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은띠를 찾아서

발터 뫼르스 / 이광일 / 들녘 / 950쪽

(2018.7.8.)

루모는 잠시 멈춰 서서 털가죽에 쏟아지는 햇살을 즐겼다. 실눈을 뜨고 눈부신 햇살을 바라보다가 이내 눈을 감았다. 거기에 다시 나타난 것은 세상이었다. 눈을 감으면 세상은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그것은 냄새의 세계로, 그의 내면의 눈앞에서 수백 가지 색채로 산들거렸다. 붉고, 노랗고, 푸르고, 파란 빛으로 된 가는 빛줄기들이 뒤죽박죽이 되어 펄럭인다. 푸른빛은 그 옆으로 우거진 풍성한 로즈메리 덤불로 이어졌고, 노란빛은 맛 좋은 레몬과자로 이어졌고 붉은빛은 건초더미를 은은히 태우는 연기로 이어졌다. 파랑은 가까운 바다 와 냄새를 실어 오는 신선한 아침 바람이었다. 그러고도 다른 많고 많은 색채가 있었다. 늪돼지들이 뒹구는 진창의 갈색 깃발처럼 흉하고 더러운 색체도 있었다. 그러나 루모가 정말 놀란 것은 전에는 결코 맡아보지 못한 어떤 색깔이었다. 이 모든 지상의 냄새 위로 서 높은 곳에서 은빛 띠 하나가 필력이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얇고 부드러운 띠였다. 그는 내면의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P.20)

이런 험악한 현실에 이제 볼퍼팅어 젖먹이가 끌려 들어온 것이다. 녀석은 아직도 네 발로 다니고. 말도 할 줄 몰랐고, 가끔 토하기도 했다. 그러나 스마이크는 자기가 기억의 방을 만든 이유를 이 젖먹이가 구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냄새나는 웅덩이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게 해주는 희망을 젖먹이가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꼬마는 이 소름 끼치는 세상에 아직 남아 있는 마지막 희망. 즉 악마바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대변하는 존재였다. 이런 소망에는 이름이 필요하다고. 그런 희망은 명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그는 확신했다. 그는 어찌할까를 그리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그가 유달리 소중하게 여기는 차모니아 카드놀이가 있었다. 이 놀이에서 가장 중요한 카드는 놀이의 이름이기도 한 루모였다. 루모를 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운명에 도전해서 모든 것 - 진짜 모든 것-을 위험에 빠뜨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집채만 한 승리를 약속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루모가 그 이름이 된것이다.

(P.46)

극히 최근에는-그러니까 한 이백 년 전부터- 영웅의 범주가 다시 확장됐다. 영웅이라고 반드시 죽을 필요는 없었다. 영응적 행위가 꼭 전쟁터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예술이나 음악, 문학, 의학 또는 자연과학 분야에서도 충분히 가능했다.

힐데군스트 폰 미텐메츠는 차모니아 작가들 가운데 거장이었고 압둘 나호티갈러 교수는 천재 과학자이자 발명가였고, 콜로포니우 스 레겐샤인은 전설적인 책 사냥꾼으로 부흐하임의 지하묘지에서 실종됐으며, 훌라제프덴더 슈루티는 공포음악을 창시했다. 이들은 영웅이었다! 현대 영웅의 표준을 대표하는 사람들은 피범벅이 된 도끼를 휘두를 필요가 없었다. 애매한 경우에도 잉크를 적신 깃펜이나 지휘봉만으로 충분했다.

이런 대담한 주장을 하면서 하라 선생은 수업을 마쳤다. 루모가 생각하는 영웅은 폴초탄 스마이크의 이야기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 에 전혀 달랐다. 창 대신 바이올린 활을 든 영웅은 아무래도 상상이 가지 않았다.

(P.266)

가우납 62세는 열에 들떠 은귀안의 어린이 책을 넘기다가 한 가지 생각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이어 과대망상적인 비전과 아이디어들이 연쇄반응처럼 터져 나왔다. 가우납 62세의 건축을 향한 꿈, 아름다운 죽음의 극장, 호문켈, 브라호크, 연금술사들의 비법, 어린이 책의 삽화, 지상세계와 지하세계, 그 모두가 하나의 계획으로 녹아들었다. 사악하기는 하지만 탁월한 독창성을 지닌 계획이었다.

가우납 62세는 자문관들과 건축가. 장성, 연금술사. 아름다운 죽음의 극장 총책임자를 소집했다. 그는 햇빛을 받으면서도 일할 수 있 는 호문켈을 동원해 지상세계에 지하세계와 계단으로 연결되는 도시를 건설하고 싶어 했다. 도시는 다 건설하고 나면 그 자리에 남겨 두고 건설인력만 헬로 돌아온다는 구상이었다.

왕의 자문관들은 망연자실해서 서로를 바라보며 맥 빠진 박수를 쳤다. 분명 또 다시 망상이 만들어낸 아이디어로 돈만 잔뜩 날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왕이 한 말은 다 짓고 나서 기다려보자였다. 인내심 많은 눈 백 개 달린 거미처럼 기다려보자. 온 도시가 족속들로 가득 찰 때까지 기다려보자. 그럼 결국은 도시가 가득 찰 것이다. 보통 사람에게 잘 꾸민 도시처럼 매력적인 것도 없을 것이다. 그의 구상은 이런 식이었다.

건축가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되는 얘기였다.

마침내 그 도시가 다 차게 되면 밤에 다들 잠자는 틈을 타서 헬의 군대가 브라호크를 타고 올라가 그곳 주민들을 연금술로 만든 가스로 마비시켜 헬로 끌어온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장성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브라호크를 실전에 투입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브라호크를 통제하는 연금술사들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우납은 또 말하기를, 포로 잡은 노예들은 납 광산이나 하수도 건설 현장, 용광로 무기제조창 등등에서 노동력으로 쓸 수 있다고 말 했다. 그리고 특히 힘이 세고 싸음-을 잘하는 포로는 아름다운 죽음의 극장에 내보내 백성들에게 기쁨을 선사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P.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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