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의 쥐
이은 / 예담 / 예담 / 328쪽
(2018. 8. 21.)
“예술이 뭐라고 생각하나?”
뜻밖의 질문이었다. 당황한 김준기가 말을 더듬었다.
“전, 그러니까 그게......"
“편하게 얘기해보게."
“예술은 열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열정? 다른 건 없을까?"
“예술은...... 글쎄요, 죄송합니다.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단지 제가 좋아하고, 또 평생을 바쳐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해 이 길을 택했습니다."
“잘 알고 있군.”
“자네가 말한 대로네. 예술 말일세, 그냥 자네가 좋아하고 평생을 바쳐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지 ."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자네는 혹시 그림을 처음 시작했을 때의 느낌을 기억하나? 처음 붓을 쥐고 그림을 그렸을 때 말일세.”
“글쎄요. 어릴 때 일이라 자세히는......"
“그렇겠지. 그럼 조금 지난 다음의 기억이라도 좋네. 처음으로 제대로 된 그림을 그렸다고 느꼈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떠오르지 않나?”
“그거라면...... 신이 나기도 하고, 떨리기도 하고, 한편으로 는 무섭기도 하고, 무언가 벅차오르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바로 그거네. 그 초심初心이 바로 예술일세."
“지금 자네의 마음은 아마 자네가 붓을 처음 쥐었을 때, 처음으로 제대로 된 그림을 완성했을 때의 심정과 같을 걸세. 첫 번째 개인전을, 그것도 주목을 받으면서 여는 개인전을 앞둔 자네의 마음은 기쁘기도 하고 떨리기도 하고, 그럴거야. 지금 그 마음, 마지막까지 잃지 말게나. 말처럼 쉽지는 않을 거야. 시간이 흘러 명성을 얻거나 돈을 많이 벌면 지금의 마음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높지. 하지만 부디 잊지 말게. 지금 자네의 마음이 바로 예술이라는 것을. 그걸 잃어버리면 자네가 하는 모든 일. 자네가 성취한 모든 영광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진다네."
(P.16)
(오컴의 면도날)
오컴의 면도날은 흔히 '경제성의 원리' 고도 한다. 14세기 영국의 논리학자이며 프란체스코회 수사였던 월리엄 오컴의 이름에서 따왔다. 내용은 '보다 작은 수의 논리로 설명이 가능한 경우 많은 수의 논리를 세우지 말라.' 는 것으로 이떤 현상을 설명할 때 불필요한 가정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같은 현상을 설명하는 두 개의 주장이 있다면 간단한 쪽을 선택하라'는 뜻이기도 하다.
(P.61)
“김 형사가 생각하는 예술 같은 건 이 세상에 없어요."
“그건 또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야.”
“김 형사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예술 같은 건 지금 이 세상에 없다고요. 뒤샹이 전시장에 변기를 갖다놓고 예술이라고 했을 때 예술은 병원에 입원했고, 앤디 워홀이 마릴린 먼로의 얼굴을 복제해서 걸어놓았을 때 예술은 사망했어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현대 사회에서는 돈이 예술이에요. 돈만큼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하는 게 없단 말입니다. 그게 예술이에요. 사람들은 이중섭 화백이나 박수근 화백, 고호의 그림 따위에는 하나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이 위대한 예술가이건 아니건, 굶어 죽었건 병들어 죽었건 관심도 없다고요. 오로지 그걸로 벌어들인 돈에만 관심이 있어요. 왠지 아십니까? 지금은 그게 예술이니까요.”
(P.257)
예술은 순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순수함이 예술의 생명이고 그것이 바로 예술이기 때문입니다. 순수해야 한다는 것은 말이지요, 이 세상 모든 현실을 등지고 스님처럼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현실의 한복판에 살면서 그렇듯 등 돌리고 사는 것은 오히려 비정상적입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예술을 시직한 때 처음 가졌던 그 마음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이 바로 예술이니까요 예술은 뭐 대단하고 거창한 무엇이 아닙니다. 순수의 회복, 그게 바로 예술입니다.
마지막이라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재미있게 시작했다가 결국 또 무거운 이야기로 글을 맺게 되는군요. 하지만 마지막에는 이 이야기를 꼭 하고 싶었습니다. 여러분, 그림을 처음 그렸을 때, 도화지 앞에서 두려웠지만 가슴이 벅차 올랐던 그 감동을 기억하십니까? 미술관에 처음 갔을 때, 뭐가 원지 하나도 몰랐지만 알 수 없는 신비감에 휩싸였던 그 느낌을 기억하십니까? 그 느낌과 감동을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그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 꿈꾸어온 예술의 세계입니다. 예수도 말했지 않습니까?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갖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 고요. 그런 순수한 미음이 바로 예술입니다. 우리들의 천국인 셈이지요.
(P.2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