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레고메나
임마누엘 칸트 / 염승준 / 책세상 / 229쪽
(2018. 7. 22.)
이 책은 이미누엘 칸트의《학문으로서 출현 가능한 미래의 모든 형이상힉을 위한 프를레고메나Prolegomena zu einer jeden kunftigen Metaphysik, die als wissenschaft wird auftretne konnen》(이하《프를레고메나》) 가운데 “초월적 주요 물음에 관하여 첫째 부분 : 순수 수학이 어떻게 가능한가?”와 “초월적 주요 물음에 관하여 둘째 부분 : 순수 자연과학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제외한 전체를 옮긴 것이다. 그리고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역자 나름대로 주해를 붙였다.
《프를레고메나》는 칸트가《순수이성 비판》을 출간하고 나서 2년 뒤에 이 책에 대한 오해와 비판을 해소하기 위해 발표한 저작이다. 《순수이성 비판》의 근본 사상과 핵심 내용을 압축해 쉽게 풀어 쓴 것이기 때문에 두 책은 구조도 비슷하다. 그럼에도 문고라는 성격상 분량의 제약 때문에 전체를 번역하지 못하고 부득이하게《순수이성 비판》의 '초월적 변증론'에 상응하는《프롤레고메나》의 세 번째 부분만을 옮기게 되었다. 이 부분을 선택한 것은 칸트가《순수이성 비판》 2판 서론에서뿐만 아니라《프롤레고메나》에서도 독자에게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순수 사변 이성의 인식 원리들과 인식 요소들 간의 유기적 관계이고, 여기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칸트는 순수이성의 유기적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순수이성은 이성 자체 안에서...... 예외 없이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분리된 영역이어서, 누구라도 모든 여타의 부분들 과 접촉함 없이는 순수이성의 어떤 부분도 건드릴 수 없고, 사전에 자신의 위치와 다른 모든 부분에 들림없이 영향을 끼치지 않고서는 어떤 것도 이행할 수 없다.” 이 말은 곧 '초월적 감성론에서 감성의 선험적 형식인 '공간과 '시간은 '초월적 분석론'과 '초월적 변증론'에서 다루고 있는 '지성개념들'과 '초월적 이념들'과 엄격하게 구분되면서도 상호 연결 되어서 영향을 끼치지 않고서는 어떤 기능도 수행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은《순수이성 비판》의 목차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P.11)
만약 형이상학이 학문이라면, 어떻게 형이상학이 다른 학문들처럼 보편적이고 지속적인 동의의 상황에 처할수 없겠는가? 만약 형이상학이 학문이 아니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형이상학이 학문이라는 위장 아래서 끊임없이 허풍을 떨고 인간의 지성으로 하여금 결코 완수될 수 없지만 사라지지도 않을 희망에의 기대를 품게 하는가?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신의 앎 혹은 무지를 드러내게 될지라도 이 근거 없는 학문의 본성에 대해서 반드시 한 번은 어떤 확실한 것이 수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현재의 토대 위에서는 이 근거 없는 학문이 얼마 지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학문이 끊임없이 진전하는 동안 지혜 자체이고자 하는, 그리고 모든 사람이 지혜의 신탁(神託)을 묻는 이 형이상학이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동일한 위치에 서성거리고 있다는 점은 비웃음을 살 만하다. 실제로 형이상학의 많은 추종자들이 사라졌고, 다른 학문에서 뛰어난 학식이나 재능을 나타내는데 충분히 자긍심을 갖는 그런 사람들이 굳이 여기〔형이상학〕에서 그들의 명성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를 하지 않는다. 그밖에 다른 모든 여타의 것들에는 무지한 자들조차 여기〔형이상학〕에서는 주제넘게도 중요한 판년을 내린다. 왜냐하면 이 (형이상학이라는) 지대(地帶) 위에서는 천박하기만 한 끊임없는 지껄임과 정확함을 구별하기 위한 어떤 확실한 척도도, 그리고 분동(分銅)도 존재 하지 않기 때문이다.
(P.20)
순수이성은 이성 자체 안에서 그렇게 예외 없이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분리된 영역이어서, 누구라도 여타의 모든 부분들과 접촉하지 않고는 순수이성의 어떤 부분도 건드릴 수 없고, 사전에 모든 부분에 자신의 위치와 다른 부분에 틀림없이 영향을 끼치지 않고서는 어떤 것도 이행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판단을 내부에서 고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순수이성의 영역 밖에 있을수 없으며, 각부분의 타당성과 각 부분이 이성 자체 안의 나머지 것들에 대해 갖는 관계에 의존해 있고, 마치 유기체의 사지의 구조처럼, 각 부분의 목적은 전체의 완벽한 개념으로부터만 파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만약 비판이 전체적으로 순수이성의 최소한의 요소들에까지 성공적으로 완수되지 않는다면, 누군가는 그러한 비판이 결코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고, 또 사람들은 이 능력들의 영역에 관하여 모든 것을 규정하고 결정해야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무 것도 규정하지도 결정하지도 못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P.32)
형이상학적 인식은 순전히 선험적 판단들만을 포함해야 하며, 그것은 이 인식 원천들의 특이성이 요구하는 바이다. 판단들은 이때 판단들이 어떠한 근원을 갖든지 간에, 혹은 판단들의 논리적 형식에 따라 어떠한 성질을 갖든지 간에, 내용에 있어서는 판단의 구별이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내용에 따라서 판단들은 단지 설명적이어서 인식의 내용에 어떤 것도 추가하지 못하거나, 혹은 확장적이어서 주어진 인식을 확대하거나 한다. 첫째 판단들은 분석판단으로, 둘째 판단들은 종합판단으로 부를 수 있다.
분석적 판단들은 술어에서 주어의 개념에 이미 실재로 생각되는 것 외에 어떤 다른 것도 말하지 않는다. 비록〔주어의 개념 안에서 이미 실재로 생각되는 것이〕그다지 명료하지 않고, 그렇게 의식적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말이다. 만약 내가 “모든 물체는 연장적이다”라고 말하면, 나는 물체에 대한 나의 개념을 전혀 확장하지 못한다. 저 개념의 연장성은, 비록 명확하게 말한 것은 아니지만, 판단에 앞서 실제로 생각되어지는 것을 통해서 물체의 개념을 분해한 것일 뿐 이다. 따라서 그 판단은 분석적이다. 이와 반대로 '몇몇의 물체는 무겁다'라는 명제는 물체에 대한 일반적 개념 안에서 실제로 생각되어지지 않는 무엇인가를 포함한다. 따라서 그 명제는 나의 개념에 무엇인가를 덧붙임으로써 나의 인식을 확대하고, 바로 그런 점에서 종합적 판단이라고 일컬어야 한다.
(P.40)
근본적으로 형이상학적 판단들은 모두 종합적이다. 사람들은 형이상학에 속하는 판단들과 본래적으로 형이상학적인 판단들을 구별해야 한다. 형이상학에 속히는 판단들 가운데 대부분의 판단들은 분석적이지만, 그것들은 단지 학문의 목적이 전적으로 지향하고, 언제나 종합적인 형이상학적 판단들을 가능하게 할 수단을 형성할 뿐이다. 만약 개념들이 형이상학에 속한다면, 실례를 들자면 실체의 개념, 그 개념들의 순전한 분해로부터 발원히는 판단들 또한 필연적으로 형이상학에 속할 것이다. 예를 들면 '실체는 단지 주체로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등등. 그리고 그와 같은 다수의 분석판단들을 매개로 우리는 그 개념들의 정의에 접근하고자 한다. 그러나 순수한 지성개념의 분석은(그와 같은 것을 형이상학이 포함한다) 형이상학에 속하지 않는('공기는 탄력적인 유체이고, 그 것의 탄력성은 알려져 있는 어떠한 한냉(寒冷)의 정도에 의해서도 제거되지 않는다') 다른 모든 개념의, 그러니까 또한 경험적인 개념의 분해 이외의 다른 방식으로는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비록 그 개념은 본래 형이상학적이지만, 그 분석 판단 자체는 본래적으로 형이상학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이 학문은 어떤 특별함과 그 학문의 고유성을 그 학문의 선험적 인식의 생산 안에서 갖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험적 인식은 따라서 그 학문이 다른 모든 지성인식들과 공통적으로 갖는 것으로부터 구별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사물들에서 실체인 모든 것은 고정불변하다'리는 명제는 종합적이고 전형적으 로 형이상학적인 명제다.
(P.48)
우리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 독단론에 넌더리가 나고 동시에 우리에게 아무것도, 심지어 허락된 무지의 평온 상태마저 약속하지 않는 회의주의에 넌더리가 나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인식의 중요성에 의해 강요되어, 우리가 소유한다고 믿었던 것들과 혹은 순수이성이리는 이름하에 우리에게 제공된 모든 것과 관련해 오랜 경험에서 비롯된 불신으로, 우리에게는 남은 것은 단지 '형이상학이 도대체 가능한가?' 하는 하나의 비판적인 물음이다. 이 비판적 물음에 대한 답변에 의해서만 우리는 우리 미래의 거동을 정할수 있 다. 그러나 이러한 물음은 현실적인 형이상학의 어떠한 종류의 주장들을 반박하는 데에서 대답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왜냐하면 우리는 현재 어떤 형이상학도 타당한 것으로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학문의 문제성 있는 개념에서 답변되지 않으면 안된다.
《순수이성 비판》에서 나는 이 물음에 관해서 종합적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순수이성 자신 안에서 연구했고, 이 원천 안에서 그 요소들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순수한 사용의 원칙들을 원리들에 따라 규정하려고 했다. 이것은 쉽지 않은 작업으로 점차로 체계 속으로 파고들어가 생각할 수 있는 결연한 독자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이성 자신 이외에 주어진 것으로써의 어떤 것도 토대로 삼지 않는 것이고, 따라서 어떠한 실재 사실에도 의지함 없이 인식을 이성의 근원적인 맹아로부터 발전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에 반해《프롤레고메나》는 예행연습이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학문을 실현시키기 위해 학문 자체를 진술하기보디는 사람들이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은〔《프롤레고메나》〕사람들이 이미 신뢰할 만한 것으로 알고 있는 어떤 것에 의지해야 한다. 거기서부터 사람들은 안심하고 출 발해서 사람들이 아직 모르는 원천들로 올라갈 수 있고, 그 원천들의 발견은 우리에게 사람들이 알았던 것을 설명해줄 뿐만 아니라, 전부 상술한 원천들에서 기인하는 많은 인식들의 범위를 구체화하게 해줄 것이다.《프롤레고메나》의, 특히 미래의 형이상학을 준비해야 하는《프롤레고메나》의 방법적 태도는 따라서 분석적이 된다.
(P.54)
《순수이성 비판》에서 나의 가장 큰 주안점은 어떻게 내가 항상 인식의 종류들을 신중하게 구별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 뿐만 아니라, 각각의 인식의 종류들에 속하는 모든 개념들을 그것들의 공통적인 원천에서 어떻게 끌어낼 수 있는가에 있었다. 나는 개념들이 어디에서 파생했는지를 가르치는 것을 통해서 개념들의 사용을 확실하게 규정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선험적 개념들의 열거, 범주화 그리고 자세한 설명에 있어서, 다시 말해서 원칙들에 따라서 인식하는 일찍이 누구도 짐작한바 없는, 그러나 평가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히 귀중 한 이점을 얻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것 없이 형이상학에서 모든 것은 엉터리 광시곡(狂詩曲)으로서 사람들은 자신이 소유한 것이 충분한 것인지 아닌지, 혹은 무엇인가가 빠 지지 않았는지 그리고 어딘가에서 빠지지 않았는지를 알 수 없다. 당연히 이러한 장점을 사람들은 오직 순수한 철학에서만가질 수 있고, 이것이 철학의 본질을 이룬다.
나로서는 지성의 모든 판단의 네 가지 논리적 기능들 안에서 범주들의 근원을 발견했기 때문에, 이념들의 근원을 이성 추리들의 세 가지 기능들에서 찾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순수이성개념들(초월적 이념들)이 현존한다면 순수이성개념들은, 사람들이 순수이성개념들을 타고난 것으로 간주하려고 하지 않는 한, 동일한 이성활동 외에 어느 곳에서도 만날수 없기 때문이다.
이성추리들의 형식적 차이는 이성추리들을 필연적으로 정언적, 가언적 그리고 선언적 이성추리로 분류하게 한다. 이성추리의 형식적 차이에 근거한 이성개념들은 첫째로 완전한 주체의 이념(실체), 둘째로 조건들의 완전한 계열의 이념, 셋째로 가능한 것의 절대적인 전체의 이념 안에서의 모든 개념의 규정을 포함한다. 첫째 이념은 인간의 영혼과 관련된 것이었고, 둘째 이념은 우주론적인 것이며, 셋째 이념은 신학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세 이념들은 각각의 고유한 방법에 따라 변증법을 초래했기 때문에, 그에 의거하여 순수한 이성의 전체 변증법의 구별이 근거하게 된다. 즉 오류추리론, 이율배반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순수이성의 이상으로 구별되게 된다. 이러한 도출을 통해서 사람들은 순수이성의 모든 주장들이 여기서 충분히 완전하게 제시되고 그 어떤 유일한 것도 빠질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중받게 된다. 왜냐하면 순수이성의 모든 주장들이 자신들의 원천으로 삼는 이성능력 자체는 그렇게 함으로써 완전하게 측정되기 때문이다.
(P.68)
이성이 자신(이성〕의 의지에 반해서 자신〔이성〕의 비밀스 러운 변증론-이성은 이 변증론을 독단론이라고 거짓 주 장한다-을 밝히는 유일하게 가능한 경우는, 이성이 일반적으로 인정된 원칙에서 주장을 근거짓고, 마찬가지로 공인 된 다른 원칙에서 추론 방식의 정당성을 가지고 그 반대를 정확하게 추론하는 경우이다.
(P.86)
회의주의는 본래 형이상학에서, 그리고 단속 없는 그것(형이상학〕의 변증학에서 발생 한다. 처음에 회의주의는 단지 이성의 경험적 사용을 위해서 이것(경험적 사용)을 넘어가는 모든 것을 실속 없고 기만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점차로 사람들은 동일한 선험적 원칙들-사람들은 이러한 동일한 원칙들을 경험에서 사용하고, 부지불식간에 얼핏 보면 경험이 도달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끌고 간다-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챘기 때문에, 경험의 원칙들에서조차 의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것(경험의 원칙)에서는 어떠한 곤경도 없다. 왜냐하면 건강한 지성은 이 점에서 언제나 자신의 권리들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어디까지 이성을 신뢰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왜 단지 거기까지이고 더 멀리까지는 이성을 신뢰할수 없는지를 규정한 수 없는 특별한 혼란이 학문 안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은 단지 형식을 갖추고, 원칙들로부터 이끌어진 우리의 이성사용의 경계규정을 통해서만 제거 될 수 있고, 미래에 발생할수 있는 이러한 문제의 재발을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가능한 경험을 넘어서 사물들 자체일 수 있는 것에 대해 우리가 어떠한 규정된 개념도 줄 수 없다는 것은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적으로 경험을 멀리하는 그것들 (사물들 자체〕에 대한 물음 앞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왜냐하면 경험은 이성에게 단 한 번도 완전한 충족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성〕은 우리를 물음들에 대한 답에서 언제나 뒤로 물러나게 하고, 물음들의 완전한 해명과 관련해서 우리 를 불만족스럽게 한다. 누구든지 이러한 것을 순수이성의 변증론에서 충분히 볼 수 있괴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변증론은 타당한 주관적 근거를 갖는다.
(P.106)
영혼이라는 것이 도대체 본래 무엇인지를 묻지 않고서, 그리고 만약 어떠한 경험개념도 그것〔영혼)에 대해서 충분하지 않다면, 비록 우리가 그것〔비물질적 존재의 이성개념)의 객관적 실재성을 전혀 증명할 수 없다 할지라도, 필요한 경우 (단순한 비물질적 존재의) 이성개념을 이러한 필요성 때문에 승인하는 것 없이. 우리가 우리의 영혼의 본성으로부터 가장 명확한 주체의 의식으로까지 도달한디는 것을 누가 견뎌낼 수 있겠는가? 그리고 마찬가지로 누가 그것(주관〕의 현상들이 물질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확신에 도달하는 것을 견뎌낼 수 있겠는가? 누가 세계의 영속(永續)과 크기, 자유 혹은 자연필연성에 대한 모든 우주론적인 물음에 있어서 한갓 경험적 인식에 만족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어떻게 시작을 하든지 간에, 경험적 원칙들에 따라서 주어진 모든 대답은 언제나 새로운 물음을 낳을 수 있고 이러한 새로운 물음은 마찬가지로 대답을 요구하며 그것을 통해서 결국 이성의 만족을 위한 모든 물리적 설명의 방식들의 불충분함을 분명 하게 입증하니 말이다.
(P.107)
모든 잘못된 기술, 모든 허황된 지혜는 오래 지속될 수 없 다. 왜냐하면 결국 그것(모든 잘못된 기술, 모든 허황된 지혜) 스스로 자신을 파괴하고, 그것의 최상의 발달Kultur은 동시에 그것의 몰락의 시점이기 때문이다. 형이상학과 관련해서 이 시간이 지금 도래했다는 것을 그 상황이 증명해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형이상학은 그 밖에 학문들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검토된 모든 열의에도 불구하고, 학식 있는 시민들 아래에서 쇠퇴한다. 대학의 오래된 연구 제도는 아직 형이상학의 잔영을 보존하고 있고, 학문들의 유일한 학술원은 때때로 포상을 통해 형이상학 안에서 이런 저런 시도를 하도록 사람들을 움직이지만, 형이상학은 더 이상 근본적인 학문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가령 사람들이 위대한 형이상학자라고 부르고자 하는 어떤 기지 있는 사람이 이러한 선의의, 그러나 어느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는 찬사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는 스스로 판단해보는 것이 좋다.
그러나 비록 모든 독단적인 형이상학이 쇠퇴할 시간이 의심할 여지 없이 도래했다고 할지라도, 근본적이고 완성된 이성 비판을 매개로 독단적 형이상학의 쇠퇴에 반대해서 형이상학의 부활의 시간이 이미 도래했디는 것을 말할 수 있 기 위해서는 몇 가지 부족한 점이 있다. 하나의 경향이 그것과 반대되는 경향으로 넘어가는 모든 이행들은 무관심의 상태로부터 일어나는데, 이러한 시기는 한 저자에게 있어서 가장 위험한 것이지만,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학문에 있어서는 가장 바람직한 시기다. 왜냐하면 만약 이전 결합들과의 완전한 단절 뒤에 편협한 정신이 사라지고 나면, 그 마음들은 다른 계획에 의한 동맹을 위한 제안들을 경청하는 최상의 상태에 있게 되기 때문이다.
(P.132)
내가 이《프롤레고메나》에 대해 이 책이 비판의 영역에서 탐색을 활발하게 하고, 사변적인 영역에서 자양분이 부족한 듯 보이는 철학의 일반적allgemein 정신에 많은 새로운 것을 약속할 수 있고 생명을 건강하게 유지시킬 수 있는 대상을 제공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할 때 나는, 이미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내가《비판》에서 인도한 가시밭길에 불만과 지겨움을 품게 된 누군가가 나에게 어디서 이러 한 희망을 근거 짓는지를 물을 것이라는 점을 말이다.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저항할 수 없는 필연성의 법칙에서”이다.
인간 정신이 형이상학적 탐색을 언젠가 완전히 포기하게 된다는 것은, 오염된 공기를 들이마시지 않기 위해 호흡을 멈춘다는 것처럼,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세계에는 언제나 형이상학이 있으되, 특히 사유하는 사람들에게는 공적인 표준 척도가 없는 한에서, 모두가 자신의 방식대로 형이상학을 재단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형이상학이라 불리었던 것들은 꼼꼼하게 검사하는 재능을 가진 어떤 사람도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형이상학을 완전히 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결국 순수이성 자체의 비판이 시도되어야 하고, 만약 비판이 현존한다면 탐색되어야 하고, 보편적인 검사에 부쳐져야 한다. 왜냐하면 한갓 지식욕 이상의 욕망이 끝까지 강요하는 것을 제거할 어떤 수단도 없기 때문이다.
(P.133)
“인간의 이성은 어떤 종류의 자기 인식에 있어서 특수한 운명을 갖는다. 인간의 이성은 이성의 자연본성 자체로부터 부과된 것이기에 피할 수도 없고 인간 이성의 모든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어서 대답할 수도 없는 문제들로 인해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칸트가《순수이성 비판》서문에서 독자에게 처음으로 건네는 말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인간의 이성은 '이성의 자연본성 자제로부터 부과되는 '대답할 수 없는 문제'들로 인해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 이 '대답 할 수 없는 문제가 인간 이성을 혼돈과 당착에 빠뜨렸으며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를 전쟁의 역사로 만들었다. 우리가 인간이고, 인간의 이성이 이와 같은 '특수한 운명'을 가지고 있다면 이러한 이성의 운명은 우리 모두의 운명이 된다.
(P.162)
칸트는 이처럼 동일한 이성의 분열로 발생한 독단주의, 회의주의 같은 적대자를 “우리 자신 안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서양 형이상학에서 등장한 모든 주의나 주장 들은, 시대순 혹은 주제별로 잘 정리된 '서양 철학사'를 통해 서 배울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스스로가 자신의 이성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철학은 배울 수 있 는 것이 아니다, 다만 스스로 철학함만을 배을 수 있다는 칸트의 말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P.163)
칸트의 주저《순수이성 비판》이나 이 책의 번역 텍스트인 《프를레고메나》셋째 부분의 주제인 '어떻게 형이상학 일반이 가능한가?'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은, 과연 우리의 이성이 '대답할 수 없는 문제', 즉 형이상학적 문제들로 인해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단 한 번도 인간 이성의 자연본성 자체로부터 부과된 대답할 수 없는 문제들로 괴로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형이상학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기능한가? 단 한 번도 자기 자신이 독단주의자, 회의주의자, 무정부주의자라는 자기반성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칸트 비판철학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형이상학적 문제들을 문제로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형이상학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물음을 던질 수 있겠는가?
누군가가 칸트 철학을 읽고 공부하려는 이유가 칸트 철학 의 권위 때문이라거나, 칸트 철학이 서양 철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 반드시 넘어야 할 산맥이라서, 또는 칸트 이후의 독일관념론자인 피히테. 셸링, 헤겔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칸트 철학의 초대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칸트 철학이 난해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그의 책이 외국어인 독일어로 쓰였기 때문도, 난해한 개념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대답할 수 없는 문제'가 나의 실존적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며, 이성 스스로가 이성 자신에게 부과하는 문제를 감지하지 못한 채 이성이 이성 자신에게 언제나 낯선 타자로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이성이 언제나 낯선 타자로 남아 있는 사람에게 칸트 철학은 무미건조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일 뿐이다.
(P.167)
칸트는《프롤레고메나》서문에서 지금까지 형이상학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어떤 확실한 측정 단위나 분동(分銅)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형이상학적 문제들에 대한 모든 작업은 일시적으로 정지되어야 하며, 형이상학이 도대체 가능한 것인지 아닌지를 묻는 것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확신시키는 것이 자신의 목적이라고 밝힌다. 이 말은 형이상학의 가능성 여부를 묻기 이전에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기존의 형이상학이 제시한 답들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이 '동굴의 비유에서 인간이 이성을 통해 존재와 인식의 근거인 이데아를 직관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 칸트는 인간 이성이 이데아와 같은 형이상학적 대상을 인식할수 있는지를 먼저 문제 삼는다는 점에서 두 철학자가 인간 이성의 인식 능력을 논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칸트가 '대답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한 기존 형이상학자들의 답으로부터 우선 자유로워야 한다고 말한 것은, 마치 '동굴의 비유'에서 죄수 한 사람이 자신을 묶고 있던 속박과 무지로부터 벗어나는 수행의 과정과 동일한 맥락에서 비교될 수 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는 진리에 대한 사랑인 에로스를 통해 동굴 안 죄수는 '태양의 빛'에 도달하고자 했다면, 칸트가 행한 순수이성 비판은 이성 자신이 능동적으로 자신의 이성을 법정에 세운다.
(P.174)
순수이성 비판이란 책들과 체계에 대한 비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 능력 일반을, 이성이 모든 경험으로부터 독립해서 추구함직한 모든 인식과 관련해서 비판함을 뜻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도대체 형이상학이라는 것이 가능한지 불가능한 지를 결정하고, 형이상학의 원천과 범위 그리고 한계를 규정 하되, 그것들을 모두 원리로부터 수행함을 뜻한다.
철학의 대상이 인간 이성 밖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 이성 능력 일반'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 바로 칸트 철학이 서양 철학사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로 평가받는 이유다.
(P.1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