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잘 읽는 방법

김봉진 / 북스톤 / 256쪽

(2018. 9. 5 .)

사람들이 궁금해합니다.​

​왜 그렇게 열심히 읽느냐고요.

그 질문을 받고 생각해봤어요. 사람들은 왜 책을 읽을까?

훌륭한 사람이 되려고?

성공하려고?

돈을 많이 벌려고?

삶의 위안을 얻으려고?

안 읽으면 안 될 것 같은 막연한 불안감 때문에?

운동선수가 매일매일 훈련한다고 해서 모두 세계적인 선수가 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책읽기도 마찬가지예요. 책을 많이 읽는다는

것만으로 성공한 삶을 보장받을 수는 없어요.

그럼 뭐 하러 힘들게 읽느냐고요?

책을 읽으면 잘 살 수 있느냐는 질문에

저는 이렇게 답해드리고 싶어요.

정해진 운명보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고요.

우리의 삶은 수많은 크고 작은 결정들에 의해 만들어지는데요.

이때 '생각의 근육'을 키워두면 조금 더 좋은 결정을 할 수 있겠죠.

이런 것들이 쌓이면 정해진 운명보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살지 않을까요.

그리고 혹시 모르죠, 운명조차 바꿔버릴지도요.

​(P.5)

책을 읽는다는 것은

저자의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읽는 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저자가 쓴

​'글자'를 읽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생각'을 읽어가는 것이에요.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글로 적어 출판한 것이 책이잖아요.

연설이나 노래나 강연 등 수많은 표현수단 중에서

그 저자는 책을 선택한 것이죠. 즉 책은 수단이고,

그것도 많은 수단 중 하나라는 뜻이에요.

그런데도 우리는 책을 읽는 동안 텍스트(활자)에 집중하는 바람에 ​

​이것만 신성시하게 돼요.

더욱이 저자의 생각은 책 안에만 담겨 있지도 않아요.

보조적으로 저자의 강연 동영상, 다른 사람들의 서평이라든가

블로그, 소설미디어, 기사, 또는

다른 저자의 책 안에 담겨 있기도 해요.

(P.40)

머리말과 목차를 읽으면 절반은 읽은 것이다.​

책을 읽을 때 저자의 생각을 빠르게 파악하는 방법이 있어요.

독자가 아닌 저자의 입장에서 책을 만든다고 역순으로

생각해보세요. 예를 들어 '서양 사람과 동양 사람은

사고하는 방식이 서로 다르다는 주제라면

첫 번째로 어떤 내용을 담을지에 대해 머리말 또는 서론에 적고,

그 다음에 동양 사람과 서양 사람이 각각 어떻게 생각하며

역사적 근거는 무엇인지, 차이점은 무엇인지 등을 서술하기 위해

생각의 지도를 만들고 하나씩 목차로 잡아가겠죠.

서론과 목차까지 잡는다면 책 쓰기의 절반 이상은 한 셈이에요.

대학에서 논문을 쓸 때에도 그러잖아요. 먼저 교수님과 몇 달

동안 상의하고 주제를 정하면 초록(머리말)을 정리해보자고 하죠.

사실 이 부분에 논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다 담겨 있어요.

그다음에 목차까지 짜면 교수님과 친구들이 뭐라고 하죠?

반은 썼다고 하잖아요. 머리말과 목차에 저자의 생각 대부분이

담겨 있으니까요. 그다음에는 각 목차의 소주제들에 맞춰

사례와 근거를 찾아 내용을 담아내면 되죠.

이처럼 저자의 생각은 대부분 머리말과 결론에 담겨 있고,

생각을 풀어내는 논리적 구조는 목차에 들어 있어요.

그러니 책을 읽을 때 머리말과 목차를 놓치지 말아야 해요.

저자의 생각이 무엇인지 알려면 무조건 읽어야 해요.

머리말과 목차를 읽으면서 저자의 생각을 미리 가늠해보세요.

또 각 목차별 핵심 포인트는 다시 해당 섹션의

처음과 마지막에 담겨 있다는 점도 참조하시고요.

책을 쓸 때 머리말과 목차를 작성하면 절반은 쓴 것처럼,

머리말과 목차를 잘 읽으면 절반은 읽은 거나 마찬가지예요.

​(P.74)

고전을 통해 내가 사는 세상의 메커니즘을 공부해보세요.

고전을 읽어야 한다고 하는데요.

고전을 읽으면 왜 좋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제가 느낀 건 이런 거예요.

우리는 지금 어떤 시대를 살고 있죠?

자본주의 사회, 시장경제 체제. 민주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잖아요.

이런 것들이 저절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수많은 철학적 토론을 통해 나은 것이거든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구조를 알아내는 데

책, 특히 고전만큼 좋은 게 없어요.

민주주의는 가장 좋은 제도인가, 민주주의의 기본적 구조는

왜 이렇게 되어 있는가. 왜 정당 제도는 지금과 같은가.

시장경제 체제는 어떻게 자리 잡게 됐는가....

이런 문제들은 누가 갑자기 나타나서 딱 정해준 게 아니거든요.

이렇게 결정된 구조를 알려면 당시의 고민과 토론내용을

알아야 하고, 그러려면 고전을 읽어야 해요.

예컨대 우리가 잘 알아야 하는 것 중에는 돈의 구조도 있어요.

무조건 돈만 많이 벌겠다고 할 게 아니라 철학적인 구조로 접근해서

알 필요가 있다는 거죠

저는 그런 것들이 인문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어요.

내가 사는 세상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P.86)

책을 읽으며 조심해야 하는 게 있어요.

책을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공고하게 만드는 데에만

사용하면 안 된다는 점이에요.

물로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책은 변명을 찾기 위한

것이 아니예요. 정말 그렇게 읽고 있다면

잘못된 독서법을 하고 있는 것이죠. 내가 듣고 싶은 말,

듣기 좋은 말만 가득한 책을 읽고 있는 거예요.​

​책을 읽는다는 것은 내 삶의 변명을 찾기 위해서도

위로를 찾기 위해서도 아니에요.

책을 읽는 것은 생각의 근육을 키우고,

내가 가지고 있는 편견, 고정관념을 깨고,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을 보기 위함이에요.

매번 책을 읽으며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라는 생각이 든다면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신호예요.

“자신이 옳다고 믿는 사람은 게으르다." -비트겐슈타인

(P.108)

자신이 과거에 한 생각과 의견이 여전히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일관성 있어 보이지만, 반대로 지적인 면으로는

무척 게으른 사람이에요.

세상을 한쪽의 시각으로만 치우쳐서 보려 하고, 세상의 다양한

견해와 전혀 다른 사고방식이 있다는 것을 알려 하지 않는 것이죠.

도끼가 필요해요. 스스로를 깨부술 수 있는 도끼.

“책은 우리 안에 꽁꽁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 - 카프카

(P.113)

머리말에서 '책을 읽으면 잘 살 수 있나요?'란 질문을 통해 책읽기에

대한 의미를 살펴봤는데요.

전 책을 읽는다고 해서 다 잘 살 수는 없지만

그래도 삶을 살아가면서 해야 하는 수많은 크고 작은 결정들을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해나갈 수는 있다고 말씀드렸어요.

큰 운명 자체를 바꾸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정해진 운명보다는 조금 더 나은 삶을 사는 지혜를 키울 수 있겠죠.

우리는 이것을 삶의 지혜라고도 하죠.

소크라테스는 지혜 중의 지혜. 궁극의 지혜는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무지의 지'라고 했어요. 공자도 같은 맥락에서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정 하는 것이다"라고 했죠.

​책은 이런 것을 알려줘요. 아무리 감명 깊게 책을 읽어도 다 기억할

수 없고, 아무리 많은 책을 읽어도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을 수는

없겠죠. 이것을 깨달으면 겸손해져요.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는 가장 큰 지혜 중 하나가

'겸손이라고 생각해요.

겸손함은 생각의 경직이 아닌 유연함을 가져다줘요.

위대한 현인들도 어떤 부분에서는 오류가 있었고,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도 오류가 없을 수는 없다는 걸 알게 하죠.

강인함과 겸손이라는 말이 어울릴까요?

겸손에 대해 마키아벨리가 이런 말을 했어요.

“약한 자가 자신을 높이는 것은 허풍이고,

약한 자가 자신을 낮추는 것은 비굴이며,

강한 자가 자신을 높이는 것은 거만이고,

강한 자가 자신을 낮추는 것이 겸손이다.”

겸손함이란 강한 자의 특권이라는 거죠.

생각의 강함이란 책읽기를 통해 쌓인 '생각의 근육'이 늘어나야

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수많은 정보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생각의 근육이 약한 사람은 누군가의 생각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이 아닌 타인이 제시해주는 생각대로 살게 되는

약한 자의 비굴한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르죠.

한 인간이 정말 잘 살았다는 것은 돈을 많이 벌거나

명예를 크게 얻은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 자기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겠죠.

이것이 진정 자유로운 삶이에요.

생각의 근육을 키워야만 진정 자유로운

자신만의 삶을 살아갈 힘을 갖게 돼요.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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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문 / 전원교향곡 / 배덕자 ​

앙드레 지드 / 동성식 / 민음사 / 528쪽

(2018. 9. 2 .)

그날 아침, 작은 교회당에는 그다지 사람이 많지 않았다. 아마도 의도적이었겠지만, 보티에 목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누가복음 13장 24절)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묵상을 위한 성경 구절로 택했다.

알리사는 나보다 몇 줄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내게는 그녀의 옆모습만 보였다. 나 자신을 망각할 정도로 그녀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집중해서 듣고 있던 설교 말씀도 그녀를 통해 들려오는 듯했다. 외삼촌은 어머니 곁에서 울고 있었다.

목사님은 먼저 그 구절을 다 읽으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 가기를 힘쓰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소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태복음 7장 13절) 그러고는 주제를 뚜렷이 갈라 놓고 나서, 우선 넓은 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P.31)

어느 날 저녁 어머니는 나와 애슈버턴 양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두셨다. 어머니 목숨을 앗아 간 마지막 발작은 처음엔 그전 발작에 비해 그리 심한 것 같지 않았다. 그 발작은 임종 무렵이 되어서야 위태로운 증세로 나타났기 때문에, 친척 가운데 누구 하나 달려올 시간이 없었다. 사랑하는 어머니의 주검을 지키면서 내가 첫 밤을 새운 것은 어머니의 오랜 친구 곁에서였다. 나는 마음속으로 깊이 어머니를 사랑했다. 하지만 눈물이 흐르는데도, 마음속에선 슬픔이 느껴지지 않는 게 놀라웠다. 정작 내가 슬펐던 것은 자기보다 훨씬 나이가 어린 친구가 하나님 앞으로 먼저 가는 것을 지켜보는 에슈버턴 양이 가엾어서였다.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가심으로써 내 외사촌 누이가 서둘러 내 곁으로 달려오리라는 은밀한 생각으로, 내 슬픔은 많이 가라앉았다.

(P.45)

“그래, 나도 오늘 아침 꿈을 꿨는데, 너와 결혼하려는 마음이 어찌나 강했던지 아무것도, 죽음 말고는 아무것도 우리를 갈라놓지 못할 것 같았어."

“넌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하고 그녀가 말을 받았다.

“내가 말하려는 건......"

"그와는 반대로, 나는 죽음이 다시 만나게 해 줄 거라고 생각해...... 그래, 살아서는 갈라서 있던 것들을 다시 만나게 해 줄거야.”

그 모든 말들이 우리 마음속에 너무도 깊이 스며들어서, 아직도 나는 그 억양까지 들리는 듯하다. 하지만 그 말들이 지닌 중대한 뜻은 훨씬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P.53)

그 마지막 만남에서, 나의 사랑이 지나치게 고조되었기 때문에, 나는 모든 열광이 소모되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는 내가 반대하고 나섰던 알리사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나의 항변이 끝난 다음부터는 내 마음속에 생생하고 당당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그래! 어쩌면 그녀 말이 옳은지 몰라! 나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을 애지 중지했던 거야. 내가 사랑했던, 그리고 여전히 내가 사랑하던 알리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어...... 그래! 우리는 어쩌면 나이를 많이 먹었는지 몰라! 그 앞에서 나의 마음이 온통 얼어 붙게 된, 예전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그 끔찍한 모습은 결국은 원래 상태로 되돌아간 것에 지나지 않았어. 내가 서서히 그녀를 실제 그녀 이상으로 높여 세웠고, 내가 좋아했던 모든 것으로 장식함으로써 그녀를 나의 우상으로 만들어 왔지만, 그러한 노력에서 피곤함 외에 무엇이 남았나......? 본래의 그녀 자신으로 내던져지자마자 그녀는 곧 자기 수준, 그 별것 아닌 수준으로 내려와 버렸으며, 나 자신도 그 수준까지 내려와 버린 거야. 하지만 나는 그 수준에서는 더 이상 그녀를 원하지 않았어. 아!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 그녀를 올려놓았던 그 높은 곳에서, 그녀를 만나 함께하려는, 그 미덕에 대한 힘겨운 노력은 얼마나 터무니없고 공상적인 것 같았는지. 조금이라도 자부심이 덜했던들, 우리 사랑은 수월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대상 없는 사랑에 대한 집착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것은 고집을 세우는 것일 뿐, 더 이상 충실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에 대한 충실이었나? 과오에 대한 충실이었다. 가장 현명한 길은 나 스스로 잘못 생각했음을 인정하는 것 아니었을까......?

(P.158)

때때로 그가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생각하고 있는 나 자신을 내가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는 나에게 나 자신을 해명해 주고, 또 드러내 보여 준다. 그가 없이 내가 존재 할수 있을까? 나는 오직 그와 함께 존재할 뿐이다......

때때로 나는 그에 대해서 내가 느끼는 것이, 정말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인지 망설여진다. 그만큼 사람들이 보통 사랑에 대해 묘사하는 것은, 내가 묘사할 수 있는 것과 너무나 다르다. 나는 사랑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내가 그를 사랑하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그를 사랑하고 싶다.

그가 없이 살아야만 한다면, 무엇 하나 내게 기쁨을 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내 모든 미덕은 오직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곁에 있으면, 내 미덕이 무기력해지는 것을 느낀다.

(P.178)

​​

<전원 교향곡>

​​

아! 슬프게도 나는 그녀의 잠든 얼굴밖에는 다시 보지 못했다. 밤새도록 헛소리를 하고 괴로움을 겪고 나서 그녀가 숨을 거둔 것은 오늘 아침 해 뜰 무렵이었다. 제르트뤼드의 마지막 소원에 다라서 드 라 M 양의 전보를 받은 자크는 임종 몇 시간 후에야 도착했다. 그는 아직 여유가 있는 동안 신부를 불러 오게 하지 않았다고 나를 몹시 책망했다. 그러나 로잔의 병원에 입원한 동안, 물론 자크의 강권에 따라 그랬겠지만, 제르트뤼드가 개종했다는 걸 그때까지도 모르던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는가? 그는 자기와 제르트뤼드가 개종한 것을 나에게 동시에 알렸다. 이리하여 그 두 사람은 동시에 내게서 떠나 갔다. 그들은 살아 있는 동안 나로 인해 갈라졌기 때문에 나를 피하여 하나님 품에서 둘이 결합하기로 한 것 같았다. 그러나 자크의 개종에는 사랑보다도 이론이 더 많이 개입되어 있다고 나는 믿는다.

“아버지, 제가 아버지를 비난하는 건 도리가 아닙니다만, 저를 이끌어 준 것은 바로 아버지의 과오라는 본보기입니다.” 하고 그는 내게 말했다.

자크가 다시 떠난 뒤에 나는 아멜리 결에 무릎을 꿇고, 나를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만 “우리 아버지시여......” 하고 읊조렸으나, 긴 침묵의 구절과 구절 사이를 우리의 탄원으로 채웠다.

나는 울고 싶었으나, 내 가슴은 사막보다도 더 메말라 있음을 느꼈다.

(P.303)

<배덕자>

​​

마지막 밤이 생각난다. 거의 만월이었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달빛이 방 안 가득히 들어오고 있었다. 마르슬린은 자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누웠으나 잠을 이물 수 없었다. 일종의 기분 좋은 열로 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이 열이 곧 생명인 것이다...... 나는 일어나서 손과 얼굴을 물에 적셨다. 그리고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이미 밤은 깊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살랑거리는 바람도 없었다. 대기 자체가 자고 있는 듯했다. 멀리서 아랍개들이 자칼 떼처럼 밤새 날카롭게 울부짖는 소리가 겨우 들려올 따름이었다. 내 앞에는 조그만 안뜰이 있었다. 거기서 정면으로 보이는 담이 비스듬히 그림자를 던지고 있었다. 질서 있게 늘어선 종려나무는 이미 빛깔도 생기도 잃은 채 영원히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다...... 잠자는 모습에서도 생명의 고동은 느낄 수 있는 법이다. 그러나 거기서는 무엇하나 잠자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죽은 것 같았다. 나는 그 정적이 무서워졌다. 그러자 갑자기, 나는 침묵 속에서 마치 항의하고, 확인하고, 탄식하기 위한 것처럼, 내 생명에 대한 비통한 감정에 다시 사로잡혔다. 너무나 과격하고 고통스러울 정도며 맹렬했기 때문에 만일 짐승처럼 울부짖을 수 있었다면 나도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지금도 기억하지만, 나는 내 손을, 오른손으로 왼손을 잡았다. 나는 그 손을 머리로 가지고 가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대로 했다.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고. 그것을 놀라운 일로 생각하고 싶어서였다. 나는 내 이마와 눈꺼풀을 만졌다.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언젠가는-나는 생각했다.- 언젠 가는 갈증을 풀기 위한 물조차 입으로 가져갈 힘도 없어질 때가 올 것이라고...... 나는 방으로 돌아왔으나 아직 잠자리에는 들지 않았다. 나는 그날 밤을 시간의 흐름 속에 정지시키고 그 추억을 마음속에 새겨서 소중하게 간직해 두고 싶었다. 무엇을 하려는 뚜렷한 생각도 없이 나는 테이블 위에 있던 책을-성경이었다.-손에 들고 아무 데나 펼쳤다. 달빛 속에 굽혀서 읽을 수 있었다. 나는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한 그 말씀, 아! 슬프게도 결코 잊을 수 없었던 그 말씀을 읽었다. “지금은 네가 스스로 허리띠를 두르고 원하는 곳으로 다니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네 팔을 벌리리니......

다음 날 새벽에 우리는 출발했다.,

* 「요한복음」기장 18절 참조. 젊을 때 자유롭게 살던 베드로가 늙어서 때가 되면 손이 묶여 십자가에 못 박히는 형을 당하리라는 예언의 말씀.

(P.365)

​​

산다는 것을 내가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그리고 좀 더 널찍하고 환기가 잘되며, 좀 더 속박이 없고,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삶에 대한 취미가 나의 답답함에 대한 극히 단순한 비밀이 아니었나라고 물었다면, 나는 대답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이 비밀은 나에게 훨씬 더 신비한 것처럼 보였 다. 나는 소생한 사람의 비밀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사람들 속에 가면 나는 마치 죽은 자들의 세계에서 돌아온 사나이처럼 언제나 이방인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상당히 고통스러운 혼란밖에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곧 매우 새로운 감정이 솟아 나왔다. 나는 그처럼 모두에게 칭찬을 들은 연구를 발표했을 때도, 바른 말이지만 약간의 자랑스러움도 느끼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이 바로 자랑이었을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거기에는 어떤 자만심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나 자신의 가치를 의식했다. 나를 남과 분리해 놓는 것, 구별 짓는 것, 이것이 중요했다. 나 이외 아무도 말하지 않았고 말할 수도 없었던 것, 바로 그것이 내가 말해야 했던 것이었다.

(P.412)

"오늘날 왜 시가, 특히 철학이 죽은 글자가 되었는지 자네는 아나? 시와 철학이 삶에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야. 그리스는 삶을 그대로 이상화했어. 그래서 예술가의 삶은 그 자체가 이미 시의 실현이었거든. 철학자의 삶은 자기 철학의 실천이었어. 그래서 시도, 철학도 삶 가운데 뒤섞여서 서로 모른 체하기는 커녕 철학은 시를 기르고 시는 철학을 노래하며 서로 납득함으로써 훌륭한 융화를 이루었던 거지. 오늘날에는 아름다움은 이미 행동하지 않고, 행동은 이미 아름다워지려고 애쓰지 않아. 그리고 지혜는 그것들과는 별도로 움직이네.”

(P.433)

“적어도 우리의 이 별 볼일 없는 머리가 추억을 시들지 않게 보전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이 추억이라는 것은 보존하기가 힘들어. 맛이 가장 섬세한 것들은 이내 벗어지고, 가장 관능적인 것들은 썩고, 가장 달콤한 것들은 나중에는 가장 위험한 것이 되지. 사람들을 뉘우치게 하는 것은 처음에 달콤했던 것이네.” 또다시 오랜 침묵이 흘렀다. 그러자 이윽고 그는 또 말하기 시작했다.

“애석, 회한, 후회, 이것들은 모두 등 뒤에서 본 과거의 기쁨일세. 나는 뒤돌아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새가 오를 때 자기 그림자를 버리는 것처럼 나도 내 그림자를 멀리 버리는 거야."

(P.434)

가난은 인간을 노예로 만든다. 가난한 사람은 먹고 살기 위해서 즐거움도 없는 일을 떠맡는다. 즐거움이 없는 일은 모두 비참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돈을 주고 몇 사람에게 휴식을 얻게 해 주었다. 나는 말했다. "일하지 마라. 그건 지겨운 거야." 나는 각자가 그러한 여가를 갖는 것을 꿈꾸었다. 그것이 없으면 어떤 새로운 것도. 어떤 악덕도. 어떤 예술도 꽃필 수 없는 것이다.

마르슬린은 내 생각에 대해 오해하지 않았다. 나는 오래된 항구에서 돌아오자. 얼마나 비참한 사람들이 내 주위에 많았는지를 그녀에게 숨기지 않았다. 사람 속에 모든 것이 있다. 마르슬린은 내가 끈질기게 찾아내려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종종 그녀가 각자에게 제 나름의 미덕을 만들어 주고는. 그것을 지나치게 믿는 점을 내가 비난하자, 그녀는 말했다.

"당신은 사람들로 하여금 무언가 악덕을 드러내게 했을 때에만 만족하는군요. 우리 시선은 누구를 보더라도 우리가 주목한 점을 확장하고 과장한다는 것을 모르나 봐. 그리고 우리는 상대방을, 우리가 그랬으면 하고 생각하는 그대로의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도 몰라요?”

될 수만 있다면 그녀 말은 잘못이라고 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각자 속에서 그 사람의 가장 나쁜 본능이 나에게는 가장 성실한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P.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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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본 영화

정희진 / 교양인 / 236쪽

(2018. 8. 29.)

영화가 끝나면 삶도 끝난다. 언제나.

(샘페킨파)

(P.8)

외로움과 혼자인 상태는 다르다. 혼자라고 해서 꼭 외로운 것 아니다. 혼자라고 느낄 때는 외롭지만, 자기만의 세계에서 스스로 충만한 시간은 외롭지 않다. 인간이 외로울 때는 상대방(사회)과 대화가 통하지 않거나 외부를 지향하는 경우이 다. 외로움을 잘못 해결하면 인생이 복잡해진다. 데이비드 리스먼의《고독한 군중》은 왜 혼자 있을 때보다 여러 사람과 함 께 있을 때 외로운지를설명해주었다.

외로움은 나와 어떻게 만날 것인가, 즉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에서 출발하는 문제다. 너무 괴로워서 자신의 존재를 잊고 싶거나 해결해야 할 문제로부터 도망가려고 할 때 외로움 도 따라온다. 내가 나를 떠밀어서, 미워해서, 소외시켜서 외로운 거다. 외로움을 해결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중독이다. 중독은 외부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몸의 외부(매체, 물질, 타인......)를 내부에 들여놓고 그들에게 '친구하자'고 에원하는 것, 그들이

나가지 못하게 막는 것, 이것이 중독이다. 그래서 알코올 중독은 여러 사람과 함께 마실 때보다 혼자서 규칙적 으로 마실 때를 가리킨다.​

알코올, 니코틴, 탄수화물, 약물 같은 구체적인 물질뿐 아니라 권력, 섹스, 도박, 게임, 스마트폰, 일, 공부,

영화, 운동, 심지어 고통도 중독의 대상이다. 나는 모든 중독자들을 이 해한다. 중독의 차이는 사회적으로

수용되는 중독인가(일, 공부......) 아닌가, 혹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을 뿐이다.

​(P.8)

나는 탄수화물, 활자, 영화, 일 중독이다. 이런 중독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렇게 '위험해 보이지 않는' 중독은 문제가 생겨도 고치기 어렵다. 일을 좋아하는 것과 중독은 다르다. 중독은 즐거움보다 강박이 앞선다. 나는 중독을 해결하지 못했다. 일 중독을 '자부심' 삼는 사람도 있지만 결국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해친다는 점에서 다른 중독과 같다. 나는 책을 읽지 않거나 글을 쓰지 않으면 불안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노트북 앞에 앉는다. 20년간 생계를 위해 글을 썼는데, 아직도 독수리 타법이라 오른쪽 어깨와 손목은 늘 부상 상태다. 당이 떨어지면(케이크와 방을 못 먹으면) 금단 현상이 온다. 탄수회물은 머리의 전원을 켜두기 위한 에너지 공급원이기 때문에. 내 뱃살은 빠지지 않을 것이다.

영화는 집을 벗어나지 못하는 내 일상을 구원해주는 고마운 중독이다. '영화광'이라는 말은 있지만 '영화 중독'이라는 말은 없고, '반대로 '소주광', '도박광'이라는 단어도 별로 사용 하지 않는다. 영화는 '폭식을 해도 편찮고 '숙취'도 없다.

​(P.8)

“소설 같다, 영화 같다는 말은 믿을 수 없다는 뜻으로 쓰이지만, 누구나 다 아는 현실(present)도 재현(re-present)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 영화라는 재현의 형식을 통해서 우리는 현실을 깨닫고, 직면하고, 생각하게 된다. 현실과 재현의 차이는 무엇일까. 우리는 현실을 살고 있는데, 왜 재현을 통해서만 현실을 볼 수 있는 것일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팩트를 따질 때, 재현물보다는 현실을 더 믿는 것일까. 재현은 뭔가 꾸며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를 포함해서 영화와 현실의 경계는 없다. 건물 안에서는 건물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재현(렌즈)을 통해서만 현실을 볼 수 있다. 렌즈는 다양하기 때문에 각자의 렌즈에 따라 당파적으로,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그리고 영화는 역사의, 인생의 한 부분을 잡아챈다.

(P.14)

나는 매일 한 편 이상씩 영화를 보았다. 이때부터 영화는 정말로 책이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영화 '보기'가 아니라 영화 '읽기'라고 표현하는데, 이미 지나 음악에 무지한 내게 영회는 원래부터 읽기였다. 영화제에서 만난 영화들은 한국 사회에서는 '절대로' 생산될 수 없는 지식을 제공했다. 내 경험 너머 새로운 앎의 세계. 나는 고급 도서관을 통째로 가진 기분이었다.

나는 이제 알기 위해 영회를 본다. '지식을 습득한다'와 '안다는 것은 다르다. 안다는 것은 깨닫고, 반성하고, 다른 세계로 이동하고, 세상이 넓음을 알고, 그리고 타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과정을 뜻한다. 이것이 인생의 전부 아닐까. 영화는 나의 세계를 확장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인생 문제가 영화에서 '대부분' 해결되기 때문에, 나는 그 다지 타인이 필요지 않게 되었다. 나만의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나는 외로움을 원한다.

(P.19)

한국 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영역은 북한이나 섹슈얼리티가 아니라 가족 담론이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문제적인 제도, 가장 부패한 제도, 가장 비인간적인 제도는 가족이다. 가족은 곧 계급이다. 교육 문제, 부동산 문제, 성차별을 만들어내는 공장 이다. 부(富)분만 아니라 문화 자본, 인맥, 건강, 의모, 성격까지 세습되는 도구다. 간단히 말해, 만악의 근원이다. 과장이 아니다. 동성애, 트랜스젠더에 대한 시각도 가족과 연결되어 있다.("남자 며느리가 웬 말이며”) 이처럼 가족은 정치경제적 영역인데도 자연적인 장소로 묘사된다(특히, 모성). 어떤 글이나 텍스트를 읽어도 가족에 대해서는 어쩌면 그렇게 상상력이 부-족한지 정말 놀랍고. '그들의 무지'가 이해되지 않는다. 가족에 관한 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뇌는 고정되어 있는 것 같다.

(P.27)

경험이란 무엇일까. 언젠가 박완서는 자신이 경험한 것밖에는 못 쓴다고 말한 적이 있다. 성찰적이며 삶의 진실을 관통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누구나 자신이 경험한 것밖에는 알지 못한 다. 모든 언어 -소설, 영화, 예술, 이론, 학문...... -는 다 개인의 경험이다. 마르크스주의도 마르크스의 경험에 '불과' 하며 푸코의 탈근대 이론도 푸코의 경험일 뿐이다. 박완서의 문학은 박완서의 경험이다(물론 아는 것과 말하는 것, 쓰는 것은 다르지만).

특정인의 사적인 경험이 보편적 이론이 되는 것, 그것이 권력의 효과일 것이다. 개개인의 경험은 모두 사회적 권력 관계를 통해 구조화된 것이다. 개인들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그리고 그 해석을 통해 다른 주체가 된다. 각기 다른 경험은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한국/여성의 경험은 '특수한 경험'이고 서구/남성의 경험은 '보편적 이론'이 된다.

특수한 것은 보편의 적용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마르크스주의를 한국에 적용했다, 정신분석학을 여성 문제에 적용했다"는 식의 언설을 싫어한다. 마르크스주의를 한국에 적용 했다면 그것은 이미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다. 다른 이름을 붙여야 한다. 마르크스주의는 특정 지역, 특정 시기, 특정한 성의 경험일 뿐이다. 서구 페미니즘이 한국에 적용될 때도 마찬 가지다.

(P.62)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변화시킨 사람을 사랑한다. 영원한 사랑 - 일부일처제, 배타적인 낭만적 사랑- 을 믿고 실천 하는 자의 고통은 상대가 자신을 변화시킨 그 순간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 순간을 지속시카기 위해,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기에 고통은 필연적이다. 조증(躁症)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대개 사랑의 황홀감은 몇 개월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 인생의 매 순간을 혁신하며 '나날이 새롭게(日新又日新)' 사는 사람은 매우 드물기 때문에 영원한 사랑은 이루어지기 어렵다. 중단 없는 상호 발전을 통해 관계의 질이 진화하지 않는다면, 그 뒤 시간은 '아주 오래된 연인들' 의 권태와 제도를 통한 감정의 구속만이 남을 뿐이다. 사람들이 왜 결혼하겠는가?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사랑의 종말이다. 사랑이 끝나서 자발적으로는 그 감정이 유지되지 않기 때문에 강력한 제도의 힘을 빌리는 거다. 세상에 결혼/가족 제도보다 강력한 제도는 없으며 그 제도를 돌파하는 사람도 드물다.

(P.68)

​​​

타인과 함께하는 시간이 지루하고 아까운 유형과 파트너와의 관계가 좋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는 시각은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내내 애달프고 쓰라리고 슬펐는데, 내 친구들은 마이에미의 해변처럼 행복하고 밝은 영화라고 했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 장면에서 완전히 다른 결론이 났다.

새삼스러울 것 없는 얘기지만, 우리가 본 영화는 우리의 인생과 붙어 있다. 몸으로 영화를 본다. 영화의 내용은 감독의 '연출 의도가 아니라 관객의 세계관에 달려 있다. 누구나 자기의 삶만큼 보는 것이다.

(P.96)

​​​

성선설이니 성악설이니 인간의 본질을 놓고 갑론을박하던 시대도 지났다. 지금은 모두가 한목소리다. 세상이 너무 나빠졌으며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착한 사람'의 개념은 완전히 무너졌다. 선함은 순진함, 무능력, 멍청함, 부적응, 루저, 답답한 인간과 비슷한 의미로 쓰인다. 선함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선함은 위선일 뿐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많다. '착하다'는 말을 칭찬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별로 없으며, 그런 말을 들으면 화를 내는 사람(특히, 여성)도 많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믿었던 선함의 의미를 모르겠다. 몸매가 착하다, 가격이 겸손하다, 착한 여행 같은 말에 '착함'이 사용되는 시대다. 내가 생각하는 착함은 자기 역량이 가능한 수준에서 타인에 대한 배려, 조금 이타적인 마음, 딱히 정의롭다기보다 정의를 추구하는 태도, 타인을 함부로 대하지않는 마음가짐...... 정도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요즘, 이런 착한 사람들은 냉소적이거나, 분노 조절을 못 하는 '아픈' 사람이 되어 병원(신경정신과)에 다니거나. 타인을 붙잡고 한없이 하소연을 하는 민폐 캐릭터가 되었다. 나쁜 사람보다 그들에게 당한 사람을 더 싫어하는 세상이다. 나름 착하게 혹은 최소한 상식적으로 살려고 노력하다가. 타인에게 이용당하거나 속거나 근거 없는 모욕을 당했을 때. 그러한 사건이 반복될 때 변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나는 다르게 질문하고 싶다. 변해야만 정상일까. 그렇게 당했는데도 같은 방식을 되풀이한다면. 그것은 착한 것이 아니라 멍청하다고 하는 것이 정녕 맞는 논리인가? 나쁜 사람이 변해야지, 왜 착한 사람이 변해야 하나? 착한 사람이 미치고 아픈 것은 당연한 반응이 아닌가.

(P.129)

​​

한마디로, “무능한 주제에 인간성도 바닥인 상사에 대처 하는 우리의 자세” 성토장이었다. 뒤집어 말하면, 유능하면 참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유능한 데다 품성도 훌륭 한 리더는 거의 없기 때문에, 리더는 그냥 유능한 사람이면 족하다. 이 영화는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 리더십에 관한 매우 '현실적인' 텍스트이다. 특히 여성 리더십에 대해 논문이 수십 편 나올 만한 논쟁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영화에서 상사 자녀의 숙제를 비서가 대신 해준다. 이는 물론 부도덕한 일이지만, 대개 남자 CEO들은 아내('사적 영역의 비서')가 알아서 해주기 때문에 비서에게 이런 일을 덜 시킬 것이다. 주인공의 표현대로, 여성 리더의 악마성은 많은 경우 그녀가 남자라면 '카리스마'일 뿐이다. 여성 리더들은 '아내'가 없기 때문에(집 안에서 아내 역할을 강요받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공적 영역의 비서가 아내 역할을 대신 수행한다. 여성이라면 결혼하지 않았어야 가능한 성공이' 남성은 결혼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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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의 쥐

이은 / 예담 / 예담 / 328쪽

(2018. 8. 21.)

“예술이 뭐라고 생각하나?”

뜻밖의 질문이었다. 당황한 김준기가 말을 더듬었다.

“전, 그러니까 그게......"

“편하게 얘기해보게."

“예술은 열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열정? 다른 건 없을까?"

“예술은...... 글쎄요, 죄송합니다.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단지 제가 좋아하고, 또 평생을 바쳐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해 이 길을 택했습니다."

“잘 알고 있군.”

“자네가 말한 대로네. 예술 말일세, 그냥 자네가 좋아하고 평생을 바쳐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지 ."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자네는 혹시 그림을 처음 시작했을 때의 느낌을 기억하나? 처음 붓을 쥐고 그림을 그렸을 때 말일세.”

“글쎄요. 어릴 때 일이라 자세히는......"

“그렇겠지. 그럼 조금 지난 다음의 기억이라도 좋네. 처음으로 제대로 된 그림을 그렸다고 느꼈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떠오르지 않나?”

“그거라면...... 신이 나기도 하고, 떨리기도 하고, 한편으로 는 무섭기도 하고, 무언가 벅차오르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바로 그거네. 그 초심初心이 바로 예술일세."

“지금 자네의 마음은 아마 자네가 붓을 처음 쥐었을 때, 처음으로 제대로 된 그림을 완성했을 때의 심정과 같을 걸세. 첫 번째 개인전을, 그것도 주목을 받으면서 여는 개인전을 앞둔 자네의 마음은 기쁘기도 하고 떨리기도 하고, 그럴거야. 지금 그 마음, 마지막까지 잃지 말게나. 말처럼 쉽지는 않을 거야. 시간이 흘러 명성을 얻거나 돈을 많이 벌면 지금의 마음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높지. 하지만 부디 잊지 말게. 지금 자네의 마음이 바로 예술이라는 것을. 그걸 잃어버리면 자네가 하는 모든 일. 자네가 성취한 모든 영광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진다네."

​(P.16)

(오컴의 면도날)

오컴의 면도날은 흔히 '경제성의 원리' 고도 한다. 14세기 영국의 논리학자이며 프란체스코회 수사였던 월리엄 오컴의 이름에서 따왔다. 내용은 '보다 작은 수의 논리로 설명이 가능한 경우 많은 수의 논리를 세우지 말라.' 는 것으로 이떤 현상을 설명할 때 불필요한 가정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같은 현상을 설명하는 두 개의 주장이 있다면 간단한 쪽을 선택하라'는 뜻이기도 하다.

(P.61)

“김 형사가 생각하는 예술 같은 건 이 세상에 없어요."

“그건 또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야.”

“김 형사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예술 같은 건 지금 이 세상에 없다고요. 뒤샹이 전시장에 변기를 갖다놓고 예술이라고 했을 때 예술은 병원에 입원했고, 앤디 워홀이 마릴린 먼로의 얼굴을 복제해서 걸어놓았을 때 예술은 사망했어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현대 사회에서는 돈이 예술이에요. 돈만큼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하는 게 없단 말입니다. 그게 예술이에요. 사람들은 이중섭 화백이나 박수근 화백, 고호의 그림 따위에는 하나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이 위대한 예술가이건 아니건, 굶어 죽었건 병들어 죽었건 관심도 없다고요. 오로지 그걸로 벌어들인 돈에만 관심이 있어요. 왠지 아십니까? 지금은 그게 예술이니까요.”

​(P.257)

예술은 순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순수함이 예술의 생명이고 그것이 바로 예술이기 때문입니다. 순수해야 한다는 것은 말이지요, 이 세상 모든 현실을 등지고 스님처럼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현실의 한복판에 살면서 그렇듯 등 돌리고 사는 것은 오히려 비정상적입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예술을 시직한 때 처음 가졌던 그 마음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이 바로 예술이니까요 예술은 뭐 대단하고 거창한 무엇이 아닙니다. 순수의 회복, 그게 바로 예술입니다.

마지막이라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재미있게 시작했다가 결국 또 무거운 이야기로 글을 맺게 되는군요. 하지만 마지막에는 이 이야기를 꼭 하고 싶었습니다. 여러분, 그림을 처음 그렸을 때, 도화지 앞에서 두려웠지만 가슴이 벅차 올랐던 그 감동을 기억하십니까? 미술관에 처음 갔을 때, 뭐가 원지 하나도 몰랐지만 알 수 없는 신비감에 휩싸였던 그 느낌을 기억하십니까? 그 느낌과 감동을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그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 꿈꾸어온 예술의 세계입니다. 예수도 말했지 않습니까?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갖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 고요. 그런 순수한 미음이 바로 예술입니다. 우리들의 천국인 셈이지요.

(P.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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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언명령 / 랄프 루드비히 / 이충진 / 이학사 / 166쪽

(2018. 8. 19.)

우리는 어떤 행위를 옳은 행위라고 말해야 하는 것일까? 또 어떤 선택이 올바른 선택인 것일까? 이러한 것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윤리학의 과제이다.

윤리학이란 개념은 고대 희랍어 ethos에서 유래했다. 본래는 짐승들의 “방목지” , “사람들의 거주지” 등으로 쓰이다가 나중에는 습관. 풍속, 성격 등으로 이해되었다. ethos는 라틴어 mos / moris로 옮겨졌고, 이것으로부터 "moralisch(도덕적)”라는 형용사가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자면 "ethisch(윤리적)”란 말과 “도덕적”이란 말은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오늘날 도덕moral은 대체로 인간 행위를 규제하는 것이란 의미를 갖는 반면, 윤리학ethik은 이와 같은 도덕을 연구 주제 및 대상으로 삼는 철학적 분과 학문으로 이해되고 있다.

(P.12)

철학의 역사는 두 개의 중요한 윤리학적 근거지움들을 보여 주고 있는데, 많은 성과를 가져온 이것들은 두 사람의 이름과 관련되어 있다. 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이며. 다른 한 사람은 칸트이다.

고대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의해 윤리학적 문제가 제기된 이후 윤리학을 통상적 의미의 철학적 사유로부터 분리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윤리학을 하나의 독립된 철학 분과로 만드는 데 공헌했다.

쾨니히스베르크의 철학자 칸트는 정언 명령을 가지고 의무 윤리학의 토대를 마련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의무란 높이 치켜든 손가락으로 상징되는 자유의 제한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칸트에게는 그렇지 않았다.『실천이성비판』에서 칸트는 의무라는 단어에 열광했으며, 의무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고백했다.

의무여! 우리에게 복종을 요구하는숭고하고도 위대한 이름이여! (......) 우리 의지를 움직이기 위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온 자연 성향들을 쫓아내지 않으면서도, (......) 너에게 저항하는 그 모든 성향들을 침묵하게 만드는 너! 너의 존귀함은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자연 성향과의 모든 유착을 늠름하게 거부하는 너의 고귀한 혈통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오직 인간만이 자신에게 부여할 수 있는 가치, 그러한 가치의 필수적 조건은 도대체 어느 뿌리에서 유래하는 것인가? (KpV A 154〉

이와 같은 뜨거운 열정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 즉. 칸트 윤리학은 오늘날의 새로운 윤리학적 시도들이 간단히 무시해 버릴 수 없는 하나의 모델을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에 모습을 처음 드러낸 이래 비록 많은 점에서 비판받아 왔지만 칸트 윤리학은 전체적인 측면에서 살펴볼 때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논박되지 않았다.

칸트의 윤리학. 그것을 이 책은 다루어 나갈 것이다.

(P.15)

칸트는 자신이 이성 규칙을 발견했음을 확신했었다. 물론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칸트는 이성 규칙의 발견과 함께 우리 인간이 감각적 세계를 넘어서는 최초의 발걸음을 내딛는다는 점을 확신했다. 이성에 의거하여 명확한 도덕적 결정을 내리는 능력. 그러한 능력을 인간에게 부여하는 그 무엇, 바로 그것을 발견했다는 확신을 칸트는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본능이 동물의 행동을 오류에 빠지지 않게 인도하듯. 인간의 행위를 확실하게 인도하는 그 무엇이었다.

자신이 발견한 그것을 칸트는 도덕 법칙, 실천 법칙, 또는 도덕적 법칙이라고 불렀다. 도덕 법칙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칸트는 열광하곤 했다. 평소에는 그토록 냉정하고 덤덤한 이 쾨니히스베르크의 철학자는 그의 글들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문장으로『실천이성비판』을 끝맺고 있다. 그 문장은 거의 시나 다름없다. 그의 윤리학 저서 끝 부분에서 가져온 이 인용을 우리는 이 책의 도입부에 놓아두도록 하자.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칸트의 열광을 우리 눈앞에서 놓치지 않은 채-길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칸트가 그토록 열광했던 법칙. 자신의 저서 어느 곳에선가 환희에 넘쳐 “지극한 위엄”이란 호칭을 부여했던 그 법칙. 바로 그 법칙으로 우리의 길은 이어질 것이다.

오랫동안, 그리고 거듭해서 생각하면 생각힐수록 더욱 새롭고 더욱 커다란 감탄과 경외로 내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별이 총총한 내 머리 위의 하늘과 내 마음속의 도덕법이 바로 그것이다. <KpV 288〉

칸트의 윤리학, 그것은 칸트의 신앙이며 곧 도덕 법칙에 대한 복종이다. 모든 것은 이 법칙 아래에 위치한다

(P.21)

이제『순수이성비판』의 기본 생각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인간의 인식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것이 칸트의 핵심 문제이다. 이 문제는 무엇보다도 먼저 인식을 가능케 하는 조건들의 탐구로 나아간다. 칸트는 우선 감성적 지각을 탐구하며, 순수한 감성적 직관의 두 가지 형식들을 발견해 낸다. 공간시간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공간과 시간이라는) 형식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지각할 수 없다.

감각을 통해 받아들여진 모든 것들은 공간과 시간의 형식에 따라 일정한 질서를 가지게 되며. 그 다음 오성에 의해 개념으로 형태화된다. 그런데 이와 같은 활동이 오성 활동의 전부인 것은 아니다. 사유에 관한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범주들이 발견된다. 범주들은 개념들을 서로 결합시켜 하나의 명제를 만들며, 오성에 의해 감성적 지각들에 마치 도장처럼 각인된다.

중요한 점은 다음의 것이다. 우리의 오성은 현상의 경험적 세계에서만 오류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오직 경험적 사실들만을 인식할수 있다.

이제 우리는 핵심적 개념에 도달하였다. 이 개념은 매번 상이한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언제나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 현상 세계. 현상된 것 나아감Phaenomenon의 세계, 감각 세계, 감성 세계, 감각된 것의 세계 mundus sensibilis 등이 그것이다.

바로 이곳이 오성이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한계이다.

그러나 오성은 이 한계에 만족하지 않는다. 오성은 추론 능력인 이성으로까지 자신을 비약시키며 스스로를 지평선 끝까지 확장시켜 나간다. 오성은 우리의 현상 세계를 초월하여 더 멀리 날아가고자 한다. 이성은 이제 모든 경험의 저편에 놓여 있는 세계의 대지 위를 날아다닌다. 이 곳에서 이성은 절대적인 것.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 것. 실제의 본질 자체를 획득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무제약자는 결코 인식erkennen 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사유denken의 대상일 뿐이다. 이성이 깨닫는 것은 오직 이러한 사실뿐이다. 칸트는 이와 같은 물자체Ding an Sich의 세계를 가상적noumenale(즉. 사유된) 세계 또는 예지적intelligible 세계 라고 불렀다.

(P.36)

​​

도덕의 최상 원리에 대한 물음과 관련하여 칸트는 오직 선의지만이 선하다는 사실을 확정하였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 의지는 선한 것일까? 의지가 그 자체로 선한 경우에 의지는 선하다. 따라서 행위가 단지 합의무적일 뿐인 경우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칸트는 성향을 거부하며, 경험 역시 단호하게 거 부한다.

의지는 하나의 행위가 의무에서 유래하여 행해진 경우에만 그 자체로 선하다. 이는 곧 한 행위가 특정한 준칙에 따라 행해진 경우를 말한다. 이때의 준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의지는 또한 법칙에 대한 외경심이 의지의 배후에 숨어 있는 경우 그 자체로 선하다. 이때의 법칙이란 도덕 법칙을 의미한다. 자연 안에 나타나지 않는 법칙, 우리의 현상 세계를 초월한 예지적 또는 가상적 세계에서 발견되는 법칙, 그것이 곧 도덕 법칙이다.

(P.78)

자연 법칙에 복종하기 위해 나는 이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 반면, 원리에 따라 행동하기 위해서는 이성을 필요로 한다.

이성에 의해 필연적 행위로 인정된 행위가 선택되는 경우, 칸트는 그것을 의지 내지는 실천 이성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우리는 칸트의 의지 개념이 흔히 말하는 자유 의지를 뜻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칸트가 말하는 의지 내지 자유 의지는 이미 실천 법칙으로 향해 있는 의지, 실천 법칙으로 장차 향해 질 의지를 뜻한다. 오늘날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자유 의지는 칸트 에게는 자유로운 자의freie Willkür에 해당되며. 자신의 기분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할 수 있는 임의성을 의미한다.

이성이 우리의 행위를 전적으로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한갓 환상 일 뿐이다. 실제는 그와 다르다. 인간과 이성 사이에는 많은 경우 “어떠한 동기들” 및 주관적 조건들(쾌락, 기분, 성향......)이 가로놓여 있다. 그것이 칸트의 생각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의지는 이성의 근거들에 의하여 강제되어야만 하는데, 그것은 의지가 이성에 언제나 반드시 복종하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칸트가 말하는 강제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등장한다. 의지를 강제하는 것은 하나의 지시이며, 지시를 “정식화시킨 것”이 명령이다.

(P.81)

칸트는 정언 명령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이 주장은 매우 중요하며). 정언 명령은 행위의 질료가 아니라 행위의 형식에 관여한다.

칸트의 윤리학이 형식 윤리학 또는 형식주의 윤리학으로 불리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형식주의라는 개념에 친숙한 주의 깊은 독자에겐 윤리적 형식주의의 개념이 칸트의 계속된 언급들에서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해에 어려움을 느끼는 독자는 자율자유에 관한 논의(제3부 자율과 자유의 장)을 참조하기 바란다.

『도덕 형이상학 원론』은 정언 명령을 다섯 개의 공식으로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첫 번째 공식에 제1공식이라는 이름을 부여하도록 하자. 그것은 다음과 같다.

네가 그에 따라서 행할 수 있는 의지의 준칙이 동시에 마치 보편적 법칙이 되는 것처럼 그렇게 행위하라. <Gr.BA 52=421〉

​(P.85)

만약 내가 올바르게 행동하였음을 확신한다면. 나는 그 사실에 만족하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내가 옳다고 생각한 행위를 다른 사람 역시 행하고 있음을 볼 때. 비로소 나는 만족감을 느낀다. 이렇게 하여 내가 생각했던 올바름이 보다 확실하게 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내가 생각하는 올바름에 대해 의심한다면. 과연 나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라고 생각할까?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가항력적으로 진리의 정당한 요구를 제기하기 마련이며, 모든 사람(또는 최소한 가능한 많은 사람)이 동의 할 때 그 요구가 충족된 것으로 생각한다.

(P.88)

우리는 정언 명령의 제1공식에 다시 한번 주목해 보도록 하자.

네가 그에 따라서 행할 수 있는 의지의 준칙이 동시에 마치 보편적 법칙이 되는 것처럼 그렇게 행위하라.

우리는 먼저 예들을 찾아본 다음 그것에 정언 명령을 적용하도록 하자.

예 1: 은행의 현금 수송 요원이 돈 뭉치를 가지고 길을 걷고 있다. 그는 돈을 강달당할 위험에 전혀 대비하지 않고 있다. 그것을 본 나는 그에게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않고 단숨에 돈 뭉치를 낚아채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기로 결심했다. 나는 돈을 강탈하는 나의 행동이 그다지 나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은행들은 어차피 돈이 많기 마런이고, 더욱 이 항상 보험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위가 도덕적으로 비난받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십계명 중 제7계명은 “도적질하지 말라!” 이다. 칸트에 따르면 이 계명은 도덕적 비난의 근거로서의 자격을 갖지 못한다. 이 계명은 타율적 규정, 타자에 의해 정해진 규정, 외부로부터(그것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이유만으로) 나에게 부여된 규정이다. 나는 도둑질 금지의 근거를 나의 이성 안에서 찾아내야 하며, 이성의 자기 규정이 도덕성과 비도덕성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제공해야만 한다. 이 점을 칸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는 위와 같은 방식으로 돈을 획득하는 것을 원할 수 있는가? 물론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욕구이며 감각적 충동 내지는 감각적 동인이다.

칸트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첫 번째 단계는 준칙의 정식화이다. 우리의 예에 해당하는 준칙은 다음과 같이 정식화된다. 삶의 쾌락을 증진시키고자 하는 경우. 나는 언제나 은행에서 돈을 훔친다. (물론 우리는 준칙을 다르게도 정식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경제적 어려움에 당면할 경우 등등.)

두 번째 단계는 위의 준칙을 보편화하고 그것을 보편 법칙으로 생각 해 보는 것이다. “삶의 쾌락을 증진시키기 위해 은행에서 돈을 훔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허용된다"라는 법칙이 우리 나라에서 통용된다고 생각해 보자. 만일 내가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한다면 나의 이성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만일 내가 그와 같은 법칙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나는 다른 사람들이 은행에 있는 내 돈을 훔쳐 가도 좋다는 사실 또한 원해야만 한다. 훔쳐 가도 좋다는 나의 바램의 배후에는 그와 상응하는 나의 의지가 놓여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같은 의지를 이성적 의지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P.95)

쾨니히스베르크의 철학자가 자신의 동시대인들에게 도덕에 관하여 아주 새로운 것을 제시하였다는 사실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모든 개인적 이익과 무관하고, 모든 인간에게 타당하며, 어떠한 상황에도 구애받지 않는 하나의 도덕 원리가 칸트에 의해 제시되었다. 칸트는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 의해 반드시 받아들여져야 한다"라는 요구를 함축하는 도덕 원리를 제시한 것이다.

이와 같은 요구는 아마도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상하게 느껴지고 또 부정적으로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이전에는 확고한 것으로 간주되었던 윤리적 한계선들이 유전 공학, 안락사, 평화 유지를 위한 무력 사용 등의 영역으로 인해 완전히 파기되어 버린 바로 우리 시대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하나의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초시대적 타당성에 대한 요구, 하나의 유일한 도덕 원리가 갖는 그와 같은 요구, 우리는 바로 그것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그러한 요구는 단지 주제넘은 것일 뿐인가?

독자로 하여금 이 질문에 대해 특정한 대답을 요구할 생각은 없다. 누구든지 스스로 결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스로 결정할 수 있기 위해선 칸트의 도덕 법칙이 제기하는 요구를 먼저 이해하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칸트 도덕 법칙에 대한 이해, 바로 그 것이 이 책의 과제이자 목표였다.

“평범한 눈das gemeine Auge”은 정언 명령의 도움에 힘입어 선과 악 의 차이를 깨달을 수 있다. 칸트는 그렇게 확언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말은 다소 과장된 것처럼 들린다. 이러한 평범한 눈이 칸트 저서를 읽 어 나가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던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이 쓰여졌다. 칸트가 발견한 도덕 법칙을 이해하-는 것, 그것이 이 책의 과제이자 목표였다.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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