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 본 영화
정희진 / 교양인 / 236쪽
(2018. 8. 29.)
영화가 끝나면 삶도 끝난다. 언제나.
(샘페킨파)
(P.8)
외로움과 혼자인 상태는 다르다. 혼자라고 해서 꼭 외로운 것 아니다. 혼자라고 느낄 때는 외롭지만, 자기만의 세계에서 스스로 충만한 시간은 외롭지 않다. 인간이 외로울 때는 상대방(사회)과 대화가 통하지 않거나 외부를 지향하는 경우이 다. 외로움을 잘못 해결하면 인생이 복잡해진다. 데이비드 리스먼의《고독한 군중》은 왜 혼자 있을 때보다 여러 사람과 함 께 있을 때 외로운지를설명해주었다.
외로움은 나와 어떻게 만날 것인가, 즉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에서 출발하는 문제다. 너무 괴로워서 자신의 존재를 잊고 싶거나 해결해야 할 문제로부터 도망가려고 할 때 외로움 도 따라온다. 내가 나를 떠밀어서, 미워해서, 소외시켜서 외로운 거다. 외로움을 해결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중독이다. 중독은 외부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몸의 외부(매체, 물질, 타인......)를 내부에 들여놓고 그들에게 '친구하자'고 에원하는 것, 그들이
나가지 못하게 막는 것, 이것이 중독이다. 그래서 알코올 중독은 여러 사람과 함께 마실 때보다 혼자서 규칙적 으로 마실 때를 가리킨다.
알코올, 니코틴, 탄수화물, 약물 같은 구체적인 물질뿐 아니라 권력, 섹스, 도박, 게임, 스마트폰, 일, 공부,
영화, 운동, 심지어 고통도 중독의 대상이다. 나는 모든 중독자들을 이 해한다. 중독의 차이는 사회적으로
수용되는 중독인가(일, 공부......) 아닌가, 혹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을 뿐이다.
(P.8)
나는 탄수화물, 활자, 영화, 일 중독이다. 이런 중독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렇게 '위험해 보이지 않는' 중독은 문제가 생겨도 고치기 어렵다. 일을 좋아하는 것과 중독은 다르다. 중독은 즐거움보다 강박이 앞선다. 나는 중독을 해결하지 못했다. 일 중독을 '자부심' 삼는 사람도 있지만 결국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해친다는 점에서 다른 중독과 같다. 나는 책을 읽지 않거나 글을 쓰지 않으면 불안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노트북 앞에 앉는다. 20년간 생계를 위해 글을 썼는데, 아직도 독수리 타법이라 오른쪽 어깨와 손목은 늘 부상 상태다. 당이 떨어지면(케이크와 방을 못 먹으면) 금단 현상이 온다. 탄수회물은 머리의 전원을 켜두기 위한 에너지 공급원이기 때문에. 내 뱃살은 빠지지 않을 것이다.
영화는 집을 벗어나지 못하는 내 일상을 구원해주는 고마운 중독이다. '영화광'이라는 말은 있지만 '영화 중독'이라는 말은 없고, '반대로 '소주광', '도박광'이라는 단어도 별로 사용 하지 않는다. 영화는 '폭식을 해도 편찮고 '숙취'도 없다.
(P.8)
“소설 같다, 영화 같다는 말은 믿을 수 없다는 뜻으로 쓰이지만, 누구나 다 아는 현실(present)도 재현(re-present)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 영화라는 재현의 형식을 통해서 우리는 현실을 깨닫고, 직면하고, 생각하게 된다. 현실과 재현의 차이는 무엇일까. 우리는 현실을 살고 있는데, 왜 재현을 통해서만 현실을 볼 수 있는 것일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팩트를 따질 때, 재현물보다는 현실을 더 믿는 것일까. 재현은 뭔가 꾸며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를 포함해서 영화와 현실의 경계는 없다. 건물 안에서는 건물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재현(렌즈)을 통해서만 현실을 볼 수 있다. 렌즈는 다양하기 때문에 각자의 렌즈에 따라 당파적으로,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그리고 영화는 역사의, 인생의 한 부분을 잡아챈다.
(P.14)
나는 매일 한 편 이상씩 영화를 보았다. 이때부터 영화는 정말로 책이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영화 '보기'가 아니라 영화 '읽기'라고 표현하는데, 이미 지나 음악에 무지한 내게 영회는 원래부터 읽기였다. 영화제에서 만난 영화들은 한국 사회에서는 '절대로' 생산될 수 없는 지식을 제공했다. 내 경험 너머 새로운 앎의 세계. 나는 고급 도서관을 통째로 가진 기분이었다.
나는 이제 알기 위해 영회를 본다. '지식을 습득한다'와 '안다는 것은 다르다. 안다는 것은 깨닫고, 반성하고, 다른 세계로 이동하고, 세상이 넓음을 알고, 그리고 타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과정을 뜻한다. 이것이 인생의 전부 아닐까. 영화는 나의 세계를 확장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인생 문제가 영화에서 '대부분' 해결되기 때문에, 나는 그 다지 타인이 필요지 않게 되었다. 나만의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나는 외로움을 원한다.
(P.19)
한국 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영역은 북한이나 섹슈얼리티가 아니라 가족 담론이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문제적인 제도, 가장 부패한 제도, 가장 비인간적인 제도는 가족이다. 가족은 곧 계급이다. 교육 문제, 부동산 문제, 성차별을 만들어내는 공장 이다. 부(富)분만 아니라 문화 자본, 인맥, 건강, 의모, 성격까지 세습되는 도구다. 간단히 말해, 만악의 근원이다. 과장이 아니다. 동성애, 트랜스젠더에 대한 시각도 가족과 연결되어 있다.("남자 며느리가 웬 말이며”) 이처럼 가족은 정치경제적 영역인데도 자연적인 장소로 묘사된다(특히, 모성). 어떤 글이나 텍스트를 읽어도 가족에 대해서는 어쩌면 그렇게 상상력이 부-족한지 정말 놀랍고. '그들의 무지'가 이해되지 않는다. 가족에 관한 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뇌는 고정되어 있는 것 같다.
(P.27)
경험이란 무엇일까. 언젠가 박완서는 자신이 경험한 것밖에는 못 쓴다고 말한 적이 있다. 성찰적이며 삶의 진실을 관통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누구나 자신이 경험한 것밖에는 알지 못한 다. 모든 언어 -소설, 영화, 예술, 이론, 학문...... -는 다 개인의 경험이다. 마르크스주의도 마르크스의 경험에 '불과' 하며 푸코의 탈근대 이론도 푸코의 경험일 뿐이다. 박완서의 문학은 박완서의 경험이다(물론 아는 것과 말하는 것, 쓰는 것은 다르지만).
특정인의 사적인 경험이 보편적 이론이 되는 것, 그것이 권력의 효과일 것이다. 개개인의 경험은 모두 사회적 권력 관계를 통해 구조화된 것이다. 개인들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그리고 그 해석을 통해 다른 주체가 된다. 각기 다른 경험은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한국/여성의 경험은 '특수한 경험'이고 서구/남성의 경험은 '보편적 이론'이 된다.
특수한 것은 보편의 적용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마르크스주의를 한국에 적용했다, 정신분석학을 여성 문제에 적용했다"는 식의 언설을 싫어한다. 마르크스주의를 한국에 적용 했다면 그것은 이미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다. 다른 이름을 붙여야 한다. 마르크스주의는 특정 지역, 특정 시기, 특정한 성의 경험일 뿐이다. 서구 페미니즘이 한국에 적용될 때도 마찬 가지다.
(P.62)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변화시킨 사람을 사랑한다. 영원한 사랑 - 일부일처제, 배타적인 낭만적 사랑- 을 믿고 실천 하는 자의 고통은 상대가 자신을 변화시킨 그 순간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 순간을 지속시카기 위해,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기에 고통은 필연적이다. 조증(躁症)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대개 사랑의 황홀감은 몇 개월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 인생의 매 순간을 혁신하며 '나날이 새롭게(日新又日新)' 사는 사람은 매우 드물기 때문에 영원한 사랑은 이루어지기 어렵다. 중단 없는 상호 발전을 통해 관계의 질이 진화하지 않는다면, 그 뒤 시간은 '아주 오래된 연인들' 의 권태와 제도를 통한 감정의 구속만이 남을 뿐이다. 사람들이 왜 결혼하겠는가?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사랑의 종말이다. 사랑이 끝나서 자발적으로는 그 감정이 유지되지 않기 때문에 강력한 제도의 힘을 빌리는 거다. 세상에 결혼/가족 제도보다 강력한 제도는 없으며 그 제도를 돌파하는 사람도 드물다.
(P.68)
타인과 함께하는 시간이 지루하고 아까운 유형과 파트너와의 관계가 좋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는 시각은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내내 애달프고 쓰라리고 슬펐는데, 내 친구들은 마이에미의 해변처럼 행복하고 밝은 영화라고 했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 장면에서 완전히 다른 결론이 났다.
새삼스러울 것 없는 얘기지만, 우리가 본 영화는 우리의 인생과 붙어 있다. 몸으로 영화를 본다. 영화의 내용은 감독의 '연출 의도가 아니라 관객의 세계관에 달려 있다. 누구나 자기의 삶만큼 보는 것이다.
(P.96)
성선설이니 성악설이니 인간의 본질을 놓고 갑론을박하던 시대도 지났다. 지금은 모두가 한목소리다. 세상이 너무 나빠졌으며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착한 사람'의 개념은 완전히 무너졌다. 선함은 순진함, 무능력, 멍청함, 부적응, 루저, 답답한 인간과 비슷한 의미로 쓰인다. 선함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선함은 위선일 뿐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많다. '착하다'는 말을 칭찬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별로 없으며, 그런 말을 들으면 화를 내는 사람(특히, 여성)도 많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믿었던 선함의 의미를 모르겠다. 몸매가 착하다, 가격이 겸손하다, 착한 여행 같은 말에 '착함'이 사용되는 시대다. 내가 생각하는 착함은 자기 역량이 가능한 수준에서 타인에 대한 배려, 조금 이타적인 마음, 딱히 정의롭다기보다 정의를 추구하는 태도, 타인을 함부로 대하지않는 마음가짐...... 정도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요즘, 이런 착한 사람들은 냉소적이거나, 분노 조절을 못 하는 '아픈' 사람이 되어 병원(신경정신과)에 다니거나. 타인을 붙잡고 한없이 하소연을 하는 민폐 캐릭터가 되었다. 나쁜 사람보다 그들에게 당한 사람을 더 싫어하는 세상이다. 나름 착하게 혹은 최소한 상식적으로 살려고 노력하다가. 타인에게 이용당하거나 속거나 근거 없는 모욕을 당했을 때. 그러한 사건이 반복될 때 변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나는 다르게 질문하고 싶다. 변해야만 정상일까. 그렇게 당했는데도 같은 방식을 되풀이한다면. 그것은 착한 것이 아니라 멍청하다고 하는 것이 정녕 맞는 논리인가? 나쁜 사람이 변해야지, 왜 착한 사람이 변해야 하나? 착한 사람이 미치고 아픈 것은 당연한 반응이 아닌가.
(P.129)
한마디로, “무능한 주제에 인간성도 바닥인 상사에 대처 하는 우리의 자세” 성토장이었다. 뒤집어 말하면, 유능하면 참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유능한 데다 품성도 훌륭 한 리더는 거의 없기 때문에, 리더는 그냥 유능한 사람이면 족하다. 이 영화는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 리더십에 관한 매우 '현실적인' 텍스트이다. 특히 여성 리더십에 대해 논문이 수십 편 나올 만한 논쟁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영화에서 상사 자녀의 숙제를 비서가 대신 해준다. 이는 물론 부도덕한 일이지만, 대개 남자 CEO들은 아내('사적 영역의 비서')가 알아서 해주기 때문에 비서에게 이런 일을 덜 시킬 것이다. 주인공의 표현대로, 여성 리더의 악마성은 많은 경우 그녀가 남자라면 '카리스마'일 뿐이다. 여성 리더들은 '아내'가 없기 때문에(집 안에서 아내 역할을 강요받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공적 영역의 비서가 아내 역할을 대신 수행한다. 여성이라면 결혼하지 않았어야 가능한 성공이' 남성은 결혼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P.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