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 은둔의 역사 - 혼자인 시간을 살아가고 사랑하는 법
데이비드 빈센트 지음, 공경희 옮김 / 더퀘스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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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는 시간은 상상에 지속적으로 강력한 힘을 부여한다. 그리고 인간의 정신을 장악하는 것은 판단이 아니라 상상이다."

 

18세기 걷기는 '도박'이 원동력이었다.

정해진 시간과 거리를 걸어서 판돈을 받는 걷기 도박은 기록 경신을 이어갔다.

걷기는 신사 남자들에게는 취미이자 인정받는 것이었지만 노동자에게는 고단한 여정이었

 

 

산책, 여가활동, 독방, 취미, 회복, 외로움, 당신

이렇게 7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낭만적 은둔의 역사.

제목에 쓰인 '낭만'과 '은둔'이 이 책에 호기심을 갖게 했다.

수 세기에 걸친 인류의 혼자만의 고독을 다양한 시각으로 그려낸 낭만적 은둔의 역사를 읽고 있자니

고독이나 은둔이나 혼자인 시간은 자유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른다.

자유 없이 반강제로 고독을 느껴야 한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가장 가혹한 형벌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그것을 능가하는 대외적인 무언가가 있다면 조금 달라질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팬데믹 상황이 바로 그런 상황이다.

그리고 그 시간을 슬기롭게 견뎌내기 위해 이 책에 담긴 혼자의 역사는 필요한 이야기였다.

 

 






산책은 혼자 하기에 가장 좋은 취미다.

물론 동반자가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은 온전한 의미에서 혼자 있기는 아니다.

산책하면서 마음과 생각이 정리되거나, 생각지도 못한 것들이 떠오르고, 무심코 보낸 눈길에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관찰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산책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보고 싶어 하는 이유는 바로 무념무상의 걷기 때문이 아닐까?

목표가 있는 걷기, 그러나 오랜 여정은 신체와 정신에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한다.

정말 아무런 준비 없이 곧바로 실행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산책이기에 혼자이고 싶은 사람이 가장 손쉽게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가정 내 단독 여가활동은, 가정생활에 억지로 참여하는 걸 피할 방책이자 다양한 형태의 지성이나 단체 활동에 참여하는 통로가 되었다.

 

 

진보적이고 창의적인 여성들이 혼자인 것과 정신질환을 동일시하는 시각에 도전하며 생긴 취미들과 단체 활동.

남자 신사들의 단독 여가활동은 우아한 취미로 봐주면서 여성들의 단독 여가활동은 정신질환으로 의심하는 시대에 뜨개질, 수놓기, 독서, 옷 만들기 등이 점차 확대된다. 남자들은 생산성 없이 산책하면서 혼자인 시간을 갖는데 반해 여성들은 혼자인 시간을 갖기 위해 생산적인 일을 해야 했다는 것에 한숨이 나온다.

지금도 여자들은 혼자인 시간을 위해 뭔가 중요한 핑계를 대고 나올 구실을 찾는다.

그래야 단 한두 시간이라도 가정과 육아와 살림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온전한 독박이다.

 

'외로움'은 혼자 있는 것의 아픔을 나타내기 위해 생긴 표현이다. 또 그것은 혼자 있는 것의 영광스러움을 표현하기 위해 '고독'이라는 어휘를 만들었다.

 

 

 

사실 혼자 있는 걸 즐기는 나는 외롭다거나 고독하다거나 하는 말의 의미를 별로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릴 땐 혼자 있는 시간에 그림을 그리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책을 읽었다.

책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다른 세계에 나를 붙들어 놓을 수 있는 좋은 도구였고, 그림이나 노래 부르기는 온전히 혼자 있을 경우에 아무런 눈치와 방해를 받지 않고 즐길 수 있는 나만의 것이었다.

 

예전과 다르게 산책에서 얻는 무념무상과 자연과의 교감은 현시대에서는 찾기 어렵다.

고도로 발전한 사회 유유히 걸을 수 있는 공간이 거의 없는 도시에서 사람들은 복작이는 공원에서 쳇바퀴 도는 산책을 즐길 뿐이다.

느긋하게 이어온 취미들이 현대사회에서는 재능과 소비로 이어지는 SNS 사회이기도 하다.

각자의 공간이 생겼음에도 우리는 각종 기기를 통해 외부와 접촉하고 있다.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SNS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 인류에게 혼자만의 시간은 그림의 떡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혼자라는 착각이거나.

 

혼자의 시간에 누릴 수 있었던 사치들이 현대에 들어와 각종 매스컴의 프로그램으로 변질되면서 우리는 혼자의 시간에도 혼자 있지 못하는 병에 걸린 거 같다.

나 역시 혼자 있을 때 TV를 틀어 놓는다.

사람의 말소리는 혼자라는 사실을 감춰주니까.

그래서 나는 늘 공허감에 가까운 고독을 느꼈던 거 같다.

온전히 혼자서 무얼 할 수 있다는 생각보다는 시간 죽이기에 가까운 혼자였으니 말이다.

 

낭만적 은둔의 역사를 읽으며 나의 혼자 있기에 대해 생각했다.

아주 많은 시간을 나는 책을 읽고, 감상을 정리했지만 온전히 혼자 있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나 자신이 덜 숙성된 어른이처럼 느껴졌다.

혼자만의 시간을 잘 보내어 내면의 나와 마주하면서 내가 원하는 바를 알아내지 못했다.

그 버려진 시간들을 내가 잘 활용했다면 나의 현재는 더 알차졌을 텐데.

 

하루에 한 시간이라도 휴대폰을 끄고, TV를 안 튼다면 그 시간에 무얼 할 수 있을까?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이 혼자인 시간에 해왔던 일들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가장 손쉬운 시간이 아닐까?

그런 시간을 조금씩 늘려 나가는 생활이 바로 외로움과 고독에서 나를 덜어내는 일인 거 같다.

 

인문서라고 생각했는데 다양한 시구와 문장들 그리고 18~19세기 영국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엿볼 수 있어서 즐거웠다.

영국 사람들의 1980년대에 즐겨 했던 TV 틀어놓기를 지금 하고 있는 나를 생각하면서 어떤 격차를 생각해 본다.

은둔의 역사는 계속될 것이고 수백 년 뒤 21세기 인류의 은둔은 각종 스마트 기기를 끄는대서 왔다고 적힐지 모르겠다.

 

낭만적 은둔의 역사.

제목은 낭만적이었지만 그 안에 스며있는 차별적 은둔의 역사는 낭만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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낀대 패싱 - 튀고 싶지만 튀지 못하는 소심한 반항아들
윤석만.천하람 지음 / 가디언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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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논하고자 하는 바는 크게 두 가지다. 사회적 현상으로 '낀대'가 가진 실체와 의미를 살펴보고, 이를 말미로 청년세대와 기성세대 간의 핵심 갈등의 축을 분석해볼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세대를 아우르는 이해와 공감의 틀을 넓혀 우리 사회의 정확한 갈등과 균열의 지점을 찾아내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는 것이 이번 프로젝트의 핵심 목표다.

 

 

낀대 패싱의 주제는 586과 90년대 생 사이에 낀 세대들이 처한 상황을 알아보자는 취지였다고 생각한다.

현 사회의 주축이 되는 3040 세대를 어떻게 분석하고 어떻게 세대 간의 간극을 좁힐 방법을 제안했는지 궁금해서 이 책을 읽고 싶었다.

 

낀대는 '튀고 싶지만 튀면 죽는다는 생각'을 의식 저변에 안고 살아간다. 스스로 개성이 있다고 판단하지만, 세대 바깥에서 보면 몰개성이라고 느낄 만큼 집단적이다.

 

 

7080년 생들이 주축이 되는 낀대는 대한민국의 발전 이전과 발전과정과 그 이후를 두루 경험하고 있는 세대이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화되어 가는 세상에서 새 시대의 유행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팬덤의 세계를 구축해온 세대다.

하지만 그들 앞엔 586이라는 거대 집단이 버티고 자리를 내어 주지 않고 있고.

밑으로는 태어나면서부터 디지털 세대였던 90년대 생들이 몰려오고 있다.

 

과거와 미래의 사이가 현재라면

낀대들은 이 현재를 담당하는 세대이다.

그들이 유일하게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며 자신들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부분은 바로 대중문화계라고 이 책은 얘기하고 있다.

 

이들이 사회의 중추이면서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것에 소극적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소극적 사실은 커다란 무형의 힘으로 결정적인 순간에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필들이가 간과하고 있는 거 같다.

 

 

반골 기질을 갖고 있어도 티내지 못하고, 비판적 사회의식이 있어도 행동을 주저한다.

 

 

이 말은 맞다.

그리고 이 말은 틀리다.

 

3040이라는 시간대를 관통하는 자들은 모든 면에서 주저할 수밖에 없다.

그들에겐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자신을 위한 자유 없이 가족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시간대에 살고 있다.

회사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도, 사회의식이 있어도 행동을 주저할 수밖에 없는 것도 바로 가족을 지켜내야 하는 원대한 사명을 견뎌내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육아의 시간을 모두 끝내고 제2의 인생을 시작한 586과

가정이라는 무게에 구애받지 않아도 되는 20대의 목소리 내기에 비례해서 생각하면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무릇 지킬 것이 있는 사람들은 무감각하게 삶을 살아가기 마련이다.

소신보다는 가족이 먼저니까.

586은 그런 시간을 지나갔고, 20대는 아직 그 시간에 도래하지 않았다.

 

이 책이 말하는 낀대에 대한 이야기는 소재에서 사람들의 감성을 건드렸지만

그걸 소화해 내는 과정에서 쓸데없는 정치 편견을 양념으로 버무려서 불편하다.

갈등의 균열을 찾아낸 건 좋지만 그 갈등을 해결할 방법에 대해서는 글을 아꼈다.

글을 쓴 작가 본인들도 낀대인데 말이다.

아마도 작가분들의 이력이 비교적 안온함에서 이루어졌기에 남을 향한 비판은 칼날같이 하면서 같은 부류에 대한 비판은 두루뭉술하게 넘어가 거 같다.

이것 역시도 나의 편견일 수 있겠지만.

그 외 다양한 분야에 걸친 세대 간의 생각 차를 다룬 것은 참고할만하다.

각 세대별로 자신이 속한 세대를 사회가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알고, 다른 세대의 문제점과 그들이 사회에 바라는 바를 알게 된다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다.

 

낀대는 우리 민족이 어느 정도 중흥된 상황에서 학창시절을 보냈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래서 대한민국 역사에 큰 획을 그을 만한 성과를 낼 기회는 적었다. 하지만 반대로 거대 담론에 가려져서는 안되는 '개인의 삶'을 본격적으로 직시한 세대이기도 하다.

 

 

나는 항상 우리를 과도기 세대라고 불렀다.

우리는 가난의 시대와 풍요의 시대와 발전의 시대를 온몸으로 관통하고 살아왔다.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걸 직관하고 살아온 세대다.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시대를 눈으로 보고 자란 세대다.

 

디지털 세대와 아날로그 세대 사이에서 그 두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낀대들.

위에서 누르고 아래에서 치고 올라온다 해서 내 자리가 위태한 것이 아니다.

이 자리는 언제든 새로이 바뀌게 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잠시 안주하는 것은 지켜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드러나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바로 그 드러나지 않는 것들의 힘에 의해 변화하고 달라진다.

우리는 그 변화와 달라짐에 과감하게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낀대들이여~ 주눅 들지 말고 살자!

 

천하람 저자의 말처럼 낀대의 시간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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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독산동 문지아이들
유은실 지음, 오승민 그림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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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만 넘겨 봤을 때는 미쳐 몰랐다.

그저 독산동에 오래 살았던 친구가 떠올랐을 뿐이다.

그 친구 덕에 나도 독산동에 놀러 갔었다.

이름만 알고 있었던 동네는 첫 느낌은 내가 살던 곳보다는 덜 복잡한 느낌이었다.

어딘지 낡았지만 그리운듯한 느낌을 그곳에서 받았다.

오래전 내가 누비고 다녔던 골목길 가득한 대학로의 정서를 본 느낌이었다.






교과서에도 그렇게 나와 있다.

 

 

공장이 가까이 있어서 친구들과 놀다가 다치더라도 근처에 있는 엄마나 아빠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동네.

공장이 가까이 있어서 가끔 친구 엄마가 아이스크림을 사주는 동네.

공장이 가까이 있어서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인형을 가지고 놀 수 있었던 동네.

 

 

하지만 교과서에는 그런 동네가 살기 나쁘다고 쓰여 있었다.

은이는 그런 동네에 살고 있었지만 우리 동네가 가장 살기 좋은 동네라고 생각한다.

 

 

 

 

"아빠, 교과서도 틀릴 수 있어?"

"넌 교과서가 틀린 것 같니?"

"엄마, 선생님도 모를 수 있어?"

"넌 선생님이 모르는 것 같니?"

"선생님은 딴 동네에 사니까, 우리 동네를 잘 모르는 거 같아."

 

 

 

 

"우리 동네는 우리 은이가 잘 알지."

 

 

그저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전부인 아이가 자신의 동네를 자랑스러워하는 이야기인 줄 알았다.

문장들을 읽어 가며 그게 다가 아님을 깨닫는다.

 

 

교과서 만드는 사람도, 교과서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도 모른다.

이 동네가 얼마나 좋은 동네인지를...

그곳에 살아 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동네 분위기...

 

 

은이에게 이곳은 다정하고, 활기차고, 안전하고 즐거운 곳이다.

공장이 들어찬 이곳이 삶이 터전인 사람들 틈에서 은이는 행복하고 안전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모르는 외부인들의 눈에 독산동은 공장이 많아서 살기 나쁜 동네일뿐이었지만...

 

 

어른들이 그어 놓은 선.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편견.

어른들이 구현해 낸 세상.

그것들이 가진 밑천이 바닥을 드러내는 건 아이의 해맑은 시선이 부여한 세상의 온기였다..

 

 

우리가 사는 어느 곳이나 살기 좋은 때도 살기 힘든 때도 있었다.

지금 독산동은 은이가 기억하던 예전과는 다를 것이다.

40년이 넘도록 살았던 내 친구의 집도 이젠 사라졌으니까...

 

 

변두리.

예전에 많이 썼던 말이다.

변두리 하면 떠오르는 동네 이름들이 있었다.

그리고 변두리 하면 떠오르는 동네의 풍경도 있었다.

그것 역시 외부인의 편견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살기 좋은 편의 시설로 중무장한 지금 우리의 모습에선 그때의 정서를 찾을 수 없다.

살기 편리해지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이 어떤 것인지조차도 잊고 사는 우리.

내가 어릴 땐 온 동네가 서로 오고 갔다.

명륜동 그 동네의 집집마다 내 학교 친구들이 있었고 내 동생의 친구들이 살았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선 이웃집에 누가 사는지 얼굴도 모른다...

 

 

나의 독산동은

내게 어린 시절의 우리 동네 모습을 떠오르게 했다.

그래서 간만에 어린 시절을 배회하는 중이다...

 

 

터전을 잃은 그 많은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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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실 끝의 아이들
전삼혜 지음 / 퍼플레인(갈매나무)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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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우주에서도 시아와 나는 엮여 있다고. 붉은 실처럼.

 

 

베이, 진, 륜, 토토, 렌은 모두 유리다.

평행 우주에 속한 또 다른 나.

그들이 지구에 왔다. 지구의 멸망을 막기 위해서.

그들은 각자의 지구에서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누군가를 죽였다.

붉은 실로 이어진 '홍연자'를.

 

"사랑에 빠지는 것도 홍연자고, 사고를 치는 것도 홍연자고, 나랑 다른 지구의 나도 홍연자고."

 

 

지구의 멸망을 가져오는 건 '시아'였다.

다른 사람의 고민을 대신 짊어지는 능력을 가진 시아가 멸망을 위해 죽임을 당해야 하는 거였다.

시아를 알지도 못했던 유리는 그렇게 시아를 발견하게 되고, 무한 반복될 거 같은 루프 속에서 인연은 점점 깊어만 갔다.

유리는 시아를 죽일 수 있을까?

 

전삼혜 작가의 붉은 실 끝의 아이들은 새로운 차원의 SF였다.

평행우주의 나

그들은 모두 초능력을 가졌고, 자신의 별을 구하기 위해 가장 사랑하는 이를 죽여야만 했다.

베이, 진, 토토, 렌, 륜. 그들의 사랑을 그리는 작가의 솜씨는 특별하다.

인간적이지 않고 초월적이라서.

 

"세상은 이미 멸망한 게 아닐까?"

 

 

사랑을 잃은 자들의 눈에 세상은 온전해도 온전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유리의 세상은 멸망할 것이다.

그 어디에도 숨을 수 없고, 그 어디에서도 그림자처럼 달라붙을 붉은 실의 한 가닥이 유리를 놓아주지 않을 테니...

 

뭐라고 딱 꼬집어서 표현하기 힘든 기분이다.

풋풋하면서 잔인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살벌하고

진지하면서도 꿈같다.

이 모든 이야기는 유리의 꿈이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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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슬퍼서 아름다운 것들 - 한 글자로 시작된 사유, 서정, 문장
고향갑 지음 / 파람북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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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와 둘을 애써 가를 필요는 없습니다. 둘이 모여 하나를 품고, 품은 하나 속에 둘이 있습니다.

 

 

모처럼 곁에 두고 천천히 음미하고 싶은 글을 만났다.

고향갑.

처음 읽는 작가님의 글이 참으로 고단하다.

그 고단함이 참으로 좋다...

 

 

4장으로 이루어진 책은

각 장마다 한 글자의 제목이 달렸다.

한 글자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나, 너, 우리의 이야기다.

 

가슴이 저리고

가슴이 아리고

마음이 들썩이다가

마음이 녹아든다.

생각이 생각을 더하고

글들이 깊이 있게 각인되어 책장을 넘기기가 조심스럽다.





69편의 글들 앞에서 나도 모르게 고요해진다.

내가 알지만 모르는 세상이 담겨 있고,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세상의 뒷면이 담겨 있다.

따뜻한 온기를 가진 글이지만 서슬이 퍼렇다.

 

 

사랑의 온도는 더하거나 뺄 수 없어요. 각기 다른 두 개의 삼십육 점 오 도가 합해져도 여전히 삼십 육 점 오 도니까요. 그런 점에서 사랑의 온도는 체온과 일치해요.

 

 

나는 조잘거렸고, 그는 빈 종이컵에 소주를 채워 내 앞에 내려놓았다. 비움과 채움이 반복되었다. 측은이 측은을 채우면 다른 측은이 측은을 비웠다.

 

 

문학은 손으로 써내는 가슴 속 언어입니다. 어깨나 이마에 붙이기 위한 계급장이 아닙니다. 문학을 자꾸 크고 거창한 학문으로 격상시키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학문으로 격상시키는 순간, 문학은 '항문'이 되고 '똥'이 됩니다.

 

 

떨지 마라, 아내야. 당신은 손가락 하나를 잃었지만 세상은 가슴을 잃었다. 사람은 없고 밥그릇만 보이는 세상에는 가슴이 없다. 설움을 앞에 두고도 고개 돌리는 세상에는 가슴이 없다. 숨소리를 따라 들썩이는 허파는 있어도 생명으로 쿵쾅대는 심장은 없다.

 

 

문장들 사이를 지나며 가슴이 차오른다.

문장들 사이를 지나며 내가 부끄러워진다.

문장들 사이를 지나며 먹먹해진다.

문장들 사이를 지나며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게 되었다가 그만큼 특별해진다.

 

고향갑.

이름에서부터 온갖 그리움들이 담긴다.

이 작가님의 글을 처음 읽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진다.

부끄러움의 이유를 아직 모르겠다...

 

한 글자로 시작되는 이야기의 결들이 깊이 있어서 좋다.

곁에 두고 자주 읽어서 각인시키고 싶은 문장들이다.

이 책에 코를 박고 힘껏 들이마신다. 글들이 코로 들어와 심장에 박혀 벌컥거리며 혈관을 타고 뇌로 향했으면 좋겠다.

누군가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앞에서 이렇게 부끄러움과 자랑스러움을 동시에 느끼게 될 줄 몰랐다.

왜 그런 느낌을 가졌는지 나는 설명할 수 없다.

 

내가 너무 안온하게 살았나 보다...

 

제목처럼 작고 슬퍼서 아름다운 것들에 묻혀서 그저 살아가고 있었다.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고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해서 사는 삶은 다채롭지 못하다.

이 글을 읽으며 그동안 다채롭지 못했던 세상을 물들여 본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가닿기를 바란다.

 

글이 고픈 사람들

깊게 음미하고 싶은 글을 찾는 사람들

자기 자신만 아는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이 한 글자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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