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
진은영 / 그린비 / 296쪽
(2018. 7.15.)
순수이성비판을 이보다 더 쉽게 설명할수 있을까?
순수이성비판의 이해를 위해 꼭 필요한 필독서
사람들이 철학에 성공적으로 입문하기 위해서 처음 공부해 볼 만한 철학자로 꼽는 이는 바로 칸트이다. 칸트에서 시작하세요!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내 주변에 칸트에서 시작해서 철학공부를 중도포기한 사람은 없었다. 칸트에게 매혹된다는 것은 사실 철학에 매혹된다는 것과 동의어다. 칸트. 정말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의 철학자다. 그러나 헤겔이 이미 말했듯이 익숙하다(bekannt)고 해서 잘 알고 있는(erkannt) 것은 아니다. 칸트는 제대로 알려 진 철학자는 아니다. 제대로 알기에는 칸트는 너무나 어렵다. 그러나 누군가 일단 칸트를 견뎌낼 수 있다면 그는 어떤 철학의 가시밭길도 걸을 수 있으리라. 칸트는 철학의 통과의례다.
(P.17)
우리가 한 사람의 삶을. 그리고 그의 사유를 이해하는 데 진정으로 필요한 것으로 무엇일까? 소크라테스는 칼리클레스라는 젊은이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가 상대방의 영혼을 이해하고 그 삶의 태도가 정당한지 충분히 살펴보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자네는 그것을 모두 갖추고 있네. 즉 지식과 호의와 솔직함이 그것이네” (플라톤,『고르기아스』). 우리가 이해하려는 사람이 만일 철학자라면. 더구나 칸트와 같이 위대한 철학자라면 이 말은 더욱 타당하다.『순수이성비판』을 단 한 번이라도 펼쳐본 사람이라면 칸트라는 철학자를 이해하기 위해서 아주 많은 사전 지식이 필요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지식이 아니다. 우리가 낯선 영혼을 이해하기 위해 정말 그렇게 많은사전 정보가 필요하다면 이미 그 정보로 인해서 그 영혼은 우리에게 더 이상 낯설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 영혼을 이해하려던 시도 자체가 부질없이 되고 만다. 우리가 우리의 한 부분처럼 익숙해져 전혀 놀라울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 존재를 이해하려고 왜 그토록 수고로이 움직이겠는가? 무엇을 알기 위해서 좀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감정은 소크라테스가 마지막 조건으로 꼽았던 솔직함의 부족에서 비롯된다.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흉금을 털어놓고 솔직하게 말하는 면이 부족한 사람은 필요 이상으로 소심하고 모든 문제를 어렵게 생각하는 법이라고.
지식에 관해서라면 우리는 칸트가 자신의 철학을 이해시키기 위해 그의 학생들에게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칸트를 끝까지 읽기 위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솔직함이다. 한 철학자의 견고한 사유체계가 우리의 사유체계 속에 쉽게 녹이들기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이 거장의 글을 읽는 내내 우리를 밀쳐내는 굉장한 저항을 느낀다. 그러나 어떠랴! 고분고분하지 않은 글을 쓰는 것은 우리 모두의 꿈이기도 한 것을. 그러므로 누군가 칸트를 읽을 수 없다면 그것은 단 한 가지 이유 에서이다. 그는 이 철학자에게 호감이 부족한 것이다. 매혹된 영혼에게 저항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P.18)
계몽을 칸트의 용어로 선명하게 정의해 보자. “계몽이란 우리가 마땅히 스스로 책임져야 할 미성년의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대한 답변」). 여기서 칸트는 근대 이전의 역사 전체를 미성년이라고 규정한다. 미성년이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지신의 이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지금까지 인류는 교회나 봉건 영주의 율법에 따르는 예속의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다. 칸트는 근대철학자로서 근대인이 미성년의 상태에서 벗어날 것을, 즉 계몽될 것을 권고 한다. 그렇다면 인류는 미성년 상태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그는 “미성년의 원인이 이성의 결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사람의 지도 없이도 이성을 시용할 수 있는 결단과 용기의 결핍에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계몽의 모토는 다음과 같다. "감히 알려고 하라(Sapere aude)! 너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우리가 칸트를 근대철학자로 규정할 때 그것은 칸트가 미성년에서 벗어나 스스로 이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지려는 계몽의 정조를 가 지고 철학적 작업을 수행했던 철학자라는 점을 의미한다. 특히 그의 비판서 시리즈는 그가 '계몽' 이라는 근대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얼마나 철저하게 해답을 모색했는지를 잘 드러내준다. 이미 우리는 칸트가 계몽의 문제의식 아래 세 가지 방식으로 물음을 제기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순수이성비판』은 그 중에서도'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라는 첫번째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쓰여진 책이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답하는 책이 바로『실천이성비판』이다. 나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이 마지막 물음세 충실히 답하기 위해『판단력비판』과 많은 역사, 종교철학의 저작들이 쓰여졌다.
(P.38)
칸트는 이성이 무엇인가를 입법할 수 있는 능력, 즉 외재적으로 주어진 율법 대신 내재적으로 고유한 법칙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임을 증명하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선험성에 대한 두 가지 테제(내재적, 입법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선험적'이란 단어의 뜻은 분명하지 않다. 여기서는 선험적인 것은 필연적으로 내재적이고 입법적이리는 점만을 분명히 해두고 넘어가자.
(P.42)
라이프니츠는 인식의 객관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본유관념(생득관념. innate idea)을 상정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절대적으로 가지고 있는 관념으로서 모두에게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다. 본유관념은 다른 설명 없이도 그 자체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절대적이고 단순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라이프니츠가 보기에 절대적 단순개념은 미리 주어진 인식의 기본전제이어야만 한다. 단순개념이 본유적으로 주어져 있어야 하고 이것을 토대로 해서만 사림들은 자신만의 주관적 관념이 아닌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객관적 지식들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즉 단순개념들은 우리가 인식하고 서로 소통하기 위한 일종의 사유의 알파벳과 같은 것이다. 또한 우리가 지닌 단순개념들은 인간 전체가 공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의부의 대상과 일치한다. 신이 모든 것이 일치하도록 미리 예정해 놓았기 때문이다(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 본유관념과 예정 조화설 덕택에 라이프니츠는 인식의 객관성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문제해결방식이 산뜻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른 문제를 뒤에 감추고 있었다. 칸트가 올바르게 지적했듯 예정조화는 “철학이 생각해낸 것 가운데 가장 기묘한 허구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 예정조화는 논증할 수도 반증할 수도 없다는 점에서 독단론이며, 인간의 주어진 조건 이외에 신의 존재를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너무 종교적이었다.
(P.45)
영국 경험론자들 중 로크와 흄은『순수이성비판』에서 중요하게 거론되는 철학자다. 로크와 같은 영국의 경험론자는 라이프니츠보다 훨씬 모던한 사상가였다. 그는 라이프니츠와 달리 철저하게 인간적인 것들의 한계 내에서 사고하려고 노력했다. 사실상 그는 합리론의 시초였던 데카르트 철학에 대한 여러 가지 불만에서 철학을 시작하였다. 그는 합리론자들이 말하는 이성의 본유관념을 중세 스콜라철학의 잔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본유관념 없이 인간이 진리를 획득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해 골몰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인간 정신에는 본유관념 따위는 없다. 인간의 정신은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석판과 같은 상태로 태어난다. 그렇다면 어떻게 지식을 획득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경험이다! 경험이라는 분필로 우리는 석판에 쓰기 시작하는 것이다.
로크가 말하는 인간 사유의 알파벳은 단순관념(simple idea)이다. 그런데 이 단순관념은 이성에 의해 주어지는 것. 즉 라이프니츠와 같은 합리론지들의 생각처럼 본유적인 것이 아니라 경험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노랑'이나 '뜨거움' 같은 것이 단순관 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경험적인 단순관념들을 합성해서 우리는 보다 복잡한 복합관념(complex idea)으로 나아가며 지식의 체계를 형성할 수 있다.
(P.46)
흄은 23세가 되던 1734년 무렵부터『인간본성론』(1740년 출간) 이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은 매우 충격적인 주장을 담고 있었다. 우 리는 어느 것에 관해서도 객관적 인식을 가질 수 없다! 로크의 경우 경험에서 인식의 근거를 찾았을 뿐 객관적 인식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흄은 객관적 인식의 불가능성을 강변했다. 흄의 주장은 철학자들에게는 마치 철학의 종말처럼, 철학 자체를 벼랑으로 내모는 행위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인간은 아무런 객관성도 가질 수 없다'는. 속어도 비어도 한 마디 섞이지 않은 얌전하고 신사적인 이 문장이 어째서 그토록 과격한 것일까? 철학이란 본디 객관적 지식을 주장하는 학문들에 대해 그것들이 진정 객관성을 갖추 있는지를 따져 묻는 학문이다. 특히 근대철학은 어느 시기의 철학보다도 오직 객관성에 대한 들뜬 사랑으로 다른 모든 중요한 철학적 문제들을 잊어버릴 만큼 객관성을 추구했다. 그리고 다른 것들이 제각기 지녔다고 주장하는 객관성의 정도를 평가하며 객관성의 심판관을 자처해 오던 터였다. 우리는 신 없이도 혹은 신이 아주 조금만 도와 주면 객관적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 이것이 근대철학의 프라이드였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흄의 주장은 근대철힉에게는 사형선고와 다름이 없었다.
(P.47)
칸트는 그 충격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흄으로 인해 독단의 짐에서 깨어났다!" 잠에서 깨어나긴 했지만 거기는 철학자가 있기에 는 너무 추운 방이었다. 따라서 칸트는 어떻게든 사유의 부싯돌을 가지고 새로운 불을 피워야 했다. 어떻게 독단론을 피해가면서도 경험론의 아포리아(aporia. 막다른 골목)에 부딪치지 않을 것인가? 칸트는 먼저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라이프니츠는 말했다. 우리는 전부 다 알 수 있다.' 이건 과도한 자신감이다. 흄은 말했다. '우리는 아무것 도 알 수 없다. 이건 과도한 절망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물어야 겠다.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는지 그리고 또 무엇을 알 수 없는지 따져 묻자. 그리하여 이성의 능력을 검토하고 인식의 한계를 확실히 밝히자. 이로써 그는 이른바 선험철학이라는 새로운 철학의 흐름을 만들게 된다.
(P.49)
위대한 연설가가 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조언이 있다. “처음 1분이 기장 중요하다. 그 1분 인에 청중을 매혹시키지 못하면 좋은 연설은 불가능하다." 위대한 저자가 되려는 이들에게도 똑같은 조언이 기능 할 것이다. 모든 위대한 저술들은 처음 몇 줄만으로도 인생에 지위질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순수이성비판』서문의 첫 구절 또한 그렇다.
인간의 이성은 자신이 하는 어떤 종류의 인식에 있어서는 다음과 같은 특수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 즉 인간의 이성은 자신이 거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대답할 수도 없는 문제로 괴로워하는 운명이다. 거부할 수 없는 문제가 이성 자체의 본성에 의해서 이성에 부여되어 있기 때문이요. 대답할 수 없음은 그 문제가 인간 이성의 모든능력 있기 때문이다.(A Ⅶ)
많은 이들이 첫 구절에서『순수이성비판』을 독파해야 할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을 느꼈다고들 한다. 칸트철학에 딴지를 걸기로 작정한 헤겔이 가장 먼저 비판해야겠다고 결심한 것도 이 첫 구절이었다. 헤겔은 인간이 대답할 수 없는 문제를 자신에게 부과한다는 것은 일종의 궤변이라고 비난했다.『순수이성비판』의 서문은 칸트의 옹호자 이든 비판자이든 그 글을 읽어기는 사람들을 자극하는 문장으로 가득 하다. 거기에는 저자의 핵심적 문제의식을 풍부하게 드러내주는 내용들이 담겨 있다.『순수이성비판』의「서론」(Einleitung)도 마찬가지다. 칸트철학의 문제의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개념으로서 언급되는 코페르니쿠스적인 '사고 방식의 전환' (B WI)이 서문에 담겨 있다면 '선험적 종합판단은 어떻게 가능한가?' 리는 칸트철학의 가장 중요한 물음은「서론」속에 담겨 있다.
인간 이성의 특수한 운명. 그것은 형이상학의 싸움터(B XV)에 뛰어들면서 칸트가 던진 첫 마디였다. 경험론자와 합리론자들의 대립, 흄이라는 혁명적 회의론자의 등장으로 칸트가 철학을 하던 시기의 사상계는 그 어느 때보다도 아수라장이었다. 이 철학적 아수라장에 뛰어들면서 칸트는 "쯧쯧 이 한심한 놈들. 다 들렸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그 싸움터에서 선배나 동료철학자들의 개인적 오류 대신 '인간 이성의 특수한 운명' 을 발견했다. 그가 보기에 인간 이성에는 피할 수 없는 곤경이 존재한다. 철학사에서 계속 등장했던 영혼의 불멸성이나 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은 이성의 성향상 물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것은 이성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성이 자신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는 곤경은 왜 발생할까? 이성은 늘 원칙을 사용해서 경험을 요리한다. 그런데 이 원칙들 을 쓰다 보면 경험적 사실들에만 국한하여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꾸 경험적 사실들을 넘어선 것들에 적용하는 일이 생겨버린다. 칸트는 이 때문에 형이상학이 경험적으로는 증명할 수 없는 주장에 대해서 제각기 고집을 부리며 소리 높여 싸우는 전쟁터로 변모했다고 탄식 한다.
(P.58)
그렇다면 이성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성은 일종의 능력이다. 칸트는 이성을 한 가지 능력이 아니라 관심에 따라 각기 달리 발휘되는 여러 가지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다루는『순수이성비판』에서는 이성의 능력이 인식하는 능력으로 드러난다. 이성은 실천적 관심을 가질 경우엔 실천능력이지만. 이 책에서는 주로 사변적 관심을 가진 인식능력으로서의 이성의 면모가 밝혀진다. 그래서『순수이성비판』의 핵심문제는 한 마디로 외적 권위에 호소함 없이 이성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인식능력이 무엇인가(혹은 그런 인식능력은 어떻게 가능한 가)를 해명하는 것이었다.
외적 권위에 호소하지 않는 선험철학의 모토에 충실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으로부터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 우리에게 가장 먼저 분명하게 주어져 있는 것은 표상(Vorstellung)이 다. 표상이라는 단어는 원래 독일어에는 없었는데, 로크의 책이 독일에 번역되면서 만들어졌다. 로크가 사용한 관념(idea)이리는 단어를 독일어로 옮긴 것이 표상이다. 우리가 외부 세계를 인식할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을 그 세계에 대한 관념(표상)이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관념을 직접적으로 느끼고 그것이 주어져 있다는 것을 확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 밖에 있는 세계가 우리의 관념과 정말 똑같은지 그렇지 않은지는 확신할 수 없다.
(P.62)
선천적 종합판단이란 우리의 인식능력이 대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우리의 인식능력이 지닌 법칙을 따른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선천적인 것이 보편적 • 필연적인 것이라는 말은 달리 말하면 경험에는 없는 보편성과 필연성이 어디로부터인가 주어진다는 뜻이다.
칸트의 핵심주장은 이러하다. 우리의 인식능력이 요구하는 대로 대상은 따라올 뿐이다. 그런데 우리의 인식능력은 기분내키는 대로, 멋대로 대상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법칙에 따라 작용한다. 그 인식능력의 고유한 법칙 때문에 보편성과 필연성 이 생겨나는 것이다. 칸트에게 인식능력은 대상을 거울처럼 그대로 반영하는 능력이 아니라 인식의 법칙에 맞게 구성하여 보여주는 능력이었다. 칸트는 대상이 인식능력의 고유한 법칙에 따른다는 것. 달리 말하면 우리가 대상에 대해 입법성을 지닌 자이며 명령하는 자라는 자신의 독장적인 통찰을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적 사유에 비교한다. 그는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이 혁명적인 만큼이나 인식능력이 대상을 따른다는 기존 견해에서 탈피하여 대상이 인식능력을 따른다고 주장한 자기의 견해가 혁명적이리는 점을 스스로 깨달았던 것이다.
(P.69)
감성과 오성의 능력들은 각각 고유한 선천적 형식을 갖는다. 감성의 경우 선천적 형식은 시간과 공간이다. 오성의 경우 그 선천적 형식은 열두 개의 범주이다. 우리는 감성과 오성 능력이 각각의 고유한 형식에 따라 작용함으로써 선천적 종합판단을 가지게 된다. 쉽게 표현해서 이 말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을 사용하지 않고는, 그리고 우성의 열두 개 범주를 사용하지 않고는, 우리는 결코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뜻이다. 칸트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을 한 마디로 직관이라고 표현하고, 열두 개의 순수한 개념 형식을 범주라고 표현한다.
감성의 직관형식 : 시간과 공간
오성의 범주형식 : 12범주 12개의 판단형식에서 도출
이같은 『순수이성비판』에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개의 중요한 제목 아래 설명되고 있다. 감성의 형식을 다루는 선험적 감성론과 오성의 형식을 다루는 선험적 논리학, 칸트의 표현에 따르자면 "인간의 인식에는 두 개의 줄기만이 있고, 이 두 줄기는 아마도 하나의 공통적인, 그러나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뿌리에서 발생한다. 이 두 줄기는 감성과 오성이며, 감성에 의해서 대상들은 우리에게 주어지고 오성에 의해서 대상들은 우리에게 사유된다."
<인식 나무의 두 줄기>
① 첫번째 줄기 : 감성 - 『순수이성비판』의 선험적 감성론에서 다뤄진다.
② 두번째 줄기 : 오성 - 『순수이성비판』의 선험적 논리학에서 다뤄진다.
(P.72)
(인식의 첫번째 줄기 - 감성)
『순수이성비판』을 펼쳐보면 선험적 감성론은 "Transzendentale Ästhetik"라고 쓰여져 있다. 칸트의 사용법에 가깝게 라틴어 단어로 표현하면 Ästhetik은 'perzeption'(지각)이다. 이 라틴어 표현은 우리가 조금 뒤에 보게 될 선험적 논리학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역시 조금 뒤에 소개될 통각(Apperzeption)은 선험적 논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서 바로 이 'perzeption'에 접두사를 붙여 만든 말이다.
지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두워질 무렵 고개를 숙여 작은 풀잎을 뜨고 그 주변의 흙 냄새를 맡고 먼 마을의 종소리를 듣고 고개 를 들어 내 얼굴로 불어오는 저녁바람을 느끼고 오른손에 쥔 과일의 새콤달콤함을 맛보는 것. 이처럼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 오감을 통해 지각하는 능력을 칸트는 한 마디로 감성 (Sinniichkeit)이라 고한다.
그러나 이런 감성만으로는 인식이 성립하지 않는다. 오른손에 쥔 이 과일을 사과라고 내가 인식하는 것은 오감의 능력만으로 가능 하지는 않다는 뜻이다. 달콤함, 붉은색. 둥그런 모양, 신선한 과일 향 기, 매끄러움 등 주어진 질료를 가지고 사과라는 개념을 형성하는 오성능력이 있어야만 인식이 성립한다. 인간의 인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감성과 오성이 함께 작용해야 히는 것이다.
인간의 인식은 두 능력의 종합적 작용이므로 우리의 경험 속에서 감성과 오성이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감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일단 감성을 오성과 분리하는 일이 필요하다. 선험적 감성론에서는 우선 감성을 고립시키는 작업이 이루어진다. 칸 트는 우리의 인식에서 오성이 행하는 개념적 활동을 제거해 본다. 내가 손에 쥔 이 과일에서 사과라는 개념을 제거한후에 남는 달콤함. 붉은색 , 둥긂 등을 칸트는 경험적 직관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경험적 직관에서 또 한번의 제거작업을 해야 한다. 인식 가능성과 관련된 원리를 도출하려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기 때문에 경험적 측면이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경험적 직관들에서 감각된 모든 것을 분리함으로써 직관의 경험적 측면을 제거하고 나면 칸트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이 나타난다. 달콤함. 붉은색. 둘긂, 신선한 향기 등의 감각된 것이 제거되면 무엇이 남을까? 그것은 바로 감각할 수 있는 우리들의 능력이다. 즉 경험적 직관에서 경험이 모두 지위지고 나면 남는 것은 순수직관이다. 우리가 시각, 촉각, 후각, 청각, 미각 등의 경험적 오감으로 느끼는 지각들의 근거는 공간과 시간이라는 두 가지 순수형식에 있다.
감성능력의 원리 ① 외적 직관능력인 공간(외감)
② 내적 직관능력인 시간(내감)
(P.75)
인간은 감성적 직관을 가진다. 직관(Anschauung)은 보다 (schauen)에서 생겨난 말로, 신적인 직관은 간단히 말해 신이 어떤 사물을 보는 것이다. 이때 사물은 신이 바라보는 그대로 존재한다. 칸트식으로 표현하자면 하느님은 물자체를 직관한다. 보는 그대 로 있으니 다른 인식작펑℃1 필요할 리 없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인식 은 직관이면 충분하고 오성의 개념작용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는 뜻인가? 신은 직관할 뿐 사고하지 않는 존재라는 결론은 이상하다. 물론 그런 결론은 잘못되었다. 하느님도 사고한다. 그런데 이 사고가 좀 특이하다.
신이 최초로 사고한 개념은 '빛'이었다. 성경에는 '빛이 있으라'라고 하느님이 명령한 것으로 나와 있지만 사실 명령은 없었다. 단지 하느님은 생각했다(denken). '빛!' 이라고 생각만 했을 뿐인데 빛이 생겼다. 신적인 사고의 특징은 바로 이런 것이다. 빛이라는 개념을 사고하면 빛이 생기고 '땅!' 하고 생각하면 땅이 생긴다. 사고하는 대로 그것에 대응히는 사물이 생긴다. 하느님이 생각하는 대로 사물이 생긴다는 말과 바라보는 대로 사물이 존재한El는 것은 동일하다. 한 마디로 하느님에게서 직관과 오성은 서로 다른 능력이 아니라 하나의 능력이다. 그래서 신적 직관을 오성적 직관이라고 부른다.
인간도 본다. 하지만 아쉽게도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없다.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공간과 시간이라는 우리의 감성을 통해서만 본다. 원래 사물이 어떤 모습인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래도 기를 쓰고 보지만 사물 그 자체를 볼 수 없기에 칸트는 조용히 되뇌인다. '우리의 직관은 정말 눈멀어 제대로 볼 수 없는 것. 맹목적인 것이구나.'
인간도 신처럼 사고한다. 그런데 우리가 '빛', '땅', '하늘', '별'...... 아무리 생객해 봐야 빛, 땅, 하늘, 별이 생겨나지 않는다. 그래서 칸트는 또 독백을 한다.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 인간의 개념 이란 참 공허하구나.' 이로써 “직관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 이라는 철학 역사상 가장 유명한 푸념이 탄생한다. 여기에는 인간은 신적인 직관을 가지지 못한 존재라는 한탄이 들어 있다. 물론 이것이 한탄과 푸념으로 그치는 것은 아니다.
칸트에게 깨달음으로 남은 것은 두 가지이다. 먼저 오성적 직관을 갖지 못한 인간의 경우에는 신과 달리 오성과 직관이 서로 분리되 어 서로 다른 두 가지 인식의 원천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 다른 하나는 인간은 특정한 방식을 통해 서로 다른 능력인 오성과 직관을 결합시킴으로써만 인식을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P.87)
올바른 물음을 던질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홀륭한 하나의 능력이다. 잘못된 물음은 묻는 사람뿐만 아니라 그 잘못된 물음에 진지하게 반응하는 사람 역시 바보로 만든다. 오성이 멋대로 작용하면서 만들어낸 어리석은 질문에 무조건 답하려 한다면 구멍난 체로 숫염소의 젖을 받으려는 바보와 다를 바 없다. 제기된 모든 문제를 심각하게 숙고하기 전에 문제 자체가 답할 가치가 있는 것인지 숙고해 보아야 한다. 따라서 칸트는 분석론에서 먼저 오성이 안전하게 활동할 수 있는 인식의 울타리를 정한다. 그럼으로써 거짓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을 사전에 봉쇄한다. 그리고 변증론에서 오성이 멋대로 작용할 경우에 발생하는 거짓문제들을 살피고 이 문제들을 제거함으로써 철학사에서 거품처럼 부풀어 있는 거짓문제들을 말끔히 없애버린다.
칸트는 직관의 제한 없이 멋대로 행동하는 오성의 개념작용을 분석론의 오성(Verstand)과 구별하여 이성(Vernunft)이라고 부른다. 그는 분석론에서는 오성의 작용을 살피는 데 반해 변증론에서는 이성의 작용을 살핀다. 그가『순수이성비판』에서 주된 관심을 가지고 다루는 것은 올바른 인식활동을 하는 오성능력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 때문에 그 책의 진정한 제목은『순수오성비판』이리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P.91)
칸트는 철학의 고유한 재판소를 세우는 일을 일생의 과업으로 심았다. 칸트는 신적인 하늘과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땅 그 사이에서 인간의 자리가 어디인지를 묻고 싶어 했다. 철학의 고유한 재판소 설립은 그러한 인간의 자리를 마련하려는 시도와 관련이 있다. 인간의 이성은 신의 심판도, 경험이라는 배심원의 판결도 없는 자기만의 고유한 법정을 세워야 한다. 이성에 의한. 이성을 위한. 이성에 대한 재판소. 우리가 그런 재판소를 가지게 될 때만 우리는 신과 자연 사이에서 인간의 고유한 자리를 찾게 될 것이다. 이것만이 철학이 할 일이다. 칸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칸트가 세운 이성의 법정에서 최초로 담당한 사건은 무엇일까? 그는 이성의 법정에서 우리가 절대적 진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들을 모두 소환해서 그것들의 정당성을 검사하고 심판하려고 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의 진리 주장을 법정으로 부르기 전에 반드시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법관 자신의 정당성 여부다.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사건을 맡은 법관이 그 사건을 맡을 만한 자격이 있는지를 상급 법원에서 검사하는 것이 처음으로 할 중요한일이다.
마찬가지로 이성의 법정에 처음으로 출두하여 이성의 검사를 받는 것은 이성 자신이다. 칸트는 이성의 자격을 검사하면서 이전 철학자들이 관심을 가졌던 문제. 즉 이성의 본성이 선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조사하지 않는다. 그가 검사하는 것은 이성의 월권 여부 이다. 형사소송을 맡은 법관이 헌법 재판을 하는 것이 월권이듯 이성이 제가 맡은 인식의 영역을 넘어가는 것은 월권이다. 우리는 이성이 담당하는 영역을 분명하게 밝힘으로써 이성의 월권을 막이야 한다.
법정용어로는 이런 자격요건 심사를 연역(Deduktion)이라고 한다. 칸트는 이성의 연역을 통해 이성을 검사하고 재판하는 절치를 거 치려고 했다.
(P.106)
경험하는 것이 사과이든 오렌지든 각각의 경험 내용에는 언제나 특정한 시간계기와 공간형식을 가진 경험적 직관이 들어간다. 그리고 이런 특정하고 구체적인 경험적 직관이 기능하려면 그것의 근거가 되는 순수직관이 필요하다.
이어서 칸트는 순수한 시간적 계기와 공간적 형식이 어떻게 우리의 구체적인 경험내용 속에서 작용하는지를 설명한다. 사과표상에 는 둥글다 • 빨갛다 • 표면이 매끄럽다 등 다양한 지각들이 하나로 종합되어 있다. 각각의 지각들이 구별된 채로 있으면서 동시에 함께 표상될 수 있어야만 우리는 사과라는 표상을 떠올릴 수 있다. 즉 둘긂 • 빨강• 매끄러움 등은 공간적으로 함께 모이고 시간적으로 동시에 주어져 사과라는 표상을 만든다. 이것을 칸트의 표현으로 고쳐보면 다음과 같다. 시간 • 공간의 형식 속에서 다양한 지각들이 종합적으로 각지(Apprehension. 포착이라고도 번역된다)될 때만 사과라는 표상은 가능하다.
붉음, 둥긂, 매끄러움과 같이 지각된 표상들을 하나로 모으는 종합작용에는 한 가지 곤란한 점이 존재한다. 각기 다른 시간에 공간의 다른 부분을 차지히는 것으로 우리가 지각하는 붉음, 둥긂, 매끄러움을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동시에 모으는 작업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것이다. 우리가 빨간색을 지각하는 순간과 갈색 밑둥을 지각하는 순간은 아주 간발의 치이기는 하지만 서로 다른 순간이다. 빨간색의 공간과 갈색의 공간은 각기 다른 시간에 귀속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서로 다른 공간조각을 모으는 일은 서로 다른 공간을 표상하는 각각의 시간조각들을 모으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한 사물을 공간적으로 표상할 수 있는 가능성은 서로 다른 시간의 조각들을 동시에 모을 수 있는 가능성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칸트는 이런 점에서 시간을 모으는 작용, 즉 종합작용이 가장 근원적인 작용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우리가 2초 전의 시간과 1초 전의 시간, 흘러가버린 시간들을 지금 이 순간에 한꺼번에 모을 수 있다는 말인가? 칸트에 따르면 이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우리의 감관에서 각지(사물을 포착하는 방식)를 통해서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각지가 가능하려면 또 다른 능력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그는 상이한 시간대를 동시(同時)로 만드는 능력. 즉 각지를 가능하게 하는 필수적인 능력으로서 구상력을 제시한다.
(P.111)
칸트는 모든 세상일이 다 그렇듯 범주가 도식화되는 데도 원칙이 있다고 본다. 범주가 네 종류의 도식을 통해 적용되면서 현상들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이들 도식화의 원칙은 현상의 네 가지 원칙, 혹은 경험의 네 가지 원칙이라고도 불린다. 이 원칙들은 다음과 같다.
1. 직관의 공리
2. 지각의 예견
3. 경험의 유추
4. 경험적 사고일반의 요청
칸트는 앞의 두 원칙을 수학적 원칙이라고 부르고 나머지 두 원칙을 역학적 원칙이라고 부른다. 흄에 따르면 경험현상에는 어떤 필연성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경험에는 아무런 학문적 의미가 없었다. 이런 흄의 회의주의에 대항하는 최종적 반격으로 칸트는 선험적 원칙을 들고 나온 다. 감성과 오성의 선천적 형식이 있고 그 형식들이 적용될 때 따르는 선험적 원칙들이 있다!
(P.132)
칸트가 이 복잡미묘한 논의들 속에서 궁극적으로 주장하려는 것은 오성이 범주를 직관에 적용시킬 때에만 객관적 인식이 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이때 범주의 적용을 위해서는 반드시 구상력이 산출한 도식과 더불어 네 가지의 원칙들(직관의 공리. 지각의 예견. 경험의 유추. 경험적 사고 일반의 요청)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도식과 원칙들은 범주라는 인식의 씨앗이 싹트는 데 반드시 수반되어야 할 적정 온도와 습도라고나 할까. 우리의 인식은 물자체라는 대지에 직접 뿌리내릴 수는 없지만 시공이라는 모종삽으로 흙(직관의 내용들)을 퍼담은 작은 회분 속에서 싹을 틔우려 애쓰는 식물에 비유될 수 있다.
구상력은 본성상 다른 직관과 범주를 연결해 주는 도식을 산출 한다는 점에서 인식과정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심오하 고 신비한 능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상력이 도식을 산출하는 것은 오성이 범주를 통해 활동하기 시작할 때뿐이다. 만일 구상력이 오성의 명령 없이 제멋대로 도식을 산출한다면 그때는 인식의 과정에 참여하는 능력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인식과정에서 오성이 내리는 규정과 명령에 따라서만 활동해야 하는 구상력의 처지는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오성이 '규정하는자'가 될 때. 바로 그때에만 구상력은 도식을 산출하는 능력으로 '규정' 된다.” (들뢰즈.『칸트의 비판철학』. 40쪽)
(P.139)
판단력은 직관의 다양한 자료들이 오성의 보편적인 개념 아래 포함되는지를 판정하는 능력이다. 칸트는 판단력의 중요성을 매우 강요한다.
판단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첫째. 이미 보편적인 개념이 주어져 우리가 구체적인 사례들을 그 개념에 따라 판단하는 경우. 이런 경우에는 원래 있는 개념에 따라 개별적 사례들을 규정하기만 하면 되므로 규정적 판단력이라고 부른다. 둘째. 개념은 없고 우리가 난생 처음 만나는 개별적 시해를 판단하기 위해서 보편적인 개념을 형성해야 하는 경우. 이런 경우에는 개별 사례를 보면서 아직 규정되지 않은 보편개념을 찾아가는 '반성' 의 직업이 요구되므로 반성적 판단력이라고 부른다 (P.141)
많은 현대철학지들은 반성적 판단력의 정의에 커다란 매력을 느낀다. 우리가 정작 판단력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이미 보편적인 정보가 주어져 있어 그에 맞추어 개별 사례를 적용시켜야 하는 상황이라기보다는 아무런 정보도 없이 완전히 새로운 판단을 내려야 하는 그런 당황스러운 상횡이기 때문이다. 즉 삶에서 판단이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경우는 개별적 사례를 통해서 새로운 개념을 창조해야 하는 상황, 반성적 판단력이 요청되는 상황이다. 그래서 한나 아렌트와 같은 정치철학자는 반성적 판단력에서 정치적 사고의 모델을 모색하며『판단력비판』에 대한 정치철학적 독해를 시도하기도 한다.
(P.143)
지금까지 우리가 함께 읽어나간 것은 오성과 감성이라는 선천적 인식능력들의 작용을 분석하고 있는『순수이성비판』의 '선험적 분석론' 이었다. 칸트는 '선험적 분적론' 에 이어 '선험적 변증론'에서 이성의 작용을 다룬다. 오성이 판단하는 능력이라면 이성은 추리하는 능력이다. 이성(Vernunft)은 오성의 통제권 아래서 작용할 때는 인식의 확장과 통일에 도움을 주는 아주 유용한 인식능력이다. 감성의 다양함에 오성이 통일성을 부여했듯이 이성은 오성의 다양한 판단들에 통일성을 부여함으로써 인식을 확장하는 데 기여한다. 이것을 칸트는 '이성의 통일' (Vernunfteinheit)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문제는 이성이 자꾸 오성에 통일을 부여하는 역할을 넘어 물자체로 진입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이성은 입법자가 되어 물자 체를 인식하려고 하는데. 이는 이성 자신이 추리하며 생각하는 것이 생각한 그대로 현실에 존재한다고 믿는다는 말과 같다.
(P.146)
경험적으로만 사용하는 원칙 - 오성의 내재적 사용
경험의 제한을 철폐하는 원칙 - 오성의 초험적 사용
초험적 사용을 통해 생긴 선험적 가상은 비판을 통해 사라지지 않는다. 비판을 통해 선험적 가상을 제거할 수 없다면 도대체 선험적 변증론이 왜 필요할까? 우리는 물 속에서 구부러진 젓가락이 착시현상임을 알지만 우리의 눈에는 여전히 구부러진 것으로 보인다. 감각기관의 이런 착각처럼 오성의 착각도 그것이 착각임을 안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눈의 착시가 자연스러운 것처럼 오성 의 착각도 우리의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소질의 산물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제거할 수는 없고 판단을 내릴 때 속지 않도록 하는 것이 선험적 변증론의 역할이다.
우리가 물에서 구부러진 젓가락을 보고 그것에 속아 젓가락이 구부러졌다는 판단을 내리지 않기 위해서는 눈이 그런 착각을 일으 키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칸트는 오성의 착각에 속지 않기 위해 오성의 착각이 발생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것은 이미 말했 듯 오성의 본성에서 기인한다. 오성은 규칙들을 사용해서 현상들을 통일하는 능력이며 동시에 자신의 규칙들을 원리들을 사용하여 통일하려는 추리능력이다. 이렇게 오성의 능력이 추리능력으로 사용될 때 오성은 이성이라고 불린다. 그러니까 칸트가 말하는 선험적 변증론에서 거론하는 이성은 오성과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인식능력이라기 보다는 추리능력이라는 특수한 사용방식을 의미한다. 이성은 경험이나 대상에 직접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오성이 작업한 산물들을 재가공하여 경험의 보다 높은 통일성을 만들어낸다. 이때 재가공 작업이란 물론 추리작업을 의미한다.
(P.153)
선험적 관념론은 사물이 단지 우리의 표상이며 우리가 보는 그대로 사물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선험적 관 념론에 대립하는 것은 선험적 실재론이다. 선험적 실재론은 우리들의 감성과 무관하게 사물들이 존재한다고 본다. 공간을 예로 들어보자. 선험적 관념론자에게 공간은 감성의 형식이고 감성 밖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선험적 실재론자는 감성과 상관 없이 공간의 실제로 존재한다고 본다. 언뜻 듣기에 선험적 실재론은 우리의 상식적 견해인 경험적 실재론과 유사한 듯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선험적 실재론자는 나중에는 경험적 관념론자 노릇을 한다. 왜 그럴까? 우리는 인식과 상관없이 공간과 사물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말을 눈을 감고 있는 동안에도 우리가 감각한 그대로 세상이 존재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선험적 실재론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감성과 상관없이' 이다. 선험적 실재론에서는 감성과 상관없이 세계가 존재하므로 우리가 감각하는 대로 세계와 사물이 있다고 말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
그러니까 선험적 실재론의 주장은 눈을 감을 때도 세계가 그대로 있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눈을 뜨고 있어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장님이라는 소리이다. “우리가 눈뜬 장님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공간의 실재성을 주장할 수 있소?”라고 선험적 실재론자에게 묻는다면 그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공간은 물론 있지요. 그건 감성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이성의 순수한 눈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이라오." 결국 선험적 실재론에서 실재론은 우리가 감각한 대로 세상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사유한 대로 세상이 있다는 의미에서의 실재론이다. 그러므로 감각을 통한 우리의 모든 경험은 환상이며 결코 믿을 수 없다. 감성에 대한 불신 때문에 선험적 실재론자는 경험적 관념론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P.172)
도대체 실재한다는 건 무엇일까? 칸트는 선배 철학자들이 사용하던 관념론의 정의만 바꾸어놓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실재론의 정의 역시 완전히 바꿔놓았다. 실재론의 전통적 용법으로 보자면 칸트의 경험적 실재론이란 우리의 표상이 표상이라고 해서 헛된 환상이라고 치부할 필요는 없고 그 표상도 충분히 보편타당하게 볼 수 있다는 주장에 불과할 뿐, 실재 그 자체에 대해서는 말하는 바가 없다. 오히려 사물 그 자체, 즉 물자체는 알 수 없다고 한 점에서 보자면 그의 주장은 반 (反)실재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세계의 실재성에 대해 대답해야 할 자리에서 계속 보편타당성만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이 철학자는 혹시 사오정 아닐까? 물음을 잘못 알아듣고 엉뚱한 대답을 계속하니 말이다. 그러나 잘못된 것으로 들리는 이 대답에 바로 칸트의 위대성이 숨어 있다. 그는 전혀 다른 대답을 통해 새로운 질문의 지평을 열어 놓은 것이다. 칸트의 대답을 들으며 우리는 실재성의 정의를 다시 한번 묻게 된다. 도대체 있다는 것은 뭘까? 그리고 없다는 것은? 못을 박으려고 망치를 찾는다고 하자. 집에는 망치가 없다. 그때 우리는 '망치가 없네” 라고 말한다. 물론 철물점에 가면 망 치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에 망치가 없다고 말할 때 우리가 잘못 말한 것은 아니다. 망치가 있다는 말과 망치가 없다는 말 모두가 참이라는 것은 말 자체로는 모순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순에 빠지지 않는다. 있다는 말과 없다는 말을 특정한 조건 하에서 사용하기 때문이다. 집에 망치가 없다는 것은 지금 곧 사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손에 집히는 곳에 그 사물이 있지는 않다는 뜻이다. 망치가 있다고 할 때도 비슷하다. 망치는 지금은 쓸 수 있는 방식으로 내 앞에 있지만 내일이 되어 누군가 훔쳐갈 수도 있고 시간이 지나면 녹슬고 부서져 없어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망치가 있다고 말하는 데 어떤 어려움도 느끼지 않는다.
이것은 실재성 개념이 어떤 조건 아래에서 어떻게 정의되느냐에 띠라 매우 상이하게 쓰일 수 있는 것이고, 또 그렇게 쓰일 때 비로소 의미있음을 보여준다.
(P.176)
『순수이성비판』은 커다란 두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먼저 선험적 감성론. 선험적 논리학은 모두 선험적 원리론에 속한 것이었다. 오성의 범주와 원칙들의 분석. 그리고 조금 전까지 살펴본 선험적 변증론은 다시 선험적 논리학에 서술되어 있는 부분이었다. 선험적 변증론을 마지막으로 해서 선험적 원리론이 끝나고 또 하나의 부분인 선험적 방법론이 시작된다. 칸트철학의 논리적 체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첫번째 부분인 선험적 원리론을 읽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철학자로서 그의 고유한 문제의식, 그의 소망과 욕구를 알고 싶다면 선험적 방법론을 읽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아는 한 칸트 연구자는『순수이성비판』 선험적 방법론을 무협지처럼 흥미진진하다고도 표현했다. 선험적 방법론은 선험적 원리론과 달리 읽기가 어렵지 않다. 선험적 방법론에 나타난 많은 것들, 칸트와 그의 동시대인들이 철학이라는 이름 하에 상상했던 것, 선배철학자들에 대한 솔직한 평가, 예컨대 흄에 대한 칸트의 엄청난 애정고백을 보면서 우리는 그의 숨결을 아주 가까이서 느낄 수 있다.
(P.201)
선험적 변증론에서 칸트는 이성이 자아, 세계, 신에 대한 피할 수 없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환상이 우리의 과 학적 경험세계를 침범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경험적 현상세계의 지위를 확고히 하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일련의 언급들을 통해 칸트의 후배철학자들은 선험철학의 핵심이 '구성'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피히테가 말했듯이 대상에 대한 인식은 우리가 구성하는 것이며. 인간의 창조적 활동능력의 산물이다. 달리 말해서 현상세계 역시 우리의 불가피한 그러나 창조적인 하나의 환상에 불과 하다.
쇼펜하우어 역시 칸트에 대해 비슷한 결론을 내린다. 현상은 마야의 베일(the veil of Maya)이다. 쇼펜하우어의 작품을 읽으면서 칸 트에 대한 관심을 키웠던 니체도 마찬가지였다. 경험세계는 우리가 생리적, 본능적, 사회•역사적 차원에서 구성해낸 일종의 퍼스펙티브(perspective. 관점 • 전망)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결론에 머물렀다면 니체는 칸트의 이류에 불과했을 것이다. 니체는 하나의 보편적이고 일반적 환상이 아니라 우리의 활동에 의해 무한히 증식히는 흰상들, 니체 자신의 용어로는 수많은 퍼스펙티브의 생산이 기능하며 생의 고양을 위해 이런 생산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단언한다. 그러한 단언으로써 그는 칸트의 영토 밖으로의 위대한 첫발을 내딛었다.
니체는 칸트의 환상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칸트적 환상의 빈곤함에 반대한다. 니체가 보기에 이 빈곤함은 칸트의 실체성 애호 취향 에서 비롯된 것이다. 회의주의에 대한 공포에 떨며 인식의 확실하고 견고한 지반을 찾는 데 깊은 관심을 가졌던 칸트로서는 그런 취향이 어쩔 수 없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든 칸트에게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사유형식, 개별적 경험의 변덕이나 변화 속에서 독립성을 견지할 수 있는 안전한 사유형식이 필요했다. 즉 그에게는 사람들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단 하나의 환상이 필요했다. 니체가 칸트를 불임의 철학자라고 비난했던 이유는 그 때문이다. 무한히 창조적인 생신능력을 가진 우리가 왜 아이를 하나만 낳아야 하는가? 왜 하나의 환상만을 고수해야 하는가? 하나의 환상만을 고수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풍경을 담고 있을 수많은 창들이 달린 성채에 살면서 창문 하나만 열어두고 같은 거리풍경을 매일 바라보는 것처럼 지루 하고 어리석은 일이다. 니체는 환상이 아니라 환상들을 무한히 다양한 방향으로 열린 수많은 창들을 원했다.
(P.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