘어선 것들에 적용하는 일이 생겨버린다. 칸트는 이 때문에 형이상학이 경험적으로는 증명할 수 없는 주장에 대해서 제각기 고집을 부리며 소리 높여 싸우는 전쟁터로 변모했다고 탄식 한다.

(P.58)

그렇다면 이성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성은 일종의 능력이다. 칸트는 이성을 한 가지 능력이 아니라 관심에 따라 각기 달리 발휘되는 여러 가지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다루는『순수이성비판』에서는 이성의 능력이 인식하는 능력으로 드러난다. 이성은 실천적 관심을 가질 경우엔 실천능력이지만. 이 책에서는 주로 사변적 관심을 가진 인식능력으로서의 이성의 면모가 밝혀진다. 그래서『순수이성비판』의 핵심문제는 한 마디로 외적 권위에 호소함 없이 이성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인식능력이 무엇인가(혹은 그런 인식능력은 어떻게 가능한 가)를 해명하는 것이었다.

외적 권위에 호소하지 않는 선험철학의 모토에 충실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으로부터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 우리에게 가장 먼저 분명하게 주어져 있는 것은 표상(Vorstellung)이 다. 표상이라는 단어는 원래 독일어에는 없었는데, 로크의 책이 독일에 번역되면서 만들어졌다. 로크가 사용한 관념(idea)이리는 단어를 독일어로 옮긴 것이 표상이다. 우리가 외부 세계를 인식할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을 그 세계에 대한 관념(표상)이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관념을 직접적으로 느끼고 그것이 주어져 있다는 것을 확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 밖에 있는 세계가 우리의 관념과 정말 똑같은지 그렇지 않은지는 확신할 수 없다.

(P.62)

​​​

선천적 종합판단이란 우리의 인식능력이 대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우리의 인식능력이 지닌 법칙을 따른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선천적인 것이 보편적 • 필연적인 것이라는 말은 달리 말하면 경험에는 없는 보편성과 필연성이 어디로부터인가 주어진다는 뜻이다.

칸트의 핵심주장은 이러하다. 우리의 인식능력이 요구하는 대로 대상은 따라올 뿐이다. 그런데 우리의 인식능력은 기분내키는 대로, 멋대로 대상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법칙에 따라 작용한다. 그 인식능력의 고유한 법칙 때문에 보편성과 필연성 이 생겨나는 것이다. 칸트에게 인식능력은 대상을 거울처럼 그대로 반영하는 능력이 아니라 인식의 법칙에 맞게 구성하여 보여주는 능력이었다. 칸트는 대상이 인식능력의 고유한 법칙에 따른다는 것. 달리 말하면 우리가 대상에 대해 입법성을 지닌 자이며 명령하는 자라는 자신의 독장적인 통찰을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적 사유에 비교한다. 그는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이 혁명적인 만큼이나 인식능력이 대상을 따른다는 기존 견해에서 탈피하여 대상이 인식능력을 따른다고 주장한 자기의 견해가 혁명적이리는 점을 스스로 깨달았던 것이다.

(P.69)​

​​

감성과 오성의 능력들은 각각 고유한 선천적 형식을 갖는다. 감성의 경우 선천적 형식은 시간과 공간이다. 오성의 경우 그 선천적 형식은 열두 개의 범주이다. 우리는 감성과 오성 능력이 각각의 고유한 형식에 따라 작용함으로써 선천적 종합판단을 가지게 된다. 쉽게 표현해서 이 말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을 사용하지 않고는, 그리고 우성의 열두 개 범주를 사용하지 않고는, 우리는 결코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뜻이다. 칸트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을 한 마디로 직관이라고 표현하고, 열두 개의 순수한 개념 형식을 범주라고 표현한다.

감성의 직관형식 : 시간과 공간

오성의 범주형식 : 12범주 12개의 판단형식에서 도출

이같은 『순수이성비판』에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개의 중요한 제목 아래 설명되고 있다. 감성의 형식을 다루는 선험적 감성론과 오성의 형식을 다루는 선험적 논리학, 칸트의 표현에 따르자면 "인간의 인식에는 두 개의 줄기만이 있고, 이 두 줄기는 아마도 하나의 공통적인, 그러나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뿌리에서 발생한다. 이 두 줄기는 감성과 오성이며, 감성에 의해서 대상들은 우리에게 주어지고 오성에 의해서 대상들은 우리에게 사유된다."

<인식 나무의 두 줄기>

① 첫번째 줄기 : 감성 - 『순수이성비판』의 선험적 감성론에서 다뤄진다.

② 두번째 줄기 : 오성 - 『순수이성비판』의 선험적 논리학에서 다뤄진다.

(P.72)

(인식의 첫번째 줄기 - 감성)

『순수이성비판』을 펼쳐보면 선험적 감성론은 "Transzendentale Ästhetik"라고 쓰여져 있다. 칸트의 사용법에 가깝게 라틴어 단어로 표현하면 Ästhetik은 'perzeption'(지각)이다. 이 라틴어 표현은 우리가 조금 뒤에 보게 될 선험적 논리학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역시 조금 뒤에 소개될 통각(Apperzeption)은 선험적 논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서 바로 이 'perzeption'에 접두사를 붙여 만든 말이다.

지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두워질 무렵 고개를 숙여 작은 풀잎을 뜨고 그 주변의 흙 냄새를 맡고 먼 마을의 종소리를 듣고 고개 를 들어 내 얼굴로 불어오는 저녁바람을 느끼고 오른손에 쥔 과일의 새콤달콤함을 맛보는 것. 이처럼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 오감을 통해 지각하는 능력을 칸트는 한 마디로 감성 (Sinniichkeit)이라 고한다.

그러나 이런 감성만으로는 인식이 성립하지 않는다. 오른손에 쥔 이 과일을 사과라고 내가 인식하는 것은 오감의 능력만으로 가능 하지는 않다는 뜻이다. 달콤함, 붉은색. 둥그런 모양, 신선한 과일 향 기, 매끄러움 등 주어진 질료를 가지고 사과라는 개념을 형성하는 오성능력이 있어야만 인식이 성립한다. 인간의 인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감성과 오성이 함께 작용해야 히는 것이다.

인간의 인식은 두 능력의 종합적 작용이므로 우리의 경험 속에서 감성과 오성이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감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일단 감성을 오성과 분리하는 일이 필요하다. 선험적 감성론에서는 우선 감성을 고립시키는 작업이 이루어진다. 칸 트는 우리의 인식에서 오성이 행하는 개념적 활동을 제거해 본다. 내가 손에 쥔 이 과일에서 사과라는 개념을 제거한후에 남는 달콤함. 붉은색 , 둥긂 등을 칸트는 경험적 직관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경험적 직관에서 또 한번의 제거작업을 해야 한다. 인식 가능성과 관련된 원리를 도출하려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기 때문에 경험적 측면이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경험적 직관들에서 감각된 모든 것을 분리함으로써 직관의 경험적 측면을 제거하고 나면 칸트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이 나타난다. 달콤함. 붉은색. 둘긂, 신선한 향기 등의 감각된 것이 제거되면 무엇이 남을까? 그것은 바로 감각할 수 있는 우리들의 능력이다. 즉 경험적 직관에서 경험이 모두 지위지고 나면 남는 것은 순수직관이다. 우리가 시각, 촉각, 후각, 청각, 미각 등의 경험적 오감으로 느끼는 지각들의 근거는 공간과 시간이라는 두 가지 순수형식에 있다.

감성능력의 원리 ① 외적 직관능력인 공간(외감)

② 내적 직관능력인 시간(내감)

(P.75)

​​

인간은 감성적 직관을 가진다. 직관(Anschauung)은 보다 (schauen)에서 생겨난 말로, 신적인 직관은 간단히 말해 신이 어떤 사물을 보는 것이다. 이때 사물은 신이 바라보는 그대로 존재한다. 칸트식으로 표현하자면 하느님은 물자체를 직관한다. 보는 그대 로 있으니 다른 인식작펑℃1 필요할 리 없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인식 은 직관이면 충분하고 오성의 개념작용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는 뜻인가? 신은 직관할 뿐 사고하지 않는 존재라는 결론은 이상하다. 물론 그런 결론은 잘못되었다. 하느님도 사고한다. 그런데 이 사고가 좀 특이하다.

신이 최초로 사고한 개념은 '빛'이었다. 성경에는 '빛이 있으라'라고 하느님이 명령한 것으로 나와 있지만 사실 명령은 없었다. 단지 하느님은 생각했다(denken). '빛!' 이라고 생각만 했을 뿐인데 빛이 생겼다. 신적인 사고의 특징은 바로 이런 것이다. 빛이라는 개념을 사고하면 빛이 생기고 '땅!' 하고 생각하면 땅이 생긴다. 사고하는 대로 그것에 대응히는 사물이 생긴다. 하느님이 생각하는 대로 사물이 생긴다는 말과 바라보는 대로 사물이 존재한El는 것은 동일하다. 한 마디로 하느님에게서 직관과 오성은 서로 다른 능력이 아니라 하나의 능력이다. 그래서 신적 직관을 오성적 직관이라고 부른다.

인간도 본다. 하지만 아쉽게도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없다.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공간과 시간이라는 우리의 감성을 통해서만 본다. 원래 사물이 어떤 모습인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래도 기를 쓰고 보지만 사물 그 자체를 볼 수 없기에 칸트는 조용히 되뇌인다. '우리의 직관은 정말 눈멀어 제대로 볼 수 없는 것. 맹목적인 것이구나.'

인간도 신처럼 사고한다. 그런데 우리가 '빛', '땅', '하늘', '별'...... 아무리 생객해 봐야 빛, 땅, 하늘, 별이 생겨나지 않는다. 그래서 칸트는 또 독백을 한다.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 인간의 개념 이란 참 공허하구나.' 이로써 “직관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 이라는 철학 역사상 가장 유명한 푸념이 탄생한다. 여기에는 인간은 신적인 직관을 가지지 못한 존재라는 한탄이 들어 있다. 물론 이것이 한탄과 푸념으로 그치는 것은 아니다.

칸트에게 깨달음으로 남은 것은 두 가지이다. 먼저 오성적 직관을 갖지 못한 인간의 경우에는 신과 달리 오성과 직관이 서로 분리되 어 서로 다른 두 가지 인식의 원천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 다른 하나는 인간은 특정한 방식을 통해 서로 다른 능력인 오성과 직관을 결합시킴으로써만 인식을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P.87)

올바른 물음을 던질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홀륭한 하나의 능력이다. 잘못된 물음은 묻는 사람뿐만 아니라 그 잘못된 물음에 진지하게 반응하는 사람 역시 바보로 만든다. 오성이 멋대로 작용하면서 만들어낸 어리석은 질문에 무조건 답하려 한다면 구멍난 체로 숫염소의 젖을 받으려는 바보와 다를 바 없다. 제기된 모든 문제를 심각하게 숙고하기 전에 문제 자체가 답할 가치가 있는 것인지 숙고해 보아야 한다. 따라서 칸트는 분석론에서 먼저 오성이 안전하게 활동할 수 있는 인식의 울타리를 정한다. 그럼으로써 거짓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을 사전에 봉쇄한다. 그리고 변증론에서 오성이 멋대로 작용할 경우에 발생하는 거짓문제들을 살피고 이 문제들을 제거함으로써 철학사에서 거품처럼 부풀어 있는 거짓문제들을 말끔히 없애버린다.

칸트는 직관의 제한 없이 멋대로 행동하는 오성의 개념작용을 분석론의 오성(Verstand)과 구별하여 이성(Vernunft)이라고 부른다. 그는 분석론에서는 오성의 작용을 살피는 데 반해 변증론에서는 이성의 작용을 살핀다. 그가『순수이성비판』에서 주된 관심을 가지고 다루는 것은 올바른 인식활동을 하는 오성능력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 때문에 그 책의 진정한 제목은『순수오성비판』이리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P.91)

칸트는 철학의 고유한 재판소를 세우는 일을 일생의 과업으로 심았다. 칸트는 신적인 하늘과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땅 그 사이에서 인간의 자리가 어디인지를 묻고 싶어 했다. 철학의 고유한 재판소 설립은 그러한 인간의 자리를 마련하려는 시도와 관련이 있다. 인간의 이성은 신의 심판도, 경험이라는 배심원의 판결도 없는 자기만의 고유한 법정을 세워야 한다. 이성에 의한. 이성을 위한. 이성에 대한 재판소. 우리가 그런 재판소를 가지게 될 때만 우리는 신과 자연 사이에서 인간의 고유한 자리를 찾게 될 것이다. 이것만이 철학이 할 일이다. 칸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칸트가 세운 이성의 법정에서 최초로 담당한 사건은 무엇일까? 그는 이성의 법정에서 우리가 절대적 진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들을 모두 소환해서 그것들의 정당성을 검사하고 심판하려고 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의 진리 주장을 법정으로 부르기 전에 반드시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법관 자신의 정당성 여부다.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사건을 맡은 법관이 그 사건을 맡을 만한 자격이 있는지를 상급 법원에서 검사하는 것이 처음으로 할 중요한일이다.

마찬가지로 이성의 법정에 처음으로 출두하여 이성의 검사를 받는 것은 이성 자신이다. 칸트는 이성의 자격을 검사하면서 이전 철학자들이 관심을 가졌던 문제. 즉 이성의 본성이 선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조사하지 않는다. 그가 검사하는 것은 이성의 월권 여부 이다. 형사소송을 맡은 법관이 헌법 재판을 하는 것이 월권이듯 이성이 제가 맡은 인식의 영역을 넘어가는 것은 월권이다. 우리는 이성이 담당하는 영역을 분명하게 밝힘으로써 이성의 월권을 막이야 한다.

법정용어로는 이런 자격요건 심사를 연역(Deduktion)이라고 한다. 칸트는 이성의 연역을 통해 이성을 검사하고 재판하는 절치를 거 치려고 했다.

(P.106)

경험하는 것이 사과이든 오렌지든 각각의 경험 내용에는 언제나 특정한 시간계기와 공간형식을 가진 경험적 직관이 들어간다. 그리고 이런 특정하고 구체적인 경험적 직관이 기능하려면 그것의 근거가 되는 순수직관이 필요하다.

이어서 칸트는 순수한 시간적 계기와 공간적 형식이 어떻게 우리의 구체적인 경험내용 속에서 작용하는지를 설명한다. 사과표상에 는 둥글다 • 빨갛다 • 표면이 매끄럽다 등 다양한 지각들이 하나로 종합되어 있다. 각각의 지각들이 구별된 채로 있으면서 동시에 함께 표상될 수 있어야만 우리는 사과라는 표상을 떠올릴 수 있다. 즉 둘긂 • 빨강• 매끄러움 등은 공간적으로 함께 모이고 시간적으로 동시에 주어져 사과라는 표상을 만든다. 이것을 칸트의 표현으로 고쳐보면 다음과 같다. 시간 • 공간의 형식 속에서 다양한 지각들이 종합적으로 각지(Apprehension. 포착이라고도 번역된다)될 때만 사과라는 표상은 가능하다.

붉음, 둥긂, 매끄러움과 같이 지각된 표상들을 하나로 모으는 종합작용에는 한 가지 곤란한 점이 존재한다. 각기 다른 시간에 공간의 다른 부분을 차지히는 것으로 우리가 지각하는 붉음, 둥긂, 매끄러움을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동시에 모으는 작업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것이다. 우리가 빨간색을 지각하는 순간과 갈색 밑둥을 지각하는 순간은 아주 간발의 치이기는 하지만 서로 다른 순간이다. 빨간색의 공간과 갈색의 공간은 각기 다른 시간에 귀속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서로 다른 공간조각을 모으는 일은 서로 다른 공간을 표상하는 각각의 시간조각들을 모으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한 사물을 공간적으로 표상할 수 있는 가능성은 서로 다른 시간의 조각들을 동시에 모을 수 있는 가능성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칸트는 이런 점에서 시간을 모으는 작용, 즉 종합작용이 가장 근원적인 작용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우리가 2초 전의 시간과 1초 전의 시간, 흘러가버린 시간들을 지금 이 순간에 한꺼번에 모을 수 있다는 말인가? 칸트에 따르면 이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우리의 감관에서 각지(사물을 포착하는 방식)를 통해서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각지가 가능하려면 또 다른 능력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그는 상이한 시간대를 동시(同時)로 만드는 능력. 즉 각지를 가능하게 하는 필수적인 능력으로서 구상력을 제시한다.

(P.111)

칸트는 모든 세상일이 다 그렇듯 범주가 도식화되는 데도 원칙이 있다고 본다. 범주가 네 종류의 도식을 통해 적용되면서 현상들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이들 도식화의 원칙은 현상의 네 가지 원칙, 혹은 경험의 네 가지 원칙이라고도 불린다. 이 원칙들은 다음과 같다.

1. 직관의 공리

2. 지각의 예견

3. 경험의 유추

4. 경험적 사고일반의 요청

칸트는 앞의 두 원칙을 수학적 원칙이라고 부르고 나머지 두 원칙을 역학적 원칙이라고 부른다. 흄에 따르면 경험현상에는 어떤 필연성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경험에는 아무런 학문적 의미가 없었다. 이런 흄의 회의주의에 대항하는 최종적 반격으로 칸트는 선험적 원칙을 들고 나온 다. 감성과 오성의 선천적 형식이 있고 그 형식들이 적용될 때 따르는 선험적 원칙들이 있다!

(P.132)

칸트가 이 복잡미묘한 논의들 속에서 궁극적으로 주장하려는 것은 오성이 범주를 직관에 적용시킬 때에만 객관적 인식이 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이때 범주의 적용을 위해서는 반드시 구상력이 산출한 도식과 더불어 네 가지의 원칙들(직관의 공리. 지각의 예견. 경험의 유추. 경험적 사고 일반의 요청)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도식과 원칙들은 범주라는 인식의 씨앗이 싹트는 데 반드시 수반되어야 할 적정 온도와 습도라고나 할까. 우리의 인식은 물자체라는 대지에 직접 뿌리내릴 수는 없지만 시공이라는 모종삽으로 흙(직관의 내용들)을 퍼담은 작은 회분 속에서 싹을 틔우려 애쓰는 식물에 비유될 수 있다.

구상력은 본성상 다른 직관과 범주를 연결해 주는 도식을 산출 한다는 점에서 인식과정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심오하 고 신비한 능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상력이 도식을 산출하는 것은 오성이 범주를 통해 활동하기 시작할 때뿐이다. 만일 구상력이 오성의 명령 없이 제멋대로 도식을 산출한다면 그때는 인식의 과정에 참여하는 능력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인식과정에서 오성이 내리는 규정과 명령에 따라서만 활동해야 하는 구상력의 처지는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오성이 '규정하는자'가 될 때. 바로 그때에만 구상력은 도식을 산출하는 능력으로 '규정' 된다.” (들뢰즈.『칸트의 비판철학』. 40쪽)

(P.139)​

판단력은 직관의 다양한 자료들이 오성의 보편적인 개념 아래 포함되는지를 판정하는 능력이다. 칸트는 판단력의 중요성을 매우 강요한다.

판단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첫째. 이미 보편적인 개념이 주어져 우리가 구체적인 사례들을 그 개념에 따라 판단하는 경우. 이런 경우에는 원래 있는 개념에 따라 개별적 사례들을 규정하기만 하면 되므로 규정적 판단력이라고 부른다. 둘째. 개념은 없고 우리가 난생 처음 만나는 개별적 시해를 판단하기 위해서 보편적인 개념을 형성해야 하는 경우. 이런 경우에는 개별 사례를 보면서 아직 규정되지 않은 보편개념을 찾아가는 '반성' 의 직업이 요구되므로 반성적 판단력이라고 부른다 (P.141)

​ 많은 현대철학지들은 반성적 판단력의 정의에 커다란 매력을 느낀다. 우리가 정작 판단력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이미 보편적인 정보가 주어져 있어 그에 맞추어 개별 사례를 적용시켜야 하는 상황이라기보다는 아무런 정보도 없이 완전히 새로운 판단을 내려야 하는 그런 당황스러운 상횡이기 때문이다. 즉 삶에서 판단이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경우는 개별적 사례를 통해서 새로운 개념을 창조해야 하는 상황, 반성적 판단력이 요청되는 상황이다. 그래서 한나 아렌트와 같은 정치철학자는 반성적 판단력에서 정치적 사고의 모델을 모색하며『판단력비판』에 대한 정치철학적 독해를 시도하기도 한다.

(P.143)

지금까지 우리가 함께 읽어나간 것은 오성과 감성이라는 선천적 인식능력들의 작용을 분석하고 있는『순수이성비판』의 '선험적 분석론' 이었다. 칸트는 '선험적 분적론' 에 이어 '선험적 변증론'에서 이성의 작용을 다룬다. 오성이 판단하는 능력이라면 이성은 추리하는 능력이다. 이성(Vernunft) 오성의 통제권 아래서 작용할 때는 인식의 확장과 통일에 도움을 주는 아주 유용한 인식능력이다. 감성의 다양함에 오성이 통일성을 부여했듯이 이성은 오성의 다양한 판단들에 통일성을 부여함으로써 인식을 확장하는 데 기여한다. 이것을 칸트는 '이성의 통일' (Vernunfteinheit)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문제는 이성이 자꾸 오성에 통일을 부여하는 역할을 넘어 물자체로 진입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이성은 입법자가 되어 물자 체를 인식하려고 하는데. 이는 이성 자신이 추리하며 생각하는 것이 생각한 그대로 현실에 존재한다고 믿는다는 말과 같다.

(P.146)

경험적으로만 사용하는 원칙 - 오성의 내재적 사용

경험의 제한을 철폐하는 원칙 - 오성의 초험적 사용

초험적 사용을 통해 생긴 선험적 가상은 비판을 통해 사라지지 않는다. 비판을 통해 선험적 가상을 제거할 수 없다면 도대체 선험적 변증론이 왜 필요할까? 우리는 물 속에서 구부러진 젓가락이 착시현상임을 알지만 우리의 눈에는 여전히 구부러진 것으로 보인다. 감각기관의 이런 착각처럼 오성의 착각도 그것이 착각임을 안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눈의 착시가 자연스러운 것처럼 오성 의 착각도 우리의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소질의 산물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제거할 수는 없고 판단을 내릴 때 속지 않도록 하는 것 선험적 변증론의 역할이다.

우리가 물에서 구부러진 젓가락을 보고 그것에 속아 젓가락이 구부러졌다는 판단을 내리지 않기 위해서는 눈이 그런 착각을 일으 키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칸트는 오성의 착각에 속지 않기 위해 오성의 착각이 발생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것은 이미 말했 듯 오성의 본성에서 기인한다. 오성은 규칙들을 사용해서 현상들을 통일하는 능력이며 동시에 자신의 규칙들을 원리들을 사용하여 통일하려는 추리능력이다. 이렇게 오성의 능력이 추리능력으로 사용될 때 오성은 이성이라고 불린다. 그러니까 칸트가 말하는 선험적 변증론에서 거론하는 이성은 오성과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인식능력이라기 보다는 추리능력이라는 특수한 사용방식을 의미한다. 이성은 경험이나 대상에 직접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오성이 작업한 산물들을 재가공하여 경험의 보다 높은 통일성을 만들어낸다. 이때 재가공 작업이란 물론 추리작업을 의미한다.

(P.153)

​​​

선험적 관념론은 사물이 단지 우리의 표상이며 우리가 보는 그대로 사물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선험적 관 념론에 대립하는 것은 선험적 실재론이다. 선험적 실재론은 우리들의 감성과 무관하게 사물들이 존재한다고 본다. 공간을 예로 들어보자. 선험적 관념론자에게 공간은 감성의 형식이고 감성 밖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선험적 실재론자는 감성과 상관 없이 공간의 실제로 존재한다고 본다. 언뜻 듣기에 선험적 실재론은 우리의 상식적 견해인 경험적 실재론과 유사한 듯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선험적 실재론자는 나중에는 경험적 관념론자 노릇을 한다. 왜 그럴까? 우리는 인식과 상관없이 공간과 사물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말을 눈을 감고 있는 동안에도 우리가 감각한 그대로 세상이 존재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선험적 실재론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감성과 상관없이' 이다. 선험적 실재론에서는 감성과 상관없이 세계가 존재하므로 우리가 감각하는 대로 세계와 사물이 있다고 말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

그러니까 선험적 실재론의 주장은 눈을 감을 때도 세계가 그대로 있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눈을 뜨고 있어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장님이라는 소리이다. “우리가 눈뜬 장님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공간의 실재성을 주장할 수 있소?”라고 선험적 실재론자에게 묻는다면 그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공간은 물론 있지요. 그건 감성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이성의 순수한 눈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이라오." 결국 선험적 실재론에서 실재론은 우리가 감각한 대로 세상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사유한 대로 세상이 있다는 의미에서의 실재론이다. 그러므로 감각을 통한 우리의 모든 경험은 환상이며 결코 믿을 수 없다. 감성에 대한 불신 때문에 선험적 실재론자는 경험적 관념론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P.172)

도대체 실재한다는 건 무엇일까? 칸트는 선배 철학자들이 사용하던 관념론의 정의만 바꾸어놓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실재론의 정의 역시 완전히 바꿔놓았다. 실재론의 전통적 용법으로 보자면 칸트의 경험적 실재론이란 우리의 표상이 표상이라고 해서 헛된 환상이라고 치부할 필요는 없고 그 표상도 충분히 보편타당하게 볼 수 있다는 주장에 불과할 뿐, 실재 그 자체에 대해서는 말하는 바가 없다. 오히려 사물 그 자체, 즉 물자체는 알 수 없다고 한 점에서 보자면 그의 주장은 반 (反)실재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세계의 실재성에 대해 대답해야 할 자리에서 계속 보편타당성만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이 철학자는 혹시 사오정 아닐까? 물음을 잘못 알아듣고 엉뚱한 대답을 계속하니 말이다. 그러나 잘못된 것으로 들리는 이 대답에 바로 칸트의 위대성이 숨어 있다. 그는 전혀 다른 대답을 통해 새로운 질문의 지평을 열어 놓은 것이다. 칸트의 대답을 들으며 우리는 실재성의 정의를 다시 한번 묻게 된다. 도대체 있다는 것은 뭘까? 그리고 없다는 것은? 못을 박으려고 망치를 찾는다고 하자. 집에는 망치가 없다. 그때 우리는 '망치가 없네” 라고 말한다. 물론 철물점에 가면 망 치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에 망치가 없다고 말할 때 우리가 잘못 말한 것은 아니다. 망치가 있다는 말과 망치가 없다는 말 모두가 참이라는 것은 말 자체로는 모순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순에 빠지지 않는다. 있다는 말과 없다는 말을 특정한 조건 하에서 사용하기 때문이다. 집에 망치가 없다는 것은 지금 곧 사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손에 집히는 곳에 그 사물이 있지는 않다는 뜻이다. 망치가 있다고 할 때도 비슷하다. 망치는 지금은 쓸 수 있는 방식으로 내 앞에 있지만 내일이 되어 누군가 훔쳐갈 수도 있고 시간이 지나면 녹슬고 부서져 없어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망치가 있다고 말하는 데 어떤 어려움도 느끼지 않는다.

이것은 실재성 개념이 어떤 조건 아래에서 어떻게 정의되느냐에 띠라 매우 상이하게 쓰일 수 있는 것이고, 또 그렇게 쓰일 때 비로소 의미있음을 보여준다.

​(P.176)

『순수이성비판』은 커다란 두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먼저 선험적 감성론. 선험적 논리학은 모두 선험적 원리론에 속한 것이었다. 오성의 범주와 원칙들의 분석. 그리고 조금 전까지 살펴본 선험적 변증론은 다시 선험적 논리학에 서술되어 있는 부분이었다. 선험적 변증론을 마지막으로 해서 선험적 원리론이 끝나고 또 하나의 부분인 선험적 방법론이 시작된다. 칸트철학의 논리적 체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첫번째 부분인 선험적 원리론을 읽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철학자로서 그의 고유한 문제의식, 그의 소망과 욕구를 알고 싶다면 선험적 방법론을 읽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아는 한 칸트 연구자는『순수이성비판』 선험적 방법론을 무협지처럼 흥미진진하다고도 표현했다. 선험적 방법론은 선험적 원리론과 달리 읽기가 어렵지 않다. 선험적 방법론에 나타난 많은 것들, 칸트와 그의 동시대인들이 철학이라는 이름 하에 상상했던 것, 선배철학자들에 대한 솔직한 평가, 예컨대 흄에 대한 칸트의 엄청난 애정고백을 보면서 우리는 그의 숨결을 아주 가까이서 느낄 수 있다.​

​(P.201)

선험적 변증론에서 칸트는 이성이 자아, 세계, 신에 대한 피할 수 없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환상이 우리의 과 학적 경험세계를 침범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경험적 현상세계의 지위를 확고히 하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일련의 언급들을 통해 칸트의 후배철학자들은 선험철학의 핵심이 '구성'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피히테가 말했듯이 대상에 대한 인식은 우리가 구성하는 것이며. 인간의 창조적 활동능력의 산물이다. 달리 말해서 현상세계 역시 우리의 불가피한 그러나 창조적인 하나의 환상에 불과 하다.

쇼펜하우어 역시 칸트에 대해 비슷한 결론을 내린다. 현상은 마야의 베일(the veil of Maya)이다. 쇼펜하우어의 작품을 읽으면서 칸 트에 대한 관심을 키웠던 니체도 마찬가지였다. 경험세계는 우리가 생리적, 본능적, 사회•역사적 차원에서 구성해낸 일종의 퍼스펙티브(perspective. 관점 • 전망)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결론에 머물렀다면 니체는 칸트의 이류에 불과했을 것이다. 니체는 하나의 보편적이고 일반적 환상이 아니라 우리의 활동에 의해 무한히 증식히는 흰상들, 니체 자신의 용어로는 수많은 퍼스펙티브의 생산이 기능하며 생의 고양을 위해 이런 생산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단언한다. 그러한 단언으로써 그는 칸트의 영토 밖으로의 위대한 첫발을 내딛었다.

니체는 칸트의 환상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칸트적 환상의 빈곤함에 반대한다. 니체가 보기에 이 빈곤함은 칸트의 실체성 애호 취향 에서 비롯된 것이다. 회의주의에 대한 공포에 떨며 인식의 확실하고 견고한 지반을 찾는 데 깊은 관심을 가졌던 칸트로서는 그런 취향이 어쩔 수 없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든 칸트에게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사유형식, 개별적 경험의 변덕이나 변화 속에서 독립성을 견지할 수 있는 안전한 사유형식이 필요했다. 즉 그에게는 사람들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단 하나의 환상이 필요했다. 니체가 칸트를 불임의 철학자라고 비난했던 이유는 그 때문이다. 무한히 창조적인 생신능력을 가진 우리가 왜 아이를 하나만 낳아야 하는가? 왜 하나의 환상만을 고수해야 하는가? 하나의 환상만을 고수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풍경을 담고 있을 수많은 창들이 달린 성채에 살면서 창문 하나만 열어두고 같은 거리풍경을 매일 바라보는 것처럼 지루 하고 어리석은 일이다. 니체는 환상이 아니라 환상들을 무한히 다양한 방향으로 열린 수많은 창들을 원했다.

(P.2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잃어버린 은띠를 찾아서

발터 뫼르스 / 이광일 / 들녘 / 950쪽

(2018.7.8.)

루모는 잠시 멈춰 서서 털가죽에 쏟아지는 햇살을 즐겼다. 실눈을 뜨고 눈부신 햇살을 바라보다가 이내 눈을 감았다. 거기에 다시 나타난 것은 세상이었다. 눈을 감으면 세상은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그것은 냄새의 세계로, 그의 내면의 눈앞에서 수백 가지 색채로 산들거렸다. 붉고, 노랗고, 푸르고, 파란 빛으로 된 가는 빛줄기들이 뒤죽박죽이 되어 펄럭인다. 푸른빛은 그 옆으로 우거진 풍성한 로즈메리 덤불로 이어졌고, 노란빛은 맛 좋은 레몬과자로 이어졌고 붉은빛은 건초더미를 은은히 태우는 연기로 이어졌다. 파랑은 가까운 바다 와 냄새를 실어 오는 신선한 아침 바람이었다. 그러고도 다른 많고 많은 색채가 있었다. 늪돼지들이 뒹구는 진창의 갈색 깃발처럼 흉하고 더러운 색체도 있었다. 그러나 루모가 정말 놀란 것은 전에는 결코 맡아보지 못한 어떤 색깔이었다. 이 모든 지상의 냄새 위로 서 높은 곳에서 은빛 띠 하나가 필력이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얇고 부드러운 띠였다. 그는 내면의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P.20)

이런 험악한 현실에 이제 볼퍼팅어 젖먹이가 끌려 들어온 것이다. 녀석은 아직도 네 발로 다니고. 말도 할 줄 몰랐고, 가끔 토하기도 했다. 그러나 스마이크는 자기가 기억의 방을 만든 이유를 이 젖먹이가 구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냄새나는 웅덩이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게 해주는 희망을 젖먹이가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꼬마는 이 소름 끼치는 세상에 아직 남아 있는 마지막 희망. 즉 악마바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대변하는 존재였다. 이런 소망에는 이름이 필요하다고. 그런 희망은 명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그는 확신했다. 그는 어찌할까를 그리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그가 유달리 소중하게 여기는 차모니아 카드놀이가 있었다. 이 놀이에서 가장 중요한 카드는 놀이의 이름이기도 한 루모였다. 루모를 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운명에 도전해서 모든 것 - 진짜 모든 것-을 위험에 빠뜨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집채만 한 승리를 약속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루모가 그 이름이 된것이다.

(P.46)

극히 최근에는-그러니까 한 이백 년 전부터- 영웅의 범주가 다시 확장됐다. 영웅이라고 반드시 죽을 필요는 없었다. 영응적 행위가 꼭 전쟁터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예술이나 음악, 문학, 의학 또는 자연과학 분야에서도 충분히 가능했다.

힐데군스트 폰 미텐메츠는 차모니아 작가들 가운데 거장이었고 압둘 나호티갈러 교수는 천재 과학자이자 발명가였고, 콜로포니우 스 레겐샤인은 전설적인 책 사냥꾼으로 부흐하임의 지하묘지에서 실종됐으며, 훌라제프덴더 슈루티는 공포음악을 창시했다. 이들은 영웅이었다! 현대 영웅의 표준을 대표하는 사람들은 피범벅이 된 도끼를 휘두를 필요가 없었다. 애매한 경우에도 잉크를 적신 깃펜이나 지휘봉만으로 충분했다.

이런 대담한 주장을 하면서 하라 선생은 수업을 마쳤다. 루모가 생각하는 영웅은 폴초탄 스마이크의 이야기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 에 전혀 달랐다. 창 대신 바이올린 활을 든 영웅은 아무래도 상상이 가지 않았다.

(P.266)

가우납 62세는 열에 들떠 은귀안의 어린이 책을 넘기다가 한 가지 생각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이어 과대망상적인 비전과 아이디어들이 연쇄반응처럼 터져 나왔다. 가우납 62세의 건축을 향한 꿈, 아름다운 죽음의 극장, 호문켈, 브라호크, 연금술사들의 비법, 어린이 책의 삽화, 지상세계와 지하세계, 그 모두가 하나의 계획으로 녹아들었다. 사악하기는 하지만 탁월한 독창성을 지닌 계획이었다.

가우납 62세는 자문관들과 건축가. 장성, 연금술사. 아름다운 죽음의 극장 총책임자를 소집했다. 그는 햇빛을 받으면서도 일할 수 있 는 호문켈을 동원해 지상세계에 지하세계와 계단으로 연결되는 도시를 건설하고 싶어 했다. 도시는 다 건설하고 나면 그 자리에 남겨 두고 건설인력만 헬로 돌아온다는 구상이었다.

왕의 자문관들은 망연자실해서 서로를 바라보며 맥 빠진 박수를 쳤다. 분명 또 다시 망상이 만들어낸 아이디어로 돈만 잔뜩 날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왕이 한 말은 다 짓고 나서 기다려보자였다. 인내심 많은 눈 백 개 달린 거미처럼 기다려보자. 온 도시가 족속들로 가득 찰 때까지 기다려보자. 그럼 결국은 도시가 가득 찰 것이다. 보통 사람에게 잘 꾸민 도시처럼 매력적인 것도 없을 것이다. 그의 구상은 이런 식이었다.

건축가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되는 얘기였다.

마침내 그 도시가 다 차게 되면 밤에 다들 잠자는 틈을 타서 헬의 군대가 브라호크를 타고 올라가 그곳 주민들을 연금술로 만든 가스로 마비시켜 헬로 끌어온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장성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브라호크를 실전에 투입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브라호크를 통제하는 연금술사들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우납은 또 말하기를, 포로 잡은 노예들은 납 광산이나 하수도 건설 현장, 용광로 무기제조창 등등에서 노동력으로 쓸 수 있다고 말 했다. 그리고 특히 힘이 세고 싸음-을 잘하는 포로는 아름다운 죽음의 극장에 내보내 백성들에게 기쁨을 선사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P.58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 이종인 / 열린책들 / 320쪽

(2018.7.3.)

<노인과 바다>

그는 곧 잠이 들었고 소년 시절에 갔던 아프리카 꿈을 꾸었다. 그는 기다란 황금빛 해안과 하얀 해안들을 보았다. 해안은 너무 희어서 눈을 찔렀다. 높이 솟은 갑과 우뚝한 갈색 산도 보았다. 그는 매일 밤 그 해안에서 지내며 꿈속에서 파도가 노호(怒號)하는 소리를 듣고 원주민들의 배가 그 파도를 뚫고 달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갑판의 타르와 뱃밥 냄새를 맡았고, 아침마다 내륙 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가져다주는 아프리카의 냄새를 맡았다.

그는 내륙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의 냄새를 맡을 즈음이면 으레 잠에서 깨어나 옷을 입고 소년을 깨우러 갔다. 그러나 오늘 밤에는 바람 냄새가 너무 일찍 불어왔고. 그는 자신의 꿈이 아직 한창 진행 중임을 알고서 계속 꿈을 꾸었다. 그는 바다에서 우뚝 솟은 하얀 산봉우리들을 보았고 카나리아 군도의 여러 다른 항구와 정박소들을 꿈꾸었다.

그는 폭풍우, 여자들, 대단한 사건들, 거대한 물고기, 사람들 사이의 싸움, 힘겨루기 시합, 그의 아내 등에 대해서는 꿈을 꾸지 않았다 그가 다녔던 곳과 해변에 나타난 사자들에 대한 꿈만 꾸었다. 사자들은 해질 무렵 어린 고양이들처럼 뛰어놀았고 그는 소년을 사랑하듯 사자들을 사랑했다. 소년의 꿈을 꾸지는 않았다. 그는 잠에서 깨어나 열린 문으로 달을 내다보다가 바지를 다시 펴서 입었다. 그는 오두막 밖에서 오줌을 누고 소년을 깨우러 길을 나섰다. 아침의 한기에 몸이 떨렸다. 하지만 그렇게 떨고 나면 몸이 따뜻해질 것이고 곧 노를 저을 수 있을 것이다.

(P.24)

그는 언제나 바디를〈라 마르la mai〉라고 생각했다. 그건 사람들이 바다를 좋아할 때 스페인어로 부르는 말이다.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때로는 험담을 하지만, 그런 때에도 언제나 바다를 여성으로 말한다. 부표를 낚싯줄의 찌로 사용하고 또 상어 간(肝)을 많이 팔아 번 돈으로 사들인 모터보트를 타는 젊은 어부들은 바디를〈엘 마르el mar〉라고 남성형 명사로 불렀다. 그들은 바다를 경쟁자, 하나의 정복 장소 혹은 적인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노인은 바다를 언제나 여성으로 생각했고, 엄청난 혜택을 줄 수도 있고 거두어 가기도 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만약 바다가 거칠고 사악한 짓을 한다면 그건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것이라고 여겼다. 달이 여성에게 영향을 주는 것처럼 바다에도 영향을 주는 것이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P.28)

난 아주 정확하게 깊이를 유지하지. 그는 생각했다. 단지 지금껏 운이 없었을 뿐이야. 앞날을 누가 알아? 어찌면 오늘은 운이 좋을지 몰라. 모든 날은 새로운 날이니까. 행운이 따른다면 더 좋겠지. 하지만 먼저 정확하게 하는 게 중요해. 그래야 행운이 찾아올 때 그걸 잡을 수 있지.

(P.31)

왜 물 밖으로 튀어 올랐을까. 노인은 궁금했다. 마치 내게 자신의 덩치가 얼마나 큰지 보여 주려고 그런 것 같아. 아무튼 이제는 놈의 덩치를 알았지. 이번엔 내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저놈에게 보여 주면 좋겠는데. 그러면 저놈은 쥐가 난 손을 보게 되겠지. 저놈이 나를 실제보다 더 훌륭한 사람으로 생각하도록 만들어야겠는데. 그리고 난 그렇게 될 거야. 내가 저 물고기가 되었으면 좋겠어. 나의 의지와 지능에 늠름하게 맞서는 저놈의 모든 자질을 그대로 갖춘 채 말이야.

(P.60)

물고기야, 넌 나를 죽이고 있어. 노인은 생각했다. 하지만 넌 그럴 권리가 있어. 난 너처럼 크고, 아름답고, 침착하고, 고상한 놈을 평생 본 적이 없어. 형제여, 어서 와서 나를 죽여라. 나는 누가 누구를 죽이든 신경 쓰지 않겠다.

이봐 영감, 이제 당신의 머리가 혼미해지고 있어. 그는 생각했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정신을 단단히 차리고 사람 답게 고통을 견디는 방법을 알아야 해. 혹은 물고기답게, 하고 그는 생각했다.

「머리야, 맑아져라.」그가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 다.「맑아져라.」

그 후 두 번이나 더 되풀이된 회전에서 전과 똑같은 결과 가 발생했다.

난 모르겠어. 노인은 생각했다. 그는 물고기가 회전할 때마다 기절 직전의 상태가 되었다. 모르겠어. 하지만 한 번만 더 시도해 볼 거야.

그는 한 번 더 시도했고 그러면서 기절할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물고기는 또다시 몸을 곧추세우고 멀리 헤엄쳐 갔다. 커다란 꼬리가 공중에서 흔들거렸다.

좋아. 또 한 번 시도하는 거야. 노인은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의 양손은 이제 무감각했고 눈도 순간적으로만 잘 보일 뿐이었다 또다시 시도했으나 결과는 같았다. 시작하기도 전에 기절 할 것 같았다. 그래도 한 번 더 시도할 거야.

그는 엄청난 고통을 감내한 채 남아 있는 힘과 오래전에 사라진 자부심을 다 짜내면서 그 힘으로 물고기의 고뇌에 맞섰다.​

​(P.86)

물고기의 몸이 훼손되었기 때문에 노인은 더 이상 고기를 보고 싶지 않았다. 고기가 공격당했을 때, 마치 자신이 공격 당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내 고기를 공격한 상어를 죽였지. 그놈은 내가 지금껏 본 중에서 가장 큰 덴투소였어. 내가 전에 본 덴투소들도 상당히 컸는데, 저놈은 정말 크군. 너무 좋은 일은 오래가지 못하는구나,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차라리 이게 꿈이었더라면. 저 고기를 낚지 않고 차라리 신문지를 깐 침대 위에 그냥 누워 있었더라면.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야.」그가 말했다.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는 거야.」

(P.96)

희망을 버린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야. 그는 생각했다. 희망이 없다는 건 죄악이야. 죄악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마, 하고 그는 생각했다. 죄악 말고도 골치 아픈 문제들이 많아. 게다가 나는 죄악이 뭔지 잘 알지도 못해.

난 그걸 잘 모르고, 또 그걸 믿는지 어떤지도 불확실해. 어쩌면 물고기를 죽이는 건 죄악일지도 모르지. 생계를 유지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기 위해서 그렇게 했더라도 그건 죄악일 수 있어. 그렇다면 모든 게 죄악이야. 죄악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마. 그런 걸 생각하기에는 너무 늦었어. 세상에는 돈 받고 그런 죄악을 저지르는 자들도 있어. 그런 자들이나 죄악에 대해 생각하라고 해. 물고기가 물고기로 태어 난 것처럼 너 어부로 태어났을 뿐이야.

(P.98)

「영감. 자낸 너무 생각이 많군.」그는 큰 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넌 덴투소를 죽이는 건 즐겼잖아. 그는 생각했다. 그놈도 당신처럼 살아 있는 물고기를 먹고 살지. 그놈은 쓰레기를 먹는 놈이 아니고 또 일부 상어들처럼 움직이는 식귀(食鬼)도 아니야. 그놈은 아름답고 고상하고 도무지 겁이 없는 놈이지.

「난 자기방어를 위해 그놈을 죽였어」노인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아주 멋지게 놈을 죽였지.」

게다가 어떻게 보면 모든 것이 모든 것을 죽이고 있다고. 낚시는 나를 살리지만 그만큼 나를 죽이기도 해. 하지만 소년은 나를 살리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스스로를 너무 기만하지는 말아야겠군.

(P.99)

<프랜시스 매코머의 짧고 행복한 생애>

「오늘 밤 우리는 사자 포획을 축하하는 샴페인을 터뜨릴 겁니다.」윌슨이 말했다.​

「낮에는 더무 덥군요」​

「아, 사자.」마고가 말했다.「그 사자를 잊어버렸네요!」

그래. 로버트 월슨은 생각했다. 저 여자가 남편을 엿 먹이고 잇군. 이런 식으로 엿 먹이는 게 저 여자가 좋은 외양을 유지하는 방식인가? 남편이 영 형편없는 겁쟁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여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지? 저 여자는 정말 잔인하군. 하지만 여자들은 모두 잔인해. 여자들이 세상을 통치하지. 그리고 통치를 하려면 때때로 잔인해져야 해. 난 말 이야, 여자들의 그 빌어먹을 잔인한 테러를 질리도록 보아 왔다고

(P.17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야밤의 공대생 만화
맹기완 / 뿌리와이파리 / 392쪽
(2018. 6. 26.)


재미있고 유익한 과학 만화 ^^​



  뉴턴이 공간을 절대적으로 생각했던 반면에, 라이프니츠는 공간을 상대적이라고 생각하고 운동 에너지와 위치 에너지를 기반으로 하여 운동에 과한 새로운 이론(동역학)을 고안했다.
  라이프니츠는 뉴턴과의 논쟁에서 공간, 시간과 물체의 운동이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라고 말함으로써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예견했다. 라이프니츠의 충족 이유율은 오늘날 우주론에서 인용되고 있고, 동일성 원리는 양자역학에서 인용된다. 오늘날 우주론의 한 갈래인 디지털 철학 옹호자들은 라이프니츠를 선구자로 여긴다.
(P.50)



  배터리처럼 플러스-마이너스 위치가 안 바뀌고 일정하면 전기가 한 방향으로만 잘 흐르는데, 그걸 직류라고 합니다. 플러스-마이너스 위치가 계속 바뀌면 전기가 이쪽으로 흐르다가 저쪽으로 흐르다가 하는데, 그게 교류입니다.요새 쓰는 220볼트 같은 게 다 교류입니다.
  교류는 전기를 발전소에서 집가지 보낼 때 손실이 적습니다. 그래서 발전소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전기를 공급할 수 있습니다. 교류를 이용할 경우 고압 송전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발전소에서 엄청 높은 전압으로 전기를 보낸 다음 가정집에서 사용하기 직전에 220볼트로 낮추는 기술입니다. 그런데 직류는 이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송전 효율이 안 좋기 때문에 발전소에서 먼 곳까지 전기를 보내기 힘듭니다.
(P.66)



  로절린드 프랭클린과 킹스 칼리지에서 같이 DNA를 연구하기도 했던 모리스 월킨스의 사이는 매우 좋지 않았다. 월킨스와 프랭클린의 정반대되는 성격, 월킨스가 무능력하다고 생각한 프랭클린의 사고방식, 월킨스가 프랭클린의 데이터를 마음대로 해석한 일등 다양한 요인이 겹쳐 둘의 사이는 매우 나빴다. 결국 둘은 존랜들의 중재에 의해 서로 다른 형태의 DNA를 연구하게 된다. 이것은 결국 윌킨스가 프랭클린의 데이터를 허락받지 않고 사용해 DNA 구조 결정에서 플랭클린이 잊히게 되는 원인이 된다.
(P.8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